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이 공존하고 있는 서울 호암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살리 고 더욱 많은 시민이 찾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향후 정비 방향과 활용 방 안을 모색해 본 것이다. 우선, 정비 방향으로는 우선 성곽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통한 현황 자료 확보와 성벽과 문지에 대한 학술발굴조사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호암산성 역사문화길 조성 및 정비에 관한 의견과 함께 QR코드를 넣은 안내판 설치를 통해 현장에서도 유적에 대한 정 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호암산성 아래로 지나가는 현재의 서울 둘레길 외에 호암산성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둘레길 코스 개발이 필요함을 언급 하였다. 그리고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제2우물지 및 주변 건물지에 대한 정비 복 원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녹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한우물에 대해서도 재정비가 필요하며, 호암산성에 상징적인 사인물을 설치함으로써 포토 스팟을 조성하는 방안을 제안 하였다. 그리고 활용 방안으로는 산성의 접근성 강화를 위한 주차장 마련, 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발굴조사 성과 등을 알리고 탐방객의 편의를 위한 방문자센터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청사초롱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외부 연결통로의 환경 개선과 함께 호암산성을 알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것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금천구 교육나눔협동조합에서 시행하였거 나 시행하고 있는 우리고장 국가유산 활용사업 활성화 및 지역문화유산교육 활성화 사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암산성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 에 호암산성과 관련된 여러 스토리텔링 개발이 필요하며, 홍보 및 탐방객 만족도 향상을 위 한 문화유산 전문해설사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그동안 통일신라시기의 산성은 성벽이나 문지, 집수시설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 다. 그 결과 성벽의 축조기법이나 조성 시기, 구조 등에 대해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성의 주체인 인간의 숙식 등과 관련된 건물지의 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산성 내 건물지는 대체로 기단석을 갖추고 있으나 동 시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구식기단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요 난방 시설인 쪽구들 의 경우도 초석 건물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된 광 양 마로산성의 경우 성주나 하급 관리,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난방시설이 턱 없이 부족함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전술한 기단석의 위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광양 마로산성은 치소성이나 거점성으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그러나 성주나 관리, 병사들이 상주하기 위한 온돌 건물지와 성주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물지의 기단석 등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산성 내 건물지가 일상생활을 영 위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산성 외부의 건물지 조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거제 옥산성은 문헌 기록에는 조선 말 거제부의 산성으로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발 굴조사 결과 신라 때 이미 축조되어 대체로 고려 시대까지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조 사에서 나타난 산성의 하부 구조는 전형적인 신라 산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다음 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옥산성은 7세기에 신라가 거제도를 직접 지배하고 또 이를 통 해 거제도 서쪽 방면에서 백제와 왜의 연결을 방지하기 위해 축조한 산성이다. 2) 문무왕 때 거제도에 군을 설치하면서 이 성은 상군 매진이현(경덕왕 때 거제군 명진현으로 개명)으로 편제되었다. 옥산성은 통일 신라 시대를 지나 고려 중기까지도 명진현의 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3) 조선 후기 거제현의 치소가 마침내 옛 명진현 인근에 정해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는 읍성을 축조하지 않았고, 조선 말 인근 고성을 수축하여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전통 시대 산성을 축조한 거의 마지막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거제도의 다른 신 라 유적과 함께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초기 왕도(王都)인 졸본의 오녀산성은 평지에 있는 중국의 도성(방어성이자 도읍 성)과는 달리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산성을 방어성이자 치소성으로 삼아서 중 국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효율성을 증명하며 국세를 펼쳐 나갔다. 고구려 왕도 연구는 일본 인 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주로 많이 하였는데 그들의 연구는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14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그의 논문에서 고구려 도성은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의 세트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 설은 한국과 일본과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10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통설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근 래에 여러 한국의 신진 학자들에 의하여 세키노 다다시의 고구려 왕성의 평지성-산성 세트 론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여러 번 나왔다. 양시은(2021)은 이러한 도식화된 이론의 시작과 정착과정 및 어떻게 일본, 중국, 한국의 학자들이 이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는지를 체계적으 로 토의한 뒤,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이론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 시민을 위한 한국사 서술이나 다른 학술 논문에서는 이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 이론이 보편화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고구려의 왕도는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가 아니고, 산 성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산성을 위주로 하여 외부 침략을 방어하고 나라를 경영하였다는 것 을 다음 다섯가지 고구려 왕도의 특징을 들어 검토하고자 하였다.(1)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산성이 주로 제1차적인 왕도이었다.(2) 고구려에서 왕도로서의 산성은 토속신앙 적 성지聖地이자 성전聖殿이었다.(3)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성(木柵城)과 비교해 보 면 한 부족이 대체로 목책으로 요새화된 성 하나를 방어성이자 거주성으로 하고 나머지 인구 는 목책성 주위에 방어벽이 없는 마을에 흩어져 살다가 위험시(외부 침략이 있을 때) 목책 요 새지에 들어가 함께 농성하였다.(4) 고구려의 외국침략자에 대한 방어 전술이 청야입보淸野 入保-게릴라전술이었는데 이러한 전술에는 산성이 평지성보다 더 큰 이점이 있었다.(5) 근 래 많은 고고학적 산성의 발굴 결과는 고구려의 산성-평지성 세트 방위체제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졸본에는 아예 평지 왕성이 없었고, 그 다음 고구려의 수도 두 곳(집안, 평양) 모두 왕 도가 산성에 위치해 있다가 힘이 축적되고 필요를 느꼈을 때 평지성을 쌓아 왕도의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산성이 곧 방어성이자 치소성(도성)의 역할을 하였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이란 세트이론은 받아 드릴 수 없 다. 여기에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방어성과 고구려 산성의 비교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산성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약 55,780㎡, 둘레 는 약 2,000m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테뫼식 산성으로 알려져 있고 1963년에 사적으로 지 정되었다가 1966년 12월에 사적 해제되어 현재는 공군 00부대 대공방위를 위한 군사시설 이 위치하고 있다. 성산성에 대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있었지만, 그 성격과 축조시기 등 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고지도와 고문헌에 따르면, 성산성은 산성이 아닌 봉수가 있는 것으로 표기된 자료는 다 수가 존재한다. 성산성은 최소한 조선시대에는 그 존재적 가치가 없는 상태이거나, 그 존재 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여 활용가치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668년 경산(지 금의 성산)에 관련된 사찬지인 경산지에 의하면, 성산봉수대 꼭대기에 옛 성터와 절터가 남아 있으며, 저수지도 있다고 기록한 것이 유일하다. 성산성에 대한 조사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1917년 일제강점기 일본학자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사적 제91호로 지정될 당시인 1963년의 조사내용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명 확한 내용은 파악되지 않으며, 1966년 지정해제 당시의 문화재위원회의 실태조사 내용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2008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부분적으로 시ㆍ발굴조사 등이 이루어져 성주 성산 성의 체성 일부 등이 조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사를 담당한 연구조사기관에서 성주 성 산성의 체성 둘레를 추정하여 제시한 바 있다. 여러 문화재 전문조사기관에서 시행한 지표조사 결과 추정한 성산성의 평면은 부정형의 다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산성 특히 치소성(治所城)의 평면 형태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성산성은 군부대가 이미 오랜 기간 주둔하여 상당한 지형 훼손이 이루어져 축조 당시의 둘레와 진행 방향을 추정하기가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그리고 각종 지표조사와 각종 시(발)굴조사에서 상당한 양의 기와편과 도기편, 일부 청자편 도 수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최근의 조사에서는 건물지와 함께 막새기와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상황을 볼 때 성산성이 치소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치소성이 산 위에 있는지 또는 산 아래에 있는지에 대하여 이미 상당한 논쟁이 있지만 고려시대 전체를 일괄하여 단정 짓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성주 성산성 정밀지표조사를 통하여 획득한 성과는 체성부 의 윤곽선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성산성의 정체성을 추정할만한 근거가 되는 문지, 건물지, 연지 등과 함께 봉수대의 위치를 함께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의 성산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현지 여건상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 지만 금번 연구에서 성산성에 관련한 현존하는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 분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고문헌, 고지도를 한 자리에 정리하여 자료화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앞으로 성산성에 관련된 자료가 더 확보되고 연구가 지속되길 기대하면서 이러한 연구에 조 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내용이었길 바란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친 축성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려의 축성 사업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었는데 1기는 북방개척으로 시작된 청천강과 압록강 유역 진출과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 과정에서 축성이 이루어졌고 윤관이 개척한 9진을 여진에게 반환하기까지 약 200년의 기 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먼저 왕건의 북진 정책에 따라 서경을 서도로 정하여 축성하고 서 경의 주변으로 진성이나 주현성을 배치하는 과정과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과정에서 축 성, 그리고 동여진을 제압하기 위한 천리장성의 축조와 동해연안의 축성, 그리고 9진 개척 으로 요약되는 시기이다. 이것은 태조가 북방개척을 위하여 변경 지역의 요해처에 진성[鎭城]을 설치한 후에 주성 [州城]을 설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의 전 쟁을 치르게 되면서 축조된 성곽들은 대부분 흥화도(영삭진성, 태주성, 신도성, 가주성)·흥 교도(용강현성, 함종현성, 진국성, 안북부성, 진국성, 안정진성, 영청진성, 박주성) ·운중도 (운남현성, 성주성, 연주성, 운주성, 안수진성, 흥덕진성, 위화진) 등의 역로를 따라 위치하고 있어 거란이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노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에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보조에 남은 성곽 축조 기사 중 동일한 성곽을 축조한 기사가 겹치는 것은 지역 의 사정에 따라 주성, 진성 등을 축성하였고 단순히 하나의 성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 것은 조선 전기 지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른 다면 평지성이나 산성으로 나누어 볼 소지도 다분하다고 하겠다. 2기는 금과 100년 간의 평화 시기 다음에 이어진 대몽항쟁기에 축조된 성곽이 축조된 시 기이다. 대몽항쟁은 해도입보와 산성입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해도에 축성한 강화중성과 외성, 진도 용장성, 장도토성 등은 고려의 토성 축조 전통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 다. 아울러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병력으로 장기간 이어지면서 대몽항쟁은 주현성을 중심으 로 치러졌고 이것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몽골 기병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 대산험 지에 위치한 산성[주현성]으로 옮겨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몽항쟁이 주현 성에서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관점이 아닌 것은 주현성과 산성이라는 구분 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 북계와 동계의 방어군성은 대부분 산에 위치하므로 몽 골과의 전장은 처음부터 산성이었던 것이다. 또한 몽골의 침입을 맞아 산성이 대형화되었다 는 것도 고려 주현성의 둘레는 조선 읍성보다는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고 군관민이 함께 입 보하여 항쟁하려 한 전략적 결정에 따라 산성의 둘레도 따라서 커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고 생각된다. 3기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맞아 연해주군의 군현성을 수축하거나 산성을 축조하여 방 어한 시기에 해당되며 대몽항쟁기 이래 전통적인 청야입보책을 시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 려말 산성의 축조는 왜구가 해로를 장악하여 조운선도 약탈하는 지경에 몽골 침입 때와는 달리 해도입보라는 대책은 무용하게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몽항쟁기에 둘레 1,000보 이상의 대형 석축 산성이 아니라 500보 내외의 석축성으로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이것은 대규모로 장기간 고려를 침공하였던 몽골군과는 달리 소규모로 자주 침공하였던 왜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하여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침공이 시작된 경인년(1350)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우왕3년(1377) 에 지방 산성 보수기사가 보이는 것은 그 동안 성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평지 에 위치한 군현성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우왕3년경부터는 산성을 수축하 여 입보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축성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은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경인년 이후 수축이 이루어진 군현성은 대부분 평지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때 수축된 군현성은 조선시대 들어 읍성으 로 편입되면서 읍성의 축조가 고려말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당한 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운용하였던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산석성인데 석축을 강조한 것은 고려시대 토축 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여 석축성으로 축조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산성에 물이 부족하거나 물이 없다고 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장기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왜구의 침 입을 피하기 위하여 급히 축조하였거나 일시적인 입보를 위하여 수축하였다가 조선전기까 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읍석성 중에는 조선시대 들어 축조한 읍성과 고려말에 석축으 로 개축한 이후 읍성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고려의 군현성으로 축조된 것을 조선시대 들어 읍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정에 따라 편입한 것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는 고려때 축조된 읍토성과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축조한 산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러한 상황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군현에 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읍성이 보이지 않거나 산성 또는 고적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어 고려말의 성곽 수축과 조선 개국 이후의 읍성 축조 정책을 반영한 결과로 생각된다.
정읍 고사부리성은 백제 5방성 중 중방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동안 9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와 문헌기록 등을 통해 중방성으로서의 역할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2021년 조사가 이루어진 9차 발굴조사에서 새로운 남문지가 확인됨에 따라 기 존에 알려진 남문지와의 관계 및 성격에 대해 재고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본고에서는 기존 남문지에서 불과 90미터 떨어져 위치한 새로운 남문지에 대해 문지의 입지, 형태, 구조 등을 기존에 확인된 고사부리성 문지 및 백제 산성 문지와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문 헌기록과 발굴조사 결과를 비교하여 고사부리성 문지 운용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기존에 확인된 남문지는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에 사용된 흔적만이 확인될 뿐, 초축 당 시의 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에 새롭게 확인된 남문지는 고사부리성 초축 외성벽과 동일한 방법(삭토법, 들여쌓기, 치석한 석재 사용)으로 축조된 문지 측벽이 확인되었으며, 입지양상 및 형태 역시도 백제 산성 문지에서 보여지는 것과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이렇듯 새로운 남문지는 고사부리성 초축 당시부터 운용되어 오다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2차례 개축된 것으로 판단되며, 고려시대까지 사용되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문지폐쇄와 함께 성벽으로 개축되었다. 이후 폐쇄된 남문지는 서쪽으로 약 90m 가량 이동하여 기존에 알려진 남문지를 개축하여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확인된 남문지는 고사부리성 4개의 성문 중 성 내부로의 진입이 가장 용이하고, 성 내의 주요시설과도 멀지 않음에 따라 고사부리성의 초축 당시의 정문 역할을 했던 것으 로 판단된다.
백제 한성기 왕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성벽 축조기법에 대하여 살 펴보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서로 다른 지형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성벽 축조기법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지면 지정과 기초성토에 의한 기저부 조성방식 등에서는 축조기 법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江岸 평지에 축조된 풍납토성은 자연제방의 구지표면을 정지하고 기초성토를 한 후 그 위에 판축틀(거푸집)을 설치하여 版塊를 축조하는 방식인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의 구조는 중심토루와 중심토루의 내·외벽면에 덧붙여진 토루로 이루어졌으며, 판괴를 순차 적으로 덧붙여가며 축조하는 分段法에 의해 성벽이 완성되었다. 반면, 구릉과 평지가 복합 된 지형에 축조된 몽촌토성은 지형에 따라 축조기법의 차이가 엿보인다. 성벽 축조구간이 평지인 경우는 풍납토성과 같은 판축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구릉 지 역의 경우는 구릉의 자연 경사면을 2~3단의 계단상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 였는데, 구간에 따라 다소 축조기법의 차이가 확인된다. 즉, 북서벽 구간은 판축틀을 설치 하여 축조한 양상이 확인되었고, 동벽 구간의 경우는 성토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판단 된다. 이렇듯 성의 입지에 따른 두 성의 축조기법상의 차이가 있지만, 축조기법상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즉, 지면과 성벽의 유동성을 억제하기 위해 성벽 기초부의 내측 혹은 외측에 해당 하는 부분의 지면을 얕게 굴착하여 끝부분이 돌출되게 지면을 지정하는 기법, 성벽 기초부 에 뻘 혹은 점질토를 이용하여 기초성토를 하는 방식, 기저부 보강 방법의 일환으로 토제를 시설한 것 등은 두 성에서 모두 확인되는 축조기법이다.
이천 설봉산성은 백제 한성기 석축산성의 존재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산성 중 하나 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산성의 축조 주체 및 구조를 밝히기 위한 기본적인 근 거자료가 되는 설봉산성의 성벽 및 토층 양상에 대해 재검토하였다. 분석 결과 설봉산성은 초축 이후 최소한 4단계에 걸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개축되며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단계에서는 성벽과 기단보축, 암거식 수구 가 축조되는데, 석축산성의 초축은 신라가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서문지의 축조 및 성벽의 수·개축이 이루어지며 성 내부 공간의 연약 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엽층 및 목재를 이용하는 등 대대적으로 산성 안팎이 수·개축된다. 이후 서문지 및 성벽이 한차례 개축되며, 통일신라 시기의 유구·유물은 물론 고려·조 선시대와 관련된 건물지 및 유물 역시 확인되는 등 설봉산성은 오랜 시간 동안 지리적·군 사적·행정적 중요성을 잃지 않고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축산성과의 관련성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백제 유구 및 유물이 확인되는 것 역시 분명 한 사실이다. 이는 최소한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 해당 공간을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음을 시 사하는 것이며, 고고학적 증명을 위해서는 차후 성 내부 공간 및 치성·북문지 등의 조사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아차산 능선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홍련봉 2보루는 평탄지(고대지)와 함몰지 2개의 지 형으로 구분되었으며, 함몰지의 협축성벽은 남한지역의 다른 고구려 보루에서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독특한 구조로 주목된다. 대부분의 고구려 보루들은 산 정상부에 따로 내벽 을 쌓지 않고 한쪽 벽을 쌓는 편축식의 성벽을 갖고 있으나, 홍련봉 2보루의 경우 절반은 편 축, 나머지 절반은 협축식으로 축조하는 독특한 형태이다. 남한지역 고구려 보루의 석축성벽은 규모나 축조된 곳의 지형에 따라 일부 차이는 있으 나, 기본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구조를 갖는다. 양주분지와 한강일대 소규모로 축성된 보루 의 성벽은 지형에 맞춰 산 정상부를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두르는 형태인데, 크게 기초부, 토축부, 석축부로 나눌 수 있다. 즉 기저면 조성층에 석축성벽과 함께 사질토를 층층히 쌓아 뒷채움 하여 편축식으로 성벽을 축조를 한다. 하지만 임진강유역의 강안평지성은 협축식 성 벽으로, 소형의 보루들과는 다소 구분되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하지만 협축으로 조성된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인 구조는 한강유역의 다른 보루들과 같이 기초부, 석축부, 토축부로 구분되어지는 형태를 보인다. 홍련봉 2보루의 평탄지는 다른 보루들과 마찬가지로 토축부를 조성하며 대지를 조성하 고 석축성벽을 편축식으로 조성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함몰지에 축조된 협축성벽은 다른 한 강유역 보루들의 성벽과는 구분되지만, 임진강유역의 강안평지성과 같은 방식으로 협축성 벽이 축조되어졌다. 즉 홍련봉 2보루 함몰지의 협축성벽은 강안평지성과 같은 토축부+내· 외석축벽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협축성벽의 외벽은 영정주를 기준으로 수직에 가깝게 석 축부와 토축부를 같이 올렸다. 특히 내벽은 자연 경사도를 주어 안정적인 각도로 석축을 올 렸으나 외벽은 나무기둥과 석축으로만 마무리한 점, 토축부에서 횡장목은 확인되지만 판재 를 설치하기 위한 종장목은 확인되지 않는 점을 볼 때 토축부는 종장목과 협판 없이 석축이 판재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홍련봉 2보루의 성벽은 다른 보루들과는 다소 구분되지만, 임진강 일대부터 한강 유역까지 조성된 다른 보루나 평지성들과 같이 동일한 형태의 축조방식이 적용된 것이다.
문경 고모산성은 이른 시기 신라 석축 산성의 대표적 사례로서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 1) 고모산성은 5세기 말 신라가 변경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축조한 산 성이다. 2) 이 성은 호측현(虎側縣, 경덕왕 때 虎溪縣으로 개명)이라는 군현(郡縣)으로 발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 내부와 아래의 공간이 모두 활용되었을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까지 성 내부의 공간이 중요하게 관리되었으며, 다만 성 아래의 읍치(邑治)는 공간이 협소하여 점 차 견탄(犬灘) 남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호계현은 결국 주현(主縣)이 되지 못하고 문경현(聞慶縣)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그렇지만 호계현에 있었던 유곡역(幽谷驛)은 찰방 역(察訪驛)으로서 주변 교통로를 관할하는 역할을 하였다. 3) 고모산성은 조선 전기에 하나 의 고성(古城)으로 남게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어 그 후 2차례 이상 수축(修築)되었고 조선 말에 이르러 실제 진수(鎭守)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 의병 (義兵)들이 성을 지키고 실제로 전투를 치른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광양 마로산성은 6세기대 백제에 의해 축성된 산성으로 지금까지 총 5차례의 발굴조사 를 통해 산성 내·외부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다종·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고, 특히 광양의 백제때 지명인 ‘馬老’와 치소·관청을 상징하는 ‘官’이 결 합된 ‘馬老官’명 기와가 출토되면서 이 지역의 고대 治所城으로 비정되어 왔다. 이 연구는 마로산성의 발굴성과를 검토하여 고대 사회 치소성의 개념을 고고학적으로 접 근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마로산성 내부시설의 입지, 규모, 출토유물 등의 집중 분석하여 상 관관계를 검토하였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관아·군사·저장·제의 관련 시설의 존재이다. 이러한 시설들은 치소성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시설인데 행정의 핵심시설인 東軒은 Ⅱ-4호건물지, 외부 경계와 조망을 위한 將臺는 Ⅱ-1호건물지, 지배계급의 생활 공간인 內衙는 Ⅰ-2호건물지, 조세와 관련된 창고 시설은 Ⅱ-2호,Ⅱ-3호 건물지로 판단된다. 둘째, 祭場으로서의 기능이다. 마로산성에서는 집수시설과 수혈유구 등을 통해 진단구, 공헌물로 볼 수 있는 특정 종류의 유물들이 반복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마로현의 제장으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상위 계층의 신분표상품의 존재이다. 마로산성에서는 금동과대, 금동투조장식, 중 국제 자기, 동경, 벼루 등 다양한 신분표상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러한 신분표상품들이 집중되고 있는 점은 마로산성이 마로현의 치소성으로서 활용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넷째, ‘馬老官’名 명문와의 존재이다. ‘마로관’명 기와는 광양의 백제때 지명과 행정치소 인 관이 복합된 기와로서 마로산성이 마로현의 치소성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자료 이다.
산성은 외침을 막고, 백성을 지키는 관방유적이다. 하지만 고대산성의 축성 목적은 일정 지역에 대한 장악(확보)를 우선하였다. 일정지역에 대한 장악은 무력을 기반한 통치, 관리, 방어 등의 개념이 포함된다. 따라서 산성 내에는 전투 가능한 방벽(성벽)이 축성되고, 안에 는 군사의 생존과 해당지역 관리위한 시설(각종 건물지, 용수시설 등)이 조성된다. 그리고, 축성주체(국가)는 이 같은 시설을 구비하고, 운영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기술력과 제도를 갖추고 산성을 중심 무대로 다양한 행적(역사)을 남기었다. 따라서 산성의 실체와 그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랜 조사와 고찰, 다양한 연구방법 의 적용과 검증이 필요하다. 국내 고고학에서 고분, 생활유적 등 다른 유구보다 연구 성장이 느린점은 城에 내포된 종합적이고 거대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에서 “산성 내 공 간활용”연구는 성벽과 성벽시설(문지, 치 등)에만 집중되던 기존연구 성향에서 벗어난 다양 한 방식의 연구 접근을 위해 시도한 것이다. 본 연구는 백제 치성(縣급)으로 밝혀진 예산산성을 대상으로 하였다. 하나의 산성이지만 조사된 내부시설이 양호하고, 유구별 구조와 배치 등 공간 활용상태 파악이 가능하였다. 그리 고, 이를 토대로 유사등급(郡縣) 산성사례를 비교하여 백제 산성 내 공간 양상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산성 내부는 A.(정상부), B.(경사 중~상단부), C.(경사 하단부)로 구분되어 필요 시설이 배치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A.정상부 공간에는 다각형건물(종교/제의), 석벽건물(대 형창고), 저장수혈, 저수조(물탱크) 등 저장시설이 밀집된다. 특히, 잔여대지(넓은 공간)를 필 수적으로 확보하여 사열(지휘)/제의(종교)/창고(물품)관리 등 공식적인 대규모 군사 활동이 가능케 하였다. B.경사 중~상단부 공간은 비탈진 경사에 협소한 평탄면을 조성하여 중소규모(6m이내) 시설을 배치하였다. 유구는 고래, 아궁이 등 난방 건물이 중심을 이룬다. 소규모로 분리된 병사 숙소/취사 및 기타 물품 제작소 등이 기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C.경사 하단부 공간은 저지대로 유수처리의 집수지가 배치된다. 그리고 곡부 주변은 축 대를 시설하여 곳곳에 평탄지를 조성하고, 규모 있는 건물지를 조성한다. 정리하면, 산성 정상부 일원은 공식적인 대규모 군사활동(지휘/사열/제의/창고관리)을, 경사면 중~상부에는 병사 숙소/취사/생산 및 기타 소규모 활동을, 경사면 하부(곡부)에는 집 수지와 축대 등 배수 및 관련시설을 구비하는 등 계획적인 공간 구획과 활용이 이루어진 것 을 알 수 있다.
불암산성은 관련 문헌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그간 단편적인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산성 의 축조시기에 대해 단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축조주체에 대해 삼국시대 신라, 백제, 고구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어 불암산성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본 고에서는 최근까지 조사된 불암산성의 축조수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산성의 성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불암산성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축조는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편축기법으로 쌓았으며, 방형․장방형의 화강암석재를 치석하여 바른층쌓기로 축조하였다. 일부 구간에서 기단보축이 축조되었으며, 현문식으로 축조된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이런 축조수법은 서울․ 경기 지역에 분포하는 삼국시대 산성에서 다수 확인된다. 특히 불암산성이 위치한 불암산은 양주․포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통해 방어체계를 형성하였 음을 알 수 있다. 다만 230m의 내외의 소규모 산성으로, 집수지 등의 성내 수원이 없으며, 해발고도는 낮으나 험지에 축조되어진 점 등을 종합할 때 소규모의 병력이 주변지역을 관측 하고, 상황 발생 시 남과 북의 상황을 전달하는 통신(봉수)의 역할적의 침입시 배후를 공략 할 수 있는 전략적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산성내 정상부 목 곽고와 수혈 내부에서 향로 뚜껑과 훼기가 이루어진 편병 등이 수습되고 있어 군사적인 목 적의 산성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산성의 기능에 일부 제의기능이 추가된 것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원도 영동지역의 수많은 산성들 가운데 문헌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논증과 함께 고고자료들을 분석하여 신라~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8곳의 산성을 추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고고학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역사적인 실상에도 접근 할 수 있었다. 우선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단위인 주-군-현마다 산성들이 있었고, 산성의 규모도 행정 구역 단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주(州) 단위는 1,000m 이상이며, 현(縣) 단위는 200~600m 정도로 구분된다. 또한 일찍이 설치된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산성(州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복식(山腹式)의 토성이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현 단위의 산성(縣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정식(山頂式)의 토성이 많았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북진기 이 전에 축조한 산성의 성벽은 토루에 돌을 피복하는 공통점도 보였다. 특히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은 바닷가의 곶[산]에 석호나 강을 끼고 입지 하고 있는데, 이들 산성이 신라의 동해안 연안항해와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시기에는 이들 산성이 다소 내륙으로 들어가 산의 정상부에 입지 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진흥왕 북진기부터 통일전쟁기에는 그 입지의 변화가 잘 나타난다. 나아가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의 존재는『삼국사기』에서 실직(城)과 하슬라(城主) 등과 함께 나오는 사료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아울러 삼척 오화리산성은 북해(北海)의 제장(祭場)인 비례산(非禮山)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비교적 확실한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들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가 있는데, 앞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사와 신라고 고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본고는 1999년 7월에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要鼓)의 특징과 사용연대를 규명하기 위해 중국 요고의 연원과 변화양상을 심도 있게 고찰한 것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출토된 요고 실물 중에서 고려시대 이전에 속하는 것은 2010년 충남 연기군 나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도제 요고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 2점뿐이다. 전자는 백제(5세기 후반)의 것으로 현재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실물자료이지만 그 형태적 특징이 초기형태의 요고와 상이하기 때문에 악기로 사용된 것인지에 대해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의 제작연대에 대해 현재 고구려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2개의 견해가 존재한다. 목제 요고의 형태적 특징을 보면,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요고의 중간 부분이 가느다란 특징보다는 통일신라시대 감은사 사리기의 요고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성산성의 요고는 중국 북위시대(北魏: 386∼534) 에 속하는 산서(山西) 대동(大同) 운강석굴(雲岡石窟)의 요고, 하남(河 南) 공현석굴(鞏縣石窟)의 요고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의 제작연대를 고구려(475년 이후)까지 소급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결론적으로 현재 형태적인 특징만으로 이성산성의 요고를 통일신 라시대의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다만 현재 고구려와 관련된 요고 실물 자료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차후 삼국시대 요고에 관한 실물 자료들이 추가적으로 발견 되어 이에 관한 논의가 심화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Busanjin Fortress was originally made of stone fortress for the Joseon Navy, which was located in Dongnae area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the Japanesque Castle of Busanjin in 1592 was built by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Since the Japanese military retreated, the Joseon Navy had renovated the fortress and had used it as a base for stationing, and it had been maintained in Busanjin Fortress until the Joseon Navy was disbanded in 1895. After the abolition of the Naval Force System, the space in Busanjin Fortress was dismantled, and the government facilities and their sites were not properly managed and repaired, eventually was sold to Japanese. As Busanjin Fortress failed to function properly, the coastal space in Busanjin became a burial ground after being reclaimed by Japanese with real estate investment in mind. Today, the traces of Busanjin Fortress have been removed by the reclamation work, and only the remains of some stone pillars remain under the name of Jaseongdae(子城臺). Thus, the old custom as the Naval base disappeared, leaving only the image of Japanesque Cas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