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영국의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 ~ )의 〈나의 침대〉 를 다룬다. 〈나의 침대〉는 에민이 이성과의 이별 후 나흘간 머물렀던 그의 침대를 전 시실로 옮겨 놓은 것으로, 매트리스와 프레임으로 구성된 하나의 침대와 침대 주변에 다양한 오브제를 배치한 작품이다. 에민의 작업은 주로 그의 사적 생활과 감정을 주 제로 삶을 이야기하며, 그가 겪어온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나의 침대〉에는 에민의 불안정한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삶의 고통이 드러난다. 〈나의 침대〉에는 모성 의 상실이 드러나거나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이별에 대한 고통과 불안감, 슬픔을 나 타난다. 에민은 〈나의 침대〉에서 그의 상처와 고통을 숨김없이 표현하였고, 그의 혼 란과 고통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치유의 순간으로 전환된 다. 에민이 작업 과정에서 갖게 되는 치유의 경험은 관람자에 전달되며 상호 관계적 소통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본 연구자는 에민이 〈나의 침대〉를 통해 자신의 상처 를 어떻게 치유하는가의 과정을 연구할 것이다.
본 논문은 원찰․원당의 시각에서 조선 시대 동학사 내 동학삼사(東鶴三 祠)의 불교사적 전개를 통해 이곳에 모셔져 있는 인물들을 위한 의례에 주목한 연구이다. 동학삼사에는 현재 단종을 비롯하여 단종의 거사를 돕 다 죽임을 당한 종친과 사육신 및 생육신, 관료 그리고 심지어 노비들도 제향되고 있다. 특히 계룡산 초혼각지(鷄龍山 招魂閣址)는 야은 길재가 동학사의 승려와 함께 단을 쌓고 고려의 국왕과 정몽주를 초혼하는 제사 를 지냈다는 점도 원찰 연구의 단초로 삼는다. 또 하나의 전각으로 숙모 전(肅慕殿)을 다룬다. 이곳은 계유정난을 계기로 등극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면서 건립되게 된 조선의 역사적인 공간이다. 본 논문은 동학삼사의 공간을 단순히 유교의 사당이나 사우로 볼 수는 없다는 점에 집중하고 있다. 말하자면 숙모전을 포함한 동학삼사에 모셔 지고 제향되는 인물들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조선시대 유교 의 례와 불교적 죽음관 및 그 의식이 혼합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동학사 동학삼사의 공간/장소에서 특정 인물들을 제사해 온 역사를 일차적으로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유교적․불교적 의례 혹은 이들 의례의 혼합양상이 번갈아가며 지속되는 양상을 포착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역내 안보 질서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지역은 무엇보 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오랫동안 이해관계에 마찰을 빚어온 한반도 지 역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남중국해와 양안문제 등 여러 곳에서 안보의 불안 요소가 존재하지만,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통해 안보질서를 위협하는 북한은 가장 불안정한 변수이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동아시 아의 강대국들이 항상 주시하는 것이 바로 한반도 지역의 안정과 평화라 고 할 수 있다. 이에 남북정상회담이나 북미정상회담 등 북한과의 평화 관련 회담은 전 세계가 주목을 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남한이 인식하고 있 는 ‘평화’와 북한이 말하는 ‘평화’가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본 논문 의 연구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남한과 북한이 ‘평화’에 대 해 어떤 개념적 인식을 지니고 있는지 분석하기 위해서 본 논문에서는 개 념사적 분석방법을 연구분석틀로 구성하여 남북한이 ‘평화’에 대해 어떻게 개념화하고 있는지를 분석하였다. 개념사적 분석방법 중 하나인 라이하르 트의 사회사적 의미론을 중심으로 분석하였을 때, 북한이 인식하는 평화는 남한이 생각하는 화해와 번영을 위한 한반도 지역의 비핵화와 같은 평화 가 아닌 자주를 강조하는 체제의 존속과 한반도 지역 내 주한미군 철수 등과 같은 다른 식의 평화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 논문은 「영규사실기」의 내용에 의거하여 그의 생애사와 의병활동 을 확인해보고, 왜 그런 기록이 등장했는지, 불교와 유교측 간에 영규에 대한 시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규사실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는 시점에서 영규가 전란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의병장들의 전투 기록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영규사실기」에서는 영규가 전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나무를 쪼개 무예훈련을 했다던가, 단단한 나무를 발견하면 따로 숨겨두었다는 것은 스스로 미래의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조헌과 고경명 등 호남지역의 의병장을 하게 되는 이들이 갑사로 찾아오는 장면은 이른 시기에 의병모집을 했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영규사실기」에서처럼 사실(史實)이 확인되지 않는 내용으로 영규를 미화하거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 등은 유교 지식인들이 쓴 영규 관련 자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불교 측이 영규를 선양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유교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영규의 의병활동에 따른 계율논쟁을 변증하고, 그의 충절을 부각시켜왔다. 이는 영규의 의병부대가 전란 초기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조선정부의 위기상황을 전환시키는데 기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세기에 「영규사실기」와 같은 문헌이 등장하고, 계룡산에 사우를 세우는 등 영규에 대한 추숭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은 이러한 불교와 유교 간의 누적된 시각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유교 지식인들의 노력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결국 불교 승려로서가 아니라, 왕조를 위해 절명한 의병장으로서의 영규를 추숭하려 했던 그들의 의지가 배경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본 연구는 동북아 문화권에서 문화적 자아개념(관계중심적자아·독립적자아)과 귀인양식(내적·외적)이 연고(緣故; 사적 관계망)현상에 대한 개인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설문조사방법을 사용하여 변인들 간의 관계를 통계적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연구는 문화에 따라 연고의 심리사회적 기능이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개방적 질문을 통해 알아보았다. 서울·경기·부산 지역에 거주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중국인과 한국인 184명을 대상으로, 문화적 자아개념(관계 중심적·독립적), 귀인양식(내적·외적), 공정성 인식(분배·절차·상호작용)에 대하여 설문조사한 결과, 관계중심적 자아개념과 외적귀인양식을 가진 개인들은 독립적 자아개념과 내적귀인양식을 가진 개인들보다 연고에 대한 공정성 인식에서 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심리사회적 기능에서도 차이를 보였는데, 관계 중심적 자아 개념을 가진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은 연고 집단으로부터 도구적·정보적 지지를 기대한 반면에 독립적 자아개념을 가진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정서적 지지를 기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고 압력과 조직 내 개인의 무기력감을 감소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귀인양식 훈련을 비롯한 조직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 개발에 대해 논의하였다.
경주시 사적지, 도시공원지역, 그리고 하천 86개소의 현지조사를 통하여 귀화식물을 조사한 결과 21과 59속 78종 1아종 5변종으로 총 84분류군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사적지는 68분류군, 근린공원 43분류군, 하천 59분류군, 소공원 42분류군 등으로 나타났다. 출현식물 중 널리 분포하나 개체수는 많지 않은 귀화도 3등급 분류군이 31.0%, 널리 분포하고 개체수도 많은 5등급이 29.8%, 국지적으로 분포하고 개체수도 많지 않은 분류군인 2등급이 20.2% 등으로 나타났다. 생태계교란식물은 미국쑥부쟁이, 가시상추, 애기 수영 등 7분류군으로 가시상추는 41.9%로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였고, 미국쑥부쟁이는 34.9%로 하천변에서, 애기수영은 25.6%로 사적지나 소공원 일원에서 빈번하게 출현하였다. 생태계교란식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며, 특히, 정착초기에 물리적 제거나 토양의 대체 등 관리 계획이 필요하다.
이 글은 삼척을 가로지르는 오십천 하구의 남쪽 곶(산)에 입지한 오화리산성의 신라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고자료와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밝히는 작업을 하였다. 고고자료로는 산성에서 수습된 신라토기를 분석하고, 할석 이 피복된 토루 성벽 축조 방식을 찾아 오화리산성을 5~6세기의 신라성으로 추 정하였다. 문헌자료로는 오화리산성 주변에 신라계 지명과 채록 자료를 찾아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논증하였다. 이와 같이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으로 추정되므로, 이 성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실직(주)성[悉直(州)城]으로 볼 수 있으며, 「울진봉평신라비」의 실지도사(悉支道使), 실지군주(悉支軍主)가 주둔하였던 성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이 성의 신라사적 의미는 강 하구의 바닷가 곶(산)에 입지한 점에서 최 근 발견조사된 강릉 경포호 옆 강문동 신라토성과 통하고 있어 신라의 동해안 연 안항해(沿岸航海)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결국 오화리산성 일대는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연안항해를 위한 중간 기항지(중간거점)로 기능하다가, 이후 신라와 고구려가 대립하면서 신라의 방어 거점 기능을 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역사적 기능이 중시되어 통일신라시대 때 오화리산성 일대를 북해(北海) 중사(中 祀) 비례산(非禮山)의 무대로 정하였다고 판단된다.
영국은 2014년 저작재산권 제한의 범주를 확 대하는 7가지 개정법을 시행하였는데 그중 사적 이용을 위한 사적복제의 경우에는 국가별로 조금 씩 그 규정과 함의가 다르다. 이번 개정을 통해 영 국은 독일과 일본에 이어 사적복제의 저작권 침해 여부를 결정할 때 원 저작물의 합법성을 전제하고 사적복제물 이용 범위를 복제 행위자에 한정하며 저작물에 적용된 권리보호기술을 우회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사적복제의 도입과 동시에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사적복제보상금제도를 도입하는 것인데, 사적복제를 가능케 하는 기기나 매체에 보상 금을 부과하여 저작권자에게 돌려주거나 문화 산 업에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은 이번 개정에서 사적복제를 허용하여 저작재산권 예외 사항을 확대하면서 보상금제도의 도입은 하지 않아 유럽 연합 저작권지침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있다. 관련하여 2015년 6월, 영국 고등 법원이 정당한 보상 체계가 없는 사적복제 허용은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며, 그 파장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 라 역시 사적복제를 허용하고 있으나 사적복제보 상금제도 등을 도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사례 에서 고려해야 할 법정 쟁점이 있을 것으로 보인 다. 특히 사적복제 조항에 대해 개정을 고려하며 착안점으로 원 저작물의 합법성에 대한 제한, 사 적복제물의 이용 범위 설정, 원 저작물에 부여되는 보호기술의 우회를 고려하며, 제도적 보완을 위해 사적복제보상금 또한 도입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신라가 최초의 주(州)를 설치한 실직의 고고자료를 검토하고, 실직의 신라사적인 의미를 찾아보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직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수용하여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고고자료부터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실직 지역의 고고자료 가운데 신라산성과 신라고분을 추출하였다. 나아가 이를 토대로 신라사에서 차지하는 실직의 역사적인 역할을 찾아 보았다. 시간적으로는 5~6세기가 중심 시기가 된다. 이 시기는 이전 시기에 비하여 문헌사료가 풍부한 편이고, 동시에 사료 비판을 통해 삼국의 쟁패와 관련한 역사적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 이 때 고고자료가 사료 비판과 역사적 해석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공간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을 기본으로 하였다. 즉 실직의 고고자료는 통일신라시대 삼척군의 군치인 지금의 삼척시와 속현 지역을 포함하여 살펴보 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삼척군의 속현에 지금의 강릉시 옥계면인 우계현이 포함되므로 동해시와 강릉시 옥계면을 실직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연구 범위로 삼았다. 그 결과 실직의 고고학적 양상을 정리하면 신라산성으로는 오십천 하구의 곶 (串)에 위치한 오화리산성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고분문화로는 5세기 3/4분기인 황남대총 남분 단계 직전에 신라문화가 출현하였으며 5세기 4/4분 기~6세기 1/4분기에 고분군이 급증․확산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분군의 입지도 구릉지대와 산의 사면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여 사구지대에 초기 고분이 분포하는 강릉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들 시․공간적인 고고자료와 문헌사료, 역사지리적 자료들을 활용하여 신라의 실직 경영에 대한 신라사적 의미를 찾는 시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오화리 산성의 경우 신라계 지명인 벌 지명이 있고, 건너편인 정라진 일대도 부리(=벌) 지명이 남아 있어 오십천 하구 일대가 신라마을이 형성된 실직의 핵심 지역으로 판단하였다. 나아가 통일신라 중사의 하나인 북해 비례산도 오십천 하구인 정라진 바닷가 일대와 오화리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였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중원(충주)을 거점으로 남한강을 따라 동해안의 강릉이나 삼척을 측방공격하는 고구려군을 막는 방어의 거점성이자 해양의 거점으로 오십천 하구에 있는 오화리산성을 운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인들이 동시대부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일대를 해양의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통일기에도 중사의 사해에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저작권과 명예감정에 관한 인격권은 개인이 언 어와 이미지 등의 매개체를 통해 스스로를 외부적 으로‘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그 권리의 향유와 침 해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공통되며, 여타의 권리보 다 더욱 사적인 권리이다. 그리고 표현물을 변형하 는 과정에서 저작권침해와 명예훼손이 동시에 문 제되기도 한다. 저작권침해와 정보통신망법 상의 명예훼손에 대한 구제 절차는 상당한 유사성을 지 닌다. 특히 권리자의 소명에 따라 즉시 조치가 이루 어진 후, 권리침해자로 주장된 상대방에게 조치를 사후에 통지하는 규정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최소 한의 배려로 두고 있으므로, Notice and Takedown and Notice 구조의 추가 피해 예방절차를 공통적으 로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공공성과 사적 영역의 접점에 있는 표현의 가치를 중시하여 사이버불링 등 사적 권리에 대한 새로운 침해현상을 규율하여야 하겠다.
It is a true fact that the ancient Buddhist temples of Korea were great, important historical influence revealing the transition and developing stages of all the BUddhist temples in Eastern Asia including China and Japan. Before Mahayana arose within India, the monastery and pagoda were united during the conflict and development of the original Buddhism and pagoda faith. With the arising of Mahayana and the introduction of Buddhist statues, the Buddhist temple and pagoda were in conflict and resulted in separation. With the creation and development of the Mahayana Bodhisattva concept, Hinayana and Mahayana started to show doctrine differences and expressed each others' characteristics relevant to the structure of the temple. As a result, the Buddhist Temple having 1 pagoda spread in China together with Hinayana and Mahayana. The Buddhist temple of Hinayana had its temple and pagoda separated and the Buddhist temple that has a pagoda in front was divided into a form of 1 pagoda and 1 main temple. The temple and pagoda for Mahayana in the form of 1 pagoda and 2 temple, where the main statue of the Buddha may be worshipped from both the left and right hand sides, were separated in the form of 1 pagoda and 3 temples to have its original form again. Mahayana was first introduced into Goguryeo through the routes in the northern region and developed from having 1 pagoda and 2 temples, to having 1 pagoda and 3 temples. China was influenced by the southern regions, which is why Abhidharma was introduced into Baekje. Later on, the importance of Bodhisattva increased and the transition speed of the Buddhist temple having 1 pagoda and 3 temples accelerated, as Buddhism became more popular and as Mahayana flourished. The statue of the Buddha on both sides of the pagoda shall gradually move next to the central temple , and the temple shall form large crowds to not only form a tacit boundary with the pagoda but the expansion of Bodhisattva shall also have a wall or a corridor constructed in between the central, left and right hand side temples to form separate areas, and shall have a pagoda built in front of the temples that worship from both sides. In conclusion, independence shall exist among each Bodhisattva within the Buddhist temple, and the status of the pagoda shall fall and appear as the pagoda on both sides in front of the main Buddha statue.
Korean formed the unique culture through the exchanges with the neighboring
civilization with the exclusion, the acceptance in pursuit of change. However, we've
experienced some of distortion. Accordingly, a lot of tradition has lost and foreign
culture t
최술은 이름 없는 선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저술 《수사고신록》은 공자 사적 고증의 압권이다. 정확한 고증을 통해 믿을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최술의 집념과 학구적인 태도는 그를 고증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한 원동력이었으며, 《고신록》과 그 일부인 《수사고신록》은 先秦史와 공자 사적에 얽힌 난제들을 풀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최술은 공자의 사적을 변증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전적의 신뢰도에 천착했다. 그리하여 《사기․공자세가》와 《공자가어》가 공자의 사적을 왜곡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고증을 진행했기 때문에 汗牛充棟의 전적을 枚擧하지 않고서도 綱擧目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술은 《논어》의 編定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張禹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논어》에도 純雜이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밝혔으며, 아울러 공자가 纂輯했다고 일컬어지는 《尙書》․《周易》의 일부분 및 《孝經》과 刪詩說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辨證을 진행했다. 《수사고신록》은 僞書의 牽强附會로 왜곡되고 날조된 성인 공자의 진면목을 복원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有機的인 體例를 활용하여 고증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제 그런 최술의 저술을 바탕으로 중국 고대사와 공자 사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검토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