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42

        21.
        201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단일제국은 러시아 정교 교회 전통에 대한 패러디 위에 구축되어 있다. 단일제국은 2×2=4에 근거한 무류한 지식(신앙)에 근거해 만장일치의 선거(부활절)를 통해 은혜로운 분(여호와)에 의해 통치되며 보안요원(수호천사)들에 의해 수호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 단일제국는 I-330을 비롯한 불복종하는 파편화된 오만한 개인인 메피들, 즉 ‘영혼’이라는 병이 든 사람들(교활한 뱀과 악마, 반그리스도교도들)이 재판제(예배식, 종교재판), 수술, 가스종과 처형 기계로 진압되고, 자유, 그림자, 욕망, 웃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행복과 구원과 미소가 머무는 국가이다. 이 안에는 선악에 대한 선택의 짐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을 받은 순진무구하고 복종적인 D-503과 O-50과 같은 이들이(아담과 이브) ‘우리들’로 살아가며 석유식품(그리스도의 빵)과 교리강의기(율법), 시간 율법책(성상)으로 일상을 영위하는 지상낙원(기독교의 낙원이자 단일교회)인 것이다. 영원한 혁명을 꿈꾼 자먀찐은 엔트로피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역사의 발생을 지향하는 에네르기의 세계, 악마와 반그리스도교도의 편에 서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는 니체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7,000원
        23.
        2013.10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조선왕릉은 조선왕조(1392∼1910년) 500여년을 통하여 동일한 조형원리로 조성된 신의 정원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소통, 생산, 사상, 의식이 내재 표현되는 토지의 집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일정한 형식으로 공간을 계획하고 수목을 식재하여 세심하게 조영된 정원문화유산이다. 남양 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 독립국을 주장하던 고종의 의지로 만들어진 능으로 명나라 태조의 명효릉의 형식을 빌려 조선왕릉과 형태를 달리하고 있으며, 동시에 조선을 계승한 정통성을 보여주는 사상과 의궤 등은 대한제국 황제릉의 고유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 다. 식생경관으로 볼 때 홍유릉의 능침주변은 일반적인 왕릉 식생경관인 소나무림이 출현하고 있으나 제향공간의 향나 무와 전이공간의 연지, 스트로브잣나무, 독일가문비 등의 등장은 기존왕릉과는 확연히 다른 경관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황제릉의 식생구조가 가진 정통성과 근대성 을 파악하여 의의를 고찰하고 기존 조선왕릉과 황제릉인 홍유릉의 식생구조의 차이점 등을 파악하여 합리적인 관리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연구대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고종황 제와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 후의 유릉이 있는 홍유릉을 대상으로 하였다. 홍유릉은 사 적 제207호로 공간적 범위는 문화재 보호구역 1,211,273㎡ 중 담장으로 경계되어진 128,342㎡를 대상으로 하였다. 홍유릉의 식생구조 및 현황 파악을 위해 문화재 보호구역 내 담장이 둘러진 경내 주변으로 공간을 구분하여 현존식생 현황을 조사 분석하였다. 현존식생은 1/1,000 축척의 수치 지형도를 이용하여 교목층 수종의 식생상관(Vegetational physiognomy)을 기준으로 조사하였으며 식생이 분포하지 않은 지역은 토지이용유형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자생종 및 외래종 대경목의 현황파악을 위하여 수목의 식재위치와 수 고, 흉고직경을 측정하였으며 공간별로 독특한 경관을 형성 하는 경관우세수종에 대하여는 별도로 측정하고 위치를 파 악하였다. 역사경관림의 후계림 검토를 위하여 소나무 묘목 식재지의 위치와 정아유무를 조사하였으며, 식생구조의 현 상황 및 잠재식재 예측을 위하여 정량적인 방법인 상대우점 치를 이용하여 조사 분석하였으며, 수령 및 생장상태 조사 를 위하여 벌근목의 근원직경을 측정하였다. 홍유릉 위치는 서울 경복궁을 중심으로 20km 범위에 위 치하고 있어 조선왕릉 능원묘제를 따르고 있었다. 백두대간 에서 한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대성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두고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는 천마지맥을 통해 천마산을 중조산(中祖山), 백봉산(묘적산)을 근조산(近祖山)으로 하 여, 홍릉은 서쪽에서 뻗은 능선 허리 해발 70m 부근 북서방 향으로, 유릉은 홍릉 능침에서 좌측으로 뻗어나간 능선 300m 전방의 좌측 60m 부근 정서쪽 방향에 능침이 위치하 고 있다. 풍수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홍릉, 유릉은 맥이 동쪽 인 묘(卯)에서 입수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을 이루는 그 상부에 봉분이 을좌신향(乙坐辛向, 동에서 서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홍유릉 식재기록 및 연혁을 살펴보면 1970년에서 1980 년대에는 잣나무 식재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1990년에 조 경식재 기록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역사경관림을 위한 소나무 식재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1970년대 이전의 자료 는 사료를 통해 검토하였는데 1919년 조영 당시에는 우량 한 소나무림과 제향공간의 향나무 식재지가 나타나고 있으 며, 연륜 등의 검토를 통하여 스트로브잣나무 등 외래수종 도 1920년경에 식재되어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였다. 홍유릉의 식생구조를 분석하기 위하여 침전을 중심으로 봉분과 그 주변을 능침공간, 침전에서 홍살문을 지나 금천 교까지의 공간을 제향공간, 연지주변의 공간을 전이공간, 진입부분의 광장부분을 진입공간으로 구분하였다. 대부분 의 능침공간에는 소나무림이 40.9%로 우점하고 있으나 참 나무류와 낙엽활엽수, 잣나무 식재지 등으로 인해 역사경관 림을 훼손하고 있었으며, 제향공간에는 소나무와 향나무 식 재지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향나무의 수세가 열악하였고, 소나무림은 낙엽활엽수와 조경수 등으로 인해 역사경관림 에 지장을 받고 있었다. 전이공간에는 연지를 중심으로 오 리나무림이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스트로브잣나무와 독 일가문비 등이 우점하고 있었다. 식재종 분포를 보면 스트 로브잣나무, 향나무 등의 대경목이 70주였으며, 자생종 대 경목인 전나무 등의 흉고직경이 최대 67cm, 외래종 대경목 스트로브잣나무 등의 흉고직경이 최대 83cm로 분석되었으 며, 식재된 소나무 묘목은 능침공간에서 정아발아율 44.2%, 전이공간에서 82.8%로 소나무림의 후계림 양성을 위한 묘 목식재 관리방안 마련이 시급하였다. 식물군집구조는 모두 54개의 조사구를 조사하였고 홍유 릉 전체를 4개의 공간으로 구분하여 대표조사구를 선정하 였으며 그에 따른 상대우점치를 분석하였다. 능침공간의 경 우 소나무 우점공간이지만 낙엽활엽수와 참나무류의 세력 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고 잣나무 식재지와 느티나무순림 등이 분포하고 있어 관리방안 마련이 필요하였다. 제향공간 은 소나무 우점공간과 낙엽활엽수 우점공간이 함께 나타나 며 역사경관 관리가 요구되었으며, 전이공간은 오리나무림 이 우점한 가운데 스트로브잣나무, 독일가문비, 백송, 주엽 나무 등 흔하지 않은 식재 수목 등이 출현하였다. 진입공간 은 소나무 우점공간이나 조경수에 대한 이식 등이 검토 되 어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왕릉과 황제릉의 식생구조를 파악하여 비교 분석한 결과 둘 다 능침지역에는 소나무림, 저지대에는 오리나무림 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황제릉의 근본적인 입지가 조선 왕릉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황제릉의 특징으로는 전이공 간에 나타나는 스트로브잣나무, 독일가문비 등의 대경목 외 래수종과 재실 등의 건물마다 나타나는 대경목 향나무가 분포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왕릉에는 나타나지 않는 식생경 관으로 1920년대 시대적인 특징으로 인해 나타나는 황제릉 의 특성으로 검토 되었으며 전이공간의 외래수종에 대하여 는 우리나라 최초의 임업시험장으로 의의가 있었다 과거 사료를 통한 황제릉의 식생구조를 파악하고 비교분 석을 통해 관리방안을 도출하였다. 조선왕릉의 대부분 식생 관리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역사경관림 복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외래수종은 적극적인 제거를 통해 역사경관림 을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황제릉은 그 시대가 가진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외래 도입수종이 왕릉에 식재되어 지금은 홍유릉의 전이공간에 중점적인 경관을 제공하고 있어 비록 외래수종이긴 하나 원형식생 경관으로 파악하여 유지관리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관리의 기본방향은 원식생에서 이 질화된 수목제거 및 이식을 통해 원식생 경관으로 복원관리 하고 홍유릉의 특성에 맞는 소나무림과 외래수종이 공간별 로 잘 어우러지는 경관관리방안을 제시하였다. 홍유릉 내 적극적인 관리지역은 22,373㎡(17.5%)를 차 지하며 그 중 능침공간의 적극적 관리지역은 10,794㎡ (8.4%)로 인근 산림부분과 연계된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능침공간 전체 20.0%의 공간이 적극적인 관리지역으 로 나타나고 있어 소나무림의 유지관리를 위한 적극적인 복원이 필요하였다. 제향공간의 적극적 관리지역은 10,073 ㎡(7.9%)로 유릉 뒤편 산림 연접지에 집중되어 있었고 유릉 소나무림의 복원이 시급하였다. 선택적 관리지역은 11,622 ㎡(9.1%)를 차지하며 그 중 능침공간의 선택적 관리지역은 3,836㎡(3.0%)로 제향공간에서 연결되는 산림부분에 위치 하고 있으며 소나무림으로 단계별 복원 필요성을 제안하였 다.
        25.
        201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transition process of Korean architecture and urbanism from traditional state to modern state, by investigating the development of modern survey and the characteristics of survey drawings during the Great Han Empire (大韓帝國), the early modern Korea. The governmental efforts of the Great Han Empire to introduce a modern survey system named Gwangmu Land survey (光武量田事業) ended in failure. After the Russo-Japanese War (露日戰爭, 1904-1905), the Residency-General (統監府) held the hegemony of Korean Peninsula. It reintroduced a modern survey system for the survey of land and buildings all over the country and enforced the Land and Buildings Certification System (土地家屋證明制度). Since then, the land and buildings survey was propagated rapidly and the modern system for land use was gradually organized. With the progress of modern survey, the survey bureau of Cabinet (內閣) and Department of Royal Household (宮內府) created survey drawings that had some characteristics of colonialism. Takjibu (度支部) produced cadastral maps of major cities, with which the modern land system was developed. In addition, the Royal Property Bureau (帝室財産整理局) produced survey drawings of land and buildings owned by the Royal Household which were finally converted into modern facilities.
        5,800원
        27.
        200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analyses the railroad trunk line constructed in the Korea since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analysis consists of the following problematics. 1) The process of the decision of the railroad route 2) The relationship of the location of Eupchi and the stations By clarifying the abov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how the morphology of the city in Korea has been affected by the change in the relationship with Korea and Japan. The Empire of Japan has been reconnoitering the Korea since way before the formal contract for the railroad construction was signed. Therefore, the Empire of Japan had a very good understanding of the actual transportation system when it started the construction of the railroad. The railroad construction was used by the Empire of Japan to empower the control over the Korea. For this reason, the new railroad system was constructed as a different system from the former transportation system and the urban system was also affected. Also the relationship of the western powers and Japan around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defined the characteristic of the railway system as a pathway through the Korean peninsular to link Japan to the continent. Moreover, being apprehensive about the friction with the western, Japan located the railway stations to avoid the missionary land properties. This made it clear that the restraint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the western affected the urban special structure.
        4,900원
        28.
        200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우원 이호빈 목사(友園李浩彬, 1898-1998)의 독립운동과 토착적 신앙운동으로서 예수교회운동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인류보편사적이고 민족사적이고 한국교회사적인 맥락과 의미를 밝히려는 작업을 시도했다. 우원의 기독교 복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생명운동과 평화운동은 근대 제국주의와 서구적인 근대 기독교 패러다임을 넘어선 지평에서 주체적인 한국기독교인의 삶의 세계를 열어냈다. 이것을 선교사들의 ‘서도서기 패러다임’과 초기 한국기독교의 주체적인 입장인 ‘대도대기 패러다임’을 넘어선 ‘한도한기 패러다임’으로 파악했다.
        9,000원
        29.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월리엄 E. 그 루버는 이 논문에서 베케트가 그의 극작품들 속의 공간을 통제하기 위해 빛과 어둠을 활용한 방법에 대해서 분명히 밝혀 보려하고 있으며, 나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했다. 그루버는 베케르가 플롯, 등장인물. 언어 또는 지시적인 내용이 없어도 극을 쓸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설명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베케트의 희곡들이 점점 더 빛과 공간 에 대한 도표가 되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로부터 입센과 브레히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극작가들은 빛과 조명효과를 가끔씩 연극적 표현을 위한 장식 정도로 여기고 있으나, 베케트는 빛을 보다 야심차고도 애 매한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베케트가 희곡을 써온 30년 이상의 세월동안, 그의 극본은 그가 조명과 더불어 지각의 수단에 점점 더 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빛과 어둠, 흰색과 검정 색과 회색에 대한 언급은 그의 모든 작품(저작물) 속에서 너무 지나친게 아닌가 여겨질 정 도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많은 베케트 작품이 회색 단색 화법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베케트는 자주 우리들에게 빛이란 우리가 보는 대상인 동시에 대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인임을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해서, 베케트의 극은 보고 아는 현상학에 대한 일관 된 심사숙고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빛이라는 수단에 대한 베케트의 통제가 극단에 이르 고 있는 텔레비전 극에서는 특히, 빛과 어둠이라는 짝지워진 리듬이 인식론과 구조적 등가 물을 창조해낸다. 베케트의 초기 극들과 후기 극들 사이의 주된 차이 가운데 하나는 후기극 들은 장면의 공간적 묘사에 대한 최소한의 시도마저도 포기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공통 적인 것으로는 초기극의 강렬한 조명효과는 중간 범위의 밝기 쪽으로 접어드는 경향을 보이 고 있어, 가너의 말에 의하면 “장면 속에 살고 있는 대상들을 불완전하게 비춰줄 뿐인, 부 드러운 빛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만든 듯한 무대의 깊이는 베케트 작품에 또 다른 특징을 낳고 있으며, 배우를 등장시키고 배우가 사용할 공간에 시각적 조화를 제공 하려는 베케트의 노력 속에서 조명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빛과 공간이 낯익은 협동작용 이 이루어질 수 없는 곳에서는, 정상적인 지각의 기초는 마련될 수가 없을 것이다. 무대는 변조 과정을 거쳐 점차적으로 회화적인 영역으로 들어가 3차원 세계 속의 2차원의 이미지 로 변한다. 베케트는 텔레비전용 작품을 쓸 때, 텔레비전 본래의 2차원성을 활용하는 면에 특히 관심이 갔던듯하다. 베케트는 텔레비전이 지니고 있는 평면성으로 인한 영상에 특히나 매혹 당했음에 틀림없다. 텔레비전의 영상은 후면에서 빛이 비치고 형광물질로 되어 있으며 텔레비전 영상의 가장 놀라운 특질은 원래부터 깊이감이 없다는 점이다. 텔레비전화면 고유 의 발광성이 베케트로 하여금 드라마를 한층 더 영상에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베케트의 텔 레비전 극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공간을 다양한 평면 단위들로 나누는 것인 바, 이로 인 해 그 공간들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반복되고 결합된다. 이런 극에서는 플롯과 공간은 더 이상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베케트는 물 흐르듯이 계속되는 공간 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며 살고 있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대신에 고립된 성자 같은 등장인물을 보여준 다. 베케트가 텔레비전 용으로 쓴 다섯 작품을 보면, 조나단 칼브의 묘사처럼 “놀라우리만 치 정교한 보석이 되고 있다.” 그루버는 베케트가 이 매체(텔레비전)에서 거둔 성공의 많은 부분은 그가 무대(연극)와 영 화와 텔레비전 사이의 형식적인 차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비앵 메르시 에는 “베케트의 루가 작품들이 짧아지는 것은 침묵에 대한 어떤 철학적 열망 때문이 아니 라...완벽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길은 축소화시키는 길 뿐 이다.”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루버는 베케트의 후기극이 짧아진 또 다른 이유는 드라마라 는 표현수단에 대한 그 자신의 불만이 커갔던 탓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무대를 위한 글 쓰기가 베케트에게 한 때, 서술적인 글쓰기(소설)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주었 듯이, 텔레비전 용 글쓰기는 어느 면에서 무대를 위한 글쓰기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루버는 말한다,, 베케트가 그의 말년에 드라마에서 텔레비전으로 돌아선 것은 한 사람 의 예술가로서 이야기(소설)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연극이라는 표현수단도 그에게 언제까 지고 만족할 수 있는 형식상의 토대를 마련해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4,000원
        30.
        200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대축척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고지도에 관한 연구는 거의 대부분 소축척지도에 집중되어 왔다. 고지도 연구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 대축척지도에 대한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대축척 실측도가 본격적으로 제작, 사용된 대한제국기의 지도들을 수집하여 그 특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다음 3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다. 첫째, 대한제국기에 근대적인 대축척지도의 기초가 된 전답도형도가 등장하였다. 둘째, 그 이후로 다종다양한 근대적인 대축척 실측도가 제작되었다. 셋째, 각 지도들의 축척이 다양하고 매우 정밀했다.
        4,500원
        31.
        2023.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엘리엇은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촉매에 현 대 시인의 역할을 비유함으로써, 문학 작품은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나 재능 또는 당대의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객관적이거나 공평무사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제시했다. 이러한 비평관은 「완벽한 비평가」나 「문학 서평에 대한 생각」 에서도 반복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라, 많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엘 리엇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당대의 정치와 경제 상황과는 상관없는 것으 로 읽어 왔다. 그렇지만 본 논문은 문학 작품을 시인 개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그의 에세이들이 쓰인 기간이 그가 로이즈 은행에서 일했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 다. 그는 로이즈 은행에서 일하면서, 영국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중요 한 경제와 정치의 변동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당대 경제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립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한 정치 경제적인 관점을 자신의 시에 반영했다. 이러한 점에 입각 하여, 본 논문은 「요리용 달걀」과 「황무지」를 당대의 정치와 경제 상황 과 연계하여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32.
        2020.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엘리엇의 제국이 언제나 “이상”이었다는 커모드나 마샬의 주장과는 달리, 엘리엇의 제국은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엘리엇이 중요하게 여긴 두 명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과 조셉 콘래드에 대 한 그의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키플링은 엘리엇이 평생 좋아했던 작가였으며, 콘래드는 『황무지』와 「텅 빈 사람들」의 제사를 제공했던 작 가였다. 엘리엇은 이 두 작가가 제국주의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엘리엇은, 제국주의와는 전혀 관계없이, 두 작가를 문학의 잣대로만 평가를 했다. 그는 키플링을 가까스로 위대한 작가로, 콘래드를 위대한 소설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노년의 엘리엇은 반제국주의자였던 콘래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나, 제국주의자였던 키플링의 시 선집을 출판하고, 그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이 글에서 엘리엇은 키플링이 대영제국에 대해 취한 입장의 의미와 의의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 사실에 근거하여, 본 연구는 엘리엇이 제국주의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취한 키플링과 콘래드 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가 두 작가와 제국주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고, 그 의미와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33.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日本의 다케시마 10포인트-제6포인트 제7항은 大韓帝國勅令第41号가 제정·반포되기 이전과 이후에 韓國의 獨島에 대한 실효적 지배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위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國際法에 위반하는 주장이다. 첫째로, 역사적 사실의 관점에서 보면, 朝鮮은 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하고 감시해왔다. 즉, 김인우를 울릉도 관찰사로 1425년에 임명·파견한 사실, 이규원을 울릉도 관찰사로 1880년에 임명·파견한 사실, 김옥균을 동남제도 관찰사로 1883년에 임명한 사실 등을 둘 수 있다. 둘째로, 범국제법의 관점에서 보면, 원거리·무인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는 근거리·유인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에 비해 용이하다. 또한 屬島의 법적 지위는 主島의 법적지위와 동일하다. 따라서 鬱陵島에 대한 실효적 지배는 獨島에 대한 실효적 지배로 인정된다.
        34.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39세의 T. S. 엘리엇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영국의 신민이 되었던 1927년 무렵, 대영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토와 가장 많은 인 구를 보유했으며, 군사적이며 경제적인 영향력은 전대미문일 만큼 지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대영제국이나 이를 아우르는 서 구의 제국주의와 연계지어 연구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본 논문은 엘리 엇이 평생 고쳐 쓰고 친구들과 공유했던 「콜롬비아드」를 제국주의와 연계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만주 제이드카(Manju Jaidka)와 데이빗 치니츠 (David Chinitz)를 포함한 몇 명의 비평가들은 엘리엇의 초기시 대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당대의 대중문화의 영향 하에 원시부족과 그들의 성을 희화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대의 서구 대중문화가 실제로 서구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 을 간과하였다. 이러한 점에 입각하여, 본 논문은 가장 미학적인 문예운 동으로 제국의 식민지 정복과 지배로 인해서 발생한 끔찍한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인 엘리엇의 「콜롬비아드」에 서구의 제국주의가 어떻게 내면화 되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35.
        2017.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를 둘러싼 논쟁 중에서 최근까지 가장 첨 예한 대립을 거듭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인 바그너의 사상과 음악이 독일의 제3제국과에 직 접적인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다. 현행 학계에서 이 논쟁은 비판과 옹호의 상호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고 개별사항에서 이견이 노출되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데, 본 논문은 이 대표적인 주장들의 배경과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증․논의하면서, 히틀러의 바그 너 숭배, 히틀러의 반유대성, 히틀러와 바그너 일가의 관계, 그리고 바그너의 서거 이후 히틀 러의 제3제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른바 “바그네리안(Wagnerian)” 내지는 “바이로이 티안(Bayreutian)”이 어떻게 바그너의 (반유대적 내용과 연관된) 사상과 작품을 의미화했으 며, 확산시켰으며, 수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추적하였다.
        36.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대한제국의 칙령은 입법체계상 법률의 위임에 의하여 제정되는 내각결정이나 명령, 훈령, 고시 등과 달리 대외적 구속력을 갖는 상위의 법규범이며 입법절차에서 법률보다 존중 되는 법규범이었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는 당시 일본의 법제와 대체로 동일하였다. 대한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대한제국의 영토관할권에 독도(석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국가의 대외적 의사표시를 하는 공식문서로서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입법체계와 절차를 규정한 법률로서 ‘공문식’에 따른 입법절차를 거쳐 제정되어 관보에 공포된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는 법체계상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불과하며 국가적 의사 표시를 위한 공식문서인 관보에도 게시되지 않은 1905년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상위의 법체계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칙령 제41호는 독도를 새로이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울도군의 관할에 포함되는 독도(석도)에 대하여 별도의 지리적 위치 등에 대한 설명 없이 법률로 명시하였다. 칙령 제41호에 따른 관할권의 행사는 울도군 절목이라는 후속적 하위법령의 제정을 통해 세금의 징수라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이 일본보다 먼저 서구적 근대법의 형식으로 독도에 대한 직접적 주권을 행사한 1차 증거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의 근거로서 그 무게와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37.
        2015.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사용되는 역사용어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도 향상을 위해 연구자 자신의 수업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실행연구를 연구 방법론으 로 채택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 연구에서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첫째, 2013학년도와 2014학년도에 S여중 2학년 전 교생 180여명을 대상으로 역사과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역사용어에 대한 이해 실태를 파 악하였다. 둘째,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는 2013학년도에 자신의 수업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실제 수업에서 역사용어 이해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6개반을 3그룹으로 나누어 3가지의 학습방 법을 적용하였다. 2014학년도에는 2013학년도에 역사용어를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이었던 학 생활동중심수업을 적용하였다. 셋째, 수업 후 교사의 수업일기와 학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수업 후의 반응을 살펴보았으며, 2주후 학생들의 역사용어 이해도의 향상 정도를 살펴보기 위해 탐 구형 평가(개념확인평가)와 지필고사 성적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교사가 활동지, 동영상 등 다양한 학습자료를 제공하여 수업하고, 학생들은 학습과 제를 통해 선행지식을 갖추어 학생활동중심으로 수업이 이루어질 때 역사용어에 대한 이해도 가 향상되어, 학업성취도도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자는 2년 동안 본 연구를 통해 자신의 수업을 되돌아보고 반성함으로써 수업을 개선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8.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05년 독도의 불법적 영토편입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한제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전면적 침탈은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과 직접적 관련성을 갖는다. 이 글은 우선 국제법적으로 러일전쟁의 발발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제물포사건이 갖는 의미, 전쟁개시 시점 그리고 국제법상 일본의 전쟁선포행위가 합법적인지에 대해 검토하였다. 러일전쟁의 개시 시점에 대하여는 일본 해군이 중국 뤼순 항구에 정박 중인 러시아함대에 대한 무력공격을 도발한 1904년 2월 8일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의 발발과정 특히 대한제국의 영해인 제물포 앞바다 사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이 러일전쟁의 개전 일자를 일본 해군이 전쟁수행을 위해 사세보항구를 출항한 2월 6일으로 주장하는 이유가 일본이 전시국제법을 위반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하였음을 은폐하려는 의도임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이 글은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게 된 근거와 러일전쟁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이 유럽국가인 러시아가 아닌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유럽과 미국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러일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국제사회에 강대국으로 등장했다는 인식과 다르게 일본은 러일 전쟁이전에 유럽의 소수국가와 미국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국가들의 국제클럽(international club)에 의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한 소위 문명국(civilized state)으로 인정되어 있었으며,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제국과 만주의 패권을 놓고 벌인 소위 문명국 간의 전쟁이었다. 세 번째, 러일전쟁의 발생 이전에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이 어떠한 이론적 배경에서 일본에 의하여 무시되고 침해당하였으며 미국과 영국 등 당시 국제사회를 주도하던 국가들은 왜 이를 묵인하였는지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한일 간에 체결되어 있던 조약들은 어떻게 양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해 보았다. 이와 함께 일본의 대한제국 흡수행위의 근거가 된 소위 국제클럽 구성 국가들의 낙후지역(backward territory)이론의 문제점에 대하여도 살펴보았다.
        39.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순수상업작품에는 창작자의 생각과 사상이 은폐화되어 있다. 개인적인 감성 혹은 사용성, 기능성이 작품에 포함되어 감상자나 사용자에 의해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 제품과 사용자의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인위적인 방해요소가 가미되되는 경우를 우리는 보아왔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사상적 동질감과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지는 십자가는 예수의 순수한 희생이라는 상징보다 크리스트교 포교라는 정벌이라는 이유로 사용되었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십자군의 십자가에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대상에 은폐화 되었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디자인과 건축은 순수한 기능적, 감성적인 내용 이외에 독일 제3제국의 정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은폐화 되어 다른 목적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본 고찰을 통하여 독일 제3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건축과 디자인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40.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울릉도는 개항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불법 입도하여 거주하기 시작하고 일본 정부도 이를 방조하므로, 대한제국은 일본인 철환을 위해 두 차례나 국제조사단을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실행하고 일본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특히 1900년 6월 내부 조사관 우용정(禹用鼎), 부산 해관 세무사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와 일본인 관리 주 부산 일본영사관 부영사 아카츠카(赤塚正助) 등으로 구성된 제2차 “국제조사단”을 울릉도 현장에 파견하여 현지 실태를 조사케 하였다. 조사단의 보고를 받은 후에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로서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종래 강원도 울진현에 속했던 울릉도와 독도를 이번에는 독립시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울도군”으로, 격상시키고, 울도군의 관할지역을 울릉도와 죽도(죽서도)와 석도(石島, 獨島)로 법정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관제 개정 사실을 중앙정부의 󰡔관보󰡕 1900년 10월 27일 자에 국제고시하였다.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국제고시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石島, 獨島)의 대한제국 영유가 서양국제법으로도 다시 한번 더 세계에 공포된 것이다. 물론 이 때에 일본측은 어떠한 반대의견이나 다른 의견이 없었다. 이 때 독도를 종래의 명칭 ‘우산도’로 호칭하지 않고 “石島(독도, 獨島)”로 표기한 것은 공도정책이 폐지되어 1883년부터 합법적으로 들어온 울릉도민들이 사투리로 돌(Rock, Stone)을 “독”이라고 발음하여 독도를 돌섬(Rock islet)이라는 뜻의 지방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돌섬”은 뜻을 취하면 “石島”가 되고 음을 취하면 한자로 “獨島”로 표기되고 있었는데, 뜻을 취해 “石島”로 표기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때 국제법에 밝았던 조사단의 프랑스인 라포트(E. Laporte)는 독도의 “Liancourt Rocks”라는 서양 호칭도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도 “리앙쿠르 石島”가 되므로 겸하여 石島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 발행한 『일·지·한 항로이정일람도(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우산도”를 “리앙꼬르드石”이라고 표기하였다. 대한제국의 石島표기는 리앙쿠르 石島(Liancourt Rocks)가 바로 대한제국 영토임을 서양국제법을 빌려다 거듭 밝힌 것이었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독도에 일본해군의 망루를 설치하려고 계획하면서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가 주장한 것은 독도가 임자없는 無主地라고 주장해 전제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有主地임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입각한 일본 정부의 독도영토편입 내각회의 결정은 국제법상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독도는 한국 고유영토로서 1905년 1월 이전에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기 때문에, 1905년 독도를 일부러 “무주지”로 억지 전제한 일본의 독도침탈은 처음부터 완전히 “무효”이고 “불법적”인 것이었다. 일본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 침탈 사실을 중앙 『관보』에 고시하지도 못하였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은 국제법상 불법의 도탈(盜奪)을 시도한 것이고 완전히 무효인 것이다. 한국은 1910년에는 일제의 강점으로 아예 한반도 전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의 패망 후에야 한반도와 함께 회복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