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simdangga Eumsikbeop』 is the second cookbook discovered in the Honam region. It is believed to have been copied by Hong Ju-song between the late 1800s and early 1900s, and excluding the missing parts, it contains a total of 14 items, including 7 liquor items and 7 general food items. Judging from the proofreading marks, it was not considered a complete creation. However, it was confirmed that the book was not influenced by existing ancient cookbooks from the Seoul-Gyeonggi, Chungcheong, and Yeongnam areas. Therefore,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book was based on an undiscovered recipe book from an ancient family. It is valuable as a basis for comparative research on regional food culture in the traditional era in that the manufacturing methods, ingredient quantities, and description methods are different from existing cookbooks in many ways and contain unique terminologies and regional dialects.
The armillary sphere, an astronomical observation device embodying the Orbital Heaven Theory of the Later Han Dynasty in China, holds both historical and scientific significance. It has been produced in various forms by many individuals since its inception in the era of King Sejong in the Joseon Dynasty. A prominent figure in this field was Nam Byeong-cheol (南秉哲, 1817-1863), known for his work 'Uigijipseol' (儀器輯說), published in 1859, which detailed the history, production methods, and usage of the armillary sphere. This text particularly highlights 21 applications of the armillary sphere, divided into 33 measurements, covering aspects like installation, time, and positional measurements, supplemented with explanations of spherical trigonometry. Despite numerous records of the armillary sphere's design during the Joseon Dynasty, detailed usage information remains scarce. In this study, the 33 measurements described in 'Uigijipseol' (儀器輯說) were systematically classified into six for installation, nineteen for position measurement, seven for time measurement, and one for other purposes. Additionally, the measurement methods were analyzed and organized by dividing them into the ecliptic ring, moving equatorial ring, and fixed equatorial ring of the armillary sphere. In other words, from a modern astronomical perspective, the results of schematization for each step were presented by analyzing it from the viewpoint of longitude, right ascension, and solar time. Through the analysis of Nam's armillary sphere, this study not only aims to validate the restoration model of the armillary sphere but also suggests the potential for its use in basic astronomical education based on the understanding of the 19th-century Joseon armillary sphere.
본 연구의 목적은 독립 이후 보고타의 수도 위상에 대한 논쟁과 대립 이 19세기 각기 다른 정치 엘리트 그룹 간의 경쟁 구조와 어떤 상관성 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 분석하는 것이다. 콜롬비아의 경우, 독립 이 후 지역을 기반으로 각기 다른 엘리트 그룹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형성되는 독특한 정치 구조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엘리트 그룹 간의 정 치 경쟁 구조는 19세기 동안 아홉 차례의 무력 갈등을 발생시켰고, 이 과정에서 수도 보고타의 위상에 대한 논쟁을 유발하였다. 보고타를 중심 으로 한 전통적인 엘리트 세력이 보고타의 수도 위상을 유지하게 되면서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으로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근대화 발 전을 시도했다. 본 연구는 수도 이전을 둘러싼 정치적 경쟁 구조 논의를 보고타의 사례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본 연구의 목적은 문학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표제음악을 현대적으로 접근하여, 대중을 위한 서양음악 콘텐츠 기획의 가능성 및 전망을 제시 하고자 한다. 19세기 표제음악은 문학의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써, 특별 히 문학의 '각색'을 통해 전달된 다양한 스토리를 음악으로 표현한 대표 적인 음악적 장르이다. 이를 바탕으로 교향곡, 예술가곡, 춤곡,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적 형식이 발전하였다. 특히, 교향시는 문학을 음악가의 관점으로 새롭게 각색하여, 문학의 스토리를 음악으로 표현하였으며, 이 것은 서양음악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방법이 되었다. 현대의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도 스토리를 각색하여 다양한 콘텐츠로 이동하며 하나 의 새로운 스토리 세계관을 이룬다. 이러한, 스토리의 각색기법과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한 표제음악의 콘텐츠 기획을 통해, 대중 이 쉽게 서양음악을 접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표제음악을 문 학의 '각색'과 현대의 융합 미디어 기법인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으로 접근하여, 현대적 접근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괴테의 <파우스트(Faust)> 를 스토리 설계, 미디어 선택, 콘텐츠 제작, 상연 그리고 관객과의 상 호작용을 위한 방법 등의 창작 과정을 제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대중 도 쉽게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 창작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maintenance and management of government office building in Dongnaebu, Gyeongsangdo in the mid-19th century. In the late Joseon Dynasty, Dongraebu was an important point of national defense and a place of trade and diplomacy with Japan, so it had many government facilities. There are very few government facilities remaining today, and no structure remains. Therefore, it is possible to grasp information about the government facilities through the old materials. Currently, there are public documents related to the local government offices such as Eupji, Eupsarye, and Junggi. Through comparison between public documents, we will examine the maintenance and management of Dongnaebu government facilities in the mid-19th century. As a result of the research, Dongnaebu government facilities were supervised by department and managed like articles. In addition, the name, size, and changes were all recorded in the management of the goods, and the authority of responsibility was clearly stated. This result is because the remaining material has the purpose of preparation as an accounting book.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e government faciliti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managed by a systematic department with clear authority.
이 연구에서는 19세기 수많은 작곡가에 의해 완성된 ≪들장미≫ 노래가 독일정원의 장미꽃 문화와 무관하지 않음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어 19세기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본 독일정원의 장미 꽃 문화로 탄생된 ≪들장미≫ 노래와 그 의미를 새롭게 주목하고자 한다. 괴테의 들장미 시는 1770년경에 작시 되지만 19세기 들어 장미꽃-붐과 함께 독일어권의 많은 작곡가에 의해 ≪들장미≫ 노래로 작곡된다. 그리고 괴테의 시를 가사로 한 ≪들장미≫ 노래는 19세기 독일정원 특히 장미원에서 소통력을 더욱 발휘했던 문화적 소리였음을 알아차리게 했고 동시에 시청각적 정서활동을 지원하는 매개체로 작용했다. 이는 당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시민들 의 생활음악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음악사에서 19세기 독일정원의 장미꽃 문화로 탄생된 ≪들장 미≫ 노래와 그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논문투고일자
중화회관은 각 국가에 있는 화교들이 만든 상공회의소 혹은 교민협회 같은 역할을 수행한 조직이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17세기 중반 명향사라는 조직이 먼저 등장했는데, 이는 단순한 화교 커뮤니티로 출발해서 명향회관이라는 조 직화를 거쳐 중화회관을 조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두 기관은 지연(地緣)이라는 공통 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기별로 연결되었다. 베트남 정권은 명향사를 화교를 관리하 는데 활용하였고, 이는 중화회관 시기에서도 이어졌다. 명향사의 특성은 베트남 중화 회관이 다른 국가와 다른 점은 갖게 하였다. 천후사당과 관우사당을 두고 복과 안녕 을 빌었으며, 중요한 화교 조상을 기리는 사당을 두었다. 또한 혈통별로 각기 달리 화교를 관리하여 중화회관의 효율적 관리와 회원들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본 논문은 17~19세기 명․청대 박고문자기의 제작배경, 유형과 시기별 특징, 그리고 조 선과 일본도자에 미친 영향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박고문자기는 고동기에 대한 완상 및 애호가 일종의 문인취미로서 확산되었던 명․청대 사회상을 반영한 대표적인 시각작품이다. 그 제작배경과 관련하여 당대 문헌사료들을 통해 박고취미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17~19세기 자기 박고문에서 보이 는 고기물 도상, 문방청완, 팔보 등 기타 길상소재 등의 구성요소로 유형 분류를 시도하고, 유형별 자기 박고문의 편년자료와 양식을 통해 17~19세기 박고문자기의 시기별 특징을 살펴 보았다. 그 결과, 17~19세기 자기 박고문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했으며, 이는 곧 시기별 박고문자기의 변천과 특징으로 이어졌다. 17세기 중후반, 경덕진 민요에서 문인취 향이 적극 반영되어 나타난 박고문자기는 18세기 이후에는 官樣의 내수뿐 아니라 다양한 품종으로 유럽 수출자기로도 크게 성행하였다. 19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자기의 질이 쇠퇴되며, 민간 잡보를 비롯한 여러 길상적 문양요소로 이전보다 더욱 번잡해지는 구성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박고문자기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던 조선과 일본도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현전 하는 작품들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 영향관계를 확인하였다. 조선의 경우, 조선 후기 골동애 완풍조 등 중국의 복고적 취향을 잇는 주요 매개체로 작용하였으며,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19세기 민화적 요소와 결합되어 자기의 문양으로 변용되었다.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17~18세기 유럽시장을 배경으로 한 수출자기에서의 수용과 변용이 이뤄졌으며, 일본식 미 감이 가미된 일본 수출자기의 특색으로 자리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각국에서 중국 박고 문자기를 수용하는 시기와 경로, 모방과 변용양상이 다르게 나타난 점을 통해 동아시아 도자 문화에서 갖는 박고문자기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changes to body measurements and silhouettes after wearing an early 19th century women’s corset. Two types of corsets were tested. Changes in body size and silhouette were compared based on the levels of tightening strength of the corset. The tightening strength was adjusted in 4 steps by making the length of back fastening string 10-40 cm shorter than the standard. The silhouette was compared with the front silhouette and the side silhouette. The results were as follows. After wearing the experimental 19th century corsets, the chest circumference and front interscye length increased. However, the chest circumference did not increase proportionally to the tightening strength. The underbust circumference, waist circumference, and back interscye length also decreased. The waist width was decreased to create a slim front silhouette. The change in the body silhouette differed depending on the style of the experimental corset. The experimental corset made with the six-piece torso pattern changed the posture so that the shoulders were pulled back and the chest was pushed forward. The experimental corset with the side bodice pattern resulted in the subject’s shoulders reclining backward and the chest and abdomen extending forward. The results of this study show that women’s body sizes and silhouettes could be changed by wearing the early 19th century corsets, but the changes in body size and silhouette vary depending on the wearer's individual body type or corset style.
최초 중남미 화교는 16C후반~19C초까지 스페인이 식민 지배하던 필리핀에서 재이주한 중국인으로 판단된다. 중남미에 본격적으로 화교가 송출된 것은 쿨리(화공) 무역에 기인한다. 1단계(1800~1874)는 노예제도 폐지로 서구 열강이 플랜테이션에서 필요한 인력을 화공으로 대체하였고, 이들은 중남미 화교 1세대가 된다. 2단계(187 4~1949)에서는 불평등 계약이었던 ‘채무화공’ 제도가 폐지(1874)되면서, 합법적인 중남미 이민이 다양화 되었다. 쿨리로 시작했던 화교들은 요리·이발·재단사로 창업하게 된다. 총리아문이 설치(1861)되고, 1879년 쿠바에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화교들도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3단계(1949~2000)는 중남미 화교들의 ‘현지화’ 시기이다. 2019 년 중남미에는 227만명의 화교가 있고, 이는 전 세계 화교 중 4.6% 수준이다.
본 논문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맨스필드 장원』의 성직자 인물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초반 영국 성직자의 모습과 종교적 분위기를 살펴보 고자 한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성직자의 전형인 『오만과 편견』의 윌리엄 콜린즈 목사에 대한 풍자를 통해 작가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세속화된 목사들의 타락상을 비판하고 교회의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맨스필드 장원』에서 오스틴은 도덕성과 소명의식, 사회적 책임감을 갖춘 에드먼드 버트람이라는 바람직한 성직자 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복음주의 운동으로 불붙여진 성직 쇄신과 교회의 정화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요구를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아울러 작가는 두 성직자 인물들의 대조적인 가정생활의 성격을 통하여 성직자로서의 자질과 사적 영역인 가정생활의 행복 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청대 袁永綸이 쓴 필기 『靖海氛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중국 남부 해상에 창궐하던 해적을 토벌한 기록이다. 중국의 역사 사료 중 『정해분기』 만큼 해적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은 드물다. 안타깝게도 1830년에 초판이 출간 된 후, 중국에서는 유실되어 전하지 않다가, 2007년 대영도서관에서 판본이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정해분기』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는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이에 본 논 문은 작가 원영륜과 『정해분기』의 판본, 영역본을 소개하고, 『정해분기』의 내용을 해적단의 형성과 세력 확장, 분열과 투항이라는 흐름에 따라 나누어 살펴본 후, 이를 기초로 그 특징과 의의를 분석하였다.
19세기 전반 동안 일본의 우키요에에 독립된 풍경이란 주제가 등장하여 대표적 유형으로 정착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우키요에의 본격적 출발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후지산 36경》(1830-1832)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호쿠 사이가 고안한 우키요에의 특징들은 안도 히로시게로 계승되어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우키요에로 발전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에서 나타나는 서양화의 기법들은 물론, 일본화 특유의 특징들과 서양화 기법들을 조화시키는 특유의 수법들이 18세기 말부터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로써 네덜란드 상인과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과 나가사키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서적 속의 삽화들과 동판화를 통해 알게 된 서양화의 기법들을 모사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일본의 회화적 전통과 어우러지게 혼합시켜가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풍경 우키요에의 차이와 특징들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복합적인 시점과 독특한 구도,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자연 묘사로 19세기 후반 서구 미술가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미쳤던 풍경 우키요에 양식이 일본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고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비롯된 토착화의 결과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한국에 가졌던 관심 분야중 하나는 가린의 접경 지역 여행기와 「國譯 韓國誌」를 통해 나타난 것처럼 안정적인 식량자원 공급지로서 가치이다. 러시아는 동해안 탐사의 결과 200여개의 해안지형과 해양 지물에 지명을 남겼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일부는 남아 프리모르스키 주 인근 바다의 해양 지명으로 Bukhta Reyd Pallada, Zaliv Posiet 등으로 구글 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안지역 조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분이 내륙에 대한 조사이며 러시아 정부가 한국에 관한 가진 관심의 방향이 표현된 것이 한국지(KOPEИ)로 생각된다. 전체 14장으로 편집된 「국역 한국지」의 내용 가운데 한국사와 한국의 언어, 행정 및 정치제도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다면 19세기까지 서구 열강에 한국과 관련되어 알려진 한국의 영역에 관한 것을 포함한 자연지리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경제와 통상 관련된 내용도 풍부하여서 이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본 논문은 『차이니스 레포지터리』의 「잡록」과 「사건일지」란의 소개 내용을 중심으 로, 19세기 초 신교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중국 사회의 부조리, 자연 재해, 국가 기 능, 지역 소식, 인물들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았다. 이 두 항목에서 주로 그려진 서사는 당시 중국에 와 있는 선교사들이 직접 문화접촉의 현장에서 마주했었던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 주면서, 동시에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 삶의 현장성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고 파악된다. 본 논문은 중국의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경계 지역에서 형성되는 현장성을 미세서사의 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는 『차이니스 레포지터리』 의 서사에 주목하면서, 그 안에 가로질러 있는 신교 선교사들의 근대적 열망을 추출 해 보았다. 필자 또한 이들의 이 같은 서사가 단순히 물리적 혹은 계량적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당대의 사회 모순과 다양한 층위에서 살고 있는 약자들의 삶이 녹아 있다고 판단한다. 본고는 이 같은 외연에서의 미세서사와 그 내면을 채우는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긴장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하였다.
The harsh economic conditions of Buddhist temples in late Joseon dynasty, and the prevalence of the Buddhānusmrti(念佛) practice, which is a practice of reciting Amita Buddha(阿彌陀佛), led Buddhist temples to organize the Buddhānusmrti association(念佛契) in th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For the practices and the activities of organization, an architectural facility was required; thereby, many temples had a Yeombul-dang(念佛堂). However, only a few of the Yeombul-dang have survived and are known today. This research investigates the ways temples tried to acquire Yeombul-dang buildings during the period and their architecture characteristics by reviewing historical records and documentary works of literature. In this research, Yeombul-dang is found to have various types of building names and building forms. Different hall names such as Amitābha Hall(佛殿), Yosa(寮舍) and Daebang(大房) were used as Yeonbul-dang. The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in terms of building forms, spatial elements composition and layouts were found depending on how they were acquired. The Yeombul-dang were most commonly built as multi-complex buildings consisting of worshiping rooms and residential areas. Most of Yeombul-dang were located in the central areas of the temple site. On this basis, this research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many Yeombul-dang is still being used under different names and for different purposes.
이 연구는 우산 명칭의 소멸과 석도 명칭의 등장 사이에서 실체(독섬1))와 명칭(우산, 석도)간 불일치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지도와 사료에 등장하는 독섬의 이미지, 그리고 우산, 석도 명칭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독섬의 실체, 그리고 우산과 석도 명칭에 얽힌 의문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17세기 무렵, 조선왕실은 독도의 실체를 분명하게 인식하였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독도는 지도에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공도정책으로 독도에 관한 지리정보는 현저하게 퇴보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오류는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초기 버전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김정호의 치밀한 고증으로 그때까지 반복되었던 표현상의 오류는 1861년 무렵에 이르러 완벽하게 시정되었다. 요컨대, 김정호가 제작한 조선 후기 전국지도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독도는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19세기 조선 정부의 울릉도·독도 통치의 일환으로 시행된 울릉도 수토제(搜討制)의 운영 실태와 그 의의를 연구하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를 하나의 셋트로 인식하여 왔음은 양국의 역사 및 지리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조선 정부의 울릉도 수토는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의 고유한 영토로 통치하였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음 몇 가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필자는 19세기 울릉도 수토 연도에 관해 조사하여 논문으로 보고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이전 논문에 누락되었던 것과 새로 발견한 사료적 근거들을 추가하고, 오류를 교정하며, 과도하게 추정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삭제하여 현 단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토 일람표를 제시하였다. 둘째, 필자의 이전 논문에서 소홀하게 다루었던 울릉도 개척기, 특히 1889∼1894년의 울릉도 수토제 운영 실태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셋째, 감영의 장계(狀啓)에 인용된 수토관의 첩정(牒呈)을 활용하여 19세기 전 기간에 걸쳐 수토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 었는지 수토 노정과 수토 내용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전반기 조선의 역사는 소수의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기’로, 이양선의 출 몰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안으로는 민란 등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울릉도 수토도 잘 행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세도정치기에도 울릉도 수토가 정기적으로 잘 진행되었고, 19세기 후반 울릉도 개척시기에도 수토제가 계속 존속되었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