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소재로 한 구라타 햐쿠조의 스님과 그 제자과 선종의 임제종을 소재로 한 다치하라 마사아키의 겨울의 유산, 이 두 작품을 인간 삶의 갈등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했다. 일제 강점기에 혼란된 정체성을 찾는 주인공의 도정을 그린 겨울의 유산에서는 주인공의 갈등이 결국 아웃사이드로서의 존재를 거부하고 주류로 편입하고자 하는 내적 갈망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구원보다 삶에 대해 더 깊은 질문을 던져온 주인공에게 작품의 강력한 모티브인 선종은 현실적인 구원의 방식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스님과 그 제자에서는 일본 사회의 전통적 인정과 의리라는 사회규범이 등장인물들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데, 이 작품의 구원은 악을 지닌 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악인정기설로 우리 모두는 본래 이미 구원되어 있다는 믿음과 비승비속(非僧非俗)인 채로 순수하고 성실하게 살아야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 종교적 구원과 현실적 구원은 여전한 평행선임을 보면서, 구원이란 우리 모든 인간의 평생 과업임을 상기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구원에 관한 견해는 전 인류를 두 진영으로, 즉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나누어왔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분의 주권으로 인해 모든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는 신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신학적 근거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나 구원의 전능성과 같은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한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타종교인과 비종교인들의 운명에 대한 명확한 신학적 합의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와 은혜를 통하여 특정 종교전통 안에 있는 개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 여기서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은, 타종교의 가르침이나 종교적 관행 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셨고, 그리고 어떻게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조사한 후, 연구자의 개인적인 신학적 결론을 제안하였다.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적 교회론’과 ‘선교적 해석학’을 거치면서 성서를 선교적으로 해석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구약성서는 포로기를 거치면서 구원신앙과 창조신앙 사이의 긴장이 사라지고 창조주 ‘하나님의 자기 확장’으로서 선교를 이해하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특별한 자질이 아닌 선교적으로 이해되 는 사명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 은혜의 독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삶으로 증언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포로기/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역사 가운데 베푸시는 해방 과 구원의 사건과 창조의 섭리를 고백함으로써 증인이 되는 ‘예배공동 체’로 인식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창조 세계의 정의와 긍휼과 샬롬을 위한 종말론적인 헌신을 요구하셨다.
사람들은 달콤하고 황홀한 사랑, 이것을 낭만적 사랑이라고 이름하여 영원히 그 사랑 속에 머물고 싶어한다. 이것은 신화처럼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다. 기쁘면서도 고통스러운 양가적인 속성을 가진 사랑은 인간의 역사 이래로 화두였고 조선 시대 「주생전」에도 서사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주생, 배도, 선화의 사랑을 낭만적 사랑으로 바라보고 이들의 사랑이 해체된 이유와 사랑의 구원을 살펴보았다. 주생과 배도, 선화는 삼각관계를 형성하여 결국은 비극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만남부터 강렬했고 낭만적 사랑이 갖는 속성들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생의 거짓과 기만으로 불행해졌다. 두 여인의 분노와 질투는 그들의 자아를 부재하게 했고, 지향점이 다른 조건부 사랑은 이들의 사랑을 해체시켰다. 또한 「주생전」은 사회적 장벽과 전쟁과 같은 세계의 불합리한 횡포에 항거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가볍고 연약한지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본고는 「주생전」을 차지하고 있는 상실 모티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환대함으로 사랑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구약 성서 외경 「유디트」에서 소재를 취하여 만들어진 헤벨의 드라마 유디트는 신정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헤벨은 신의 절대적 선함과 그에 대한 믿음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냉담한 특성으로 인해 기독교인의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는 현실을 성찰한다. 이것이 성경과의 명료한 차이점으로, 드라마에서는 신의 존재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성이 연출된다. 다니엘과 유디트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구원을 위해 선택된 신의 도구들이지만, 현실의 비난과 내적 분열을 감내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다. 그 비극성의 책임은 인간뿐만 아니라 신에게도 있다. 신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한 인간의 고통을 책임지지 않는 자의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헤벨의 드라마 유디트는 기독교의 신과 구원 이념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본 논문에서는 2020년 부커상 수상작인 더글러스 스튜어트의 셔기 베인에 나타난 구원의 문제를 다룬다. 아일랜드계 이민자 3세대 출신으로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노동자 계층의 셔기는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가 중독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바람기 많은 아버지와 의붓형 그리고 누나가 차례로 집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셔기는 매일 아침 어머니가 변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반목 관계가 난무하는 가운데 두 종교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셔기는 윌리엄 제임스의 낙관주의적 성품을 지닌 종교적 인간으로 볼 수 있다. 제임스가 말하는 낙관주의적 성품은 삶의 주요 관심사를 행복으로 보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 종교적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 이에 의해 셔기의 10여 년의 삶을 돌아보면서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끌어안는 구원의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의(Samuel Taylor Coleridge)의 노수부의 노래 는 20 세기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었던 실존주의에 나타난 부조리성 인식과 구원의 문 제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합리적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세계 의 비합리적인 침묵 사이의 대립 과정은 노수부가 겪게 되는 일련의 초자연적 인 상황을 통해 드러난다. 노수부의 노래 는 여러 부조리한 상황을 매우 사실 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현대 실존주의 문학이 천착하 고 있는 주제를 매우 선구적으로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현대 실존주의적 관점에 서 삶의 부조리성과 구원의 의미를 제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수부가 겪게 되 는 과정을 통해 삶의 부조리한 비극을 촉발하는 것은 무엇이고, 극단적인 부조 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인간은 어떤 구원을 기대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구 원의 실질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노수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의 부조리성과 그것에 대한 자각을 통한 구원의 문제를 보여준다.
1998년 발표되어 전 세계적인 흥행과 더불어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 던 피터 위어(Peter Weir) 감독의 영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는 미디 어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실재와 가상세계의 대조를 통해 실재가 점 점 허구적인 세계를 닮아가고 있음을 매우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광 고와 자본주의로 야기된 삶의 이중성을 풍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인 확산에 대한 냉소적인 견해를 직,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트루먼 쇼>는 현대사 회의 구조 속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통해 미디어의 기만성으로부터 자신을 해 방시키는 과정을 자유의지를 통한 구원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트루먼 쇼>는 등장인물의 이름, 트루먼(Truman)과 크리스토프(Christof)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일종의 종교적 알레고리를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구원의 문제, 특히 전지전능해진 현대미디어를 극복해가는 개인의 여정을 보여준다. 미디어 에 종속되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맹목적인 시청자들과 달리 시스템의 통제 와 억압적인 미디어 세계를 탈출하려 하는 트루먼의 각성과 행동은 크리스토프 로 상징되는 미디어의 신적인 권위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극복하는 내적성찰과 그것을 통한 개인의 구원을 보여준다.
본 논문은 제임스 볼드윈의 소설,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에서 나타 난 볼드윈의 블루스의 정신과 작품 속에 나타난 구원과 사랑의 블루스의 의미를 분석했다. 이 소설에서 볼드윈이 그리는 미국 사회의 흑인에 대한 탄압과 편견과 더불어 이에 대응하는 흑인 남녀의 구원과 사랑의 가능성을 블루스라는 음악적 장르의 적용을 해석했다. 볼드윈이 묘사한 소설 속 블루스의 의미는 흑인의 삶과 투쟁을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다. 볼드윈은 이 소설 속의 젊은 흑인 청년, 파니 헌트가 한 경찰에 의해 보복적으로 강간의 누명으로 잘못 감금되었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블루스의 정신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볼드윈은 주인공 파니의 역경은 물론 파니를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가족들 간의 사랑을 구원과 사랑의 블루스적 감성으로 그려낸다. 볼드윈이 소설 속에서 그리는 구원과 사랑의 블루스는 흑인의 고통과 좌절의 경험 속에서도 흑인 고유의 자산이자 언어인 블루스의 유산을 통해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과 해방의 원천인 것이다. 이러한 볼드윈의 블루스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이해를 논의하고 분석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존 웨슬리의 영원한 시간과 현재적 구원과 열린 구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원을 과거의 영원과 장래의 영원으로 분류한 후, 더 나아가 장래의 영원을 행복한 영원과 불행한 영원으로 구분한다. 웨슬리는 현생의 목적이 단지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현생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행위이다. 웨슬리는 구원은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의 보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주장한다. 웨슬리 신학에서 큰 구원과 열린 구원 은 동의어다. II 장에서 웨슬리의 영원한 시간을 과거의 영원과 장래의 영원, 행복한 영원과 불행한 영원으로 구분해 다룬다. III 장에서 웨슬리 의 현재적 구원을 죄로부터의 해방, 은총의 수단과 마술적 태도, 참된 종교인 내적 종교로 나눠 다룬다. IV 장에서 웨슬리의 열린 구원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V 장에서 이 논문의 결론을 맺는다.
본 연구는 이승우의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을 종교적 구원의 문제로 읽어나간다. 이 작품에서 종교적 구원의 문제는 신화 속 인물인 에리직톤의 여러 가지 초상을 그리는 과정에 존재한다. 삶의 실천으로서의 구원은 여러 남성 인물들을 통해 시도되지만 이는 결국 실패와 미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구원은 여성 인물을 통해 새로운 삶과 구체적 실천으로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소설 속 여성성의 문제는 그 한계를 보여주는데, 구현된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교화되고 신비화되고 낭만화되어있다는 점이다. 이승우는 종교와 철학, 인간 존재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 왔다. 통상 종교의 문제에서 소외되기 쉬운 여성이 종교적 실천과 구원의 적극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기존의 종교소설이 보여주지 못 한, 이승우 소설만의 의미 있는 성취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 글은 60년대 이청준 소설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아도르노 비판미학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하였다. 의학지식의 대중화를 통해 문학 분야에 적극 유입 됐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한국 지식담론장의 비판인식에 영향을 끼쳤던 아도르노 비판미학이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탐구한 것으로 이를 통해 구원의 서사로서 이청준 소설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청준 소설은 이윤의 목적성에 훼손된 근대의 부정성을 공격하며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무목적적 미의 세계를 유토피아로 투시한다. 현실에 대한 분노를 가학적 공격성을 통해 표현하는데 여기에 문화지식이 중층적으로 개입된다. 타나토스의 본능을 위험한 충동으로 부정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고통으로만 구원이 투시될 수 있다고 강조한 아도르노 미학을 경유하여 비판적으로 전유되고 있다. 소통과 화해 대신 분노와 불화를 통해 구원을 모색하는 것으로 격자소설 양식, 성찰적 서술자 운용, 거짓말과 말없음 등 전통 문법을 해체하는 형식적 고안들도 비판미학과 연결된다. 이를 통해 문화지식담론을 전유하며 유토피아를 희구한 이청준의 구원의식과 사회의식이 온당하게 이해되며 70년대 이후로 비판미학의 수용 시기를 진단한 연구도 재론될 수 있다. 이론이나 잡지와 함께 소설은 문화지식 수용의 텍스트로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점에서 60년대 이청준 소설은 아도르노미학 수용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논문은 어거스트 윌슨(August Wilson)의 연극에 나타난 기독교와 아프리카 전통 종교 사이의 긴장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비전과 의미를 탐구한다. 어거스트 윌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의 집단적 투쟁을 상징하기 위해 미국 사회가 흑인들에게 가한 억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윌슨 의 작품에는 종교와 신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씨름하는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두 작품 『피아노 레슨』과 『울타리』에서 기독교와 아프리카 전통 종교의 역할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종교가 갖는 뚜렷한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해는 흑인들에게 교훈적 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가 극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흑인들에게 영적 세 계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그들의 삶에서 보다 즉각적이고 보다 가시적인 특징에 대해 보다 건강한 인식을 함양하라는 요구다. 결과적으로, 본 논문은 윌슨의 연 극이 미국 흑인들의 삶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현대적인 논평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본고는 이성교 시의 기독교적 형상화와 구원의식을 구명했다. 이성교는 1956년 등단 후 주로 고향을 소재로 한 향토적, 전통적 서정시를 선보였다. 그러나 제4시집 이후 그는 강원도의 일상적․전통적 소재에 신앙적 감흥과 성서적 사건을 연결한다. 그는 일상의 ‘눈(雪)’을 기독교적 ‘거듭남’으로, ‘까치소리’를 ‘영 성의 소리’로, ‘봄’을 부활을 현시하는 ‘영적 회복’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예수의 형상으로 시화된다. 예수의 형상화는 ‘어머니<임<그 사람’으로 변조된다. 어머니는 실제적(a real) 어머니(이성교의 어머니)에서 실재적 ‘임(당신)’ 으로 형상화되며, ‘임’에서 ‘그 사람’으로 예수의 형상화가 다시 확장되어 자기 희생적 삶과 구도자적 삶을 객관화하여 노래하게 된다. 이성교는 강원도를 시적 배경으로 삼아 실제 지리적 공간을 이상화된 지정학적 구원의 공간으로 노래한다. 그는 풍요의 유년 공간 월천(삼척)을 이상 실현의 공간 강릉(영동지역)으로 확대하며, 강릉 일대는 인심이 가득한 본향으로서의 구원 공간 강원도로 다시 한 번 확장된다.
『깊은 강 』은 엔도의 평생을 사로잡고 있던 문학적 테마인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을 탐구한 역작이다. 마음의 상처와 죄의식을 치유받기 위해 인도여행을 떠난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힌두적 환경과 갠지스 강을 통하여 개별적인 종교 체험을 하고 구원을 얻는다. 인간의 고통을 무화시키는 갠지스 강은 기독교의 부활과 불교의 전생까지도 함께 포용해 흐르는 신적 실재로 나타난다. 어머니로서의 강은 영혼을 정화하며 초월을 지향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엔도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서양의 하나님을 체화하지 못하고 종교다원주의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 결과 예수는 가쿠레 기리시탄의 고통을 위무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 상징이 되었다. 예수는 인간의 모범을 보여준 성자였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간의 종교성을 고양시키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관점에서 은유적 성육신에 해당하고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성육신은 반복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예수를 본받은 오쓰의 성육신은 일본인의 심성에 적합한 모성적 신의 원형으로 떠오를 수 있다.
디지털 기술혁명의 시대는 인간 삶의 환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고등교육 분야에서도 혁신교육은 필수가 되었고, 21세기 인문·교양은 디지털 문해력 향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학문은 문학과 종교라는 학제 간 연구에 주목함으로써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기독교 학문의 방법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언어보다 이미지에 더욱 관심을 두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디지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언어에 대한 꼼꼼한 읽기, 즉 ‘디지털 문해력’이 필요한 것이다. 조나단 모스토우의 <대행자>는 디지털 기술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과 결과에 대한 종교·철학적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두 주인공인 캔터 박사와 그리어는 디지털 기술혁명의 시대가 이끄는 탈인간화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캔터 박사는 대행자의 창시자이지만 기술 문명에 의해 자기 아들을 잃게 되고, 그리어는 대행자에 중독된 아내와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인류문명의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와 삶에 대한 종교·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탈인간화를 예방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계 미국작가 이창래는 미국사회의 변방에 위치한 인물들에게 관심을 보여 왔다. 『투항자』에서 백인여성 실비는 미국사회의 바깥 또는 가장자리에서 살아온 소수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이 소설이 독자들을 인도하는 종교적 담론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투항자』에서 말하는 종교는 특정한 제도권 종교가 아니라 ‘자비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실비는 전쟁의 상황에서 부모님과 첫 사랑을 잃은 후, 평생을 ‘자비의 도구’로 살아온 부모님의 신념을 따라 자비의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실비에게 자비의 실천은 투항의 대상에게 자신을 성적으 로 내어주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한국 전쟁 후 새희망고아원에서 선교사의 아내로 온 실비와 미국인 참전군인 헥터, 전쟁고아 준이 만나고, 세 사람의 전쟁 서사와 서로를 향한 욕망이 교차된다. 실비는 고아원에서 준이 일으킨 화재 사고로 죽지만, 죽음을 통해서 ‘자비야말로 유일하게 참된 구원’이라는 금언을 실현 한다. 살아남은 준과 헥터는 실비의 책, 『솔페리노의 회상』을 좇아 이탈리아 솔페리노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실비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삶의 일부로서 죽음을 대면하게 된다. 『투항자』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요청하는 정동은 자비이며, 자비는 죽음에의 투항을 넘어 타인과 삶에로 투항하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