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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1.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4년 1월 28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 개정을 발표 하였다. 2008·2009년의 경우 중·고등학교 지리에만 한정한 독도 관련 내용이 중학교 역사 와 공민까지 확대되었고, 고등학교 일본사, 현대사회, 정치경제까지 확대되었다. 또 4월 4일, 일본 문부과학성에 의해 검정 통과된 초등학교 5, 6학년용 사회 교과서는 2010년 검증을 거친 현행 교과서보다 독도 영유권 왜곡을 훨씬 더 구체화·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4종 모두 “일본 고유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령했다”고 기술하였고, 예외 없이 독도에 ‘다케시마’라고 표기한 지도를 곁들이기도 했다. 이에 대응하여 이 논문은 ‘교육과정’의 독도 기술과 현행 교과서의 독도 기술 현황을 살펴보고 ‘독도교육 내용체계’ 개정을 통한 독도교육 강화방안을 제시하고, 그에 입각한 교육과정·교과서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독도교육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교육 정책기관과 연구자와 일선 현장 교육자와 상호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1862.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MCC)는 1951년에서 1971년까지 한국에서 구제와 교육 사역을 해 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1920년 조직된 이후 전 세계의 분쟁지역 사람들을 구제하기 시작하였고,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제사역을 펼쳐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농업, 물공급, 집 짓기, 보건, 직업 창조, 평화 세우기, 교육 등이다. 이런 활동과 함께 그들은 전 세계의 수많은 다양한 기구들을 파트너로 삼아 지원하고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평화 선교’ 정책에 기초하여,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인 모든 차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한국과 관계를 시작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7월에는 한국대표부를 대구에 설립하고 경산에 농장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국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 네 가지는, 물자구제 사업, 직업학교, 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 전쟁 과부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 등이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의 사역은 제자도에 기초하여 공동체 안에 평화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사역의 구체적인 모습이 개인과 가정과 마을과 한 국가에 대한 구제와 개발이고, 구제와 개발이 지향하는 바는 평화인 것이다. 이 구제사역은 곧 평화를 주고 나누고 세우는 사역이었다. 구제사역과 평화사역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한국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모든 욕구를 포괄하는 선교인 ‘메시야의 평화 선교’에 근거해서 한국전쟁 시기 한국에서 그들의 평화사역을 시작하였다. 진정한 평화는 ‘일용할 양식’과 ‘공동체’가 그 기초이다. 그들은 신앙교육은 하되 교파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설립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메노나이트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들어온 한국의 교회들을 존중했고, 한국교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감당해 주었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섬겨 준 것이다.
        186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은 건국 이래 중앙집권 정치를 표방하고 각 행정의 말단까지 수령을 파견하여 통치하고자 했다. 조선 초기 지방관은 지방 세력의 억제 정책 속에서 ‘守令七事’의 임무를 가지고 파견되었는데, 이 임무는 명목상으로는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 지방 사족에 의한 향 촌 지배 주도의 시기를 거쳐, 조선 후기 지방제도는 왜란과 호란의 피해 복구가 끝나고 국가의 안정을 이룬 가운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조선후기 지방제도는 국왕의 왕권 강화책과 맞물려 지방에 대한 역 사, 지리, 호구, 양전 등의 조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지리서 간행, 통치 강화를 위한 새로운 법전의 편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지방의 부역과 조세, 교육 등에 지접 관여하는 한편, 새로 부를 축적한 중인층이나 서얼, 몰락 양반 등은 납속책 등을 통하여 국가 재정 확충과 기득권층으로 편입시켰다. 활발한 사회변동 속에서 한편으로는 수령은 흉년이나 역질 로 인한 구휼이 중요 임무의 하나였 다. 韓範錫은 조선후기 현종13년(1672) 태어나 영조 10년(1734) 74세로 세상을 떠난 무인으로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목민관으로서도 여 러 관직을 지냈다. 그는 하동현령으로서 지방 수령의 첫발을 디뎠는데 관직 중 남쪽에서는 제주도의 관찰사, 북쪽 변경에서는 회령부사와 남 병사를 지내면서 특히 목민관으로서 구휼활동에 관심을 보이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범석의 목민관으로서의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여러 방면으 로 그를 조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18세기 국가의 큰 변란이 없던 시기를 살았던 한 무장으로서 목민관의 최우선은 다른 지방관과 다름없이 구휼 문제였으며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처한 인물이었다 고 생각된다.
        1864.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젠더이슈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1920-30년대 기독교가 젠더담론 형성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관한 연구이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근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신여성의 등장과 ‘여성해방’의 전위를 자처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기독교가 선점해왔던 ‘남녀평등의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적 ‘진지’를 어떻게 지켜나가고자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더불어 「신학세계」, 「신학지남」, 「기독신보」 등 대표적인 기독교 정기간행물들에 실린 글들을 분석하여 일제 식민치하에서 형성된 기독교의 근대담론이 저항담론이 아닌 서구적 근대이념에 종속된 또 하나의 식민담론이었음을 밝힌다. 기독교계는 선교를 위협하는 ‘신사상들’로부터 기독교 대중들을 지키고 기독교의 외연을 확장해나가기 위해 새로운 담론전략이 필요했다. 대중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전기장르를 통해 ‘남녀평등’과 ‘인류애’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임을 설파하고 이를 실현한 역사적 모범으로 영미권 여성들을 소개했다. 다음으로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두각들 드러냈던 여성들의 역사를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소개하면서 기독교야말로 남녀평등의 종교임을 재차 확인시켰다. 또한 개인의 도덕성 계발의 강조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사회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대중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기독교가 취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덕분에 기독교는 ‘남녀평등’이 근대사회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임을 주지시키고 젠더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불을 지피는데 공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드러난 기독교계의 담론전략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또 다른 방식의 식민화를 초래하는 종속구조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로부터 단절을 강요받고 있던 조선의 대중들이 영미권 역사와 영미권 여성들의 업적을 근대의 이상적인 모델로 동경하게 만들었다. 또한 일제의 억압정치와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외면한 채 ‘자발적 헌신’과 ‘이타적 희생’만을 강조한 담론전략은 식민체제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키고 억압적 현실에 스스로 순응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젠더 논의에 있어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조선사회가 처한 현실과 교회의 실질적인 문제들이 논의의 중심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865.
        2014.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현재 “어업”과 “납”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어구에 사용되는 납의 환경 중 거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2012년 9월 10일부로 시행된 「낚시관리 및 육성법」에서는 낚시 도구라 지칭되는 모든 제품에 kg 당 납 성분이 90 mg이 초과하는 제품은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나, 납은 비용적인 면에서나 가공의 수월성 면에서 어망에 많이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어망의 폐기 실태, 어망 중 함유형태 및 함유량 등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어 환경에서의 거동에 대한 검토는 전무하다. 이에 어구, 특히 폐어망에 함유된 납추의 환경 중 거동(fate)을 알아보기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수행하고 있는 본 연구에서는 우선, 어망에 함유된 납의 형태 (실납, 납추 등)를 알아보고, 함유 형태별, 환경 매체별 환경으로의 납 용출량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최근 발표된 일본의 “폐정치망 어망의 적정처리와 리사이클의 가능성으로의 과제 (2011년)”에서, 우선 납에 의한 오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망과 로프에서 납추를 완전히 분리할 필요가 있으며, 그 분리 방법도 외부에 부착된 경우와 내부에 삽입된 경우와는 서로 다름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분리된 어망과 로프는 화학적 리사이클이나 열회수 등으로 재활용하고, 분리한 납은 순도가 높아 판매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나, 실제로는 사용된 납추에는 조개류가 부착된 형태이므로 다른 적정처리가 필요함을 제기하고 있다. 폐어망 5kg을 분리・분별 장치에 넣고 납 분리를 실시한 결과, 로프 약 3kg, 납 약 1.5kg를 회수했으며, 나머지는 토사 등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4 종류의 폐어망의 납 함유량을 조사한 결과, 42.4 - 58.4% (무게비) 함유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나, 납추 또는 실납 형태별 환경으로의 용출량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1866.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은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불교식 사회사상을 비판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었고, 고려의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단으로 지목되었으며, 불교 이단성의 비판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문이 유입되었고, 당시 명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도 매우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그런데 이 양명학 역시 주자학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단성이 지적되었는데, 주된 비판의 내용은 불교와의 유사성이었다. 명나라로 사행을 간 조선인은 명나라 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양명학의 공부 방식이 참선의 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하였으며, 양명학은 선학(禪學)이라는 명제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일본의 유학이 아직 맹아 상태일 때, 경전을 논하는 이들은 주로 승려 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이들의 이단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의 유학이 성장하여 고학 등이 등장하였을 때 조선인은 양명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사행에서의 양명학 논쟁 경험이 일본 유학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1764년 일본에 번성하는 고문사학의 경향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서야 일본 유학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비판의 논점이 불교 유사성에서 경전 이해의 오류로 옮겨갈 수 있었다.
        1867.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교육복지 개념의 체계적 정교화를 위해서는 교육과 복지의 사회정치적 결합구조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도의 하나로서, 먼저 교육복지 개념을 교육의 사회정치적 목적과 관련하여 재조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복지(국가)체제 유형에 따른 교육복지의 제도적 구현 양상을 예비적으로 분석·논의한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한국의 교육복지 관련 정책담론을 보다 풍부하게 하고 더욱 체계적인 후속연구를 촉발하기 위한 분석틀 구성의 한 방향을 제시한다.
        1868.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10년 청나라에서 해적이 출현하자 황제는 해적을 소탕하고 餘賊이 있을 까 걱정하여 조선에 알린다.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謝恩使를 준비하여 謝恩兼三節年貢使로 정사 鄭載崙과 부사 朴權, 서장관 洪禹寧을 북경에 보낸다. 이들보다 앞서 10월 5일, 당시 39세 였던 한범석을 都摠府都事의 자격으로 북경에 보낸다. 한범석을 포함하여 1710년에 북경을 다녀온 조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남긴 기록은 현재 발견할 수 없다. 다만 한범석이 조정에 狀啓로 올린 「單使赴燕時」와 「到義州報狀」이 남아 있는데, 이 때문에 한범석이 북경을 다녀온 전후의 과정과 목적은 이들 장계와 「赴燕詩」,『조선왕조실록』같은 자료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당시 청나라는 강희가 황제로 있었을 때였다. 즉위 초부터 왕실의 반대파인 鰲拜를 제거하고 三藩의 난을 평정하였지만 중국 전역에는 여전히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浙江, 湖光 등에서는 苗賊이 해변에 출몰하였고, 陝西와 階州 지방에서는 라마교의 난리가 일어났으며, 甘肅省 서쪽에서는 喝爾靼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었다. 조선에 영향을 끼쳤던 해적은 金州에서 소탕되었다. 원래 이들은 남방에서 일어나 북상하면서 登州와 萊州 지역에 출몰하였고 이어 북쪽 요동반도의 旅順 부근에 있는 金州까지 세력을 뻐친다. 한범석은 이 전후의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고 있다. 특히 해적의 규모라든가 전술방법 같은 것도 소상하게 보고하고 있다. 이들 기록들은 주로 북경으로 가는 동안 鳳凰城에서 얻은 정보와 심양에서 들은 것, 해적의 피해를 입은 李重德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보고한 것도 있다. 북경에서는 정보입수가 어렵게 되자 청나라 하급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자료를 얻기도 한다.그런데 한범석과 일행들이 북경에 도착했지만 오히려 청나라 예부는 한범석과 일행을 의심했다. 선발대가 이렇게 사은사보다 먼저 온 것이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범석 일행은 예부관원들과 한 차례 갈등을 겪게 된다. 당시 황제는 도성에 있지 않고 薊州와 永平 등지에서 사냥을 하며 지역을 시찰하고 있었다. 한범석이 얻은 정보는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三藩의 난 이후에도 청나라에 크고 작은 규모의 전란이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한범석의 선발대는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고 당시 정세 파악에 주력하였으므로 그의 장계는 정치와 종교의 변화에 자세하다. 朱氏 후손을 세워 멸망한 명나라 왕조를 재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최고 산문 중의 하나인 열하일기의 「허생전」을 보면 북벌에 대한 삼대책을 허생이 이완장군에게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朱氏왕손을 세운다거나 자제들을 빈공과에 보내고 강남에 상인을 보내어 북벌을 도모한다는 내용이다. 「허생전」은 허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소재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한범석의 장계를 통하여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1869.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밀턴은 청교도 혁명이 진행되던 1643년부터 45년에 걸쳐 작성한 이혼론 산문 4편과 실낙원 등을 통해 결혼과 이혼과 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혼론』 초판과 재판은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대상으로 저술하면서 교회법 개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혼에 관한 법률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에서 교회법과 의회법 모두에서 결혼을 성사로 인정하여 합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음행 등의 이유로 이혼한 경우에 과실이 없는 사람도 재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함께 영국의 이러한 이혼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한 밀턴은 불합리한 이혼제도를 개혁하려고 공적 논쟁에 뛰어 들었다. 밀턴은 이혼론 산문들을 통해 결혼의 목표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세우게 되었다. 당시까지 자녀출산과 음행 방지가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이해되고 있었는데, 밀턴은 창세기 2장 18절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부부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영적인 성숙과 정신적인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자녀출산은 결혼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간의 정신적인 대화와 사랑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음행만이 이혼의 근거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과도한 이혼에 대한 책망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며, 신명기 24장 1절에서 이혼 사유로 인정한 수치스러운 것에는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밀턴은 부부간의 정신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밀턴의 이혼론은 남성의 입장에서 제기되어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반영하여 여성의 위치를 비하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밀턴은 결혼에서 여성을 대화의 동등한 반려자로 인정하고 행복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당시 밀턴의 관심은 영국의 국교회와 왕정 하에서 종교와 개인과 정치의 개혁을 통한 인간의 자유의 확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혼론 산문들은 인간의 개인적인 자유의 확보를 위한 차원에서 저술되었다. 그의 이혼론 산문들은 부부간의 사랑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밝힌 것은 중요한 공헌이었고, 당시 그의 이혼에 관한 입장은 수용되지 못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성격차이가 이혼의 요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밀턴이 말한 바와 같이 부부간의 건전한 사랑의 관계가 잘 형성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1870.
        2014.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글은 기독교에 토대를 둔 엘리엇의 정치적 입장이 제3세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시극 ��원로 정치인��에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요소들이 발견된다. 먼저 극의 등장인물들은 중미에 위치한 국가인 산마르크 공화국을 영국이나 유럽에 비해서 매우 무질서하고 타락한 곳으로 치부하며 거기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폄하를 노정하고 있다. 이처럼 세3세계의 국가는 당시 많은 문제를 노출했던 유럽인들에게 집단적인 그림자로서 작용했으며 엘리엇도 그에 동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 극의 주인공을 비롯한 남자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여성과의 조화롭고 결실을 맺는 관계에 실패하고 있다. 엘리엇의 전기를 반영하는 듯한 이 특징은 배우자 원형, 즉 아니마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특징은 정치적으로는 어머니원형이 지배하는 단계, 즉 권위에 복종하고 타자의 가치에 제한을 두고자하는 보수적 성향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원로 정치인��은 작가가 의도한 원만하고 이상적인 삶의 정리가 아닌 작가와 주인공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그와 관련된 제3세계인으로서 인정하기 어려운 정치적 태도를 담고 있다 하겠다.
        1871.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2년 12월 제2차 아베내각이 등장한 이후 일본정치에 적지 않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헌법 개정 논의의 본격화는 물론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위한 해석개헌 감행과 같은 보수우경화가 급진전되고 있다. 아베정권이 보수우경화 경향을 강화시켜 나가는 사회경제 적, 정치적 기반은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여론정치, 온라인공간의 논의를 오프라인 또는 제도권 안으로 유인하는 전략, 중국에 대한 반발과 미국에의 불만을 토대로 고조되는 민족 주의적 정서, 그리고 자민당 내 대외인식에서 강경파인 세와카이(町村派)의 집권, 아베정권 에 소속된 정치인들의 강경노선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에서 ‘넷우익’의 등장 은 보수우경화 경향에 새로운 변수가 되고 있다. 한일관계에 쟁점이 되고 있는 역사인식문 제, 영토문제, 야스쿠니문제 등에도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아베정권의 보수우경화 경향에 따른 헌법 개정, 집단적 자위권 문제는 일본정치의 기본 적인 틀에서 지나치게 일탈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태평양전쟁에 대한 역사인식은 일본이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기본질서에 대한 부정이라는 정치적 일탈에 해당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1872.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아시아의 파워 밸런스 및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국내 정치 변화를 배경으로 역사·영 토 분쟁이 심화되고 있다. 한·일 및 중·일 간에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 차이를 둘러싼 공방이 끊이지 않고 있고, 독도와 센카쿠의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도 격화되었다. 영토 문제는 민족주의 정서라는 ‘명분’이 주는 지지율 확보, 국민통합의 수단으로서의 효용 과, 자원·에너지 정책 차원의 경제이익이라는 ‘실리’가 결합되어 있다. 향후 영토 문제에서 타협하면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는 인식 즉, ‘영토문제의 성역화’와 결부된 ‘영토 내셔널리 즘’의 발호가 우려된다. 미·중·일 간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전개되는 동아시아 세력전이 속에서 한국은 국익 극대화와 지역질서 안정화를 위해 냉철한 판단과 절제된 대응이 요구된다. 향후 시진핑 체제와 아베 체제 간에 경쟁이 심화될 경우, 한국은 일·중 간의 대립을 조정하 는 중간자적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일본의 보수 우경화에 대해서는 역사인식과 방위안보정 책을 구분해서 대응하되, 일본에 대한 관여와 견제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인류 보편적 가치 차원에서 과거사 반성과 화해가 세계적 대세이며, 역사 왜곡이 일본의 국제적 역할 확대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환기시켜 나가야 한다.
        1873.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지난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행사를 치루면서 독도홍보책자 󰡔죽도문제 100문 100답󰡕을 배포하였다. 여기서는 2005년 7월 죽도문제연구회 발족 이후 지금까지 죽도문제연구회가 펼쳐온 독도는 ‘일본 역사적으로 고유의 영토’라는 왜곡논리가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사실 여기서의 ‘100문 100답’은 ‘Web죽도문제연구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 네티즌들의 소박한 질문에 관해 답변해온 자료들 중 100여개를 취사선택하여 명료하 게 간추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은 “예로부터 전혀 독도를 인지하지 못했고, 17세기 오야·무라카와 양가의 죽도도해로 인하여 17세기 중엽에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성 립했다”고 하는 입장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본 논문은 『죽도문제 100문 100답』의 고유 영토론의 논리를 일본 사료를 통하여 비판하고자 했다. 분석의 결과 고유영토론은 일본의 사료에 의해서 명확하게 부정되는 것임을 밝혔다. ①1695년 12월 24일 에도 막부의 필두로쥬(筆頭老中) 아베 붕고노카미(豊後守)가 돗토리번 의 에도번저(江戶屋敷)에 보낸 질의에 대한 답변서 「7개조 답변서」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에 부속하지 않는다고 확인한 다음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렸던 점, ② 1870년 4월 일본 외무성이 3명의 외무성 관원에게 조선의 내정에 대해 정탐을 하게 하여 보고받은 「조 선국시말내탐서」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부속임을 명확히 확인하고 있는 점, ③ 1877년 3월 29일 당시의 최고정치결정기관인 태정관이 지령으로 ‘울릉도·독도가 일본의 판도가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린 「태정관지령문」에서 2섬이 일본의 영역이 아니라 조선의 영역임 을 천명한 점, ④ 일본에서 독도가 최초로 언급되는 관찬지 󰡔隱洲視聽合記󰡕(1667)에서 일본의 서북한계를 오키섬까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 등이다. 이들 일본 사료를 통해서 보더라도 죽도문제연구회와 일본 외무성이 주장하는 ‘고유영토론’ 논리가 성립하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역사적 왜곡이 또 다른 사실 왜곡을 재생산하는 연결고리를 단절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독도에 대한 ‘고유영토론’의 논리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1874.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청옹 이명기는 17세기 후반 숙종조 조선왕조의 사대부들 사이의 당쟁이 격화되고 있었던 시기에, 중앙정부의 정치권력에서 점차 더욱 멀리 소외되고 있었던 밀양 사림을 대표하였던 인물의 한 사람이다. 그는 임진란 전후로 밀양의 내진리에 정착한 벽진이씨의 후예로서, 한강 정구 및 여헌 장현광의 학문 연원에 접속하였던 부형들이 전수한 家學을 토대로 학문을 성취하고, 부형들로부터 이어진 世交를 이어받아, 과거를 통하여 중앙정부의 관직에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가 되었는데, 집안의 喪故와 경신환국과 임술고변,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더욱 격화되어가는 당쟁의 와중에 到記科에서 直赴會試의 은전을 받았지만 실현되지 못하였고, 예순이 넘은 만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그 또한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로 별세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청옹의 생애 전 과정이 숙종조의 당쟁이 격화된 시점과 맞물려 있음을 주목하고, 그 생애 이력의 파란이 당쟁과 관련이 있음을 방증하는 한편, 당쟁의 시대에 지방 학교의 건설과 교육에 종사하였던 지방 사림의 역할과 그 시문의 문학적 성취와 특징적 면모를 드러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청옹문집��에 실린 시문을 개관하는 한편,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문 십여 건을 찾아내어 그 내용을 소개하였고, 또한 청옹의 시문은 시어가 平順하고 義理가 雅正하다는 기왕의 논평을 기반으로, 이와 관련됨직한 몇몇 시문을 예로 들어 그 의미와 의의를 유추하여 논증하고, 산문으로 「紅紙說」 한 편을 분석하여 당대의 인재등용에 대한 풍자의 의의와 小品文으로서의 의의와 특징을 논하였다.
        1875.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76.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Bacterial cellulose (BC) has played important role as new functional material for food industry and industrial products based on its unique properties. The interest in BC from static cultures has increased steadily in recent years because of its potential for use in medicine and cosmetics. In this study, we investigated culture condition for BC production by Acetobacter sp. F15 in static culture. The strain F15, which was isolated from decayed fruit, was selected on the basis of BC thickness. The optimal medium compositions for BC production were glucose 7%, soytone 12%, K2HPO4 0.2%, NaH2PO4ㆍ2H2O 0.2%, lactic acid 0.05% and ethanol 0.3%, respectively. The strain F15 was able to produce BC at 26℃-36℃ with a maximum at 32 ℃. BC production occurred at pH 4.5-8 with a maximum at pH 6.5. Under these conditions, a maximum BC thickness of 12.15 mm was achieved after 9 days of cultivation; this value was about 2.3-fold higher than the thickness in basic medium. Scanning electron micrographs showed that BC from the optimal medium was more compact than plant cellulose and was reticulated structure consisting of ultrafine cellulose fibrils. BC from the optimal medium was found to be of cellulose type I, the same as typical native cellulose.
        1877.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이용도의 시대인식과 조선적기독교를 연구하였다. 먼저 그의 시대인식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조선교회, 선교사 및 서구교회, 그리고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또 이런 시대인식이 예수교회의 설립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고찰하였다. 이용도는 조선교회의 정통주의적 주류 신앙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선교사 및 서구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전형적인 반교회적, 반선교사적인 인물로는 평가할 수 없다. 그는 협성신학교를 입학한 후 정치적 민족주의를 포기하였다. 때문에 예수교회의 설립은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용도가 예수교회를 설립한 이유는 조선교회의 신앙적 체질을 바꾸고자 한 그의 시도가 장로교회의 견해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관점에서 예수교회는 서구교회로부터의 신학적, 경제적 독립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던 이용도 지지자들은 기성교회의 권위에 부딪히자 독자적인 교회의 설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1878.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존 애쉬베리의 작품『세 시』는 T. S. 엘리엇의 모더니즘 시『네 사중주』에 대한 포스트모던적인 반향이다. 엘리엇은 “육화”를 “회전하는 세계” 속에서 궁극적인 “정점”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중심을 갖는다.『세 시』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애쉬베리가『네 사중주』의 특정한 언어와 생각에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시간에 포섭되는 것을 거스르는 엘리엇의 기독교적인 주장을 해체하고자 했다. 엘리엇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유럽중심적인 고착이 자신들만의 문화적 구조를 바탕으로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비서구사회의 독자들에게 문제시될만한 영향을 만들어내는 반면에, 애쉬베리의 보다 평등한 중점은 비서구사회의 문화적 구조에서도 보다 폭넓게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애쉬베리의 비정치적인 주체적 병합은, 즉 탈중심화된 주체는 그 자체가 유럽중심주의라는 측면에서 문제시 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들이 논의해온 것처럼, 탈중심화된 정체성은 비서구사회와 소수민족들이 정체성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순간 특권을 갖는다. 애쉬베리의 엘리엇에 대한 비위계적이고 탐구적인 비평은 유럽중심주의에 반하는 좀 더 성공적인 미적 대응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
        1879.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코리올란』과 『반석』두 작품은 로마 정치가와 성서의 인물을 객관적으로 인유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심층적으로는 엘리엇 자신의 삶의 고뇌와 종교적 개종으로 인한 자기 성찰이 강력해, 달리 보면 어린 시절, 성장해 정치인, 사회인으로부터 엘리엇 나름의 구원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코리올란』의 로마 정치인 『코리올란』과 『반석』의 예수나 성 요한은 엘리엇에게 공적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나 자아를 위한 탐구의 기회를 준 것이어서 공공질서의 원리에 관한 담론이라기보다, 엘리엇이 영국사회의 역사적 산물인 영국교회에서 그 새로운 의미를 찾게 한 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조화될 수 있는 있는 영국국교 기반의 정치사회를 바라는 엘리엇의 의도는 오늘날의 인간 상황이나 조건에 유희적인 디지털시대에도 더욱 그 가치가 기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코리올란』과 『반석』이 주는 메시지, ‘위대한 영광’은 황무지 유형이나 이전 시에서의 죽음보다 명백하게 희망에 찬 구원을 영국교회로부터 찾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1880.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아시아에 위치한 버마(1998년 미얀마로 개칭)의 소수종족인 까렌족이 서구 제국과의 만남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권국가 건설을 시도하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버마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불교 국가로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6년 1월 해방된 신생 독립국가(버마연방)이다. 버마 역사 상 정치적 주권을 전제한 민족주의운동은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화하는 시기 소수종족 까렌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어난 까렌 민족주의와 그 실천 과정은 당시 서구 기독교 선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소수종족 까렌족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구전된 까렌 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책’에 대한 예언(백인 형제가 생명의 책’을 가지고 귀환할 때 까렌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의 성취로 보고,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버마족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버마족으로 분리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였다. 언급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본 논문은 먼저 식민지 전 구(舊)버마 전통사회의 구조를 개관하고 식민지 이후 변화된 사항들을 고찰한다. 다음으로 영국의 식민지 통치 시기 서구 기독교가 까렌족에게 소개되고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까렌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현실에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본 연구결과는 19-20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간 복음과 서구 문명이 버마의 소수종족 까렌족에 주어진 특수 환경, 즉 식민정부의 종족분할정책, 다수 버마족과의 공존, 낙후된 문명과 정령신앙 등의 영향으로 아시아 여타 지역과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