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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2006.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대기-해양의 상호작용과 제주도 후면에서 발생하는 카르만소용돌이행렬의 상관관계를 수치실험을 통하여 분석하였다. 카르만 소용돌이는 한라산의 제한된 높이에서 형성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는 900 hPa고도에서 카르만 소용돌이가 뚜렷이 생성되었다. 카르만소용돌이행렬의 발생초기에는 하나의 소용돌이세포가 나타나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소용돌이는 이류를 한다. 이때 작은 소용돌이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분리된 소용돌이의 강도와 지속시간은 해수면 온도 분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즉 약한 해수면의 온도경도는 카르만 소용돌이의 지속 시간을 길게 하며, 산 후면의 소용돌이도를 감소시킨다. 강한 해수면 온도경도는 혼합층과 대기하층 수증기량을 증가시키고, 강화된 하층대기 혼합은 산악에 의하여 형성되는 기계적 응력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4,300원
        122.
        200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李齊賢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학자요 또한 시인으로서, 후세 사람들로부터 ‘道德의 으뜸이요 文章의 宗主’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문학부문에서 이제현이 남긴 업적 가운데 한 가지는 고려시대 四大詩話集의 하나인 『翁稗說』을 통해 그의 詩論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이제현의 시론이 특색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후세의 문인들이 이제현을 시의 大家로 존경한다는 것은 그만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詩觀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제현은 詩作에 있어서 ‘個性’을 존중했고, ‘言外意’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 ‘詩의 언외의’를 ‘詩味’라는 말로 표현하였다.‘시미’는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추구되던 미학이었다. 漢詩가 화려한 꽃을 피웠던 고려시대의 시화에서도 가끔 ‘시미’가 언급되기는 하였지만 그 내용은 빈약한 것이었으며, 이 ‘시미’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詩作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사람이 바로 이제현이었다. 이제현의 ‘詩味論’은 중국의 여러 ‘詩味說’과는 다른 이제현만의 독창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가 추구했던 시세계는 ‘미래에 豫期되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豫味論’이라는 용어로 정의할 수가 있다. 이제현의 시론이야말로 가장 독창적인 시론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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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
        200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李奎報의 佛敎關聯詩를 佛敎詩의 관점에서 조명함에 있어 불교관련시의 주제를 고찰함으로써, 불교시 일반의 시 의식과 시적 특질을 구명하는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적 사유와 정서를 근간으로 하는 불교시 일반의 특질을 찾아내는데 있어 이규보의 시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새로운 일이다. 이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대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시의 분류와 분석에 있어 기존의 禪詩연구의 범주를 적용하려 한다는 점과, 특히 이규보의 시를 禪師들의 선시에 지나치게 대응시킴으로써 그가 적극적으로 불교적 교리를 실천한 居士이거나 禪의 이치를 체득한 禪僧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게 하는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규보의 불교관련시를 불교시의 관점에서 논의하기 위해서는 이규보와 그의 시대, 그리고 그의 문학에 있어 불교적 사유와 정서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불교시의 근간인 불교적 사유와 정서가 그의 문학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러므로 해서 문학작품에 드러나고 있는 실질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귀결된다. 본고는 이규보 불교관련시의 주제로서 空的思惟의 詩的 受容이라는 측면과 自我省察의 측면을 설정하고, 해당되는 시를 분석하였다. 특징적인 것은 이규보 자신의 불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주의깊은 직관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 사유의 저변 위에서 그의 불교관련시가 시로서의 문학성과 불교 교리적 사변성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규보의 불교관련시에 대한 논의는 주제에 관한 논의와 더불어 그가 살았던 불교문화의 토양 위에서 불교에 대한 작가로서의 의식이 반영되고 있는 양상과, 고려시대 불교시 전체의 구도 속에서 불교시 일반의 특질과 의의를 파악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기대되는 것은 이규보의 불교 인식과 불교시에 보이는 국면들이 이규보의 개인적인 성향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불교에 대한 일반적 정서 또는 불교 문학적 성취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 점이 밝혀진다면 본고의 논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 이규보의 佛敎關聯詩를 통한 불교시 일반의 특질을 구명한다고 하는 문제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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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
        200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李資玄이 활동하던 12세기는 벼슬하여 가문을 번창시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家門意識과 現實主義的인 世界觀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토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던 그는 당시와는 상반된 삶을 살았으며 시세계에도 그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자현 시세계의 특성을 고찰하기 위해 먼저, 그가 젊은 시절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게 되는 이유 즉 상처, 타락한 현실에 대한 염증, 병, 사상적 경향 등을 살펴보았다. 그 중 그의 사상체계는 儒學으로 출발하여 道敎와 佛敎가 융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벼슬을 버린 후에는 禪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12세기에는 자연에 은둔하거나, 그러한 지향을 보여준 인물들이 적지 않게 출현했다. 흔히 이자현을 정지상․곽여 등과 같은 시세계를 지닌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지만 변별점을 찾을 수 있다. 정지상은 결국 현실로 회귀하고, 곽여는 자연으로 귀의를 꿈꾸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자현만 자연에 귀의를 실천하여 자연과 합일을 도모함으로써 그만의 특징적인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이자현의 시에서 자연은 현실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자연은 현실세계의 탐욕과 고통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청정한 사물들이고, 이자현의 天性을 보존시켜주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그의 현실적 가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결국 동시대에 고통스런 현실을 비판하거나 가슴아파하는 시가 다수 창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를 창작하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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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200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Since Korea disclaimed to open the ports, Korean architecture has met the impetuous transformation. Although there would be various factors of this transformation, the new-coming architecture by missionary seemed to be a significant one, and many researches have been carried out on this theme in diverse viewpoints. However, because these researches have preponderated on the Catholic tradition, it is deficient for clarify the whole history of mission architecture. Therefore, this research has the meaning to enrich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architecture by making balance. First of all, this paper is focused on the activities of one missionary, Graham Lee. He is a practical missionary at the beginning, his architecture made a critical influence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Graham Lee was born in Rock Island, Illinois, 1861, and he determined to become a missionary through grown up. He spent his boyhood by working as a plumber for his purpose and studied in a university afterward. Graduating of McComick Theological Seminary, he was nominated as a pioneer of Pyeng Yang Mission Station and set foot in Korea, September of 1892. Since then he started to erect missionary facilities in Pyeng Yang, such as Well House(1898), Pyeng Yang Central Church(1900-1901), Pyeng Yang Academy(1902). These all his works are designed with eclectic style which shows western and Korean traditional style intermingled. This unique characteristic made a profound influence to the Korean mission architecture afterwards. Especially, the L-type plan of Pyeng Yang Central Church, which is first shown by him, is recognized very unique, and this plan type had been spread all over the country. Therefore the L-type plan became the peculiar feature of the early Korean churches. Furthermore, working with Korean carpenters, he taught them new skills of modem buildings. After that, they were expanded out northern part of Korea and took the roles of master builders. According to this expansion, his particular style had got spread and had been settled as a unique eclectic style in Korean modern architecture. In the conclusion, he is evaluated to be a critical pioneer missionary, who left a big influence on the frame work of Korean modern architecture in the transitiona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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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
        199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is not known that when and by whom 'The Lee's UmsikBup' was written. This cookbook is written purely in Korean and has not been published yet. There is another book named 'UmsikBup' in the cookbooks of the Chosun Dynasty and there are many books with similar names. So this book is tentatively named 'The Lee's UmsikBup'. This book comprises fifty three items, among which there are fifteen items of rice alcoholics, three items of Gook-Su (noodles), sixteen items of side dishes, seventeen items of Tuck (rice cakes) and Guaja(kookies), and two items of fruit punch and tea. Three items were illegible because the lines were erased or the letters were not clear. The cereals needed for making rice alcoholics were sixty four percent regular rice and thirty six percent sticky rice. As for the processes, the process using Jee-ae-bop took up fifty five percent. As for side dishes, pheasants, which are seldom used for food these days, were then popular for food. And the entrails of domestic animals were much used for food. Seeing that red pepper paste mixed with vinegar was used for steamed breams (Jim) and that red pepper was used for Yeolgooja Tang, we can estimate that this book was written after red pepper was introduced. Inferring that Chohong Chang (red pepper paste mixed with vinegar and honey) is found Jinchan Ye Que, we can estimate this book was written in the late 1800's. The cereals used for making rice cakes were ninety two percent sticky rice and eight percent regular rice. Sticky rice was much more used and pepper was used for making Tuck (rice cakes) as Hun Chal Byung, So Ham Byung and Dootum Tuck. The analysis of the terms used in this book revealed that 117 items were used for cooking processes. And it also showed us that there were six kinds of cutting and thirteen kinds of heating procedure. The shapes and sizes of foods were revealed on the basis of real things. The measuring units are hard to revive since the measurements were taken by the container then in use. Thirty four kinds of containers and cookers, twenty more of which are now in use, were used for preparing foods. The use of ‘twigs stretched for the east’ had no scientific base but said something of Korean folkways at that time.
        4,500원
        132.
        202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경기도교육청의 다문화교육 정책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문화교육 방향 성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지난 10년간 경기도교육청의 다문화교육 기본계 획을 수집․분석하였으며, 관점 및 방향성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2010, 2014, 2018, 2020 년도를 중심으로 정책을 내용 분석하였다. 그리고, Jenks, Lee, & Kanpol(2001)이 제시한 보수 적, 개방적, 비판적 다문화주의에 따라 이를 해석하여 방향성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2010 년부터 지금까지 경기도교육청의 다문화교육 정책은 보수적 다문화주의 관점의 다문화교육이 꾸준히 운영되고 있었다. 다문화학생 대상 한국어 교육 및 문화 적응 교육이 이 관점에 해당하는 다문화교육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좀 더 체계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2010년 부터 지금까지 점점 확대되어 운영되고 있는 다문화교육 정책은 개방적 다문화주의 관점의 교육이다. 2010년도에는 일반학생 대상으로 다문화 축제 및 문화 체험 교육을 통해 문화 다양성을 이해하고 감수성 함양을 강조하였으며, 2019년도에는 ‘상호문화이해’ 연구학교를 지정․운영함으로써 다문화교육으로 상호문화이해 교육을 보급 확산시키는 정책을 시행하 였다. 비판적 다문화주의 관점의 교육은 기본계획에서 나타난 것은 2018년도부터이다. 기본 계획에서 ‘평등한 출발선, 교육기회 보장’ 등의 용어를 통해서 비판적 다문화주의 관점이 반영되었으며, 다문화국제혁신학교 지정 및 법률 개정 등 구조 변화를 통한 다문화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기도교육청의 다문화 정책은 비판적 다문화주의 관 점으로 이동하고 있으나, 아직은 시작 단계이다. 향후 과제는 비판적 다문화주의 관점에 부 합되는 다문화 정책 발굴과 학교 현장에 이에 대한 명확한 프로그램 제시 및 공유, 확산이 필요하다.
        133.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고 이지용은 남명의 유향이 스민 산청군 단성에서 태어나 남명에 대한 존모의 뜻을 품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학문적인 면에 있어서는 남명학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남명학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 는데 있어서는 뛰어난 묘사와 정제된 문풍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시는 인위적인 수사와 彫琢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 로이며 天稟과 자질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관조와 성찰에 의 해 발현된 언어들은 아무런 격의 없이 사람에게 스며들 듯 감동과 찬탄이 나오게 한다. 「관등행」은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악부시 형태의 시로 당시의 풍속과 시대 상을 읽을 수 있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민속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요 한 자료가 될 만한 작품이다.
        134.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8세기 강우 지역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叛逆鄕이라는 汚名을 쓴 후, 정 치·사회적으로 가해지는 탄압을 감내해야 했고 도덕적인 질시와 비난에서도 자 유로울 수가 없었다. 濟菴 李恒茂(1732~1799)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한 강우 지역의 처사로서, 丹城縣 培養里에서 대대로 기반을 잡고 살아온 향촌 사족 출 신이다. 본관이 합천인 데다 평생을 산청에서 살았던 제암에게, 반역향이란 汚名 은 자기 가문의 忠心을 否定당하는 치욕이 되었다. 제암은 수차례 과거에 낙방하면서 항거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충분히 감지하 였지만, 그 속에 골몰하거나 침체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은 선조의 문집 간행을 도모하는 것, 단성 지역의 書院 및 祠宇를 건립하고 관리하는 것, 향촌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확립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의 內的 不平은, 그것을 해소하 는 유력한 수단인 글쓰기로 표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제암 문학을 ‘先賢의 공간과 結束의 글쓰기’ ‘鄕村 공간과 凝集 의 글쓰기’ ‘私的 공간과 省察의 글쓰기’로 삼분하여 분석하여, 제암에게 글쓰기 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선조의 유지를 계승하고, 지역 선현의 권위를 확인 하고, 유학의 정신적 가치를 천명하는 유력한 수단이었음을 밝혔다. 이에 제암의 문학은 본인의 내적 불평을 해소하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135.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방문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 라고 하여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비난했다. 특히 일본 국회에서 독도문제를 국제사 법재판소에 제소하여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본 연구는 일본국회에서 독도문제를 국제사 법재판소에서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분석하였다. 첫째, 일반적으로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일본국회에는 국회의원들이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하는 인식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 아니면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고찰했다. 적극적인 견해는 독도가 일본영토임에도 불구하고 현 민주당정부가 적극적으로 독도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고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소극적인 견해는 독도가 일본영 토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게 된 것은 이전의 자민당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하여 정치권 모두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이 ‘죽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그 이후 매년처럼 중앙 정부의 관료를 초빙하여 2월22일에 ‘죽도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일본 국회에서도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독도문제를 제기하여 영토문제는 외교문제 이기 때문에 정부주도의 행사를 개최하여 국내외에 홍보해야할 것과 독도문제를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여 신속하게 해결할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독도문제를 제기하는 의원은 시마네현 출신 국회의원 단 한사람뿐이다. 그것도 매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제기했다. 이처럼 일본국회에서도 독도 영유권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국회에서도 독도가 일본영토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와야하는 영토라는 인식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136.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滄浪亭 李尙靖(1725∼1788)삶과 그의 문학에 나타난 정신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의 문학이 한창 무르익었던 시대였다. 학문적으로는 義理學과 事理學이 병행하던 때였다. 그가 어렸을 때는 그다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爲己之學에 있었다. 그가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가 嶺南 左道와 右道 학자들의 소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예로 그가 도산서원을 참배하고 그곳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문학에 나타난 정신은 크게 4가지이다. 첫째 큰 국량을 바탕한 追遠精神이다. 그가 선비로서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그의 식견이 편협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여 집안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둘째 經術을 바탕 한 道學精神이다. 그의 학문은 육경에 연원을 두고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知行合一한 道學者였다. 셋째 마음을 바탕 한 義理精神이다. 그가 爲己之學을 바탕으로 義理學 에 전념하였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 正心이 바탕이 된다고 하였다. 넷째 그의 가슴속에는 尊王攘夷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道德的 理想主義의 실행을 바라고 있었다.
        137.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자는 退溪 李滉(1501-1570)의 한시를 연구하던 중에 그의 逸詩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시 내용에 규명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겨 논문으로 작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첫째 수에 해당하는 작품은 문집에 실려 있지 않은 일시임을 확인했고, 그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아래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째, 퇴계의 친필로 남은 한 수의 逸詩는 風流의 現場에 대한 實證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필자는 이를 조선 중기 영남의 江湖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과 함께 막 완성된 「漁父歌」를 初演한 풍류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았다. ‘烹茶仙風’ 즉 ‘차를 마시는 신선의 모습’이라는 사자성어 는 퇴계의 일시에 들어 있는 시구를 통해 만들어본 것이다. 이는 당시 퇴계가 추구했던 하나의 江湖의 眞樂과 연관 지을 수 있는 한 경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둘째, 새로 발견된 퇴계의 일시는 元韻의 형태로 聾巖 李賢輔 (1467-1555)와 溫溪 李瀣(1496-1550)의 次韻으로 이어졌는데, 정작 퇴계 자신의 문집에는 누락된 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는 道學 淵源이라는 學統의 계승문제와 연관 지워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집과 초고로 남은 작품들에 대한 詩題를 함께 살폈는데, 거기 에서 드러난 ‘先生’이 ‘相公’ 등으로 달리 표현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묘한 시각차 때문에 중심 작품이 일시로 남아 문집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추론해 보았다. 필자는 자료 고찰을 통해, 퇴계 역시 도학 계통상으로 농암을 師承關 係로 인식하기보다는 그를 鄕先輩로서 인품과 문학 방면에 국한해 무한한 존경을 표했다고 보았다. 끝으로 그동안 年譜나 口碑傳承의 형태로 그 일부 시구절만 알려졌던 河西 金麟厚(1510-1560)가 퇴계를 기린 한시 또한 발견되어 이를 번역해 퇴계의 시인과 도학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했다.
        138.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에서 필자는 一齋 李恒(1499~1576)과 思庵 朴淳(1523∼1589)의 理氣論 내용 및 특징을 비교론적으로 고찰하고, 이들의 철학이 호남학파로서의 성립 가능성이 있는지를 연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조선전기의 리기론의 전개와 그 양상을 살펴보았다. 조선 전기의 리기론은 주로 太極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에서 이견이 생겼고, 이를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었다. 다음으로 一齋의 태극론과 리기론을 연구하였다. 일재의 리기론 또한 그의 태극론에 기초하며, 周濂溪의 「태극도설」의 요지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특히 일재가 주장한 리기의 不離不雜과 ‘一而二, 二而一’은 栗谷 李珥(1536~1584)의 리기론과 같은 맥락임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思菴의 태극론과 리기론을 검토하였다. 사암은 기본적으로 화담의 기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암은 율곡과의 논변에서 태극 이전에 太虛라는 원초적 기가 있다고 보았다. 사암과 율곡의 논쟁의 핵심은 ‘太極生兩儀’의 해석에 있음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사암은 태극으로부터 음과 양이 생겨난다고 해석하였고, 율곡은 음과 양이 태극 속에 내재해 있으면서 태극의 작용에 따라서 그것이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상의 과정에서 일재와 사암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학파의 성립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율곡의 성리학과 호남학파는 상호 연관성과 함께 차별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조선성리학의 깊이와 외연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139.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철학자 데리다는 절대적인 정체성은 있을 수 없으며, 그 무엇이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세상은 모든 것들은 변증법적 대상이며 의미 또한 변화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는 항구적 정체성이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으며, 그들의 시대 초월적 가치와 미학은 지금까지도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시장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미학적 기능주의 디자인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시작된 감성적 소비 가치가 스칸디나비아의 인본주의 디자인에 의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세계를 감동시킨 스칸디나비아 디자이너, 이희숙. 2013)”에 근거하여 12인의 디자이너를 선정하였다. 또한 해당 국가는 그들만의 정체성에 의해 유사성이 존재하기에 다시 한 번 대표적인 1인의 디자인에 내제된 함축적 특성을 비교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해석학적 차원에서 제시되었던 평가 툴(Tool)을 사용하였으며, 평가에는 디자인 전공자, 대학원생 그리고 일반인 60인이 참여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였다. 21 세기 디자인은 인공지능(AI),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디지털기술, 생태계파괴 문제 그리고 지식 중심의 합리주의 사회에 따른 부작용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 의해 상품의 수명은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디자인 정서와 인본주의적 기능주의의 중요성과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였으며,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함축적 특성이 향후 디자인 개발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 한다.
        140.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the birthplace of their first ancestor), and they are called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hich include the Nongseo Lee family, the Byeokjin Lee family, the Seongsan Lee family,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s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had different progenitors and frequently married each other. If they use the same Gwanhyang, it is considered as a marriage between people with the same surname and the same family origin. Therefore, it was not easy to indicate Gwanhyang when there was a marriage between people from the six Lee families. Since Seongju and Seongsan were the most commonly used Gwanhyang by the six Lee families, it is highly difficult to find a certain ancestor with an assumption that the ancestor uses today's Gwanhyang, because it is hard to know which family this ancestor is from. Therefore, I want to reveal the origins of the six Lee families and how they indicated their Gwanhyang specifically. This work will be significant since it clarifies the identities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nd provides guidelines to find ancestors related to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The results of this review come down to the following. First, there are six Lee families who use Seongju as their Gwanhyang, and it includes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Akgeobujeong (official title) Lee Deok-bu; the Gwangp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wangpyeonggun (official title) Lee Neung; the Nongseo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Nongseogungong (official title) Lee Jang-gyeong; the Myeonggyeong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Myeonggyeongjangwon (signifying winning the first place in the Myeonggyeon exam) Lee Geuk-song; the Byeokji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official title) Lee Chong-eon;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Seongsangun (official title) Lee Neung-il. Second, the Gyeongsan Lee family, the descendants of the Akgeobujeong, was also called the Bujeong Lee family. As they were also the descendants of Sobuyoon (official title) Lee Gam, they were once called the Soyoon Lee family. Third, the Nongseo Lee family unites and uses their Gwanhyang as the "Seongju Lee family" nowadays. Fourth, the Myeonggyeong Lee family was combined into the genealogy of the Byeokjin Lee family after 1864, and it has been maintained until today. Fifth, the descendants of Lee Gyeon-gan among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were once indicated distinctly as the Sanhwa Lee family. Sixth, the Gwanhyang of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was indicated as "Seongju" in the official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era. Seventh,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frequently used "Seongju" and "Seongsan" as their Gwanghyang in historical records. Eighth, "Byeokjin" and "Nongseo" are the most distinctive Gwanhyang among the six Seongju Lee families as they refer to the descendants of General Byeokjin and the descendants of the Nongseogungong. Ninth, the Nongseo Lee family and the Seongsan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yeongsan" as their Gwanhyang, and the Nongseo Lee family temporarily used "Gwangpyeong" as their Gwanhyang. However, in general, the Gyeongsan Lee family and the Gwangpyeong Lee family have a historical uniqueness. Finally, the need for distinguishing Gwanhyang began to be gradually recognized after 1593 when genealogies were established, and it was strengthened in around 1800, but it did not completely settle down. In the 1900s, Gwanhyang began to be indicated distinctively. Before then, Seongju and Seongsan were mixed and used so that it was not possible to distinguish the six Lee families only with Gwanh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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