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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1.
        2014.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8세기 유럽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패러 다임이 등장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왕국을 건설하고 프리드리히 1세 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베를린 궁정의 음악은 각 왕들의 정치관과 국가의 경제, 그리고 성장기에 경험한 심리적 영향으로 다양하게 변화 발전했다. 그중 음악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의 통치아래 프로이센은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문화가 크 게 발달하였다. 음악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국제정치가 안정되고, 국가 경제가 부흥해야 함을 프로이센의 음악후원의 변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382.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세기 해금 정책으로 인해 무인도로 된 울릉도·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침입해 어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의 연구를 바탕으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다케시마(竹島)=울릉도 도해면허처럼 마쓰시마(松島)=독도 도해면허도 발행하고 마쓰시마 를 경영했기 때문에 일본은 마쓰시마에 대한 영유권을 17세기에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이 처럼 17세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검증한 논문은 거의 볼 수 없다. 본고는 이런 일본인의 마쓰시마 어업이나 도해면허를 분석 하고 독도 영유권 문제를 생각한다. 마쓰시마에서 어업이 시작된 것은 다케시마(竹島)=울릉도에서의 어업이 시작된 지 약 30년 후다. 이렇게 뒤늦게 마쓰시마 어업이 시작된 것은 많은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마쓰시마에는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갈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마쓰시마에는 장작이나 식수가 거의 없으니 생활하기가 어려운데다가 강치에서 기름을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시마에서의 강치 기름의 수확이 급감했기 때문에 어민들은 부득이 1650년대에 마쓰시마에서 강치 잡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강치 사냥은 악조건 때문에 “조금씩”밖에 못했다. 따라서 다케시마 도해가 없으면 마쓰시마 어업은 경제적으로 도 성립되지 않다. 가와카미 겐조는 어민들은 다케시마로 도해하는 도중에 먼저 마쓰시마에 들러서 어업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도해 기록을 분석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케시마로 왕복하는 도중에서의 마쓰시마 어업은 없었다. 마쓰시마 어업은 다케시마를 기지로 삼아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마쓰시마는 “다케시마 근처의 작은 섬” 등 다케시마의 속도로 인식됐다. 종래 다케시마로의 도해는 200석짜리의 큰 배 2척으로 갔는데, 마쓰시마에서 어업을 하려면 배 2척 중 1척을 80석짜리 정도의 작은 배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져올 수 있는 어획물의 적재량이 감소한다. 이 때문에 당초 오야(大谷)는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제의한 무라카와(村川)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라카와만이 마쓰시마 어업을 시작한다 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무라카와는 오야·무라카와 양가를 돌보던 아베 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를 움직여 오야를 설득했다. 드디어 오야도 수입의 감소를 각오해 마쓰시마에서의 어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사정을 아베는 그때까지 전복을 헌상하고 있었던 로쥬(老中)에 알리고 양해를 얻었다. 이것이 “로쥬의 내의(內意)”인데,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이를 바탕으로 마쓰시마 도해면허가 발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가 주장하듯이 “로쥬의 내의”는 결코 도해면허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민들 사이의 사업을 조정하는 것이며, 마쓰시마 도해면허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오야·무라카와 양가의 어업은 조선인도 울릉도에 출어하게 되자 전기를 맞았다. 다케시 마(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조·일 간에 울릉도쟁계(다케시마 일건)가 시작됐다. 논쟁이 평행선이 됐다는 쓰시마번의 보고를 받자 에도막부는 다케시마·마쓰시마의 조사를 시작했 다. 그 결과 다케시마는 조선 영토이며, 다케시마 근처에 있는 마쓰시마는 돗토리번에도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다는 사실을 에도막부는 알게 됐다. 따라서 1696년에 에도 막부가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내렸을 때에 일본 땅이 아닌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됐던 것이다. 그 후는 약 200년 동안 마쓰시마에서의 일본인 어업은 기록에 없으며 마쓰시마에 상륙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17세기에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 은 성립될 수 없다.
        383.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92년 정조는『奎章全韻』을 편찬한 후 각신 및 초계문신, 검서관을 포함한 9명의 신하들에게 문자에 관한 策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文字策文 9편이 제출되었으며 그 중 현재 남아있는 글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윤행임, 서영보의 대책이다. 문자책문의 집필배경이 된『규장전운』의 편집 방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음과 조선음을 구별하여 각각의 규범음을 밝히는 것, 둘째, 俗音을 제거하고 압운 체계를 개정해 전아한 문사 창작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 셋째, 古音의 확정을 통해 古經을 읽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는 점이다. 6편의 문자책문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문제의식들은 위 세 가지 목적에서 배태된 것으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도출된 상이한 견해들이 이 시기 문자학의 논점들을 형성하고 있다.첫 번째 논점은 글자와 소리 혹은 말의 관계 문제이다. 박제가는 문자에서 聲의 요소가 중요함을 일관되게 서술하였으나 중국어 사용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행임은 글자와 소리가 일치하는 중국어를 사용하여 중화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유득공은 천하만국에 각자의 글자가 있다는 논의를 통해 기존의 華夷觀을 뛰어넘는 사고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논점은 문자학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이서구는 이 시기 六經의 이해를 위해 문자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와 달리 이덕무는 실제적인 名物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에 문자학의 효용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세 번째 논점은 字形의 변천과 異體字 문제이다. 유득공과 이서구, 이덕무는 모두 俗字, 訛字, 조선식 한자 등의 사용을 일절 금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덕무는 시대에 따른 자형의 변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하게 피력하였는데, 이와 달리 서영보는 자형의 변천을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인지 서영보는 이체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국가 문서에 글자를 잘못 쓰는 일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고만 하였다.이상에서 분석한 문제의식들은 18세기 후반의 전반적인 문자학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각각의 의의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또한 이 논점들이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는지, 나아가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문자책문을 작성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학파나 가문, 당파 등에 따라 언어문자관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 역시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385.
        2013.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uf der Weltmissionskonferenz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in Edinburgh 1910 forderten die 17 nicht-westlichen Vertreter ein herzliches Zusammenwirken zwischen westlichen Kirchen und nicht-westlichen Kirchen. Auf der Vollversammlung des IMR in Jerusalem 1928 forderten die Delegierten aus nicht-westlichen Kirchen die Anerkennung ihrer kirchlichen Selbständigkeit. Nicht-westliche Kirchen wünschten eine nationale vereinigte Kirche im Zusammenhang mit ihrem erwachsenden Nationalgefühl. Auf der Vollversammlung des IMR in Tambaram 1938 waren die Delegierten aus nicht-westlichen Kirchen in der Mehrheit. Aber dazu wurde im Bericht, der John Merle Davies vorgelegt hatte, ernüchternde festgestellt, dass nichtwestlichen Kirchen in einer schlechten finanziellen Lage waren, und dass ihre Strukturen immer noch schwach waren. Auf der Vollversammlung des IMR in Whitby 1947 wurde die Partnerschaft zwischen westlichen Kirchen und nicht-westlichen Kirchen viel stärker verwirklichen. Die Weltkonferenz für Praktisches Christentum (The Universal Christian Conference on Life and Work) veränderte nicht ihren westlich geprägten Charakter auf der Vollversammlung in Stockholm 1925 sowie auf der Vollversammlung in Oxford 1937. Auch die Weltkonferenz für Glauben und Kirchenverfassung (The 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 veränderte nicht ihren westlich geprägten Charakter auf der Vollversammlung in Lausanne 1927 sowie auf der Vollversammlung in Edinburgh 1937. Deshalb hatten die Weltkonferenz für Praktisches Christentums und die Weltkonferenz für Glauben und Kirchenverfassung keine guten Beziehungen zu nichtwestlichen Kirchen. Darüber hinaus dominierten westliche Kirchen den Gründungsprozess des Ökumenischen Rates der Kirchen (ÖRK). Auf der Vollversammlung in Amsterdam 1948 gab der ÖRK der Lage der nicht-westlichen Kirchen keine Beachtung. Bei den ökumenischen Bewegungen in der ersten Hälfte des 20. Jahrhunderts. will westliche Kirchen keine echte ökumenische Annäherung an nicht-westlichen Kirchen.
        387.
        2013.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8세기부터 미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유년모티브가 20세기 후반 피아 노 작품 헬무트 락헨만의 ≪어린이 유희≫에서는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되는지 연구한다. 20 세기 후반 어린이는 기존 세기와 달리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되며, 특히 70년대 이후 부터 청소년문학 및 청소년 음악의 붐, 68혁명으로 인한 내면성의 미학, 신주관주의 등으로 유년모티브가 확산된다. 락헨만의 사회비판적 의식은 기존의 음악적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 고 새로운 청취습관과 음향을 중요시 여기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음악관은 ≪어린이 유희≫ 속의 유년모티브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유년세계의 모습들이 다양한 음향과 잔향을 통 해 묘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락헨만은 그 유년의 모습들을 피아노가 생산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로 표현하고 있다.
        388.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댕디(Vincent d’Indy, 1851-1931)의 서곡3부작 《발렌슈타인》(Wallenstein)에 나타난 ‘표 제적 연주회용 서곡’의 장르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오페라 의 극적 내러티브를 악곡구성에 반영하던 19세기 오페라 서곡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이 작 품은 일종의 ‘음악적 드라마’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표제적 연주회용 서곡’ 작곡가들은 ‘서 곡’이라는 장르 명칭과 함께 베토벤과 바그너 등의 ‘표제적 서곡’의 전통을 따라 리스트가 교 향시에서 점차 소멸시킨 것, 다시 말해 반복의 원리에 입각한 소나타악장 형식 안에서 표제 를 다양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서곡들에 나타난 표제와 악곡구성 간의 관계는 19세기 베토벤에 의해 시작되고 바그너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에 의 해 발전했던 전통적인 ‘표제적 서곡’의 역사 안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389.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life and works of Sébastien Castellion, a French humanist and reformer of the 16th century. The reason why I am concerned about Castellion is that his idea of tolerance is very suggestive to us who live in religious plural society. In order to fulfill this goal I first introduce a dramatic but tragic life of Castellion briefly, and then examine his central idea through his works. In particular, I will focus my interest on the tolerance issue of the 16th century that broke out between Calvin and Castellion concerning the death of Michael Servetus in 1553. In this paper, I look into Castellion’s several works dealing with tolerance problem: I select five primary works to reveal Castellion’s tolerance thought: “Preface to the Latin Bible, Dedicated to Edward VI,” “Concerning Heretics,” “Reply to Calvin’s Book,” “Counsel to France,” and “Concerning Doubt and Belief.” Castellion was a prophet of his time, a rationalist before Rationalism, and an advocate of religious tolerance in an age of intolerance. He was certainly ahead of his time. I hope this study will provide a momentum for sincere and academic concern about Castellion and his tolerance thought.
        390.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세기는 조성의 해체와 함께 화성보다는 대위적 사고가 우위를 갖게 된 시대이다. 본 논 문은 20세기 작곡가들이 대위적 짜임새를 형성하기 위해 구사하고 있는 다양한 방식들 가운 데 대표적 한 가지 예인 비조성 푸가를 통해 현대 비조성음악에서의 대위적 텍스처를 고찰한 다. 이를 위해 ‘대위’의 음악사적 개념과 대위적 음악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20세기 작품에서 의 대위적 양상을 수직적 음정의 처리에 대한 ‘공통관습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논의한다. 이 어서 ‘푸가’의 음악사적 개념과 조적 관계성이 부재하는 현대 비조성푸가의 특징과 한계점들 을 고찰함으로써 단순 모방기법과 구별되는 푸가만의 특징이 비조성푸가에 존재하는가에 대 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한다. 아울러 20세기 비조성푸가의 유형들을 세 가지로 분류해, 전통 적 푸가의 외형적 특성을 유지하나 조적 관계성을 실제로 갖지 않는 푸가로부터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된 실험적 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 예를 통해, 비조성푸가의 한계점과 이에 대한 작곡가들의 대안모색 방식들을 살펴본다.
        391.
        2012.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392.
        2011.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음악사 서술에서 베토벤에 대한 포괄적 조명은 20세기 초 이후에 일반화 된다. 본 연구는 20세기 초 대표적 음악사 문헌인 리만의 『베토벤 이후의 음악 역사 (1800-1900)』와 해도우 의 『비엔나 시대』에서 베토벤을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각 문헌에 나 타난 서술 관점 및 방식의 차이점을 정리해 본 결과, 전반적으로 리만의 방식은 세기별 구분 에 따른 대가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 형태를 보이며, 해도우의 것은 양식적 공통성에 따른 악 파 중심의 해석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베토벤은 리만에게서 19세기를 이끈 새 시대의 개척 자로 조명되며, 해도우에게서 비엔나 악파의 마지막 대가로 채색된다. 이 두 문헌은 키제베 터가 선보인 음악 발달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세이어 및 그로브의 연구 물을 참조한 해도우의 문헌이 베토벤 음악에 대한 가치 판단에 보다 적극적이다.
        393.
        2011.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8세기음악가들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가들과 달리 궁정이나 시 의회에 속한 철저한 직 업 음악가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18세기의 음악후원은 19세기 음악후원의 형태나 개념과 는 달랐다. 19세기 음악후원의 모습도 다양한 형태지만, 기본적으로 예술가를 지원함으로서 ‘예술작품’이 창작되는 것을 후원하는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18세기의 음악 후원의 모습은 왕이나 영주가 문화 활동을 즐기기 위해 직업 음악가나 예술가들을 궁정에 고용하는 형태였 다. 그 과정에서 음악 행위가 이루어지고 작품이 창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남부 독 일 궁정의 음악들은 매우 실용적이면서 기능음악의 성격을 띠고 있다. 궁정의 음악후원도 지 금 사용하는 후원의 개념보다는 고용에 대한 ‘보수’ ‘연봉’ 그리고 ‘보너스’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하임 궁정과 같이 정치, 경제적인 안정 속에서 영주가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인식하면 음악 문화가 크게 번성하고 음악사에 뚜렷이 기록되었다. 반면에 주변 정치적 상황 이 불안정하고 국내 경제가 불안할 때는 문화 예술이 쇠퇴하는 경우를 슈투트가르트와 뮌헨 궁정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18세기의 궁정의 문화와 음악에 대한 후원의 개념은 현대의 기업들이 예술분야와 공익사 업을 지원하는 메세나 개념이 아니라 원래 로마시대 문화예술을 지원하던 로마제국의 정치 가 마에케나스의 정책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기업 이윤의 사회적 환원 의미에서 예술분야를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영주가 자신의 궁정에서 음악을 즐기고 활용하기 위해 예술가 들을 고용하는 의미이다. 예술가와 음악가들의 고용이 안정되고 지원이 확대될수록 보다 뛰 어나고 가치 있는 예술 창작이 이루어짐을 18세기 남부 독일의 궁정음악을 통해 알 수 있다.
        394.
        2011.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우리 세대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이어진 혼란기에 6․25전쟁을 치루는 등 어려운 기간을 살아 왔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때였다. 그런 때 나는 생물학자를 꿈꾸었다. 다행히 서울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하여 생소한 생물학을 배웠다. 세포학, 유전학 혹은 생리학을 배우면서 더욱 더 생물학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새로 나온 항생제인 스트렙토마이신이 생쥐 백혈구 수 혹은 백혈구의 운동능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한 실험결과를 정리한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56년이다. 그 때로는 매우 첨단적 과제였다. 그러나 실험실 연구는 더 이상지속하기 어려워, 종이와 연필로 가능한 생물학을 선택했다. 그것이 우리 한국인의 인구문제, 유전형질 그리고 출생성비연구였다. 차차 실험실 사정이 나아짐에 따라 실험실연구로 복귀하였다. 출생성비연구 과정에서 성분화 혹은 성결정기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4년 미국인구협회 의생물학부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설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2년간 보냈다. 이 연구소는 기관배양연구로 독보적인 Biggers 박사가 연구소장이고, Brinster 박사, Whittingham 박사 등이 배양 중인 생쥐배아의 신진대사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배양 중인 생쥐난소로부터 배란을 유도하는 실험으로 소일하였다. 배양중인 생쥐난소로부터 눈이 부실 정도의 관택을 내며 배란되어 나오는 난자를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 귀국할 때 록페재단으로 부터 약 1만5천 달러의 연구비를 얻었고, 이것으로 실험실에 기관배양시설을 꾸몄다. 시설 완비까지는 1 년여가 걸렸다. 그 사이 생쥐의 안전방을 이용한 난자의 성숙, 배아의 발생에 관한 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생쥐 안전방이 배양액과 같은 성분이어서 배아발생연구에 매우 적절함을 알았다. 기관배양시설이 완비된 뒤 이를 이용하여 난자성숙 기작, 배아발생 및 분화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1971년부터 2년간 WHO의 연구비로 두 번째 유학을 떠났다. 처음 4개월은 죤스 홉킨스 대학에서, 다음 1년 2개월은 하버드 의과대학의 인간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그리고 나머지 6개월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생리학연구실에서 보냈다. 하버드에 있는 동안 cAMP가 배양중인 난자의 성숙을 가역적으로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는 원거리 수송이 가능한 난자 혹은 배아의 미세관배양법을 창안하였고, 실제로 발생 중인 배아를 장거리 이송하는데 성공하였다. 나의 연구활동은 이 때가 고비가 된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옮긴 뒤 자연과학대학 학장을 맡고, 그 뒤 부총장, 끝내는 총장의 직책에 이른다. 대학의 행정직에 있는 동안 연구실은 그대로 유지되며, 대학원생들이 꾸준히 실험실을 지켰다. 그런 사이 실험결과도 다수 발표할 수 있었다. 교실의 연구 주제도 점차 호르몬과 연관된 분야로 옮겨졌다. 학장 재직동안 AID차관사업을 주관하며 기초과학연구 질을 향상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1982년에 유전공학학술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우리나라 유전공학 및 생명공학 육성에 공헌하였으며, 그 뒤 바이오산업협회 회장으로서 우리나라 바이오산업 발전에 힘썼다. 199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제백신연구소 사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최초 유치단계 때 위원장으로, 유치 된 후에는 연구소 이사로, 혹은 소장특별고문의 직책으로 연구소 운영에 직접 관여했고, 그 뒤 한국후원회 이사장으로 그리고 최근 후원회 상임고문의 직책을 맡고 있다. 그 밖에 대통령과학기술 자문회 위원장으로, 과총회장으로, 그리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등으로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의 반생은 발생생물학 분야의 연구에 바쳤고, 나머지 반생은 우리나라 과학 특히 생물학 분야 발전을 위하여 봉사한 기간이다.
        395.
        2011.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7세기의 음악적 판타지에 관한 논의들과 ‘멜랑콜리’ 개념을 통해 광범위한 문 화적 맥락 안에서 음악 창작의 주제를 고찰하였다. 멜랑콜리란 전통적으로 영감이나 천재성 과 연관되어 왔고 음악에 있어서는 류트 악기나 오르페우스 신화와 함께 언급되곤 하였다. 17세기의 주요 음악 문헌들은 경험주의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여 감정의 표현과 소통, 이를 위한 규칙으로부터의 일탈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되는 과정 속에서 예술적 자유와 판타지 장 르에 관해 논하고 있다. 이 시기 멜랑콜리는 이러한 예술적 자유를 조명하는 하나의 구체적 인 메타포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문헌상 발견되는 판타지의 정의들, 멜랑콜리의 다양한 개념 들과 함께 판타지 장르로 분류되는 작품들인 프렐루드, 토카타,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의 멜 랑콜리를 주제로 한 플랭트를 중심으로 17세기의 멜랑콜리 미학을 살펴보았다. 투고일자:
        396.
        2011.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에서는 관측 자료에 근거하여 20세기에 일어난 전지구적인 Köppen 기후구 면적의 변화와 사막화의 특징을 조사하였다. 5개 대기후구 면적의 변화를 분석한 결과, 대체로 따뜻한 기후구(특히 A 기후구)의 면적은 증가한 반면에 찬 기후구(특히 E 기후구)의 면적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C/D 기후구 면적의 경우 1960대 이후부터 비교적 뚜렷한 증/감을 나타내었다. 전지구적 기온 상승의 추세 패턴을 감안할 때, 이러한 기후구의 변화는 지구 온난화의 직접적인 결과로 사료된다. 건조 기후구(B 기후구)의 면적은 1970년대 이후부터 급속한 증가를 나타내었는데, 1960년대 대비 1990년대에 그 면적비가 약 2% 정도 늘었다. 이 중에서 사막(BW) 기후구의 경우, 20세기 말기(1991~2000년)의 면적이 1961~1990년 대비 1,320×103㎢정도 확장되었는데, 이것은 대부분 스텝(BS) 기후구가 더욱 메말라 일어난 것으로 밝혀져 사막화의 특징을 보였다. 또한 사막화의 지역적 특징을 살피기 위해 전 세계의 주요 사막 지역 다섯 곳을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북아프리카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1950년대 이후 가장 뚜렷하고 지속적인 사막화가 일어났음을 밝혔다. 사막화의 한 원인으로서 지구 온난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해들리 순환의 강도 변화를 조사하였다. 북반구 겨울철 해들리 순환의 강도는 지구 온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해들리 순환 강도의 증가와 이 기간 동안 급속히 진행된 전지구 아열대 사막의 확장은 서로 일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397.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은 南冥 曺植의 학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南冥學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圖說이다. 그런데 后山 許愈가 「神明 舍圖銘或問」을 지어 이것에 관한 해석 작업을 시도하기 이전까지 300년 동안 은 어느 누구도 그 내용과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后山은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어 南冥의 「神明舍圖銘」을 상세히 해석하고 그 것이 가지는 유학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神明舍圖銘」에 南冥의 心學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南冥의 「神明舍圖銘」에 대한 주해 작업을 경상우도 학자들의 공적 안건으로 발의함으로써, 南冥의 학문과 수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南冥學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神明舍圖銘或問」은 后山의 개인적 저술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慶 尙右道의 학자들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남명학을 조명하는 촉발점 이 되었으며, 그 작업에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398.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subject of this thesis is the history of the iconoclastic controversy that originated in the 8th century Byzantine church. Christian art flowered in the time of the Emperor Justinian and in the 8th century the iconoclastic controversy arose. The full-dress iconoclastic controversy started at the beginning of the 8th century, was dealt with by successive General Councils until the matter was solved when the 7th Nicene council of 787 approved the veneration of images. These became idolatry, threw church and society into chaos so that the Pope and the emporer and their supporters over the course of two centuries developed their own Christologies. At that time images were at the heart of the people(Minjung)’s faith. There is always a tendency for religious feelings to be transformed by images.This writer in concentrating on the 8th century controversy has reviewed its historical background, occasion and results and has attempted to deal with the question of images in relation to present day church worship. Idolatry through worship of symbols finds fulfillment in Eucharistic theology for that visualizes the presence o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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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