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은 중국에서 악취나 벌레를 제거하고 의복에 좋은 냄새를 더하며 실내의 공기를 정화하려는 목적으로 춘추전국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한대에 이르러서는 향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향구가 사용되면서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수량도 풍부해졌으며 사용범위도 확대되었다. 滿城漢墓는 景帝의 아들이자 武帝의 이복형이었던 中山國 靖王 劉勝과 그의 부인 竇綰의 무덤으로서 香爐 6점과 香枕 2점 그리고 향료가 출토되어 서한대 왕실의 향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만성한묘의 향구에 대한 분석과 동시대 문헌기록의 해석을 통해서 한대의 향문화를 고찰하였다. 만성한묘의 향로는 형태의 특징에 따라서 豆形, 博山形, 多足形, 帶 柄形 등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향을 담아 사용하는 향침에는 산초나무 열매(花 椒)가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이 열매는 중국 본토향료로 향신료, 약재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망자의 혼령을 하늘로 인도해 준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한대 향에 대한 관념과 사용은 향구의 형태, 함께 부장된 기물 및 출토된 공간의 특성에 따라서 예의상의 향과 생활 속의 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만성한묘에서 祭器, 酒器와 함께 출토된 향로는 연회 혹은 제사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고 욕실공간에서 목욕기물과 함께 부장된 향로는 냄새와 세균을 없애서 욕실의 환경을 개선하거나 목욕시 몸에 향이 스며들도록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20년대 동북지방의 요양벽화묘에서부터 발굴이 시작된 한대 벽화묘는 섬서, 하남, 하 북 등에서 100여기에 가까운 수가 발굴되었다. 한대 벽화묘의 발달에서 동한 후기에는 동 북, 북방, 하서를 잇는 북부지역이 벽화묘 축조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이들 북부지역 동한 벽화묘들은 한대 고분벽화 문화의 분포에서 동일한 소재를 공유하면서도 지역적 특징의 형성이 관찰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연원에 중요한 자료로 최근 북방지역에 발견된 벽화묘들의 연구의 필요성에 주목하여 내몽고와 섬서성 북부 지역을 포함하는 중국 한대 북방지역 벽화묘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한대 고분벽화의 분포와 전파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새로운 벽화묘들로는 섬서 북부의 陝西定邊郝灘東漢壁畫墓, 陝西靖邊楊橋畔東漢壁畫墓, 陜西 靖邊楊橋畔鎮楊橋畔二村南側渠樹壕漢墓, 陝西靖邊楊橋畔渠樹壕漢壁畫墓가 있다. 내 몽고에는 內蒙古鄂托克旗巴彥淖爾鄕鳳凰山1號墓, 內蒙古鄂托克旗烏蘭鎭米拉(蘭)壕漢 墓, 内蒙古卾爾多斯巴日松古敖包漢代壁畫墓 등이 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북방지역 벽화묘의 구조와 벽화의 특징을 정리한 후 관중지역 서한 후기 벽화묘들과 비교하여 지역 간 연관관계를 고찰하였다. 섬북과 내몽고지역 동한벽화묘와 관중지역 서한벽화묘의 공통점은 첫째는 수렵도, 천상도와 같은 특정 주제의 공유, 둘째는 소재의 배치와 표현방법의 계승, 셋째는 벽화의 바탕면을 녹색이나 적색으로 칠한 후에 그 위에 벽화를 그리는 제작 방법의 유사성이다. 주제와 배치 및 표현방법의 연속성은 관중지역의 사민이 북방지역으로 이루어지면서 화본의 유통과 화공집단도 같이 이동한데서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섬북과 내몽고지역의 수렵도와 산악도의 구성, 인물도의 구성과 배치 등은 고구려의 초기 고분벽화가 형성되는데 하 나의 연원을 북방지역에서 찾을 수 있도록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계의 지형 변화는 이데올로기 대립 구도의 붕괴, 세계성과 지역성의 충돌, 아날로그와 디지털 체계의 교차 등 당시 대내외 사회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시기 ‘신세대 미술작가’라 불린 일군의 젊은 세대 작가들은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예술 활동을 벌였는데, 이들은 시대적인 구도 변화의 의미를 분명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작업 초기 신세대 작가로 호명되었던 이불은 초기 퍼포먼스부터 1990년대 이후 다양한 미술 활동들로 대내외 미술계를 넘나들었다. 본 논문은 이불의 미술 작업을 통해 우리 현대미술이 동시대성을 획득하게 된 맥락을 구체적으로 추적하고, 당대 우리 미술계 내 세대전환의 계기가 단순히 어느 한 시기의 일정 상황과 관계하는 것이라기보다 인식체계의 전환과 연관된 바임을 다루고자 하였다.
본고는 이성자의 1950-1960년대 프랑스에서의 활약을 ‘누벨 에콜 드 파리’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전후 프랑스는 미국과 문화 종주국으로서의 입지를 두고 경쟁하는 와중 ‘에콜 드 파리’ 개념에 주목했고 ‘전통’과 ‘자연’을 중시하는 아시아 작가들을 대거 포함시켜 ‘누벨 에콜 드 파리’ 라 칭했다. 문화적 충돌과 번역을 거듭하는 ‘사이 공간’으로 작용했던 파리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이성자는 프랑스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중국, 일본과 차별화되는 한국성을 은유적이고 혼성성이 두드러지는 작업을 통해 드러냈다. 이를 통해 이성자는 ‘누벨 에콜 드 파리’의 일원으로 인정 받고 국제적으로 활약한다.
주지하듯이 기존의 한국 문인화에 대한 연구는 미술사가나 미술평론가들이 고전 자료를 중심으로 한 화론적(畫論的)인 내용이나 한국 현대문인화의 문제점 분석 등 관념적인 내용의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한국 현대문인화의 본질(本質)을 중시하는 관념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논자가 미술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문인화의 실존(實存)을 통한 한국 현대문인화를 전통적 경향과 현대적 경향의 작품으로 분석하여 한국 현대문인화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엄밀하게 말해서 작품의 성향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오해의 가능성이 크다. 또 같은 작가라고 해도 각각의 작품의 내용과 방향성은 세부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현대문인화를 전통적 경향과 현대적 경향으로 나누어 구분할 것이다. 구체성에서 멀어진 대신 지극히 단순함이 갖는 이점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국 현대문인화를 구조적으로 개괄함으로써 복잡하고 다양한 작품들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한국 현대문인화에 대한 기본 틀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작품인 애니멀 키오스크는 2019년 사비나미술관 여름특별기획전에 7월부터 11월까지 전시되었다. 멸종 위기동물, 예술로HUG전은 ‘생물다양성 보전’ 이라는 인류의 당면과제를 예술적 시각으로 제시하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로 기획되었다. 이와같이 본 전시는 멸종위기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류에게 전하는 공존과 화해의 메세지를 주제로 기획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더욱 돋보이기 위해 키오스크와 프로젝션을 통해 환경 자가 진단 체크리스트인 “애니멀 키오스크”를 전시했다. 애니멀키오스크는 환경에 대한 실천지수를 점검하고 각자에게 맞는 환경보호 실천방법을 진단해 알려주는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이다. 관객이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생태계 공존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하고 관객 참여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살기 위한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애니멀 키오스크는 각각 다른 개발 도구를 활용하여 개발되었다. 이는 효과적인 표현과 플랫폼에 맞추기 위해 선택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5개월간 열린 전시에서 확인해 보았다. 또한 본 연구를 통해 앞으로 다양한 전시 콘텐츠와 다른 개발 도구를 융합하는 방향을 도출한다.
이 논문은 단색화가 부상한 1970년대와 재부상한 2010년대의 두 시기를 세계화 관점에서 각각 고찰하면서 각 시기에 대두된 담론의 변화를 추적한다. 1970년대 서구미술 수용 과정에서 나타났던 모노크롬 추상화는 1975년 일본에서 열린 《한국 5인의 다섯 가지의 흰색》전을 계기로 단색화로 수렴되는데, 이 과정에는 일본을 국제무대 진출의 창구로 바라보는 세계화 인식이 작동 하였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조선 미술의 특질로 ‘비애의 미’를 언급한 ‘백색 미학’이 이 시기에 단색화 담론으로 부활한 것은 일본을 통해 세계로 나가려는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2010년대 들 어 한국미술이 세계무대로 직행하게 되자 단색화 담론에는 서구의 타자로서 동양을 의식하는 동양주의가 나타난다. 제국주의를 넘어선 제국의 시대에도 서구의 근대적 시선의 권력이 단색화 담론을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로서 인공지능, IOT(Internet of Things) 등 모든 산업의 핵심은 소프트웨어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게 소프트웨어 교육 즉 코딩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며 화두가 되고 있다. 컴퓨팅 사고력 검사에서는 평가, 분해, 알고리즘에 유의미한 상승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창의력 검사에서는 독창성, 성급한 종결에 대한 저항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승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본 연구의 미술 코딩 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조하고 있는 컴퓨팅 사고력과 창의력을 향상시켜주며 이를 통해 프로세싱을 활용한 미술 코딩 교육 프로그램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교육 현장에서는 변화의 물결에 대응할 만큼 소프트웨어 교육을 통한 미래 인재 양성 교육에 대한 인식과 관심, 준비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교육의 목적 달성에 기여하고자 컴퓨팅 사고력과 창의력 향상을 위한 미술 코딩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실험 연구로 좀 더 다양한 주제로 게임 코딩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도 적용될 것이다.
본 연구는 이탈리아 예술운동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일원으로 활동하여 주목을 받았던 조반니 안셀모(Giovanni Anselmo, 1934- )의 초기 작업에 대한 연구이다. 제르마노 첼란트가 주도했던 ‘아르테 포베라’는 ‘미래주의’를 제외하고는 전후 아방가르드 미술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 온 예술 종주국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미국 및 다른 유럽 국가들의 개념미술 운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의 예술운동을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첼란트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이 운동에 대한 정의를 여러 차례 번복하면서 ‘아르테 포베라’의 특징은 포괄적이고 모호해진 측면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의 정의는 가난한 오브제, 자연적인 형태, 활동적인 힘, 재료적 리얼리티 등으로 귀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안셀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안셀모는 첫 번째 전시만을 제외하고 모든 ‘아르테 포베라’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첼란트가 정의한 이 운동의 특징을 작업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했으며, 그가 원했던 넓은 범주의 동시대 작가들을 포용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였다. 안셀모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에너지’는 열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며, 모든 고정된 것들과 유동적인 것들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작업에 표현된다. 또한 물의 증발이나 열에 따른 금속의 긴축 상태, 직접적인 유기물을 재료로 한 작업들은 자연력과 생명력을 중시하는 아르테 포베라의 강령에 부합한다. 또한 멈춰있지 않고 흐르는 에너지는 소모와 소비의 전략으로 연결된다. 안셀모의 이러한 작업들은 ‘아르테 포베라’의 정착 초기에 그 운동을 효과적으로 대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작업’,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의 증가’, 조르주 바타유의 ‘데팡스’ 등의 담론과 연결되어 동시대적 연구의 동의를 이끌어낸다.
연구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기독교적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소고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을 필두로 빅 데이터, 클라우드, 5G 등의 신조어를 쏟아 내며 오늘날 우리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하여 긍정적인 담론과 부정적인 담론들이 혼재하며 우리의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고있다. 4차 산업혁명은 오늘날 시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 체계 속에 파고들고 그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문화체계인 영화계, 미술계, 음악계에 영향을 주고 있고, 교육체계에도 적지 않은 도전을 주고 있으며 의학 분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심리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영향은 앞으로 기독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먼저 1차에서부터 4차에 이르는 산업혁명의 주요변화 특징 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1차 산업혁명에서는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산업에 혁신을 가져 왔고, 2차 산업혁명에서는 전기의 발견을 생산량의 증폭을 가져와 사회구조의 변화를 일 으켰다. 3차 산업혁명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하여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가져 왔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서는 방대한 데이터을 클라우드에 구축하고 5G의 초고속 통신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정보를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이 소통하는 시대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속에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하고 분석하며 판단을 내리는 인간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들이 예상되고 있다. 이와같은 4차 산업혁명이 다양한 사회체계 속에서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에 대한 기독 교적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본 글을 마무리 했다. 시대 변화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 전략을 마련하지 못하면 4차 산업혁명이 제시하는대로 이끌려 다닐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기독교적 신앙은 절대 진리인 성경의 말씀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분석하고 판단하며 제시하는 것을 따르게 될 수 있는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따라는 본 연구는 기독교적 대응을 모색하여 시대적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더 나은 성경적 신앙으로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한국전쟁 직후에 식민지 세대 화가ㆍ평론가들이 제기한 추상 담론이 한국근현대 미술사에서 어떤 의미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재검토하는 작업의 일부이다. 추상 담론은 식민지 유산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미술계가 재편된 가운데 제기되었다. 그들은 한국전쟁 후 폐허 같은 상황에서 이른바 세계화ㆍ현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고, 서구의 전후 추상 물결을 현대성으로 인식하는 한편, 실존주의 사상과 문학에 공감하는 가운데 추상 담론을 전개했다. 그들은 주로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전반기의 동양주의 추상 담론을 재인식하는 가운데 추상을 통하여 동양적/한국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과 뒤이은 전후 세대가 냉전공간에 현대성을 지시하는 기호로서 추상을 신화화하는 동안, 식민지 근대성을 해체하는 또 다른 시대적 과제는 묻히게 되었다.
본 논문은 아키발트 모틀리(Archibald J. Motley Jr, 1891-1981)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에 나타난 ‘신 흑인’ 도상을 통해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밝히는 연구이다. 모틀리는 동시대 ‘신 흑인’의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구현하며, 할렘 르네상스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모틀리의 명성과 달리 국내에서 그에 관해 이루어진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모틀리의 전반적인 작업경향의 시작되는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을 연구하는 것은 모틀리에 작업 전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획일적인 흑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도상을 연구하는 작업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모틀리는 미국 사회의 인종개념에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진실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미지를 알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 인종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체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주목했다. 또한 다양한 피부색과 개성 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은 정형화된 흑인의 모습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인 종차별에 관한 관념 및 사고들에 관해 재해석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담론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에 대항 하는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화가 조셉 스텔라의 1910-1920년대 작품에 나타난 종교성에 대한 연구이다. 스텔라는 뉴욕의 도시풍경을 묘사한 대표작 <빛의 전쟁, 코니 아일랜드, 마디 그라 Battle of Lights, Coney Island, Mardi Gras>(1913-1914)와 <해석 된 뉴욕 도시의 음성 The Voice of the City of New York Interpreted>(1920-1922)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미래주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스텔라는 산업도시 이외에도 여성 누드, 마돈나, 식물 등 다양한 주제와 양식으로 풍성한 다작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텔라 작품 연구는 미래주의 시각에서 아주 짤막하게 소개되었고, 간혹 정밀주의에서 스텔라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그 관계는 매우 미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텔라의 작품 속에 내포된 의미에 접근해야할 것인가. 스텔라는 1896년에 도미(渡美)하면서 대도시 뉴욕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그는 산업적 풍광에서 심미적이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느꼈으나, 이내 건물에 가려진 햇빛과 주변의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현실은 망향(望鄕)이 깊어지고 내면적 감정을 작품에 투영하게 했다. 스텔라가 간직한 고향 풍광은 교회종탑이 있었고 이는 그리움과 종교적 근원처럼 그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스텔라는 대도시 뉴욕의 수직적 공간에서 발생한 양가 적 감정을 천상과 소통하려고 하는데 유연한 접근이 가능했다. 스텔라는 브루클린 다리를 본 순간, 다리의 본질적 기능인 통로를 떠올림과 동시에 과거의 대성당이 그 시대의 상징물이었던 것처럼 현대 기계시대의 상징물로 보았다. 그는 브루클린 다리를 배경 속의 부수적인 역할로 등장시킨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통로로 사용하여 감상자를 신성의 면전에 세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종교미술에 내포된 신성함과 경건함 등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러한 스텔라의 노력은 전형적인 현대 도시, 뉴욕 자체를 묘사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스텔라는 거대한 크기의 <해석된 뉴욕 도시의 음성>에서 종교 제단화 구조의 서사적 구성으로 맨해튼을 상징하는 장소들을 가시화하고 유랑하는 듯이 정신적 체험을 유도할 수 있었다. 1910-1920년대 스텔라의 대표작 속에서 종교성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톨릭 문화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스텔라에게 내재되어 있는 가톨릭 유산이 나타난 것이자 점진적으로 정신적 통합을 고취시킨 것이다. 스텔라는 기계문명을 찬미하는 세속적 주제와 종교성을 결합하여 캔버스를 정신적 감동으로 승화시켰고, 이것은 모더니즘 양식에 기초하면서도 정신적 가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표현하는데 적합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스텔라의 1910-1920년대 뉴욕 이미지를 통해 종교성이 내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스텔라의 작품에 대한 기존 연구가 미흡한 것을 고려할 때 대표 작품을 종교성이라는 주제에서 재조명하고 스텔라 연구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민족주의의 발현과 함께 유산은 본격적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기 시작 하였고, 20세기 중반 유네스코의 탄생과 더불어 인류의 자산으로 국제적인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문화유산학이라는 독립 학제의 탄생과 더불어 유산의 담론이 학문적으로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유산은 과거에서 발견된 문화적 산물에서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선별되고 형성되는 사회적, 인류학적 과정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유산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 다양화되어, 유산은 국가 건설에 있어서,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내러티브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 관계에서 외교적 무기이자 소프트 파워로서 세계에 각 나라의 역사적 당위성을 전달하는 역할까지로 확대되었다. 최근에는 유산이 개인의 삶과 더욱 깊이 연관되면서 그 역할이 치유와 사회적 웰빙 매개체로서 발전하는 추세이다.
본 논문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의 <선택받은 자 The Consecrated One>(1893)에 관한 연구이다. 호들러는 죽음의 경험으로 형성된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였다. 호들러의 초기작은 비관적 종말론으로 보편적 운명인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하는 인물상을 그렸다. 그러나 호들러는 1892년에 뒤팽과 아들 헥토르와의 재결합으로 안정을 찾게 되어, 삶과 죽음이라는 생의 이중적 구조와 보편적인 주제를 낙관적인 시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선택받은 자>는 이시기의 과도기적 작품으로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기념비적 회화이다. 호들러는 <선택받은 자>에서 여성 이미지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배열하였고, 소년과 작은 정원을 화면의 정중앙에 배치하여 평행주의를 적용하였다. 평행주의란 호들러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조형언어로 화면의 구성방식을 의미하는 형식적인 측면 뿐 아니라, 호들러가 평생 동안 추구한 보편적 가치인 내용적인 부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호들러의 평행주의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그 거대한 운행과 모습이 형성하는 통일감을 바탕으로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호들러가 평행주의에 대한 개념 정립이 자연의 질서와 통일감에서 시작됐다면 이론적 근거는 샤를르 블랑(Charles Blanc, 1813-1882)의 조형예술의 문법 Grammaire des Arts du Dessin(1867)의 영향이었다. 블랑의 저서에 서는 종교적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집트 미술의 반복 대칭을 강조하였으며, 호들러는 이러한 특징을 <선택받은 자>에서 활용하였다. <선택받은 자>는 이러한 형식적 특징과 함께, 기도하는 나체의 소년과 천사들 그리고 추상화된 배경으로 신비롭고 신성한 종교적 분위기와 상징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선택받은 자>의 주제는 ‘봄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과 ‘구원을 의미하는 기독교적 도상’ 으로 분석된다. 첫 번째 주제는 범신론에 근거한 자연숭배사상으로 봄의 부활과 재생, 젊음의 생명력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였다. 호들러의 종교는 프로테스탄트교였지만 1892 년 장미십자회 전시와 19세기 말 여러 가지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범신론적인 주 제를 표현하였다. 두 번째 주제는 아들 헥토르와 천사들을 통해 드러나는 기독교적 구원의 개념이다. 호들러는 유년시절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극복하기 위해, 칼뱅의 선민사상을 기반으로 아들의 구원을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호들러는 묘목과 소년과 천사의 도상을 통해 십자가 책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호들러는 <선택받은 자> 에서 아들의 구원뿐 아니라, 십자가 책형으로 인간의 원죄를 대속한 예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인류의 구원을 기원하는 보편적 인류애를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호들러는 이 작품에서 천사를 성모마리아로, 소년을 어린 예수로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가톨릭교에 대한 관심도 배제하지 않았다. 호들러는 <선택받은 자>에서 평생 동안 천착했던 종교성과 보편성을 개인적인 가치를 초월하여 성공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선택받은 자> 단 하나의 작품으로 작가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포괄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목적 : 본 연구는 그룹감각통합치료가 학령전기 발달지연 아동의 작업수행과 또래와의 상호작용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연구방법 : 본 연구는 그룹감각통합치료를 경험한 적 없는 만3세의 발달지연 아동 3명을 대상으로 주 1회 70분씩 5주 동안 진행하였다. 그룹감각통합치료는 대근육과 소근육 증진, 또래와의 상호작용 향상을 위한 오감놀이 활동과 미술 활동으로 구성하였다. 결과측정은 중재 전, 후의 작업수행과 상호작용을 평가하기 위해 Canadian Occupational Performance Measure(COPM)과 Penn Interactive Peer Play Scale(PIPPS)를 실시하였다. 또한, 사전/사후설문지를 사용하여 그룹감 각통합치료에 대한 보호자의 요구 및 만족도를 평가하였다. 측정결과는 윌콕슨 순위 검정(Wilcoxon matched-pair signed rank task)을 사용하여 그룹감각통합치료 중재 전, 후의 변화를 비교하여 분석하였다.
결과 : 그룹감각통합치료 중재 후, 대상자의 작업수행과 또래와의 상호작용능력에 유의한 향상을 보였다(p<.05). 또한, 전 반적으로 그룹감각통합치료에 만족하며 추후 진행될 중재에 참여할 것이라는 보호자의 평가가 있었다.
결론 : 그룹감각통합치료는 작업수행과 또래와의 상호작용 향상에 효과적인 중재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향후에는 장기간 동안 많은 대상자에게 그룹감각통합치료를 적용하기를 기대한다.
고고 유적은 집중적 관리를 필요로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요 문화 유산이다. 런던 미트라 신전 박물관은 정부 및 민간분야의 협업을 통해 고고유적을 활용한 복합 문화 공간이 되었으며, 문화재의 관리와 활용에 있어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영국의 전통을 반영한다. 그 협업의 결과로 본래 건축 자재와 복제품으로 복원한 신전 유구에 다양한 시청각적 효과를 더해 관람객들의 상상을 북돋우는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또한 박물관은 소재지인 월브룩 지역의 로마시대 고고 유물과 함께, 이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 기업인 블룸버그가 관리 책임을 맡아서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문화유산의 활용에 있어서 민간 분야의 새로운 형태의 협력상을 보여주는 유용한 참고사례가 될 것이다.
본 논문은 사전트가 제작한 남성 초상화를 생물학적 남성의 지위나 가치보다 남성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남성성의 가치를 살핀 연구이다. 사전트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영국, 미국의 저명한 귀족, 학자, 정치인 등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이들의 초상을 제작함으로써 19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의 남성성을 확립했다. 사전트의 남성 초상화는 일견 계급과 젠더라는 측면에서 우월한 귀족 계급의 남성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귀족 계급이 붕괴되기 전으로 회귀하려는 노스탤 지어적 성격을 띤다. 그는 급격히 성장한 부르주아지 계층들이 구 귀족 세대를 따라하려는 욕구를 초상화에 반영했다. 사전트는 당시의 댄디라는 개념을 적용해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뿐 아니라 상류사회의 기호에도 맞는 방식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 문맥에서 댄디란 신체의 외모, 세련된 언어 구사, 여유로운 여가 등에 특별히 의의를 부여하는 사람을 이른다. 사전트는 19세기 말 벌어진 커다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변화를 목격했다. 동시대 남성들에게 산업화에서 제국주의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는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으며, 제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곧 새로운 남성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19세기말 ‘남성성(Maleness, Masculinity, Manliness)’이란 용어는 특별한 함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Manliness’는 용감하거나 강하다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특질을 말한 다. 반면에 ‘Masculinity’와 ‘Manliness’는 사회적으로 구축된 남성상의 형식을 지시하는 표현이다. 이 두 개념은 특별히 19세기말의 남성 연구와 관련 있으며, 사회적으로 요구 되는 남성상의 개념이다. 이러한 남성상의 패러다임에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은 젠틀맨, 댄디, 비지니스맨과 같은 사회적 남성상의 개념이다. 따라서 사전트의 초기 남성 초상화의 남성성의 개념은 생물학적 개념보다는 사회적 개념인 남성상의 개념과 관련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도 사전트의 남성 초상화의 남성성의 개념을 생물학적인 층위에서 보다는 남성상이라는 사회적 측면에서 고찰했다. 그 결과 사전트는 시터와 화가와의 전통적 관계에서 교감하거나 소통 혹은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관찰하며 시대적 변화를 담아내는 사회적 초상을 제시했다.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는 성모가 죽은 그리스도를 무릎에 안고 있는 전형적인 피에타와는 다른 구도를 지니고 있다. <론다니니 피에타>에서 성모와 그리스도는 수직으로 서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고 기대어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 전 과정에서 남은 것으로 보이는 팔 형태와 사람의 얼굴, 그리고 세마포와 도유석으로 추측되는 파편적인 형태들이 남아있다. 이와 같은 <론다니니 피에타>의 독특한 구도와 파편적인 흔적들은 이 조각을 피에타 외에 십자가 책형이나, 매장 등의 다른 도상으로 해석할 여지를 준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 도상들에 기반하여 그리스도 뒤편의 인물이 성모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논의해볼 수 있다. 이 인물의 신체적인 비율과 맨 다리를 드러낸 표현은 그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바사리와 콘디비는 그가 니고데모이자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었을 가능성을 제안한다. 당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에서 갈등하였음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해석은 가능해 보인다. 즉, 미켈란젤로는 밤에 비밀스럽게 그리스도를 찾아간 유대인 니고데모와도 같은 처지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여러 차례 수정하면서 결국에는 모호하게 남아있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통해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조각에 이상을 끊임 없이 추구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여러 흔적을 지닌 미완의 대리석 그대로 남아있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와 대리석 사이의 치열한 조각적 과정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크노소스는 고대와 현대의 역사적 층위가 공존하는 기념비적 공간으로서, 문화유산의 보존과 운용에 대한 다양한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에번스가 추진했던 ‘재구성’ 작업은 고대 유적의 보존과 보수 뿐 아니라 미노스 문명에 대한 현대 관람자들의 이해와 감상을 북돋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으며, 일반 관람자들이 보다 쉽게 고대 미노스 문명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시각 자료 를 제공하려는 목적이었다. 크노소스 발굴 당시는 서구 사회에서 고대 유적 답사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무렵으로, 일반 관람객과 전문 연구자들로 이원화되는 주체들에 대한 지속적 활용 방안이 모색되었다. 에번스 개인에서 아테네 영국연구소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리스 정부로 소유권 이 이관되는 과정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던 과제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역할에 대한 균형적 대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