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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엘리엇연구 KCI 등재 Journal of the T. S. Eliot Societ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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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24권 제1호 (2014년 5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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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론과 주코프스키의 ‘객관주의’ 시학은 객관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시학의 대표적인 시론들이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의 주관성 또는 자의식 과잉에 대한 엘리엇의 문제의식은 시적 의지의 부여를 “침탈하는 의도”로 바라보는 주코프스키의 ‘객관주의’ 시학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 이 “외부 대상과 감정의 완벽한 적합성”이라는 재현의 한 완성된 순간을 전제하고 있다면, 주코프스키는 시 언어를 물질적이고 유동적인 대상으로 보며 재현의 불완전함을 당연한 것으로 제시한다. 엘리엇이 대상이나 상황 등 객관적인 형상을 부여한다면, 주코프스키는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며 그 불완전한 과정 자체를 ‘객관’의 정의 속에 포함시키려 한다. 스티븐스의 후기 시와 시론은 이런 모더니즘의 객관성 중심의 시학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확장시키는 면이 있다. 특히 그의 ‘추상화’ 개념은 실제와 시인 자신을 동시에 추상화 함으로써 인식 또는 창조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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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엇에 대한 연구는 셀 수 없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엘리엇이『하버드 애드보킷』(Harvard Advocate)에서 발표했던 시편에 대한 연구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이 시들은 1904년에서 1910년 사이에 쓰여진 것 들이다. 엘리엇 연구에서 초기시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초기시라는 명칭은 대부분 이 시기의 시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엘리엇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지속적인 주제의식과 시학을 고려해볼 때,『하버드 애드보킷』에 실린 10대 후반 20대 초의 이들은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전히 이 작품들 속에도 맹아적 형태의 엘리엇의 철학과 “몰개성이론” “객관적 상관물” 과 같은 후기 시학이 초보적인 형태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한 시학과 미성숙의 요소들이 나중에 훨씬 더 성숙하고 완전한 시편으로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볼 때, 그 근원적인 의미로서 『이른 청년기 시절의 시편들』은 그 의미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비록 이 작품들이 그의 후기시가 이룬 것만큼의 문학적 성취는 이룰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시학과 철학이 어떤 맹아적 형태에서 비롯된 것인지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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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타난 죽음을 주로 전기적 접근과 부도덕한 성애가 죽음이라는 테이레시아스의 실체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이다. 히아신스 정원, 마게이트 백사장, 선술집에서 릴의 대화, 위험 성당, 밀레 해전 등의 장면과, 바다, 템즈강, 런던교, 시티와 런던,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등에서 성폭행, 죽음 또는 멸망이 병치‧직조되어 죽음의 함의와 상징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요컨대,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중 에게 해에 익사한 친구들인 루퍼트 브루크와 다다넬즈 해협에서 익사한 장 베르드날 뿐만 아니라 죽음의 기원을 하는 꾸마에의 무녀, 슈타른베르크 호수에 미쳐서 익사한 루트비히 2세, 익사한 페니키아 선원의 타로 카드, 즉 플레바스, 밀레 해전에서 익사한 스텟슨, 미쳐서 연못에 빠져 죽은 오필리아, 궁전이 파괴되어 흙속에 파묻힌 첨탑에 유폐되어 몰락한 아뀌뗀느 왕자, 다시 미치고 자살하는 이에로니모 등과 같이 미쳐서 물에 빠져 죽고 싶은 죽음에의 염원을 암시적‧상징적으로 표백함으로써 죽지 않고 재생의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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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올란』과 『반석』두 작품은 로마 정치가와 성서의 인물을 객관적으로 인유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심층적으로는 엘리엇 자신의 삶의 고뇌와 종교적 개종으로 인한 자기 성찰이 강력해, 달리 보면 어린 시절, 성장해 정치인, 사회인으로부터 엘리엇 나름의 구원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코리올란』의 로마 정치인 『코리올란』과 『반석』의 예수나 성 요한은 엘리엇에게 공적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나 자아를 위한 탐구의 기회를 준 것이어서 공공질서의 원리에 관한 담론이라기보다, 엘리엇이 영국사회의 역사적 산물인 영국교회에서 그 새로운 의미를 찾게 한 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조화될 수 있는 있는 영국국교 기반의 정치사회를 바라는 엘리엇의 의도는 오늘날의 인간 상황이나 조건에 유희적인 디지털시대에도 더욱 그 가치가 기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코리올란』과 『반석』이 주는 메시지, ‘위대한 영광’은 황무지 유형이나 이전 시에서의 죽음보다 명백하게 희망에 찬 구원을 영국교회로부터 찾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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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이전의 전기시에서 엘리엇은 시적 화자의 자아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것은 자아를 발견하려는 또는 자아 없이 행하려는 투쟁의 과정이었다. 프루프록과 다른 관찰들 의 제사(題詞)의 마지막 2행은 시적 화자로서 자아인 ‘나’의 주체가 그림자같이 텅 빈 상태에 있으며, 이것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는 점을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견고하고자 하지만 견고할 수 없는 프루프록과 다른 관찰들의 주체를 ‘주체적인 것’이라보면 이러한 ‘주체적인 것’이 이 시집의 시적 화자들의 주체의 공통된 특징이다. 1917년의 프루프록과 다른 관찰들에서 계속 의문시되었던 주체의 위상에 대해서 1920년의 시집은 질문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의 주체에 대한 내면적인 회의가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시집』의 시적 화자의 주체는 ‘주체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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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은 20세기 최고의 모더니스트라 평가되며 영미시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그의 문학적 위상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란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 그 원인 중에 하나는 바로 시간에 대한 난해한 정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연구는 먼저 엘리엇의 네 사중주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즉,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하나의 고리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시간을 나타내기 위하여 엘리엇은 물리적 시간과 형이상학적 시간의 원리를 동시에 사용한다. 물론 정점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엘리엇은『네 사중주』뿐 아니라『황무지』를 비롯하여 「J.알프레드 프로프록의 사랑노래」, 「게론티온」 등에서도 시간의 이동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작품 속 화자의 의식의 이동 즉,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등 다양하게 화자의 시제가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엘리엇은 시간의 이동원리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화자의 의식의 이동원리라는 기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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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들의 여정 에 나타난 동방박사들의 육체적·영적 여정은 단순히 아기예수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한 긴 여정일 뿐만 아니라 이교도로서 영적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고행이다. T. S. 엘리엇은 복음서의 내용과 렌슬럿 앤드류의 설교를 극적 독백 형식을 통해 병치시킴으로써 화자, 청자, 사건 등이 여정에 잘 녹아 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동방박사들이 기독교에 동화되어 이교들의 삶을 정리하기까지의 육체적·영적고통을 여정에 투영시켜 개종의 고통을 알레고리적으로 묘사한다. 화자의 회상에 따르면, 그들이 아기 예수 탄생의 장소에 도착했을 때 탄생의 고통과 죽음의 고통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 논문에서 는 화자가 느끼는 죽음·탄생의 복합적 고통들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공시적으로 의미를 분석해 그 고통의 순간이 엘리엇의 주장하는 정점의 순간으로 보고자한다. 나아가서 그 고통의 감정 속에는 다층적인 의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알레고리적 읽기로 영적·육체적 여정이 하나의 정점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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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애쉬베리의 작품『세 시』는 T. S. 엘리엇의 모더니즘 시『네 사중주』에 대한 포스트모던적인 반향이다. 엘리엇은 “육화”를 “회전하는 세계” 속에서 궁극적인 “정점”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중심을 갖는다.『세 시』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애쉬베리가『네 사중주』의 특정한 언어와 생각에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시간에 포섭되는 것을 거스르는 엘리엇의 기독교적인 주장을 해체하고자 했다. 엘리엇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유럽중심적인 고착이 자신들만의 문화적 구조를 바탕으로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비서구사회의 독자들에게 문제시될만한 영향을 만들어내는 반면에, 애쉬베리의 보다 평등한 중점은 비서구사회의 문화적 구조에서도 보다 폭넓게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애쉬베리의 비정치적인 주체적 병합은, 즉 탈중심화된 주체는 그 자체가 유럽중심주의라는 측면에서 문제시 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들이 논의해온 것처럼, 탈중심화된 정체성은 비서구사회와 소수민족들이 정체성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순간 특권을 갖는다. 애쉬베리의 엘리엇에 대한 비위계적이고 탐구적인 비평은 유럽중심주의에 반하는 좀 더 성공적인 미적 대응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