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pose: This review study analyzes the impact of the Korean Society for Customized Visiting Health Care on the development of Home Visiting Care in public health centers since its inception in 2007. It also suggests potential future directions for both the Korean Society for Customized Visiting Health Care and Home Visiting Care in public health centers. Methods: The investigation scrutinized various sources including the white paper detailing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Society for Customized Visiting Health Care, academic conference materials, minutes from general meetings, research papers from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and the Korea Health Promotion Institute. Results: The Korean Society for Customized Visiting Health Care has been actively involved in advancing and assessing home-visiting health care services. The society has been focused on developing and evaluating the effectiveness of home visit health care services offered by public health centers. Conclusions: The Korean Society for Customized Visiting Health Care has achieved progress by continuous interaction with field staff, rigorous personnel training, technical assistance, field research, and policy recommendations. In 2024, the home visit health care sector could be advanced and improved using AI technology.
거제 옥산성은 문헌 기록에는 조선 말 거제부의 산성으로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발 굴조사 결과 신라 때 이미 축조되어 대체로 고려 시대까지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조 사에서 나타난 산성의 하부 구조는 전형적인 신라 산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다음 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옥산성은 7세기에 신라가 거제도를 직접 지배하고 또 이를 통 해 거제도 서쪽 방면에서 백제와 왜의 연결을 방지하기 위해 축조한 산성이다. 2) 문무왕 때 거제도에 군을 설치하면서 이 성은 상군 매진이현(경덕왕 때 거제군 명진현으로 개명)으로 편제되었다. 옥산성은 통일 신라 시대를 지나 고려 중기까지도 명진현의 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3) 조선 후기 거제현의 치소가 마침내 옛 명진현 인근에 정해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는 읍성을 축조하지 않았고, 조선 말 인근 고성을 수축하여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전통 시대 산성을 축조한 거의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거제도의 다른 신 라 유적과 함께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양주 청련사는 2010년 이전까지 서울 하왕십리 무학봉 바위절벽 아래에 있던 사찰이다. 태고종에 속한 청련사는 조계종과 소유권 분쟁 과정에서 조계종의 승려가 하왕십리의 사찰 구역을 건설업자에게 매각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양주로 이전 건립하게 되었다.
근래까지 안정사라고도 불렸던 청련사의 역사는 1940년대에 만들어진 「청 련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지에 수록된 조선시대의 상량문 등의 기록에 따르면 청련사는 신라 흥덕왕대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였다. 흥덕왕대 창건설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는 당시가 중국으로부터 선(禪)이 전래된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술하였고, 조선초기 창건설의 배경으로는 무학대사가 종남산 서쪽 계곡에 있던 사찰을 동쪽으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청련사는 조선시대에 다섯 번의 중창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두 번의 중창이 있었다. 이때까지의 중창은 홍수 혹은 화재로 무너진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2010년 여덟 번째의 중창은 사찰 부지를 옮기는 대작불사였다. 이때의 중창은 주지로 있던 백우대사가 주도하였다. 이로써 청련사는 천년 동안 이어온 전통을 양주 계명산 자락에서 다시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유럽과 한국에서 사용된 ‘독도’ 명칭과 새 한글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독도의 표기 문제를 살펴봄과 동시에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의 정당성을 증명하는데 있다. ‘독도’가 쓰이기 전까지 이 섬은 ‘우산도’, ‘석도’, ‘삼봉도’, ‘가지도’ 등 다양하게 쓰여졌다. 독도는 1849년 ‘리앙쿠르’ 포경선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고, 그로 인해 ‘리앙쿠르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독도’라 쓰여지게 된다. 본고에서는 ‘독도’의 남·북한 로마자 표기법을 적용하여 적절한 표기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Based upon literature survey, this research aims to analyze western children's clothing and characteristics over centuries. It was not until the 18th century that children were given serious consideration and that fabrication of clothing began to be designed only for children. The very first clothes which revolutionized children's wear was 'a la matelot' in the 18th century which freed children from physical restriction, recognized gender difference, and sailor suit became popular among all sexes and adopted as school uniform. And then children's clothing was shortened in length and adopted tubular silhouette, which allowed greater comfort and movement. The 20th century saw children's wear reform to be carried out after the World War II due to invention of synthetic fiber, easy care dress material, mass production system and sophistication of marketing methods. Further evidence of improvement of children's social status can be found in contemporary designs: for example, 'casualized' wear, 'character design' which reflects children's psychology and 'family look' which is designed to be worn with mothers. This evolution of children's clothing within western dressing support the view that children's clothing is not a miniature of adult wear but it reflects idiosyncrasies of the era and exerts children's dignity.
과거 오르델리우스가 지도를 제작할 때에 비해 현재의 오픈스트리트맵은 위성사진의 촬영으로 인해 현실과 매우 흡사하게 만들수 있게 되었다.오픈스트리트 맵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적 정보에 언제,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지도는 평면에 제작되기 시작하여,디지털 공간에 공간 정보를 표시하기에 이르렀다.지도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공간 정보를 더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
We have focused on the building appearance according to the change of conservation policy and urban fabric in Bukchon, Seoul. The Urban Hanok, urban traditional housing type, had been evolved in modern contort from 1920's to 1960's, that is to say, many buildings(Urban Hanok) in Bukchon area has built up with a lot and road at the same time. But the change of conservation policy has an effect on the urban fabric and building(wooden structure, RC and brick building). Thus many types of building in Bukchon has undergone a various chang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efine a change factor of Bukchon buildings. Thus we need to pay attention to policy and urban fabric. We reached the result as follows. First, the change of architecture regulations according to the several policies(an aesthetic area, an altitude area for sky line restriction and so on) brought into building deformation and eventually the historic scenery of Bukchon has been spoiled. Second, the change of policy had an effect on the change of roads and lots. Buildings on a widen road and a united lot was built newly. But new buildings built up with a concrete or brick structure was not in harmony with the historic scenery of Bukchon area. Third, a development method of a large lot with lack prudence(disregarded a scale and size of lot) did damage to Urban hanok and urban fabric. With the understanding on the relationship of buildings, a urban fabric and a policy in Bukchon, we can define the identity and correspond with the urgent request for a the conservation of historic urban scenery In addition we can suggest the policy and the design guidelines for the reservation and rehabilitation for Bukchon, Seoul.
수원시 이목동에 있는 원예연구소의 사과원에서 조사한 1958년부터 1998년까지 자료를 바탕으로 사과응애와 점박이응애의 역사적 발생변동 과정을 추적하였다. 1970년까지는 사과응애가 우점하였고 1980년 이후에는 점박이응애로 우점종이 바뀌었으며, 그 변화는 1970년 중반을 전후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3가지 가정, 즉 첫째, 두 종의 경쟁에서 점박이응애가 승리한다. 둘째, 과원의 초생은 점박이응애의 수상이동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즉 초생이 파괴되었을 때 점박이응애의 수상이동이 촉진된다. 셋째, 과원생태계가 교란되지 않을 때 응애류는 천적에 의하여 개체군 밀도가 조절된다 하에 약제살포(고독성 비선택적 약제 처리 및 선택적 저독성 약제처리)와 초생관리(초생재배 및 청경재배=제초제 살포)에 따른 두 종의 장기적 상호작용 결과를 추정하였다. 고독성 농약/초생재배 시스템에서는 점박이응애의 수상이동이 제한되어 사과응애는 경쟁을 피할 수 있고, 또한 천적상이 파괴되기 때문에 전 생육기간 동안 사과응애가 우점한다. 고독성 농약/청경재배 시스템에서는 계절초기부터 점박이응애가 수상으로 이동하여 사과응애를 경쟁적으로 배제시킴으로써 점박이응애가 우점한다. 저독성 농약/초생재배 시스템에서는 점박이응애의 수상이동이 제한되어 사과응애가 우점하지만 천적의 작용으로 높은 밀도를 형성하지 못한다. 저독성 농약/청경재배 시스템에서는 점박이응애가 수상으로 이동하여 사과응애와 경쟁하지만 천적의 작용으로 밀도가 낮아져서 경쟁압력이 낮아지므로 생육후기 사과응애의 발생이 가능하다. 따라서 계절초기 사과응애, 계절후기 점박이응애가 우점하는 형태로 공존할 수 있다. 본 자료에서 제시한 점박이응애 우점화 현상은 부분적으로 고독성 농약/청경재배 시스템 상태에서 두 종의 장기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었다. CAD를 이용하여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가장 일반적인 실로 묶기, 전통적인 손바느질 느낌이 나는 시침질, 현대적 느낌이 강한 깡통에 의한 묶기와 기하학적 효과가 나는 접기 등의 홀치기염색 기법으로 수작업 한 다음 CAD를 이용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홀치기염색기법에 의해 제작된 패턴을 모티브로 하여 수작업에서 얻지 못하는 다색사용가능성이 주�
승산리는 진주목 東面 勝禦山里에 속한 네 개의 자연 마을 가운데 상승어산과 하승어산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후에 이웃 龍奉里에 합해 졌다. 승산리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관련된 길은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승산리는 남해안 고성지역에서 내륙의 의령·삼가지역을 연결하는 지름길에 위치하였다. 승산리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474 년 무렵이며, 처음으로 들어선 곳은 蓮塘 許東岦(1601-1662)의 유허 지 연당의 북쪽 일원이었다. 승산리 김해 허씨의 입향조는 許錘인데, 1474년 허추는 진주 班東山 里 진양 강씨 姜叔卿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산리로 이거하였다. 이로써 승산리에 사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허추는 비록 학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수된 벼슬도 참봉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육신으로서 명망이 높은 함안 원북리 漁溪 趙旅의 가문과 情分을 깊이 맺고서 교유하였던 인물이다. 승산리는 15세기 말기에 사족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17세기 중엽까 지도 多數의 사족이 거주하는 마을로 성장하지 못했다. 승산리가 사족 마을로서 성장하는 데에 첫 디딤돌을 놓았던 이가 입향조 허추라면 그 정치·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한 인물이 觀瀾 許國柱이다. 관란 허국주 는 비록 벼슬이나 학문으로 현달하지 않았지만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으로 승산리 김해 허씨 가문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조선 중기 승산리는 사족 마을로서 성장의 한계를 지녔으나 17세기 중엽 이후 승산리 김해 허씨는 벼슬로 현달한 자가 배출되는 등 사족 마을로서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 글은 조선 중·후기 介坪里의 역사 변천을 일두 정여창과 사회·경제적 변화 에 초점을 맞추어 구명한 것이다. 먼저 개평리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정 여창의 증조부 정지의, 조부 정복주, 아버지 정육을의 행력을 고증하여 가전 자 료의 오류나 윤색 부분을 구명하였다. 정여창의 행력은 조카 정희삼이 행장으 로 정리하였으나 1550년의 시점에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널리 알려지 지 않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1552년에 개암 강익이 주도한 사우 창 건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1570년 5월에 이르러 정여창에 대한 국가의 포증은 대체로 마무리 되었다. 이와 함께 정수민이 수집하여 정구를 통해 찬집한 文獻 實紀는 사림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정여창의 위상 정립과 제고의 근거였다는 점에서 개평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다음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山郡인 함양도 1662년(현종 3)에 그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개평리의 상민들은 호세로서 대동세를 포목으로 납부하였다. 개평리의 사족과 상민들은 17세기 중 엽의 庚辛大飢饉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 1728년 정 희량 사건에 의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불안정한 형편에 처하였다. 더구나 18세 기 중엽 이후 환곡의 폐단은 개평리를 비롯한 함양지역 상민들의 삶을 매우 열 악한 상태로 밀어 넣었다. 대체로 1790년대를 기점으로 극심한 환곡의 폐단에 서 벗어났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田稅木價로 인한 농 민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개평리에 위치하였던 北倉, 場市, 介坪店 등 은 조선 후기 개평리의 사회·경제적 변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며, 육 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지역 내 거점의 증거이다. 이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사 설의 介坪店이 생겨나고 운영되었다. 개평 장시는 조선 후기 5·10일장으로 개 평리가 주변 마을과의 관계에서 사회·경제·문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으며, 개 평리 사족과 상민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이 글에서는 단계마을의 역사 변천과 의미를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구명하고자 했다. 먼저 단계마을의 지명은 철광석의 산화철 현상인 ‘붉 은’ 의미가 들어간 ‘적촌’‧‘단읍’‧‘단계’에서 유래했다. 단계의 고대 사회 는 한 가야 소국을 구성하던 단위인 읍락이었으며, 신라에 의해 정복된 이후 赤村縣으로 편제되었다. 통일신라 때 菁州 闕支郡의 영현이 되었 으며, 경덕왕의 한화정책에 의해 丹邑縣으로 개명되었다. 다음으로 940년 단읍현에서 단계현으로 명호 개정은 단계현이 국가 질서 내로 편제되었음을, 토성분정으로 지역 내의 세력 재편이 마무리 되었음을 의미한다. 단계마을은 나말여초의 변화 속에서 단계현의 중 심지가 되었다. 그 치소가 도평[양전]에서 단계마을로 옮겨졌기 때문 이다. 단계현은 1254년의 몽골 침략, 皆品部曲의 山陰縣으로 移屬, 왜 구의 침입으로 위상에 큰 변화를 겪었으며, 단계마을도 그러한 변화로 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끝으로 許邕은 단계마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지명에서 취한 단 계로 호칭되었으며, 토성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단계마을 역사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허옹은 1337년에 처향 단계로 은거하여 스스로 迂軒이라 칭하였으며, 당시 일반적인 男歸女家의 혼인 형태에 서 본다면 귀향이라 할 수 있다. 허옹은 1345년에 다시 벼슬살이에 나섰다가 1348년 무렵에 다시 단계로 낙향하고 그 직후 법물리로 이거 하였으며, 1357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헌 허옹이 단계에 입향함으로써 불러온 단계 사회의 변화는 결코 적지 않았다. 여말선초 우헌 허옹의 아들 허소유와 許繼道, 사위 안동 장씨 張綱, 외손서 상산 김씨 丹邱齋 金後가 단계마을과 법물리에 은거하거나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이다.
한글 근대 활자 인쇄사적 관점에서 한글 번역 성경의 역사적 변천을 천주교 , 개신교로 나누어서 , 출판 년대 별로 분류하고 , 타이포그래피의 실증적 분석을 통해 , 천주교의 성경출판의 역사적 변천을 수반한 타이포그래픽의 발전을 명확히 정리하였다 . 천주교 선교사들은 병인박해 후에도 조선 정부의 엄중한 탄압정책에도 굴복하지 않고 , 조선과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관계로 ,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서 정리하였다 . 국내 조사에서는 , ① 1860 년 조선교구 인쇄소의 목판본 간행목록을 정리하였다 . ② 1870 년대 블랑 신부에 의해서 설립된 인쇄소에서 간행된 목활자로 인쇄된 활자본을 조사하였다 . 국외 조사에서는 , ③ 1879 년부터 리델 주교의 주도로 요꼬하마의 출판활동과 1881 년부터 1886 년까지 코스트 신부가 나가사키에 설립한 조선교구 인쇄소에서 간행된 연활자본을 조사 정리하였다 . ④ 1886 년 조선교구 인쇄소의 서울이전 , 그리고 1898 년 명동성당 완공 후의 인쇄활동에 관해서는 [ 표 ] 로 정리하였다 .
지금까지 근대 활자 인쇄사에서도 미해명 되어왔던 , 천주교 선교사들의 한글 활자 개발의 계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본문용에는 1880 년 최지혁체 5 호 활자 , 1881 년 2 호 활자 , 1886 년 4호 활자 , 1887 년 3 호 활자 , 1889 년 1 호 활자 , 1894 년 5 호 활자 , 제목용에는 1895 년 초호 활자가 해서체로 개발되었다 . 여기서 동일인 원도로 개발된 활자를 제작 년대 순으로 나열하면 , 1881 년 2 호 활자 , 1886 년 4 호 활자, 1887 년 3 호 활자, 1894 년 5 호 활자가 제작되었다 .
This article is a diachronic study of different constructions involving the verb DARE from Old English (OE) to Modern English (ModE). With regard to the Late ModE (lModE) change, this paper examines the Corpus of Historical American English (COHA) covering 1810 to 2009. It is found that the general tendency is a decline of the frequency of DARE in terms of both the modal auxiliary and the main (lexical) verb uses in American English. However, the frequency of the auxiliary use, contra Taeymans (2004), has more rapidly decreased, while that of the main verb use has less drastically dropped. The blend constructions have had a low frequency throughout the past 200 years. Yet, the inflected blends(e.g. dared, dares) showed gradual decrease of frequency, whereas the DO-support blends did not. This study also examines historical changes from OE to Early ModE (eModE). It is found that lexical and modal properties coexisted from OE to Early Middle English (eME), the modal ones climaxing during the eME period. This paper argues that the grammaticalization from lexical to modal was triggered before the OE period and thereafter until eME is the period of gradual extension. From the lME period lexical properties increasingly occurred, which led Beths (1999) and Taeymans (2004) to argue for degrammaticalization. This paper accounts for the same phenomenon in terms of renewal, a natural process in grammaticalization. There are lME evidences showing phonological and semantic reductions of DARE, which necessitated a renewal of DARE. This study, moreover, shows that the words of the same category can follow different paths of change with time.
In the traditional subsistence farming era in Korea, most of small farmer's housing plots in the rural villages had their boundary barriers of which materials being the natural ones provided from nearby places. However, during the rapid industrialization period from 1960s, a traditional type of boundary barriers in the rural villages had been replaced mostly by low-cost factory-made ones, which means absolute loss of their amenity values as a linear part of villagescape. In spite of many study efforts on boundary barriers of traditional rural houses, detailed historical dating on them after 1960s have not tried up to now, which provoked to try this study. Through the direct and in-depth interviews to rural villagers sampled from 21 case villages, it was found that original boundary barriers structure in most of farm houses was made of natural materials like stone, soil, trees and bamboo, but, replaced by cement block structures mostly during Saemaeul Project period. However, although being relatively minority, traditional ones have been preserved up to now mainly in remote mountainous and seashore villages, but was in very low condition. In the overall view,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boundary barriers of farm houses had been left without public or private improvement efforts. In order to enhance their amenity values, more research works should be carried out on positive reassessment of the traditional ones harmonized with multifunctionalities for modern village life.
This study explores the diachronic development of expletive negation (EN) from Old English to Early Modern English. The EN examined in this paper involves a matrix verb with the meaning `prohibit`, `deny/refuse` or `doubt/fear` governing a subordinate clause with a negative marker whose meaning is allegedly empty. It is argued that EN is not a case of long-distance negative concord, but it is a genuine negative clause, as evidenced by the existence of emphatic negative markers. The use of EN is explained from a cognitive perspective as a speaker`s frequent (mis-)interpretation of counterfactual contexts, which is compatible with the use of the subjunctive mood.
This paper attempts to explore the grammaticalization of the [The fact is that] construction in order to substantiate the synchronic extensions of [The fact is that] > [The fact is,] > [Fact is,] (Kim 2001, 2003a) found in the present-day corpus (COBUILD 2000). In other words, this study is to examine whether such present-day extensions can be observed historically or not. For the historical data ARCHER (A Representative Corpus of Historical English Registers) Corpus (1999) and OED (Oxford English Dictionary 1989) will be used. These data will reveal that [the fact is that] construction has evolved along the grammaticalization path: [The fact is this.] + independent sentence [The fact is that] + complement clause > [The fact is,] + main clause > [Fact is.] + main clause. To conclude, this paper verities our claim that seemingly superficial THAT deletion and THE deletion do not represent optional ommission or performance errors but fit into the systematic language changes: the present- day variations reflect different stages in historical grammaticalization.
Pil - Hw an Lee . 2002 . On the Dev elopment of Eng lish Infinitiv al Cons tructions . S t ud ie s in M od e rn Gram ma r 27, 77- 104 . This is an explanation for the development of the three infinitival constructions which were introduced into English roughly at the same time during the Middle English period, i.e., the so- called Accusitiv cum Infinitivo (or exceptional case-marking ) construction, the f or NP to V construction, and the passive infinitivals . There have been various accounts for the introduction of these constructions . The traditional accounts are synt actic borrowing from Latin and analogical extension. However, Fischer (1988, 1989, 1990, 1991, 1992a, 1992b, 1994) criticizes such accounts, saying that the introduction was due to grammar - internal factors, expecially to the word order change English underwent in this period. It is argued in this article that the loss of inflectional endings is a more important internal change than the word order change. The argument is that the reanalysis, by which new infinitival constructions appeared, was due to the loss of inflectional ending (especially, dative ending ) of the sandwiched NP between the main verb and the infinitive. Furthermore, there is a general agreement that the word order change in English was it self due to the loss of inflectional endings. In this respect , the loss of the inflectional endings is a more basic and important factor for the changes of English Infinitival constructions .
1946년 제정된 교수요목으로부터 1987년 5차 교육과정이 나오기 까지 40여년 동안에, 우리나라 초등국어교육과정은 체제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해온 셈이다. 이 40년의 기간은 과거 몇 백, 몇 천 년에 맞먹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대변혁기라고 할 수 있다. 초등국어교육과정은 바로 이기간 동안에 서구 교육사조의 영향 아래, 때로는 언어의 실용적 기능 중시와 정의적 가치기능 중시의 양극을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아동중심의 교육과 국가사회 중심의 교육의 양극을 방황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