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036

        1961.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布告天下文(이하, 포고문)은 1896년 2월 7일 재야 유림인 郭鍾錫이 姜龜相, 尹冑夏, 李承熙, 張完相, 李斗勳과 함께 서울에 있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의 공사관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발송한 서한이었 다. 본 논문은 당시 곽종석이 지역 유림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유교적 세계관 인 華夷論에서 夷狄으로 이해되던 구미열강에 도움을 호소한 이유가 무엇이었 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곽종석의 문집인 󰡔俛宇集󰡕에 수록된 1895~1896년 편지들을 분석 했다. 󰡔면우집󰡕에는 편지가 다량 수록되어 있어 곽종석의 사상과 행적을 파악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1895~1896년의 편지는 대개 곽종석이 1895년 12월 안동의병에 불참하게 된 배경과 1896년 2월 구미열강의 공사관 에 도움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곽종석이 포고문을 발송한 경위를 일제의 국권 침탈을 강력히 규탄함 과 동시에 아관파천 이후 고종집권세력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시하고, 유교문 화를 수호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표명한 데에서 찾고자 했다. 포고문 발송은 고종집권세력과 정치적 공감대를 확인하고 아관파천 이후 조성된 정국에 지지 를 표명하기 위해 진행한 행위라는 점에서 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곽종석의 포고문 발송에는 사상적인 목적도 개재되어 있었다. 즉 포고문은 유 림 지도자로서 1894, 1895년 두 차례의 ‘개혁’을 통해 유교문화가 급격히 쇠퇴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유교문화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소명의식 을 반영하였다. 본 논문은 곽종석이 1895~1896년 의병운동 제의를 거절하면서도 구미열강 의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송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던 정치적, 유교적 배경을 이해하고, 곽종석이 1919년의 巴里長書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상황을 이해 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리라 판단된다. 1896년의 포고문과 1919년의 파 리장서에는 20여 년의 시간적 간극과 사상적 차이가 있었지만, 유림의 지도자 로서 유교문명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 유사했기 때문이다.
        1962.
        2009.03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 결정에 있어 사회적 수용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고에서는 그 역동적 과정을 담아낼 그릇으로서 공론장을 제안한다. 즉,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에 대한 공론장은 무엇이고, 공론장의 주체인 이해관계자들은 누구이며 또 공론장에 내재된 갈등구조는 어떠한지에 대해 살펴보고, 바람직한 공론장의 조건에 대해 논의한다. 공론장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시민이 스스로의 의지를 바탕으로 정책의 결정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제와 제도를 의미한다. 현실성 있고 효과적인 공론장을 구축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용후핵연료 관리를 둘러싼, 정치, 외교안보, 경제, 사회문화, 법과 제도에 관한 면밀한 분석과 대응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1963.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145년 고려왕조가 발간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독도는 521년부터 한국영토였다. 한국은 반만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1910년 한국 국민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제국 주의 무력에 의해서 합방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비참한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 독도(리앙코 섬, 마쓰시마)를 합병하려는 일본내각의 비밀결정은 1697-99사이에 한국과 전 일본 정부 사이의 협약에 근거하여 “다케시마는 일본과 무관하다.”고 진술하고 있는 태 정관문서(1877. 3. 29)의 결정을 부정함으로써 국제법의 금반언의 원칙을 파기하는 것이다. “국가는 한 공동체가 정부의 구성, 영토의 확정, 그리고 자국의 재산과 국민을 타국의 지 배에서 배제된 영토에서 통치할 수 있는 권위를 획득했을 때 존재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1948년 8월 15일 한국사회는 독도를 포함하여 한국 땅에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독도는 포츠담 선언에 따라 SCAPIN 제 677호(1946년 1월 29일)에 의해서 일본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배제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정치․행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전술한 SCAPIN 제 677호(1946년 1월 29일)의 조항은 발효된 후 개정되거나 취소된 적이 결코 없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압도적인 다수로 “한국국민은 국민정부의 수립과 그에 따른 자유와 민주 선거를 통해서 오랫동안 추구했던 자유와 독립을 획득할 목적”임을 가결했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1948년 8월 15일 1952년 일본정부가 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기 4년 전에 일본과 샌프란시스코(1951년 9월 8일) 평화 조약에 따라 전술한 자유와 민주 선거권을 획득했다. 전술한 SCAPIN 제 677호(1946년 1월 29일)의 조항인 “일본의 정의에서 리앙코 섬(다케 시마)의 배제”는 평화 조약 제 19항(d)과 유엔헌장 제 107항에 포함된다는 것은 자기설명 이다. 그러므로 독도에 관한 일본의 주장은 전술한 조항을 위배하는 것이며 2차 세계대전 후 평화조약에 명시된 국제 평화와 안전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일본은 독도에 관한 주장을 그만둘 때이며 그것은 예의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독도주장 포기는 1910년 일본의 강점에 의해서 악화된 한국국민의 상처에 대한 “화해의 상징”이며 정의를 위한 것이다. 이는 또한 1905년 일본이 한국에 속한 독도를 탈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외무성은 한국 섬, 독도를 영유하기 위하여 소위 “다 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개의 포인트”를 발간하였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여기에 첨부한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개의 포인트”처럼 불법 이며 비논리적인 점을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1964.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세계화와 더불어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학교교육의 역할과 성격이 어떻게 재정립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 제시를 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세계화는 일종의 정치문화체제인 세계사회의 형성을 촉진시킴으로써 세계사회의 주요 구성인자이자 합리적 행위주체인 국민국가와 각종 조직 및 개인에게 새로운 존재론적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종래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던 학교 교육제도는 이제 그 경계가 지구차원으로 넓혀진 세계사회의 합리적 운영과 지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춘 세계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제도로 변모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21세기 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새로운 교육모델로서 다문화 교육을 제안하고 다문화 교육의 목적, 대상, 내용 및 방법과 관련된 근본적인 원칙과 방향 제시를 시도하였다.
        1965.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은 아시아・유럽・북부아프리카・아메리카 등 세계의 원주민 사이에 이루어졌던 혼속을 말한다. 인도나 일본의 소수민족 사이에는 최근까지도 위와 같은 혼속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대완에서는 서조모와 혼인을 하였으며 흉노에서도 서모・형수・계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었다. 서역의 당항족은 백모・서모・형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고 돌궐에서는 후모・백숙모・형수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오・여진・몽골・부여 등에 서는 형수와 혼인하는 혼속이 있었다. 󰡔양서󰡕・󰡔남사󰡕・󰡔태평어람󰡕 등의 사서에 서는 고구려에서도 형수와 혼인하였다고 전한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이 최초로 나타난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고국천 왕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우씨왕후는 시동생 연우와 통정하고 그를 왕위 에 앉히니 이가 산상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천왕 부분에 ‘立妃于 氏爲王后’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비가 되기 전에 이 미 ‘妃’였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연나부의 명림씨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 후 우씨는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 등 4대에 걸쳐 왕후로 또는 왕태후 로 권세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명림씨 가문의 대모 노릇까지 한다. 산상왕은 우씨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라 우씨를 왕후로 삼은 각시바치의 전형이다. 그러 나, 정치적 재능을 지녔던 산상왕은 연나부와 정략적 거리를 유지하며 진대법 을 실시하고 국상 을파소를 기용하는 등으로 연나부를 제어하였다. 산상왕과 우씨왕후 사이에 이루어진 형수와의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당사자 인 산상왕과 우씨왕후는 물론 산상왕의 형제들인 발기・계수・고국천왕은 각기 다른 의식변화를 보여준다. 발기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을 역수와 천륜을 어긴 비례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실패하고 만다. 산상왕의 명에 따 라 발기를 정벌하러 나섰던 계수도 산상왕이 국양하지 않은 것을 불의라고 하 면서도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종국을 멸망시키려 한 발기의 행위 역시 죽 어서 선인을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 지낸 뒤 산상왕은 우씨왕후와의 사이에 뒤를 이을 아 들이 없으므로 소후를 얻겠다는 뜻을 비친다. 산상왕이 주통촌녀와 상관한 것 을 안 우씨왕후는 질투하여 병사를 보내 주통촌녀를 죽이려고 한다. 이 과정에 서 주통촌녀의 유체가 자신의 후사임을 확인한 산상왕은 이를 우씨왕후에게 말 하여 주통촌녀에 대한 우씨왕후의 횡포를 제어하고 주통촌녀를 소후로 삼은 다 음 아들 교체를 태자로 봉하니 이가 동천왕이다. 산상왕의 의식은 다분히 정치 적이고 정략적이다. 왕의 아이를 임신한 주통촌녀를 병사를 보내 죽이려 한 투 기 죄를 짓고도 우씨왕후가 무사했던 것으로 보아 왕후와 연나부의 권력이 산 상왕을 능가했던 것 같다. 우씨왕후는 죽을 때 스스로의 행위를 첩실행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신하들에 게 자신을 구렁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이 미 죽은 고국천왕은 무당의 입을 빌어 우씨왕후의 행위를 낯이 뜨거워 백성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문제를 놓고 권근・서거정・안정복・최 보 등이 천륜을 어긴 수혼이라고 비판하였다.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에 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첩이나, 백모나 숙모, 형수나 계수와 혼인한 자를 극 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유습 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1966.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의 명분은 대개 廢母殺弟 등의 패륜 및 대북의 전 횡에 대한 다른 붕당들의 반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변이 성공한 다음날 반포된 반정교서에는 반정의 명분이 광해군의 背明親後金외교(43%), 폐모살제 (31%), 대북의 전횡(14%), 토목공사(10%) 등의 비중으로 발표되었다. 그렇다 면 반정 직후에 널리 강조되었던 외교문제가 이후에 어떻게, 왜 명분에서 사라 졌을까? 병자호란 때 인조는 직접 청 태종 앞에 나아가 叩頭禮를 행하며 항복하 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사실상 후금의 무력에 굴복하여 화친을 맺었다. ‘반정’ 을 한 지 4년 만에 그 핵심 명분 하나를 상실한 것이다. 이에 다른 명분인 폐모 살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記述들이 후대에 이르도록 사 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가 하면, 폐모 논의에 가담하였던 북인계열 저자들은 폐모살제보다 권력의 전횡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폐모 논의에 참 여한 약점을 덮기 위해 폐모문제를 최대한 덮고, 그 다음 명분인 권력의 전횡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 인조의 거사가 反正이라는 점에는 다들 동의하였으나, 어떤 亂에서 어떤 正으로 돌이켰는지에 대한 세부 문제에 있어서는 강조점이 시대에 따라, 또 저자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달랐다. 결국, 반정의 본래 명분에 대한 후대의 손질은 ‘반정’의 명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후기사회 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1967.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논자가 앞으로 10여 년간 중점적으로 탐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지 리산 유산기 연구의 試論이다. 논자가 진행해야 할 연구는 지리산권역을 중심 으로 한 조선조 지식인의 문학이다. 특히 조선조 지식인의 지리산 관련 遊山文 學과 영남・호남 지식인의 樓亭文學 작품을 주요 논의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山 水美學과 그 속에 융화된 자연관을 집중 탐구하고, 이의 전반적 이해를 통해 조 선조 지식인의 자연에 대한 이해,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모색하던 태도 를 밝혀내게 될 것이다. 본고는 그 첫 시도로써, 조선조 지식인이 지리산을 유 람하고 남긴 유산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그 동안 발굴된 자료를 개괄하고, 작품 속에 내재된 그들의 산수인식을 고찰함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초기 李陸의 「智異山記」에서 시작된 지리산 유산기는 20세기까지 약 90 여 편이 발굴되었다. 이를 시대별로 분류하면 15세기 6편, 16세기 5편, 17세기 전반과 후반에 각 6편과 7편, 18세기 20편, 19세기 27편, 20세기는 21편인데, 후대로 갈수록 작품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 수의 차이는 조선시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그에 따른 지식인들의 浮沈에 그 원인 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유산기에 보이는 산수인식은 4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먼저 유산기 담당층이 조선조 유학자인 만큼 다양한 儒家的 志趣를 先賢尊崇으로 압축하여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지리산 산수자연 가운데 佛家的・巫俗的 유적지를 통해 異端을 배척하는 지식인의 의식을 살펴보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仙境을 찾는 그들의 遊仙 의식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지리산의 절경 속에서 道家的 志趣를 갈망하면서도 유학자로서의 자세 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람을 통해 뛰어난 文學的 志趣를 표출해 내었는 데, 이는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으로 일관되었음을 확인하였다.
        1968.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의 역사적 성격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名山文化로서 智異山의 正體性을 조선 초・중기의 문헌사료를 통해서 구명한 것이다. 먼저 명산은 인간 이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결정한 의미에 의해서 규정・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명산은 고정되는 경우보다 변화를 겪는 존재로서 사회적 생산물의 성격을 갖고 있어 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명산문화는 명산이 의미하는 바의 정체성까지 수렴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 지리산은 太祖 李成桂에게 조선 건국과 관련해서 중요한 신성의 장 소이자 그들의 정치적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含意를 지닌 곳이었다. 한편 지리 산의 神聖은 卿·大夫·士・庶人이 숭배 대상으로 하였던 山神으로서 信仰性을 갖 고 있었다. 반면에 왕을 비롯한 위정자에게 지리산의 신성은 명산대천으로서 신성에 정치적 성격을 포함한 이중적 함의를 지녔다. 세종 같은 경우 전통문화 로서 명산대천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惑信하는 신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 하여 금지하였다. 이처럼 鮮初 지리산의 정체성은 신성에서 신앙성・정치성 등 다양한 함의를 지녔다. 조선 중기 지리산은 지리산권역의 사림들과 수령들에게 仙遊・修養의 공간, 그리고 勳戚政治 개혁을 위한 모색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럴 때 馬 崇祖가 지리산 天皇을 숭배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지리산이 신앙으로서 神聖性을 크게 잃어갔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리산의 정 체성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함의가 커져갔다. 한편 賊徒 張永己 사 건에서 지리산이 인간의 삶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는 사회성을 읽을 수 있다. 이 보다 더 사회성과 정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자칭 의병대장 宋儒眞 사건이다. 16세기 말 지리산은 王朝를 부정하였던 송유진을 따르는 한 무리의 활동 공간 이었다. 이는 그만큼 지리산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1969.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학파와 관련된 각 가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번에 남명 조식의 문인인 文益成 및 그의 후손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천에 거주하던 문익성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문 려도 마찬가지로 문과를 거쳐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할도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형제간의 우 애도 돈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들의 가 문은 경상 우도에서 손색없는 사대부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주로 이거한 문할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이런 사족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면 서 진주에서 명망가문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들은 선조의 가학을 잇는 입장 에서 남명학파의 맥을 이어갔고, 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 입장 을 견지하였다. 다른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中華문화를 굳건하게 이어 간다는 입장에서 존주의식을 꾸준히 계승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大明花의 보호・전승을 통해 이를 실천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970.
        2008.07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근 국내에서는 기상이변으로 인한 홍수피해가 증가하고 있으나, 환경, 경제 및 정치적 문제로 인해 댐과 같은 대규모 수공구조물의 설치가 어려우며, 이에 대안으로 천변저류지의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천변저류지는 비교적 규모가 작아 대상유역에 설치가능한 후보지가 다수 존재하며, 이들 후보지를 적절히 조합할 경우 효율적인 홍수 조절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천변저류지 후보지가 다수 존재할 경우 최대의 효과를 제공하는 조합을 결정하기는 어려우며, 특히
        1971.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현실주의 동화의 교육적 함의(含意)를 탐색하기 위하여 리얼리즘의 세계관에 기반을 둔 현실주의 동화의 리얼리즘 구현 양상을 밝히고, 예비 문학 교사들의 현실주의적 인식을 고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현실주의 동화 교육의 현황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실제로 아동문학 교육 중에서도 가장 논의가 부족한 부분이 예비 초등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대학의 아동문학 교육임을 인식하고, 현재적 난점을 넘어 아동문학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살릴 수 있는 문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아동 서사문학 중에서도 비판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현실주의 동화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핍진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아동문학의 독자인 초등학교 아동들과 교육대학의 예비 문학 교사들에게 현실을 비판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전형과 형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현실주의 동화의 미학적 세계관은 기존의 통념을 넘어 새롭게 재조명 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보다 온전한 아동 서사문학의 지형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실제로 아동 서사문학과 교육은 판타지 동화와 전래동화 그리고 현실주의 동화가 서로 조밀하게 엮어 짜인 구조를 지향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주의 동화의 경우 현행 초등 문학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치성의 우위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압력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현실주의 동화 교육의 기초적 토양 마련을 위해 보다 본원적인 문학 교육적 함의를 탐색하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자본의 지배와 목표 지향적 단순 논리로 인해 점차 획일화되고 있는 아동들의 현재적 삶 속에서 현실주의 동화가 지니는 가치들이 기존의 상투적이고 고형화 된 인식을 전복시키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의 정신을 길러주는 일에 일조할 수 있음에 천착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추동하는 현실 인식의 힘을 길러주기 위한 현실주의 동화 교육은 아동문학 교육의 한 축으로 기능해야 하며, 이에 대한 정치하고 심도 있는 모색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1972.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양하씨 滄洲 河憕家門은 진주의 전형적인 토반 사족가문으로서 17세기 초 반까지는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그 후 양송을 통해 畿湖學을 수용하면 서부터는 강우 서인[노론]세력으로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으며, 그런 흐름은 한 말까지 지속되었다. 북인 남명학파에서 서인 기호학파로의 전향은 인조반정 이 후 江右 지역을 덮친 정치사회적 격랑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 이후 滄洲家의 사회적 활동은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판도 위에서 설정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제약도 작지 않았지만 이들은 현조 滄洲 河憕(1563-1624)에 대한 각종 추양사업을 추진하며 문호의 기반을 확충함은 물론 지역 노론세력 및 중앙의 노론계 관료들과 연대하여 강 우지역 노론계 공론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부심하였다. 하증의 6세손 河鎭兌에 대한 孝子旌閭運動이 강우 지역 노론계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추진되고, 또 갖 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에 걸쳐 공론이 유지되어 마침내 정려를 하사받 을 수 있었던 것도 강우지역 노론사회에서 지니는 창주가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사환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었던 창주가가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하 게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풍부한 경제력에 있었다. 18세기 초반에 기준할 때, 창주가는 1,000斗落에 육박하는 전답과 100구에 달하는 노비를 소 유하고 있었음이 분재기를 통해 확인되고 있으며, 시기가 지날수록 경제 규모 는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은 단순히 문호의 유지 차원을 넘어 창주가의 인사들이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사론을 주도해나가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시론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강우지역 사족가문의 존재양태를 고문서를 통해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혀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것이며, 남 명학파 연구로 대표되는 사상사적 분석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 일정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본다.
        1973.
        200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에서는 “교실친화적 교원(classroom friendly teacher)”이란 개념을 교원양성과정을 통해서 배출해낼 이상적 교사의 모습으로 상정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였다. 구체적으로 이상적 교사로서 활동하는 교원의 구체적인 속성을 탐색하고, 교실친화적 교원양성과정에 있어서 주안점을 두어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교실친화적 교원은 효과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기술적 차원의 지식과 기술 (technical domain), 수업활동이 학습자들에게 교육적 경험으로 조직,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윤리적 요소 (ethical domain), 그리고 교실외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영향력이 교실수업에 미칠 수 있는 효과를 예측, 조절할 수 있는 정치적 요소 (political domain)의 세 차원의 지식, 기술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요소에 덧붙여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교실상황에서 최선의 문제해결에 필요한 상황적 지식을 구성할 수 있는 학습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교실친화적 교원양성과정은 교과내용 및 교수방법에 대한 전문적 소양을 배양하는 동시에 교육활동이 벌어지는 상황 이해능력, 그리고 윤리적 판단가능성을 증진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갖춘 교사는 수동적인 지식, 기술의 소비자가 아닌, 수업상황에 적절한 지식의 생산자로서 역할에 필요한 창조적 학습능력을 신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1974.
        2008.02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RIASEC 모형에서 예술형(A) 직업흥미를 보이는 공·사립 유치원에 재직 중인 173명의 유치원 교사를 대상으로 직업흥미의 GOT, BIS, PSS 척도별 분포 및 상호 관련성을 알아보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 결과, 예술형(A) 유치원 교사의 직업흥미는 GOT 척도에서 예술형(A)이 가장 높고, 사무형(C)이 가장 낮게 나타났다. BIS 척도는 예술형(A) 코드의 음악/드라마, 미술이 가장 높고, 진취형(E)코드의 판매가 가장 낮게 나타났다. PSS 척도는 학습유형에서 학문적인 학습형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GOT 척도내 상관관계는 인접코드인 예술형(A)과 탐구형(I), 예술형(A)과 사회형(S)간에상관이 있으며, PSS 척도내 상관관계는 학습유형과 리더쉽유형간에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GOT 척도와 BIS 척도간 상관관계는 현장형(R)의 자연, 탐구형(I)의 과학, 예술형(A)의 음악/드라마, 미술, 응용미술, 글쓰기, 사회형(S)의 사회봉사, 진취형(E)의 대중연설, 법/정치와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GOT 척도와 PSS 척도간 상관관계는 예술형(A)과 학습유형간에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PSS 척도와 BIS 척도간 상관관계는 학습유형이 예술형(A)의 글쓰기, 진취형(E)의 대중연설, 법/정치와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5.
        2007.12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정부는 사용후핵연료의 중간저장시설의 입지로 아우모리현의 무쯔시를 선정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유치활동이 5 년만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국은 사용후핵연료를 원자력 발전소 내에 저장하고 있는데 2016년이면 저장한계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일본의 사례연구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경주에 중,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시설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경험이 있어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시설을 유치하는 학습경험을 축적한 바 있는데 두 나라의 큰 차이점은 한국은 경쟁적인 주민투표를 통하면서 막대한 지역지원금을 지원한다는 점이고 일본은 주민투표를 시행하지 않고 지방자치 정치의 리더쉽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엄청난 지역지원금이 지원되지 않은 점도 일본의 특징이다. 본 연구가 한국의 사용후핵 연료 저장시설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76.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강 김우옹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서 조선중기 남명학파의 저명한 학자이 다. 김우옹의 학문은 스승인 조식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근원 을 찾아보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자의 영향권 아래 있다. 주자와 김우옹의 정치론과 학문론을 비교해 본 결과, 이 두 학자의 영향 관계 는 매우 직접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정치론을 살펴보면, 군주론에서는 군 주의 정치적 역량보다 군주의 마음을 가장 중시하였고, 신권론에서는 나라를 경영하는 주체로서 신하의 권한을 옹호하고 있으며, 붕당론에서는 군자와 소인 을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요구하고, 외세론에서는 시종일관 외세배격의 논리를 지녔다. 그리고 학문론에서는 주자학의 공통된 이념인 ‘性卽理’를 공유하였고, 敬과 실천을 매우 중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인격적 면에서도 매우 유사한 면모 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명학을 두고 주자학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김우옹의 삶 과 사상을 살펴본 결과 김우옹을 위시한 남명학파는 철저히 주자학의 기반위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77.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鄭仁弘의 晦退辨斥은 광해군 초에 실현된 五賢從祀에 대응한 것이었다. 오현 종사는 선조초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등 四賢에 대한 종사 요청을 그 연원으로 하고 있었다. 이 중 이언적은 乙巳士禍 때의 행적으로 인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李滉의 평가에 힘입어 종사 논의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이황을 포함한 오현종사는 東方의 道統을 설정하 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즉위 초 사현종사를 수용하지 않는 대신 이들의 행적을 수집 정리한 󰡔國朝儒先N󰡕을 편찬함으로써 이들이 담지한 도통의 구도를 일정하게 인정하 였다. 그러나 재위 후반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 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오현종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 론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광해군은 즉위 초 公論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선택에 따라 오현종사를 실행하였다. 정인홍은 이에 대응하여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 다. 그의 회퇴변척은 程朱學이 설정하고 있던 道統論을 조선에 적용시키는 논 점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변척 과정에서 朱子와 관련된 사례를 적 극적으로 원용하였다. 주자가 孟子와 顔子를 변론한 것과 陳建이 주자를 변론 한 것은 결국 주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도통의 학문적 실천으로 평가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를 동방 도통에 적용하면서 학술적 성과보다 도학의 실천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오현종사 논의에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편 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언적의 경우 정치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황의 인정에 힘입어 종사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학술과 행적 모두에서 이황에게 集大成의 의 의를 부여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인홍은 이러한 구도에 부당함을 느끼고 도학 의 실천적 측면에서 도통의 일원적 설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경학적 측면에서 보면 󰡔中庸󰡕의 요체를 時中으로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顔子의 은거를 時中의 道에 부합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 연장에서 曹植의 위상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식을 조광조와 정여창에 대한 평가와 연결함으로써 出處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통해 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 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이언적과 이황은 時中의 道에 어긋 난 사례이며, 따라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1978.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晩醒 朴致馥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에 영남 강우의 유학을 다시 일으킨 대표적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 재 류치명을 사사하여 전통적인 퇴계학파에 속하면서도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 상을 수용하였으며, 유학을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성재 허전의 학문에도 심취했다. 만성은 당시 국가가 당면한 총체적 위기는 유교적 교훈을 따르지 않았던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유교적 정치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만이 국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처방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華夷論’을 수용하여 오랑캐인 서구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조선 을 보호해야 하며, 조선은 ‘中華’로 상징되는 유교적 가치와 질서의 옹호자여야 했다. ‘斥邪論’은 당시 집권층과 학파적 바탕을 같이하는 기호지역 유학자들의 지론이었는데, 만성을 통하여 영남의 유학자 가운데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공감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성은 비록 조선후기 일반의 유학자들이 갖 는 세계인식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눈을 통하여 당시 조 선지성들의 사유세계와 그들이 안고 있던 위기의 본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1979.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명심보감󰡕의 사상가운데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이상적인 道德修養과 治國) 을 목표로 하는 儒敎思想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老莊思想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수기치인의 능력을 가지는 자에게는 착한 성품을 길러 天下에 좋은 바람직한 정치를 행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 는 각자 자신의 정도에 맞는 선행을 행하여 강한 인내로 자신의 작은 행복을 찾 고 구해야 한다는 「知足安分」을 논하고 있다. 후자는 人民이 정치・사회제도에 대해 그다지 불만 없이 선행을 행하여 자신의 분에 만족하기 위하여 安貧樂道 를 가져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명심보감󰡕의 권선의 최종목적은 모든 인간 이 「天」의 섭리를 기본으로 마음에 性善을 배양하고 선행을 통해 서로 용서하 고 존중하는 사회를 이룩함에 있다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명심보감󰡕의 전체상을 파악하려고 한 연구보다 는 천의 관념을 근거로 한 특정 사상만이 주목되어져 왔다. 그 결과 󰡔명심보감󰡕 이 단순한 서민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선서로서 규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명심보감󰡕이 󰡔태상감응편󰡕·󰡔공과격󰡕 등과 같이 단순한 俚俗 대 상만을 위한 권선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명심보감󰡕의 전편(원본 󰡔명 심보감󰡕본문의 제1 ‘계선편’에서 제20 ‘부행편’까지의 총 20편의 주요 내용)을 분석·정리 한 후, 󰡔명심보감󰡕의 주요 내용의 사상적 특징(天의 觀念.知足安分.五 倫의 道德)을 명확하게 하려고 한다.
        1980.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역사적 事實에 기원을 두고 있는 王昭君 故事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 들에 의해 수없이 창작 소재가 되어 왔다. 元代 馬致遠의 「漢宮秋」는 장르를 불 문하고 王昭君을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經典的인 가치를 가진다. 따라 서 이후 敍事文學 특히 戱曲作品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漢宮秋」 이후 다양한 재창조가 이루어졌으나, 王昭君 素材는 시대의 변모에 따라 작가의 시대정신에 따라 항상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 발전되어 왔다는 점 이 특징이다. 이 중, 20세기에 와서 郭沫若과 曹禺에 의해 각각 창작된 同名 史 劇 「王昭君」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대표적인 예다. 「漢宮秋」는 元代의 첨예한 민족 모순을 바탕으로 망국의 한과 민족의 절개 등 이 표현된 작품이었다면, 郭沫若의 「王昭君」은 중국의 신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20년대를 배경으로 여성해방과 여권의식의 시대성이 반영된 작품 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1970년대 曹禺의 「王昭君」은 그 당시의 정치현실을 반영하여 ‘민족단결’을 강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조우의 작품은 당시 정치 지도자 周恩來의 ‘지시’에 의해 수동적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다 른 작품과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조우의 작품은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창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曹禺는 작품에서 ‘민족 단결’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기존 王昭君 형상 및 故事를 몇 가지 측면에서 變容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 다. 첫째, 王昭君의 出塞 동기를 자신의 정치 이상에 따라 自願하는 것으로 變 容하였다. 둘째, 元帝와 單于를 明君化하여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시켰다. 셋째, 出塞 후 王昭君의 신분과 생활내용에 변화를 주고, 胡地에서의 생활 내용을 작 품의 절반 이상으로 안배하였다. 넷째, 和親 이후 漢과 匈奴간의 화목함을 구체 화하였다. 작품에 반영된 曹禺의 시대정신은 일면 타인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있기는 하 지만, 어쨌든 기존 작품에서 대부분 눈물 흘리며 가련한 모습을 보였던 王昭君 을 웃음 가득한 여성으로, 떠밀려 出塞하는 비극적 인물이 아닌 자신의 이상을 따라 용감하게 나아가는 여성 영웅으로 변화시켜, 20세기 다민족 국가 중국이 걸어야할 ‘민족단결’의 시대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