이 글은 중국 징진지 협력발전이 계획되고 실천되는 과정에서, 역사·문화적 자원들 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즉 중국의 문화정책과 공간정책이 연동되어 실천되는 양 상을 살핀다. 징진지 협력발전 계획은 베이징과 톈진, 허베이를 연조문화를 공유하는 동질적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특히 대운하, 장성, 서산 영정하라는 3대 문화벨트를 통해 세 지역을 베이징 중심의 동질적 문화기억의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자연화한다. 한편 퉁저우를 부중심으로 건설하여 베이징의 행정 기능과 비수도적 기능을 분산한 다. 그리고 신도시 개발지구로 슝안신구를 지정한다. 이를 위해 중화문명의 태동·다 원적 문화통합·대외무역의 태동과 유산이라는 이미 소멸된 지역성을 재발굴하여 소 환하는 문화논리를 작동시킨다. 이 고유의 지역성은 국가 자긍심의 신장, 세계도시 건설이라는 슝안신구의 기획과 실천이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데 기여한다.
According to the research, all the translations of Mathematical terms in the Chinese translation of the Ji He Yuan Ben in Ming and Qing Dynasty adopt Liberal translation. Some translation of mathematical terms exists the problem of multiple translations of a word, Matteo Ricci and Xu Guangqi’s collaborated on the translation of the mathematical terms most in use today. In the purely Liberal translation of the words translated by Matteo Ricci in collaboration with Xu Guangqi, borrowed and transplanted words are the most used today. In Literal translation words, two-syllable Literal translation words are the most used today. This was due to the impact of the principle of naturalization, influence of traditional systems theory thinking and the restriction of Chinese disyllabic law. The Mathematical terms translated by Matteo Ricci and Xu Guangqi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choice and creation of mathematical translations for later generations: establishes a predominantly Liberal translation of mathematical terms, pay attention to the combination of traditional Chinese knowledge, according to the need to create three syllables and more than three syllable translation words and lay emphasis on the systematic translation of words, etc.
중국 화조화 역사에 있어 명대(明代)는 중요한 전환기에 속 한다. 이 시기의 화조화는 송·원시대 화조화의 정수를 계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화조화의 상태와 기법을 보여준다. 려 기(呂紀)는 명나라 원체(院體) 궁정 화조화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화조화 양상은 다양하며 색체가 화려하고, 구도가 교묘하여 당시 궁정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려기 화 조화의 많은 장점 중에서도 구도적 특색이 가장 두드러진다. 중국 화조화 역사에 있어 명대(明代)는 중요한 전환기에 속한 다. 이 시기의 화조화는 송·원시대 화조화의 정수를 계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화조화의 상태와 기법을 보여준다. 려 기(呂紀)는 명나라 원체(院體) 궁정 화조화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화조화 양상은 다양하며 색체가 화려하고, 구도가 교묘하여 당시 궁정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려기 화 조화의 많은 장점 중에서도 구도적 특색이 가장 두드러진다. 려기 화조화의 구도는 화조(花鳥)를 주체로 하는 전경식 화조 구도와 산수(山水)를 주체로 하는 전경식 화조 구도로 나눌 수 있다. 그의 화조화 구도는 변경소(邊景昭), 임량(林良)의 화조화 구도의 특징을 계승하여 거폭의 전경식 화조화를 독창적으로 창작해냈다. 또한 이러한 전경식 화조화 구도에는 마원(馬遠)과 하규(夏圭)의 산수화의 변각식(邊角式) 구도 및 ‘삼원법(三遠 法)’의 구도 요소가 녹아 들어 있다. 전체적인 화면은 구성과 점, 선, 면의 처리에 있어, 동시대의 선배들을 뛰어넘어 더욱 풍부한 층차감을 띄고 있다. 이러한 구도적 특색은 이후 화조 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세워진 젠코지(善光寺)와 그 불상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일본의 젠코지 아미타삼존상은 백제 성왕이 전해준 일본 최초의 불상이다. 젠 코지 상에 대한 연구는 전근대기 일본의 상황을 중심으로 구미와 일본에서 여러 차례 진행되 었으나, 그 모각상이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봉안됐음은 주목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젠코지와 그 상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유입된 일본 불교 미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또한 백제와 일본의 미술사적 교류 사실이 근대기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논문에서는 조선에 들어온 젠코 지의 사례로 1916년에 창건된 진해 젠코지와 1942년에 승인된 공주 젠코지를 제시한 후 각각의 특징을 고찰했다. 이를 통해 첫째로 젠코지 상은 조선 내에서 그 내력이 재발견 되었 으며 이에 따라 동일한 상이 모각됨에도 모각 시기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음을 확인했다. 둘째로 조선에서 젠코지식 상은 나가노 젠코지의 분신으로 여겨졌으며 상의 모각이 나가노 젠코지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본 논문은 이를 살핌으로써 일제강점기 조선 내 일본 불상의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자 했다.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floor of the royal palace was covered with grass mat called ji-ui. Ji-ui was produced by connecting several mats named seokja(席子) and trimming the edge with narrow fabric named seon (縇). The standard manufacturing technique was to connect the shorter sides of the seokjas by overstitching them. A room was covered with either single or multiple ji-uis, depending on the case. In the case of the main and the subsidiary halls (jeong-jeon and pyeon-jeon, respectively) where the king conducted official meetings with the civil servants, multiple ji-uis were laid out to signify the division of space, which reflected the ceremonial aspects of the governing acts. The most essential division was the distinction of yeong-wae(楹外) and yeong-nae(楹內), with the jeon-goju (a tall frontal pillar inside the hall) functioning as the breakpoint. Jeong-jeon was divided into four spaces each covered with one ji-ui: yeong-nae, yeong-wae, and the left and the right sides of the royal seat named jwa-tap(座榻). Pyeon-jeon was covered with three ji-uis that divided the hall into three spaces: yeong-nae, yeong-wae, and hu-twae(後退) (the hind section) where the royal seat was placed on.
구양수의 애도 시문은 작가 개인이 견지한 문학 이론을 적극 이입함으로써 애도 주제의 서술 범위 확장과 더불어 애도의 새로운 방향성 모색을 가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에 따라 구양수는 역사가로서의 태도를 견지하며 사실에 근거한 시문 창작 을 부각시키는 한편, 쉬운 언어와 짧은 편폭 속에 비애의 반응과 작가 개인의 견해 를 적절히 배합시킴으로써 관습주의에 매몰된 기존 애도 시문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는 거시적으로 북송 문인들이 애도 시문을 대하는 관점의 변화를 나타 내는 징후이자 구양수 애도 시문의 독창성을 담보한다. 구양수가 보여준 애도 시문 의 새로운 작문법의 실천은 애도문학사 변천의 중요한 의미를 규정해준다.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isolated lactic acid bacteria (LAB) on the quality of high moisture rye silage. Rye forage (Secale cereale L.) was harvested at the heading stage (27.3% of dry matter (DM)) and cut into approximately 3-5 cm lengths. Then, the forage divided into 4 treatments with different inoculants: 1) No additives (CON); 2) Lactobacillus brevis strain 100D8 at a 1.2 x 105 colony-forming unit (cfu)/g of fresh forage (LBR); 3) Leuconostoc holzapfelii strain 5H4 at a 1.0 x 105 cfu/g of fresh forage (LHO); and 4) Mixture of LBR and LHO (1:1 ratio) applied at a 1.0 x 105 cfu/g of fresh forage (MIX). About 3 kg of forage from each treatment was ensiled into a 20 L mini-bucket silo in quadruplicate for 100 days. After silo opening, silage was collected for analyses of chemical compositions, in vitro nutrient digestibilities, fermentation characteristics, and microbial enumerations. The CON silage had the highest concentrations of neutral detergent fiber and acid detergent fiber (p = 0.006; p = 0.008) and a lowest in vitro DM digestibility (p < 0.001). The pH was highest in CON silage, while lowest in LBR and MIX silages (p < 0.001). The concentrations of ammonia-N, lactate, and acetate were highest in LBR silage (p = 0.008; p < 0.001; p < 0.001). Propionate and butyrate concentrations were highest in CON silage (p = 0.004; p < 0.001). The LAB and yeast counts were higher in CON and LHO silages compare to LBR and MIX silages (p < 0.001). However, the mold did not detect in all treatments. Therefore, this study could conclude that L. brevis 100D8 and Leu. holzapfelii strain 5H4 can improve the digestibility and anti-fungal activity of high moisture rye silage.
This study examines the process of the introduction of stupa, which has originated in India, to the Xinjiang Uyghur region and the features of the stupas in the Xinjiang Uyghur region in detail. This study examines the layout of the buildings in temple compounds and the types, structural elements, and construction methods of the stupas in the Xinjiang Uyghur region in particular by looking into the content of the Da Tang Xi Yu Ji and remaining stupas, which provide examples of stupas at the time. This study finds that due to the characteristics of dry deserts, stupas in Xinjiang Uyghur region, where assimilation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ultures is seen, were mostly made by pressing clay into a mold and had no interior spaces. Also, construction materials and techniques had been developed and improved in a way that enabled stupas to combat the challenging desert conditions. However, the stupas in this region differed significantly from the wooden tower-like stupas discovered in central China(zhongyuan 中原). The shape of the dome of most stupas in Xinjiang Uyghur region was chosen under the influence of the Gandharan style. Some of the stupas in the region have taken the general forms of the wooden stupas and the others have taken many forms, from cylindrical drums to towers. Also, there have been forests of stupas and stupas similar in form to chaityas and stupas of Vajrayana. Such different forms were transformed and modified through regional history and it was related to the peoples and cultures that produced and used stupas. Stupas evolved into distinct forms in Xinjiang Uyghur region in this way.
위ㆍ진 시기는 경제ㆍ정치뿐만이 아니라 서예(書藝)에서도 중요한 변혁기로 이전의 전서ㆍ예서ㆍ해서ㆍ장초ㆍ행서ㆍ초서 등 여러 서체를 활용하여 서예가들이 개인적으로 예술 풍격을 꽃피우는 양상을 나타냈다. 진나라 시기의 서예는 당시(唐詩)ㆍ 송사(宋詞)ㆍ원곡(元曲)이 나란히 문단에 이름을 날린 것처럼 후대에도 인정받았는데, 특히 ‘상운(尙韻)’의 서예로 대표되는 왕희지 서예는 우아하고 표일한 기운이 넘쳐 많은 이들의 사랑 을 받았다. 왕희지는 또한 광범위하게 한ㆍ위 이래 많은 서예작품에서 유익한 자양분을 얻고, 전대(前代)와 당대(當代)에 분산된 서예 작품에서의 창조적인 요소들을 집대성하여 정제과정을 거침으 로써 자신의 새로운 예술창조에 융합ㆍ통일하여 자아를 풍부하 게 하는 신서체(新書體)로의 변법(變法)에 성공함으로써 한 시 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고질(古質)’ 서풍 대신 ‘금연(今姸)’ 서풍을 내세워 후대의 서예가들은 물론 한반도의 서예가들에게도 손길이 닿는 모범이 되었다. 본고는 왕희지의 생애ㆍ사상ㆍ학문 등을 살펴보고 서예의 눈 부신 성취와 함께 서체 변법의 성공과 그 서예가 후대 서예계 에 미치는 영향을 중점적으로 탐구하여 고질의 서풍에서 유미 한 서풍으로의 변법을 고찰하고, 서체의 변법은 중국뿐만 아니 라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창출한 변법의 서예를 활용한 문인서예의 승화 와 함께 서예의 위상을 정립하고 미래의 지향할 바를 연구하고 자한다.
劉基(1311∼1375)는 원말명초의 정치가, 군사가, 사상가이자 문학가다. 유기는 원과 명의 두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를 살면서 그의 삶과 문학 역시 그 영향을 깊이 받았 다. 유기는 1300여수의 시를 남겼으며, 그의 시는 대체로 주원장에게 초빙된 다음해 인 1360년(元 至正 20년)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시의 경우 사회비 판과 풍유, 교화를 중시했다면 후기에 창작한 시는 개인감정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 루는 경향을 보인다. 「感時述事十首」는 유기가 48세였던 1358년에 창작한 연작시로 사회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전기시의 주요 경향을 잘 보여준다. 元 왕조 치하에 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유기는 원말의 혼란한 상황과 백성들이 겪은 고통을 목도 하고 이를 「感時述事十首」에 생생하게 담았다. 유기는 「感時述事十首」에서 원말의 관리부패, 군대적폐, 황제무능, 화폐남발 등의 여러 사회폐단에 대해 비판하고, 이런 폐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에 마음 아파했다. 이는 宋詩의 ‘의론으로써 시 를 쓰는(以議論爲詩)’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유기 자신이 가지 고 있었던 문학은 세상에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經世致用의 유가적 문학관점의 발로 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를 책임 진 조지송의 산업선교 활동을 제시하고 그의 산업선교 활동에 대한 선교신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그의 선교로부터 얻는 교훈을 제시하고자 한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산업선교는 평신도를 통한 산업전도, 노동 조합을 통한 산업선교, 소그룹 활동으로서의 산업선교로 전개되었다. 그의 산업선교는 성육신적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십자가의 길로서의 산업선교,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산업선교, 현존으로서의 산업선교, 디아코니아로서의 산업선교, 노동의 신학과 산업선교, 산업선교와 돈, 노동조합 교회론: 노동자의 눈으로 본 한국교회, 산업선교와 구원 론, 바보들의 행진, 어릿광대 공동체로서의 산업선교이었다. 그의 산업선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실무자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 실무자와 노동자 및 학생, 목회자, 총회 임원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교육, 교육의 언어는 몸과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삶의 언어, 산업사회에서 현존으로의 선교 등이다.
본 논문은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진산사건을 전후해 윤지충과 정약용이 처했던 중국과 조선의 상황과 자신들의 생각을 언급한 1.2차 사료의 분석을 통해 고찰했다. 이를 통해 제사에 대한 이들의 상반된 입장은 천(天)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자 했다. 즉 윤지충은 천주(天主)의 명령은 큰 부모의 명이며 동시에 교회의 명령으로 여겼기 때문에 천주교 제사 금령을 목숨을 걸고 지켰다. 한편 정약용에게 천명은 상제(上帝)의 명이었는데 상제의 명은 인간의 마음에 생기는 도덕을 행동으로 실행함 으로써 따르는 것이었고, 인간 도덕에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죽은 부모와 천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록 공적으로 천주교를 포기하면서도 제사를 지냈다. 한국에서 제사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인이 되는 데 커다란 걸림돌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한국개신교는 제사에 관한 태도를 정하는 데 있어서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신학을 확립해 가는 가운데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1920년대 중국어 교재인 『支那语集成』에서 나타나는 인물 간 권력의 차이를 화행분석을 통해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Searle의 화행 유형 중 단언형, 지시형, 언약형, 선언형 화행을 분석하고, 간접화행의 함축을 추론하였다. 권력의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단언형은 진술형/주장형 단언, 지시형은 상향형/ 지시와 비상향형 지시, 언약형은 自愿형/他愿형 언약으로 분류하였다. 분석을 통해 대화 상황 내 상대적인 권력을 도출할 수 있었다. 권력이 직접 드러나는 지시화행과 선언화행 외에도 단언 화행이나, 언약화행의 인물의 권력에 따른 다른 특성을 고찰한 점이 본 연구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錢時(1175-1244)는 중국 남송대 유학자로, 육구연의 학문을 계승하여 심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여러 경서들을 해석했다. 본인은 전시의 四書 주석서인 『융당사서관견』을 번역하여 전시의 경전해석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현재는 전시의 『尙書』주석서인 『융당서해』를 번역하여 그의 경전해석에 관한 연구를 점차 확장시키고 있다. 『융당서해』에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제시할 때 쓰는 ‘先儒’라는 단어가 「禹貢」 편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기에, 본 논문에서는 「禹貢」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전시의 해석은 「禹貢」편의 전체적인 내용과 저자에 대한 이해부터 선유들과 차이를 보인다. 또한 「禹貢」편에서는 旅자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 그 해석이 이 편의 마지막에 가서 어떤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지에 대해, 스승인 주희를 대신하여 『尙書』를 해석한 蔡沈(1167-1230)의 주석서과 비교하며 살펴보도록 한다.
청대 袁永綸이 쓴 필기 『靖海氛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중국 남부 해상에 창궐하던 해적을 토벌한 기록이다. 중국의 역사 사료 중 『정해분기』 만큼 해적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은 드물다. 안타깝게도 1830년에 초판이 출간 된 후, 중국에서는 유실되어 전하지 않다가, 2007년 대영도서관에서 판본이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정해분기』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는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이에 본 논 문은 작가 원영륜과 『정해분기』의 판본, 영역본을 소개하고, 『정해분기』의 내용을 해적단의 형성과 세력 확장, 분열과 투항이라는 흐름에 따라 나누어 살펴본 후, 이를 기초로 그 특징과 의의를 분석하였다.
The domestic of modern architectural remodeling method emphasizes simple aesthetic elements, and the correct design and construction methods are not established based on quantitative grounds, thus damaging the value of cultural properties. This study attempts to re-examine the value of modern buildings recognized as old buildings. It is a basic step to present the correct remodeling of the building. The design criteria for exterior wall remodeling of modern buildings were presented. These research results are suitable for energy conservation design standards and can prevent defects in buildings. In the future, more accurate analysis will be required by securing physical property values for various domestic materials through subsequent research.
1928년 벽두 좌익문단을 뜨겁게 달군 이른바 ‘속도’와 ‘정서’의 이슈는 혁명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논쟁의 도화선이 된 蔣光慈의 『현대중국문 학과 사회생활』은 혁명을 ‘속도전’이 아닌 모종의 감정 상태로 규정한 점에서 문제적이다. 여기서 蔣光慈는 理性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혁명의 또 다른 양상을 포착하고, 혁명은 일거에 판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으며, 일상에서 그 情緖를 꾸준히 길러 舊習을 무력화하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숙성의 시간이 담보될 수 없는 속전속결의 시대에 蔣光慈 의 진단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물론 기성의 프로문학과는 차별화된 ‘또 하나의 프로문학’ 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본고는 蔣光慈의 시도가 어떻게 기성 문단과는 차별화된 혁명을 연 출했는지 評論과 作品을 함께 읽어가면서 새로운 논의의 불씨를 지펴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방지일에 대한 선교학적 연구는, 한 편으로는 1957년까 지의 중국선교에 집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방지일의 중국선교가 현재 의 한국선교에 주는 의미나 영향을 탐색했다. 그런데 양쪽의 공통점은 연구가 대체로 영등포교회의 외부자들의 관점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이 다. 이러한 시도들은 방지일의 중국 선교와 영등포 목회를 별개의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이 연구는 내부자라 고 할 수 있는 영등포교회 출신의 목회자들이 볼 때 방지일이 선교와 목회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선교적 교회의 관점에서 탐구했다. 차마즈 (Cathy Charmaz)의 구성주의적 근거이론(constructivist grounded theory)을 준용하여, 이 연구는 방지일에게 있어서 선교와 목회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선교와 목회는 구분되거나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목회는 선교적이어야 하고, 동시에 선교 는 목회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와 목회는 목회자의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런 목회자의 선교적 삶이 없는 선교적 목회나 목회적 선교는 가능하지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jiǎo (腳)” can refer to the body part, which is a common concept. Since the Tang dynasty, the word “jiǎo” has been used as a common word, which has features of the ordinary shape, high frequency, and strong ability of word-formation. It can be illustrated by the fact that Grand Chinese Dictionary collects more than 600 entries that contain the morpheme “jiǎo”. Therefore, when not knowing the motivation of word-making, people find it easy for the word “jiǎo” to be borrowed for another character. The main reason for the shape error of “jiǎo” is found in the phonetic similarity. “zhǐ jiǎo couple (指腳夫妻)” has the shape error, so some people can only explain its meaning according to the text regardless of its formation reason. Others just undertake studies on the word “zhǐ (指)”, which can not provide the right answer, either. The form “zhǐ jiǎo (紙腳)” can refer to more than one word. Some of them are fake forms. These words marked by “zhǐ jiǎo” may not be received or collected completely, which is unhelpful for us to understand ancient books.
본 논문은 秋巒鄭之雲의 『天命圖說【이 어떠한 내력을 지녔으며, 『天命圖 說』에는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退溪와 비교해 볼 때, 성리학의 초보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秋巒은 선조들이 高陽으로 이주해 오면서 그곳에 살았고, 죽기 전에 고향 인 高陽의 강위에서 밭을 갈기를 희망했던 53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秋巒은 士禍期를 거쳤다. 秋巒이 조용했던 삶이 그의 「天命圖說」이 후에 다른 사람의 저술로까지 여겨지는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秋巒「天命圖說」의 ‘天命’은 『中庸』 1章에서 따온 것으로 天命과 人性이 같아짐을 나타낸 것이다. 즉, 天의 理致가 人間의 理致임을 말하였다. 天의 운행에는 元⋅亨⋅利⋅貞이라고 하는 4가지 德이 존재한다. 이 四德을 바탕으로 해서 理氣가 나뉘고 陰陽과 五行이 나뉘게 된다. 秋巒은 人과 物이 다르게 된다는 것은 氣의 正⋅通⋅明⋅偏⋅塞⋅暗의 다양한 차이점으로 보고 있다. 性과 情의 문제에 있어서는 四端과 七情의 문제 를 끌어들여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四端⋅七情은 하늘의 四德⋅五行과 합치된다고 한다.
秋巒은 心이 發하기 전에는 善⋅惡의 나뉨이 없다가 發할 이후에 善⋅惡으로 나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心이 發하게 되는 ‘意’가 중요하게 된다. 인간은 바름[正]을 받아 태어났지만 氣에는 淸⋅濁⋅粹⋅駁의 차이에 따라 上 智⋅中人⋅下愚로 나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인간의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에 빠지게 되어 修養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 지만 모든 것이 자질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또, 수양의 방법으로 存養工夫, 省察工夫, 敬工夫를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초보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秋巒의 사상은 退溪와 비교해 보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秋巒이 그의 동생 鄭之霖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던 「天命圖說」은 退溪哲學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