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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1.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성화상 논쟁에 대하여 역사(historiography)와 사상(philosophy and methodology)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동시에 다룬 연구이다. 이러한 점 에서 성화상 논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차별되는 독특성을 띠고 있다. 본 연구는 ‘이미지 이데올로기(image ideology)’ 측면에서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하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화상 논쟁에 관한 연구는 논쟁 발단의 외면적 요인을 중점적으로 다룬 반면, 본 논문은 그 내면적 요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췄다. 연구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이미지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 해석의 툴(tool)로 사용하였다. ‘이미지 이데올로기’는 이 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와 ‘이 미지의 이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 of image)를 동시에 지닌 해석체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지가 본 래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이미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조명해 본 결 과,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은 성화상 파괴를 주도하였던 황제 레오 3세(Leo Ⅲ, 717-41 재위)와 성화상 숭배를 옹호하였던 교황 그레고 리우스 2세(Gregorius Ⅱ, 715-31 재위)간의 이미지 이데올로기 충돌로 인해 발생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레오 3세는 ‘황제-교황주의’를, 그레고리우스 2세 는 ‘교황-황제주의’ 라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성화상(icon)이라는 이미지를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이 미지 담론은 오늘날에 이르러 단순히 신학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정치, 경 제, 사회, 문화, 예술, 사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거 대담론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이미지의 속성이라는 본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 황에서 본 논문이 이론적으로는 성화상 논쟁 연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하고, 정책적으로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미지 이데올로기에 대 한 경각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762.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제헌국회에 진출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50명으로 확인된다. 한민당 11 명, 독립촉성국민회 13명, 대동청년단 5명, 무소속 14명, 기타 단체 7명이 며, 여기에는 천주교인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인 의원들 50명이 전 체 의원들 209명 가운데 차지하는 24% 비율이 전체 인구 가운데 기독교 인구 0.5%를 과대하게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고등교육을 받았 던 기독교인들의 인구비율이 20-30% 정도 된다는 점에서는 적절한 비율의 대표성을 나타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 의원들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24명으로 거의 절반에 가까워 전체 국회의원들 가운데 독 립운동 가담자 27%보다는 훨씬 더 높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공부한 경우에 미션스쿨에서 공부를 하였고, 졸업 후에도 대부분 실력양성 운동의 일환이었던 사립 기독교학교에서 교원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해방 후에는 미군정, 민주의원, 입법의원 등의 다양한 정치활동 을 하였고, 면장, 읍장, 군수 등의 다양한 행정직도 하였으며, 교육기관에도 상당수가 근무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에 한민당과 독촉국민회, 여러 청년 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우파 세력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제헌국회에 진출한 후에는 한민당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한민당에서 활동하였고, 독촉국민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상당수가 일민구락부에 소속되 어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활동하였고, 6-7명의 사람들은 소장파에 소속되어 개혁활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소속된 정당 이나 구락부에 따라 활동하며 개인들의 경우에 이합집산이 심하였다.
        1763.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근 들어 한국의 영상산업은 급속히 발전해왔으며 성장속도와 추세가 가장 강한 산업으로 부상 되고 있다. 한국영상산업의 성장은 정치, 경제에도 유리하게 촉진한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나라로서 한국의 영상산업의 급성장을 보고 많은 소중한 경험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은 한국의 영상산업 급성장의 원인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중국의 영상산업에 대해 살펴보고 중국의 영상산업 발전에 유용한 의견과 제안을 연구해 보았다.
        1764.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주목적은 T. S. 엘리엇의 「이스트 코커」에서 이차 세계 대전의 혼란스럽고 파국적인 상황이 왜상의 기법으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이 없었던 2차 세계 대전 초기 몇 개월을 일컫는 ‘가짜전쟁’ 시기에 쓰진 이 시는 임박한 전쟁에 대한 묵시적 장면들을 생생하게 그림으로써,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불어 넣어 국민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는 쳄벌레인 수상과 같은 노정치인들의 기만적인 수사의 정체 를 폭로하고 있다. 『기독교 사회의 이념』에서 더욱 명확히 밝히고 있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마주하게 된 엘리엇은 영적 구원을 추구하는 길로 이끌어 갈 겸손의 윤리를 강조한다.
        1765.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6년 일러수뇌회담은 일러 양국의 영토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만, 더 나아가 아베 수상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하고자 하는 회담이었으며, 동북아국제정치의 큰 판의 움직임을 염두에 둔 아베 수상의 의도가 엿보이는 중요한 회담이었다. 그러나 북방4도의 반환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북방영토문제의 미해결은 많은 부분 일본정부의 책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정부의 ‘4도 일괄 반환’ 주장과 ‘2도 선행 반환’ 주장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잦은 ‘골대 이동’이 북방영토 해결을 무산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물론 일본정부의 그러한 결정에 미국정부의 부정적 영향력 행사의 산물이거나, 미일동맹정책의 대가임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 영토문제는 대국간 힘의 전이 현상이 배경에 있어 복잡한 정치역학이 작용하는 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고유영토론에 대한 러시아인의 인식을 살펴보면, 북방4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고유영토론’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명확해진다. 일본의 ‘고유영 토론’은 독도에 대한 주장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그 주장의 공허함이 같은 이유에서 오버랩 되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1766.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해방 후 전재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구호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당시 인구의 1/10-1/6에 해당하는 전재민이 남한에 유입되면서,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경험했는데, 경제적 위기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 에 전재민들의 성향에 대해서는 사회학적인 방법을 그리고 전재민 구호활 동에 대해서는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살피고자 한다. 미군정청에서 활동한 주요 한국인들이 해외 유학파 기독교인이며, 교회는 민간구호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전재민 교회는 자신 스스로가 자력갱생 을 이루는 모범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통해 기독교가 전재민구호활동을 통하여 한국현대사회에 기여하였음을 보이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정기간에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였던 전재민에 대한 구호활 동은 종교인들의 당연한 관심의 영역이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없었 다. 또한 당시에 대한 연구가 지나치게 정치역학의 관점에서만 조명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논문은 기독교인들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설명하면서, 전재민 구호활동이 민간인 주도에서, 미군정청중심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전재민 스스로 자력갱생의 과정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1767.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촉국민회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합하여 1946년 2월에 지방우익세력을 조직하려고 만들었던 연합조직이었다. 초기에는 오하영과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을 이끌었으나, 이승만은 지방 조직을 확산시킨 남부지방 순회여 행 후 1946년 6월에 열린 2차 전국대회에서 중앙조직을 장악하였다. 이 조 직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신익회의 정치공작대 세력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 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6월 29일에 민족통일총본부를 조직하였고, 7월에 이 조직에 애국단체 총연합회를 통합시켰다. 이러한 세력 확장을 이룬 후 에 독립촉성국민회의 운영에서 드러난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1946년 9 월 7일에 제3차 전국대회를 열었는데, 임원진에 임정세력이 상당히 참여했으나, 중앙위원조직은 이승만이 확실하게 장악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말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미국방문에 나섰다. 그의 미국방문기간 동안 임정세력은 비 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임정봉대론에 입 각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배은희와 이윤영등의 반대로 임정세력의 이러한 통합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은 임정봉대론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은 1947년 4월에 열린 제4차 전국대회에서 임정세 력을 정리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독촉국민회를 재편하였다. 그 이후에 점차로 단독선거를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개편한 후 에, 이 조직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총선거에 임하였다. 그 결과 제헌국회 의원 가운데 가장 많은 55명이 독촉국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독촉국민회 중앙조직에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초기에는 오하영이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중간역할을 하면서 부위원장을 하 였다. 중앙에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는 배은희목사와 이관 운목사 그리고 이승만의 직계였던 송필만, 임영신, 북한에서 월남한 이종 현 등이었다. 특히 월남기독교인들로 주목되는 그룹이 이윤영과 이종현, 변성옥이었다. 그리고 최태용은 반공과 국민운동을 통한 건국운동이란 점 에서 독촉국민회의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촉성회 중앙조직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0%에서 40% 정도 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비율은 해방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이 우파 세력의 중 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이 조직의 임원진에 참여한 기 독교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제기 동안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 기반이었다.
        1768.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낭만주의 시대라는 스펙트럼 속에 슈만을 전형적 낭만주의자로 각인시켰던 종래의 편 향적인 시각을 극복하는 시도이다. 여기서는 외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음악의 미적 자율성과 예술성 을 극대화한 낭만주의와 함께, 왕정복고시대라는 역사적 이행기에 체념적 내지 현실 참여적 비더마 이어음악 발전에 모두 개입한 이들이 독일 교육시민계급이며 슈만이 이 특정 계급에 속함을 입증한 다. 먼저 교육시민의 형성사와 정치관, 독일혁명기(1848/9) 태도, 취향 등을 해체한 후 그들이 향유 한 음악장르 위주로 비더마이어음악사를 간략히 재구성한다. 다음으로 이 교육시민계급을 분석 틀 로 삼아 슈만의 혈통과 교육 및 성장배경, 정치관과 음악관, 음악 커리어와 작품 집필의 경향 변천, 학계 최대 난제 중 하나인 혁명기와 그 이후 내보인 소위 ‘모호’하다는 태도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그리하여 교육시민계급 음악가 슈만에게 마치 괴테의 반복투영개념처럼 낭만주의와 특히 참여적 비 더마이어 경향이 정당하게 공존하며 필생의 음악세계를 형성해갔고, 이를 통해 그가 예술성을 극도 로 고양시킨 위대한 음악가임은 물론 독일근대사의 발전과 함께 호흡한 시대지성이었음을 논구해낸 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궁극적으로 음악사학의 정체성을 명실상부한 인문학의 한 분야로 설정하고, 동종 인문학과 연관 사회과학계열 학문들과의 연계·맥락화 속에서 도출 가능했음이 강조된다.
        1769.
        2017.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독일통일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한 분석, 통일 및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한 여론조사결과에 기초하여 정치교육의 과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명제를 여섯 가지로 정식화하여 제시하였다. 첫째, 독일통일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는 후속근대화라고 특징지을 수 있으나 여전히 여러 가지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어 아직도 완결된 것이 아니다. 둘째, 민주적인 갈등문화 혹은 논쟁문화의 정착이 요청된다. 셋째, 민족적 연대의식의 강화와 더불어 정치적인 동일시의 기반·준거가 무엇인가의 질문과 문제를 다루어야 하며, 이 맥락에서 헌정애국주의의 착근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넷째, 헌정애국주의의 착근을 위해 정치교육의 활성화가 요청되며, 담당기관이나 단체 사이의 네트워크가 요청된다. 다섯째, 다문화사회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와 다양성의 측면, 사회통합의 과제 및 국가·국민·민족정체성의 확립 혹은 재정립의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고, 그 두 가지 차원 혹은 준거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담론의 활성화가 요청된다. 여섯째, 통일과 사회구조의 변화 그리고 정치교육을 위한 그 함의와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당사자와 참여자의 내부적 관점 혹은 이믹(emic)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와 내러티브 접근방법이 더 많이 요청된다.
        1770.
        2017.04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젖산발효를 통해서 얻어진 목이버섯과 녹각 추출액 혼합물의 항산화 및 생리활성평가를 수행하였다. 녹각 추출액의 GABA생성 최적조건에서 probiotics 및 기능성 강화를 위해 목이버섯을 2.5% 첨가하여 30℃에서 7일간 젖산발효를 하였다. 발효 7일 pH 5.06, 산도 0.77%로 나타났으며 1.3×108 CFU/mL로 높은 균수를 유지하였고 GABA를 1.4% 생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이버섯을 첨가했을 때 젖산균 발효물의 물성이 개선되며 단기간에 고농도의 GABA를 생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녹각 추출액의 젖산발효물의 세포 생존율을 실험한 목이버섯 2.5% 조건에서 발효 전 6 mg/mL에서 독성이 나타났으나 발효 후 독성이 완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효 후 6 mg/mL 농도에서는 5.58 μM로 발효 후 NO 생성이 감소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녹각 추출액과 목이버섯 혼합물의 젖산균을 이용한 정치배양을 통해 단기간에 고농도의 GABA 생산이 가능하였으며, 젖산 발효물은 세포독성 완화 효과 및 NO 생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발효물은 GABA, probiotic, 식이섬유 등을 함유하여 기능성 식품소재로 이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1771.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그간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지리산권 문화 연구’를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수 행해 왔다. 현대문학 분야에서는 ‘지리산’에 함축된 ‘근대성’을 규명하기 위해 ‘기행(탐험, 여행, 관광 등)’에 초점을 맞춰 일제 강점기의 기행문학 등을 대상 으로 지리산의 근대적 표상을 다각적으로 규명하였다. 또한 르포‧소설‧희곡‧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분석하여 지리산에 얽힌 역사적 상흔과 그의 문학적 대응 양상을 면밀하게 논구해 왔다. 본고는 기왕의 논의를 바탕으로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지리산권 현대 문학의 특징과 의의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試論的 논의이다. 이를 위해 본고는 지리산이 전근대시기에는 둔세자의 피난처이자 민중의 도피처였으며, 근대 이 후에는 남과 북이 대립했던 이데올로기 戰場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리산을 배경으로 창작된 여러 문학 작품에 함축된 주요한 인문학적 사유와 태도 등을 靖獻 意識과 哀悼 倫理, 그리고 自癒 意志로 나누어 논구하였다. 정헌 의식이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는 탈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학문 적·사상적 신념을 고양하고, 이를 통해 도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식을 일컫 는다. 김택술과 이은상의 기행문학, 그리고 󰡔지리산󰡕의 중심 인물인 박태영에 게서 이와 같은 정헌 의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근대 이후 지리산에서 죽어간 ‘만혼령’에 대한 문학적 애도 작업은 일찍이 70 년대 지리산 소재 시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만혼령’을 존재론화‧의미론 화하는 상징화-애도 작업은 ‘國史로부터의 伸冤’과 ‘대문자 역사로의 기입’이라 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성부와 송수권의 시편 에서 ‘지리산 만혼령’이 다시 출현하게 되는데, 그의 ‘비탄’과 ‘피울음’이 ‘만혼 령’에 대한 충실한 기억을 목표로 하는 哀悼 倫理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고찰하 였다. 분단과 전쟁은 ‘지리산 만혼령’을 출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 게도 깊은 상흔을 남김으로써 그 후과는 또다른 비극의 맹아로서 상존하고 있 다. 이러한 후과는 우연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해소되거나 극복될 수 없는 것 이다. 여러 작품들이 반목·불신·원한·증오를 넘어 화해와 용서를 향한, 자성·고 백·참회·공감·생명 존중이라는 자발적이고 자각적 행위, 즉 自癒 意志를 역설하 고 있음을 검토하였다.
        1772.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중·후기 介坪里의 역사 변천을 일두 정여창과 사회·경제적 변화 에 초점을 맞추어 구명한 것이다. 먼저 개평리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인 정 여창의 증조부 정지의, 조부 정복주, 아버지 정육을의 행력을 고증하여 가전 자 료의 오류나 윤색 부분을 구명하였다. 정여창의 행력은 조카 정희삼이 행장으 로 정리하였으나 1550년의 시점에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널리 알려지 지 않았음을 구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1552년에 개암 강익이 주도한 사우 창 건은 의미가 크다. 그리고 1570년 5월에 이르러 정여창에 대한 국가의 포증은 대체로 마무리 되었다. 이와 함께 정수민이 수집하여 정구를 통해 찬집한 󰡔文獻 實紀󰡕는 사림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정여창의 위상 정립과 제고의 근거였다는 점에서 개평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다음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되고, 山郡인 함양도 1662년(현종 3)에 그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개평리의 상민들은 호세로서 대동세를 포목으로 납부하였다. 개평리의 사족과 상민들은 17세기 중 엽의 庚辛大飢饉과 전염병의 유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악화, 1728년 정 희량 사건에 의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불안정한 형편에 처하였다. 더구나 18세 기 중엽 이후 환곡의 폐단은 개평리를 비롯한 함양지역 상민들의 삶을 매우 열 악한 상태로 밀어 넣었다. 대체로 1790년대를 기점으로 극심한 환곡의 폐단에 서 벗어났으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田稅木價로 인한 농 민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개평리에 위치하였던 北倉, 場市, 介坪店 등 은 조선 후기 개평리의 사회·경제적 변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며, 육 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지역 내 거점의 증거이다. 이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사 설의 介坪店이 생겨나고 운영되었다. 개평 장시는 조선 후기 5·10일장으로 개 평리가 주변 마을과의 관계에서 사회·경제·문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으며, 개 평리 사족과 상민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1773.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南冥學의 본질과 특색에 대해 재조명한 것이다. 南冥은 16세기 사화 기에 현실정치의 참여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한 인물인데, 25세 때부터 孔子 를 배우고자 하여 顔回의 克己復5를 통해 근본을 확립하는 구도의 길로 들어 섰다. 남명학의 淵源은 남명이 학문을 전환한 뒤 孔子·周敦頤·程Ⅱ·朱熹의 초상 을 그려 봉안해 놓고 참배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주자의 博文約5의 학문과 程明道의 揚休山立의 氣節과 周濂溪의 光風霽月의 흉금을 추구하고, 나 아가 안회의 克己復5를 통해 공자의 경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명학의 요체를 敬·義라 하는데, 이는 󰡔주역󰡕 「坤卦-文言」의 ‘敬以直內 義以 方外’에서 나온 것으로, 주자도 학문의 요체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경의학의 연 원은 주자를 통해 󰡔주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의학은 마음을 眞實無妄하게 하는 공부로, 敬은 마음을 고요하고 또렷하게 하여 긴장감과 경건함을 유지하 는 것이고, 義는 마음이 발한 뒤 판단이나 조처를 올바르고 합리적으로 하는 것 이다. 남명학의 본질은 남명이 남긴 3편의 賦와 󰡔學記類編󰡕의 「誠圖」·「易書學庸語 孟一道圖」·「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原泉 賦」에는 근본을 중시하는 사유가 근저에 깔려 있으며, 「民巖賦」는 나라의 근본 을 백성으로 보고 정치의 근본이 임금에게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며, 「軍法行酒 賦」는 나라의 근본은 禮義라는 점을 역설한 글이다. 또한 「誠圖」와 「易書學庸 語孟一道圖」는 남명학의 본체에 해당하는데, 「誠圖」는 眞實無妄의 誠을 목표로 그 공부방법과 실천요령을 적시한 도표이며, 「易書學庸語孟一道圖」는 惟精·惟 一의 공부를 통해 誠을 추구하는 것을 형상한 것이다. 「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는 남명학의 작용에 해당하는데, 「心爲嚴師圖」는 心을 嚴師로 삼아 存養·省察을 나타낸 것이고, 「幾圖」는 省察과 克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것이 며, 「神明舍圖」는 극기복례하여 至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남명학의 특색은 「神明舍圖」의 ‘天德’과 ‘王道’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천 덕은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얻어 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內聖에 해당하 고, 王道는 그 덕을 현실사회에 펴는 것으로 外王에 해당한다. 천덕을 추구하는 것은 人道를 닦아 天道에 배합하는 誠을 추구하는 것으로, 남명학의 특색은 居 敬行義의 공부를 통해 󰡔中庸󰡕의 大旨인 誠을 추구한 데 있다. 이는 퇴계가 󰡔소 학󰡕·󰡔대학󰡕을 근본으로 한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중용󰡕을 所依經傳으로 삼은 것이다.
        1774.
        2017.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중 양국은 오랜 역사기간동안 문화와 정치, 종교와 예술에서 끊임없는 교류를 통하여 우리나라 는 자체적인 우수문화를 창달하였다. 중국의 선진문물과 문화를 도입하여 발전시키고 이를 이웃국가 인 일본에 전파하는 중간 매개체 역할도 수행해왔다. 특히 인쇄와 종이제조 기술의 유입과 발달은 중 국의 문학작품을 수용하여 한국고유의 작품탄생이 탄생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에 유입된 중국 고대문학 작품 수는 총 483종이며 이중 전등신화와 전등여화를 포 함한 소설이 464종, 원나라 잡극 서상기를 포함한 희곡 19종이다. 특히 조선왕 연산군이 직접 하교하 여 중국 서적을 구매해서 들여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중국에 파견하는 사절 단에게 명나라에서 서적을 구매해 올 것을 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파견 사절단이 서적 유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유입된 서적 중 전등신화와 전등이화는 조선 초기 한국의 최초 소설인 금오신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전기소설집 기재기이의 탄생은 17세기 몽유록 소설의 대표작인 구운몽의 탄생에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표적인 애정소설 운영전과 주생전 그리고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 동전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무역에 의한 중국 서적 유입은 한국의 고전소설의 탄생과 발전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문화컨텐츠는 고전소설을 중요한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산업을 활용하 여 수출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국가 경제 이익창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에 문화 산업 수출의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될 것이다. 오래전에 국내로 들여온 무역서적 중 전등이종의 국내 유입은 우리의 자체적인 문학작품탄생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독자적인 소설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 다. 이후 우리는 우수한 고전문학작품을 문화컨텐츠 소재로 잘 활용한다면 문화산업발전과 나아가 세 계 무역교류를 이끄는 선두 주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을 통하여 중국서적의 무역유입과 현 재의 한국 경제에 깊은 영향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1775.
        2017.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첫째, 현재 학계와 대중에 의해 통용되는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미니멀리즘 음악에 관한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 방식의 정의를 이끌어냈다. ‘수렴하는’ 정의는 초기 미니 멀리즘 음악을 설명하는 정치적 · 사회적 · 미학적 조건 및 음악외적 형태를 바탕으로 미 니멀리즘 음악을 특정 맥락에 위치시킨 것이다. 한편 ‘발산하는’ 정의는 변화하고 발전된 미 니멀리즘 음악을 지칭하기 위한 것으로서, 앞서 언급했던 네 가지 조건을 부분적으로만 충족 시키거나 이런 조건으로 범주화되지 않는 다양한 음악을 미니멀리즘 음악으로 정의하는 방 식이다. 둘째, 본 논문은 이런 두 가지 방식의 정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을 고찰했다. 이 런 현상은 언어가 특정 대상을 명확하게 지시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며, 이 단어가 지칭하는 음악이 너무도 급격하게 변해왔고, ‘미니멀’이라는 용어가 형용사이며 애매모호 한 뜻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발되었다. 셋째, 본 논문은 이런 두 가지 방식의 정의가 미니멀리즘 음악의 수용에 미치는 영향을 탐 구했다. 우선 미니멀리즘 음악의 의미는 수렴하고 그리고 발산하는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존 재하며, 수렴이 발산을 억압하는 형태로 표상된다. 그리고 청자는 단어 내부에 작동하는 이 런 역학관계에 의해 미니멀리즘 음악을 받아들일 때 ‘수렴하는 상(像)’을 이 음악 경험 이전 에 전제한다. 다만 이런 억압의 구도가 항상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며, 사례에 따라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중 소통가능성으로 나타나기도, 때로는 미니멀리 즘 음악에 대한 경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미니멀리즘 음악이라는 기표가 독특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러한 상황 자체가 미니멀리즘 음악 고유의 특성이라 보았다. 또한 본 논문은 위와 같은 일련의 논 의를 바탕으로 미니멀리즘 음악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렸다. 미니멀리즘 음악이란, 이 음악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그 기원인 극도로 미니멀한 형태를 계속해서 상상하도록 유도되는 음 악이다. 또한 미니멀리즘 음악이란, 그 안에 포함된 특정 음악 요소를 미니멀한 무언가로 보 고자하는 욕망과 관계되어 있는 음악이다.
        1776.
        2017.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단군신화를 기존의 교육학자들이 선택한 시각과 조금은 색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교육이념으로서 홍익인간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인 간관과 가치관을 제시하고, 또 신화적 사고방식이 교육과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지 않은 데 착 안하여 미분화된 상태로서 교육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단군신화에 내포되어 있는 교육의 중요한 측면들이 해명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신화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과 그것 을 학문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교육을 교육답게 해명하려면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을 혼동하거나 제도적 사실로 파악하는 일상적인 인식태도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종래의 접근방식은 이런 원칙을 충실히 따르지 않음으로써 신화연구에 필요한 학문 적 요건에서 다소 멀어졌다. 이 연구에서는 다시 그 요건을 따라 기존 해석에서 간과되거나 은 폐된 단군신화의 교육적 측면을 해석해 보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 단군신화에서 등장하는 환 웅과 곰은 그 사이에 가로놓인 존재적 격차를 역이용하는 독특한 상호작용을 전개함으로써 그 격차를 점진적으로 해소하는 교육적 관계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단지 단 군신화에서 볼 수 있는 교육의 일단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교육적 측면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날 필요가 있다.
        1777.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한일 간 독도이슈의 시기별 및 이슈별 전개과정을 국제정치·안보적 측면에서 분석을 시도해 봄으로써, 향후 계속되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도발에 효율적으로 대처함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한일 간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한 양국 간 갈등 해결의 계기가 과연 가능 한지를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한일간 독도 이슈의 연도별 추이를 종합적으로 보면, 1950년대 초반에 독도 이슈 발생 건수가 처음으로 급증했다가 이후 40여 년의 비교적 소강 상태를 거쳐 1990년대 중반부터 한일간 독도 관련 이슈가 다시 급증되면서 그 이후로는 독도 이슈 건수가 계속해서 상승기 류 추세로 나타난다. 특히 2010년 이래로 일본의 독도영유권 도발은 국제 홍보전의 양상으 로 나타나고 있어 이에 대한 대비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1990년 이래 한국 언론매체의 독도 기사를 대상으로 빅데이터(빅카인즈) 트렌드분석 결과에 따르면, 독도 기사가 가장 많이 나타난 세 시기는 2012년 8월의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2008년 7월의 ‘일본 문부과학성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의 독도 명기 강행’, 그리고 2005년 3월의 ‘일본 시마네 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등으로 파악되었다. 시기별로는 1950년대의 평화선 선포, 1960년대의 한일협정, 1970년대의 한일대륙붕 협정(제7광구), 1980년대의 유엔해양법협약 체결, 1990년대의 유엔해양법협약 발효와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의 독도 기점 여부, 2000년대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및 2010년대의 국제홍보전 본격화 등이 한일 간 독도 이슈의 추이에 미치는 역학관계를 분석해 보았다. 한편 본고에서는 이슈별 개관을 통해 연례적으로 반복 되풀이되 는 일본 방위백서, 일본 외교청서, 일본 교과서 등의 독도 기술 추이를 비교해 보면서 도발 의 수위가 계속 증가되어 왔음을 도출하였다. 특히 일본 방위백서의 독도 기술 추이를 국제 정치적 및 안보적 측면에서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과의 시기적 연관성 여부를 분석해 보았 다.
        1778.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가 중점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독도학 정립을 위한 학제간 연구”이다. “독도학 정립을 위한 학제간 연구”의 기본과제는 제1과제(인문사회과학 분야)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한 연구’와 제2과제(자연과학분야) ‘독도의 생태보전과 독도해역의 생물상 연구’로 구성하여 1) 독도가 한국 고유영토임을 다학문간 통섭적 연구, 국제 공동 연구를 통해 재확인하고, 2)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한 매뉴얼 개발을 통해 만일의 경우 ICJ(국제사법재판소)나 국제중재재판이나 제3자 소송 등의 국제소송에 임하게 되었을 때를 상정하여,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한국측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한 반박문과 답변서를 비롯한 재판에 임할 매뉴얼(Manual)을 만든다는 데에 초점을 두면서 3) 국제사회에서 용인되는 이론 개발을 통해 일본 측 주장의 허구성과 부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독도학(獨島學)’을 정립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런 목적 하에서 역사, 지리학·문화인류학과 국제법, 정치학의 학제간 통섭연구를 지향한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 성과의 한 사례로 「울릉도쟁계의 타결과 쓰시마번(對馬藩)」(필자:송휘영)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의 국내의 울릉도쟁계에 대한 연구가 주로 국내자료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데 반해서 이 연구는 『죽도기사』 및 『죽도문담』 등 일본측 1차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쓰시마번의 내부에서도 일본측의 무위(武威)라는 위협을 바탕으로 한 강경책에 대해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고 조선에 대해 인교의 도리로써 대응해야 한다는 스야마 쇼에몽과 같은 온건파의 주장이 대두하였으며, 결국 그의 설득과 번내 여론 주도로 말미암아 에도막부가 조선 어민의 죽도도해를 금지하라는 당초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결과인 「죽도도해금지」를 명령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찰하였다. 이러한 고찰은 국내자료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연구에서 남구만 정권의 강경노선이 그 타결을 주도하였다는 결론의 지평을 확대하여 유학자이자 쓰시마번의 유력번사였던 스야마 쇼에몽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역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 지평의 확대야말로 독도연구소의 강점이자 앞으로의 지향점이기도 한 것이다. 또 다른 논문인 「죽도고 분석」(필자: 김호동) 또한 도토리번의 번사인 오카지마 마사요시가 1828년에 지은 『죽도고』를 인용서목의 분석과 함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독도 논문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죽도고』 자료를 인용할 때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측 학자들의 논리와 역사 왜곡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일본 고문서의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이러한 일본측 사료의 비판적 검토는 앞으로 더욱더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바람직한 독도교육을 위해 ‘내러티브’에 주목해야 한다. 독도의 자연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이나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법제적인 접근 모두는 독도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생동하는 삶과는 멀리 떨어진 죽어있고 굳어있는 한갓 돌덩어리 섬으로 바라보게 한다. 독도는 우리 영토라는 영웅담에 기초한 애국주의적인 위인전식 접근 또한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도덕적인 교훈을 제공하는 하나의 모범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이렇듯 생태학적 접근과 법제적인 접근의 진실성을 살리는 한편, 위인전식 접근에서의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내재화함으로써 독도를 동시대 한국인들의 삶과 함께 살아있게 할 수 있는 접근방법이 곧 ‘이야기체 역사’로서의 접근이다. 이를 통해 생태학적 접근과 법제적인 접근, 그리고 위인전식 접근과 같은 여러 영역을 뛰어넘는 다양한 방식의 내적 관계의 총체를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 나타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체 역사’로서의 내러티브를 통해 무수히 많은 내적 관계를 맺고 있는 ‘독도’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로 내면화하게 된다.
        1779.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법적 구속력 있는 합의문서로서 제2차 대전 이후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새로운 국제질서인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법적 정점이다.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국제적 법 체제(legal system)로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 선언 그리고 이를 수락한 일본 항복문서, 연합국총사령부(SCAP)가 제정하여 공포한 법적 구속력 있는 명령들(instruments)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이후의 국제적 합의와 관행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국제적 법적 합의의 체제로 이해할 수 있다. 영토분쟁의 당사국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근거에 대한 국제법원의 실행을 살펴보면 영토 주권 또는 국경관련 분쟁에 대하여 권원(title)을 입증할 적용가능한 조약법(treaty law)이 존재하는 경우 이를 우선 적용하고, 조약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리고 특히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들과 관련된 경우에 기존 행정관할경계유지(uti possidetis) 원칙을 고려하 며, 앞서의 두 가지 준칙을 적용할 수 없는 경우에 대상이 된 영토 또는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effective control) 여부 또는 정도를 기준으로 권원의 존재와 영토주권의 귀속을 판단하고 있다. 국제법원의 사례를 보면 독도문제에 국제법적 근거로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최우선으로 해석하여 적용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경우 당사국간에 분쟁의 해결은 물론 결과를 통한 평화 달성에 한계가 분명하다. 더욱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동서냉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한미일 군사동맹체제 등 당사국의 사활적 국가이익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요인으로 인하여 조약에 의한 영토경계획정을 유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조약을 기초로 국제법원이 사법적 판단을 하는 경우에 당해 법원은 샌프란시스코 조약뿐만 아니라 동 조약의 체결 이전에 이루어진 국제적 합의로서 카이로선언, 포츠담 선언, SCAPIN 677과 1033 등을 동 조약의 영토조항 해석의 기준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1780.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13년의 동경협정, 1922년의 요코하마협정, 1929년의 태평양문제연구 회를 관통하는 YMCA의 첨예한 관심사는 문화적 자치의 공간이었다. 이는 외교적 협력을 통해 획득한 한국YMCA의 고유한 권리로,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의 한국에 문화적 독립에 상응하는 권리를, 외교권이 박탈당한 한국에 국제교류의 통로를 제공하였다.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체 결한 동경협정은 한국 YMCA가 보유한 문화민족주의 실현의 자치권을 일 본YMCA의 체제에 예편시켜, 기관명칭, 의사집행부, 법규제정에 이르기까 지 일본 YMCA에게 동반적 통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1922년 체결한 요 코하마협정은 동경협정조문의 실행에 제동을 걸고, 기관명칭, 건물소유권, 의사집행부구성, 선교사 관할영역에 이르기까지 한국 YMCA의 독자적 자 치권을 천명하고, 구체적으로 반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한일YMCA의 쌍방협약은 3년 후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일본, 필리핀, 하와이로 구성된 태평양문제연구회에 1925년부터 1929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본과 구별된 독자적 국제교류를 가능하도록 수문을 개방했다. 1925년 태평양문제연구회라는 국제기관의 발족단계에서부터 시작된 한국의 참여는 한국문화를 말살시키는 일본정책을 보고를 가능하게 하였고 해외전문가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 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나 1920년 파리강화회의에서 기회조차 두 절된 식민지 한국의 상황 및 한국인의 입장은 1925년 제 1회 태평양문제연 구회에서 평화적으로 진술되었고 1차 세계대전 후 평등과 상생이 지배하 는 국제적 신질서를 모색하는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이해를 증진하는데 기 여했다. 즉 한국YMCA는 단순히 민족주의의 보루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주의의 이상을 구현할 자치의 공간을 제공하였 다. 한국 YMCA의 민족주의는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투쟁을 통해서라기 보 다 장기적이고 은밀한 외교적 방식을 사용하였고 국제주의에 입각한 협력 을 통해 획득한 자치공간 안에서 발현되었다. 국제기구라는 장막 안에 숨 겨진 민족적 이상을 실현할 장이요 민족 지도자를 양육할 백년지대계를 이 행할 장이었다. 이러한 YMCA의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정신을 꿰뚫고 있는 중심인물 은 윤치호로서 그의 YMCA 훈련은 한국YMCA역사의 오류로 알려진 최초 의 YMCA가담자 여병헌에 선행한다. 윤치호는 여병헌이 런던으로 가는 1896년, 한국에 YMCA가 도입된 1903년 이전, 미국의 반더빌트 대학, 에 모리 대학, 학생자원운동의 학생 YMCA대표로 활동했고, 전국신학교 선교 연맹 및 조지아주 YMCA컨벤션에서 YMCA 지도자 훈련을 몸에 익혔던 YMCA인이었다. 윤치호는 뉴욕 본부가 지원한 한국인 최초의 YMCA간사 였고, 모트 등 해외 YMCA 간사의 한국인 자문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수 십 년 동안 YMCA 이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봉쇄 및 이권 착취의 최대걸림돌은 국제관계를 유지한 YMCA의 제압이었다. 따 라서 일제는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가 대구 구치소에 투옥된 기간, 이상재, 남궁억, 신흥우, 아비슨 및 언더우드의 참석과 존 모트의 진행가운데 동경 협정을 체결하여 자치권을 보유한 한국 YMCA에 일본의 감독권을 침투시켰다. 여기에 애국자로 묘사된 한국YMCA 인사들이 한국 YMCA를 일제 에 복속시키는 협정에 서명한 것이다. 그러나 1922년 YMCA의 요코하마 협정에서는 윤치호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한국 YMCA의 자치권을 탈취 하였고, 이로 인해 1925년 YMCA 중심의 태평양문제연구회의 활동이 가 능했으며, 1929년 일제가 태평양문제 연구회에 한국인 참여금지법안을 제 정하고자 상정할 때 한국태평양연구회 회장인 윤치호가 전면에서 한국인 참여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변호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국면은 일반적으 로 애국자의 표상으로 구축된 인물의 해석이나, 윤치호는 삼일운동 이후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친일로 기울었고 대동아이론에 기초하여 서구를 배 척하고 친일에 전향했다는 양극단적 해석의 실증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역사자료의 실증적 검토는 윤치호가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경도된 사실을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에 복잡하게 얽힌 억압의 현실이 친일파 내지 애국자라는 양극단적 해석의 틀에 개인생애 전반과 집단 전체를 삽입 하여 유형화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그러기에는 선택의 폭이 다양하고 유동적이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