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신탁법은 우리 사회가 고령화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됨에 따라 피 상속인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함과 더불어 유연한 재산승계제도를 구축하 기 위하여 구 신탁법에 없던 유언대용신탁을 전격 도입하였다. 신탁법 제59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의 사망 시에 수익자로 지정된 자가 수익권을 취득하는 신탁 또는 위탁자의 사망 이후 에 수익자가 신탁재산으로부터 급부를 받는 신탁을 의미한다. 유언대용신 탁의 도입 이후 관련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필연적으로 유언대 용신탁을 둘러싼 분쟁 또한 증가하는 추세이다. 대법원 2024. 4. 16. 선 고 2022다307294 판결은 이러한 배경에서, ① 유언대용신탁에 있어 수 탁자가 신탁재산에 관한 유일한 수익자가 되는 신탁은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한편, ② 위와 같은 신탁이 설정된 경우 신탁법 제5조 제2항이 규율하고 있는 목적이 위법하거나 불능인 신탁에 해당하여 무효라는 점 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③ 이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위탁자가 사망하기 전 수익자를 위탁자로 지정하여 수탁자로 하여금 신탁재산을 관리 또는 운용하도록 한 부분은 신탁법 제5조 제3항에 따라 유효하게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최초로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다만 잔여재산수익자와 귀속권리자는 엄격히 구별되는 개념이라는 점 을 고려하면 위 판결이 파기환송심에서 추가적으로 심리가 필요한 대상 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귀속권리자만 언급하고 잔여재산수익자를 누락한 점과 신탁행위상 잔여재산수익자나 귀속권리자에 관한 지정이 없는 상황 에서 신탁법 제101조 제2항의 유추적용 가능성을 판단하지 않은 점 등 은 아쉬운 대목이다.
본 논문은 선행논문이 거의 없는 이순신의 정읍현감 시절: 그 행적(行 蹟)과 그 함의를 분석하고자 한 것이다. 주로 북방변방 수비장교로 떠돌 던 그가 유성룡의 천거에 힘입어 전라도 정읍현감에 부임하여 그의 준비 된 능숙한 기량과 역량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현감 재직시 파격적인(7계 급) 승진으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정읍현감 시절은 ①험난했 던 변방수비장교의 안정회복기, ②현감으로서 선정과 탁월한 업무능력 발휘기, ③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의 파격승진기라는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풍전등화의 국가위기인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전라좌수 사로 승진되어 전란에 대비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정 의와 책임감으로 일관된 공직관을 가진 철저히 준비된 능력과 장수의 덕 을 지닌 군인이자, 목민관이자, 인격자였다. 문무겸전한 구국영웅으로 최 후 순간까지 조국에 헌신한 그는 오늘날에도 만인에게 희망·용기·비전을 주며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As a kind of ideology, poetry creation is restrained and influenced by the political thought, philosophy, philosophy, culture and other aspects of the society where the poet lived without exception. These influences are complex and involve multiple aspects. They not only affect the poet's world outlook and life attitude, but also affect his cultural psychology and emotional purport. More importantly, they affect the poet's creation, and the social mindset and aesthetic trend in a specific era. Wang Wei is a man with rich knowledge, twists and turns, and ups and downs in his life. He received orthodox Confucian culture and education since his childhood, and learned Buddhism and paid respect for Buddha when he was young, winning him the title of Poem Buddha. In the second half of his life, his poems gradually began to embody the ideological core of Taoism. Wang Wei was a Confucian, paid respect for Buddha but he was not a monk. He followed the Taoism but he was not a Taoist. By looking at his poems and analyzing them from different themes and creation times, it can be see that when the ideal that he focused on as a “social person” collided with the reality, he dispelled such collision with the “nature” and “original aspiration” of Buddhism and Taoism. From a certain point of view, Wang Wei represented the mainstream cultural spirit of China. He focused on the objects gradually from the outside to the inside, and then completes the process of “introversion transformation” from “social person” to “natural person” and then to self “original aspiration”. This process was also the process of the integration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and the formation of “introversion transformation” culture.
백만장자 가문의 윌리엄 보든(William Whiting Borden, 1887-1913)은 비록 그가 의도한 중국에서의 선교사역을 시작하기 전 소천 하였지만 이상적인 선교사의 한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연구는 예일대 신학도서관의 특별소장자료로 있는 보든의 대학시절 서한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 자료는 그의 인생의 중요한 형성기에 그의 일상적 삶과, 신앙적 사고 및 선교사로서 헌신된 삶을 준비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자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1차 사료가 된다. 보든의 서한들은 또한 당시 학생자원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여파와 그 영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시대를 볼 수 있는 역사적 창구와 같은 이 서한들이 보여주는 바를 통해 그의 삶은 선교역사상 소위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일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의 교차로 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경상우도에 연고를 둔 함인재 정국채는 19세기 전반을 전후로 한 시기를 주요 활동기로 삼았던 노론 계열의 재야 유학자다. 남명학파의 본산 지역에서 자신의 학적⋅이념적 소속을 노론계로 정위시킨 사실도 독특하지만, 정국채의 경우 정주학과 농학 및 예학 등과 같이 제 범주를 아우르는 학문세계를 개척한 정황 또한 매우 이채롭게 여겨진다. 그러나 정국채가 남긴 문집인 『함인 재유고』가 학계의 공적 담론의 장에 접속되지 않은 채 사실상 미공개의 상태를 유지해 왔던 까닭에,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금번 논의에서는 정국채가 향유한 생애의 연대기적 추이를 추적해서 개괄해 보임과 동시에, 특히 그의 학문세계 형성에 관여하였던 두 스승인 성담 송환기와 경호 이의조 간에 교차된 학문적 영향력의 문제를 논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간 축적된 가학의 토대 하에, 42세에 대면한 송환기의 문하에서 정국채는 정주학 전반에 걸쳐서 질적으로 도약하는 심화 학습의 계기를 맞이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송환기의 5대조인 송시열이 수립한 우암학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국면으로 이행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한편 이의조와의 대면을 통해서 정국채는 그의 학자적 정체성을 예학자로 정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정국채는 지리한 『가례증해』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사례촬요』를 저술하기도 했으나, 이의조에게 전한 서신들은 예학이 형성된 연원의 일단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송환기가 매개가 되어 우암학의 계승자로 나선 정국채는 『송자대전』과 송시열의 「연보」를 숙독하는 한편, 주변의 동문들에게 우암의 저술을 필독 할 것을 적극 권유하는 열의를 발휘하기도 했다. 송시열 이상으로 『주자대전』을 예찬하곤 했던 정국채는 성주에 건립된 노강서원의 사액 문제에도 큰 관심을 표했는데, 이 또한 우암학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노론계의 도통 계보를 중시한 결과였다. 송환기 사후에 스승을 노강서원에 추배하기 위해 노력하고, 문집 간행을 위해 주도적인 희생을 기울였던 정황 또한 우암학을 적극 계승하려는 의지와 필적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칼 라이헬트는 노르웨이 출신 중국선교사로서 중국 불교승려들에 대한 초점을 맞추어 사역한 선교사로서 그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 선교역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승려들의 복음화를 위해 그들과 동일화하는 과감한 상황화 입장을 펼쳤으므로 선교부의 오해와 불신으로 추방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성취론(Fulfillment Theory)적 입장에서 불교철학과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다. 하남성에서 홍콩으로 선교지를 옮긴 후 도풍산에 불교양식의 선교센터를 건립하고 찾아오는 불교승려들과 도교인들에게 함께 기숙하며 토론하면서 복음을 가르쳤으며, 270여명의 불교승려들과 다수의 도교인들을 개종시켰다. 또한 루터교 연합신학교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배출시켰으며, 중국어 성경주석발간 등 교육사업과 출판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당대 선교부로부터의 냉대와 추방에도 불구하고 일생에 걸친 불교의 지도자들을 향한 사랑과 전도행로는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재평가되고 연구되어야할 가치가 있다. 본 연구를 위해 칼 라이헬트의 저서와 그에 관한 저널들, 성취론에 대한 견해들과 라이헬트의 입장, 도풍산 현장의 증거 등을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본 연구는 일본에서는 높게 평가되는 인물이지만 Hamel에 이어 한국을 서양에 알린 두 번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지도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Siebold의 일생과 업적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특히 의사인 동시에 지도학자 혹은 지역연구가로서의 Siebold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의 출생부터 학창시절의 자료를 검토함으로써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Siebold는 의사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다방면에 걸쳐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노력하여 의학자․식물학자․지도학자․지역학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재작성한 「일본변계약도」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령으로표시하였고, 「朝鮮全圖」는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가 16세기 경 일본으로 전달되어 1785년 하야시[林]에 의해 모사된 된 것이 일본 국내에 유포된 타미야[田宮]의 「朝鮮八道之圖」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Siebold가 제작한 「일본지도」는 유럽 지도에울릉도와 독도를 혼동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16세기 메노나이트 지도자였던 더크 필립스의 사상을 밝히고 그의 중심 사상을 논의함으로 그의 기독론이 보이는 교회에 관한 관점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먼저 더크 필립스의 생애를 간략하게 다룰 것인데 이를 통해 그의 신학의 형성과정과 그의 사역 환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더크는 동시대의 다른 종교개혁 지도자들과 달리 매우 독특한 기독론 (호프만의 ‘천상의 육체론’을 기본으로 한)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기독론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더크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도 그의 기독론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핵심 신학으로 여겨져 왔으며 실제로 더크의 저작의 분량에서도 기독론의 비중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그의 기독론이 그의 보이는 교회의 관점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히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기독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더크의 기독론 안에 성육신의 논의가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는 성육신의 교리는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며 성육신은 인간의 그리스도 안에 거룩한 본성을 갖도록 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본고는 林養正(1716-1777)의 문집인 『수분와집』을 텍스트로 하여, 그의 생애와 가학을 계승하고 실천한 양상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守分窩集』은 별도의 목차 없이 그의 지향을 밝힌 문장인 「守分窩 序」와 관련 기록 부분, 시편과 간찰을 모아놓은 부분, 家狀 관련 부분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양정은 남명학파의 학자였던 임진부(1586-1658)의 후손으로, 三嘉 지역의 학풍을 이끌어나가는 지역 명문가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조부를 여의었으나 평생 충과 효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고, 가학 을 잇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받아들였다. 이는 성현이 남긴 文義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이를 후학에게 자신이 터득한 문의를 정확히 전수 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아울러 가학의 전수는 임진부의『禮略』을 실천하여 誠禮의 정신을 체득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이를 실질적으로 적용시켜 선조의 가훈을 誠孝와 公正이라는 정신으로 확립시켰다. 임양정의『수분와집』은 남명학파의 한 지파인 임곡 임진부의 후손이 향촌의 명문가로 자리 잡으면서 선조의 가훈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시켰고 윤리규범으로 작용하였는가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 경상우도 宜寧에 살았던 송파 강우영의 생애와 시세계를 고찰한 글이다. 송파는 忠孝로 이름나고 南冥學派를 연원으로 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치적으로 남명학파가 몰락함으로써 張福樞와 金道和를 스승으로 섬겨 남인계열이 되었고, 張錫贇・ 張升澤・田珪鎭・安鼎漢 등과 당색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만년인 60세 무렵에 鳳里精舍를 지어 考槃亭 등의 이름을 붙이고 隱居自靖하였다. 송파의 은거는 19세기 후반 대내외적으로 혼란을 겪다가 일제치하로 변한 시대에 대한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송파는 시를 통해 드러내었다.
송파는 101題에 112수의 시를 남겼는데, 시세계는 크게 세 가지 양상을 띤다. 첫째, 松節 지향은 복잡다단한 世事와 일제치하라는 시대현실의 파고를 넘기 위한 修身의 표상을 소나무로 설정하고, 根固・晩翠・直幹 등의 소나무 본질을 자신이 지향하는 덕목으로 표현한 것이다. 둘째, 隱居求道의 志趣는 격동하는 시대현실에 대해 鳳里精舍를 지어 隱居自靖으로 대응하면서, 持敬工夫를 통한 心수양 등의 道學추구를 표출한 것이다. 셋째, 報本追遠의 정성은 충효가문의 후손으로서 선조에 대한 추모를 다짐하며 정려 도모, 비석 설립, 묘지명 찬술, 제각 수리 등의 사업을 실천하여 선조의 미덕을 현창한 것이다. 이러한 송파의 모습은 19세기 후반 의령지역 士人들의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의 일면을 견지한 것이라 하겠다.
蒼崖 許萬璞(1866~1917)은 진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말의 유학자 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잠시 武人으로 살았으나, 외세의 침략과 문란한 정치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관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인 진주 지 수 승산마을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經史를 탐구하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도학을 강론하였다. 본고 는 그 동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진주 지역의 한말 유학자 창애 허만박을 주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허만박의 문집을 토대로 그의 삶을 보다 세밀하게 추적해보고 그 자취를 담고 있는 한시를 검토 분석 하여 그의 내면의식을 따라가 보고자 했다. 52세의 나이로 비교적 짧은 생을 살다간 허만박은 선조들의 행적이 그러하듯 젊어서부터 은거 지 향적 면모를 보이다가 무과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해 서울 생활을 시작했 다. 그러나 서울에서 보고 겪은 외세의 침략과 국가적 위기에 그는 절망 하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승산 마을의 염창강 가에 은둔하면서 도학의 근본 탐구에 골몰하며 절의를 실천하고자 하 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인해 스승 송병선을 잃은 허만박은 이후 송병순과 최익현, 전우를 차례로 스승으로 모시며 도학을 강론하 고 자제와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 시절 그는 상소문과 편지 또는 제문에서 혼란하고 무력한 정치 현실과 일본의 침략에 대해 비분강개 하며 통탄과 憂國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거듭되는 집안의 불행으로 위축된 모습과 하루하루 견디는 심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삶의 이력으로 볼 때 그는 폭넓은 교유 관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웠 던 것으로 보인다. 허만박은 자신이 살았던 智水 勝山 마을의 山水를 대상으로 삼아 시를 많이 지었다. 더불어 인근 주변 지역의 승경이나 또는 자연 속의 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도 시적 감수성을 발휘해 시를 짓는 계기로 삼았다. 물론 한시에 묘사된 산수 자연은 허만박의 삶의 흐름과 그에 따른 정서가 스며들면서 시기에 따라 다른 느낌과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허만박은 자신의 삶 대부분을 아름다운 고향의 산수에서 은둔하 며 조용하게 보냈지만, 당시 나라의 형세가 혼란하고 위급했던 만큼 그에 대한 심정과 감성도 시의 소재나 때에 따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10년을 전후해 지은 시에서는 나라 잃은 분노와 비통함의 시적 정서 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으며, 더불어 체념과 자조적 한탄도 뒤섞여 표출 되었다. 또 현실과 차단한 채 은거의 즐거움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의식도 담아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재현은 1883년에 울릉도에 입도하여 일제강점기까지 울릉도에 거주한 인물로 그의 손자가 독도의용수비대장으로 알려진 홍순칠이다. 홍순칠은 조부가 1898년 일본 시마네 현에 건너가 독도에서 일본인의 불법 강치잡이에 대해 항의를 하여 일찌감치 독도를 수호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 1898년에 일본 시마네 현에서 가타오카(片岡) 형제와 찍은 사진을 제시했다. 일본 시마네 현의 죽도문제연구소가 펴낸 『제3기 「죽도문제에 관한 조사 연구」최종보고서에는 이시바시 도모키(石橋 智紀)가 「메이지30년대 초 시마네현을 방문한 울릉도민과 홍재현의 허실(明治30年代初頭に島根県を訪れた鬱陵島民と洪在現の虚実)」 이라는 논문에서 위의 홍재현의 활동상은 거짓이며 그는 울릉도에서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 었다고 밝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1947년에 독도와 관련한 홍재현의 진술서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덮기 위해 위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는 이와 같은 이시바시의 연구를 재검토함과 아울러 그동안 주목되지 않은 홍순칠과 그의 처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자료를 중심으로 홍재현의 행적을 재검토한 것이다. 연구결과, 홍재현은 1896년에 울릉도에 입도한 가타오카 요시베(片岡吉兵衛)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울릉도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화를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다. 그 과정에서 1898년 일본 시마네 현에 있는 가타오카 요시베 자택을 방문하여 그의 형제로부터 환대를 받고 방문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실은 문제의 사진이 보관된 상자 뚜껑의 안쪽에 적혀있다. 따라서 1898년에 홍재현이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은 가타오 카와의 친분관계를 나타내는 사진이지 그의 독도수호활동을 증명하는 사진은 아니다. 아울 러 일제강점기에 홍재현은 일제 식민통치협력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울릉도의 조선인과는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시바시의 주장처럼 1947년에 이루어진 그의 독도관련 진술서가 그의 친일행 위를 은폐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진술서는 당시 남조선과도정부 및 조선 산악회의 활동 과정에서 울릉도 현지조사를 통해 채록된 산물이며 1898년의 渡日에 대해 서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홍재현의 1898년의 독도 관련 활동상이 허구였다고 해서 1947년의 홍재현의 진술서를 거짓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淸州韓氏는 高麗 중기 이후로 名公巨卿과 文人學者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는 혁혁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朝鮮朝에 들어와 더욱 번창하였고, 成宗 때 韓繼禧의 대에 이르러 번창함이 절정에 이르렀다.그 손자 韓承利가 晋州에 은거한 이후로는 中央官界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줄어 자연히 高官大爵으로의 진출은 어렵게 되고, 중앙의 名閥家와의 聯婚이 어렵게 되자, 결국 진주를 중심으로 한 地域士族階級으로 변화하였다. 또 진주의 지역사족으로 변화한 이후로는 주로 武科를 통한 仕宦으로 家聲을 지속해 나갔다. 그런 인물 가운데 조선 肅宗 英祖 때 활약한 兵使 韓範錫과 그의 후손들이 대표적이다.그러나 韓範錫 家門의 무과 출신들은 단순히 武藝만 아는 무인이 아니고, 儒學的 素養을 겸비한 무인으로서 문무를 겸전했고, 江右地域의 儒所에도 참여하는 가문이 되었다.특히 韓範錫의 후손 가운데는 11명의 武科出身과 14명의 仕宦者, 3명의 문집 저자를 배출함으로써 강우지역의 명가의 위상을 유지해 나갔다. 한범석은 무과를 통해서 사환하여 50년 동안 仕籍에 있으면서 英祖의 특별한 知遇를 입어 6도 병사, 7개 고을원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특히 국가 민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들을 어루만지는 使命感이 투철하였다. 兵使 등 軍職을 맡아서는 성을 쌓고 무기를 정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고을원을 맡아서는 백성들의 고통상을 이해하고 이를 제거하고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흉년에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그는 무예에 정통한 무인이면서 아울러 모범적인 牧民官이었다.또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中國과 日本의 使行에 참여하였고, 그 사행의 활동상과 노정을 狀啓와 日記로 남겼다는 것이 다른 무인에게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일이다. 한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일본에 간 경우도 극히 드물어 그 일기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두 나라의 문화에 대한 감각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그는 전일에 많은 治績을 쌓은 高官이라 하여 鄕村에서 武斷을 일삼는 일은 전혀 없었고, 鄕村의 父老들과 동등한 친구로서 어울려 담소하는 소박한 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이런 지극히 평등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碧珍 李氏 가운데 密陽 來進 門中의 경우 조선 중기 이후 후기에 들어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대에 걸쳐 문집이 이어져 나오고 벼슬도 이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중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중간에 東巖 李而樟과 松岡 李命徵 부자의 효우 돈목의 정신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동암은 아버지 秉節公 李繼胤으로부터 ��小學��의 실천궁행의 정신을 받아 위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五友堂을 지어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자질의 교육에 힘썼다. 그 결과 중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재자들과 교유를 확대하는 등 도약의 단계에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함께 서울에 머물던 셋째 아우 李而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세상에 나아가는 일을 단념하였지만 그 후유증으로 일년 만에 자신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동암의 시는 그의 생애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동암은 그리 많은 시를 남기지는 않았고, 시도 輓詞가 위주이지만 시작품들은 비교적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만시는 여러 작품들이 거의 일관되게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어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抒情詩와 交遊詩는 그리 많지 않으나, 시 속에 절제된 감정이 잘 스며들어 있다. 송강은 아버지 동암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많지 않은 나이에 조부모와 어머니, 그리고 여러 명의 삼촌을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처자와 형제를 돌보아야 하는 막중한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간에 환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효우와 돈목을 매우 중시하여 一家契를 조직하였으며, 12說을 지어 유자로서의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였다.송강의 시도 그의 생애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의 시는 아버지의 것에 비해 양적으로 많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아버지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는 벗과 주고받으며 우의를 다진 交友詩, 자신과 동갑인 숙부와 벗처럼 주고받은 唱酬詩, 고향의 산천에 대한 자부를 드러내거나, 특히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思鄕詩 등등의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이들에 대한 연구는 동암과 송강 부자 각각의 삶과 사상을 살피고 시를 통하여 이를 확인하는 것 이외에 벽진 이씨 내진문중이 흥왕하게 한 원천이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조선 중기에 살다간 藍溪 表沿沫(1449, 세종31-1498, 연산군4)의 작품에 나타난 그의 학문자세와 사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藍溪는 일찍 부모를 여의어 유년기의 그의 삶은 그다지 호화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스승과 좋은 벗들을 만났다. 특히 그가 태어나 24살 2월까지 살았던 咸陽은 그의 꿈과 희망이 깃든 곳이었다.
남계는 우리나라에서 한창 성리학이 성장할 때 살다간 사람이다. 그의 스승은 점필재였고, 서거정은 그의 座主였다.그가 깊이 사귄 친구들은 대부분 점필재의 제자이면서 그와는 동문관계인 사람들이었다. 그 외 그가 관직 생활을 하면서 사귄 친구들도 있다
寒暄堂과 一蠹가 도학면에만 뛰어났다면, 藍溪는 道學과 文章 두 가지에서 뛰어났다. 그의 「謹次朱子感興」시 20수는 그가 주자학을 구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을 입증한다.
藍溪는 道學과 文章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남계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中庸』에 나오는 ‘尊德性 道問學’이라는 말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다루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서서히 싹이 트기 시작한 新儒學, 즉 性理學을 보다 깊이 체득하였고, 작품을 통하여 이론화 한 先驅者였다.
實踐 倫理面에서 보면, 藍溪는 春秋史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그의 의식 속에는 正名思想이 녹아 있다.
그는 자신의 心性修養, 즉 存心養性을 통하여 도학을 실천하였다. 그는 明道學, 闢異端의 이론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려 하였다. 그는 현실에 대해 憂患意識이 있었다. 그는 고고한 선비로서 王道政治 통한 道德的 理想主義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뒤의 靜菴 趙光祖의 이상과도 통한다. 그의 삶과 정신이 繼往聖 開來學이라는 말을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그 意義를 지닌다.
It is appatent that Kyung-Chik Han was an eunormously influential perso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especially in the era since 1945. Nevertheless, historical studies on his life and thoughts hame not been as vigorous as those of Park Hyeongryong, Kim Jaejun and Han Sangdong who lived contemporaneously as Han. Historians have paid a little attention to Han in a sense that he preferred a life as pastor rather than as a professor, school founder, or a social reformer. Han lived through the turbulent times of the Greater Korean Empire, the Japanese colonization,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ance in Korea, and the Korean Government thereafter. Encountering the national turmoil of Korea, he lived to fulfill the calling given by God. Although Han was not born into a Christian home, he attended Sunday school and grew up learning theology taught by the church. He was truly a pioneer in leading the first generation of Christian education in Korea. Through the teachings of the Christian patriots, Han was able to learn not only theology but patriotism; the love for his country. Passion for evangelism was also instilled in him by the missionaries in Korea. The warm welcome and the sharing of Jesus’ love by Christians in the U.S. lead a young foreign student, who had lost a country, to encounter the saving love of God during the most devastating time in his life to devoting his life to God. Upon his return to Korea, he did not stop proclaiming the love for Jesus, the love neighbors, and the love for one’s nation even though he was under severe surveillance of the Japanese government. Moreover, he lived his live an he proclaimed. He believed that transformation of the mind could pave a way to a solid nation and this transformation can only be achieved by the Christian belief. Hence, he poured all his energy into evangelism. During his ministry at Youngnak Presbyterian Church, Han triggered movements for the national evangelism and the spiritual transformation. He also participated in various evangelization movements in Asia and in the world as a representative of Korea. Although he kept his distance from the communists’ government of North Korea, he continued to send rice of love to aid the North Koreans from malnutrition. His ministry drew the attention of religious societies in the world and he was awarded the Templeton Prize. Kyung-Chik Han indeed is the only Korean religious leader whom the world respectively acknowledged.
This paper aims at the research on the theological change of the radical Pietist Gottfried Arnold. It is well-known, that it is discussed in Arnold’s research, whether there has been a change in Arnold’s theological views in the course of his life. In his largest work Unparteyische Kirchen-und Ketzer-historie [i.e. Impartial History of the Church and of Heresy] (Frankfurt, 1699-1700), Arnold showed very sympathy towards heresy than towards any established Church, or especially the clergy. He thought that the worst calamity in Church history was its establishment as the accepted and orthodox faith by the Roman Emperor Constantine in the fourth century. Arnold evinced a remarkable sympathy for a huge variety of “heretics.” Absolutely he was the radical representatives of Pietism. However, Arnold had become a moderate Pietist from the radical representatives of Pietism after his marriage (1701) and his acceptance of a regular pastoral position (1702). He produced a number of noteworthy works on practical theology. The primary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why Arnold married and took over the church office. This study mainly utilizes Arnold’s writings in 1700-1701 as primary sources.
文益成은 1526년에 태어나 1584년 肅川都護府使로 재직 중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문집인 옥동집은 전란으로 잃어버리고 남은 詩文 들을 모은 것으로 그 분량이 매우 적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본고는 특히 관직 생활과 연관된 시를 중심으로, 그 삶의 과정들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승문원과 사섬시에 근무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禁中題立春」과 「題 司贍寺契軸贈同僚」에서는 관직 생활의 희망, 임금을 송축하는 마음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洪原縣樓贈別朴公鳴渭」 「次端川上房韻」에서는 향수와 함께 약간 울적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澤稚」라는 작품을 들고, 그것이 울산군수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즈음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매우 위험한 추정이지만, 관련 자료가 소략한 상황에서 조금 과감한 상상을 해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숙천도호부사 시절에 지은 「聞雁 有感」은 아마 문익성이 남긴 마직막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벼슬에서 완전 히 물러나 여생을 마무리할 뜻을 굳힌 상태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평안도 숙천 에 부임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이 시에서는 나 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인생의 종착점을 목전에 둔 비장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