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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1.
        2021.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국경선을 298년에 국경선을 시네로 철수하였고, 메로에 왕조가 4세기 중반 이후 붕괴하자, 트리아콘타스코이노스에서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 무렵에 이 지역에서 블레미스인들과 노바데스인들이 등장하여 충돌하였다. 먼저 블레미스인들이 394년에 탈 미스를 점령하였고 5세기 전반기에는 도데카스코이노스와 함께 동부 사막 지대의 에메랄드 광산을 개발하였다. 동부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이들은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하자 매장지와 목초지를 구하여 도데카스코이노스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치적으로 지배하면서 에메랄드를 중심으로 중개무역을 하였다. 5세기에 제2폭포 지역을 중심으로 노바데스인들이 등장하여 노바디아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의 실코 왕은 5세기 중엽에 부족연합국가를 형성하여 블레미스인들을 물리치고 도데카스코이네스 지역을 차지하였고 6세기에 접어들어 중앙집권화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부족연합국가 단계를 넘어 중앙집권화된 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실코 왕은 다른 전통 종교들과 함께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였다. 그러한 증거로 블란나 지역의 무덤들에서 기독교의 표지를 가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던 풍습이 사라지다가 500년경에는 큰 무덤을 만드는 매장 풍습이 사라졌다. 동로마제국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나라가 543년에 정식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이것은 5세기 후반부터 기독교가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의 정점으로 보인다.
        1702.
        2021.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손중산(孙中山) 선생은 중국 근대 민주혁명의 선구자로서 민주혁명에 그의 일생을 받쳤다. 그는 중국 근대화 시기 민주혁명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서양의 문화와 정치제도를 결합하여 그만의 독특한 정치사상을 형성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삼민주의(三民主义)를 창안하였다. 손중산(孙中山)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三民主义)에서 비롯되었으며, 삼민주의(三民主义)는 다년간의 민주혁명운동의 과정에서 그의 혁명강령이 된다. 손중산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하에 서양의 삼권분립체제를 한 단계 발전시킨 오권분립체제의 민주공화제도를 중국에 도입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손중산이 주장한 오권헌정(五权宪政)이다. 이는 헌정(宪政)을 민주정치의 기초로 삼고 국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하여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1703.
        2021.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2003~2018년까지 16년간 중국이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에 직접 투자한 패널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한 것으로, IMF의 대표적 금융기관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FI (Financial Institution Index)와 금융시장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FM (Financial Markets Index)을 채택해 ASEAN의 금융 발전 수준을 가늠 하는 변수로 삼았다. 각국의 정치적 수준을 대변하는 WGI(Worldwide Governance Indicators)와 각국의 인간개발지수를 나타내는 HDI (Human Development Index)를 채택해 아세안 사회 환경을 가늠 하는 변수로 삼았다. 이를 조절변수로 삼아 아세안에 대한 중국의 직접투자를 각각 상호작용을 하여 중국의 직접투자가 아세안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관측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대한 직접투자가 유치국 경제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아세안의 사회 환경과 금융 발전은 중국의 직접 투자에 대해 부정적인 조정 작용을 가져온다.
        1704.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의 목적은 인명진 목사의 정치참여 활동을 11번으로 구분해서 분 석했고 끝으로 그 정치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검토했다. 인명진은 1970년대 산업선교를 통해 노동자 인권과 권익을 대변했고 네차례 감옥 생활을 했 다. 1980년대 인명진은 강제 추방되고 외국에서 다양한 혁명 사례를 분석 했고, 정치 혁명이 아닌 신앙에 근거한 인간 변화의 공동체 운동을 대안으 로 생각하게 됐다. 1982~84년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극좌로 이념화되어 인명진의 사상은 개량주의로 비판받는다. 1986 그는 민주화운 동 국민운동 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지도자 김영삼과 가까운 관 계를 맺고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이것이 훗날 보수 정당과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권하에서 그는 목사의 정체성을 지키면 서 행정개혁과 KBS 이사직에 참여했다. 2006년 보수 정당 한나라당이 부 정부패로 위기에 처했을 때 윤리위원장직을 맡아 부패한 정치인을 징계하 는 개혁에 참여했으나 정치구조를 바꿀 수 없는 한계를 경험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된 이후 새누리당에서 97일 동안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탄핵을 수용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고, 헌정질서를 따라 당에서 대통 령 후보를 배출하고 그 직을 사임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큰 비 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활동을 기독교 목회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겼고, 죄인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교회는 보수 진보를 떠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했다. 한국교회사와 정치사에서 진보적 사회운 동을 했던 목사가 보수 정당을 대표해서 비상대책활동을 한 것은 아주 특 이한 정치참여 경험이다.
        1705.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로마 사두체제(주후 303년〜311년)가 기독교를 박해하게 된 원인을 통해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박해의 원인을 기초로 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관과 사 두체제의 기독교 박해의 관계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사두체제에서의 박해는 첫째로, 전통 종교에 대한 로마 사회의 절대적인 믿음이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다양한 원인의 기초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로마의 황제들도 종교를 정치의 정책으로 이용했고, 통치의 방법으로 활용 했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를 단순히 통치의 방법으로서 활용한 것에 그치 지 않았고, 그들에게 종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셋째로, 로마 사두체제의 기독교 박해는 종교관에서 뿐 아니라 사 상적, 철학적인 지지를 받아 실행했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1706.
        2020.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교원 행정업무 경감 정책이 변동되어온 흐름을 Kingdon의 정책흐름모형을 활용하여 분석하며 교원 행정업무 경감 정책 방안의 재조명과 함께 정책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따라 지난 20년간 교원 행정업무 경감 정책 관련 기사 흐름을 분석한 후, 최근 10년의 정책을 Kingdon의 정책흐름모형을 활용하여 정책의 흐름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분석 결과, 2008년 이후 총 3번의 정책의 창이 열린 것으로 분석되었다. 주요 흐름은 정치의 흐름이며 각각의 흐름을 결합하는데 정부 내 활동가와 가시적 활동가인 대통령, 교육감, 정책 관련 공무원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차 정책의 창은 미국의 금융위기에 따른 정책 문제의 흐름과 2010년의 교육감 직선제 등 정치의 흐름으로 정책의 창이 열린 것으로 분석하였다. 2차 정책의 창은 학교폭력으로 인한 학생의 자살로 인해 문제의 창이 열렸고, 제19대 국회선거, 제18대 대통령 선거 등의 정치적 변동이 주요 흐름으로 흐르며 정책의 창이 열린 것으로 분석하였다. 3차 정책의 창은 정책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활용된 교무행정사의 자살, 학교 현장에서의 집단 간 갈등 등의 정책 문제의 흐름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이익집단의 활동으로 정치의 흐름이 결합하여 정책의 창이 열린 것으로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였다. 첫째, 교원 행정업무 경감 정책의 의사결정과정에서 협력적 거버넌스를 지향하며, 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 둘째, 교원 행정업무 경감 정책의 인력 자원으로 활용된 교무행정사 제도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이 필요하다. 셋째, 교원 행정업무 경감 정책의 안정적인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인 긴급지원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1707.
        202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한국사회의 ‘인정의 정치’의 일면을 교육감 선거의 공약 측면에서 관찰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2014년과 2018년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 어떤 후보 자가 다문화 관련 공약을 제시했는지 검토했다. 후보자 130명의 공약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다문화 공약은 후보자의 정치적 진영이나 출마 지역의 특수성을 떠나, 높은 당선 경 쟁력을 갖춘 후보자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제시되어 온 경향이 관찰되었다. 이러한 결 과는 선거 후보자와 유권자를 ‘정치 시장’의 ‘합리적’ 참여자로 간주하는 ‘행위자 중심적’ 시각으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대신, 후보자의 공약 제시가 상당한 정도로 ‘적 절성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질 가능성을 강조하는 ‘제도주의’ 가설과 부합한다. 교육감 선 거에서 다문화 공약은 높은 제도적 ‘정당성’을 갖춘 ‘적절한’ 정책 의제로서 주요 후보자들 을 중심으로 제시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1708.
        202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는 우리 국민 모두의 관심사이며, 여전히 영유권 분쟁으로 일본과 대치상태에 있다. 이러한 독도를 지키기 위한 국민적 관심과 노력은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들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독도 지키기의 일환으로 문학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진행되어 왔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다. 그동안의 독도에 대한 문학 작품은 대부분 교육차원의 동화 나, 학술 차원의 역사적 고증이 주를 이룬 역사교양 소설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출간된 동화나 소설의 경우는 목적을 가진 도서로 그 수용계층의 한계성에서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순수한 마음의 노래인 시(詩)의 경우는 그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다. 이 글은 전문적인 소양을 갖춘 등단작가와 문학의 독자인 일반인이 독도에 대해 쓴 시를 취합하여 엮은 『詩로 만나는 독도』 에 수록된 작품들을 바탕으로 하여, ‘독도에 대한 문학적 관심과 그 실태’를 살펴보았다. 『詩로 만나는 독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다양성과 주제에 대한 편향성이었다. 독도에 대한 시를 쓴 작가들은 기존 유명한 시인에서부터 등단하여 현재 문단에서활동 하는 문인(시인)은 물론이고, 어린 학생에서부터 해방정국까지 겪은 80대까지의 폭 넓은 연령층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직업면에서는 주부, 기업인, 직장인, 공직자, 학생, 연애인, 예술과, 종교인, 정치인 등 사회 모든 분야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거의 참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이처럼 작가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애국’에 함몰된 작품이라는 한계성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독도를 수호하자, 독도는 우리의 땅이다 라는 구호성의 글쓰기에서 ‘독도 사랑’의 효용성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 효용성은 시가 대중화되어 대중들이 향유할 때 그 ‘효용’을 발휘한다. 다시 말하면 ‘독도 시’가 ‘대중 시’가 되기 위해서 시인들이 독도를 애국의 기재를 넘어 문학의 기재로 재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문학의 기재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독도 시’는 시가 가지는 특징이나 시의 미학이 많이 미흡하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서 문학적 측면에서 좀 더 다양하게 독도를 알리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709.
        2020.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목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T. S. 엘리엇의 『황무지와 스티븐 스펜더의 『비엔나가 각각 어떻게 1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유럽의 분열과 정치사회적 탄압 이라는 주제가 각 시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조명하는 것이다. 1인 칭 대명사 사용에 대한 연구는 시인이 “얼마나”, 또 “어떻게” 자신의 시 에 직접 개입하여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는지를 알기 위한 중 요한 작업이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황무지속의 1인칭 대명사 “I”의 정체를 찾기 위한 과정이 유럽의 분열이라는 시적 주제를 어떤 방식으 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 다음, 『비엔나에서의 “we”와 “they”의 병치가 어떻게 사회주의자들을 향한 정치적 탄압 뿐 아니라 동성애자들을 향한 사회적 탄압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논할 것이 다.
        1710.
        2020.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중등교사의 논쟁학습 실천 지향성에 따른 논쟁학습 실천 장애 인식이 어떠한지를 탐구하여 논쟁학습 중심 민주시민교육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보이텔스 바흐 합의’의 내용이 논쟁학습의 실천 원리와 정합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 구정보원과 서울교육정책연구소(2017)에서 위탁받아 시행된 「보이텔스바흐 합의 정신에 기반한 학교 시민교육 현장 적용 방안 연구」에서 수집된 자료를 이차분석(secondary analysis)하였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핵심 내용에 대한 지지 정도에 기반한 논쟁학습 실천 지향성을 분류하여, 조사 대상자는 ‘적극적/보통/소극적’ 논쟁학습 실천 지향성 집단으로 범주화되었다. 일원분산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극적 실천 지향성 집단일수록 논쟁학습 내용이 교육과정과 교재 내용과의 부합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논쟁학습의 실천을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배 가능성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둘째, 적극적 실천 지향성 집단일수록 논쟁학습 실행에 대한 제도적 제한뿐만 아니라 교사 신변의 불안정성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외적 장애에 민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적극적 실천 지향성 집단이 논쟁학습에 대하여 부분적인 교수효 능감을 인식하였다. 본 연구는 조사대상이 서울시 중등 교사에 한정되어 있으나 논쟁학습의 실행 지향성 수준에 따른 논쟁학습 장애에 대한 교사의 인식 양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므로 향후 민주 시민교육 실천 확대를 위한 방안도 이에 따라 서로 차별화될 필요가 있다.
        1711.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과 내용적인 특징을 연구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에서 채택한 것으로 당시 같이 채택한 대한장로교회 신경과 함께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의 제정 과정에서 노회를 위한 규칙과 부칙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합공의회의 회원들은 곧 설립하게 될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감당하기에는 어렵다는 이유로 좀 더 간단한 형태의 규칙을 채택했다. 이렇게 제정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에 나타나는 장로교 정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항존직을 장로와 집사 두 종류로 구분하고, 다시 장로를 목사와 치리장로로 구분했다. 둘째, 당회, 노회, 총회 등 치리회를 매우 수직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교회직원을 항존직 중심으로 규정하고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영수, 조사, 전도부인, 전도사, 권서 등에 대한 규정은 미비했다. 넷째, 별도의 예배모범 없이 간결한 주일 예배 형식만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시찰위원회와 같이 현장에 필요한 독자적인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은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정치체제를 따르면서 1907년 당시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을 고려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1712.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시마네현이 2005년에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이래 매년 2월 22일에 기념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독도 도발은 끊이지 않았고, 한일 간의 정치적 갈등은 심화되었다. 특히 일본의 초중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기술됨에 따라 한국의 반발이 거세지고 독도교육은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초중 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기술된 독도 관련 내용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그것은 첫째, 중학교 사회와 역사 교과서, 고등학교 한국지리와 한국사 교과서에서 다루는 독도 내용의 중복이 많고 계열성이 부족하다. 둘째, 이들 교과서의 본문 기술과 수록 지도에는 독도와 관련하여 부정확한 내용이 보인다. 초중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독도 내용이 정확 하고 충실하도록 수정 및 보완이 요구된다.
        1713.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의 독도정책은 정치 행위로서 항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제도화 된 법규 혹은 규범보다 정치적 가치에 따라 단순한 반대를 표하는 것으로 권리보전을 위한 소극적인 행위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행동이다.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정책 시책들을 ‘고유영토 주장’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의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시책들은 사료와 자료를 찾아내는 것을 넘어서 영유권 주장을 위한 공세적 논리로 ‘다케시마의 날’ 행사의 정치화,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관제화, 독도 영토교육의 확산화 등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러한 특징들은 정부 주도의 해양정책에 예속된 독도정책, 우경화된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구성원, 노골적으로 편향된 독도교육의 강화 등과 같은 딜레마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마네현의 독도 관련 시책들은 일방적 선언에 적용되는 지도원칙으로 항의한 영토의 권리를 보전하기 위해 현존하는 상황이 고착화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항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1714.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사탕수수 농장주들을 비롯한 미국 기업가들이 주도하고 미군이 협조하여 일어난 하와이왕국의 전복은 서부지역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던 미국의 서구식민화과정으로 규정될 수 있다. 1800년대에 설탕산업은 하와이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초기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 원주민, 빈곤한 유럽인, 그리고 남아메리카인들을 농장의 노동력으로 활용하였으나 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등의 이유로 농장에서 이탈하였다. 1800년대 후반에 농장주들은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중국인과 일본인을 끌어들였지만, 그들 역시 노동조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심지어 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5년에 이르러 자조적 일환으로 ‘하와이농장주협회’(HSPA)를 구성한 농장주들은 마침내 한국과 필리핀으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하여 중국인과 일본인의 부족을 채우거나 그들의 세력을 희석시키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의 호소는 재한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과 미국감리교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조원시) 등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1902년에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하와이농장주협회 임원들과 만났던 알렌은 그 첫 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에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및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던 그는 조선 국왕 고종을 설득하여 유민원을 설치하고, 윌리엄 데쉴러(William Deshler)를 모집책으로 선정하여 하와이농장주협회의 부름에 응답하였던 것이다. 존스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와이로 이주하여 노동하도록 설득하였고 그 결과 1902년 말에 출항한 첫 이민 선박의 절반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송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순종적 노동력에 대한 요구는 무엇보다도 미국감리교회의 하와이선교부를 이끌어갔던 초기 감리사들, 와드맨(John W. Wadman)과 헨리 프라이(Henry Fry)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응답되었다. 재정이 부족하였던 감리사들은 하와이농장주협회와 농장 주들에게 선교부를 위한 기부금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기부금에 대한 보답으로서, 한인 신자들로 하여금 농장에 협조하도록 격려하거나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농장을 이미 떠난 그들의 동료들이 돌아오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1905년에 와드맨을 돕기 위하여 하와이를 방문한 재한 감리교 선교사 아더 노블(W. Arthur Noble)은 한인 신자들이 하와이 농장의 지속적 번영을 담보하도록 ‘모범적 소수민족’(Model Minority) 담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결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감리교 선교부와 한인교회들은 번성하였던 반면에 한인 노동자 자신들은 선교부로부터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도움을 받지 못했고, 낮은 임금, 인종 및 국적별 업종의 차별, 잔인한 대우 등으로 인하여 빈곤과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미국이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립주의를 버리고 서부를 넘어 태평양과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소위 ‘백인의 짐’ (the White Man’s Burden)을 짊어지 기를 자처할 때에, 하와이선교부는 주한 미국 공사와 선교사들의 강하고 지속적인 도움과 더불어 하와이농장주협회의 요청에 적극 응답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서구식민주의에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715.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仁祖反正(1623)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남명학파는 戊申亂(1728) 이후 강우지역 에 대한 경계와 불신이 짙어지면서 더욱 위축되더니, 끝내 과거의 영광을 회복 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야 했다. 눌암 박지서가 한창 활 동하던 시기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남명학의 쇠퇴가 150년 이상 지 속되고 나아질 기미조차 없던 시기였다. 눌암은 가계·학문·지역적 연원으로 보아 남명학적 성향이 다분히 드러날 수밖 에 없는 여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지역의 在地士族으로서 문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현실적 대세를 비켜갈 수 없었다. 이에 진주지역에 세거한 눌암의 문중도 증조부 때부터 南人化 성향을 드러냈고, 눌암에 이르러 더욱 폭넓은 교유를 통한 남인화가 이루어졌다. 그에게서 보이는 退溪 중심의 治學 방법이나 문학작품에서 남명학 관련 언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 등이 이러한 문중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눌암이 강우지역 남명학파적 성향을 버리고 남인으로서의 특성 만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가계·학문·지역적 여건에 의해 계승된 남명학파적 성 향 위에 남인화 성향이 보태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눌암이 평생 이룩한 수많은 지적활동은 강우지역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강우지식인의 오랜 염원 인 南冥의 文廟從祀 請願을 주도하였고, 침체된 진주지역의 鄕學風 쇄신을 위해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시설 중건에 앞장섰으며, 남명학파의 시련과 함께 역사에 묻혀버린 지역 선현의 삶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들이 이를 증빙하고 있 다. 적어도 그의 생애에 드러난 활동으로 평가한다면, 눌암은 남명학파적 성향 을 지닌 江右學者였다고 하겠다.
        1716.
        201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을 사상적 토대로 삼은 사림파의 학문적 계보와 연대는 조선왕조의 건 국과 함께 역사적 행보를 시작한다. 鄭夢周, 吉再로부터 江湖 金叔滋와 그 아들 佔畢齋 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사와 정치사의 서막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후 星湖 李瀷은 退溪와 함께 단연 南冥 曺植을 영남지역의 학자로 지목하며 문명의 극치를 이룬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두 학자의 활동 지역에 따라 上 道의 퇴계와 下道의 남명은 각각 ‘仁’과 ‘義’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이 드 러난다. 퇴계가 학적 자세로서의 仁을 구현한 예악의 완성에 집중하였다면, 남명 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로 대표되는 克己復禮를 통한 ‘內聖外王’의 목표에 집중한 실천적 측면이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남명의 강한 실천성은 후학들 의 전범이 되었다. 來庵 鄭仁弘이 이룩한 학파의 흥성했던 시기는 물론이거니와 戊申亂(1728)을 거쳐 정조의 賜祭文(1796)이 내리기 이전까지의 침체기에도 학 맥을 유지하던 원동력이 되었다. 본고는 18세기 남명학파의 인물로 이해되는 丹溪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의 梧潭 權必稱의 학파적 연원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의 집안은 15세기 중반 丹城縣에 혼인 관계로 정착한 이후 權潗·權濬 형제와 권필칭의 5세조 權濤가 문과에 합격 해 ‘三權’으로 불리면서 지역적 기반을 확고하게 잡았다. 그런데 18세기 무렵부 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은 문과가 아닌 무과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그리고 권필칭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지만 그는 34세 때 櫟泉 宋明欽을 방문하였으며, 52세 때 渼湖 金元行을 찾아가 문인록에 도 올랐을 정도로 학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권필칭은 51세 때 고향인 三嘉에 梧潭精舍를 마련해 독서와 講學의 터전을 삼아 후학 양 성에 매진하였다. 특히 자신이 관직 생활을 하던 지역에서 유생들을 교육하고 백일장 등을 시행해 유학의 권면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소학󰡕, 󰡔주역󰡕, 󰡔성리 대전󰡕, 󰡔중용󰡕을 탐독하며 ‘誠’과 ‘敬’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실천 자세를 중시하 는 修身의 생활 태도를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만년 저작인 「隨思輒錄」에 집중 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남명 조식의 심적 수양과 실천적 면모의 학문 적 흔적이 18세기 단계 지역 안동 권씨 가문에 잔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1717.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산업혁명 이후 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는 현대인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다. 인권과 자연과의 공생이 주장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 이후의 사상가와 문필가로부터 환경 친화적 개념을 도입한 디자인 교육자들과 정치가 등 다양한 분야의 실천가들과 그들의 대표적인 저서와 사상을 고찰하였다. 이들의 사상과 함께 태동한 생태학의 이론과 개념 으로부터, 생태학적 디자인은 인간과 환경의 공존을 위한 대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생태학적 디자인이라는 큰 영역 속에서 에코디자인(Eco Design), 그린디자인(Green Design), 환경친화적 디자인(Eco Friendly Design), 지속가능한 디자인 (Sustainable Design)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비슷하면서도 다른 디자인 관점에 대해 고찰한다. 특히 ‘지속가능한 디자 인’이라 불리고 사용되는 디자인의 개념을 시간과 공간과 프로세스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디자인 사례를 통해 ‘지속가능성’ 이라는 불분명한 개념을 디자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환경과 인간 활동의 공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생태학적 디자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1718.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으로 스마트 디바이스 사용자들이 많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문화, 경제, 쇼핑, 정치 등의 다양한 서비스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무선 통신을 활용하여 주변 스마트 디바이스를 감지하는 21세기 새로운 교육콘텐츠가 등장하였다.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교육콘텐츠들이 제공되어 교육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는 반면, 만족스럽지 않은 콘텐츠 서비스의 질과 양 그리고 운영상 미비점들이 한계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인간은 색채를 통해 다양한 감성과 시각적 언어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특히나 아동은 이러한 색채를 통하여 심리적, 정서적, 생리적 효과를 표현하기 때문에 색채에 대한 교육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따라서 위와 같은 현안을 개선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으로 아동용 색채교육콘텐츠 개발을 제안한다. 필자는 새로운 색채교육콘텐츠에 UX 디자인방법론을 적용하여 아동용 색채교육 하드웨어와 시스템 구조를 구성하였다. 이는 색채의 활용과 이해를 돕기 위한 학습목적으로 제작되어 어려운 이론을 스토리와 영상으로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동시에 학습효과를 유발하고 흥미로운 게임과 같은 학습법을 적용하여 언제 어디서나 쉽고 편리하게 즐기며 학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본 연구에서 제시한 아동용 색채교육콘텐츠 앱은 색채를 중심으로 아이들의 거부감 없이 학습 재미와 학업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자기 주도적 맞춤형 학습에 최적화되었다. 앱을 통한 체계적인 학습과 진단은 아이들의 이해를 촉진시키고 감성을 발달시키는 신개념 교육의 흐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1719.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해방공간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하다. 이들은 큰 틀에서 우익진영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인이었다. 이 세 사람은 귀국하면서 다같이 기독교인으로서 활동했고, 기독교를 중요한 정치적인 배경으로 생각했다. 이런 우익 3영수의 대열에서 제일 처음 이탈한 사람은 김규식이었다. 원래 중도파였던 김규식은 제 1차 미소공위 이후 미국의 좌우합작 정책에 따라 중도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김규식를 우익의 지도 자라고 따르던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는 김규식의 노선을 이탈하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독립촉성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48년 김구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반대하자 기독교인들은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1948년 3월 이북인대회에서 김구는 강력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익 기독교세력은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우익 3영수가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반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들을 지지하였다. 특별히 공산주의의 학정을 체험한 월남 기독교인들의 발언권이 센 기독교에서 김규식의 좌우합작 주장이나, 김구의 통일지상주의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결국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이 되었다.
        1720.
        2019.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4-5세기 니케아적 영성신학의 은사론을 통해 나운몽의 용문 산 운동에 나타난 은사들을 평가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동안 나운 몽 연구는 한국교회사의 지평 안에서만 논의 되었는데, 필자의 새로운 방 법론을 통해 나운몽에 대한 이해를 보다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니케아적 영성신학을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된 텍스트는 주로 아타나시오스, 바실리오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이며 이 외에도 사막 영성을 증 언하는 작품들도 사용되었다. 나운몽의 용문산 운동에 대해서는 『아실 나 운몽목사전집』만을 사용하였다. 전반적으로 니케아적 영성신학의 은사론은 섬세하게 신학적 사유를 전개한 반면, 나운몽의 경우는 체계적인 은사론이 아니라 단편적인 사건 중심으로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 비교의 범주는 고린도전서 12장 8절 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서 치유와 기적의 은사, 악령을 쫓아내는 은사, 예언의 은사 등 세 가지로만 한정했다. 이 세 가지 은사는 나운몽의 용문산 성령운동에서 두드러지는 요소였기 때문에 니케아적 은사론의 틀을 통해 검증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아실의 은사론은 전체적으로 니케아적 영성신학 안에 머무르며, 특히 치유와 기적의 은사는 니케아적 은사론에 근접한다. 그런데, 축사(逐邪)의 경우 아실은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지만 니케아적 영성신학은 사 회와 역사와 정치구조의 축귀 등 거대한 지평을 갖고 있다. 예언의 경우 니케아적 은사론은 신학적으로 정교하지만, 아실의 경우 사건만 설명할 뿐 신학적 차원의 관심은 결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