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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2.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滄海 文尙海(1765-1835)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진주 인근에 살았던 남명 연원가의 한 사람이다. 이 시기 경상우도 지역의 학자들이 인조반정 이후 出仕 하지 않고 지방에 퇴처하여 학문연구와 修身에 치중하여 살았던 것처럼, 창해 또한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생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不斷한 수양자세로 일관하였는데, 이러한 삶의 자세는 그의 문 학작품 속에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 ..창해집..에는 그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이 시기 경상우도 지역의 여느 지식 인의 문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문체의 글이 실려 있다. 漢詩의 경우 조선조 지식인에게 통용되던 오언시와 칠언시 외에도 六言詩가 6수나 들어 있 으며, 그 외 記·說·詞·傳·訓·銘·歌·賦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골고루 실려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재야지식인으로서의 ‘끊임없는 수양하기’가 일관되게 나타 난다. 곧 유사한 내용을 읊어내더라도 다양한 형식으로 표출해 낸 경우인데, 이 는 창해가 그만큼 풍부한 문학적 소양과 다양한 창작활동 욕구를 지녔음을 의 미한다. 문학작품 가운데 특히 시를 중심으로 효용론적 측면에서 孝行詩·紀行詩·愛民 詩·修養詩·隱居詩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는데, 그 속에 드러난 창해의 문학적 志 趣는 재야지식인으로서 삶 그 자체였다고 하겠다. 그는 출사하여 자신의 이상 을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조 지식인으로서의 處世, 士意識, 愛民精神 등을 다양한 문체 형식을 빌어 작품 속에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303.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芳洲 文國鉉은 둔암-성재-순암-성호-퇴계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발견되는 보수적이고 반외세적인 영향으로 일찍부터 서구세력의 동점을 경계했다. 외세에 의한 침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자기 수양과 함께 유학의 부흥과 후진의 양성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과 국권의 상실의 역사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그의 이념의 적극 적인 실천 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을 선택하게 하였다. 은둔자로 자처하던 방주는 개방적이기 보다는 보수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여 유가의 전통적인 이념을 묵수하면서 혼란한 시대에서도 本性의 유지와 심성의 함양을 통한 인간 도리의 실천 그리고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 공부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의 재기를 꿈꾸었다. 이 시기의 방주의 학문경향이나 문예관은 조선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유 가적 학문・문예관을 충실히 계승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근대로 들어서는 시 대 상황을 고려하여 평가할 때는 역사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는 동참하 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유학자로서의 문예관을 고수한 인물로 평가된다.
        304.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文劼은 어려서부터 문명을 떨쳐 소년시인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시 작 품을 남겼고, 정유재란에 하수일과 의병을 일으켜 하동의 악양에서 활동함으로 써 이들 덕분에 이 지방이 온전하였다는 평과 조정의 상을 받기도 하였다. 文弘 運은 아버지를 따라 악양에 있다가 아버지가 병사함에 전란의 와중에서도 장례 를 치루고 그 이후로는 유거하며 지냈으며, 그가 남긴 「頭流八仙遊篇」은 지리 산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頭流八仙遊篇」은 문홍운 자신을 비롯하여 성여신, 정대순, 강민효, 박민, 이 중훈, 성박, 성순의 여덟 사람이 성여신의 제의에 따라 두류산을 유람한 과정과 느낌을 읊은 시이다. 이 시는 지리산 유람을 노래한 여러 시편 가운데 가장 긴 것으로 240구 1,200자에 이르는 장편 5언시이다. 특기할 것은 성여신의 「방장 산선유일기」 가운데에도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여덟 사람을 신선이라 부른 것이다. 선비들이 자신들이 유람을 가는 곳을 신선세계라 하며, 그곳을 속세와 구분하 여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듯이 그 감회를 기록한 것은 있지만, 유람 가는 자신 들을 신선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인에게 신선의 이름을 이처럼 지어붙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이들의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또한 한 번의 일회적인 유희에 그치지 않고 유람하 는 동안 내내 이어졌음을 성여신과 문홍운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여신이 “속에 들어가서는 눈에 띄는 사람 모두 선인이었고, 산 밖으 로 나와서는 만나는 사람 모두 범인이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결국 유자로서 신선에 인식의 테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 다. 문홍운이 지리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과 예찬이 극 에 달하였지만, 막상 그가 지리산에 당도한 뒤 특히 지리산 청학동이나 향로봉 에 올라 읊은 평범한 시구는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홍운은 그의 시에서 청학동이나 향로봉에서 신선세계에 당도하여 신선을 보았다고 했으나, 이는 보통 사람들의 신선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문홍운의 신선놀음도 결국은 성여신이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선유는 이름은 비록 ‘仙’이나, 실제는 ‘仙’이 아닌 것 이다.”라고 한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05.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6세기 초 경상좌도의 퇴계학파와 더불어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경 상우도 남명학파의 宗匠이 된 南冥 曺植의 문학과 교육에 관한 연구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고에서 그의 문학에 나타난 敬·義 사상을 바탕으로 한 實踐躬行과 그의 교육에 나타난 因人施敎의 下學上達의 교육관 등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명이 퇴계에게 보낸 書信에서 '입으로만 天理를 담론하는' 16세기 당시 성 리학의 한 특징이라고 할 이론적 측면만을 중시한 사실에 비판을 가하면서 形 而上學의 이론적 논쟁에 앞서 形而下學의 실천적인 덕목이 필요함을 주장하였 다. 남명의 제자 김우옹도 스승에 대한 회고에서 '몸소 실천하는 공부는 매우 돈 독하다'고 하였다. 「言行總錄」·「戊辰封事」 등에서도 敬·義 사상으로서의 실천궁 행을 강조하였다. 그의 <浴川>에서는 敬의 마음으로 義가 내포된 活敬의 의미 를 드러내었으며, <經傳>에서는 맹목적인 학문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서 직접적 으로 필요로 하는 실용성의 학문을 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처럼 남명의 실천력 강조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기점이 될 수 있었다. 남명의 因人施敎 교육은 배우는 사람의 지적 수준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것 이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학습자의 연령대와 능력 자질에 맞추어 교육하여 그 피교육자의 능력, 자질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학문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제자에게는 그에 맞는 교육 방법을 택하였으며, 성품이 성급 한 제자에게는 천천히 행할 것을 당부하는 뜻으로 걸음이 느린 황소를 타고 가 게 하였다. 이 같은 교육 방법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행한 因人施敎의 교육 방법 이었다. 이 같은 유학자의 교육 방법은 ‘老莊爲崇’의 주장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墓碣銘」·󰡔學記類編󰡕 등에서도 下學으로써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 다. 經世致用的 학풍을 지닌 정구는 남명의 제자인 오건의 제자이고, 후기 실학 파와 직접 접목된 허목은 정구의 제자이기도 하다. 정구·허목 등의 經世致用的 학풍과 考證學的 경전 해석은 실학의 泰斗인 이익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처럼 남명의 인인시교의 교육 방법과 下學을 통하여 上達해 나가는 實踐躬行的 교육 사상은 조선 후기에 꽃을 피운 實學思想의 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06.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士農窩 河益範(1767-1813)은 滄洲 河憕 및 그의 손자 河洺으로 이어진 가학 을 계승한 바탕 위에 尤庵學派의 性潭 宋煥箕에게 경학과 성리학을 배우고, 鏡 湖 李宜朝에게 예학을 배워 韓元震-宋能相-宋煥箕․李宜朝로 내려오는 학맥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성담에게 집지함으로써 학문적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尤 庵家와 世交를 돈독히 하는 두 가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사농와의 삶의 지취는 자연에 동화되는 삶을 산 曾點의 방식을 추종하면서 仁 智之樂을 추구한 데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實心․實學으로 爲己之學을 하는 用實心務實學의 務實精神으로 나타난다. 그의 문집에는 紀行詩와 紀行文이 대 부분을 차지하여 문학적 특징으로 부각된다. 그의 기행시는 크게 山水遊覽과 求道觀光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지리산 등의 산수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고, 후자는 스승의 문하에 나아가고 한양을 관광하면서 지은 것들이다. 그의 기행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식으로는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째, 산수유람을 좋아하는 성품으로 자연에 몰입하는데, 그것은 현실에서의 불 화를 달래기 위한 측면보다는 曾點의 경우처럼 天人合一의 경지를 추구하는 仁 智之樂에 心醉하는 정신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둘째, 산수유람이건 구도관광 이건 그의 기행문에는 源頭處를 향하는 求道意識이 깊게 스며 있다. 셋째, 그의 기행시문에는 선인의 유적을 만나 역사를 회고하는 작가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데, 선현의 道德과 志節을 흠모하기도 하고 선현의 불행을 탄식하기도 하며 불 교의 황당한 설을 비판하기도 한다. 넷째, 그의 기행시문에는 南冥精神을 환기 시키며 그것을 본받고자 하는 작가의식이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307.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초등학교 학습자들은 이야기를 즐겨 읽고, 이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학습자의 흥미와 발달 수준을 고려하여 볼 때, 이야기 제재는 향후 문학 경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 교육은 텍스트 위주의 구조적인 특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대부분 읽기 영역에서, 학습자들의 텍스트 이해에 초점을 두고 지도되었다. 문학 영역에서 이야기는 학습자의 생각이나 느낌 위주의 감상만을 해 왔고, 의미를 구성하는 문학 감상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한명숙(2003)의 연구는 이야기 구조 교육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는 텍스트와 학습자 모두를 존중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깊이 있게 감상하는 방법에 속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 연구 방법이 문학 감상 능력을 신장시켜주는 도구 역할을 할 수 있을지의 가능성을 검증해보고자 했다. 학습의 실제 양상은 문화 기술적 방법으로 접근하였고, 문학 반응을 분석하여 문학 감상 능력의 신장 정도를 파악하였다. 이는 학습자들의 언어, 비언어적인 반응 및 학습 결과물, 반응일지, 면담을 통해 확인하였다. 처음에는 이해적 반응을 주로 보이던 학습자들이 해석적 반응, 평가적 반응, 정의적 반응을 보여 이야기 감상 능력이 향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학습자들은 이야기를 감상하는 것을 즐거워하여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읽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감상하는 방법을 알게 되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와 감상의 폭이 넓어지고 문학적 표현력이 향상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학습자의 독서 동기를 활성화하여 향후 독서 태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본 연구는 학습자 내면의 변화를 확인하기에는 짧은 기간 동안 연구를 하였고, 학습자의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모형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교육 현장에서 꾸준히 이야기 교육이 실시되기를 기대한다.
        308.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遺逸은 16세기 조선조 사대부문학의 작자층 가운데에서 학덕이나 재능을 지 녀 朝官이 될 자질을 갖추고도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未入仕者를 말 한다. 士禍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근거지로 은거한 이들은 현실 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심성수양을 통해 온전한 인격을 추구하 였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도학을 전파하는 등 경색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士 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중과 신망이 조 정에서 벼슬하는 관료보다 더 높아져, 조정에서는 이들을 예우하여 徵召하였다. 곧 遺逸은 출사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에서 백성의 신망이 두텁던 당대 碩儒들로 서, 우리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산수자연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은거지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고, 은거지 주변의 명산과 절경을 유람하는 것으로 이를 표출하였다. 유람 에서 만나는 자연경물에 자신의 심정을 붙여 술회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 산 수자연은 ‘본래 그러한 것, 본래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특히 16세기 조선조는 성리학 연구의 심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이 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산수자연은 당대의 不正한 현실을 인식하는 자신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은거지 중심의 유람에서 표출되는 산수자연은 현실에서의 좌절을 수양으로 승화시키는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성리학자였던 만큼 자연경물을 통해 현실의 不 正 및 민생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고, 역사유적지를 접하면 그 시대를 회고 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무엇보다 물러나 있지만 자아를 각성하고 심성수양에 진력했던 이들에게 산수자연은 士意識을 고취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곧 당대 관료세계에 피동적으로 편입되기를 거부 하고 물러났던 조선조 士人의 의식을 산수자연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309.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만성이 그의 시에서 어떠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그의 어떠한 생각이 반영된 것인가를 살펴본 것이다. 만성은 그의 시에서 역사와 현실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으려 애 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것은 그의 도문일치에 입각한 그의 문학관에 기 초하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도 문학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 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매우 단편적이거나 편의적 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잡록 부분에서 잠간 언급하거나, 청탁에 의해 짓는 개인 의 문집 서와 발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매우 체계적으로 문 학론이나, 문론 혹은 시론이라는 글을 지어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문학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또 생각에만 머물고 그의 문학 세계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만성은 문학관에 대해 피력한 글이 많지는 않으나, 최장한・곽종석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문학관을 일목요연하게 사적 체계를 세워 정리한 것을 볼 수 있 으며, 이러한 문학관은 그의 많지 않은 시작품 속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올바른 인간에 대한 관심과 수양은 그의 몇 몇 잡저들 예를 들면, 「명덕 설」, 「위인론」, 「입지설」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그의 시 속에서 나란히 읊어진 한유한, 정여창 등 선현에 대한 그의 생각과 남명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당대의 어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읊은 시 등에서 발현되어 있다. 그가 매 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특히 납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과 이를 바탕 으로 지은 「납매설」은 그의 참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현시하려한 의도를 읽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인간이 속해 있던 그리고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에 관심 을 가지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는 역사를 회고하고, 또 시사를 걱정하고,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의 과거와 당대에 깊 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만성의 시문학에는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를 열어가는 당대의 바람직 한 인물들과 깊은 교유를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그의 과거와 과거의 인물 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만성이 바라보는 현실은 없어져야할 대상이 아니고, 보존하고 안존하 고 싶은 곳이다. 시사를 걱정하는 것도 현재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걱정 해서이다. 그래서 그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 다 만 미래의 불안과 걱정이 있을 따름이다. 미래의 불안과 걱정은 바로 굴욕적이 고 처참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예측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과거는 현재를 보 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를 보는 거울인 것이다. 인물의 경우에도 사람을 평가하는 바람직한 기준이 무시되는 현실을 매화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현실 속에서 그러한 인물들을 모색하였으며, 과거에서는 그러한 바람직인한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던가를 인식하고, 현실의 인물들에 교우를 유지하였다.
        311.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문학 교육은 학습 독자의 문학 능력 신장을 목표로 한다. 또한 문학 교육에서는 학습 독자가 주체적으로 문학 작품의 의미를 인지적, 정의적, 평가적인 면에서 구성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학습 독자의 균형 있는 문학 능력 신장과 주체적인 의미 구성을 위한 방법으로 문학 비평 교육을 제안한다. 이에 문학 비평 교육의 개념을 정의하고, 학습 독자의 발달 특성을 고려하여 학습 독자의 수준에 맞는 문학 비평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학습 독자 중심 비평과 문학 작품 기반 비평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전제로 문학 비평 교육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문학 비평 교육은 학습 독자가 문학 작품에 대해 주체적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문학 교육 방법이다. 문학 비평 교육에서 학습 독자는 자기 관점에서 문학 작품을 인지적, 정의적으로 수용하고 평가하여 의미를 구성한다. 또한 문학 비평 교육은 학습 독자가 문학 작품의 가치를 분석하여 자신이 구성한 의미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문학 교육 방법의 한 형태이다. 특별히 초등 학습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 비평 교육은 학습 독자의 문학 반응 발달 특성과 비평 수행 능력을 중심으로 그 가능성을 검증하여 교육 수준을 조절해야 한다. 이를 근거로 한 학습 독자를 위한 문학 비평 교육은 학습 독자가 문학 작품을 읽고 주어진 관점 중 한 가지를 선택, 그 관점에 맞게 작품을 이해, 감상하고, 논리적으로 가치 평가하여 구체적인 비평 텍스트를 표현하도록 하는 활동 중심의 문학 교육을 의미한다.
        312.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 한 때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성인의 학문 을 자신이 공부할 목표로 정한 뒤로부터는 문학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 는 완물상지하기 쉬우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 정인홍에 따 르면 그는 항상 시황계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명이 이처럼 시를 배격하였다면 그의 문집에 시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 만, 그의 문집에는 많은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시 벽이 있어 시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남명은 결국 시를 멀리 하면서도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물론 시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지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 다. 특히 문장의 경우에는 이른바 문예문에 속하는 글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실용성에 근거하는 남명의 문학관은 작품 속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성이나 바탕과 같은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원천부」에서 온 갖 이치가 모두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도 이 러한 생각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과 일상과 같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을묘사직소」와 「무 진봉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일상을 중시하는 생각은 다른 산문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시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실을 중시하고 허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하였던 점 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스스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특히 묘문을 지으면 서 그는 고인에게 아첨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훌륭한 학자라는 빈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다는 생각을 여러 작품 속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남명의 문학작품 속에는 그가 문학을 멀리하면서도 왜 작품을 짓지 안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문학작품을 지음에 있어서 무엇을 강 조하였는가,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것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중시하였 는가를 살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 결론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과 맞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13.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에서 학문활동을 하였던 물천 김진호 (1845-1908)의 문학사상을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아직 이런 주제로 그에 대한 논문이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우선 문학사상사의 흐름위에서 그가 어 떠한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1.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도학파였는가. 그는 문학에서 덕성과 의리를 중시하고 실천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도 학파들의 주장에서 시를 짓는 작자들이 선험적인 도리를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 에 머무르고 있는데, 비하여 그는 인간마다 가지고 있는 ‘良知’를 강조하였다. 그는 단순히 전통적 이념을 계승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2. 모방을 거부한 현실주의자였는가. 그는 대가의 학자들이 의고적 입장에서 唐詩를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당시의 형식적인 운율을 모방하는 것으로 현실의 의미를 담지 못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시를 칭찬하면서 ‘그대의 시는 세상에 드 문 옛음율’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그가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과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3. 古文으로 어떻게 현실을 담을 것인가. 그는 전통적인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문학은 형식적 논리보다는 실천적 행위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보 편적 진실을 가지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 이 바로 고문이라고 생각하였다. 4. 언어를 실천하면 살 수 있는가. 그는 자기만의 깨달음을 실천해야하고, 언어와 행동은 일치해야한다고 생각 하였다.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주인공 으로 하는 글을 많이 남기고 있다. 언어는 행동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언어관, 문학관은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양면성을 지니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문을 고집하면서 과거회고적일 수도 없고, 그렇 다고 현실적인 처지만을 강조하는 반의고적 주장을 할 수도 없는 모순된 시대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문학적 입장은 그가 일본 등 외국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시대 말기에 살았다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다.
        316.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朝鮮 成宗朝 新進士類의 일원으로서 당시 산문의 第一家로 稱譽되던 濯纓 金馹孫(1464-1498)의 생애와 문학, 정치적 역할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찰 해 보는 것에 목적이 있다. 15세기 성종조는 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서 詞章과 道學의 상대적인 비중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정치적인 성향과 연계 되어 대립의 양상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신진사류의 선두를 자임 하였던 탁영의 문학적 견해와 정치적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 가 있다. 탁영은 신진사류의 실질적인 영수였던 佔畢齋 金宗直의 문인으로서, 점필재와 정치적ㆍ문학적으로 유사한 노선을 견지하였다. 훈구세력들의 전횡 에 반대해 유학적 왕도정치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훈구세력들이 崇文을 조장하여 군주의 修己任人을 방해한다거나 阿諛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편, 본고가 江右 지역과 연관된 인사들의 학문과 생애 등을 개괄적으로 소 개, 고찰하기 위한 학술대회의 일환으로 작성된 만큼, 기존의 연구에서 비중 있 게 소개되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다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문집 의 改刪 경위나, 詩文에 대한 후대의 평가, 節義之士로서의 변화하는 위상 등에 대해 일정한 비중을 두어 소개하였다. 탁영의 문장과 절의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과 35세라는 짧은 생으로 인해 학통이 연결될 만한 고 리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문장과 절의가 후세에까지 많은 영향을 줄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특히 宋時烈 같은 道學者들조차도 탁영 문장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탁영 문장의 내용적인 측면 과 실제로 보여준 유가로서의 실천적인 삶과 절의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가 바탕이 된 진정한 ‘經文一致’를 추구했던 도학자들에게 탁영 의 문장은 전범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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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계 표연말(1449-1498)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교체되던 시기에 사림파의 입장에 선 김종직의 문인 중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인물로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만나 사림파의 올곧은 정신을 꺾지 않다가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남계의 생애는 왕조와 벼슬에 따라 효행을 실천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초년기, 과거에 출사하여 告身을 빼앗기고 유배를 당하기도 하는 출사와 좌절기, 예문 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를 거치면서 간관활동을 하던 출세기, 그리 고 연산조에 들어 대사간까지 올랐다가 사초로 유배되어 죽은 쇠퇴기 등 4기로 나누어진다. 남계의 교유는 김종직, 서거정, 유호인과의 교유 정도만이 보이는데 김종직과 서거정은 당대 훈구관료와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대립적인 관계였으나 남계 에게는 각별한 선생들이었다. 김종직은 늘 서릿발 같은 기상을 길러 엄정한 판 단을 할 것을 요구하였고 서거정은 그런 기상도 좋지만 백성을 포용하는 관대 함도 지니라고 하였다. 유호인은 함양을 동향으로 김종직의 문인 동료로, 또한 거의 비슷한 환로를 거친 절친한 사이로 고향, 사림, 조정에서 바라는 인물이 되기 위해 함께 힘썼던 師友이다. 남계의 학문과 문학은 남겨진 글이 시 9제 20수, 산문 4편 밖에 없어 제대로 알기 어려우나 학문관은 주자와 같이 마음을 높이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세한 일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마 음만을 강조한 육구연을 이단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성현과 같이 되려면 마음 보존을 잘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당대 사림파처럼의 주자일변도 학풍을 그대 로 따른 셈이다. 남계의 문학은 당대 신진사류가 지향하던 東國文明의 懷古, 禮俗敎化, 우국애 민, 절의와 강개 등을 아울렀다고 여겨지나 남은 작품이 적어 전모를 알 수 없 다. 그러나 문장 공부보다는 현실참여를 중시했으며, 글로 표현하는 일과 관계 없이 본래의 자질은 불변한다는 생각을 가졌음이 작품에 나타난다. 한편 만년 에 가서는 현실참여를 통한 정치개혁의 한계를 깨닫고 고향 자연 속에서의 깨 달음을 추구하려는 태도변화를 보였다. 남계를 비롯한 성종조 신진사류들은 훈구파에 대적할 만한 문학적 재능을 지 녔으되 이를 발휘하기 보다는 도학적 수양을 바탕으로 한 실천행위를 중시하였 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으며, 도의 실현을 위해 현실의 위기를 두 려워하지 않는 지조 있는 조선 선비의 표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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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뇌계는 忠孝淸儉하고 沈重簡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시를 지나치게 좋아하였 고, 眞醇한 儒者로서 忠義를 분발하였으며, 현실세계에 살면서도 늘 物外의 仙 界를 동경하였고, 圭角이 없는 성품에 達觀의 세계관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는 詩癖이 있을 정도로 시를 탐닉하였고, 당대를 요ㆍ순 시대로 만들고 싶은 포부 를 갖고 있었으며, 身病과 客苦로 고향을 끝없이 그리워하였고, 현실세계와의 불화를 달래기 위해 物外의 仙界를 정신적 귀의처로 삼았다. 이런 점이 그의 志 趣다. 뇌계는 金宗直의 문인이며 성종조 신신자류로서, 당대의 모순을 개혁하여 새 로운 시대를 만들고 싶은 士意識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 대한 애정 과 재난에 대해 우려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을 인식하고 배척하였으며, 현실제 도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동참하였다. 뇌계의 處世觀은 그의 개인적 사유와 정 치적 사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귀향의식으로 집결된 다. 그리고 이런 귀향의식의 저변에는 物外의 세계를 꿈꾸는 정신적 지향이 자 리하고 있다. 뇌계의 詩風은 黃庭堅ㆍ陳師道ㆍ陳與義 등 江西詩派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方回의 一祖三宗說을 수용하여, 황정견ㆍ진사도ㆍ진여 의를 통해 杜甫에 도달하는 시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氣豪意豁한 蘇軾의 시풍에서 벗어나 唐詩風에 접근할 수 있었다. 뇌계의 시에는 사찰ㆍ유 적지ㆍ객지 등에서의 所懷를 노래하거나 벗ㆍ승려 등에게 內面의 情緖를 보여 준 시편들이 많다. 이 글에서는 歷史에 대한 回顧, 民生에 대한 愛情과 憂慮, 故 鄕에 대한 그리움, 物外의 仙界 志向 등을 시세계의 주요 성향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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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洪重聖(1668-1735)은 문학론에서 文氣를 강조했다. 文氣의 개념은 文勢의 氣 이다. 즉 문학작품을 창작할 때 필요한 기본적 소양과 아울러 문학작품의 표현수 준을 말한다. 그는 문기를 길러야 훌륭한 글을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文 氣를 기르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중국 秦과 漢의 古文을 비롯하여 唐 宋八家의 문장을 숙독해야한다고 본다. 또 六經을 비롯하여 儒家의 經學을 공부 하여 識見이 고명하게 되면, 文氣가 창성해지고 筆力이 풍부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詩또한 工麗하고자 하지 않아도 공려해진다고 간주한다. 그 이유는 고전의 명문을 독서하면 명문이 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즉 명문이 담아야할 내용과, 명문의 표현기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文氣를 강조한 이유는, 천 부적 재능은 타고나기 때문에 배울 수 없지만, 후천적 노력으로 문장력을 향상시 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홍중성의 文氣論은 그의 손자 洪養浩에게 영향을 주어, 道와 氣가 錯綜하여 文이 된다는 道氣論을 전개하게 했다. 李夏坤등 石室學脈문인들은 당시의 擬古的문학풍토를 쇄신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시대의 대세에 부응하여 홍중성도 중국 古文의 학습을 통해, 문학 창작의 기본요건으로 文氣를 배양할 것을 제기했으니, 그 역시 선각적 문인이요, 개명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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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后山許愈(1833-1904)의 文學思想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후산이 활 동한 19세기는 勢道政治에 따른 민란과 일본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성리학적 통치 이념과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후산은 이러한 內憂外患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탐구와 인재양성에 전념하였다. 그가 행한 학문적 사업은 正學을 수호하고 異 端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인조반정(1623) 이후, 침체된 경상우도의 학풍 을 진작시키는 일이었다. 그 결과 후산은 공자․주자․퇴계, 그리고 寒洲李震相 (1818-1886)으로 내려오는 主理的학문의 전통에서 스승인 한주가 내세운 ‘心卽 理’설을 자신의 학문의 귀결처로 삼아, 어려움에 처한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南冥을 비롯하여 이 지역 출신 및 연고가 있는 스승 선배 학자들 의 문집간행과 현장에서의 강학을 통해 지역의 학풍을 진작시키는 일에 심력을 다 하였다. 한편 후산은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왔으며, 특히 맹자 이후, 쇠퇴해 진 유학을 일으키고 六朝시대의 쇠약해진 문풍을 일으킨 韓愈의 문장을 좋아하였 다. 그렇지만 후산은 문장가의 입장에서 문학을 바라보지 않고, 시종일관 학자적 관점에서 문학을 바라보았다. 그 결과 후산은 학문과 인격에 기반 한 건실한 내용 의 문장, 즉 ‘世敎’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추구하였으며, 그 문장은 바로 이치를 밝히는 ‘明理之文’이었다. ‘명리지문’의 구체적 내용은 主理的전통 속에서 正學 을 수호하고 時文인 科擧之文과 俗學인 異端之學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문체 적 특징도 내용에 걸맞게 화려한 수사적 표현을 배제하고, 담박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를 선호하였다. 후산은 이처럼 정통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문학사상의 기반위에 있으면서도, 나름 대로 19세기가 처한 시대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우선 후산은 문장에 대해 일 정한 효용적 가치를 인정하였으며, 나아가 도가 담고 있는 내용도 성리학적인 내 용뿐만 아니라 현실적․실용적인 내용을 다소 포함하고 있어, 문장의 내용상의 외 연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도와 문의 상호관계에서 후산은 도가 들어갈 자리에 ‘理’를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리 지문’을 추구한 그의 문장학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평생 정통 理 學을 추구해 온 학문경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후산이 추구한 문학사상은 영남학풍의 학문적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처한 지역 적․역사적 입장에서 나름의 문학사상을 견지해 나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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