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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2019.04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of ordinary Portland cement. Water-cement ratio was 0.40 and cement-sand ratio was 1:3. The content of nano-TiO2 was 3% but the content of nano-SiO2 changed in cement mortars. The content of nano-SiO2 was 0%, 0.5%, 1%, 1.5% and 2% of the binder weight. Mortar prisms and beams were made in specified molds and cured in limewater. Compressive and flexural strengths, porosity and ultrasonic pulse velocity were measured. Then mortars were stored in 6 molar ammonium nitrate (NH4NO3) solution. Leaching depth, variation of mechanical and microstructural properties were measured. Presence of nano-particles decreased the leaching depth and the degradation of mechanical and microstructural properties in mortars.
        62.
        2018.04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the performance of the self-healing with the granulated alkali activator (Ca(OH)2) manufactured in seawater environment is investigated for crack healing under 300 μm of cracks. Specimens combined with GGBFS and OPC with and without the granulated alkali activator were manufactured and immersed in seawater. After that, crack recovery on the surface of the specimens with the granulated alkali activator (Ca(OH)2) was also evaluated by the ultrasonic pulse velocity test. From the results, it was verified that cementitious materials with the granulated alkali activator, exposed in marine environments, could be able to heal or seal inside cracks
        63.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국가에서는 조선초기부터 도성 내외와 연해지역에 禁山을 설정하고 禁松정책을 취했다. 한편 민간이 山林을 사적으로 점유해 이용하는 것도 허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에게는 그 기회가 별로 없었고, 그 대상은 주로 양반층이었다. 국가의 禁山정책에도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에게도 수목 채취를 어느 정도 보장하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숙종 21년 당시 민간에서 시행되고 있던 禁松契를 참조해 마을마다 금송계를 만들어 스스로 금송활동을 하게 하는 조치를 충청도에 시험적으로 시행해 보기도 하지만, 이후 국가에서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시행하는 조치는 없었다. 다만 조정에서 여러 차례 논의가 이루어져 금송계 문제가 부각되고, 또 일부 관리들이 작성한 牧民書에 이런 방안이 소개되면서, 금송계가 전국적으로 점차 확산된 것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을마다 금양의 경계가 지워져 마을 단위로 禁養하고 採樵하는 관행이 점차 일반화되어 간다. 이런 추세 속에서 禁養權과 그 경계를 둘러싸고 양반층과 사찰, 그리고 금양처를 새롭게 마련해 가던 마을 간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 이런 갈등 상황에 직면하여 양반층은 마을과 연대하여 금송계를 결성·활용하는 방법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런 금송계는 사족이 주도하면서도 주민이 함께 화합하고 채초문제를 잘 해결해 가려는 것이었지만, 일부 금송계에서는 양반층의 입지가 약화되고 서민들의 입지가 강화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금양경계를 둘러싼 마을 간의 다툼도 적지 않았다. 산송이 계속되면서 관에서는 애매했던 경계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소송 당사자 간의 권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조정하고 구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처럼 사족, 사찰, 마을 간에 금양권과 그 경계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산림 중에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공한지가 있었다거나, 또 금양경계가 분명하게 처리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에서도 연유한 것 같다. 또 금양처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여 생존권 차원에서 다른 마을과 채초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마을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금양권 확보를 위한 마을 간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64.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효과적이고 안전한 화장품 성분 탐색을 위해 항산화 활성 가이드라인에 따라 다양한 식물 추출물을 대상으로 효능을 확인하였으며 이 중 가장 효능이 좋은 식물을 발굴하고 이를 최적의 비율로 혼합하여 Charmzone Extract (CZE)로 명명하였다. CZE는 하엽(Nelumbo nucifera leaves), 삼백초(Saururus chinensis) 및 와송(Orostachys japonica)으로 구성된 식물복합추출물로, 본 연구에서는 CZE의 항노화 화장품 원료로서의 개발 가능성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CZE는 자유 라디칼 소거 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 각질 형성세포주인 HaCaT 및 인간 섬유아세포 NHDF에서 활성산소종의 생성을 억제하고 총항산화능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NHDF에서 제1형 프로콜라겐의 분비를 촉진하였고, B16F10 세포에서 멜라닌의 생성을 감소시켰으며, RAW264.7 세포에서 lipopolysaccharide 자극에 의한 산화질소의 생성을 농도 의존적으로 저해하였다. 또한, CZE는 HaCaT의 이동을 촉진하는 효능을 나타내었다. 결과를 종합하면, CZE는 항산화, 주름개선, 미백, 항염증 및 상처치유의 다효능을 나타내며, 이러한 효능을 통해 피부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 므로 식물복합추출물 CZE는 피부 항노화용 화장품 성분으로 응용 가능하다.
        65.
        2017.04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Retarder, which shows characteristics of delay hydration reaction and reduce hydration heat in concrete, was processed through granulation and paraffin coat to induce reation by hydration heat. Concrete with Granulated and paraffin coated retarder were prepared and compressive strength was measured by curing at 20℃ and 40℃.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retarder exhibits performance depending on the curing temperature.
        66.
        2017.04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Retarder, which shows characteristics of delay hydration reaction and reduce hydration heat in concrete, was processed through granulation and paraffin coat to induce reaction by hydration heat. The prepared paraffin coated granular retarder was mixed with the mortar and the setting time was measured according to the desired temperature.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paraffin coated granular retarder which does not react during the concrete placing exhibits performance depending on the temperature.
        67.
        2017.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Retarder, which shows characteristics of delay hydration reaction and reduce hydration heat in concrete, was processed through granulation and paraffin coat to induce reation by hydration heat. Concrete with Granulated and paraffin coated retarder were prepared and compressive strength was measured by curing at 20℃ and 40℃.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retarder exhibits performance depending on the curing temperature.
        68.
        2016.10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to evaluate the performance of fire resistance of the mortar with magnesium hydroxide(MH) and aluminium hydroxide(AH) which has a RCC (Radiant Control Capability) as repair material to the steel structure, temperature evaluation of mortar was conducted by increasing 500°C in the furnace. The performance of RCC can decrease a temperature to external and internal mortar. As a result, it is confirmed that temperatures of mortar with magnesium hydroxide(MH) and aluminium hydroxide(AH) were more decreased than general mortar due to the RCC effect of MH and AH. Therefore, it can be possible to apply to a repair material at the steel structure.
        69.
        2015.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산업부산물인 제철 산업의 전기로 산화슬래그골재를 이용하여 천연골재를 대체하고 자동차 산업에서 발생하는 폐유리를 분쇄하여 채움재로 활용하는 연구로써, 환경친화적인 아스팔트 포장 재료를 개발하였으며, 폐PVB로 아스팔트 바인더의 물리적 성능을 개선하여 현장적용성을 검토하였다. 최적의 공극률을 결정하기 위한 반복적인 배합설계를 거쳐서 13-5mm(40%), 5-0mm(57%), 폐유리미분말 채움재(3%), 아스팔트(4.1%)의 투입량을 결정하였으며, 마샬안정도는 약 10,000N의 강도를 발현하였으며, 간접인장강도는 1.00~1.16 MPa의 범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혼합 및 다짐온도 조건은 실내 최적 배합설계에서 적용한 결과를 동일하게 적용하였다. 현재 전기로 산화슬래그는 제철 인근의 토목현장에 사용되고 있으며, PVB 필름과 차량 폐유리는 토목·건축용 자재로 일부 사용되고 있으므로 향후 도로현장이 추가 수요처로 안정된 소비가 기대된다. 본 연구에서 더욱 기대되는 것은 PVB 필름으로 개발될 중온형 아스팔트 바인더에 전기로 산화 슬래그 골재의 높은 강성과 고분말 폐유리 미분말의 충진성이 조화되어 기존 제품과 차별화된 친환경 고내구성 포장체의 한 분야를 개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70.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향전은 英祖대 이전부터 기존 사족간의 당파적 대립에서 시작된다. 이런 갈등으로 인해 사족층의 지배질서가 균열을 보이자, 그 틈새를 비집고 신흥세력들이 鄕權에 참여하면서, 향전이 점차 신․구세력간의 갈등의 모습까지 덧씌워진다. 영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사족층의 지배질서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지만, 고을에 따라 사족층의 지배질서의 강약이 달랐다. 지배질서가 약한 고을에서는 일찍부터 새로운 세력이 新鄕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컸다. 또 영남을 좌․우도로 나누어 볼 때, 좌도보다는 우도가 향전이 더 심했다.영남지역 중 우도, 특히 경남 서부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南冥學派는 원래 大北의 입장을 취하다가 仁祖反正 이후 침체하면서 대거 南人화해 갔다. 게다가 南冥集판본 훼손사건 등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발생한 소외그룹이 西人化하면서, 남명학파 내부에 서인(老論)․남인의 당파적 대립양상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런 갈등은 진주 인근의 고을에도 영향을 미쳤고, 좌도의 여러 고을에서도 당파적 갈등으로 인한 향전이 전개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영남에서도 新鄕․舊鄕의 대립으로 인한 향전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의 신향은 鄕案에 새로 진입하려는 같은 사족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후 영남에서는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신향들이 중앙의 老論세력의 지원 하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계층의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서얼층이나 다른 계층의 진입도 점차 확산된다.17세기 말 18세기 중엽 향안을 둘러싼 대립과 파치 현상은 이전부터 향촌사회 내의 재지사족간의 당파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같은 사족반열에 있으면서도 향안에 입록되지 못한 인물들은 점차 중앙의 서인․노론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향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에 따른 분란이 신․구향의 향전으로 발전한 것이다.영남에서의 교원을 둘러싼 갈등도 일찍부터 기존 사족간의 당파적 대립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지만, 영조대부터는 신․구향간의 대립이 점차 부각되기 시작한다. 신향도 향교․서원에 대해서도 똑같은 참여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通淸운동을 전개하던 서얼들도 교원에 참여하게 되면서 영남 각 고을에서도 기존 사족과 서얼간의 갈등이 격화된다.향임을 둘러싼 향전에서도 처음에는 기존 사족간의 당파적 대립으로 향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영남에서도 향임을 둘러싼 신․구향간의 향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향전은 19세기 말에는 사족층뿐만 아니라 향리층까지도 노골적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향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71.
        2014.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산업부산물을 아스팔트 혼합물 포장에 활용하고 천연골재를 대체하기 위한 연구로써 전기로 산화 슬래그를 이용한 아스팔트 혼합물의 물리적 성능과 내구성능을 분석하였으며, 현장 적용성을 분석하기 위하여 시험시공을 실시하였다. 아스팔트 혼합물의 내구성능을 평가하기 위해 아스팔트 혼합물의 최적 배합을 도출하여 평가하였다. 마샬안정도 등 실내시험결과 전기로 산화 슬래그 혼합물이 일반 혼합물보다 높은 강도를 나타내었다. 수분 민감도 실험에서도 일반 혼합물과 동등한 저항성을 나타냈다.시험시공을 통한 현장 적용성은 기존 천연골재 아스팔트 혼합물과 동일하였으며, 미끄럼저항성능이 더 우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72.
        2014.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박층 포장용 다층(Multiple layer) 에폭시 폴리머 콘크리트의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개발된 에폭시수지에 대한 실내실험을 통해 물리적 특성 평가를 수행하였고, 시공성 및 초기 공용성 평가를 위한 시험시공을 수행하였다. 실내실험으로 강도 특성을 평가하기 위하여 압축강도, 휨강도, 인장강도, 부착강도 시험을 수행하였으며 내구 특성 평가를 위하여 염소이온침투시험, Thermal Compatibility 시험을 실시하였다. 압축강도 시험결과 40MPa 이상으로 ACI(American Concrete Institute)의 폴리머 콘크리트 기준값보다 큰 값을 나타냈으며 휨강도 시험결과는 20MPa 이상으로 기준을 만족하였다. 인장강도 시험결과 15MPa의 강도값과 60%이상의 신장율이 측정되었고, 콘크리트포장면과의 부착강도 시험결과는 2.2MPa 값을 나타내어 국제기준을 만족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염분침투저항성 시험결과는 측정값이 0Coulomb으로 수밀성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나 제설제 등의 염화물에 대한 저항성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 Thermal compatibility 시험 후 콘크리트와 에폭시 포장층의 접착면을 살펴본 결과 균열이 발견되지 않아 콘크리트포장과 에폭시 포장층의 열팽창계수 차이로 인한 접착은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장 시험시공 결과 우수한 시공성과 초기 공용성을 나타내어 실용화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국내 토공부 포장과 교면포장 적용시 포장 공용성과 내구성이 크게 향상 될 것으로 기대된다.
        73.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을 언급할 때 흔히 거론되는 것 중에 ‘南冥學派의 본고장’, ‘1862년 농민항쟁의 선구적 지역’, ‘1894년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전쟁의 본거지’라는 표현들이 있다. 이런 상징적 표현은 진주의 강역이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변해왔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려시대에 진주는 경상도 界首官의 하나로서 경남 서부지역을 통할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여러 고을을 통할하였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邑과 鄕ᆞ所ᆞ部曲 등의 任內를 고을 예하에 두고 있었다. 예종대 이후 진주목의 일부 속읍들이 독립해 나가기는 했지만, 昆明縣 등의 여러 임내가 조선왕조 초기까지 남아 있었다.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진주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강역이 축소된다. 1419년 진주의 속현 중 하나인 곤명현이 분리되고, 이후 진주 예하의 金陽部曲을 흡수하여 昆陽郡으로 독립해 나갔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들어와서도 섬진강 일대의 관방을 강화하면서 진주목의 적량ᆞ진답ᆞ화개현ᆞ악양리가 하동으로 이속되었다. 을사조약 직후인 1906년 일제는 합리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때 진주의 강역은 대폭 축소된다. 즉 진주의 75면 중 25개 면이 산청ᆞ하동ᆞ고성ᆞ사천ᆞ남해ᆞ함안 등 주변지역으로 이속된다. 또 한일합방 직후인 1914년에는 전국의 군과 면ᆞ리를 통폐합하여 군과 면의 수를 크게 줄이는데, 이때에도 진주군의 영역 중 일부는 사천군으로 이속되었고, 1906년 진주에서 함안군으로 이속되었던 지역이 다시 진주로 편입된다. 이처럼 진주의 강역은 여러 시기에 걸쳐 점차 축소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74.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의 목적은 각 계층의 사람들이 지리산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해왔 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리산은 영․호남의 여러 고을에 걸쳐 너르게 퍼져 있고 매우 靈驗하다고 알 려져 있었다. 신라 때부터 국가에서 중요시해왔던 지리산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산천제 정비에 따라 산신의 封爵이 제거되고, 전라도 남원에 神祠를 세워서 제 사지내게 되었다. 지리산 산신신앙에는 불교․도교 등 여러 신앙이 복합되어 있 었다. 지리산에는 聖母祠 이외에 여러 신당들이 세워졌고, 봄과 가을마다 삼남지역 의 무당과 일반 민중에 의한 기도가 성행하였다. 또 지리산은 골이 깊고 여러 가지 작물들이 풍성하여, 생계가 어려운 사람, 도망자들이 이곳을 찾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불교 억압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새롭게 들 어섰다. 이런 사찰 중에는 지리산 신을 위한 신당을 세운 곳이 많았다. 불교계 에서는 聖母天王이나 이외의 상징물에 대해서도 불교와 관련시켜서 지리산에 서의 불교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儒者들은 지리산 신에 대한 별도의 敬拜는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있었고, 무 당이나 불교계의 지리산 제례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리산을 찾은 것은 경치를 즐기고 문학적 호기를 기르거나, 속세에서 찌들렸던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일반 민중과 무당, 불교계, 유자층들이 지리산을 인식하고 이용하는 입장은 서로 달랐다. 지리산을 둘러싸고 계층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도 없 지 않았다. 게다가 지리산의 승려․무당이나 골짜기 깊숙한 곳에 사는 민간인에 게는 일찍부터 관의 침탈이 가해져서,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75.
        2009.12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국내산 Allium속의 휘발성 유기성분과 생리적 유용성을 지닌 함유황 유기화합물을 비교 분석하였다. 마늘, 양파 및 대파를 동결 건조하여 SDE 추출법을 이용하였으며 휘발성 유기성분을 추출하고 GC/MS로 분석하였다. 건마늘의 주요 향기성분은 diallyl disulfide, diallyl trisulfide, allyl methyl trisulfide, allyl methyl disulfide 등이었으며, 건양파에서는 diprop
        76.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학파와 관련된 각 가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번에 남명 조식의 문인인 文益成 및 그의 후손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천에 거주하던 문익성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문 려도 마찬가지로 문과를 거쳐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할도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형제간의 우 애도 돈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들의 가 문은 경상 우도에서 손색없는 사대부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주로 이거한 문할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이런 사족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면 서 진주에서 명망가문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들은 선조의 가학을 잇는 입장 에서 남명학파의 맥을 이어갔고, 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 입장 을 견지하였다. 다른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中華문화를 굳건하게 이어 간다는 입장에서 존주의식을 꾸준히 계승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大明花의 보호・전승을 통해 이를 실천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77.
        2008.04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천연물을 이용한 고부가가치 간장을 개발하고자 기능성 간장을 제조하여 일반 간장과 특성 변화를 비교하였다. 일반 간장과 3% 및 5%의 약용식물 추출물을 첨가한 기능성 간장에 대한 일반성분 분석결과, 성분 조성변화는 관찰되지 않았으며, 향기성분 분석 결과, 일반 간장과 기능성 간장간의 차이가 없었으나, 추출물에서 유래된 paeonol과 senkyunolide A 및 cnidilide들이 기능성 제품에서도 관찰됨으로써 약용식물 추출물을
        79.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는 19세기 말 진주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盧應奎라는 인물에 대 한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노응규는 명망있는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와 노응규의 조상 은 가세가 몰락하여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의 부친인 盧以善이 安義로 거주지를 옮겼던 것도 생계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런 경제적 어 려움에도 불구하고 노응규는 학문에 전념하여 崔益鉉, 宋秉璿 등 당시 위정척 사 운동을 주도하던 노론계 유명 인물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많은 노론계 인 물과 교유하게 된다. 18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노응규는 1896년 1월 초에 진주 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와 인근 고을의 여러 세력들의 호응에 따라 한때 노 응규는 鄭漢鎔과 함께 경남 서부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 은 의령에서 관군과 전투하여 물리치고 부산을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그 러나 3월 초 진주성은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후 노응규는 오랫동안 여기저기로 피해 다니다가 1897년 10월 초 왕으로 부터 그의 활동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여러 관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부형 살 해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었다. 이후 노응규는 귀향하여 생활하기도 하고 조정 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11월 중순에 그는 충청도 黃澗으로 들어가 세력을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핵심 인물들이 순검에 체포되면서 이 일은 무산되었 고,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병사하였다. 노응규의 의병활동은 19세기 말 당시 지방 유림 사이에 퍼져 있던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 에 옮기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는 당시 노론계의 사상과 노응규 집안 의 가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학문 수행과정에서의 집안의 경 제적 어려움이 그의 사상과 현실대응에 더 치열한 면모를 보이게 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한다.
        80.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자는 연계재에 소장된 여러 종류의 사마안, 연계안을 통해 조선 후기 진주 사마소의 건립과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 전기 유향소를 능가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향촌사회에 행사하고 있었던 사마소는 1603년에 혁파되었지만,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1620년대에 와서 사마소가 다시 세워지고 있다. 사마소는 고을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일찍 부터 지속적으로 운영되기도 하고 아주 늦은 시기에 설립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진주에서도 조선 전기에 사마소가 세워졌다가 혁파된 이후 한동안 운영되지 않다가 1736년에 새로 창건되었고, 이에 따른 명안인 ‘사마안’도 만들어졌다. 이후 1812년에는 다시 ‘청금록’이 작성되었는데, 입록의 시기적 범위가 넓혀지 고 문과 급제자도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1841년에 와서는 연방안과 계적안이 별도로 작성되었고 사마소의 명칭도 ‘연계재’로 바뀌었다. 이후에 가서도 새로 운 명안이 여러 차례 만들어진다. 18세기 전반 진주에 사마소가 창건된 것은 우선 진주 지역에서 좀더 많은 과 거 합격자가 배출되기를 열망하는 교육적 목적 때문이었다. 사마소가 건립된 또 하나의 배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진주 내에서 열세이던 노론세력들 이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점이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사마소의 성격은 변화양상을 보인다. 참여가문이 증가 하고 사마시 합격자뿐만 아니라 문과 급제자도 포함되면서 점차 연계안 체제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연계안에 입록된 인물의 수도 점차 증가한다. 많은 가문들이 연계안에 관심을 가지고 조상을 입록시키기 위해 경쟁하면서 과거합 격 여부가 분명치 않은 인물들도 수록되기 시작하고, 가문간에 여러 가지 분쟁 도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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