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설봉산성은 백제 한성기 석축산성의 존재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산성 중 하나 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산성의 축조 주체 및 구조를 밝히기 위한 기본적인 근 거자료가 되는 설봉산성의 성벽 및 토층 양상에 대해 재검토하였다. 분석 결과 설봉산성은 초축 이후 최소한 4단계에 걸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개축되며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단계에서는 성벽과 기단보축, 암거식 수구 가 축조되는데, 석축산성의 초축은 신라가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서문지의 축조 및 성벽의 수·개축이 이루어지며 성 내부 공간의 연약 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엽층 및 목재를 이용하는 등 대대적으로 산성 안팎이 수·개축된다. 이후 서문지 및 성벽이 한차례 개축되며, 통일신라 시기의 유구·유물은 물론 고려·조 선시대와 관련된 건물지 및 유물 역시 확인되는 등 설봉산성은 오랜 시간 동안 지리적·군 사적·행정적 중요성을 잃지 않고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축산성과의 관련성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백제 유구 및 유물이 확인되는 것 역시 분명 한 사실이다. 이는 최소한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 해당 공간을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음을 시 사하는 것이며, 고고학적 증명을 위해서는 차후 성 내부 공간 및 치성·북문지 등의 조사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 글은 옥천 이성산성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에 기초하여 그 축성과 운영의 특징을 간략 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성산성은 삼국시대 신라의 굴현 지역인 옥천군 청산면과 청 성면 일대를 아울러 관리하기에 매우 유리한 위치에 축성하였다. 그리고 가까이는 신라 삼 년산군인 보은 지역, 나아가 영남 중북부 지역과의 교통이 용이한 지점에 위치한다. 이성산성의 초축 성벽은 판축기법을 적용하여 토축성벽으로 축조하였으며, 후대에 지속 적으로 수개축되었다. 특히 초축성벽인 토축성벽 외측에 부가하여 석축으로 성벽의 입면을 이루도록 개축한 부분은 매우 특징적인 모습이다. 성 내부에 대한 조사는 남서쪽 지역 일대 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확인된 목곽고, 원형수혈군, 석축 집수시설 등은 성 내부 에 각각의 용도와 기능에 따른 다양한 시설물이 조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각 유구에서는 주 로 6~7세기의 신라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어, 축성 주체가 삼국시대 신라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목곽고와 원형수혈군의 존재는 이성산성이 수행한 역할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이성산성의 축성 위치와 성 내부에서 확인된 유구의 성격을 통해 성은 신라가 5세 기 후반 소백산맥을 넘어 금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삼년산군 아래 굴현 지역 을 관할하는 중심 거점으로 역할하기 위해 축성한 성으로 보았다.
Since its construction in the late 14th century, Hanyangdoseong had been carried out three major repairs and reconstructions during the 500 years of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o the large-scale construction, small-scale construction continued until King Gojong era. In particular, in the 18th century, systematic construction management was implemented by the craftsmen and the military participated in the renovation of Hanyangdoseong in earnest, and the construction methods also developed rapidly. In the early 18th century, new construction techniques were attempted in various sections of the reconstruction work, and gradually became a common technology for repairing Hanyangdoseong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and period of changes in the 18th century's construction technique, when the rapid development of Hanyangdoseong took place. To this end, the excavation results related to Hanyangdoseong, the remaining city wall, and the inscribed stones were used to identify and demonstrate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 of the construction method.
Because of the economy and construction simplicity, Jacketing method has been widely used in strengthening RC columns in Korea. Although some studies on the compressive performance of jacketed elements have been conducted by experimental or analytical methods, the correlation between the axial performance and the surface roughness of the jacketed element has not been performed. In this study, the surface roughness of chipped surface of old element was measured and the compressive strength test was performed to evaluate the surface roughness and jacketed effects. The test results are as follows; (1) Compressive strength was improved by 1.8%∼3.1% by chipping, (2) Compressive performance of the jacketed elements reduced to 85%∼93% of theoretical values, (3) As a result of analysis of correlation between surface roughness index and axial strength, surface roughness index based on the wave length was more effective than existing methodology for evaluation surface roughness.
청주 父母山城은 단면 사다리꼴 모양의 협축식 전면 석축성벽, 편마암계의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10m 정도 높이로 정교하게 쌓은 체성벽, 높이 4m에 달하는 단면 삼각형의 보축성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든 懸門式성문 등의 축성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5-6세기의 新羅城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지만 동시기의 고구려성이나 백제성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요소 들이다. 부모산성 주변에는 4개의 堡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는 부모산 정상부에도 보루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작은 성을 확장하여 쌓는 경우는 있지만, 큰 성을 쌓은 후 그 안에 다시 작은 보루를 쌓는 사례는 없기 때문에 이는 父母山城보다 보루가 먼저 축조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산 일대에 구축된 여러개의 작은 堡壘는 백제가 쌓은 성이며, 父母山城은 6세기 중엽 이 지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부모산 제1보루와 학천산성 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보루는 모두 版築技法으로 토축부를 먼저 쌓고 외벽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土芯石築工法’으로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토심석축공법은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축성기법으로서 원래 고구려의 축성기술이었지만 고구려의 남진과정에서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로부터 새로운 축성기술을 받아들인 백제는 6세기 초부터 扶蘇山城의 일부 구간과 부여 나성 등 都城뿐만 아니라 부모산 일대의 보루처럼 국경 지역의 성곽도 전통적인 土城공법 대신 이러한 토심석축공법을 적용하여 石城을 쌓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In the 16th century, the country of the heaven’s son Ming Dynasty had been on the verge of decline. Under such a circumstance, Portuguese who had been shown along the coast of Southeast Asia occupied the Malacca Kingdom with their force, which was a tributary state to China for a long time, resulting in disturbances in the tributary trading system whose summit was Ming Dynasty. Although Portugal with its entry to the Sea of Southeast Sea wanted to keep a tributary relations for the stable and organizational trading activities with China, the government of Ming Dynasty could not overcome its suspicion and fear against Portugal as they had not experienced such a situation, resulting in forming conflicts for a long time. Macao – The process to form residences of Portuguese in Macao can be said to be a course to expand the understanding and trust on the counterpart while the government of Ming Dynasty with no power to control the counterpart were reducing the suspicion and fear against Portugal. Although Ming Dynasty could not embrace Portugal as one of the tributary states, it allowed their stay in Macao as the land of the heaven’s government. Although gateways were installed to control the access of Portuguese to the inland, their trading was never blocked. Although Portuguese did not give up the construction of walls under the justification of protecting their living foundations from the external invaders such as the Dutch, they served for the government of Ming Dynasty which allowed them to have their safety and Christian missionary works until they were perished. The Portuguese residents in Macao with Catholic churches and Western buildings in the Iberian style together with Chinese colors can be said to be cultural heritages which came from the contacts and conflicts between China and Portugal.
청주 지역의 약 40개소 이상의 성보(城堡)들의 존재 양상을 분석 정리하여 축성 계획의 연속적 발전과정을 추구하였다. 소규모의 목책과 토축의 성보가 축조되는 단계에 백제왕국의 영역 내로 편입되어졌다고 여겨진다. 가장 많은 수의 성보들은 분포양상과 유물들에 의한 편년으로 보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삼국이 마주치던 국경지역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고, 10세기 초에는 후삼국의 분열시기가 되면서 수축되어 다시 사용된 국경지역의 양상을 보인다. 안정된 지역 중심지로서의 성곽도시의 첫 단계는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의 석축 산성 축조에서 시작되고, 평지나 낮은 구릉을 이용한 읍성 성격의 토축 도시성곽과 도시 배후의 산성을 동시에 가지는 성곽도시는 통일신라 지배시기와 관련된다. 문헌상의 서원소경이 서원경으로 승격되는 시기에 변화가 시작되어 고대적인 성곽도시의 최종형태는 10세기 고려왕조 초기에 나성을 가진 도시로 변화하였다. 이후 13세기에 이르러서는 관할구역 내의 가장 험준한 곳에 대규모의 입보농성을 위한 피난용 산성이 추가되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읍성이 석축으로 개축되어 행정 중심도시가 되었다. 16세기 말의 왜란과 17세기 전반의 호란을 겪은 뒤인 17세기 후반에 지역 육군을 총괄하는 병영이 읍성에 자리하면서, 그 배후의 토축 옛 산성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상당산성을 경영하였다. 이 읍성 내지 영성(營城)과 산성이 하나의 짝을 이루는 형식의 성곽도시가 최종 형식이었다.
주장성은 5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하는 신라 석축산성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무왕12년(672) 신라는 해발 500m가 넘는 남한산에 대규모 산성을 쌓고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신라는 이미 둘레 8km가 넘는산성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쌓을 수 있는 조직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돌도 주변에 있는 편마암 석재가 아니라 최소한 11k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서 운반해온 화강암 성돌을 하나 하나 옥수수알 모양으로 치밀하게 가공하여 쌓았다. 보축(保築)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을 만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을 쌓았다. 당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성 내에는 대형 창고를 지어 많은 군량미와 병장기를 비축하였다. 길이 53m가 넘는 대형 건물에는 기와 한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특대형 기와를 사용하였다. 기와 무게로 인한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돌과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견고하게 대지를 조성하고 벽체는 두께 2m가 넘도록 하여 기둥이 받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등 이 대형건물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로 구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인조2년(1624)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다.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서 성을 쌓고, 주장성 성돌을 재활용하기도 하였지만 현문식 성문을 평문식(平文式)으로 바꾸고, 12개의 암문(暗門)을 새로 만드는 등 남한산성에는 조선중기의 새로운 축성기술이 반영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화포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옹성과 포루가 새롭게 구축되었으며 한봉성과 봉암성, 신남성 등의 외성(外城)이 보강되었다. 성돌의 크기도 커지고 돌로 쌓았던 여장도 벽돌과 석회(石灰)로 다시 쌓아 포탄을 맞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여장을 만들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고대의 축성기술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각 시기 축성기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교과서와 같은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진하해수욕장 서편 야산 구릉에 위치한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은 임진왜란 시기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축성되었다. 서생포왜성은 남․동해안 각지에 현존하는 30여개의 왜성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뛰어나 왜성 연구의 최적지가 되고 있으며 임란 중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와 4차례에 걸친 평화교섭을 진행하여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부터 1895년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水軍)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었기에 근세기 한일간 축성법의 비교연구뿐만 아니라 성곽이용방식에 대한 상호 고찰도 가능하다. 이에 본 연구는 지금까지 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었던 서생포왜성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왜성의 성곽구조와 체성 축조기법상의 특성을 밝히고 이차적으로 한국성곽과의 비교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일차적으로 문헌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현장실측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입지 및 평면형태, 성곽 내부의 공간구조, 虎口와 해자 등의 방어시설물, 체성 및 隅角部축조수법, 성벽의 기울기 등 서생포왜성의 제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곽의 축조는 당대의 토목기술과 관념(정치상황과 국가간의 관계)을 반영하므로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성곽들은 유사한 축조수법과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양상은 창녕지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본고에서는 창녕지역 성곽 중 낙동강 연안에 축성된 성곽에 대한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확인한 속성들을 분석한 결과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성곽들은 5세기에서 6세기 초반경 재지세력에 의해서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성곽들의 특징 및 성격은 첫째, 낙동강과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축조된 성곽들은 200m 이하의 소형인데 반해, 창녕지역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지점의 성산산성과 웅곡리산성, 그리고 낙동강 중류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점의 구진산성은 대체로 400~600m로 대형에 속하지만 경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신라산성 중 규모가 소형인 산성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소형에 해당된다. 따라서 낙동강 연안에 위치하는 성곽의 규모로 보아 낙동강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낙동강 연안 성곽의 축조수법은 토성과 석성으로 나누어지며, 토성의 비율이 높다. 토성의 정확한 축조수법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 시기에 축조된 다른 토성들의 축조 수법을 감안할 때 순수판축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성의 경우 허튼층쌓기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암괴가 노두된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음으로써 공력을 줄였다. 이러한 양상은 전형적인 신라성곽과는 차이를 보인다. 상기의 내용으로 보아 낙동강 연안에 축조된 성곽들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 신라의 영토 확장과 관련된 지역에 축성된 신라성곽의 특징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근거 역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대부분의 성곽들이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거창 정장리 일반공업지역내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정장리토성은 구릉 능선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져 있으며, 전체 길이는1,000~1,200m정도이다. 체성은 기초석열・영정주・판축토에 의해 축성되었으며, 체성관련 시설물로는 추정문지・4주식건물지・배수시설이 있다.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호경부편・개・개꼭지・인화문 편구병 등으로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중반 정도로 편년되지만 체성에서 출토된 유물의 하한을 근거로 볼 때, 토성은 9세기 중반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토성의 성격에 대해 지방 행정조직의 치성과 통일신라말 호족세력의 거점성일 가능성에 대해 상정해 보았다. 통일신라말의 정세로 볼 때, 재축성한 치성의 성격보다는 호족의 거점성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이해되었다. 정장리토성의 축성 시점이 호족의 지방세력 확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은 중요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한국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서울, 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倭가 개입하여 축조한 성을 말하며, 그 축조 배경에는 일본군의 남해안 거점 확보가 주목적이었고 부수적으로는 행좌소와 보급기지 역할이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 왜성은 1592년에 가덕, 웅천, 영등성을 시작으로 1593년에는 서생포, 기장, 자성대, 안골포, 거제도 등지에도 축조되었다. 이러한 왜성은 현재 남해안 일대에서 이미 확인된 것만 해도 30여 개소에 달하며, 내륙 곳곳에서도 유구는 자세하지 않으나 왜성의 기울기와 축조수법을 가진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김해, 울산, 구포, 순천, 사천 등지에서 간헐적인 고고학적 조사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최근 한일 양국에서 왜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조사 예가 늘고 있다. 왜성이 토목이나 건축사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성곽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면 연구는 주로 일본인에 의하여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왜성에 대한 전기한 기존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본인이 직접 현지답사에서 얻은 자료를 집성, 분석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았다. 그 결과 축조기술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일본성곽요소와 우리나라 성곽요소가 혼합된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석성의 발전과정은 사원계 석원의 성립→安土城→舊 大坂城→ 남해안 倭城→肥前 名護屋城→근세 석성→江戶期 개수성 등의 순서인데 그 중간에 왜성이 위치하고 있다. 둘째, 왜성 입지는 강이나 바다의 돌출한 곶에 위치하고 본곽, 2곽, 3곽으로 둘러져있고 그 형태는 연곽식, 별곽식, 제곽식으로 나눌 수 있다. 셋째, 왜성에 사용된 성석은 자연석, 절단면석, 다듬돌, 장식석 등으로 구분되며, 그 변천과정은 자연석→절단면석→다듬돌→화장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말기에 보수된 성에서는 이들 3단계가 혼용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 근세성에서도 장식석까지 혼용되고 있다. 성석 가운데는 성문 입구에 게시용으로 배치한 방문석을 일본 근세성에서는 立石, 裝飾石, 記念石, 鏡石 등으로 명칭하고 있으나 그 시작은 왜성에서부터 이며 조선읍성의 방문석이 그 시원이었다. 넷째, 초기 왜성은 축조 기법상으로 우각부는 축성집단에 따라 기울기를 63°, 60°를 기준으로 하는 곳과 50°이상을 전후한 기울기를 기준으로 하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정유재란기에는 70°, 80°에 가깝게 급한 기울기를 갖는가 하면 성고를 높이기 위해 협축 성벽을 구사하면서 전기한 2가지 기울기를 겸용한 분절형 성벽이 나타나며 전쟁 말기에는 곡선 성벽도 나타난다. 이것은 모두 왜성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알수가 있다. 다섯째, 성곽의 구조적 측면으로 보면 왜성에서 시작된 치성, 적대, 등성로, 해자, 고식 고려문 등이 일본 근세 석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남해안에 위치하는 왜성은 기본적으로 일본적인 요소와 조선적인 축성기술 요소가 혼합되어 발생기에는 일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가, 수축기에는 점차 한국적인 요소가 증대되고 발전기에는 왜성 축조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 근세 석성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기울기의 변천, 경석의 배치, 성석의 채택, 천공에 의한 절단방법, 성곽석과 채움석 쌓기수법, 협축과 분절형 성벽, 치와 적대, 해자, 고려문 설치 등은 우리나라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적으로 축조된 산성, 읍성, 진보루 등 관방성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기술 중 일부임을 감안할 때 일본 근세성은 물론 우리나라 석성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paejang system of the castle constructions in the late period of Chosun dynasty. Moreover, this study aimed to examine effects and influences of its constructional productivity. The results are as follow ; 1. Paejang was originally a sort of military positions. Thereafter it had been adopted to the various fields like soonrapaes. Pae, which was a regular working unit organized with 30~50 laborers, took charge of the works allocated with its own chargeable section. 2.The first adoption of paejang system was found at the construction of Ganghwa-oyseong in 1690. Since the period of King Yeongjo and Jeongjo, it was generally used as a working system. 3. Yoo Hyeongwon had early suggested that this system should be adopted as a reformative system because it had a perfect command system like Soko-je, the provincial military system. 4.At the constructions of Dongnae-upseong, Jeonjoo-upseong and Daegoo-upseong in the period of King Yeongjo, paes were organized to 40~60units, and worked in the fields of masonry, carriage and picking of stones. 5.At the construction of Soowon-seong in the period of King Jeongjo, a large number of various paejangs participated in all of working fields. Especially masonry-paes were usually organized with over 100 units. 6.It was estimated that paejang system surely could guarantee saving labors and term of works. Moreover, it was a basis for the further development form of dogup-je, a contracted work system. 7. Paejang system was applied in the constructions of Buddhist temples since the middle period of 1700s and later, it was widely used in the constructions of pala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