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이후, 한국교회의 전도와 선교가 정체와 침체를 맞이하였다. 4차산업혁명과 포스트코로나시대에 한국교회가 붙잡고 가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영혼구 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혼구원에 전 생애를 바친 김홍도의 설교, 목회, 사역과 신학이 한국교회와 선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구령열에 대한 선교학적 관점을 김홍도의 구령열이 담긴 「불기둥」을 중심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더욱이 연구자는 김홍도가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미친 영향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살리는 ‘구령열’ ‘영혼구원과 복음전도’에 대한 선교학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김홍도의 영혼구원과 사회봉사와 사회에 대한 공공성 의 통전적인 선교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평가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그리고 김홍도를 통한 한국교회의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의 통전적 선교 를 논의하고, 전망하고자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백치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고자 했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특히 그 그리스도 이미지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기초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 요한복음을 깊이 읽으며 그 내용을 자신의 문학 작품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하고 반영했다. 그러한 경향은 백치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아름다운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해 므이쉬킨이라는 주인공을 설정하고 요한복음의 그리스도 이미지를 그에게 부여한다. 요한복음을 토대로 백치에서 강조되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성육신, (2) 유로디비 및 사랑, (3) 거듭남과 변화, 부활, 그리고 이로 인한 영생. 강생의 소설 백치는 주인공 므이쉬킨을 통해 강생한 그리스도를 형상화한다. 물론 므이쉬킨은 때로 유로디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를 통해 요한의 예수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가 요한복음을 읽고 해석하여 자신의 작품에 투영한 내용을 토대로, 독자들은 요한복음을 새롭게 읽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요한복음은 거듭남과 변화의 책이며, 이를 통한 영생을 추구하는 책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구원에 관한 견해는 전 인류를 두 진영으로, 즉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나누어왔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분의 주권으로 인해 모든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는 신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신학적 근거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나 구원의 전능성과 같은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한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타종교인과 비종교인들의 운명에 대한 명확한 신학적 합의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와 은혜를 통하여 특정 종교전통 안에 있는 개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 여기서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은, 타종교의 가르침이나 종교적 관행 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셨고, 그리고 어떻게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조사한 후, 연구자의 개인적인 신학적 결론을 제안하였다.
이 글은 코로나-19시대를 맞이한 한국 상황에서의 복음전도 사역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나 홀로 문화 로 대변되는 극단적 개인주의가 한국사회의 전반에 만연하게 되었고, 사회 전체에 만연한 우울감과 세대 간의 이념적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 교회의 상황은 더욱 어려운데, 정부의 현장예배 금지조치는 출석 성도 숫자의 급감과 가나안 성도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모이는 교회론 중심의 한국 성도들에게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 게 하였다. 또한, 정부의 방역 조치에 대한 일부 보수적 교회들의 반발과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한국교회 는 한국사회 안에서 심각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역교회가 어떻게 복음 전도의 사명을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지속하고 있는지를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를 분석한 후, 필자는 코로나-19시대의 새로운 복음전도 사역의 방식으로 1) 영상을 통한 접근, 2) 이야기를 통한 접근, 3) 삶을 통한 접근, 4) 환대를 통한 접근을 각각 제안하였다.
로마제국 2~3세기에 발생한 대규모 전염병을 겪는 초대교회와 한국전쟁이라는 위기를 겪은 한국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전도의 방향과 목적을 정립해갔는지 살펴본다. 각각 사회적 질서의 아노미 현상이 발생하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전파 그리고 교회의 성장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전도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가 마주하는 어려움을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써, 전도의 기회를 모색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위기가 아닌, 복음전파의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 교회 내부의 결속과 회복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여 교회가 사회에서도 유익함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 중심의 전도가 아닌 삶 중심의 전도를 모색해야 한다. 더 나아가 변화된 코로나 이후의 환경에서 전도의 새로운 영역과 방법에 대하여 도전해야 한다. 폐쇄적인 종교모임이 아닌, 개방적인 네트워크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성장하여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의 형편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본 연구는 선교적 교회론 태동에 있어서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선교신학 안에 나타난 교회와 선교에 대한 선교신학 논쟁에 관한 연구이다. 두 진영이 갖고 있는 신학적인 입장과 차이들은 교회와 선교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들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선교에서의 교회 위치와 삶의 자리를 각각 달리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교에 대한 교회 역할에 있어 에큐메니칼 입장은 사회 참여와 변혁적 삶에 보다 치중하는 신학을 강조했다면, 복음주의 입장은 복음 전도와 영혼구원, 교회 개척에 보다 치중하는 신학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의 인식론적 변화들은 화해를 모색하는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삶의 자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롭게 인식했다. 무엇보다 두 진영의 지속적인 협력 모색은 통전적 선교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상호간의 선교신학 보완을 위해 화해를 모색하게 되었다.
본 논문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사도요한의 눈으로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높고 크고 깊으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세상’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들에 대해 비교하여 살펴보고, 또 ‘이처럼 사랑하사’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특별히 요한복음 3장 16절과 대조를 이루는 14-15절 말씀 중 ‘놋뱀’에 대해 한발 더 들어가 그 말씀 을 통해 지금을 사는 신앙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복음의 배경이 되는 마태공동체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차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의 선교명령에 따라 열방을 향해 선교하였고, 동시에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선교하 였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가 유대인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다윗의 혈통 을 이은 왕이자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마태복음 전체의 구성을 모세오경과 유비시켰다(analog). 또 왕으로 온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보다 ‘천국’(Kingdom)을 선호하며 ‘왕’(King)의 복음의 특징을 드러낸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결론이자 핵심인 ‘대위임령’을 천하의 제왕이 등극하는 형식,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로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선교 명령은 결국 그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가르치고 고치며 훈련했던 모든 것들이 ‘선교적 제자도’로 집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 논문은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운동과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인, “사중복음”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먼저,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운 동은 이 시대를 위한 가장 효과적이며 적합한 선교방법론임을 밝힌다. 이미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 특별히 2세대들을 세계선교를 위한 자원으로 세워가자는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운동은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선교방법론임에 틀림없다. 선교운동은 그 운동을 가능케 하는 신학적 토대와 근거가 필요하다. 필자는 사중복음이 한인 디아스 포라 선교운동을 위한 신학적 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사중복음의 각각의 주제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성결교회의 신학을 넘어,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할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 포라들이 만일 사중복음의 신학으로 훈련되어 있다면, 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훌륭한 선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에이전시 신학의 근거와 내용 그리고 방법을 Sendung의 철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선교 혹은 에이전시로 번역되는 Sendung은 요한복음서의 핵심 개념으로 60회 이상 사용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빛과 어둠, 하늘의 일과 땅의 일, 영생과 멸망 사이의 이원론적인 갈등은 Sendung 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음서의 중심 주제인 표적과 영광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보냄(Sendung) 받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오르락내리락 할 때 나타나고 있으며, 말씀인 로고스가 육신이 된 사건은 아버지의 Sendung 때문이었다. 에이전트의 모델인 예수는 자기 정체성을 έγώ είμι (에고 에이미)를 통해서 계시하는데 연결자 예수의 정체성은 그가 행한 행위에 의해서 아버지께 영광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복음서에 나타난 Sendung의 철학적, 선교학적 분석은 주객의 사이에서 주체 쪽으로 객체의 방향을 향하게 한다. 에이전시 신학은 Sendung 가운데 나타난 연결 신학이며, 행동신학이며 제자도를 실천하는 사도적 신학으로서 절대주체이신 성부 하나 님을 향해 빛과 생명과 선한 능력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나가도록 학문적 근거를 제공하는 신학이다.
통일선교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생애사적 증언에 기초한 북한의 정치·사회·경제·문화는 물론, 복음 환경과 같은 상황적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졸저의 생애사 주인공 강철수(가명)는 북한이탈주민으로서 현재 남한에서 기독교 복음사역을 하고 있다. 이 연구는 강철수가 복음을 수용하고 북한선교 사역자가 되기까지의 생애사를 로젠탈 (Ronsenthal)생애사 연구방법으로 분석했다. 특히 강철수가 복음을 접하게 된 계기, 수차례의 탈북, 체포 및 수감생활 등 한국에 입국하기 전까지 생사를 넘나들던 시기, 그리고 한국 입국과 그 이후 신학대학원에서의 공부와 북한선교사역의 시작 등 현재까지의 그의 생애사를 분석했다. 분석결과 중국에서 복음을 전해 준 두 분의 영적아버지와 한국에서 북한선교의 비전을 심어 준 영적어머니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드러났다. 강철수의 신실한 믿음은 준비 된 인적자원 (human resources)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통일선교 시대를 맞이하여 사람을 준비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화와 산업화가 이 세상을 축소시킴에 따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의 지형도 역시 변하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인들이 이제 일상생활 속에서 타종교인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만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 종교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목회자나 선교사와 같은 기독교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닌, 교회에 출석하는 일반 교인들에게도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종교에 대한 연구의 기초 연구로서 복음주의 종교 신학은 지금까지 주로 구원론적 혹은 기독론적 관점에서 논의 되어 왔다. 그러나 일단의 현대 기독교 종교 신학자들은 이렇게 종교 신학의 과제를 구원론과 기독론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종교 신학을 너무 편협한 학문 영역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은 종교 신학 연구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성령론적 접근법이 새로운 방법론으로 등장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았을 때, 성령론적 종교 신학은 창의적이 고 연구의 가치가 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방법론은 여전히 더 깊은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미래의 복음주의 종교 신학의 과제다.
본 연구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에 관한 신학적인 유산과 그 내용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위대한 신앙의 거장들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실천하며 세상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특별히 웨슬리는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큰 사명이 복음전도라고 생각하였으나, 동시에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종교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웨슬리의 이해는 창조와 선행은총, 칭의와 중생, 성결과 회복 등 구원과 연관된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 안에서 체계화 되었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개인을 구원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4년 로잔 선언은 이러한 전도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계를 재정립하며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개인의 구원과 사회적 책임을 균형 있게 실천할 수 있도록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고 구조적인 변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면, 한국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큰 동력이 여기서부터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요한복음의 선교적 동인과 선교주제를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고찰한다. 복음전도를 기록목적으로 명시한 요한복음은 비르카트 하-미님과 성전파괴가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선교의 동인이 되어 선교문서로서의 지향점을 갖는다. 1-4장의 하나님의 선교 주제는 예수의 지상 활동을 선교신학의 관점으로 이해하게 한다. 성육신은 창조와 구원의 사건이자 자기 계시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자녀삼기 위한 전인격적 섬김과 증언이 핵심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는 구원의 무대인 세상에서 사랑으로 경계를 해체하여 믿는 자마다 구원으로 초대하는 죄와 구원의 보편성을 제시한다. 예수의 선교는 아버지의 선행적 주도권을 인정하고 보내신 이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선교의 지속성을 담보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시고 보냄을 받는 교제와 협력은 예수 시대의 제자들과 교회에게 추수의 참여자가 될 것을 촉구한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선교는 시대적 배경으로 사회참여와 봉사를 주로 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선교의 본질적 과제로 본 복음전도보다도 선교현장의 우선적인 사회봉사사역에 집중 하게 되는 에큐메니컬 선교를 탄생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에큐메니 컬 선교진영은 1961년을 시작으로 조직화 되었다. 에큐메니컬 선교는 사회봉사로 전문화, 그리고 특화되었다. 복음주의 선교는 복음전도에 집중하게 되었다. 양 진영은 통전적 선교로 갈등이 봉합되고 관계발전을 이루었다. 복음주의의 통전적 선교는 복음전도를 선교의 본질적 과제로 선언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다. 양 진영의 갈등문제는 선교신학으로 방향을 잡고, 실무차원에서는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안을 찾아야 한다. 위원회에서 문제가 될 때마다 선교현장의 과제를 함께 평가하며,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본질적인 선교적 과제를 확보하는 것이다. 어린아이 목욕을 시키다 물을 버린다는 것이 아이까지 버리는 실수가 없어야 한다. 통전적 선교가 복음주의 선교가 되려면 로잔의 복음전도의 본질적 과제를 사회봉사와 구별하는 평가가 있어야 한다.
본 연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복음전도의 모형으로 ‘사랑’에 관해 고찰하여, 이 이론이 초대교회 복음전도의 토대가 되었음을 제시 하였다. 또한 이것은 시대가 지나도 변함없는 복음전도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사상과 사역을 중심으로 밝히었다. 계몽주의와 회의주의가 만연했던 18세기의 영국은 이신론 이 기독교의 신앙을 위협하는 등, 복음전도를 실천하기가 너무나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전도의 원리를 계승하고 실천하여 초대교회와 같은 위대한 복음전도를 할 수 있었고, 영국 사회는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이 시기에, 다시 신앙의 개혁이 일어나고 교회가 갱신되기 위해서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본질로 되돌아가야 한다. 복음전도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가르쳐주 시고 초대교회가 계승한 복음전도의 모형이 오늘날 교회에 온전히 계승될 수 있다면, 이 시대에도 위대한 복음전도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의 웨슬리가 그러했듯이!
베를린 세계복음전도대회(이하 베를린 대회)는 복음주의선교의 언약과 선언문의 기초가 되었다. 1961년 WCC 제3차 뉴델리대회 이후, 베를린대회는 복음주의 선교에 관계된 모든 단체, 모든 선교사, 개인 그리고 교회와 교단들이 총 집결된 모양이었다. 마치 WCC와 같은 복음주의세계선교대회라는 성격을 갖게 한 창조적인 대회였다. 베를린대회는 두 가지를 정리한 대회였다. 1)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 관한 사역과 2) 복음의 직접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강조한 일 이었다. 이것은 로잔대회로 발전되었다. 베를린 대회는 복음을 듣지 못한 세상을 향한 복음전도가 주된 관심사였다. 베를린 대회가 선교의 사회참여는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복음전도를 모든 선교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한 것이다. 로잔 제1, 2, 3차대회에서도 선교의 사회참여와 봉사는 복음전도의 우선적 논쟁에서 벗어나 있었다. 복음전도를 “사역의 한 유형”으로 전달 매체의 종류를 보려는 경향성은 상당히 에큐메니칼 선교입장에서 논증하는 것이다.1) 베를린 대회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방어적 입장’을 취한 면도 있지만, 복음주의 선교의 ‘복음전도’를 다른 어떤 형태로든지 “저해”, “방해”, “변질”시키려는 모든 경향성을 차단하는 것이 베를린대회의 성격이다. 이점에서 휘튼대 회와 차이가 난다. 휘튼대회는 선교의 적응력을 키워가는 성향을 지녔 다.2) 즉, 휘튼대회는 사회참여 선교의 효율성을 주는 점에 접근했다면, 베를린 대회는 사회참여가 복음전도에 필요하지만 동시에 장애물로 작용할수 있다는 점을 선포한 것이다. 1974년 로잔 제1차 대회에서도 사회참여가 필요함을 인정했지만 복음전도가 우선이라는 점을 언약으 로 규정했다. 제2차 로잔 마닐라 대회는 “선언문”으로 3차 로잔 케이픈 타운 대회에서는 “서약”으로 정리하였다.3)
본 연구는 다문화사회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 대응을 총체적 복음 사역을 중심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제 단일민족이란 특성에서 다문화사회로 진입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가 있다. 특히 선진국들이 다문화정책에 실패했다고 선언하는 상황 속에서 다문 화사회의 현실적 이해를 분명히 하고 기독교적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그 결론은 다문화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대응은 총체적 복음사역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문화사회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다. 긍정적인 면이라면 해외에 있는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국내에서도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 문화의 유입은 매우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 문화는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오히려 이슬람 문화 즉 이슬람 종교적 영향이 우리나라에 깊이 자리 잡고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 대응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총체적 복음사역으로 다문화사회 속에서 접근한다면 하나의 핵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총체적 복음 사역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다문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도 함께 치유하고 회복하기 때문이다.
휘튼대회는 1958년까지 함께한 IMC가 1961년 3차 WCC에 귀속 됨으로써 설자리를 잃어버린 선교단체와 선교회, 개 교회와 교단선교부 들이 1966년 휘튼에서 에큐메니컬 선교에 도전하고, 복음주의 선교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복음주의 일치를 꾀하고자 개최되었다.
1. 휘튼대회는 반에큐메니컬 운동과 선교를 선포하였다. 복음주의 진영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 “이단, 적, 죄악, 교회가 아니다”라는 강경한 어투를 사용하면서 반대하였으며, “WCC와의 만남과 대화도 포기”한다고까지 하였다. 또한 에큐메니컬 진영으로부터 받은 압력과 고난, 고통을 제시하면서 복음주의의 통합과 일치를 강조하였다. 특히 로마가톨릭과 정교회가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입한 사건을 개신교 정체 성의 혼란과 혼동을 야기한 주된 요인으로 보고, 심지어 로마가톨릭도 선교의 대상으로 보았다. 복음주의 선교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 운동이 복음을 혼란, 변경, 대체 혹은 가감함으로써 복음의 정체성을 흔드는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향은 1917년 IFMA를 구성할 때 허드슨 테일러의 공식적인 선언에서 발견된 내용과 일치한다.
2. 휘튼대회는 복음주의 선교의 성경적 입장을 근거로 에큐메니컬 선교와 통합이 불가능하고, 복음주의 선교와 에큐메니컬 선교가 근원적 으로 다르다는 점을 밝혔다. 복음주의는 선교를 성서의 권위를 근거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함을 믿고, 말씀의 삶을 결단하는 제자화를 강조한다. 이때 제자화란 복음주 의 선교의 사회적 삶의 실천을 말한다. 에큐메니컬 선교는 이것을 두 영역으로 나누어 하나는 개인구원, 다른 하나는 사회구원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정의하였다. 에큐메니컬 선교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여러 과제 중 상황적으로 긴급한 사역에 집중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선교 현장을 영적 황무지를 만들고 영혼구원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복음주의는 오직 복음으로 회개한 영혼을 구원 하는 활동에 집중하며, 영적 사역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사회봉사 사역이 성취된다고 보았다.
휘튼대회는 양 진영이 더 이상 연합할 필요가 없음을 입증하였다. 복음주의 선교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지속적인 압력과, 선교지에서의 회유와 압박을 고통스럽게 호소하며, 오직 복음전도로 주님의 대위임령 을 수행하려고 한다. 복음의 열정이 있으면 사회참여와 봉사가 이어질 것이지만, 설령 사회봉사를 실천하지 않았다고 해도 복음제시가 이루어 졌다면 그것은 선교를 행한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에큐메니컬 선교 와의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1)
3. 양 진영을 통합하려는 노력보다 서로의 특징을 살려 독립적 선교운동이 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서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복음주의 선교는 에큐메니컬 선교의 핵심적 동심원이다. 따라서 가운데 영역에 복음주의 선교를 놓고 그 주변 원으로 에큐메니컬 선교를 배치해 야 한다.
정리하자면, 양 진영을 통합하려는 시도보다 성경의 권위와 복음 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배려함으로써 사역의 다양성 을 전제로 서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독립적으로 할 것은 독립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 선교의 개종 문제나, 로마가톨릭과 정교회 문제는 에큐메니컬 선교에서 관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에큐메니 컬 선교의 개종 문제나 복음주의 선교의 복음 제시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 양 진영이 서로 논쟁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이다. 오히려 복음주 의 선교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정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선교를 떠받치는 토대로 보는 것이 좋다. 반면에 에큐메니컬 선교는 다양한 선교 영역을 접할 수 있는 정책과 전략을 지원하며, 연합과 통합된 사역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양 진영의 사역들은 복음증거 사역을 전제로 한 영역으로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컬 선교는 로마가톨릭과 정교회가 개신교의 교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