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친 축성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려의 축성 사업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었는데 1기는 북방개척으로 시작된 청천강과 압록강 유역 진출과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 과정에서 축성이 이루어졌고 윤관이 개척한 9진을 여진에게 반환하기까지 약 200년의 기 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먼저 왕건의 북진 정책에 따라 서경을 서도로 정하여 축성하고 서 경의 주변으로 진성이나 주현성을 배치하는 과정과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과정에서 축 성, 그리고 동여진을 제압하기 위한 천리장성의 축조와 동해연안의 축성, 그리고 9진 개척 으로 요약되는 시기이다. 이것은 태조가 북방개척을 위하여 변경 지역의 요해처에 진성[鎭城]을 설치한 후에 주성 [州城]을 설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의 전 쟁을 치르게 되면서 축조된 성곽들은 대부분 흥화도(영삭진성, 태주성, 신도성, 가주성)·흥 교도(용강현성, 함종현성, 진국성, 안북부성, 진국성, 안정진성, 영청진성, 박주성) ·운중도 (운남현성, 성주성, 연주성, 운주성, 안수진성, 흥덕진성, 위화진) 등의 역로를 따라 위치하고 있어 거란이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노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에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보조에 남은 성곽 축조 기사 중 동일한 성곽을 축조한 기사가 겹치는 것은 지역 의 사정에 따라 주성, 진성 등을 축성하였고 단순히 하나의 성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 것은 조선 전기 지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른 다면 평지성이나 산성으로 나누어 볼 소지도 다분하다고 하겠다. 2기는 금과 100년 간의 평화 시기 다음에 이어진 대몽항쟁기에 축조된 성곽이 축조된 시 기이다. 대몽항쟁은 해도입보와 산성입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해도에 축성한 강화중성과 외성, 진도 용장성, 장도토성 등은 고려의 토성 축조 전통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 다. 아울러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병력으로 장기간 이어지면서 대몽항쟁은 주현성을 중심으 로 치러졌고 이것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몽골 기병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 대산험 지에 위치한 산성[주현성]으로 옮겨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몽항쟁이 주현 성에서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관점이 아닌 것은 주현성과 산성이라는 구분 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 북계와 동계의 방어군성은 대부분 산에 위치하므로 몽 골과의 전장은 처음부터 산성이었던 것이다. 또한 몽골의 침입을 맞아 산성이 대형화되었다 는 것도 고려 주현성의 둘레는 조선 읍성보다는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고 군관민이 함께 입 보하여 항쟁하려 한 전략적 결정에 따라 산성의 둘레도 따라서 커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고 생각된다. 3기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맞아 연해주군의 군현성을 수축하거나 산성을 축조하여 방 어한 시기에 해당되며 대몽항쟁기 이래 전통적인 청야입보책을 시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 려말 산성의 축조는 왜구가 해로를 장악하여 조운선도 약탈하는 지경에 몽골 침입 때와는 달리 해도입보라는 대책은 무용하게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몽항쟁기에 둘레 1,000보 이상의 대형 석축 산성이 아니라 500보 내외의 석축성으로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이것은 대규모로 장기간 고려를 침공하였던 몽골군과는 달리 소규모로 자주 침공하였던 왜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하여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침공이 시작된 경인년(1350)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우왕3년(1377) 에 지방 산성 보수기사가 보이는 것은 그 동안 성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평지 에 위치한 군현성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우왕3년경부터는 산성을 수축하 여 입보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축성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은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경인년 이후 수축이 이루어진 군현성은 대부분 평지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때 수축된 군현성은 조선시대 들어 읍성으 로 편입되면서 읍성의 축조가 고려말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당한 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운용하였던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산석성인데 석축을 강조한 것은 고려시대 토축 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여 석축성으로 축조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산성에 물이 부족하거나 물이 없다고 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장기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왜구의 침 입을 피하기 위하여 급히 축조하였거나 일시적인 입보를 위하여 수축하였다가 조선전기까 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읍석성 중에는 조선시대 들어 축조한 읍성과 고려말에 석축으 로 개축한 이후 읍성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고려의 군현성으로 축조된 것을 조선시대 들어 읍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정에 따라 편입한 것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는 고려때 축조된 읍토성과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축조한 산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러한 상황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군현에 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읍성이 보이지 않거나 산성 또는 고적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어 고려말의 성곽 수축과 조선 개국 이후의 읍성 축조 정책을 반영한 결과로 생각된다.
성주는 신라이래 고려시대까지 군현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피현 (本彼縣, 신라)·신안현(新安縣, 757)·벽진군(碧珍郡, 후삼국)·경산부(京山府, 940)·광 평군(廣平郡, 981)·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 1295)·성주목(星州牧, 1308)·경산부(京 山府, 1310)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1401년(태종 1) 태종의 태실(胎室)이 조성되면서 다시 성주목(星州牧)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몇 차례 현(縣)으로 강격(降格)을 거듭하다가, 1745 년(영조 21)에 다시 성주목으로 환원되었다가 1895년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23부제(府 制)를 실시할 때에 성주군이 되었다. 이후 이웃 지역과 몇자례의 면(面)·리(里)의 행정 분리 조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주는 신라시대 때에는 그만큼의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성주읍 지역에 있던 신안현(新 安縣)은 성산군(星山郡) 소속 4개 영현(領縣)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일대의 지역 중심지는 현 성주읍 지역이 아니라, 옛 성산군의 치소가 있던 낙동강변의 현 경북 고령군 성 산면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경산부와 조선시대 성주목으로 경상도의 상주, 진주 와 함께 3대 목(牧)의 하나로 번영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성주목이 지녔던 지역적 위상은 이 미 고려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성주는 고려시대 이후 한말까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성주 ‘6이(李)’와 함께 성주배씨(裵氏)와 성주도씨(都氏)가 유명하다. 성주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여섯 이씨 가문은 모두 다른 시조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이총언(李悤言)의 등장 이후 성주 지역에서는 이씨 성을 칭한 가문들 사이에 세력 경쟁이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여 겨진다. 이총언(李悤言)·이능일(李能一)·이장경(李長庚)·이조년(李兆年)·이승경(李承 慶)·이승휴(李承休)·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숭인(李崇仁)·배극렴(裵克 廉)·도길부(都吉敷)와 조선시대 인물인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이진상(李震相)· 김창숙(金昌淑)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성주 가암리와 동포리, 봉정리, 어산리, 용봉리 등에서 토기 및 자기산포 지가 지표상 확인되었으며, 성주읍 예산리 동방사지 칠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0호) 과 가천면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 수륜면 백운리 석탑부재, 가천면 창천리 청명사 석불좌 상과 같은 불교 관련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성주 시비실, 예산리와 기성리, 학산리, 대성리 그리고 성산 옥성리 유적에서 이루어졌다.
나한신앙은 나말여초 시기 중국 절강성 천태산에서 유입되어 고려시대 성행한 불교신앙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나한이 천태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나한재 를 통해 祈雨, 國難克服, 長壽 등 현세와 관련 깊은 소원을 빌었다. 고려시대의 나한상은 천태종이 발원한 중국 절강성 지역 나한상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자 세로, 다양한 지물과 함께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동시기 중국의 나한상에선 볼 수 없는 ‘두건’을 쓴 나한도상도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도상은 승가대사상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 으로 생각된다. 이 영향에는 천태종단의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천태종의 본산인 국청사에서는 북송시기 지자대사, 승가대사, 그리고 나한을 함께 모셨다는 기록이 전한다. 관음신행을 중시한 천태종단에서는 관음의 화신인 승가대사를 수용 하였으며, 나한과 관음을 동일시하였기에 세 존상을 함께 모신 것으로 보인다. 국청사를 방 문하였던 고려의 승려들은 두건을 쓴 승가대사와 지자대사를 보았을 것이다. 지자와 승가 모 두 두건을 쓴 신이한 승려이므로, 신이한 승려인 나한에게도 이 이미지가 적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은 중국에서 북송(960~1127)과 남송(1127~1279) 시기에 유행하였던 점다법(點 茶法)에 사용되었던 금속제 다구를 통해 송대의 차문화의 역사적 의미와 고려 차문화를 살 펴본다. 차의 정수는 차 거품이라는 의견은 당대의 육우에 의해 주장된 바 있다. 이 차의 거품을 맛있고 멋있게 만들기 위해 점다문화가 투다문화로 발전한 것은 차의 정치사를 행했던 송대 사회의 문화적 특징으로 이해된다. 일반 백성에서 황제에 까지 공유되었던 점다문화는 차의 질과 다구의 질을 계층에 따라 달랐고 사치가 극성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칠기, 주석, 흑자와 청자 그리고 백자의 도자기, 주석, 금은기 등의 다양한 재질로 다도구가 제작되었고 특히 금은기는 감상수준으로 발전하 는 원동력이 되었다. 금은제 다도구는 송대 이전의 황실의 다도구인 법문사 지궁의 의종의 공양품을 통해 살펴 보았다. 바로 이 법문사의 다구를 통해 차의 포말을 즐기는 점다법으로 이해되는 다문화의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송대의 점다법에 구사된 금속제 다기에 대해서는 그간 연구된 바가 없었다. 이글에서는 금은기로 만든 주자와 잔과 탁의 기형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고찰해 보았다. 13 세기 팽주 교장의 금은기를 통해 두립형의 잔과 끼우게 되어 있는 구조의 탁, 그리고 절견형 의 주자는 다기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송대 점다법을 수용한 고려의 금속제 다구들의 존재를 은숟가락과 미국 보스턴박물관 소 장의 금도은제주자와 승반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 다구들에서 동시대의 국제적 흐름을 타면 서도 고려만의 독자적인 미감이 파악되었다.
등촉구(燈燭具)는 등 또는 초를 사용하여 불을 밝히는 기구이다. 본 논문에서는 고려시대 등촉구의 종류를 크게 등과 초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광명대(光明臺), 초를 사용하는 촛대 [燭臺]와 번(燔)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등(燈)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 인류와 함께 등을 사용하기 위한 등촉구도 발달하였다. 불교에서는 등을 중요한 공양물로 인식 하였는데 지혜의 상징으로 광명을 통해 어리석음의 어둠을 없앨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등공양을 통해 무한한 공덕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성불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 다양한 등촉구가 발견되었고 한대(漢代) 부터 초의 사용이 나타난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등공양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통일신라에 들어서 등촉구를 찾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는 燈具 이외에도 초의 생산이과 함께 촛대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 등촉구를 광명대, 촛대, 번으로 나누어 각 유형을 분류하고 시기별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았다. 광명대는 일반적으로 받침의 모습에 따라 삼족형과 안상형으로 나누고, 특수하게 간주에 쌍사자가 표현된 쌍사자형으로 분류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촛대는 받침의 모습에따라 안상형과 삼단형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번은 초꽂이가 둥근기둥으로 그 안에 초를 세우는 입촉형, 초꽂이가 針으로 나타나 초를 끼우는 삽촉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제작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과 양식의 변천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려시대 등촉구에 나타나는 명문과 동반출토유물을 통해 사찰에서 등공양구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This paper aims at researching on the substantial characters of the memorial address, namely the mookseo-myeongs(墨書銘), written at the members of the wooden buildings in the late period of Goryeo Dynasty and the early period of JoseonDynasty. In this paper, I pursued to declare the systematic origins by the comparison the Buddhist buildings with the other buildings, on the focused the written patterns. Furthermore, I tried to examine the transitional trend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The results are as follow:
First, it is supposed that the mookseo-myeongs of the Buddhist buildings were not used for the a memorial address for the ceremony of putting up the ridge beam, so to speak the sangryang-muns(上樑文), but the prayer address(發願文) to memorize the donations of the believers for the constructions.
Second, it is supposed that ‘the short sangryang-muns’ were originated in the mookseo-myeongs of Buddhist buildings and the other ancient prayer addres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Dynasty, those were established in the formal literary styles.
Third, to the early period of JoseonDynasty, ‘the long sangryang-muns’ were partially used in the several royal palaces. In the late, those were widely used not only in the royal palaces but also in Buddhist buildings, but those literary patterns were rarely changed from the former types.
Sangnyang-mun(上樑文) is not only a memorial address for the ceremony of putting up the ridge beam, namely the sangnyang-ceremony(上樑式) but also the executional record of building construction. This paper aims at researching on the oldest five sangnyang-muns written for the constructions of palaces and government offices in Goryeo Dynasty, especially viewed in the architectural history. The results of that are as follows:
First, it is supposed that sangnyang-mun originated in the ancient Chinese ceremonial songs for the celebration of building construction. Second, as compared against the former times, the sangnyang-muns in Goryeo Dynasty were written to the advanced establishing forms and literary patterns, so to speak, these were the more developed styles. Third, in the 12th century, sangnyang-mun was introduced from Chinese Song to Goryeo. To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sangnyang-mun had been to write for the sangnyang-ceremony as necessary memorial address. Fourth, the writers of five sangnyang-muns in Goryeo Dynasty were the new civil ministers appointed by the soldier rulers. They wrote the contents of their sangnyang-muns, especially focused to the king’s achievements. And in the yugwi-song(六衛頌), they recited six poems in which were complicated the world view and aesthetics of the time.
The color that painted on the ground of Dancheong becomes Gachil(basecoat)-Dancheong and underpainting of Moro-Dancheong or Geum-Dancheong. So, the color of underpainting is the most important element that determines impression of the building. Thus, the architecture after using “Sangrokhadan” has different characters from what it had been. In the existing perception toward the background color of Dancheong, it was considered the characters of Korean Dancheong so-called “Sangrokhadan” that paint vertical elements like columns red and upper part of the columns green. But this study examined the color of Dancheong according to the era and region before and after Goryeo Dynasty era, then it reveals that Sangrokhadan technique was applied from the 14th century in the late Goryeo Dynasty. One of the Goryeo architecture, Geungnakjeon Hall of Bongjeongsa Temple is thought to be a previous style that is not applied “Sangrokhadan” technique because old elements are painted red pigment.
The architectural influence from the Yuan had impact on the Goryeo Dynasty in earnest during Yuan intervention period in the 14th century. The representative examples which were influenced by the Yuan architecture are the Eungjinjeon in Seongbulsa(成佛寺) temple, the ten-story stone pagoda of Gyeoncheonsa(敬天寺) temple site, the Bogwangjeon in Simwonsa(心源寺) temple, the Hoeamsa(檜巖寺) temple and so on. Notwithstanding the changes of relationship between two countries, it can be comprehended that there was a selective acceptance of the Yuan architectural peculiarities in Goryeo Dynasty. It means that the adoption of foreign culture in Korea has not been inevitable from the unilateral demand, but been autonomous by perceiving as the advanced culture. This tendency was maintained even though the government had been changed.
We investigate the records related to the reign style and the calendar day from the epigraphs of the Goryeo dynasty (918 - 1392) in Korea in order to verify and supplement the sexagenary cycle data of the first day in the lunar month of the dynasty. The database of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e Heritage contains a rubbed-copy image, transcription statement, and translation statement for Korean epigraphs as well as 775 epigraphs corresponding to the Goryeo dynasty. The epigraph records are valuable in that, during this time, they were written differently from other historical literature such as the Goryeosa (History of the Goryeo Dynasty), which was compiled in the next dynasty. We find that the Goryeo dynasty, in general, had adopted the reign styles of Chinese dynasties at that time. We also find 159 calendar day records all showing good agreement with the work of Ahn et al. except for dozens of records. Through this study, we can verify the reign styles and the calendar days of the Goryeo dynasty.
려말선초 혼란기에 불교는 타락하고 활발했던 조영의 분위기는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 사찰건축의 명맥을 유지된 몇 가지 중요한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건물짓는 기술자가 바로 승장 대목 자신들이라는 점과 혼란기를 틈타 엄격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스럽게 영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그대로 건물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사찰 전각 측면공포에 대한 등간격배열방식이다.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심도갚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규정짓는 자세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찰되었다.
On the basis of the cookbooks and Data Base of the Korean Classics(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this paper analyzed the fermented soybean listed in the general documents of the Chosun Dynasty(1392~1897) and the Goryeo Dynasty(918~1392). In the Goryeo Dynasty, there are 15 kinds of Jang(soybean paste or solution), among which are Jang (soybean paste fermented by mold)(6 documents), Yeomgjang, Yeomshi(2), and Gaejang(1). However, the cookbook at that time is defunct. The Goryeo Court relieved the famine-stricken people by proving them with Jang. In the Chosun Dynasty, 111 kinds of Jang were listed in the general documents, and 153 kinds in cookbooks. There were 55 kinds of general Jang, such as Jang(204), Yeomjang(63), Chojang, Goojang(7), and Gaejang(6), are listed in the general documents, and in the cookbooks, there are 55 kinds of Jang, such as Sookwhangjang(9 cookbooks), Daemaekjang(8), Myeonjang(8), Saengwhangjang (8), and Yooinjang(8), and among them, 13 kinds belong to the Chinese origin. A total of 9 Kinds of Ganjang(soybean solution fermented by mold), such as Soojang(30), Cheongjang(23), Gamjang(8), and Ganjang(3) are found in the general documents. In the cookbooks, 12 kinds of Jang, as Cheongjang(10), Cheonrijang(4), Ganjang(3), and etc., are listed. There were 9 kinds of Gochoojang(red pepper-soybean paste), such as Chojang(12), Gochojang(3), and etc., are listed in the general documents, and 9 kinds as Gochojang(7), Manchojang(7), rapid Manchojang(4), and etc., are in the cookbooks. In addition, 16 Kinds of Yookjang(fermented soybean-meat paste) as Haejang(15), Hyejang(11), Yookjang(11), and etc., are found in the documents, and 22 kinds as Nanjang(9), Gejang(6), Yookjang(5), Shoigogijang(4), and etc., are in the cookbooks. Eighteen Kinds of Shi(soybean paste fermented by bacteria) as Yeomshi(40), Shi(35), Shijang(6), and etc., are recorded in the documents, and 19 kinds as Jeonkookjang(6), Shi(4), Sooshijang(4), and etc., are in the cookbooks, and among them 11 kinds belong to the Chinese origin. Six kinds of Jipjang(aqueous soybean paste) as Jipjang(7), Uoopjang(4), Pojang (2), Jangzoop(2) are recorded in the documents, and 15 kinds as Jipjang(9), Zoopjeo(7), and Hajeoljipjang(5) are in the cookbooks. Soybean paste, or solution for relieving hunger is not recorded in the documents. However, the Chosun court, for the purpose of relieving famine-stricken people, used general Jang. Such 21 Jang to relieve the famine-stricken people as Pojang(7), rapid Jang(6), and Sasamgilgyeongjang(4) are listed in the cookbook. Geonjang(dried soybean paste), Nanjang (egg-soybean paste), Doojang(soybean paste), Maljang(random soybean paste), Myeonjang(wheate-soybean paste), Sodoojang (red bean-soybean paste), Yookjang(soybean-meat paste) and Jang(soybean paste) are recorded in the documents, as well as in the cookbooks. Chinese-original Jang and Shi are recorded in the cookbooks, with no list in the general documents. Therefore, it seems that it didn't pass down to the general public.
고려후기의 불교계는 귀족 중심의 불교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 중심의 불교운동 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단의 변화 분위기에 따라 불교에 귀의하여 信行 했던 승려들의 출신성분도 다양해져 이전까지 주를 이루었던 귀족 출신 승려보다 는 오히려 민간 출신의 승려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여 불교계를 이 끌어 갔던 승려들은 대부분 당시에 불교계를 풍미하던 禪宗에 속해 있으면서 불 교를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승려들로써는 慧諶 (1178-1234), 天因(1205-1248), 一然(1206-1289), 冲止(1226-1293), 景閑 (1299-1374), 普愚(1301-1382), 惠勤(1320-1376) 등을 예거할 수 있는데, 이들 은 대부분 일반 사대부가문 출신으로 그중에는 儒業에 관심을 가져 儒經을 공부 한 뒤에 과거에 합격했던 경력의 소유자가 있기도 하다. 冲止는 19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29세에 祝髮入山하여 승려의 길로 들어선 인물 이다. 그가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고 문학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승려가 된 뒤에도 속세 문인들의 문학적 聲價에 못지않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어 고려후기 불교문 학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 갔다. 그가 승려로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부단하게 세상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불교가 단순히 내세를 기원하는 비현실적인 종교 가 아니라 부당한 현실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대중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그 들과 함께 하는 현실적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교관을 가지고 있던 충지는 세속을 초탈하여 물욕을 버리고 마음을 문학에 의탁하여 詩 와 더불어 노닌다는 禪的詩觀을 보일 수 있었다고 하겠다. 충지는 운문과 산문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지만 그의 시를 통하여 그의 문학세계는 물론이고, 아 울러 고려후기 불교문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충지가 남긴 한시를 분석해 보 면 승려로서 불교의 교리를 읊은 것보다는 세태인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방 하거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그의 시 에서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과 대중들에 대한 애정은 고려후기 불교문학이 일반 대중들을 교화하고 절망에 빠진 그들을 구제하는 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and historical positioning which the historical architecture will be understood better through collecting results from researches which was done on various points of views and positions. Therefore, a study on the layout of the main palace of Goryeo Dynasty also becomes a prerequisite for understanding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and historical positioning which it possesses. However, the reality is that as the results from the excavation and preceding researches were not integrated together, the understanding of the layout of main palace is remaining on a partial and conceptual level. Therefore, this paper attempted to review in overall the restoration of the layout of the main palace of Goryeo Dynasty using historical documents, precedent researches, excavation maps, topographical map and cadastral maps. Consequently,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e name of some of the ruins and restore the location and layout of other buildings. The result of this research presented above, will become a basis for understanding the layout of the main palace of Goryeo Dynasty in more realistic and way. Furthermore, it could be used as a fundamental data for related research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