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목적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그의 교회 칸타타 안에 흐르는 ‘당대’ 루터교의 신학 언어를 읽어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역시 신학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바흐 의 ≪칸타타 75번≫, ‘주린 자는 먹을지어다’(Die Elenden sollen essen)를 분석한다. 이 작품 안 에 담긴 루터교의 교리와 메시지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들은 어떤 신학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 는지 파악해 나간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칸타타 75번≫에서 발견되는 두 개의 교리, 즉, ‘칭의’와 ‘십자가 신학’이고 이것의 신학적인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루터 교를 상징하는 두 교리가 ≪칸타타 75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이러 한 주장이 내포하는 바에 대해 질문한다.
18세기 작곡가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건반 협주곡은 장르사적, 양식사적 중요성에도 불구 하고 음악사와 음악이론에서 간과되었다. 고전시대에 소나타 형식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의 중요 성이 부각되면서 독주 협주곡은 교향곡의 파생 장르처럼 여겨졌고, 이중 제시부를 갖는 모차르트 의 피아노 협주곡이 표준화되면서 이전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은 소외된 듯 보였다. 1999년 징-아카데미 악보의 새로운 발굴은 엠마누엘 바흐에 대한 음악계의 관심을 촉발하였고, 활발한 학 술활동이 진행되었다. 북미 학자들의 연구 동향에 발맞추어 본 연구는 엠마누엘 바흐의 건반악기 협주곡 형식에 대한 1970-80년대의 논문들을 재점검하고, 과거에 제시된 형식 모델들의 효용성에 주목함과 동시에 이들을 보완하였다. 엠마누엘 바흐의 몇몇 건반 협주곡을 분석함으로써 연구자 는 1980년대 데이비스(Shelley David)에 의해 제시된 3개의 협주곡 형식 모델을 검토하였고, 2개 의 모델을 추가적으로 제안하였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건반 협주곡의 올바른 역사를 밝혔고, 엠마누엘 바흐의 건반 협주곡의 정형성과 독창성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필자의 논문, “바흐의 ≪추모 송가≫에 관한 소고”에 뒤따르는 후속연구이다. 선행연 구에서 필자는 이 작품이 절절한 슬픔을 전달하는 것도, 이를 통해 위로를 건너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 후속연구는 ≪추모 송가≫의 5악장과 6악장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 아 이 악장의 가사와 그것의 신학적인 의미를 살핀다. 나아가 이 신학적인 의미가 당대 루터교의 언어, 특별히 루터의 죽음관, 즉 루터의 아르스 모리엔디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술해 나간 다. 또한, 이 후속연구는 루터의 아르스 모리엔디가 어떤 음악으로 구현되는지도 설명한다. 최종 적으로 이 글은 루터교의 아르스 모리엔디에 흐르는 좋은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그리고 그것 을 구현하는 바흐의 음악을 통해 위로를 구할 수도 있으리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 글은 바흐의 ≪부활절 오라토리오≫(Oster-Oratorium)를 논의의 중심에 두고 있다. 이 작품 은 1725년 2월, 세속칸타타로 작곡된 이후 일련의 수정과정을 거치면서 1737년경 오라토리오로 재탄생한다. 이 글은 1730년을 전후한 바흐의 행적, 그리고 그가 남긴 원전자료들을 면밀하게 검 토하면서, 작곡가는 어떤 방식으로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있는지 추적해나간다. 당대 의 오라토리오 정의, 보편적인 정의들에 기대어 바흐의 오라토리오는 어떤 음악적, 가사적 특징을 보이는지 분석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이 글은 ≪부활절 오라토리오≫가 ‘극적인 어떤 것’과 ‘신학적인 명상과 성찰을 요구하는 어떤 것’ 사이에 어떤 방식으로 놓여 있는지 고민하면서, 과연 작곡가가 상상하는 전례음악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질문하고 있다.
본 논문은 정치성이 짙은 세속칸타타 ≪그대의 행운을 찬미하라, 축복받은 작센이여≫(Preise dein Glücke, gesegnetes Sachsen) BWV 215를 당시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 읽는다. BWV 215는 전쟁을 치르며 힘겹게 얻은, 그러나 여전히 불안정한 왕좌에 앉아 있는 아우구스트 3세의 폴란드 왕 즉위 기념행사를 위해 생산된 것이다. 이 칸타타에는 왕을 향한 칭송들 외에도 정치적, 전시적 상황 묘사를 비롯해 종용, 설득, 경고, 약속 등의 다양한 정치적 수사들이 담겨 있다. 바흐는 그러 한 칸타타를 화려한 정치행사용 음악으로 만들어냈다. 칸타타의 곳곳이 패러디이지만 옛 것과 새 것을 ‘하나’의 몸체로 녹아내고, 거대한 이중합창과 악기편성, 레치타티보 세코와 레치타티보 아 콤파냐토, 아리오소의 중창, 기교적 아리아 등을 골고루 동원했다. 그 내부에서는 악기들의 독특 하며 상징적인 사용, 폴리포니와 호모포니의 혼합, 섬세한 조성과 화성의 운용, 바로크 음악의 필 수적인 콘티누오를 대체하는 바셋헨(Bassetchen) 등 다채롭고 획기적인 수단들을 꾀하고 썼다. 그 렇게 산출된 칸타타 ≪그대의 행운을 찬미하라, 축복받은 작센이여≫에서 바흐의 오페라가 느껴 지는 듯하다.
이 글은 바흐의 쾨텐 시기를 논의의 중심에 두고 있다. 전통적인 바흐 담론은 바흐의 정체성을 루터교 교회의 칸토르로 규정하면서, 그의 삶과 작품이 이것을 향해 움직였다는 거대한 내러티브를 창안해냈다. 이 글은 이러한 시각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이지 질문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바흐가 남긴 1차 사료, 특별히 그가 1708년 뮐하우젠을 떠나면서 자신의 목표를 천명한 사직서에 주목한다. 이 글은 이 문서를 보다 다 큰 음악적, 문화적, 사회적, 신학적인 맥락 안에 위치시키고 이것이 함의하는 바에 대해 논의한다. 이 글의 후반부는 쾨텐 궁정으로 초점을 이동시켜, 쾨텐은 어떤 도시였는지, 이 궁정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위 사직서에서 제시된 목표와의 연장 선상에서 논의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 글은 바흐의 쾨텐 시기와 그것의 해석에 관한 새로운 의미의 결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바흐와 그의 음악을 1700년대를 전후한 독일의 오페라 전통이라는 음악문화 안에서, 또는 그것에 기대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전통적인 바흐연구는 바흐가 속한 사회적 맥락을 경건과 세속, 또는 교회와 그 외부로 엄밀하게 구분했고, 작곡가를 경건과 교회에 속한 루터교 교회음악가 로 규정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당대 독일, 특별히 라이프치히의 지적, 신학적 담론이 세속과 교회가 구분되는, 그리하여 서로 넘나드는 유동적이고 탄력적이며 다양한 문 화적, 사회적, 신학적 지형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러한 지형 안에서 당대 작곡가들은 전례음악과 오페라 모두를 넘나드는 작품을 작곡하였다. 이 글의 결론은 바흐 역시 당대의 음악관습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칼 필립 엠마뉴엘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A장조 소나타, W. 55/4의 1악장을 여딩엔의 스키마 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하였다. W. 55/4의 1악장에서는 각 스키마 유형이 소나타 형식의 구조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활용된다. 이는 작곡가가 갈랑 스타일로서 스키마를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형식적 구조 또한 면밀히 고려하여 작품을 구상했음을 의미한다. W. 55/4의 전체 악장에서는 종지가 갈랑 스타일을 반영하는 또 다른 척도이다. MI-RE-DO, 커드워스 종지, 회피 또는 위종지, 수렴 종지, COMMA, 클라우줄라 베라, 그랜드 종지 등의 다양한 유형이 용도와 기능에 맞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작품을 끝맺는 3악장의 종결부에서는 그랜드 종지, 회피 종지, 커드워스 종지가 연이어 나타나 종지를 극대화한다. 여딩엔의 스키마 이론은 갈랑 음악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과 지침서로서 전형화된 음악적 패턴인 ‘성부 진행 스키마’를 제시하였고 이러한 스키마 유형과 종지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갈랑 음악의 스타일과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키마 이론은 전고전시대 뿐 아니라 적용 가능한 고전 시대 작품까지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1713년 2월 23일 연주된 바흐의 세속칸타타 208번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개의 아리아, 즉 제7악장 베이스 아리아와 제9악장 소프라노 아리아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다. 이 두 악장은 바흐가 비빌디의 협주곡을 접하기 이전, 즉 1713년 7월 이전에 작곡된 음악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바흐담론은 비발디 협주곡을 통해 학습한 리토르넬로 형식은 1713년 7월 이후 작곡되는 바흐의 성악작품에 침투하였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칸타타 208번의 분석을 통해 이 글은 이미 1713년 7월 이전부터 바흐는 리토르넬로 형식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나간다. 이를 통해 이 글은 바흐의 작곡공정이 뮬하우젠이라는 준비기간을 거쳐, 비발디의 협주곡을 학습하고, 이것을 바이마르의 루터교 칸타타에서 실험하여 라이프치히에서 최상의 수준에 이른다는 일관성 있고,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내러티브의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미 진정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는 클래식과 함께 진정효과가 있다고 밝혀진 레게의 효과를 비교하고자 진행되었다. 연구에 사용된 실험견들은 실험을 잘 이해하고 있는 연구원들이 현재 키우는 반려견 4마리를 섭외하여 진행되었다. 섭외 된 반려견은 말티즈 2마리, 요크셔테리어 2마리이다. 진정효과를 알 수 있는 지표로는 Lori R. Kogan외의 ‘Behavioral effects of auditory stimulation on kenneled dogs’ 논문에서 사용한 지표를 일상에서도 확인하기 쉽도록 간소화하여 짖은 횟수, 서있는 시간, 서있지 않은 시간, 수면시간의 평균을 냈다. 그 결과 짖는 횟수 외의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고, 진정효과만은 확실한 것을 확인하였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실행하는 것과 실험견의 일정한 결과를 위해 각 가정에서 실행하여 정확도는 떨어질 수 있다. 주변 소음 등이 적은 가정에서 실행한다면 조금 더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1733년, 바흐와 첼렌카가 드레스덴 궁정의 선제후로부터 하사받은 교회작곡가라는 직책에서부터 시작한다. 18세기 전반부 독일어권의 바로크 음악문화에서 이러한 명칭은 당대의 관습과 전통을 드러내는 표식이라는 논의를 거친 후, 드레스덴 궁정과 이곳의 음악가, 그리고 이곳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로 관심을 이동시킨다. 이 궁정의 음악문화가 드러내는 특징과 성격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친이탈리아적인 성향과 연계지어 설명한 후, 이 글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바흐와 첼렌카는 선제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규정하며, 이것이 작센지역에서 살아가던 작곡가들이 경험하고 부딪히고 관계 맺던 당대의 음악적 문맥임을 역설하고 있다.
본 논문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그의 여타 작품들 및 서양음악의 창작 유산들과 구별되는 수용의 역사, 즉 작곡가 사후 오늘날까지 부단히도 해석, 재생산, 창작의 범주에서 예술음 악과 대중음악 간의 뚜렷한 경계마저 넘나들며 활기차고도 압도적인 생명력을 유지해온 역사에 주 목하면서 그 ‘특별한’ 수용사의 요인들을 역사의 흐름 안에서, 작품의 내부에서 찾으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다양하고 때로는 매우 이질적인 시대, 양식, 장르, 음악적 콘텍스트로의 탁월한 동 화력과 시대, 양식, 장르의 초월성으로 귀결되는 양면적 가치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특별한’ 수용사를 일군 주요 요인이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 기댄 후대의 작품들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기도 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수용사는 결국 이 작품이 품고 있는 가치와 속성, 음악적 가능성과 잠재력이 역사의 흐름을 타며 한껏 발현되고 호응될 수 있는, 역사적 · 예 술적 위상의 담보가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에 기반을 둔다.
선행연구의 후속연구로 기획된 이 글은 보편 바흐(Bach, the universal)이라는 이미지를 논의의 중심에 두고 있다. 특별히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보편 바흐라는 이미지가 1980년대 후반 영미권의 새음악학(new musicology)과 함께 등장하였고, 새음악학 담론과 교차되면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냈다는 점이다. 새음악학의 대두와 함께 보편 바흐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도전받고, 변화하고, 또는 변화하지 않았는지 살피기 위해 이 글은 보편바흐를 주장한 로버트 마샬, 새음악학적인 시선으로 보편 바흐를 반박한 수잔 맥클러리(Susan McClary), 그리고 보편 바흐의 이미지를 근대라는 새로운 창으로 검증해나간 존 버트(John Butt) 등의 논의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근대와 바흐라는 사고가 21세기 한국의 바흐담론(또는 서양음악담론)에서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지 질문한다.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BWV 1001-1006의 소나타들에 위치하는 푸 가들이 작품집에서 점하는 의미에 대해, 바이올린에 의해 실현되는 바흐 푸가의 새로운 면면 들에 대해 탐구하는 본 논문은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바흐는 바이올린 솔로로 푸가의 새로 운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거기에서는 대위법적 전개뿐 아니라 바이올린 특유의 기교적, 수식 음형적 패시지들까지 아우러지며, 이로써 그 엄격한 양식과 자유로운 양식의 결합이 작품집 을 가로지르는 의미를 띤다. 또한 바흐의 바이올린 푸가들은 다양성과 유동성의 형식 및 구 성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푸가의 기본 질서에도 침투되어 있다. 다양성과 유동성에 정 교하게 조성되는 통일성과 완결성이 더해진다. 이 특성들은 개별 푸가에서, 세 푸가 사이에 서 함께 나타나고, 이러한 관점에서 푸가들은 BWV 1001-1006의 ‘커다란 코스모스’를 함축하 는, 대위법적 연주의 차원을 개척한 ‘작은 코스모스’로 이해될 수 있다.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의 《세 개의 바흐 주제에 의한 푸가》는 클라라 가 J. S. 바흐 푸가의 주제들을 차용하여 작곡한 곡으로, 전통적으로 남성의 장르로 여겨져 온 푸가 장르에서 여성 작곡가로서 첫 발을 내딛는 중요한 지점에 놓여있다. 본 논문에서는 클라라 슈만이 푸가의 작곡에 도전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기록들을 추적해봄으로써 바흐와 슈만이 클라라의 푸가 작곡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와 바흐의 《평균율곡집》에 담 긴 원곡 푸가와 비교를 통해 클라라가 어떠한 방식으로 푸가 작곡가로서 첫 발을 내딛고 있 는지를 살펴본다.
클라라의 푸가와 바흐의 원곡 푸가의 주제의 등장시점의 비교를 통해 본 연구는 클라라의 푸가가 전체적으로는 바흐와의 유사성이 강하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그 안에서 대선율, 중간 부분의 전개방식, 그리고 페달톤을 주로 사용하는 푸가의 마지막 부분의 처리방식 등이 같은 주제 위에 쓰인 세부적인 차이를 만들어냄을 보여준다. 이렇게 같은 주제 위에 쓰인 바흐와 클라라의 푸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클라라가 바흐의 작곡방식들에 세밀하게 집중하여 자신 의 작곡기법으로 소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바흐가 보여 주었던 대담함 보다는 순차진행의 기반 위에 동형진행을 결합하는 패턴의 반복으로 다소 안 정적인 진행을 추구하고 있는 부분도 보였고, 성부가 등장하지 않는 빈 공간들이나 예기치 않은 극도의 불협화음 같은 결함도 나타났다. 이러한 사례 연구를 통해 19세기 여성작곡가 의 창작환경을 이해해 보고, 클라라 슈만의 푸가 창작이 지니고 있는 음악사적 의미를 조명 해 본다.
이 글의 관심은 바흐담론의 내부와 외부에서 유통되는 바흐의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이 글은 바흐의 이미지들이 바흐담론 안에서 어떤 과정과 절차를 통해 생산되고 재생산되 고 또 해체되는지 추적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19세기를 대표하는 포크켈과 슈피타, 그리 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허츠와 볼프의 문헌을 분석한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다하나 이들 의 연구는 고귀하고 숭고한 인품을 지닌 위대한 작곡가 바흐, 독일 루터교 교회음악의 완성 자, 최선을 다하는 천재 등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이미지를 전통적인 바 흐의 이미지로 규정하고 이들이 음악학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 글은 바흐의 세속칸타타를 담론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 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1733년을 주목한다. 바흐담론에서 1733년은 바흐의 《1733년 미 사》가 작곡되고 이것이 드레스덴 궁정에 헌정된 해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바흐담론은 이 시기 바흐가 모두 5곡의 세속칸타타를 작곡하였고, 이들 역시 드레스덴 궁정에 헌정되었다 는 사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 글이 시도하는 것이 이러한 기존의 시각에서 종교와 세속 의 날선 구분을 잠시 내려놓은 채 이것을 넘어선 바흐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는 바 흐의 세속칸타타(또는 그의 《1733년 미사》)를 작곡가의 ‘특별한 과외 활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의 음악활동의 일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또한, 이것은 드레스덴을 향한 바흐의 동경, 또는 야심이 그의 대표작인 《1733년 미사》뿐 아니라 이 시기 작곡된 그의 세속칸타 타들을 통해서도 일관되게 구현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글이 주목하는 문제는 바흐연구와 신음악학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음악학의 지류 중 가장 보수적이라 평가받는 바흐연구는 과연 신음악학과 관련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1985년 미국의 음악학자 커만은 자신의 저서, 『음악을 생 각한다』를 통해 당시 음악학의 연구대상과 방법론 등을 비판하고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커만이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커만 스스로에 의해 비평, 그리고 이후 학자들에 의해 신음악학이라 명명되었다. 그러나 과연 신음악학이 바흐연구에도 침투 하였는지, 또는 하지 못하였는지 논의하고 있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글은 이러한 질 문을 염두에 두고 1950년대 이후 바흐연구가 지나온 행적을 분석함으로써 신음악학의 영향 력을 진단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