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안병호에 의해 쓰여진 「오타 줄리아 전」과 후데우치 유키코(筆内幸子)가 지은 오타 줄리아의 생애(おたあジュリアの生涯)를 한국어로 번역한 오타 쥴리아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종교적 인물로 숭상받고 있는 ‘오다 쥬리아(大田 Julia, ?-?)’에 대한 글쓰기 양상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허구 ‘사이’에서 종교적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 나타나는 수사학적 전략과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인물에 대한 담화 구성의 차이를 통해 형성되는 종교성에 관해 살펴본다. 두 글쓰기는 오다 쥬리아가 보이는 천주교 신앙의 모범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독자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고 믿게 하기 위해 신앙인으로서의 자질(/존재(être)/)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것에 관한 /현상(paraître)/과 함께 서술하는 수사적 전략을 보인다. 하지만 담화 구성에 있어서 전자는 그녀를 약초 지식과 의술에 기반하여 종교적 삶을 실천한 ‘치유자’로, 후자는 박해 속에서도 일본에서 천주교 신앙을 지킨 ‘수호자’로 오다 쥬리아에 대한 서로 다른 종교적 의미를 독자들에게 소통한다.
The low participation of women in clinical trials of pharmaceuticals raises ethical issues that hinder accurate assessment of the safety and effectiveness of medicines by gender. Historically, clinical trials have been conducted primarily on men, and the thalidomide scandal further excluded women from participation. Despite policies to encourage women’s participation since 1986, women’s participation in clinical trials of pharmaceuticals remains low and needs to be improved. Given the lack of research on women’s physical characteristics and hormonal changes, increasing women’s participation in clinical trials of pharmaceuticals is essential to develop safe and effective medicines and improve public health, and improvements are needed to ensure equitable health outcomes by gender.
거제 옥산성은 문헌 기록에는 조선 말 거제부의 산성으로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발 굴조사 결과 신라 때 이미 축조되어 대체로 고려 시대까지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조 사에서 나타난 산성의 하부 구조는 전형적인 신라 산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다음 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옥산성은 7세기에 신라가 거제도를 직접 지배하고 또 이를 통 해 거제도 서쪽 방면에서 백제와 왜의 연결을 방지하기 위해 축조한 산성이다. 2) 문무왕 때 거제도에 군을 설치하면서 이 성은 상군 매진이현(경덕왕 때 거제군 명진현으로 개명)으로 편제되었다. 옥산성은 통일 신라 시대를 지나 고려 중기까지도 명진현의 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3) 조선 후기 거제현의 치소가 마침내 옛 명진현 인근에 정해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는 읍성을 축조하지 않았고, 조선 말 인근 고성을 수축하여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전통 시대 산성을 축조한 거의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거제도의 다른 신 라 유적과 함께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본 연구는 역사적 제도주의를 활용해 박정희 정부의 국회의원 선거제 도를 생성 과정, 지속 과정, 조정 과정, 변화 과정으로 검토하고자 하였 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성 과정이다. 권력장악을 위한 정 당추천제, 소선거구제, 제1당에 유리한 전국구 배분 원칙이 적용된 국회 의원선거법은 집권당에게 득표율 대비 의석률에 유리하였다. 둘째, 지속 과정이다. 제1당에 유리한 국회의원선거법이 유지되면서 집권당의 일당 우위정당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셋째, 조정 과정이다. 기존 선거제도에 서 의석수의 확대, 등록기간의 축소, 배분 제한조건의 강화 등 변화가 있 었고, 집권 세력에 대한 국민의 저항으로 제1야당은 집권당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변화 과정이다. 집권위기에 직면한 집권세력은 중선 거구제를 도입하여 지역선거구에서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제1당은 이득비와 보너스율에서 이득을, 제2당은 제9대 국회의원선거를 제외하면 이득비와 보너스율에서 손해를 보았다. 박정희 정부의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제1당에 유리한 양당 체제를 강화하였으나 집권세력이 권력창출, 권력유지, 권력연장, 영구집권을 위해 국회의원 선 거제도를 도구로 활용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After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ese colonial rule, the U.S. established USAMGIK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 required many Korean-English interpreters to serve as language specialists and administrative officers. This study considers Korean military interpreters as a collective concept referring to a group of language experts and aims to analyze news reports about the group from 1945 to 1953. At that time, some news reports criticized Korean interpreters who served for the U.S. military because the experts abused their language power to influence Korean people by using their social position to pursue their own interests. However, such negative opinion revealed multifaceted problems, such as political dissent from the USAMGIK and its flawed language policy. From the perspective of Wodak and Reisigl’s (2001) proposed Discourse-Historical Approach (DHA), it can be explained as interdiscursive relationships among discourses about Korean military interpreters and the USAMGIK. Through an analysis of these overlapping discourses, this study discusses their interconnectedness.
본고는 전쟁 결정 원인으로서 역사적 필연성 사고 체계에 주목하였다. 이에 대하여 냉전 시기 소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우선 본고는 전쟁 결정 여부를 설명하는 데 있어 타자와의 관계 인식을 양립불가성 또는 공존불가성에 기반한 관계로 분류할 수 있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인식론을 분석틀로 제시하였다. 이 중에서 후자가 전쟁 결정을 야기시킬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본고는 소련의 역사적 필연성 인식을 살펴보았 다. 냉전 시기 소련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진영과의 전쟁불가피론과 필 연적 승리론을 채택하였으나, 흐루쇼프 시기를 기점으로 이를 폐기하고 전쟁가피론을 수용하였다. 더 나아가 본고는 소련이 미국과의 전쟁에 대 하여 새로운 역사적 필연성 인식을 가졌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에 대하여 소련이 전쟁 대신 체제 경쟁을 통해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 하였으며,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궁극적으로 공동 멸절을 가져올 것 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필연성의 확립으로 인해 소련의 전쟁불가피론에서 전쟁가피론으로의 사고 변화는 불가역적 속성을 갖는다는 결론을 도출하 였다.
This article defines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vegetarianism by tracing the changes in the core motives revealed in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vegetarian movement that started in the West. We further explore and compare the limitations of the vegetarian movement conceived in the West with the essential values, ‘How can Korean vegetarian culture gain the upper hand?’. Our results indicate that the sequential changes of the motives inherent to the flow of the modern vegetarian movement were <religious-philosophy>, <political-society>, and <healthy-nutrition>. This settled the transition from ‘vegetarianism as an ideological form’ to ‘vegetarianism as a lifestyle’, making it a more becoming way of life. However, along with the spread of ‘vegetarian lifestyle as a form of life’, commercial vegetarianism, which overshadows the essential value of vegetarianism, continued to flourish due to the modern capitalist industrial system. To curb commercialization, the necessity arose to establish a new vegetarian diet with a propensity towards an ‘ecological-environmental point of view’. Thus, in order to establish the term and concept of a vegetarian diet for Korean vegetarian characteristics, we propose the formation of a vegetarian term and concept suitable for the Korean vegetarian culture.
본 논문에서는 반도체 패권의 변화에 관한 역사적 경로의 분석을 통해 동 산업생태계 변화를 예측하고자 한다. 특히 본고는 일본의 반도체 산 업 역사를 고찰하고, 현재의 일본 반도체 정책 및 전략을 분석하였다. 본 고에서는 반도체 패권의 변화에 대해 통상관계와 기술 생태계 변화 두 측면에서 역사적 흐름을 고찰하고, 일본 반도체 산업의 변화 및 역사적 경험을 미일 반도체 협정 이전과 1990년대 이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또한 일본 반도체 산업정책 및 전략을 내부 산업지원 정책과 클러스터 지역 정책 그리고 외부 칩4동맹 및 주변국과의 협력관계 구축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본 연구 목적은 북한의 사회복지제도화 초기 단계의 역사적 동학을 추적하여 북한사회복지의 태동 배경과 요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분석범위는 해 방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활동기간을 중심으 로 한다. 본 연구방법은 역사서술적 접근을 통한 문헌연구방법을 통해 분석하였 다. 분석결과, 첫째, 각 독립운동 단체와 단체, 계열과 계열 사이의 연결성에 이 은 상호성과 인과성은 비교적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동안 각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운동과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공존했다. 둘째, 마지막 으로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계열의 복지정책을 이어받아 이를 적용하고 노력한 흔적이 확연히 나타났다. 북한은 정권 초창기부터 사상적 배경을 기반으로, 사회 복지정책을 도입하고 적용하고자 노력했고 이는 무엇보다 사회주의계열의 복지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문경 고모산성은 이른 시기 신라 석축 산성의 대표적 사례로서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고모산성은 5세기 말 신라가 변경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축조한 산 성이다. 2) 이 성은 호측현(虎側縣, 경덕왕 때 虎溪縣으로 개명)이라는 군현(郡縣)으로 발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 내부와 아래의 공간이 모두 활용되었을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까지 성 내부의 공간이 중요하게 관리되었으며, 다만 성 아래의 읍치(邑治)는 공간이 협소하여 점 차 견탄(犬灘) 남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호계현은 결국 주현(主縣)이 되지 못하고 문경현(聞慶縣)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그렇지만 호계현에 있었던 유곡역(幽谷驛)은 찰방 역(察訪驛)으로서 주변 교통로를 관할하는 역할을 하였다. 3) 고모산성은 조선 전기에 하나 의 고성(古城)으로 남게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그 후 2차례 이상 수축(修築)되었고 조선 말에 이르러 실제 진수(鎭守)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 의병 (義兵)들이 성을 지키고 실제로 전투를 치른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자주와 인권이 짓밟혔을 때 천도교와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이에 적극 참여했다. 세계사와 구속사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만세운동이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구원받은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며, 교회사뿐 아니라 전체역사를 그 영역으로 삼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참여한 만세운동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하나님 의 선교 관점에서 3·1운동과 익산4·4만세운동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의 관련성과 선교역사적 의미를 준비과정과 피해상황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This study discusses various conflict situations and unexpressed pathological potential in historical regions. In this regard, the issue of alienation of local people due to local identity was raised and the cause was investigated. It explains the structural origins of local alienation that occurred in the process of objectifying a region and forming its identity. The process of alienation of local residents of local identity identified in this paper was divided and explained in three stages: objectification of the region, symbolization of local identity, and religious materialism of local identity. In addition, in the process, the incorporation of the production mode of intellectual work, the separation of producers, and the loss of the subject-centered control ability over these products were pointed out as problematic situations. The study suggests to change the perception of the region and to restore the control of the local people through narrative in relation to this problematic situation. Thus, this thesis asserts that we need to have doubts about the justification for the public good and the basis of the resulting consensus, and that we should be constantly interested in the pathological signs of society around us.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 디지털산업정책과 관련하여, 역사적 제도주의 분석을 통해 지난 30년 동안 6개 정부를 거치면서 작용된 제도변화 결 정요인을 밝히는 데 있다. 본 연구는 정치·경제적 환경요인과 정책패러다 임·정책거버넌스의 제도적 맥락을 분석기준으로 하여, 이 기간을 디지털 산업발달에 따라 5단계로 나누어 분석을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국가혁신체제론은 1994년 정보통신부 설 립 이후에도 줄곧 한국 디지털산업정책 변화에 큰 영향을 주어 강한 경 로의존성을 보였다. 둘째, 과학기술부처의 위상 변화가 각 정부의 관련 정책변화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과학기술부처와 산업부처 간의 거버넌 스 경쟁은 다른 변화요인인 '정권교체 및 국내정치적 환경' 등과 상호작 용을 통해 더욱 강화되면서 이후 정부들의 정책변화에 제도적 맥락으로 작용되었다. 셋째, 정권교체가 그 자체로 또는 '정부의 시장개입 태도에 대한 정권 태도', 'IT산업과 굴뚝산업에 대한 정권 태도' 등 다른 변화요 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더욱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IMF 외 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대통령 탄핵 등 국가위기상황 자체 가 한국 디지털산업정책의 변화요인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는 지난 30년의 기간을 관통하는 한국 디지털산업정책 변화요인과 제도적 맥락을 분석함으로써 디지털산업정책의 수립방향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구술 자료와 문헌 조사 등의 방법을 통해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고, 부마 민주항쟁에 대한 과제를 제안하는데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에서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지속된 유신체제에 대한 민주화운 동이었다. 특히 부마민주항쟁은 민중이 저항의 주체로 등장해 18년간 존속했던 박정희 독재체제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부마민주항쟁은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었다. 즉, 부마민 주항쟁은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이어질 수 있게 한 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부마민주항쟁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제대로 기억되고, 기념되어져야 한다. 둘째,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부마민주항쟁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부마민 주항쟁 당시 언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고, 정확한 진실 을 보도해야 한다. 다섯째,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들의 명예회복과 그에 상응한 유공자관련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여섯째,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자료가 지속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일곱째,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인식을 고취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최근 행정 환경의 변화와 국민의 요구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적극행정의 요구는 커지고, 공무원에 대한 면책과 보상 등과 같은 기존 논의로는 적극행정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설명 하는데 한계가 있어, 다른 차원의 역사적이고 행정학적인 논의로 적극행 정의 발전적 방향성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빅 데이터를 통해 적극행정의 변화의 경향성을 확인하고, 적극행정의 이론적 한계를 탐색하고 이를 극복하는 발전적 논의 즉, 적극행정의 개념적 구체화와 신공공거버넌스에서의 적극행정 적용 가능성 등 본질적 접근을 통한 적극행정의 근본적 물음에 답을 해보고자 한다.
선교역사에 대한 기술이 서구의 입장에서 점차 비서구의 수용사 (受容史)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선교의 기원을 장로교 알렌이 내한한 1884년 혹은 감리교 아펜젤러가 내한한 1885년 을 기준으로 1984~1985년에 걸쳐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 내한 이전에 중국에서 한국인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고, 이들은 성경번역까지 참여했으며, 한국에서는 자생적 ‘소래교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더구나 내한선교사들은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누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의 추동력과 내부로부터의 흡인력을 모두 고려하는 중도파 ‘역사기술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선교사 내한 이전에 일어난 최초의 선교사건까지 포괄하는 선교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관점에서 한국선교역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 글은 미소군정의 한반도 분단과 38°선 획정, 6.25전쟁을 회고하면 서 DMZ 탄생의 역사적 난제와 해결방안을 고찰하는 데 근본적인 연구의 목적을 지닌다. DMZ 연구를 위해서는 한반도 분단과 관련된 역사적 난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38°선도 그렇고, MDL도 그렇고, DMZ도 그렇고, 외세나 외세에 합작한 결과물이 결국은 한반도 분단과 분열을 가져왔다는 생각이다. 이 뜻은 아직도 한반도는 통일이나 통합의 실체가 민족 내부이기보다는 외세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과 관련된 역사적 난제들을 풀어나가는 노력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글에서 38°선을 소환한 이유도 DMZ와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한반도의 평화나 통일을 위해서는 38°선과 6.25전쟁, MDL과 DMZ를 새롭게 개진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분단 76년 정전 68년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달라진 게 없다. 과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를 위한 6자회담도 소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