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종교의 스포츠 수용에 관한 이론적 틀을 만들어서 앞으로 종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 스포츠와 종교 간의 긴밀한 관계는 특히 스포츠 선교가 복음 전파의 통로로서 큰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스포츠가 종교를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통적인 종교의 경건성, 엄숙성이 주는 무게나 어렵고 딱딱한 분위기를 스포츠가 매력적으로 또는 즐겁게 변화시 켜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스포츠의 기능 중 중요한 것이 레크리에이션이다. 서구에서 18, 19세기 산업사 회로 옮겨가면서 사회복음이 출현했는데, 특히 이 복음에는 ‘오락과 스포츠’, 바로 레크리에이션을 포함했 다. 교회 레크리에이션은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스포츠와 복음적 메시지의 결합 은 교회의 필수적인 프로그램으로 의미, 도덕 및 목적에 대한 현대의 불안을 해소하는 하나의 출구를 제공한다.
생활세계 뿐만 아니라 정치과정에서도 디지털 전환의 흐름은 매우 크 게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콘텐츠 생산과 소비의 무게중심이 텍스트에서 동영상으로 무게중심이 이동되는 현상이 대단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 다. 따라서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 차지하는 위상도 비약적으로 제고되고 있으며, 그것이 정치과정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게 주목받고 있 다. 이렇듯 정치 동영상의 영향력은 크게 증대하고 있지만, 그것이 선거 캠페인과 같은 정치과정에서 어떠한 효과를 낳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 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논문은 선거캠페 인에서 정치 동영상이 지지를 강화하는지 아니면 전환하는지에 대한 효 과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이 연구는 유권자 설문조사 자료를 활용하여 경험적 분석을 수행하였다.
한국은 2000년을 기점으로 국내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활발히 진행 되고 있는 상황이다. 대부분의 연구 주제는 한국이 복지국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며 그 전략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들이 한국은 이미 복지국가라는 것을 상정한 상태로 논의를 하고 있거나 한국의 목표가 유럽의 복지국가라는 전제하에서 논의되고 있는 상태다. 즉, 복지국가의 유형이나 성격 논쟁 등 대부분의 연구가 유럽 의 복지국가로 수렴 되어지는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의 여러 제한된 시스템 속에서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이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또, 한국의 복지 철학과 정치 시스템을 바탕으로 ‘유럽의 복 지국가 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본 고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복지국가론을 비판하고 한국이 나아가야 할 국가모델이 복지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발전된 미래 모델에도 있다는 것을 제시함에 목적이 있다. 먼저 에스핑 앤더슨의 ‘복지국가 유형 분류’를 이용하여 유럽 복지국가의 모델을 설명하고 복지국가의 성공 요인을 다섯 가지로 논하였다. 그리고 한국과 유럽의 정치구조를 비교한 후 한국이 지향하는 복지국가 형태에 따른 저해 요소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새로운 국가모델로 공진 국가, 생태 국가, 혁신국가, 소강 국가, 지식 국가를 제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본고는 한국의 프레임 속 복지가 과연 완벽한 복지 시스템인가를 생각해보고, 미래 한국의 발전을 위해 복지국가 이외의 새로운 국가모델을 제시해 본 시론적 성격의 논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으로 인해 온 세상이 아픔으로 가득 차있다. 이 글은 오늘날처럼 상처가 만연한 시대에 적합한 교회의 선교로서 ‘치유를 지향하는 환대’의 사역을 제안한다. 이 글은 이야기적 접근이 선교신학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살핀 후, 본인이 직접 경험한 두 개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상처입음의 경험이 환대를 통해서 치유적 경험으로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이 ‘치유를 지향하는 환대’의 경험이 또 다른 아픔을 감싸는 환대의 선교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 글은 ‘치유를 지향하는 환대’를 오늘날 선교적 소명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였고, 이어서 다음의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교회는 오늘날의 극심한 깨어짐의 고통을 호소하는 자들에게 환대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둘째, 환대의 사역이 치유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신학의 역할을 통한 공동체적 성경해석의 과정이 필요하며, 셋째로, ‘치유를 지향하는 환대’가 새로운 타인과 공동체를 향해 이어지기 위해서는 환대의 선교적 차원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키워드라고 하면 단연 ‘음모론’이란 언어이다. 어느 사건이나, 정치적인 이슈가 발현하게 되면 어김없이 언론, 뉴스, 개인 방송, SNS를 통해 ‘음모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천안함 음모론’, ‘총선 음모론’, ‘코로나 음모론’은 물론이거니와, ‘美 대선 음모론’, ‘9.11 음모론’ 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음모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음모론’에 대한 합리적 의심도 하지 않은 체, 비합리적이고, 편집증적인 환자 취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음모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정치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음모론’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학문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본 연구는 음모와 관련되었던 역사적 사건들이나, 일상생활에 듣고 보는 정치적 비밀, 음모로 포장된 진실들을 음모론으로 포괄하여 살펴보았다. 음모론은 개인의 편협한 사고로 사회를 왜곡해서 보는 관점이지만, 음모론이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의식을 가져온다는 긍정적인 특징을 7가지로 분석하였다. 반면 음모론은 검증은 가능하지만, 과학과 실험에 의해 반증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음모론의 한계가 있다고 칼 포퍼의 논의를 빌려 음모 론의 한계를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지식으로서의 음모론을 좀 더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이론으로서의 학문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 논문은 이윤기의 소설 「숨은그림찾기 1-직선과 곡선」에 대한 공식적인 문학교육 방식을 고찰하고 개선 방안을 제안한다. 이는 청소년의 현실과 연계하여 그 정신적 성장을 유인하는 문학교육, 인문교육과 제휴하는 문학교육 방안을 축적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공식적인 문학교육은 이 작품을 통해 타자 이해의 윤리를 주입하면서, 정형화된 타자 이해 교육의 패턴을 추수한다. 이는 학생들에게 공감을 유발하지 못하 며, 작품의 이해를 교란한다. 이 논문은 타자를 이해하자는 죽은 구호보다는 인간의 내재적 한계인 시각과 인식의 자기중심성에 주목하기를 제안한다. 이는 청소년의 심리적 특징인 자기중심성과 연계하여 교육할 지점을 마련한다. 문학교육은 청소년의 실제 현실을 연상시키면서 심리학적 지식을 보조 자료로 도입할 수 있다. 또한 청소년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문학교육과 인문교육의 제휴는 유용한데, 그 자료의 축적에 기여하고자 이 논문은 시각과 인식의 자기중심성에 관한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를 참고 자료로 제시한다.
본고는 신석기시대부터 통시적 관점에서 청동기시대 조기의 사회형태를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석기시대 조기~전기의 복합수렵채집사회에 대한 논의, 신석기시대 후·말기 양상, 청동기시대 조기의 취락·농경·석기·청동기 양상, 돌대문토기문화의 기원지로 여겨지는 마성자문화의 양상을 살 펴보았다.
그 결과, 신석기시대 사회는 수렵채집어로를 바탕으로 기후 및 자연환경에 따라 사회규모와 형태를 변형시키는 유연성을 갖춘 사회였음을 확인하였다. 신석기시대 조기~전기는 복합수렵채집사회의 특 징을 보이나, 말기에는 기후악화에 따른 생업환경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생존 전략을 구사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말기는 평등사회의 범주에 포함되나 취락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진 소규모 분절사회의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청동기시대는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사회복합화가 가속화되는 한 방향의 길을 걷게 된다. 조기 사회는 완만하지만 서열사회를 경험한 이주 농경민에 의해 형성되었고, 정착 및 잉여가 발생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추어진 사회였다. 그리고 가족단위와 친족단위의 분절사회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리더(리더를 포함한 집단)는 권위 표출이 제한되거나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이 제도화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전기이후 농경사회의 생업과 제도가 확산되면서 비혈연을 기반으로 한 지역집단이 형성되고, 지역집단 통할과 공동체 통합을 위해 취락 내와 취락간의 서열 발생이 가속화된다. 점차적으로 청동기, 지석묘 등의 장치를 통해 집단 내 서열은 더욱 공고해지고 제도화되면서 수직적 사회 분화가 심화된다.
이상으로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사회는 연속적으로 점진적으로 한 방향으로 변화·발전하는 과 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석기시대 사회형태는 수렵채집이라는 획득경제 하에서 각 집단의 선택의 결과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청동기시대 사회는 도작농경이라는 생산경제 하에서 집단 통할과 공동체 통합을 위해 사회복합화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본고는 중국학을 위해서 언어학이 지향할 역할과 연구 대상에 대해 시론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학문 분야로서의 중국학은 중국에 관한 학문 정도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유래와 지역 및 연구 대상의 상이함에 따라 중국학은 Sinology와 Chinese Studies란 명칭으로 각기 다르게 불려왔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중국학은 Chinese Studies로 범칭되는데, 학문 체계상 상위 학문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 중국학은 여러 하위 학문 분과의 단순 병합이 아닌 공동의 연구 주제를 갖는 하위 학문 분과 간 유기적인 총체이어야 한다. 그 속에서 언어학은 향후, 중국의 제(諸)현상을 좀 더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 기타 연구 분과들과 통섭을 도모하며 주제와 사고를 확장해 나가야할 것이다. 예견되는 글로벌언어로서의 중국어가 현 글로벌언어로서의 영어와 위세 상 어떤 지위 관계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중국학을, 중국에 국한한 중국학이 아닌, 일본, 한국, 인도, 필리핀 등 기타 국가학과의 관계를 고려한 아시아학의 하나로 위치시킬 때 이해 가능 할 것이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 한다면, 예술이란 자연적 ‧ 인문적 토대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이 발전하려면 당시대의 문화와 밀접해야 한다. 경험 접촉도가 빈번해야 대상을 여실히 파악하고 반영하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미술사와 문화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예사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그 시대의 유행하는 대상과 방식이 어떠한 것을 수준 높게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다. 서예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한자는 이미 우리 실생활에서 멀어져 있고, 세로쓰기 방식 또한 매우 특수한 필기방식이 되었다. 또한 한자보다는 한글이 주류 서사대상이 되고, 사유의 대상이 됨으로써 한자의 조형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약화된 실정이다. 쓰기 방식도 세로쓰기보다는 가로쓰기에 익숙해져 있고,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한 문자의 기능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몫이 되었다. 서예가 이러한 문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현대, 예술과 디자인, 실용과 예술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새로운 형태의 서예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전통서예와 차별화 된 글자구조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다. 이 일은 매우 창의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 서예방식은 모델이 있었고, 그 기준으로부터 어떻게 수용하여 어떻게 변용하였는가 하는 일정한 방향이 정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웠다. 반면 현대서예와 캘리그라피는 방향도 방법도 수준도 목표도 없이 망망대해에 표류된 상태에서, 경험과 지식과 지혜와 직관을 방법삼아 방향을 잡고 영역을 확장하며 목표에 이르러야 하는 고행일 수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서예 역시 시대에 따라 그 풍격이 변해왔다. 그런데도 변화의 시기마다 자신이 ‘정통(正統)’이라 여기고 변화를 ‘이단’이라 주장하며 거부한 부류가 있었다. 하지만 거부한 것은 소멸되고 거부당하던 것이 주류를 이루며 새 전통(傳統)으로 남았다. 서예사를 회고해보면 한나라 때 초서의 유행을 비난하였고(非草書), 왕희지 글씨의 연미함을 폄훼하였고(古質而今姸), 안진경의 글씨를 추서(醜書)라 비난하였으며, 축윤명과 문징명 등의 글씨를 문둥이 같다고 욕을 하였다. 이렇듯 서예의 역사도 순탄치 않았다. 비난을 받으며 문자 쓰기가 예술로 인식되기 시작한 이래로 왕희지에서 안진경으로, 소동파로, 등석여로 이어지면서 서예사의 뼈대를 형성해왔다. 한글의 역사도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한글서예의 역사도 시대와 그 시대 주류계층의 수요에 따라 유행을 바꿔왔다. 오늘날의 한글서예 역시 실용과 예술사이, 고전주의와 대중화 사이에서 사뭇 긴장관계가 형성된 듯하다.
문화는 대개 주류계층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형성된다. 서예 역시 각 시대마다 주류 계층의 유행을 타고 이어져온 유행서풍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디지털 대중시대의 서예문화 또한 다시 한 번 새로운 패러다임에 직면해 있다. 이 시대의 주류 계층인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생성하고, 그와 동시에 이 시대에 맞는 서예양식을 구축해 나가는 일에 촉각을 세워야 할 것이다.
The ancient Chinese character “ ” in the second slip of Kongzishilun was calligraphed as “ ”, and explained as a kind of musical instrument made of bamboo. However, it is suggested in this paper that this character should be calligraphed as “ ” in Clerical Script instead of “ ”. Its phonetic loan is “蕩”. Its meaning is “profound and grand” according to the bamboo’s exact meaning and the masterpiece Shijing. The second part of this paper mainly discusses the ancient Chinese character “ ” in the tenth slip of Kongzishilun. There are many explanations of it, such as “攺”, “改”, “妃”, “媐”, “逑” and so on. In our opinion, this character should be written as “施”, which means “educate” or “education”. “關雎之” reflects Confucian ethics of “克己復禮”.
전통 유가에서 제창했던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예의관”은 고대 권귀예제주의(权贵礼制主义)라는 심각한 낙인이 찍혀 있다. 지금도 현재 여전히 중국 사회생활 중에 침전되어 있다. 특히 관직을 근본으로 유지하려는 측면에서 엄중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그로 인해 현재 우리는 이론적으로 중국사회의 정의 문제라는 중요한 관건으로 바꾸어 해답을 찾고자 한다. 즉 이글에서는 어떻게 “사람을 해하지 않고 인권을 존중한다”(不坑害人)라는 정의의 저선에 기초하여 유가의 “인의 관”이라는 적극적 요소를 취하고 유가의 “예의관”의 부작용을 극복할 것인지를 다룬다.
한극서예의 국제화를 위해서는 그 동안 한자 중심의 전통세예를 탈피 한 디지털시대 맞는 방법론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말과 같이 서양 동양 중국 일본 한국 등 특정 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우리 한글이 우수성과 문자의 독자성을 찾아 서 거기에 맞는 방법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논자는 그 방법론 중에서 문자텍스트와 이미지가 융합된 전형적인 도 상텍스트를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자 한다 아울러 본 연구에서는 서구기 호학이 천착해운 기호사각형 관점을 빌려 서양의 타이포그래피 나 캘리 그래피 동양의 전통서예 나 문자도에 나타나는 상이한 차이에 대한 물음 을 제기하면서 서예문화를 연구한다. 한글은 타 글자와는 다른 추상문자에서 출발하여 점차 이미지로 변환 되어가는 문자 추상이 중심이 되므로 기호학 관점을 빌어 연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한국은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에서 과학기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의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과학기술은 인류의 보편적 인권이나 한 국가의 장기적인 사회체제의 변화를 유인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이 과학기술 국제협력 및 ODA를 통해 더 큰 전략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회수렴을 위한 거번넌스와 시스템을 사회지향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시민사회와 민간영역의 참여의지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국제협력은 국제정치의 문제를 고스란히 내재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익을 달성하는 것에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기술 ODA는 초국가적 기구 및 INGO 등 복 합적 행위자가 중층적으로 역할을 하고 있는 국제정치질서에서 더욱 중요 한 영역으로 변화해 갈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규보(1168~1241)의 시론의 특징과 그 시적 변용의 미학을 살펴보는 데 있다. 시와 술과 거문고를 너무 좋아하여 ‘삼혹호선생 (三酷好先生)’으로 불렸던 이규보는 경전과 사기와 선교를 두루 섭렵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발흥한 선시는 이규보의 사상과 시 창작의 태도에 지 대한 영향을 미쳤다. 평생을 ‘시마(詩魔)’에 붙들려 살았던 그의 시벽(詩癖) 은 결국 시마에 대한 관심과 그것의 극복으로 연결된다. 그의 시론의 특징 은 시 창작에 있어 감정에 연유하여 발로되는 ‘연정이발(緣情而發)’과 시는 새로운 뜻(新意)과 새로운 언어(新語)로 담아내야 한다는 ‘어의창신론(語意 創新論)’이다. 이규보의 이러한 독특한 시적 이론은 그의 선심의 시심화에서 한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성품 탓으로 벼슬을 제수받지 못한 시기는 오히려 그에게 뜨거운 시혼으로 많은 시가 창작되는 절호의 기회였다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차를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차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번뇌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점도 주목 할 만하다. 특히 진여의 상징인 달빛에서 공(空)을 읽어내는 그의 감수성과 각성의 경지가 고상한 깨달음의 시적 세계로 표현되고 있는 점은 간과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물 속에 비친 달빛이라는 허상을 주목하여 공사상과 연 기사상을 간파하는 그의 선적 사유의 시적 표현은 선시의 미학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밝혔다.
세계 각국은 지진, 테러 등 예기치 못한 각종 재해재난에 대응하여 공공기관, 기업 등 대규모 조직에서 핵심 업무의 중단을 방지하고, 재해복구를 신속히 수행하기 위한 BCP 수립을 강조한다. 특히 지진 등 재해가 많은 일본 지방정부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대상으로 BCP의 의무적 수립을 규정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일본 지방정부의 BCP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조직적 측면, 제도적 측면, 인력적 측면과 동시 에 내각부와 총무성이 실시했던 현황조사를 바탕으로 분석을 수행하였다. 분석결과, 일본 지방정부는 BCP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조직적 측면에서 위기상황을 평상시와 비상시로 이원화하여 BCP 추진체계를 정비하고 있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 내각부의 표준안 및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지방정부가 자체적으로 BCP를 수립하고 있으며, 인력적 측면은 중앙정부의 교육훈련과정을 통해 전문가를 양성하여 교육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황분석에서는 책정완료 기관은 도도부현은 11%, 시정촌은 0.1%에 불과하고, 지진 등을 상정한 BCP 관리체계 정비는 도도부현 21%, 시정촌 5.5%로 광역정부와 기 초정부간에 차이가 나타났다. 또한 BCP 미수립의 이유로는 기관내 논의없음(50.0%), 재원 및 인력 부족 (18.0%), 지식부족(18.0%)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황 결과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 수준 및 인식격차, 추 진체계 미정립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 지방정부에 대한 시사점으로는 조직적 측면에서 BCP 전담추진체계의 이원화 시스템 구축, BCP 전담 추진체계 정비, 제도적 측면에서 BCP 표 준 가이드라인 책정 및 지방정부에 제공, 인력적 측면에서 전문인력기관 설치, BCP 인식확산, 인력양성, ICT부문의 BCP 수립 등을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해양환경 행정조직 및 법체계의 역동적인 진화과정은 환경법적 관점에서 수많은 연구과제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환경의 개념과 범위 설정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최근 논의가 필요한 생활환경으로서 해양환경의 보전을 위한 법체계의 개선방향을 논의하고자 한다. 과거 해양은 인간의 환경으로 인식되지 않거나, 혹은 주로 인간으로부터 거리가 먼 자연환경으로 인식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해양환경에 대한 인식의 중심축이 자연환경에..
In the domain of Korean arts history, the studies on the beginning of the Korean modern arts have been insufficient so far. But there have been attempted to deal with this issue in the various fields of Korean arts. But the field of crafts, compared to the fields of painting or architecture hasn't given us good results about this. This study aims at analyzing the beginning of modernization and the modernity of the ceramic crafts that appeared since the period of transition into modern era.
In the late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various ceramics used by royal class were intensively produced especially in Bunwon(分院) that was operated by government and the ceramics for the general public's daily life were produced actively in local kilns. But various foreign ceramics that were imported due to the opening of ports after the Treaty of Ganghwa-Island(江華島) in 1876 and the privatization of Bunwon in 1884 caused the traditional way of making ceramics to change a lot. And modern techniques of producing ceramics were imported from the West and experts from various countries were invited. Especially, in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morden system of ceramic production was imported from Japan. From the end of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the ceramic process and the distribution changed much, these aspects indicate the modernity of the Korean ceramics.
This paper examined the progression of the aspects of the Korean ceramics that had undergone change since the late period of the Chosun in order to determine the period, the modernity of Korean ceramics began and established. The period of emerging modern ceramics were divided into two periods on the basis of the analysis of the system of manufacturing ceramics and the government policy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first period began when the Chosun opened her ports to foreign powers. After the reformation of systemin the late period of the Chosun, the opening of ports conclusively led to the different framework of the manufacture system that was new to the Chosun. And, in the period of the Great Korean Empire that succeeded the Chosun dynasty around the time of the privatization of Bunwon, modern factories research and education institute for ceramics were established foreign experts with technical skills came into Korea. However, Japan occupied Korea forcedly 5 years after they set up resident-general office in Korea, this caused the modernization. Japan adopted various policies in favor of them and made the manufacturing of the Chosun white porcelain declined fast. Partially the modern technique was adopted making vessels which changed the supply and demand of ceramics. Therefore,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when Korea faced the new modernization without voluntary agreement, can be classified as the second period of modernization. Especially in the period of about 40 years since 1910, the year when Japan began to occupy Korea, there were a lot of changes in the ceramic industry. So this period can be considered as a very important period of modernization.
In the period of the opening of ports, the aspects of manufacture and the supply and demand of Korean modern ceramics began to change and the privatization of Bunwon caused the manufacture system to change rapidly. And through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after the period of the Great Korean Empire, the modernization was pushed ahead forcedly without voluntary agreement. Therefore, it is required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modernity of this period be analyzed by paying attention to the change of situation and system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