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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眞庵 李炳憲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俛宇 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今文經學을 공부하고 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西歐文物이 밀려들어오고 日本의 침략 마수를 뻗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儒敎가 급속도로 망해가고 우리 傳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며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교를 復原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 하여 孔敎라 이름하고, 孔子를 敎祖로 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교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今文經學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교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유교는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 있는 宋學이 아니고 孔子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인 孔敎였던 것이다. 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孔敎運動은, 培山書堂에 文廟를 지어 孔子를 享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 실제로는 크게 확산되지 못 했다. 시대변화에 무관심한 保守儒林들의 악랄한 반발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 평생 孔敎運動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의 孔敎運動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지만, 그는 韓國儒敎史上 가장 독특한 유학자요 사상가요 종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유학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韓國思想史에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康有爲의 大同思想을 바탕으로 華夷觀을 극복하고 四海同胞主義를 제창하였고, 變法自疆에 의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自矜心을 고취하였다. 그는 孔敎運動을 통해 우리 민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韓國學述史上 본격적인 今文經學者이다. 또 今文學에 바탕하여 儒敎經典을 재해석하여 『易經今文考』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韓國經學史上 독특한 업적이다. 朱子學 일변도의 한국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 아니라 해도,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조류에 孔敎를 통한 儒敎의 復原과 民族의 自尊의 추구가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眞庵은 많은 儒學者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학자고, 금문학을 도입한 특이한 학자고, 서양의 학문도 선구적으로 상당히 이해하였으며 당시 중국 사정이나 학계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학자였다. 일본과도 무조건적인 투쟁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62.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紫雲 李宜翰(1692~1766)의 삶과 학문경향에 대해 조명한 것이다. 18세기 밀양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의한은 평생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향촌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處士型 학자이다.그는 碧珍將軍 李忩言(858~938)으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문학, 그리고 절조와 의리를 중시하는 家學的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嶺南學統의 큰 주류인 葛庵-大山의 학통과 寒岡-眉叟 학통을 계승한 近畿南人의 학통을 兼攝하여 자기 나름의 학문세계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젊은 날에 관심을 가졌던 文章學에서 50세를 전후하여 爲己之學으로 학문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론 性理學에 치중하기보다 일상적인 삶속에서 자신이 배운 학문을 실천하는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집에는 마음의 수양과 관련한 글이 없지 않지만, ‘當世의 文衡’으로 평가를 받았던 만큼 公的이고 실용적인 문장을 다수 창작하였다. 이는 이의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밀양 지역의 鄕風 振作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로서의 소임과 책무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었다.
        63.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64.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丁酉再亂 때 黃石山城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던 분이다. 당시 그 황석산성에서는 대소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 大笑軒과 存齋 郭䞭(1551-1597)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縣監이란 벼슬아치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기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들이 황석산성에서 殉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이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학문과 행실을 겸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소헌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학문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는 합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대소헌은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데다, 鄭斗·盧禛·曺植 등 당대 경상우도에서 가장 이름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사사하였고, 이러한 학문 풍토에서 함께 강학했던 좋은 벗들을 많이 만나, 여기서 학문이 무르익을 수 있었다. 둘째, 「學校策」이나 「倡義文」 등을 통해서, 대소헌의 학문이 社會的 實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曺植의 학문과 깊은 영향관계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셋째, 대소헌은 대범하고 호방한 삶의 자세를 지녔는데, 학문에 의해 ‘大節이 不踰閑’할 수 있었기에 후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다. 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삶의 자세와 학문의 역량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5.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弘堂 李秉灝(1892∼1964)은 宜寧 中橋里에서 태어났으며 저술로 『弘堂文集』을 남겼다. 홍당은 성품이 方正하고 流俗에 휩쓸리지 않는 耿介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학문이 귀중하다는 것을 안 것은 俛宇 郭鍾錫 선생과 艾山 鄭載奎을 만나고 나서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深齋先生(1873∼1933)이 은둔하여 정산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즈음, 23세가 된 弘堂은 1913[癸丑]년 심재선생을 알현하고 다음 해인 1914년 鼎山書堂에서 수학한다. 이곳에서 鄕約으로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講和會議가 1919년∼1920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때, 유림 측에서는 1919년 3·1운동 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내려고 하였던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관련된 俛宇 같은 분은 심재와 긴밀한 관계였는데, 옥고를 치르고 이어 운명하게 된다. 이 일은 홍당선생이 이런 애국계몽기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30세가 넘었을 때 홍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며 집안은 매우 화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文山亭과 中和堂에 서재가 있었고 학도를 모아 놓고 강학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文山亭은 삼성 이병철회장의 조부 文山 李洪錫翁이 건립한 것이다. 홍당은 중년이 된 이후에 馬港으로 왔다. 馬港에 우거하고 일을 때 주변에 있는 선비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학문교류를 하며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仲兄이 운명하였을 때는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홍당보다 16년 전에 부인이 먼저 운명하게 되었을 때 다시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문장가로 알려진 山康 卞榮晩(1889~1954)과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서책이 불타 俛宇 같은 분들의 글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홍당은 향년 73세로 馬港에 운명한다. 이때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인 유생 수백 명이 조문하고 아쉬워하였다. 『弘堂文集』은 선생이 스스로 교정을 보고, 필사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讀書를 잊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同好人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그의 문집을 보면 만년에 학문이 더욱 정교 해졌고, 論辨도 휼룡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홍당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등 전통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심재와 홍당은 宋學을 중심에 두고 학문을 한 분이다. 홍당이 고찰한 학문 세계 중에 유달리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理氣論을 계승 발전시킨 내용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학문적 연원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불교에 맞선 유학이 위기를 맞은 시대로 파악하였듯이 홍당은 국난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살던 시대를 바라보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先祖와 연관지어 홍당의 인생행로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11대 조상 芝峯은 명리를 떠난 선비였다. 芝峯은 임진왜란 때 火旺城 전투에서 곽재우와 같이 참전하였다. 홍당이 시대를 아파할 때 남명과 곽재우처럼 다시 深齋와 俛宇을 만났고 이것은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홍당을 통하여 영남 의령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유학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6.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주리론과 위정척사사상을 고수하였던 의령의 입암 남정우의 교유관계와 학문세계를 분석한 것이다. 입암은 영남의 盧沙 학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서 寒洲 학파의 인물과 교유가 깊었기 때문에, 한말 유학계를 대표하는 두 학파의 상호교류나 학설의 발전을 살피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입암은 노사학맥에서는 노백헌 정재규, 農山 鄭冕圭, 한주 학맥에서는 俛宇 郭鍾錫, 弘窩 李斗勳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에 그의 성리설은 노사학설과 한주학설이 종합되어 나타난다. 그는 노백헌과 농산의 학설을 한주의 학설과 동일한 心卽理와 理體理用으로 이해하였다. 한주의 심즉리설은 본래 노사의 리주재와 이일분수의 관점을 보다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노백헌이 한주의 설을 수용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입암은 허령도 아예 리로 이해하여 노백헌의 심설에서 논란이 되었던 리의 작용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입암의 심성론은 곧바로 기의 작용을 중시하였던 夷川 南昌熙 등에 의해 심은 기로 보아야 한다는 반박을 받기도 하였으나, 노백헌의 뒤를 이었던 농산이나 송산 등의 지지를 받아 심즉리설이 노백헌의 정통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또한 입암은 심을 리의 차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敬을 통해 인심을 억제하고 도심을 온전히 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매사에 선악을 구분하여 절대선을 지향하고자 하였으며,예설에서도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의리에 부당하다고 하여 명분에 입각한 예설을 따랐다. 이러한 입암의 학문은 주자와 노사, 노백헌의 학풍을 계승하여 이기, 심성에서의 주리설과 경을 통한 수양을 중시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衛正斥邪를 고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67.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覺齋 權參鉉은, 평생을 宜寧에서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선조인 霜嵒의 志節을 물려받고, 어린 나이에 淵齋 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栗谷, 尤庵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였다. 그는 격변하는 시대조류 속에서 전통 儒學者의 자세를 견지하며 道學의 연구와 보전에 힘썼고, 제자 교육에 誠力을 다했다. 그리고 평생 많은 漢詩文을 저술하여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여 남겼다. 신학문의 보급과 확대 속에서 유학의 보전과 전승에 힘을 다 쏟았지만, 이미 유학은 시대의 主潮가 아니라 국가나 대중으로부터 관심 밖으로 말려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시대와 인심은 그의 뜻과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좌절하기 않고 최후의 일각까지도 자신의 召命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바른 길을 추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수준 높은 저술과 많은 제자들을 길러 전통유학자로서 마지막 세대를 의미 있게 보냈다. 새로운 문명을 거부한 고루한 儒學者로 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68.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一蠹 鄭汝昌(1450-1504)의 삶과 학문적 특징이 무엇이며 그의 생활 및 강학 공간인 지리산권, 그 가운데서도 하동의 악양정과 함양의 남계서원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을 따진 것이다. 정여창에게 있어 하동과 함양은 대표적인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하동은 악양정을, 함양은 남계서원을 중심으로 살폈다. 악양정은 그가 은거하며 심성수양과 강학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곳이라는 측면에서, 남계서원은 정여창 사후 이곳을 중심으로 추모사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정여창은 김종직 문하에서 『소학』을 중심으로 한 실천유학을 배워 김굉필과 함께 도학의 선구가 되었다. 하동의 악양정은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는데 李澄이 그린 「花開縣舊莊圖」나 한말 정재규의 「岳陽亭會遊記」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북인, 남인, 노론의 장악이라는 정치적 변화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 중심에는 정여창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수많은 시문이 창작되기도 했다.
        70.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溪南 崔琡民(1837∼1905)의 삶과 학문경향에 대해 조명한 것이 다. 계남이 활동했던 19세기는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위협 받고 있었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시대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19세기 사상계는 영·호남 할 것 없이 ‘主理’의 학문체계를 통해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孔 孟程朱로 내려오는 정통 성리학을 유일한 正學으로 보고 陽明學을 비롯한 西學 등 모든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외세 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계남 최숙민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절조의 家學的 전통을 이어받아 한평생 학자적 삶을 추구하였다. 젊은 시절 형인 橘下 崔植民(1831~1891)의 보살핌에 의한 獨學, 그리고 중년에 蘆沙 奇正鎭(1798∼1879)의 학문적 기반 을 토대로 하여 만년에 華西學脈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자신의 학문세계를 열어나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세기 시대현실에서 노사의 ‘주리’의 학문종지 를 터득하여 후학들에게 열어주는 것을 자신의 일대 사업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계남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힘입어 黨議에 사로잡힌 당시 사상계 에서 학문적 울타리를 트고, 오직 진리를 찾으려는 求道의 일념과 개방적 학문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래서 지역과 당색을 초월하여 많은 학자들과 학문적 담 론을 통해 이론성리학을 지양하고 心學을 위주로 하는 실천성리학을 추구하였 다. 이는 평소 그가 주장한 현실의 삶 속에서 人事인 下學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에 기인한 결과이다. 하학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은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영향에 힘입는 바 이지만, 아울러 이 지역의 학풍을 주도했던 南冥 曺植(1501∼1572)이 강조했 던 학문관점이기도 하였다. 남명의 학문정신이 19세기에 되살아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는 下學重視의 학문경향은 바로 계남 학문경향의 주요한 관점이었다.
        71.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중국의 17세기 말엽의 혁신적 사상가였던 顔元의 개혁사상을 학문 론과 교육론을 위주로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안원의 사상에 대한 그 러한 논의는 이후에 전개할 남명 사상과의 본격적인 비교 논의를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안원은 초기에 朱子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이윽고 생명을 잃을 뻔한 실존 적 체험을 겪고 난 뒤에 품은 의문을 계기로 사상적 전환을 행하게 된다. 이후 그는 주자학 체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행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이 현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실제적인 공헌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그들의 사유가 주자학적 인성론에 얽매여 있음을 깨닫고서 이를 비판하여 새로운 인간 개념을 공식화하 기에 노력하였다. 그러한 그의 인성론에 대한 논의가 지니는 실천 지향적 특성 은 이후 그의 사상이 후대에 나타나는 實學 사상의 한 선구적 존재가 되게끔 하 였다. 안원은 우주를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으로 보고 인간도 본질적으로 선악을 벗 어난 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인간성을 자아실현의 진정한 도구로서 낙관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보았던 그의 관점은 이윽고 학문과 수양의 과정에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러한 실천적 주체로서의 자아는 학문과 수양의 과정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길 은 공자의 원시유학에서 제시하는 三事와 三物, 특히 六藝의 학문을 習行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강조하는 習行의 방법론은 끊임없이 현실적 과제나 구체적 사물과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학습과 실행을 강조함으로써 주자학 체계 가 지니는 개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과 뚜렷하게 대립하였다. 이렇듯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세계를 중시하는 안원 사상의 특징은 格物致知 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곧 그는 이 말이 지니는 의미를 ' 실제로 그 일을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서 그 행위의 대상이 곧 六藝라고 해 석한다. 이러한 해석의 전환을 행함으로써 그는 학문과 수양의 주체를 수동적 이고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해방시켜 현실의 경험 세계 속에서 대상 사물과의 동적인 관계를 맺는 주체적 자아로 바꾸어 놓았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안원이 학문과 수양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진정한 목 적을 轉世之人, 곧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데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이 론의 당연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안원의 사상적 탐구는 자아 수 양의 정신적 역량을 어떻게 하면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는 세계 형성을 위한 사 회정치적 힘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시종일관 향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현실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안원의 사상을 그보다 앞선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실천 사상이었던 남명 조식의 사상과 비교의 관 점에서 논의해 보는 것은 남명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동아시 아 유학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의 중요한 기초적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72.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鄭載圭(老柏軒, 1843-1911) 시세계에 나타난 학문정신을 탐구하 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 남 기호학파의 문학세계, 그 일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규의 삶과 문학에 저류하고 있는 것은 강한 호학정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학활동은 모두 여기에 기반한 것이라 하겠다. 정재규의 시세계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학문적 연대를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창작활동은 학문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학문 내용은 그 중심에 율곡학이 있었고, 그 주변에 남명학과 퇴계학 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기호학에 연원을 두면서도 영남학으로 열려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자연은 성리학적 이념과 굳건히 결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문학과 성리학이 일체를 이루며 작품군을 형 성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이념적 인식과 그것의 시적 형상은 정재규의 시작 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관념성으로 편향되어 있 다고 하기는 어렵다. 유례없는 위난의 시대를 맞아 위기의식에 입각하여 작품 을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복령과 단발령이라는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경 험하면서 明末 절의를 지키며 죽어간 중국 선비들을 시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위정척사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정재규 시세계의 의미구조는 단순하지가 않다. 호학정신에 바탕하여 학문적 연대를 통해 작시활동을 전개하면서 선현의 도학을 계승하고자 했고, 또한 다 양한 사물에서 이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관념으로 흐를 수 있다 는 자각 하에 당대를 극도의 위기적 현실로 인식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추구하 고자 했다. 그러나 정재규의 시는 실천정신과 결합되어 있다기 보다 성리학적 이념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 우세하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전통적인 세 계관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 성리학을 묵수하면서 현실대응을 시도한 당연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의 시세계에 이러한 점이 확연히 드 러나 하나의 특징과 한계를 이룬다.
        73.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노백헌 정재규(1843-1911)는 한말의 혼란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1843 년 경남 합천군 쌍백면 육리 묵동에서 태어나, 개화기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 에서 일생 실추된 전통유학의 도를 회복하고 확립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22세 때 전라도 장성의 노사 기정진(1798-1879)에게 수학하였고, 쇠잔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명학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강우지역에 노사학을 확립 한 핵심 인물이었다. 정재규는 19세기 중반 이후 강우지역에서 일었던 학맥의 융합 분위기에도 아랑 곳 않고, 기정진을 집지한 이후부터 일관되게 노사학에 매진하였다. 인근 타 학맥의 학자들과의 친밀한 교유, 치열한 논쟁 등을 통해 그들의 학설을 접하고 수용하면서도, 강우지역에서 일어나는 여타의 강회나 인 근 명승으로의 유람 등을 통해 학문적 결속력을 심화시킨 것 등은 모두 노사학 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생 강우지역에서 스승의 학맥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일생 전통유학의 도를 扶持하고 이를 통해 난세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 백헌의 정신은 사후 그 문인들의 학문 활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정 재규의 이러한 삶과 학문 활동이 개화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대처방식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당시 종래의 전통유학을 고수해 오던 노백헌이 택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74.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9세기 후반 이후 영남 우도지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蘆沙學 派 문인들의 학문적 연원이 되는 蘆沙 奇正鎭(1798∼1879)의 학문 활동을 韓 末 畿湖學界의 동향과 관련하여 고찰한 것이다. 門戶 分立에 따른 학파 분화, 그리고 이에 따른 다양한 학문적 입장의 대두 속에서 기정진의 主理的 학문 경 향이 가지는 위상을 검토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반 기호학계의 논란이 되었 던 理 중심의 이기론과 호락논쟁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기정진은 호남을 중심으로 꾸준히 강학활동을 펼치면서 그 학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계의 학문 연원이 되는 栗谷 성리설에 대한 비 판적 입장을 제시하며 자신의 학설을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당시 기호학계의 최대 논란 대상이었던 호락논쟁에 대해 인성물성동이를 중심으로 비판적 지양 의 입장을 취하였다. 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성리설은 실천적 위정척사로 현실 화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학문관은 그의 문인에게 계승되어 호남과 영남 우도 지역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그의 학문 활동을 영 남 우도의 학계 지형에 유의하여 전반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75.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鄭載圭(1843-1911)의 학문정신과 󰡔대학󰡕 해석에 대해 살펴본 것으 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재규는 인륜이 무너져 금수의 세상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守正主義를 강조했고 衛正斥邪를 부르짖었다. 그는 도 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守死善道意識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를 보전 하기 위해 讀書種子를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재규의 학문방법은 독 서를 통한 지식을 실생활에서 체찰하는 隨事省察과 자신의 몸에 돌이켜 실천하 는 反身踐實로 요약된다. 이는 分殊 속에서 理를 구현하려 한 주리론적 사유를 반영한 것이다. 정재규의 󰡔대학󰡕 해석 기본관점은 ‘新民도 明德 속의 일’로 보는 명명덕에 치 중한 해석과 팔조목 가운데 反身踐實에 해당하는 修身에 치중한 해석이다. 해 석의 주요 특징으로는, 1)反身踐實의 관점에서 誠意를 󰡔대학󰡕의 골자로 본 점, 2)「大學章句序」의 分節이 선유들의 설과 다르며 性․敎에 중점을 두어 성인의 가 르침을 따라 본성을 회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 본 것, 3)明德을 ‘天之明命’과 연관시켜 理로 보고, 心合理氣를 전제로 하되 心은 氣之精爽, 明德은 心之无妄 으로 보아 理主氣資의 입장에서 心 속에서 眞實无妄한 본체를 명덕으로 본 것, 4) 正心을 全體主宰處에서 照管하는 것으로 보아 장구의 ‘敬以直之’에 천착해 體까 지 말한 것으로 보는 설을 따르지 않고, 用의 측면만으로 본 것 등을 들 수 있다. 정재규의 󰡔대학󰡕은 해석을 경학사적 시각에서 보면, 주리론적 관점에서 明德 를 理로 보아 이에 치중해 해석한 것과 反身踐實의 관점에서 성의․정심에 치중 한 해석을 하면서 齊家 이하를 수신의 實事로 본 것이 시대적 변화에 대처한 그 의 새로운 해석성향이라 하겠다.
        76.
        200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My study is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historiography of Korean musical scholarship and a more comprehensive view of Korean music and history. The main goal of this study is to elaborate a new form of rhetoric and strategy for both historical and ethnographic studies of Korean music. By exploring the various attempts of earlier scholars to establish indigenous musical scholarship, my study details how musical scholarship can symbolically represent the core of historical tension and amnesia which has resulted in conflict between indigenous vs. foreign, tradition vs. modernity, and past vs. present in modern Korean society. Following the spirit of Michel Foucault’s dialogics and micropolitics, my study explores the following theme: why and how academic discourses have played an ambiguous role in encouraging, and at the same time discouraging monolithic and canonized language use and scholarly convention. Furthermore, my observation on discourse reveals the interaction produced between power and resistance in the larger process of institutionalization and the concomitant processes of de-institutionalization.
        77.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芳洲 文國鉉은 둔암-성재-순암-성호-퇴계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발견되는 보수적이고 반외세적인 영향으로 일찍부터 서구세력의 동점을 경계했다. 외세에 의한 침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자기 수양과 함께 유학의 부흥과 후진의 양성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과 국권의 상실의 역사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그의 이념의 적극 적인 실천 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을 선택하게 하였다. 은둔자로 자처하던 방주는 개방적이기 보다는 보수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여 유가의 전통적인 이념을 묵수하면서 혼란한 시대에서도 本性의 유지와 심성의 함양을 통한 인간 도리의 실천 그리고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 공부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의 재기를 꿈꾸었다. 이 시기의 방주의 학문경향이나 문예관은 조선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유 가적 학문・문예관을 충실히 계승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근대로 들어서는 시 대 상황을 고려하여 평가할 때는 역사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는 동참하 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유학자로서의 문예관을 고수한 인물로 평가된다.
        78.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소눌 노상직의 학문이 영남유학의 전통 속에서 어떠한 측면을 계승하 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노상직은 이황과 조식을 함께 높이면서도, 정구의 실용주의적 노선을 더욱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 자 正脈이 이황에게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구와 허목 등을 통해 허전에게까지 그 맥이 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는 근기 남인의 학문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 스 스로가 허전의 제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로 학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상직에게 있어 하나의 자부심으로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고, 여타 영남 좌우도의 선비들을 폭넓게 교유하면서 사상사적 진폭 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노상직의 학문은 ‘수양론에 바탕한 실용학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당을 건 립하고 수양론에 입각하여 강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저술과 출판사업을 벌였던 것은 이 같은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특히 근기 남인의 실 학연원을 튼실히 하면서 자암서당을 중심으로 학도들을 기르며 이들에게서 미 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점, 다양한 저술과 출판을 통해 전통문화를 정리하고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점은 모두 위기적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키우기 위한 것 이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그의 실용학풍은 결국 구국의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고 하겠다. 소눌학은 무엇보다 江岸學的 特性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협의적 개념으로 16세기 이후 낙동강 연안의 유학사상을 의미하는 강안학은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으나 정구의 한강학이 담지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경향은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강안학은 강좌지역의 퇴계학과 강우지역의 남명학을 넘나들며 새로 운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는데, 그 선두에 한강학이 있고 그 마지 막에 소눌학이 있었다. 따라서 강안학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 면서 또한 이를 당대의 환경 속에서 응용하려는 학문의 실용성을 충실히 담보 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9.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晩醒 朴致馥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적 세계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에 영남 강우의 유학을 다시 일으킨 대표적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 재 류치명을 사사하여 전통적인 퇴계학파에 속하면서도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사 상을 수용하였으며, 유학을 현실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성재 허전의 학문에도 심취했다. 만성은 당시 국가가 당면한 총체적 위기는 유교적 교훈을 따르지 않았던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유교적 정치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만이 국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처방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華夷論’을 수용하여 오랑캐인 서구세력의 침입으로부터 조선 을 보호해야 하며, 조선은 ‘中華’로 상징되는 유교적 가치와 질서의 옹호자여야 했다. ‘斥邪論’은 당시 집권층과 학파적 바탕을 같이하는 기호지역 유학자들의 지론이었는데, 만성을 통하여 영남의 유학자 가운데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공감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성은 비록 조선후기 일반의 유학자들이 갖 는 세계인식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눈을 통하여 당시 조 선지성들의 사유세계와 그들이 안고 있던 위기의 본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80.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晩醒 朴致馥은 定齋 柳致明과 性齋 許傳, 두 문하에서 수학하여 江右(慶尙右 道) 지역을 대표하는 퇴계학파의 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한주학파의 새로운 학설로부터 師門을 보위할 것을 자임하 였다. 한주와 만나 太極動靜의 문제를 토론하고 만성은 바로 그 이듬해인 무인 년에 太極動靜辨을 저술, 한주의 태극설을 반박하였다. 여기서 만성은 태극이 홀로 동정할 수 없고 반드시 음양이 함께 있어야 하니, 음양을 떠나서 태극의 동정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氣를 떠나서 理를 말하면 理가 공허하 고 추상적인 것이 될 우려가 있다고 반박했는데 이는 퇴계학파 전통의 心說인 合理氣說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성의 명덕설은 스승 정재의 설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주의 설을 반박한 것이 다. 만성의 명덕설에서 중요한 특징은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맑고 밝은 것도 명덕이요 맑혀서 다시 밝게 하는 것도 명덕’이라 하여 明明德까지 명덕의 개념 속에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만성만의 매우 특이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工夫論의 차원에서 나온 견해로 이해된다. 태극설, 명덕설을 이어서 心說에서도 만성은 理와 氣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 하였으며, 특히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역시 理만으로 심을 정의한 한주의 心卽理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다. 만성의 心說 전반을 관통하는 심의 主槪念은 시종 合理氣일 뿐이다. 즉 합리기를 근간으로 삼은 위에서 경우에 따 라 즉기·즉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심의 개념 자체를 달리 정의할 수 없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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