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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1.
        201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6-17세기 초반은 南冥 曺植(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 및 재전제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학문적ㆍ정치적 활동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 려웠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시기는 남명학파의 전성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6-17세기 초반에 창작된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 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수양론을 파악해보고자 시도했다. 箴의 효용성에 주목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분석하여 수양의 실천 양상 을 분류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수양론의 핵심 사상을 제기하여 그것에 따른 실천 의지를 촉구한 작품군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ㆍ본질적 측면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규계하는 것이므로, 치료 방법중에서 原因治療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특정한 병폐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적시하여 그것에 따른 수양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어떤 증상에 대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對症治療의 명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는 어 느 시기나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지어진 작품으로, 이것은 주위 환경이나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병을 호전시키는 改善治療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3가지 유형 가운데 편수가 가장 많은 것은 對症治療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총 10편이 여기에 속한다. 原因治療는 5편이 있으며, 改善治療는 4편이다. 곽재우의 「調息箴」은 호흡법에 관한 내용으로 다른 箴 작품의 일반적인 성 향과 구별되어 기타로 분류했다.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 학자들이 창작한 箴 작품은총 20편인데, 비슷 한 시기에 지리산권의 서부인 호남지역에서는 箴 작품의 수량이 6편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2편이 임금을 위해 지은 官箴이고 나머지 4편은 경전 을 해석하거나 전대의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箴 창작 양 상과 대비해 보자면,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품은 수양의 내용 및 방법을 서술한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따라서 16-17세기 초반 남명학 파의 箴 작품은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고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382.
        2015.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GPS 모듈을 탑재한 모바일 단말기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나 코드의사거리를 측위에 사용하므로 반송파 위상을 사용하는 GPS 수신기에 비해 정확도가 낮다. 특히 다중경로신호는 반송파 위상 수신기에 비해 측위 결과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므로 다중경로신호를 검출 하여 측위에서 제거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다중경로신호의 검출을 위해 위성의 신호세기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초기 분석을 수행하였다. 개활지환경에서 GPS 위성의 고도각이 증가함에 따라 신호세기가 증가하는 것이 확인되었고, 주변에 장애물이 있는 지역에서는 시선방향에 차폐요소가 있는 위성의 신호세기가 감쇄되어 기록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GPS 위성이 동일 궤도를 지날 때에도 반복되어 발생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위성의 재현시간을 적용하여 비교 분석하였다. 그 결과 GPS 위성 신호세기 변동 특성은 위성이 궤도상 의 동일 위치를 지날 때에도 거의 완벽하게 재현되었고, 이 현상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관측 환경에 의해 거의 완벽히 재현되는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호세기를 이용한 다중경로신호의 검출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38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German popular music in the 19th century is the music, which is accepted in several citizen groups, on opposite to nobility society. With the emergence of capitalism and change of political situation produced the populace their own music of those life culture and distributed it in music market. But the evidence of independence of the popular music from art music of the aristocratic group is verificated in those antipathy and menace to the music of civil groups and those intention to classification their own music culture to the one of the populace. Eventually the meaning of german popular music in the 19th century is the new musical and cultural approach of the citizen group, who passively accepted and is known of unrefined and simple music, which is expression of emotions of uneducated people. Furthermore, it is important that the german popular music in the 19th century holds the ‘functional sociality’ changing the society than the lack of the artistry which the art music had.
        384.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focuses on an analysis of the Song cycle Reisebuch aus den österreichischen Alpen(op.62) by Ernst Křenek(1900-1991). When Křenek composed this Song cycle in 1929, the Orchersterlied had become a main genre in the 20th concert program and since Pierrot lunaire, Lied accompanied by a chamber ensemble elevated its position high in vocal music creation. Therefore, the conventional 19th century art song with piano accompaniment tradition had not continued into the 20th century. Křenek completed 31 art songs in his life. And this means a lot in the history of 20th century art song. Another fact that Křenek was of great importance in the history of 20th century art song is that he composed five Song cycles. Among these, four are based on his own poem, and the other one is Reisebuch aus den österreichischen Alpen. Composing Song cycle on his own poem verify the fact that Křenek was a person of a literary turn of mind and he faithfully followed the Song cycle tradition of the 19th century in purpose of unfolding a story based on one theme. Křenek’s Reisebuch aus den österreichischen Alpen consists of 20 pieces(19 songs and an Epilog added later) and is modeled on Wienterreise by F. Schubert. The Romantic inclination appeared in this Song cycle is the use of consistent rhythmic pattern in the song number eight ‘Unser Wein’, the pattern also favored by Schubert’s piano pieces. As Schubert described disenchantment of love in hisWienterreise, the fact that Křenek depicted his own hapless love for his homeland in this Song cycle is also considered to be a reflection of Romantic tendency. Křenek recapitulated the theme of the first song in the song number nineteen ‘Heimkehr’ and this is compared to the construction of Schumann’s Song cycle Frauenliebe und -leben. There are several factors in this Song cycle that continued the 19th century art song tradition, musical aspects of the cycle contain various contents of the 20th century. Twenty songs can be divided into two categories according to musical language: songs in Romantic musical languages are song number one ‘Motiv’, number seven ‘Regentatg’, number eight ‘Unser Wein’; songs in Expressionism musical languages are song number eleven ‘Alpenbewohner’, number twelve ‘Politik’. There are songs with text simply describing apparent impressions of journey such as song number two ‘Verkehr’, number three ‘Kloster in den Alpen’, and number six ‘Friedhof im Gebirgsdorf’. But those which put psychological, moral, social, and political contents into text are song number five ‘Traurige Stunde’, number nine ‘Rückblick’ and number twelve ‘Politik’.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text and musical languages are conformed through the analyses.
        385.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月村 河達弘은 19세기 강우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이다. 그는 실용 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南冥 曺植과 謙齋 河弘度를 존숭하며 慕寒齋에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인근의 학자들을 운집시키 고 그들에게 남명학파로서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 月皐 趙性家ᆞ 溪南 崔琡民ᆞ東寮 河載文ᆞ克齋 河憲鎭ᆞ斗山 姜柄周ᆞ尼谷 河應魯 등이 그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이후 조성가와 최숙민은 하달홍의 인도 아래 보다 체계적인 학문을 위해 노사학단에 나아가 奇正鎭에게 수학하였다. 한편 하재문과 하헌 진은 본거지로 돌아가 寒州 李震相과 교유하였고, 강병주와 하응로는 性齋 許傳에게 나아가 집지하였다. 조성가와 최숙민이 노사학단의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에 비해 하재문이 한주학단에서나 강병주가 성재학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리 크지 않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남명을 존숭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하달홍의 모한재 강학이 남명학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달홍이 노사학파와 친밀성이 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달홍은 19세기 하동과 인근 강우지역의 문인들에게 남 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보다 큰 학문을 접할 수 있도록 발판의 역할을 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그 문인들은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학문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386.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8세기의 평범한 독일 음악가들(궁정음악가, 도시음악가)의 급료는 적었다. 그래서 현물(Naturalien)과 특별수당(Gratifikation), 그리고 때에 따라 숙소와 식사가 함께 제공되는 이중(二重) 보수 제도였다. 연봉으로 정하였던 궁정음악가의 수입은 자체적으로도 격차가 심하였다. 소수의 정상급 음악가들은 고액의 연봉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액수를 받았다. 정세의 변화에 따라 궁정악단은 해체·결성을 반복하였고, 국가 재정이 어려우면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다. 반면에 시청과 교구청 소속의 도시음악가는 고용 여건에서 안정적이었으나, 연봉 자체가 아주 낮았다. 그래서 부수입원인 잡종행사(Accidentien)가 오히려 더 주된 수입원이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음악가들의 수입을 다른 시민 사회 구성원들과 비교해 보면, 그 수입은 중간 또는 그 이상에 해당하는 수준이었고, 사회적인 신분도 대략 그것에 준하였다.
        387.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江右 지역에 유행처럼 일었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을 중심으로 강우지식인의 의식세계를 살펴 본 것이다. 존주의식은 임진란 이후부터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던 지성사의 한 중심축이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이에 매몰되어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족쇄였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19세기까지도 조선사회의 주류를 차지하였다. 중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존주의식 현양 활동이 지방에 끼친 영향의 상관성 연구가 전무했었는데, 본고가 강우지역의 세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 시기 강우지역에는 수많은 학자가 활동하였고, 그들은 여전히 명나라 毅宗의 ‘崇禎’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편적인 현상만으로도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라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전도 치욕 이후 형성된 북벌론 또는 대명의리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당대의 시대논리로 변모해 왔듯, 이 시기 강우지식인들도 자기 시대의 논리에 맞게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예컨대 남평문씨 가문의 大明花 현양과 朴震英 추숭으로 인해 강우지역에 일었던 존주의식 현창 활동은, 오랜 기간 소외되어 있던 지방사족이 顯祖를 선양하고 가문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절박함에 의해 도출된 그들 나름의 명분이었다. 鄭蘊과 朴明榑를 통해 某里나 弄月亭에서 갈구했던 지식인의 自意識 또한 그 시대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었다. 한말에 몰아닥친 외세의 침략과 일제의 야욕, 이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전통유학의 봉건적 질서 등 내우외환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이 시기에 정온 등의 춘추대의 정신이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강우지역의 존주의식 현창 양상은 강우학자들이 당대 지식인으로서 자기 시대를 헤쳐 나가는 최선의 선택이자 기회였던 것이다.
        388.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고분군 일대에서 발견된 5세기∼6세기 초반 무렵의 삼국시대 토기를 대상으로 암석학적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광물학적 특징과 소성온도 및 환경을 추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광물학적 동정과 미세조직관찰, 화학성분 분석 등의 다양한 기법을 적용하여 암석광물학적 분석을 시행하였다. 편광현미경 하에서 토기 시료들을 관찰한 결과 석영, 장석류가 주구성 광물이었으며, 그 외에도 규장질 화산암(felsic volcanics), 비짐(temper), 저급점토에 주로 함유되는 불투명광물 등이 관찰되었다. XRD와 FTIR을 통해 현미경으로 볼 수 없었던 멀라이트, 적철석, 스피넬 등이 관찰되었다. 조사된 토기시편에서 보이는 흐름선과 색이 다른 기질이 혼재는 두 가지 이상의 점토를 사용하였거나 반죽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소성온도가 1,200-1,300℃로 제작된 토기에서 관찰되는 일반적인 석기의 특징은 보이지 않으나 다소의 기공이 존재하고 석영을 비롯한 특정 광물들의 결정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소성온도는 1,000℃ 정도에서 소성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고온광물인 멀라이트가 토기의 내부보다는 외곽부나 균열 부근에서 주로 관찰되며 토기 내외부의 산화정도가 다른 것은 균질한 소성환경이 조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시료에서 규장질 화산암편이 관찰되고 일부 시료에서 크리스토발라이트가 관찰되는데, 크리스토발라이트의 형성온도가 일반적으로 1,470℃ 이상임을 감안하면 소성 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원래의 태토 내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389.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세기 중국개신교의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는 사실 그 제국주의적인 선교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서방선교사들은 중국종교를 이교문화로 규정하고 중국인을 개화시켜야할 선교적 대상으로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중국문화의 강렬한 반기독교적 정서를 체감하면서 선교사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다시금 중국종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이해는 중국인의 종교정서 등을 발견하게 했고 보다 복음이 중국문화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신도는 자신의 고유한 토대문화 위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려고 노력하면서 좀더 적극적인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를 개진시켜 나갔다. 우리는 19세기 중국개신교의 노력을 통해 오늘날 단편적인 자신의 이해를 넘어 복음전도를 위해 폭넓은 자신의 이해의 지평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390.
        2014.03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MRT는 정밀한 입체조형 방사선량 분포를 얻을 수 있어서 종양의 모양에 맞추어 방사선량을 집중함으로써 종양에 들어가는 총방사선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에 따라 적절한 증례에서는 국소제어율과 완치율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표적에 대한 차별화된 방사선량을 분포시킬 수 있어서 종양부위를 포함 하면서도 동시에 종양 주위의 중요한 정상 장기를 보호 할 수 있으므로 국소 부작용을 감소시켜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IMRT는 일반적인 방사선치료보다 더 많은 방향에서 치료하고, MLC를 조절하여 세기를 조절한다. 치료할 부위는 MLC를 열고 보호해야 할 부위는 MLC를 닫고, 점진적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선형가속기에서 사용되는 모니터단위(monitor unit, MU)는 일반적인 방사선치료보다 3-10배 많게 되므로 치료시간이 길게 된다. 그러므로 환자가 치료시간 동안 자세고정이 잘 되어야 IMRT를 시행할 수 있다. 또한 정상조직의 선량분포는 고선량을 받는 용적은 감소하고, 저선량을 받는 용적은 증가하게 된다. IMRT를 합리적으로 이용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방사선치료에 의한 부작용의 감소이다. IMRT의 이용은 두경부암과 전체 유방을 치료해야 하는 유방암에서 근거수준1의 임상적 증거가 있어서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전립선암 등 다른 부위의 종양들에서도 여러 수준의 임상적인 증거들이 있다. 생존율의 향상, 종양제 어율의 증가, 그 외 치료 유효성의 지표들에 대한 결과는 전반적으로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아서 앞으로 더욱 임상 연구가 필요하다.
        391.
        2014.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8세기 유럽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패러 다임이 등장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왕국을 건설하고 프리드리히 1세 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베를린 궁정의 음악은 각 왕들의 정치관과 국가의 경제, 그리고 성장기에 경험한 심리적 영향으로 다양하게 변화 발전했다. 그중 음악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의 통치아래 프로이센은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문화가 크 게 발달하였다. 음악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국제정치가 안정되고, 국가 경제가 부흥해야 함을 프로이센의 음악후원의 변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392.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세기 해금 정책으로 인해 무인도로 된 울릉도·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침입해 어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의 연구를 바탕으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다케시마(竹島)=울릉도 도해면허처럼 마쓰시마(松島)=독도 도해면허도 발행하고 마쓰시마 를 경영했기 때문에 일본은 마쓰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17세기에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이 처럼 17세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검증한 논문은 거의 볼 수 없다. 본고는 이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이나 도해면허를 분석 하고 독도 영유권 문제를 생각한다. 마쓰시마에서 어업이 시작된 것은 다케시마(竹島)=울릉도에서의 어업이 시작된 지 약 30년 후다. 이렇게 뒤늦게 마쓰시마 어업이 시작된 것은 많은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마쓰시마에는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갈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마쓰시마에는 장작이나 식수가 거의 없으니 생활하기가 어려운데다가 강치에서 기름을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시마에서의 강치 기름의 수확이 급감했기 때문에 어민들은 부득이 1650년대에 마쓰시마에서 강치 잡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강치 사냥은 악조건 때문에 “조금씩”밖에 못했다. 따라서 다케시마 도해가 없으면 마쓰시마 어업은 경제적으로 도 성립되지 않다. 가와카미 겐조는 어민들은 다케시마로 도해하는 도중에 먼저 마쓰시마에 들러서 어업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도해 기록을 분석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케시마로 왕복하는 도중에서의 마쓰시마 어업은 없었다. 마쓰시마 어업은 다케시마를 기지로 삼아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마쓰시마는 “다케시마 근처의 작은 섬” 등 다케시마의 속도로 인식됐다. 종래 다케시마로의 도해는 200석짜리의 큰 배 2척으로 갔는데, 마쓰시마에서 어업을 하려면 배 2척 중 1척을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져올 수 있는 어획물의 적재량이 감소한다. 이 때문에 당초 오야(大谷)는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제의한 무라카와(村川)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라카와만이 마쓰시마 어업을 시작한다 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무라카와는 오야·무라카와 양가를 돌보던 아베 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를 움직여 오야를 설득했다. 드디어 오야도 수입의 감소를 각오해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사정을 아베는 그때까지 전복을 헌상하고 있었던 로쥬(老中)에 알리고 양해를 얻었다. 이것이 “로쥬의 내의(內意)”인데,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이를 바탕으로 마쓰시마 도해면허가 발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가 주장하듯이 “로쥬의 내의”는 결코 도해면허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민들 사이의 사업을 조정하는 것이며, 마쓰시마 도해면허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오야·무라카와 양가의 어업은 조선인도 울릉도에 출어하게 되자 전기를 맞았다. 다케시 마(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조·일 간에 울릉도쟁계(다케시마 일건)가 시작됐다. 논쟁이 평행선이 됐다는 쓰시마번의 보고를 받자 에도막부는 다케시마·마쓰시마의 조사를 시작했 다. 그 결과 다케시마는 조선 영토이며, 다케시마 근처에 있는 마쓰시마는 돗토리번에도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다는 사실을 에도막부는 알게 됐다. 따라서 1696년에 에도 막부가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내렸을 때에 일본 땅이 아닌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됐던 것이다. 그 후는 약 200년 동안 마쓰시마에서의 일본인 어업은 기록에 없으며 마쓰시마에 상륙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17세기에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 은 성립될 수 없다.
        393.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analyzed M. Kagel(1931‐2008)’s Anagrama(1957‐58) and G. Ligeti(1923‐2006)’s Aventures(1962) to present the diversity in the creation of vocal music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20th Century. The point for the analysis of music was set through the analysis of vocal music by Kagel and Ligeti when the concept of ‘sound composition’, ‘language composition’, ‘vocal composition’ and others apply, and through the pieces of the composers who lived in the same era when it comes to the changes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20th Century. Among Kagel’s numerous vocal music pieces, there were not many pieces that placed the ‘emphasis of the Phonetic aspect’ at the front without text. At best, they are Phonophonie, Hallelujah für Stimmen and Die Mutation. Ligeti’s compositional tendency in vocal music is slightly different from that of Kagel’s. Ligeti’s Aventures and Nouvelles Aventures, pieces based on the synthesis of the voice originated in actual diverse languages are the vocal music pieces of the 1960s that realize experimental thinking towards ‘stage piece’ from very early on. After this piece, Ligeti did not continue on this tendency. Along with Clocks and Clouds that uses the consonants and voiced vowels, 13 each, that follow the international phonetics’ phonetic notation and the mix of these instead of the text conform with Syntactics, and other pieces that used text such as Requiem, Lux aeterna, Drei Phantasien nach Friedrich Hölderlin, Nonsense Madrigals confirm this. Analysis of Kagel’s Anagrama shows that the composer did not set music to text. Instead, it was shown clearly that it was handled musically regardless of the contents of the text. Besides the conclusion that non‐semantics was realized or that another meaning was formed compared to the Latin phrase that serves as the basis of this piece, it includes the contents that could lead to yet another conclusion. Not only was basic Latin text used as Phonetic material, but it is possible to verify the conclusion that it embraces the meaning of linking to drama through analysis. Analysis of the Aventures composed of the Phonetic text that Ligeti himself explained in person according to E. Dieth and H. F. Wendt’s pronunciation presents diverse methods that can be defined as ‘vocal composition’ and verified the matters concerning ‘toning of the voice’(tone melody). Moreover, ‘musical gestures’ (crying, laughing, whispering, yelling, sigh and others) presented directly on the music note can be re‐appreciated with the opera‐like parody or caricature expression.
        394.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92년 정조는『奎章全韻』을 편찬한 후 각신 및 초계문신, 검서관을 포함한 9명의 신하들에게 문자에 관한 策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文字策文 9편이 제출되었으며 그 중 현재 남아있는 글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윤행임, 서영보의 대책이다. 문자책문의 집필배경이 된『규장전운』의 편집 방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음과 조선음을 구별하여 각각의 규범음을 밝히는 것, 둘째, 俗音을 제거하고 압운 체계를 개정해 전아한 문사 창작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 셋째, 古音의 확정을 통해 古經을 읽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는 점이다. 6편의 문자책문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문제의식들은 위 세 가지 목적에서 배태된 것으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도출된 상이한 견해들이 이 시기 문자학의 논점들을 형성하고 있다.첫 번째 논점은 글자와 소리 혹은 말의 관계 문제이다. 박제가는 문자에서 聲의 요소가 중요함을 일관되게 서술하였으나 중국어 사용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행임은 글자와 소리가 일치하는 중국어를 사용하여 중화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유득공은 천하만국에 각자의 글자가 있다는 논의를 통해 기존의 華夷觀을 뛰어넘는 사고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논점은 문자학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이서구는 이 시기 六經의 이해를 위해 문자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와 달리 이덕무는 실제적인 名物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에 문자학의 효용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세 번째 논점은 字形의 변천과 異體字 문제이다. 유득공과 이서구, 이덕무는 모두 俗字, 訛字, 조선식 한자 등의 사용을 일절 금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덕무는 시대에 따른 자형의 변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하게 피력하였는데, 이와 달리 서영보는 자형의 변천을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인지 서영보는 이체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국가 문서에 글자를 잘못 쓰는 일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고만 하였다.이상에서 분석한 문제의식들은 18세기 후반의 전반적인 문자학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각각의 의의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또한 이 논점들이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는지, 나아가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문자책문을 작성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학파나 가문, 당파 등에 따라 언어문자관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 역시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396.
        2013.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uf der Weltmissionskonferenz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in Edinburgh 1910 forderten die 17 nicht-westlichen Vertreter ein herzliches Zusammenwirken zwischen westlichen Kirchen und nicht-westlichen Kirchen. Auf der Vollversammlung des IMR in Jerusalem 1928 forderten die Delegierten aus nicht-westlichen Kirchen die Anerkennung ihrer kirchlichen Selbständigkeit. Nicht-westliche Kirchen wünschten eine nationale vereinigte Kirche im Zusammenhang mit ihrem erwachsenden Nationalgefühl. Auf der Vollversammlung des IMR in Tambaram 1938 waren die Delegierten aus nicht-westlichen Kirchen in der Mehrheit. Aber dazu wurde im Bericht, der John Merle Davies vorgelegt hatte, ernüchternde festgestellt, dass nichtwestlichen Kirchen in einer schlechten finanziellen Lage waren, und dass ihre Strukturen immer noch schwach waren. Auf der Vollversammlung des IMR in Whitby 1947 wurde die Partnerschaft zwischen westlichen Kirchen und nicht-westlichen Kirchen viel stärker verwirklichen. Die Weltkonferenz für Praktisches Christentum (The Universal Christian Conference on Life and Work) veränderte nicht ihren westlich geprägten Charakter auf der Vollversammlung in Stockholm 1925 sowie auf der Vollversammlung in Oxford 1937. Auch die Weltkonferenz für Glauben und Kirchenverfassung (The 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 veränderte nicht ihren westlich geprägten Charakter auf der Vollversammlung in Lausanne 1927 sowie auf der Vollversammlung in Edinburgh 1937. Deshalb hatten die Weltkonferenz für Praktisches Christentums und die Weltkonferenz für Glauben und Kirchenverfassung keine guten Beziehungen zu nichtwestlichen Kirchen. Darüber hinaus dominierten westliche Kirchen den Gründungsprozess des Ökumenischen Rates der Kirchen (ÖRK). Auf der Vollversammlung in Amsterdam 1948 gab der ÖRK der Lage der nicht-westlichen Kirchen keine Beachtung. Bei den ökumenischen Bewegungen in der ersten Hälfte des 20. Jahrhunderts. will westliche Kirchen keine echte ökumenische Annäherung an nicht-westlichen Kirchen.
        400.
        2013.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8세기부터 미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유년모티브가 20세기 후반 피아 노 작품 헬무트 락헨만의 ≪어린이 유희≫에서는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되는지 연구한다. 20 세기 후반 어린이는 기존 세기와 달리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되며, 특히 70년대 이후 부터 청소년문학 및 청소년 음악의 붐, 68혁명으로 인한 내면성의 미학, 신주관주의 등으로 유년모티브가 확산된다. 락헨만의 사회비판적 의식은 기존의 음악적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 고 새로운 청취습관과 음향을 중요시 여기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음악관은 ≪어린이 유희≫ 속의 유년모티브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유년세계의 모습들이 다양한 음향과 잔향을 통 해 묘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락헨만은 그 유년의 모습들을 피아노가 생산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로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