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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6·25전쟁 시 패퇴하던 북한군에게 있어 중국인민지원군의 지원은 절 대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중연합사를 구성하여 조선인민 군을 통제하였고 김일성은 추락한 위상을 만회하고 군권을 장악하고자 조중연합사와 협력하고 갈등하며 북한군의 독자적인 군사전략 발전의 필 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북한의 주체적인 군사전략이 6·25전쟁 시 조중의 협력과 갈등의 결과로 창출된 것임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조중연합사 운용 간 조중이 협력한 사항과 갈등을 빚은 내용을 분석하고, 6·25전쟁 이후 조중의 협력과 갈등이 북한의 주체적 군사전략 발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6·25전쟁 중 조중 연합사 운용 간 조중의 협력과 갈등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주체적인 군사 전략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였고, 김일성은 자위적 안보에 초점을 둔 배합전략과 속전속결전략의 군사전략을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군사전략은 국제적 안보환경과 북한의 핵 무력 완성 등에 따라 다소 유동적일 수는 있어도 김일성 주체사상에 기 초한 배합전략과 속전속결전략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으로 예견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비가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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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유엔연설 에서 여러 차례 제의한 종전선언을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김일 성이 밝힌 ‘3대혁명역량강화방침’에 입각해서 추론한 것이다. ‘북조선 혁 명역량강화’에서는 핵무력을 보유한 군사적 역량은 어느 때보다 강하지 만 국제제재와 경제난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등 정치·경제적 역 량은 매우 약화되었다. 이러한 체제내구력 보완을 위해 ‘강한 외부의 적’ 인 ‘미 제국주의’가 필요하므로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첫 단계인 종전선언 카드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조선 혁명역량강화’에서는 ‘이 석기 내란 선동 사건’처럼 제도권 침투를 비롯해 노동, 교육, 문화, 종교 계 등 사회 저변에 친북·반미 의식이 폭넓게 퍼져있다. 따라서 미-북 간 종전선언으로 인해 평화체제로 전환된다면 반미 명분이 약화되어 70여 년간 축적된 남한의 혁명역량이 치명적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국제 혁명 역량강화’의 핵심은 국제사회에서 반제·반미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미국을 고립시켜 궁극적으로 ‘혁명의 가장 큰 장애물’인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다. 미-북 간 종전선언이 합의된다면 적대관계가 청산되어 미국을 비롯한 반제·반미 이데올로기로 연대한 ‘국제 혁명역량’이 와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향후 북한은 자체의 힘으로 충분한 대미 핵 억제력 및 체 제 내구력을 갖추고, 전술핵무기와 배합된 남조선 혁명역량을 완비할 때 까지 ‘종전선언 카드’를 받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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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3.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남한, 북한, 미국 등 세 행위자 간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지속되며 전략적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왔다. 세 국가 간 관계에 적용돼 온 디트머의 전략적 삼 각관계 분석틀에 따르면 냉전기엔 ‘안정적 결혼’, 탈냉전기엔 ‘안정적 결혼’과 ‘로맨틱 삼각관계’ 사이의 과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북한이 대미 협상수단으 로서 핵개발 단계를 넘어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사실화하고, 미중 간 패권경쟁 과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구도가 본격화된 신냉전기에 들어서면서 남북미 간 전략적 삼각관계는 무너졌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래 미국과의 대화에 목매지 않고 대미 장기전체제에 돌입한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도 철저히 단절한 채 동 맹국들과의 관계에만 몰두하고 있다. 북한의 핵 무력 완성으로 비핵화라는 목 표가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군축’이 최선책이 된 가운데 현재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하느라 여력이 없는 바이든 정부에도 북한문제는 후순위로 전락해 소극적 인 대북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남북미 간 상호작용이 아예 끊겨버린 지금 이 오히려 북한의 배신행위 아래 불안정하게 유지되어 오고 있던 현재까지의 남북미 관계가 새롭게 거듭나는 중요한 기회일 수 있다. 기회가 오기까지 남북 관계에서의 긴장 국면이 확전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현재 한국 정부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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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2000년부터 시작된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전쟁 기간 동안 수 습되지 못한 전사자 13만여 분을 찾아 국가와 가족의 품으로 모신다는 데 목적을 두고 추진 중이다. 2005년부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을 출범하여 유전자 채취와 신원확인센터 설치 등 체계적 및 전문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영구적인 국가정책 사업이다. 아울러 2018 년 4·27 판문점 선언과 9.19 남북군사합의에 의해서 오랜 숙원 사업으 로 제기됐던 비무장지역(DMZ) 내 유해발굴이 가능해졌다. 오랜 기간 접근하지 못했던 DMZ 내에서 남북유해발굴 공동합의는 접경지역과 한 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완화에 대한 남북한의 의지를 잘 반영한 것이 다. 기대했던 북한의 약속 이행은 없었지만 국방부는 2019년 4월 1일 부터 2021년 6월 24일까지 약 2년 반 동안 “9·19 남북군사합의”에 명 시된 남북공동유해발굴의 사전준비 차원에서 화살머리고지 일대 남쪽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꾸준히 진행했다. 특히 DMZ 내 화살머리고지 유 해발굴을 통해 9명의 국군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하여 유해봉환 및 안장 식을 거행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논문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와 중요성, 체계 수립을 위해서 “활동이론”(Activity theory)을 근 간으로 세부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기반으로 이 논문에서는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평화와 유지와 인도주의 차원에서의 최초의 DMZ 내 남북 공동유해발굴사업의 추진 배경과 성과, 그리고 의의를 중심으로 유해발 굴사업의 중요성과 함의에 대해 고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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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2.05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한국 여성 국회의원들이 외교 안보 이슈와 관련한 호명 투 표에 있어서 남성 의원들과 다른 투표 행태를 보이는가에 관한 질문을 규명하고자 한다. 젠더가 의회 정치의 행태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연구는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연구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 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본 연구는 16대와 17대 국회 회기 당시 이 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파병안 찬성 여부의 호명 투표의 행태에 초점을 맞춘다. 정량적 연구 결과 한국 여성의원들은 남성 동료들과 비 교하면 파병안에 찬성하는 확률이 낮은 점을 발견했다. 또한 여당 여성 의원들의 경우 이전 선거에서의 득표율이 높을수록, 선거 선수가 높을수 록 파병안에 찬성하는 확률이 줄어든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그동안 정량적 연구가 부족했던 한국 국회에서의 여성의원들의 투표 행태의 요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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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외교를 통한 대외적 자율성 확보 정책을 분석하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임시정 부의 활동 공간을 확장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중국으로부터 한국광복군에 대한 자주성을 회복하고, 미국·영국 등 연합국과 군사합작을 통해 전후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정치적으로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으나 군사적으로는 임시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 하고자 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했던 군사외교활동이 국가의 대외적 자 율성 확보 측면에서 갖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외적 자율성 확보 를 위해서는 대내적 환경의 안정성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째, 대외환경의 변화는 대외적 자율성을 추구하기 위한 기회이자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셋째, 강대국과의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요소는 대외적 자율성 확보 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임시정부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기회를 활용 하여 최종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연합국의 승인을 얻어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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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DMZ가 생성된 이래 북한의 도발 및 남북무력충돌이 발생해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가장 높았던 시기가 바로 1960∼70년대였다. 정전협정 체결 후 1960∼70년대 북한 무력도발은 ①남조선혁명의 일환으로 획책, ②체제결속의 강화 차원에서 지속, ③남북분단 고통의 심화·확대의 초래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북한의 대남전략 및 무력도발이 주는 시사점은 ①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대한 철저한 대비, ②북한의 어떤 무력적화도 발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안보능력 강화, ③통일지상주의 및 근거 없는 낙관론의 지양, ④북한의 변화를 위한 점진적·단계론적 접근의 추진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우리의 국방은 항상 최악의 상황 까지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 유사시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조적·공조적 국방안보능력 강화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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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1.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로마제국 2~3세기에 발생한 대규모 전염병을 겪는 초대교회와 한국전쟁이라는 위기를 겪은 한국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전도의 방향과 목적을 정립해갔는지 살펴본다. 각각 사회적 질서의 아노미 현상이 발생하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전파 그리고 교회의 성장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전도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가 마주하는 어려움을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써, 전도의 기회를 모색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위기가 아닌, 복음전파의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 교회 내부의 결속과 회복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여 교회가 사회에서도 유익함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 중심의 전도가 아닌 삶 중심의 전도를 모색해야 한다. 더 나아가 변화된 코로나 이후의 환경에서 전도의 새로운 영역과 방법에 대하여 도전해야 한다. 폐쇄적인 종교모임이 아닌, 개방적인 네트워크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성장하여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의 형편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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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2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i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odernity of the Cold War, examining and analyzing two works of Korean Chinese novels in the 1960s, “A different kind of feeling in my mind”(bie you yi fan zi wei zai xin tou) and “Yantai Story”(yan tai feng yun). Both of these two works show how Hanwha looked for self-coordinates in the changing times during the Cold War period. ‘What is the modernity’ is the dialectical issue in these novels. How do them reflect the issue from the social reality, transnational movement, utopian imagination? When modernity brings about changes in regional movement, cultural convergence, military technology, and economic activities, how do them imprint on the Korean Chinese? The overseas Chinese education policy that was born in response to the Cold War was not only a means for the regime to recruit overseas Chinese in the form of education subsidies, but also an opportunity for overseas Chinese to move across borders, engage in new trade patterns, and produce unique commodity cultures. On the other hand, when the war broke out, the confrontation between regimes became a fact. Korean Chinese learned the way of imagining China in popular novels and created an ideal utopia by this. Although it exists in the past time and space, it also embodies the helplessness of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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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21.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한국전쟁이 한국 개신교 교회에 준 영향을 규명하고, 이러한 규명을 바탕으로 한국 개신교 교회의 평화선교 과제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의 범위는 한국전쟁이 한국 개신교 교회에 준 영향이다. 이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 연구와 메츠(J. B. Metz)의 위험스러운 기억과 역사의 주체로서의 희생자이다. 희생자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의 결과를 제시한다. 한국 개신교가 한국전쟁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교회 재건과 국가 재건, 개신교 교회의 구조와 성격, 개신교와 국가의 관계, 교회분열과 사이비이단 발흥 등을 다룬다.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신교의 특징으로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의 보루, 기복적 신앙, 신학적 성찰 없는 교회성장주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개신교 우파의 등장과 정치참여, 신학적 영향을 제시한다. 한국 개신교의 평화선교 과제로 죄고백, 회심, 전쟁 기억 치유를 통한 민족화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올바른 한일관계 수립, 희년을 이루는 교회 10년,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과, 평화신학과 평화선교신학 수립, 평화교육, 민족의 코이노니아, 군축과 평화체제로의 전환 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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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사진가들과 미술가들이 매향리를 기억하고 상징화하기 위해 어떠한 작업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매향리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50여 년간 미공군이 작은 해안 시골마을 옆의 섬을 표적삼아 폭탄 투하 연습을 했던 곳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촉발된 사회참 여와 미국의 폭력성에 저항하고자 했던 작가들은 매향리 주민들의 고통을 대변하여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작가들은 권력의 주류 담론에 대한 저항 의식과 자주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폭발 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매향리 주민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예술로써 사회에 전달할 것을 촉구했다. 1990년대부터 쿠니사격장의 폐쇄 전까지 임옥상은 매향리에 떨어진 포탄 잔해물을 모아 미국을 풍자하는 조형물을 설치했으며, 노순택은 제도적 폭력과 분단 상황을 리얼리즘 사진으로 포착했 다. 이후 2018년 탈북화가 선무는 《반갑습니다》를 개최하여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는 차원에서 남북미 세 지도자의 초상화를 매향리에 설치했다. 이러한 미술가들의 작업은 한국전쟁 이후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한국사회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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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19.12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한국의 국군포로문제 해결노력과 향후과제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국군포로문제의 성격과 현황, 한국의 국군포로문제 해결노력의 전개와 성과, 한국의 국군포로문제 해결을 위한 향후과제를 살 펴본 후 결론을 도출해 본 것이다. 「정전협정」에 따라 전쟁포로 송환이 이루어졌으나, 미송환 국군포로들이 북한에 억류된 채 남아 있어 이들의 송환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이래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목표로 하되, 이산가족만남과 관련한 생사확인, 상봉, 그리 고 송환 등 현실적인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국군포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여전히 정전협정체결 당시 다 해결되었고 강제억류중 인 국군포로는 1명도 없다는 입장이다. 향후 한국은 국군포로문제 해결 을 위해 ①국군포로에 대한 면밀한 실태조사, ②정부와 민간의 역할분담을 통한 공동노력, ③유해 및 생존자·가족의 의사를 존중한 송환모색, ④ 귀환한 국군포로·가족에 대한 정착지원 등과 같은 노력을 지속·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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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18.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한국전쟁 당시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기에 관해 연구한다. 이를 위해 당시 남한 사회에 거주하고 있던 멜 으제니 수녀, 셀레스뗑 코요스 신부, 가르멜회의 마리 마들렌 수녀, 필립 크로스비 신부가 작성한 한국전쟁 수기를 살펴본다. 한국전쟁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는 북한군들에게 냉전 체제 속 이데올로기에 따른 타자 만들기의 빌미가 된다. 동시에 전쟁 포로들에게는 재난 상황 속에서 피해자들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희망에 대한 인식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전쟁이라는 재난을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서 타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기억과 애도, 더 나아가 연대를 가능하게 해준다. 본고에서는 한국전쟁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기를 통해 종교가 이데올로기적 기구로 작용하는 과정에서는 재난을 일으키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재난 상황 속 피해자들을 치유하고 공동체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종교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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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14.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lthough relationships among the former belligerent parties of the Korean War have changed drastically over the decades, the parties still remain under the armistice system because the Korean War is not over legally. The primary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analyze questions related to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in the Korean War from an international legal perspective. As a new topic, this is intended to be a precautionary examination of an issue that could haunt the eventual process of peacemaking on the Korean peninsula. The main text of this article consists of three parts. The first examines whether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s entering the Yalu River was self-defense under Article 51 of the UN Charter. The second part covers various legal questions relating to armed hostilities in the Korean War under international law. The third part discusses the legal questions around an armistice negot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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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1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memory of the Korean War is about the time period when people lived toughly during evacuation, due to being exposed to the natural climate such as intense cold or heat without any protection, leaving their comfortable home and living in temporary built shelters which were barely enough to avoid the wind. ‘Death is concealed and only the figures of evacuation for survival were expressed, just as how the government ordered. Since the experience of the battlefield is personal and fragmentary, that is broken into pieces, it does not have compatibility. As war is a distorted experience that cannot be placed in a big picture, it is not possible to take a view of the war’s big picture. Having this individualized experience as a common collective memory is an issue and it is the will that people tries to pursue. The reason why the evacuees from north to south, and as well as from the south to further south were all able to be adopted as the theme of artworks due to the military action that emptied the occupied territories of the North Korean Army under the forced removal command. In such situations, the natural state of the ‘snow’ was like a symbol of the 1.4 Recession. The group of people who were thrown into the intense cold displaced the war damage of loosing their base livelihood, and symbolized the obedient citizens who faithfully follow their government’s command. The figure of advocating anti-communism is projected as a figure of a refugee during cold winter-time and it contains ones past which he or she obeyed its own country’s commands. Evacuation, especially the evacuation during the winter is a visual device that can confirm these kinds of country’s command. The consequences were same for the artists as well. Therefore, the situation being communal could be found due to the individual experiences during war are ideological. The image of the refuge shown in the picture played the role of strengthening the consciousness of defecting to South Korea into the meaning of the ‘Finding Freedom.’ I would like to express that the reason of them leave their home during the harsh winter is in order to avoid the oppression of the Communist Party. The evacuation that people went through was not to ‘Finding Freedom’, but ‘To Survive’. Later, this evacuation has been imprinted as a behavior of choosing free Republic of Korea, which was an ideological issue. Anti-communism was the rule of survival in South Korea society, and people have the tendency to remember what they want to remember. As it is not the people who possesses an incident, but the memory that possesses ones, people cover their memory with disguised plots in order to forget the violence and to live a different prologue. They share the incident of violence as a hurtful memory. The tragedy of the Korean War was the result of Ideology and being in between the powerful nations’ rights, but the violence during the war has been depicted as a natural disaster, which was the evacuation in heavy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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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언론의 전쟁취재 역사는 50년 이상 되었지만, 취재 과정의 노하우 축적이나 취재활 동에 필요한 제반여건의 개선은 아직 많이 부족한 상태다. 따라서 이 연구는 제반 여건이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전쟁취재를 다녀온 실무 기자들을 직접 만나 전쟁취재과정과 환경 등을 듣고 그 개선점과 개선방안은 어떠한 점들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전쟁취재를 직접 경험한 기자들은 아직 한국언론이 전쟁취재에 있어 취재 노 하우의 축적이나 활동지원이 많이 부족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특히, 전쟁 취재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국제전문가와 분쟁전문기자 또는 특파원을 둘 필 요가 있고, 기자들도 적극 가담해 평소에도 꾸준히 이 분야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준비 해 시청자나 독자의 관심을 유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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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먼저 국가 안보 위기와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서 교회가 평화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한국전쟁 발발의 국제적 영향과 냉전체제 내에서 전쟁의 위협에 대응하여 서독의 외교정책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본다. 또한 서독 총리 아데나워가 추진한 서독 재무장 정책이 서독 사회와 독일 개신교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추적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인들은 독일에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다. 이러한 이유로 서독 수상 아데나워는 서독의 재무장을 추진했다. 재무장 정책에 대한 서독의 의견은 엇갈렸다. 독일 개신교회 내부에서도 서독의 재무장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마틴 니묄러와 그의 그룹은 아데나워의 재무장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그룹은 먼저 서독이 재무장하고 유럽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독일 개신교회의 논쟁 속에서 이 연구는 교회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연구한다.
        20.
        2018.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lluminate the veracity of deployment of the North Korean psychological warfare unit to the Vietnam War and its activities. With the South Korean troops as its target, North Korea deployed over a hundred psychological warfare troops every year, beginning with the first unit of four dispatched in June of 1966. The North Korean psychological warfare unit produced and distributed propaganda leaflets and materials; taught the Vietcong the Korean language and means to abduct South Korean troops; operated Korean-language broadcasts; and conducted data investigation and radio monitoring. The most noteworthy of said activities was the distribution of propaganda bills. An analysis of fifty-eight propaganda bills collected at the time demonstrates forms as diverse as writing, photographs, drawings, and a combination of writing and photographs (or at times writing and drawings). The contents involved propaganda regard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war, instigation of anti-American and anti-government struggles, stimulation of nostalgia and decline of morale, and inducement of defection to North Korea. The illumination of North Korean participation in the Vietnam War is a crucial facet of better understanding the significance of the Vietnam War in contemporary Korean history as well as the security conditions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1960s and the 1970s. Essential will be ongoing research on the North Korean involvement in the Vietnam War, a subject that has remained relegated to the sidelines thus f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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