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되고 종교 간의 더욱 활발해진 상호 작용으로 금세기가 “종교의 세기”로 불리고 있으나 이러한 상호 작용은 대부분 종교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증가시키는 역할만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인식을 가지고 본 논문은 7세기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갈등 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을 중심으로 이것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시대에 한국 교회는 어떠한 선교적 태도와 교훈을 가져야 하는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위하여 세계 도처에 서 종교를 빌미로 한 무력을 행사하는 글로벌 지하디스트 무브먼트 (Global Jihadist Movement)의 동기가 되는 지하드의 신학적 개념이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적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설명한다. 이러한 일부 무슬림들의 호전성에 대한 상호 작용으로서 유럽의 기독교 인들이 만들어 낸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의 국내적 사례를 예멘 난민과 대구 모스크 건립을 둘러싼 논란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이러한 충돌과 폭력을 넘어서는 환대를 통하여 두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인류 공통의 과제인 평화와 진정한 복음 증거의 구현으로서의 기독교 선교가 지향되어야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표적인 신유물론 학자인 Karen Barad의 행위적 실재론을 중심 으로 ICF에서 제시하는 코치의 8가지 핵심역량을 분석하고, 기후변화와 환경위 기에 대응하는 4세대 코칭을 위한 그 철학적인 기반을 제시하고자 탐색적 연구 를 실시하였다. 신유물론은 현대사상의 총아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그 대표 주 자인 Karen Barad의 행위적 실재론은 삶의 만남을 강조한다. Barad의 신유물론 적 관점에서 본 ICF 핵심역량의 개정은 첫째, 윤리-존재-인식론적 관점에서 응 답하는 실천적 존재로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한다. 둘째, 핵심역량이 명사형에서 동사형으로의 변형하여, 행위역능의 실천적 현상으로서 하기(doing)와 되기 (being)를 강조한다. 이 외에도 8가지 핵심역량은 Karan Barad가 이야기한 행위 적 실재론의 적용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단, 코치의 핵심역량이 인간중심적 세 계관에서 머물러 있고, 코치와 고객의 만남이 얽힘과 내부-작용에 집중하기 보 다는 이분법적 상호작용에 머물러 있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향후 기 후 및 생태계 위기에 대응-능력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핵심역량 및 코칭모델 의 제안이 필요할 것이며, 본 연구는 신유물론이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코칭 핵 심역량과의 첫 만남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부버에 따르면 ‘나—너’ 그리고 ‘나—그것’은 사람이 세계에 대해 취하는 이 중적인 태도를 표시한다는 의미에서 근원어라고 불릴 수 있다. ‘나—그것’은 사 물의 세계다. 내가 ‘그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타인을 대상물로 소유하고 그것 으로부터 사물성을 이끌어낸다. 이때 나는 대상물을 소유하는 주체로서 세워진 다. ‘나—너’는 관계의 세계다. ‘나―너’는 내가 타인을 대상물로 인식하지 않 으려고 노력할 때 자기중심주의가 극복될 수 있고, 자기중심주의가 극복될 때 자기중심주의 너머에 있는 사이의 영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아의 의도에서 도 출되지 않은 이 사이의 영역에서 나는 직접적인 상태로 너와 관계를 맺을 수 있 다. 부버는 ‘나—너’를 다른 말로 만남이라고 부른다. 데이지 밀러: 한 연구 에서 윈터본은 데이지를 ‘나—그것’으로 대한다. 윈터본은 데이지를 본 순간 그 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그는 데이지에게 호감을 느끼 면서도 그녀에게서 냉철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윈터본은 데이지를 범주화하 고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그녀를 추론과 인과율의 세계에 가둔다. 결국 윈터본은 데이지가 창녀 같은 여자라고 확신하게 되고 그의 의식에 그녀는 일정한 내용 을 지닌 사물과 같은 ‘그것’으로 저장된다. 결국 윈터본의 이런 태도는 데이지 의 죽음을 초래한다.
예이츠와 엘리엇 사이의 관계 규명을 위한 시도는 있었지만 좀처럼 그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이 두 시인 사이의 관계 규명을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엘리엇과 예이츠 비교 연구의 의의와 이 두 시인 사이의 첫 만남에서 시작하여 예이츠와 엘리엇 상호 간의 평가와 마지막으로 엘리엇 작품 속 예이츠의 투영 모습을 고찰했다.
이 논문은 『매의 우물에서』와 『이머의 유일한 질투』가 어떻게 예이츠 자신의 독특한 영성에 대한 생각을 문화적 민족주의와 결합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두 극은 쿠훌린을 주제로 사용함으로써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인 『매의 우물에서』는 쿠훌린이 영생의 샘물을 찾아나선 젊은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쿠훌린은 결국 샘물을 얻지 못하고 떠난다. 두 번째 작품인 『이머의 유일한 질투』는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극에서 쿠훌린은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인 후 미쳐서 파도와 싸운 후 의식을 잃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논문에서는 두 극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노 극 『요로』 (養老)와 『아우이노우에』(葵上)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예이츠가 어떻게 노 극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변형시키는지에 대하여 알아본다.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적 기제는 사유(私有, private possession) 이다. 그런데 미래에 예상되는 사회경제적 주요 현상으로 공유(共有, sharing)가 지목되고 있다. 공유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자연스런 귀결이 될 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적 모델인지는 분명치 않다. 중요 한 것은 공유 개념에 대한 분명히 의미 정리와 공유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 적 사고, 그리고 올바른 방향의 모색일 것이다. 이에 불교 특히 관음사상의 주요 상징들이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관음 사상은 공유사회에서 재해석하여 되새길 만한 세 가지 주요한 상징 을 내포하고 있다. 자비(慈悲, compassion), 이근원통(耳根圓通), 천수천안 (千手千眼)이 그것이다. 자비가 보여주는 공유에 필요한 핵심적 가치는 바 로 공감이다. 또 원통(圓通)이 보여주는 공유에 필요한 핵심적 가치는 편들 지 않고 가리지 않음이다. 원이 나타내는 ‘골고루’(regular, even)의 상징성 이 이를 나타낸다. 그리고 천(千)은 순서상의 차별성을 극복하고 ‘한꺼번에’ 의 상징을 통해 공유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관음사상에 내포된 공유적 관점은 단순히 종교적 이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삼계교(三階敎)라는 교단조직을 통해 실제적으로 구현 되기도 했다. 따라서 관음사상에 내포된 공유적 상징성은 현대 공유사회의 방향성을 모색하는데 있어서도 시사점 내지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종교가 세상에 참여하고 구원하는 방식이다.
본 논문은 역사적 관점에서 7세기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주요 논쟁점을 살펴본다. 본 연구의 주된 내용은 무슬림들은 기독교인 들이 하나님, 예수, 마리아의 삼신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이슬람을 기독교의 한 분파나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테오도어 바르 코니는 다마스커스의 요한처럼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무함마드를 이단의 두목으로 보았다. 가경자 피터, 루터, 칼뱅도 이슬람 을 이단으로 단정하였다. 무슬림들은 예수의 하나님 되심과 구세주이심 을 부인한다. 루터와 칼뱅은 무슬림들이 예수를 구원자, 중재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다고 보았다. 루터와 칼뱅은 이슬람을 하나님이 범죄한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하시 는 진노의 막대기로 보았다. 루터는 무슬림을 기독교의 대적자로 보았 고, 칼뱅은 이슬람은 거짓 종교(우상숭배)이며, 무함마드는 배교자, 협잡꾼, 악마의 하수인, 그리고 적그리스도로 간주하였다. 새로운 무슬림 전도방안을 제시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대 이슬람 변증의 주요 논쟁점이 무엇인지 우선 인식해야 한다. 이슬람에 대한 공격적인 선교 를 지양하고, 이슬람 선교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성경과 유사한 꾸란의 내용을 활용하여 무슬림 전도의 연결고리(bridge)로 활용해야 한다.
한무숙의 『만남』은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천 주교의 전래와 그 과정에서의 고난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작품 에서 천주교는 물론 탄압의 주체인 유교, 그리고 불교와 무속까지 ‘모순적 공존’ 을 보여주고 있다.『만남』에는 관조와 초월의 시각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대 상과 거리를 두고 사심 없이 바라보는 미학적 향유로서의 관조를 통해 현상이 대립이나 갈등보다 ‘아름다움’으로 인식된다. 또 세계를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초월의 시선으로 조망함으로써 주술적 신비를 인정하고 인위적 인 혁신보다 현존하는 제도와 윤리를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두 개의 시각은 한 무숙 문학의 중요한 미학적 특징으로 가부장적 억압을 자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작가의 체험과 연결된다. 작가는 결혼 후 전통적 인습으로 인해 자아 상실을 경험하지만 정면의 도전보다 억압적 요구를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비판적 항의를 실현하는 역설적 저항을 보여준다.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이탈하 기보다 안에서 억압을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모순을 통찰하는 밖의 시선을 확보 하게 된 것으로 경계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시각을 통해 인식적 저항을 실천 하고 있다.
예이츠는 인생과 예술에서 인간의 조건을 초자연계와 관련지어 정의하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경험은 초자연적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라는 소신을 연극에 적 용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그의 연극적 과제는 어떻게 초자연적인 존재를 관객이 이 해할 수 있도록 무대 위에 올리는가 하는 것이었다. 유리창에 새겨진 글자들은 무 대, 인물, 언어 등에 있어 사실주의적 틀 속에 서양인들이 익숙한 강령회(séance)를 극 중 극 형식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초자연적 존재를 관객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과제를 해결하였다. 최면상태의 영매는 18세기 작가 스위프트의 애정관계를 전달하는데, 예이츠가 이상적 시대라고 생각한 18세기와 현대 아일랜드를 대조시킴으로써 현대 아일랜드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현대 아일랜드가 스위프트 시대의 마스크를 씀으로써 위 대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토대 위에서 움직이는 시민 사회이고, 그 핵심 원리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경쟁이다. 불교는 고립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가 지닌 이기심보다는 자비심과 협력에 주목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념과 대립적인 관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불교가 자본주의와 만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립관계 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저항담론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그것이 지니는 역기능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조계종단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계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자본주의와의 만남 과정에서 지속적인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한국불교가 자본주의와의 만남에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은 세 차원으로 나누어 제안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 자본주의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성찰할 수 있는 대안적 관점을 적 극적으로 제시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를 제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본주의적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위로와 치유의 방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불 교 사회이념을 제안하는 일이다. 마지막 방안은 연기적 관계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각자 삶의 영역이 지니는 고유성과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 연기 적 독존(緣起的獨尊)의 이념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본 논문은 모순을 안고 출발하는 글이다. 언어를 부정하는 선의 세 계와 언어가 기본 자료인 시가 서로 동질성을 갖는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을 전제로 이 글을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자 자신이 선시라는 용어의 사용에 항시 주저스러움을 금하지 못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첫 이유가 선은 언어를 부정하려 하여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으라[離言絶慮]라 하는데 언어가 제1차적 도구인 시 와 선이 하나가 되는 선시라는 용어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소박 한 회의에서이다. 그래서 여기서 선과 시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상징성(象 徵性)이라는 답을 얻게 되었다. 시는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지극히 상징화된 언어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독자는 이 상징된 언어 를 다시 상상을 통하여 그 표현된 원형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사(禪師)들이 진여의 실상을 고도의 상징으로 포장하여 대중의 교 화 수단으로 삼는 점과 동일하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마하가섭(摩訶迦葉)은 뛰어난 상징적 예술가요 지혜로운 상상적 청중인 셈이다. 석가여래가 영산 에서 치켜든 꽃 한 송이의 상징을 정확하게 상상한 가섭의 미소는 영 산의 무대공연에서 극도의 환희적 연출이었던 것이다. 의사소통이라 는 인간의 정신적 교감이 있어온 이래 이 염화(拈華)의 꽃 한 송이와 미소의 대답보다 더 분명하고 정확한 전달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 한 적이 없다. 이러한 염회미소(拈花微笑)적 언어가 바로 선시의 출 발인 셈이다. 이렇듯 선과 시의 만남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 송대 (宋代) 엄우(嚴羽, 1185~1235)의『滄浪詩話』이었으니, 시도(詩道)나 선도(禪道)가 다같이 묘오(妙悟)에서 출발한다 하였다. 이어 17세기 명대(明代)의 왕사정(王士禎,1634~1711)이 명확한 정론을 내렸으니, “사다리를 버리고 언덕에 오르는 것을 선가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라 이르고, 시인에게는 조화의 경지라 하니 시와 선이 하나로 되는 것이 똑같아 차별이 없다.[捨筏登岸禪家以爲悟境詩家以爲化境詩禪一致 等無差別]”(香祖筆記)라 하여 선에서 깨달음의 경지라 하는 것을 시 인은 조화의 경지라 하여 차별이 없다 하였다.
본 연구는 직업사회복지와 코칭의 통합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사회복지와 경영간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였다. 사회복지와 경영의 첫 번째 만남은 산업혁명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산업사회에서 기업 내에 자선적 성격의 사회복지제도가 생성되고 정착되면서 이루어졌다. 순수하게 자선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던 기업의 자선복지가 생산성 향상과 사회통제의 목적아래 기업의 인사/노무관리 제도로 정착하였으나 과학적 경영방법의 출현으로 인해 기업에서 퇴출되었지만 자선적 기업복지와 과학적 경영방법이 통합되어 인사관리제도가 형성되었다. 두 번째 만남은 1970년대 초반에 이루어지는데 과거의자선적기업복지에서 전문적인 사회복지실천기술을 기반으로 한 근로자 지원프로그램과 선택적 기업복지제도를 포함하는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직업사회복지로서 기업에 진출하게 된다. 전기한 두 가지 직업사회복지 프로그램이 기업의 이익과 생태에 잘 부합되어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되고 생산성 향상과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의 두 가지 목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확산 일로에 있다. 세 번째 만남이 본 연구에서 제시하는 만남으로서 직업사회복지의 한 분야인 근로자 지원프로그램과 근래 새로 부상하는 코칭의 제 분야 가운데 기업코칭과의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 근로자 지원프로그램과 기업코칭을 학문적인 성격, 목적, 과정, 효과, 서비스 대상자에 측면에서 비교한 결과 공통되는 부문이 대부분이어서 서로 간의 통합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두프로그램을 연결시키고 각각의 프로그램 내에 상대방의 프로그램을 적절히 접목 시킨다면 근로자 지원프로그램과 기업코칭의 통합적인 프로그램 개발이 가능하게 되어 근로자에게 더욱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복지증진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고 기대된다.
최근 들어 다양한 앎의 방식과 다차원적인 삶의 측면들을 이해하는데 관심이 확대되면서 내러티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육학에서도 내러티브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물들의 축적되고 있지만 내러티브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적, 개념적 탐구는 미약하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탐색해보려고 한다. 첫째,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식론적 토대가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Rankin(2002)의 설명을 토대로 내러티브의 개념을 이야기의 결과물, 사고양상,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측면에 비추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러티브 관점이 교육현상을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주는 시사점에 대해 논의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