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41

        1.
        2024.08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000원
        3.
        2021.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의 청동무기 연구는 尹武炳의 청동단검 형식분류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동북아지역의 청동무기 중 한국에서 출토되는 동검의 특징적인 마연 현상을 찾아낸 것이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세밀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는 바 아직까지 이보다 先見을 가진 형식분류가 나오지 못한 것은 그의 완성도 높은 논문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그의 청동무기 형식분류는 현재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尹武炳의 청동무기 형식분류는 공반품의 검토에서 오류가 발생하는데 필자는 선생의 연구를 기반으로 재분류를 진행하였다. 즉 동검 Ⅰ식과 Ⅱ식 마연의 세부적인 분류를 진행하고, 공반품을 통해 각각의 공존기간을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요령식-한국식동과의 계보 문제(단절), 중세형 청동무 기의 제작지(국산화)에 대한 견해를 간략히 제시하였다. 이는 1960년부터 2020년까지 청동무기 연구사와 출토 사례를 기반에 둔 분류·분석의 결과로 생각되는 바이다. 이상을 토대로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생각해본다면, 형식분류의 확대보다 선학의 연구사를 받아들이고, 치밀한 관찰을 통해 한국고고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점을 특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아가 고고학 연구는 다양한 방향 모색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각화된 쟁점 및 학제 간 협동 연구가 필수적이라 하겠다.
        8,400원
        7.
        2020.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3,000원
        9.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은 한국 현대서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킨 선구자이다. 서예작품에서 검여의 다양한 아호가 확인 되는데 선행연구에서는 서두에서 개괄적으로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논증을 진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동안 발표된 도록의 작품을 바탕으로 검여의 아호와 당호를 재정리해 그 사용연대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먼저, 검여(劍如)란 아호는 1952-1976년 작품에서 모두 확인된다. 그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도인(道人), 거사(居士), 학인(學人), 산인(散人)을 추가한 경우도 일부 확인되고, 1968년 뇌출혈 이후에는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의미의 좌수(左手) 혹은 좌수서(左手書)를 추가했다. 둘째, 1964-1968년 작품에서 검(劍)자만 쓰거나 검(劍)자 뒤에 생 (生), 노(老), 도인(道人)을 추가한 경우도 일부 확인된다. 또한 불함도인 (不咸道人)은 1962-1964년, 시계외사(柴溪外史)는 1956-1963년, 청천 후인(菁川後人)은 1967-1968년의 작품에서 주로 확인된다. 셋째, 서실 관련 당호로 검여서소(劍如書巢)와 관훈서소(寬勳書巢)가 확인된다. 검여서소(劍如書巢)는 검여서루(劍如書樓), 검여서원(劍如書 院)이라고도 부르며, 검여가 1962년 11월에 관훈동 통문관 맞은편 건물에 검여서원(劍如書院)을 개원하면서부터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거주지 관련 당호로 도곡장(道谷莊 혹은 道谷書室)과 시계고옥 (柴溪古屋)이 확인된다. 도곡장은 1960-1963년 작품에서 확인되며, 시계고옥은 1955년 작품에서만 확인된다. 또한 계우(桂寓 혹은 桂洞寓), 가회우사(嘉會寓舍), 경우(京寓) 등이 확인되는데, 관훈동 서실에서 인천 자택이 너무 멀어 1963-1964년 서울의 여관에 잠시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흠모하는 인물 관련 당호로 소완재(蘇阮齋)가 보이는데, 1965 년의 작품에서 처음 확인되며 1965-1976년에 주로 사용하고 있다. 소완 재(蘇阮齋) 뒤에 주(主), 주인(主人), 주인좌수(主人左手)를 추가하기도 했다. 여섯째, 성품 관련 당호로 몽학선관(夢鶴仙館) 혹은 몽학선헌(夢鶴仙軒) 이 확인되는데, 이는 검여의 태몽과 관련된 것이다. 전자는 1964-1976년 사이의 작품에서 주로 확인되고, 후자는 1974년 작품에서만 확인된다. 또 한 1975-1976년 작품에서 눌옹정(訥翁亭 혹은 訥翁亭主人)이란 당호가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작품에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아호 용례를 구체적으로 논증해 보았다. 이를 통해 검여의 작품을 시기별로 감상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연대미상의 작품들에 대한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7,800원
        10.
        201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서예는 함축적인 언어를 간결한 선으로 표현하는 매우 추상적인 시각 예술이다. 또한 知性과 感性을 겸비하고 미적인 ‘情’과 지적인 ‘理’가 상호 융합하여 표현된 心像의 예술로서 그 글씨를 보고 그 사람의 人性과 品格은 물론 도덕성까지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南田 元仲植 선생은 劍如 柳熙綱 선생의 高弟로 생전에 서예와 전각 작품을 비교적 많이 남겼다. 남전선생의 작품에 대해, 靑冥 任昌淳 선생은 “준마가 거침없이 들판을 내닫는 듯하다.”라 하였고, 如初 金膺顯 선 생은 “천성이 진중하여 溫故知新의 新을 창출해 내었다.”라 하였고, 嘉 軒 崔完秀 선생은 “韓中 서예를 관통하여 자기화하고 채색을 이용해 문자조형의 미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라고 하였다. 현재 남전 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 있어 그의 생애와 서법예술 을 구체적으로 논하는데 상당한 제약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주요 전시작품을 토대로 남전 선생의 학서과정과 작품성향을 살펴보고, 그 작품 연대를 체계적으로 구분해 보았다. 남전 선생의 예술세계를 인생에 일대 전환이 되는 사건과 거주지 이전 을 주요시점으로 2기 5단계로 구분하였다. 먼저 1990년 5월 서예에 전 념하기 위해 직장을 사직하고 강원도 인제 미산에 은거하는 시점을 중심 으로 크게 전후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學書期: 1941-1989)는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로, 1971년에 제20회 국전 낙선전을 기준으로 修鍊期와 硏鑽期 2단계로 나 눌 수 있다. (1) 修鍊期(1941-1971)는 검여 선생에게 입문하여 서예를 도제식으로 사사받으며 안진경의 서풍을 충실히 임서하는 한편 검여선 생이 주로 공부하던 청대 서예가들과 추사의 글씨를 집중적으로 공부하 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硏鑽期(1972-1989)는 스승의 필법을 계 승하여 강인한 필치의 행서와 예서를 구사하는 한편 漢簡과 같이 새로 발견된 자료에 천착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는 의지도 확인할 수 있다. 후기(成熟期: 1990-2013)는 산수가 수려한 강원도에 기거하며 서예에 전념하던 시기로, 속초와 고성 죽정리로 이주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隱匿 期, 完熟期, 超逸期 3단계로 세분할 수 있다. (1) 隱匿期(1990-1998)는 인제 미산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1995년을 전후로 그 서풍에 변화가 있 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1995년부터 매년 개최한 ‘시계서회전’과 몇 번의 중국답사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 새로 발견된 자료에 대해 끊임없는 연찬을 하여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고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2) 完熟期(1999-2004)는 속초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흰 화선지나 검은 먹보다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색지와 석채를 활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다. (3) 超逸記(2005-2013)는 고성 죽정리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 시 기에는 임서보다 창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말년에 항암치료를 받으 면서 구도자와 같은 심정으로 작품에 몰입하였던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남전 선생은 역대 한중서예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연마하 여 5체를 두루 섭렵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族徽가 있는 금문과 漢簡을 이용한 작품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해서는 顔眞卿의 해서에 기초하여 寫經을 깊이 공부하였고, 행초는 왕희지 계통을 근간으로 米芾의 것을 소화하여 자신의 서풍을 선보이고 있다. 스승의 인품과 예술혼을 흠모하고 이를 후학들에게 전해주고자 무던히 애쓰던 남전선생의 人品高와 藝術香은 다시 후학들에게 이식되어 새 로운 형태로 면면히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7,700원
        11.
        2016.03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기존에 논의되어진 미디어와 중독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고 유년층에 있어서 스마트 미디어 중독의 유형 파악과 함께 중독의 요인에 대하여 조사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부모 및 선생님의 중재의 유형이 어떻게 유년층 스마트 미디어 중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녀와 학생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스마트 미디어에 대한 교육을 효과적으로 실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부모와 선생님의 역할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연구결과, 유년층의 스마트 미디어 사용에 있어서 ‘일상생활장 애’, ‘강박’ 그리고 ‘불안’과 같은 유형의 중독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에서 일상생활장애가 가장 두드러진 중독적 요인으로 분석되어졌다. 또한, 일상생활장애에 대한 영향력으로 성별, 이용시간, 부모의 적극적 중재, 부모의 소극적 중재 그리고 선생님의 소극적 중재가 유의미한 변인으로 조사되었다. 더불어 유년층의 스마트 미디어 중독 유형 중 강박에 대한 설명력을 갖은 변인은 이용시간과 부모의 적극적 중재로 제한적으로 나타났으며 불안에 영향을 미치는 변인은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로 유년층의 스마트 미디어 중독을 예방하기 위한 변인을 예측할 수 있었으며 추가적으로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100원
        13.
        2013.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本稿は、韓国と日本の教員を対象とし、非教員に対する先生呼称の使用実態と意識を対照分析した。分析の結果、以下のような結果が得られた。第一に、非教員が先生と呼称されることに違和感を感じる教員は日本の方が韓国より多く、違和感がないと答えた教員は韓国の方が多い。先生呼称使用の拡大傾向は日本より韓国の方がもっと強くなると考えられる。また、韓国の教員の場合、非教員に比べて教員に対する呼称=先生という絶対的な呼称意識が強い。第二に、韓国の教員は典型的に先生と呼称される職業群以外の人に対する先生呼称の使用率が低く、韓国社会の先生呼称使用の拡大傾向のレベルまでは至っていない。日本の教員の先生呼称の使用対象は非教員のそれとあまり違いがない。今後、韓国社会における先生呼称使用の拡大現象を受け入れる速度は教員より非教員の方が速いと予測されており、日本社会では教員、非教員ともにその現象を受け入れる速度には違いがないと見られる。
        5,200원
        14.
        201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本論文以先譯後釋的方法探討了元代著名文學家楊維楨所寫的<淸苦先 生傳>, 對中國傳統茶文學及茶文化有何影響, 其價値所在何處? 以茶爲題 材的傳記文, 通常叫做‘茶傳’, 其主要特色是, 化茶爲人來敍述其模擬生平所 歷, 始自蘇軾<葉嘉傳>, 而二百年來從無踏訊, 無人寫出化茶爲人的傳記散 文, 直到元楊維楨才苦心刻劃出一篇宏動茗茶雅壇的<淸高先生傳>。其文 章內容發揮了古代茶人的文化風格與風雅高節, 涉及各地所産的茶有何特色, 注重茗茶之自然應物, 盧仝․陸羽․蔡襄等自發其才, 各顯其能, 以‘淸’與‘苦’ 的審美境界來悟明茶道, 留下萬邦名香, 楊維楨特別重視茶詩同行, 聞茗鬪 茶, 以茶爲君子相對, 其文化談論的嚴格態度前人無以可比, 故能欣起茶尙 文學的氣風來踏之者續出, 終而由此肯定傳統茶文化的雅致昇華。
        6,000원
        15.
        2009.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Both people in the mainland China and Taiwan, use sa,e Chinese language. Pu-tong-hua, However, after the separation from 1949, many words have diversified into their different meaning. Especially, concerning the second person, people between the Taiwan strait ususlly make mistakes in the use of the meaning of tai-tai, aii-ren, xiao-jie, xian-sheng, tong-zhi, shi-fu, when the people in Taiwan first visit their mother land around in 1980s. However, ever since the exchange of commercial business and culture visits. over ten million Taiwanese have visited their motherland. People between the Taiwan strait now can understand and use each other's language and this will be the basic of the unification of China.
        4,000원
        16.
        2007.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400원
        17.
        2007.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imed to let people recognize lecture halls and to investigate the short history of Go un Choi Chi -won, an object of enshrinement , to examine the location environments, establishment background and meaning of Jacheondae, Oksan Lecture Hall , Munchang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located in Gunsan area in Jeollabuk-do. The results concerning the facilities of the said historic sites and the arrangement of trees could be summarized as below. 1. Goun was a person from Silla and studied in Tang Dynasty when he was 12 (in 868) and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6 years when he was 18 and became a Jinsa (進士) so that people were very surprised at his smartness. At the age of 20, he became a Yunam Jeoldosa (桂南 節度使: military officer) in China and commander in chief of eastem section and was in charge of documentation duties. At that time, the insurgent Hwangso rebelled against the country and Goun became famous for putting down the rebel as a Dochonggyeonggwan (都統警官) . 2. Among 12 remains related to Goun distributed in Jeollabuk-do , 1 pavilion and 3 lecture halls including Jacheondae, Oksan Lecture Hall , Munchang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in Gunsan’s Okgu area and Jacheondae and Munchang Le cture Hall have been located in Okgu Hyanggyo and Oksan Lecture Hall has been on the right side of Okgu Hyanggyo flanked by a wall. Amogn them, Jacheondae was the place where Choi Chi-won read books when he followed his father who was appointed in Naecho-do as a military officer of Silla during his childhood. Meanwhile, Munchang Lecture Hall, Oksan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were f ounded by regional Confucian scholars in the reign of Sukjong in Joseon Dynasty (in the heyday of Confucianism) to follow the thought of loyalty and filial piety and lofty knowledge of Choi Chi -won. There many regional competent scholars have been brought up and they have played a large role in doing religious services for ancient sages and in maintaining the Confucian community order. 3. Jacheondae in Okgu-eup was actually located on a hill at Seonyeon-ri and three lecture halls were situated in the flat village with low mountains and they were surrounded by private houses. In terrns of buildings and main planting species, in Munchang Lecture Hall , inner Samun and shrines were arranged in a row. Meanwhile, inner Samun, outer Samun and space for religious services were arranged in a row and education space and managerial sector were in symmetrical form and the space for religious S8rvices was arranged in a rear(a form of building arrangement of Humyojeonhak ) in Oksan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In addition, crape myrtle was unique as a planting species and they were planted in symmetrical form in education space and space for religious services
        4,000원
        18.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000원
        20.
        200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7,000원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