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연해자평에서 주장하는 육친 가운데 이견이 존재하는 財星과 官星의 문제점과 타당성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학자인 진소암은 보 수적인 유교사회에서 자식이 부친을 극하는 財와 官의 배치는 효 윤리를 위 배하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부모는 모두 인성으로, 자식은 남녀 모두 식 상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재관의 배치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이 중요한 財官이 혼동되면 운명을 판단하는데 오류가 발생하고, 명리의 신뢰가 손상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재관의 배치에 대한 혼란을 막고, 하극상의 효 윤리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연구가 필요하나 아 직까지 부족하여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성역할 관점에서 부친(재성)과 모친(인성)의 역할을 조명하고, 유전자 관점에서 자식(관)을 연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소암의 육 친론에는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의 오류를 바로잡 고 논란이 되는 재관의 배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기 위해서는 육친은 위계적 인 관계가 아닌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는 관점이 필요함을 밝 혀냈다. 또한 자식으로서 관의 배치는 유전자가 전달되는 생물학적인 관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주제어: 육친론, 성역할, 공존화, 진소암, 재관의 배치, 오행의 위계.
남고 이지용은 남명의 유향이 스민 산청군 단성에서 태어나 남명에 대한 존모의 뜻을 품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학문적인 면에 있어서는 남명학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남명학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 는데 있어서는 뛰어난 묘사와 정제된 문풍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시는 인위적인 수사와 彫琢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정의 발 로이며 天稟과 자질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관조와 성찰에 의 해 발현된 언어들은 아무런 격의 없이 사람에게 스며들 듯 감동과 찬탄이 나오게 한다.
「관등행」은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악부시 형태의 시로 당시의 풍속과 시대 상을 읽을 수 있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민속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요 한 자료가 될 만한 작품이다.
履齋 宋鎬彦은 한말 경남 삼가군의 학자인데, 그는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에 대한 인식에 있어 매우 흥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남명의 고향과 같은 지역에 살았고, 학문적으로는 尹冑夏, 李震相, 郭鍾錫 등에게 배워 퇴계의 학맥에 닿아 있었다. 그의 문집에 보이는 남명과 퇴계의 인식에 있어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특히 남명에 대해서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를 상징하는 敬義劍을 읊은 「南冥先生古劍歌」와 퇴계에 대해서는 한주 이진상이 부르짖은 祖雲憲陶가 새겨진 옥사자인을 읊은 「玉獅子印歌」를 들 수 있다. 두 작품 가운데 「남명선생고검가」는 경의검을 통해 남명의 사상을 읊은 것이고, 「옥사자인가」는 옥사자인을 통해 한주 이진상이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것을 읊은 것으로, 바로 남명과 퇴계를 대비시켜 논한 것이 아니라서 두 작품이 긴밀한 연관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옥사자인가」에서 송호언의 퇴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는 있다. 이재의 남명에 대한 생각은 남명의 제자들에 대한 시, 특히 삼가군수로 부임한 申斗善이 雷龍亭을 중수하면서 이재에게 명하여 지었던 「雷龍亭詩」에 잘 드러나 있다. 「뇌룡정시」에서 그는 인을 회복하여 乾道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바라는 것인데, 이를 실행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며, 남명이 바로 千仞壁 立의 기상을 가지고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남명선생고검가」는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역사가 깊은 칼을 남명이 지리산에서 갖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뜻 으로 없애고자 해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이 그의 敬義劍을 가지고 세상의 일들을 처리하였다면, 온 세상이 밝고 정의로운 경과 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칼이 남아 있으니, 후대 사람들은 경의 뜻을 담은 여덟 자의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재의 퇴계에 대한 인식은 이재가 퇴계의 시에 차운한 3제 4수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雙明軒의 차운시는 퇴계가 한 때 거처하던 장소에서 퇴계를 생각하고 그 서글픈 심회를 노래한 것이고, 四樂亭 차운시는 사락정의 모습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퇴계의 자취를 읊었는데, 퇴계를 사모하여 도의 眞諦를 그에게 묻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노래한 것이다. 특히 「옥사자인가」는 「남명선생고검가」와 마찬가지로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주자의 학문이 퇴계로 이어진 것을 寒洲 李震相이 계승하였음을 여러 고사와 비유적인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사자를 그려 자신의 학문을 전하였기에 사자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 되었지만, 꼭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혔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후학들에게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경계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퇴계에 대해서는 남명에 대한 것만큼 현실적 실천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만 후대의 학자가 부르짖는 ‘祖雲憲陶’의 주체로서 주자로부터 조선후기 이진상에게 이르기까지 그 학문의 정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였다.
남명학 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남명학의 대중성과 실천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남명의 합천 유적을 주목한 것이다. 합천지역의 주요 남명 유적은 12개소이다. 삼가면 5개소, 합천읍 2개소, 쌍책면 2개소, 가야·용주·대병면 각 1개소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삼가면은 남명의 탄생지이자 남명이 뇌룡정과 계부당을 지어놓고 강학을 하였던 곳이니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유적에는 복원된 생가처럼 유적으로 남은 곳도 있고, 이영공유애비처럼 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으며, 함벽루처럼 문학경관으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남명 유적은 이처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남명의 합천 유적에는 남명학의 주요 부면들이 잘 드러나 있다. 탄생지에서는 위대한 학자의 등장에 대한 예감, 뇌룡정과 함벽루에서의 부동과 역동이라는 남명 자아의 역설구도, 부모 묘비에서의 과장되지 않는 효심, 황강정과 사미정에서의 진정성 있는 우정, 이영공유애비에 나타나는 관료와 백성의 이상적 관계, 「을묘사직소」에서의 비판적 현실인식 등이 그것이다. 합천지역 남명 유적에 대한 활용 방안으로는 뇌룡정에서의 神性 찾기 프로그램 개발, 합천의 내외적 연계망을 활용한 남명학 문화탐방 노선 개발, 함벽루를 중심으로 한 회통 문화의 재구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로써 합천 공간을 중심으로 남명학의 핵심은 더욱 부각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爲己之學이라는 용어는 爲人之學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쓰인다. 위인지학은 출세가 목적인 반면 위기지학은 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명이 위기지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면 이는 출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는 그가 강조했던 엄정한 출처관과도 직결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명이 이처럼 중대한 의미가 있는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변한 시기가 과연 언제였던가 하는 점을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를 중심으로 논증해 보았다. 그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남명이 위기지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환한 것은 처음으로『성리대전』을 읽으면서 허형의 언급을 접하고 크게 자극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둘째, 다만 이 시기가 25세냐, 26세냐, 31세냐의 문제인데, 이는 요컨대 행장과 연보의 말이 본인의 기록과 어긋날 때 어느 것을 근거로 삼을 것이냐의 문제라는 점에서, 행장을 바탕으로 제기된 25세설과 26세설은 남명이 기록한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31세설에 대해 설득력을 잃는다. 셋째,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의 ‘已三十餘矣’라는 말이 科擧에 여러 번 낙방하고 난 뒤라는 곳에만 연결되고, 그 뒤 『성리대전』을 본 것과는 연결시켜 볼 수 없다는 견해는,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라는 글을 남명이 기록으로 남긴 이유와 관련시켜 이해하면, 당연히 그 뒤에 『성리대전』을 가져다 읽었다고 함이 순리라는 점에서 역시 설득력을 잃는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를 통해서 원전비평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고, 특히 2차 자료에 근거한 기록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1차 자료의 기록과 어긋날 경우에는 1차 자료에 따라 마땅히 수정되어야 함을 확인하 였다. 더구나 남명의 위기지학으로의 전변 시기에 대해서 필자의 견해를 참조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중국의 熊禮滙 교수도 필자와 같은 결론을 낸 것에서도 31세설의 정당함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만하다.
出處는 儒學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중요한 덕목이며, 많은 유학자들이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남명 조식은 출처를 君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평생 ‘處士’로 실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정의 계속된 출사요구를 거부한 남명을 퇴계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문적 體認의 결과가 아닌 개인적 기질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기절’이나 ‘기상’, ‘절개’등 개인적 차원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남명의 처사적 삶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명의 ‘처’ 즉 ‘물러남’이 가지는 국가권력과의 ‘거리감’에 주목한다. 유학은 현실정치를 긍정하여 ‘나아가감(出)’을 강조했지만, ‘處-물러남’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처’는 유학자들이 현실의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견제와 긴장을 만들어낸 요소이기도 했다.
남명은 이러한 ‘물러남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으며, 그의 출처사상과 처사로서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남명의 處는 개인적 기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경계’와 ‘비판’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폭력적 국가권력’을 ‘공공의 국가권력’으로 변화 시키려는 문제제기도 담고 있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른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남명의 비판과 그가 실천한 ‘물러남의 정치학’은 현대의 정치현실에 있어서도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의 성격을 보다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 현대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 조식의 사상에 나타난 개별화 교육의 의미를 분석하여 내러티브 관점에서 바람직한 유아기 개별화 교육의 시사점을 논의하는 데 있다. 연구결과, 남명은 학습자의 마음성찰을 근간으로 개인의 자질을 인정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존중하는 개별화 학습을 실천한 것으로 분석 되어졌다. 내러티브 관점에서 남명사상은 자아성찰로서의 내러티브 접근, 잠재능력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 상호작용 관계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결과가 주는 시사점은 내러티브 관점에서 학습자 개인의 자질을 어떻게 인정하고 지도할 것인지에 대한 유아기 개별화 교육에 큰 함의를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명사상에 담긴 교육의 의미를 통해 유아기 개별화 교육을 이해하고 그 실천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산천재는 남명학이 완성된 곳이자 제자들과 강학한 본산이다. 산해정이나 뇌룡정과는 달리 산천재는 남명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곳에 지은 건물이다. 남명은 그 터를 잡기 위해 11번 이상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답사하고서 결국 『주역』 「대축괘」의 뜻을 취하여 자리를 잡았으며, 동시에 지리산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를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남명의 주요 제자들은 대부분 산천재에서 배웠으며, 그 교육의 효과는 후일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많은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궐기하여 구국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산천재는 남명 사후 2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1592년 소실되었고, 225년 후인 1818년에 복원되었다. 산천재의 중건은 정조 때부터 있었던 남명 선양 사업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본다면 제2차 남명 선양사업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 당시에 있었던 서원의 사액 및 영의정 추증 그리고 문묘종사운동이 제1차 선양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산천재가 폐허로 남아 있던 시기 그곳을 지나간 인물들이 남긴 기록에서 우리는 경의검에 대한 새로운 정보 및 사성현유상과 남명 고택에 대한 정보도 접할 수 있었다.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18년 복원한 산천재에서 약 반세기 후 1871년 덕천서원이 훼철되고 몇 년 뒤 곧 사성현유상을 모시고 남명을 배향하면서 채례를 계속 이어 나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용암서원이 훼철되고 1883년 무렵에 진행된 뇌룡정 중건과도 일맥상통 한다.
본고에서 살펴본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남명학의 계승과 선양사업이 시기별로 몇몇 열성 인사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에는 또한 늘 본손들 중에서도 정성을 기우리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남명학파는 비록 그 세력은 미약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산천재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은 제문이 가지는 특성에 주목하여 南冥 曺植(1501-1572)의 제자들이 지은 11편의 제문을 분석한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남명의 제자들이 문하에 나아간 때는 언제이며, 당시에 그들이 저마다 받은 각별한 가르침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11편의 제문에 드러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오건은 1551년에 남명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자신이 스승에게 받은 특별한 가르침을 ‘공부하는 방법’과 ‘때를 알아보는 의리’로 함축했다. 정인홍은 남명의 교육은 책을 잡고 읽는 강학이 아니라 제자들의 정신을 깨우쳐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김우옹은 남들보다 백배 천배 노력하라는 말씀, 출처에 관한 경계, 성성자를 전해 받은 일, ‘雷天’ 두 글자의 훈계 등을 남명에게 받았으며, ‘서리 내린 소나무와 눈 쌓인 측백나무’처럼 어떠한 어려움에도 자신을 간직하라는 장려를 입었다.
정구는 남명이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밤낮을 이어가며 강학을 진행했는데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고 회고하며 스승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쳤는지를 서술했다. 최영경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남명이 가진 ‘깔끔한 맑은 기풍’에서 큰 배움을 얻었다. 하항은 남명의 교육 방법의 특징으로 일에서 비유를 취해 깨우치게 했다는 점을 특기했다. 이 기록을 통해 남명이 문장을 지을 적에만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적절하게 활용하여 깨닫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는 스승의 모습을 봄날에 눈이 녹는 듯이 감화시키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제신은 스승의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므로, 그분의 언행이 일치한 것은 자신만이 안다고 확신했다. 류종지는 남명의 교육 방법을 ‘병통의 뿌리를 시원하게 도려내고 뒤이어 약을 처방하는 것’이라고 기억했다. 곽율은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칠 적에 두 양단을 들어 남김없이 극진하게 말씀해주셔서 정성스러운 가르침에 감화를 입어 분발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조원은 자신의 자질이 매우 부족했지만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장려해주신 일에 깊이 감격했으며, 가르침의 핵심을 ‘居敬窮理’라고 요약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그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제문의 작자들은 남명 문하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 제자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남명이 산청의 산천재에 은거한 만년에 입문한 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 남명은 절실한 비유에 의해 새롭게 각성시키는 것, 핵심 단어와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수양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 자신이 살아온 삶에 근거해 학자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보여주는 것 등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글은 덕천서원의 공간과 명칭에 담긴 의미를 심도 있게 고찰한 것이다. 서원의 공간구성과 공간명칭에는 그 서원에 제향 되고 있는 선현의 학문과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덕천서원의 경우 남 명사상이 공간과 명칭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 덕천서원의 공간구성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동재·서재의 앞 에 方塘을 만들고, 그 연못에 연꽃과 소나무 한 그루씩 심어놓은 것이 다. 방당을 만든 것은 주자의 「觀書有感」에서 취한 것으로, 天人合一을 지향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또 方塘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소나무와 같이 변치 않는 남명의 志節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방당에 연꽃을 심은 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언제나 淸香을 잃지 않는 연꽃에서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은 柳下 惠의 모습을 발견한 남명의 현실주의 세계관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방당은 종합적으로 남명의 出處大節과 隱逸이 아닌 處士로 서의 정신지향을 공간에 구현해 놓은 것이다. 공간명칭을 살펴보면, 堂名을 敬義堂이라 하고, 동재·서재의 명칭을 사액이 되고 난 뒤 進德齋·修業齋로 바꾸었는데, 이 속에도 각별한 의미 가 담겨 있다. 남명선생편년에 ‘남명의 학문은 주역 坤卦 六二爻와 乾卦 九三爻에서 터득한 것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곤괘의 ‘敬 以直內 義以方外’와 건괘의 ‘君子 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 誠 所以居業也’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남명은 敬·義와 忠信·修辭를 공 부의 두 축으로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덕천서원 경의당과 진덕재·수 업재에는 심성수양의 실천을 강조한 남명학의 핵심을 모두 갖추어 놓 았다. 문루의 명칭이 幽貞門에서 왜 時靜門으로 바뀌었는지, 그 의미는 무 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전하는 설이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남 명사상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鷄伏堂·雷龍亭 등의 명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남명은 평상시 淵黙 같은 主靜工夫를 위주로 하였으 니, 時靜의 의미는 그때그때 수시로 主靜의 涵養을 추구하고자 한 남명 의 학문정신을 덕천서원 전체를 포괄하는 문의 이름에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幽貞의 의미가 현실을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현실을 등지지 않은 남명의 정신을 투영하여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본 연구는 남명의 교육사상을 근거로 청소년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다. 이를 위하여 인성교육에 대한 교육요구를 PRECEDE-PROCEED 모형에 따라 설문문항을 개발하여 중학교 2학년(272명)과 고등학교 2학년(243명)으로 전체 515 명을 대상으로 교육요구를 진단하였다. 조사 결과, 청소년의 인성교육에 필요한 주 요 인성덕목은 존중, 정의/공정성, 책임, 성실, 정직/믿음, 예의, 배려의 7가지 항목 으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덕목을 기초로 하여 남명의 교육사상을 프로그램 구성의 주요내용으로 설정하였다. 프로그램은 전체 10회기로 구성되었으며, 각 덕목을 한 회기에 한 덕목씩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진행방법은 남명이 제자들을 교육한 방법과 협동학습법을 프로그램의 운영에 적용하였다. 인성덕목에 대한 이해 및 실천이 과정평가의 목표가 되며, 이를 통해 다양한 문제 행동을 줄이는 것이 영향평가의 목표가 되었다. 이후 장기 성과평가의 목표는 학생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수준 향상과 삶의 만족도를 증가하는 것이었다. 본 연구를 통해 개발된 남명의 교육사상에 근거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은 추후 한국의 자생적인 교육사상을 근거로 하는 인성교육 프로그램의 확산 및 정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瞻慕堂 林芸(1517-1572)은 조선 시대 安陰 葛溪에 살았던 儒學者로, 그 형 葛川 林薰(1500-1584)과 함께, 살아서 孝⼦ 旌閭를 받아 당대에 實踐儒學의 表象으로 알려져 사후에 一蠹 鄭汝昌(1450-1504)을 제향 하던 ⿓門書院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형 갈천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南冥 曺植(1501-1572)을 從遊하였던 것으로 山海師友淵源錄에 收錄되어 있는바, 학문의 성취와 관련지어 유추해 보 거나 연령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남명의 문인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瞻慕堂集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1501-1570)과의 師承 관계를 표현 하고 있는 글들이 곳곳에 보일 뿐만 아니라 후인이 찬술한 瞻慕堂 墓道文字에서도 退溪의 門人임은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南冥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만한 첨모당 본 인의 글은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남명이 66세 때 첨모당을 만난 사실이 남명학파의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그 이 전에 만나서 담화를 나눈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566년이라면 첨모당이 50세 때이 니, 첨모당의 학문에 대한 남명의 충고가 첨모당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첨모당의 학 문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명연보에 전하는 남명과 첨모당의 만남 정도는 싣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서는 지금 전하는 첨모당집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첨모당의 손자 임곡 임진부가 남명이 절교했던 귀암 이정의 曾孫壻라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林⾕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无悶 堂 朴絪이 편찬한 山海師友淵源錄의 龜巖 李楨 부분의 기록 가운데 淫婦獄事와 관련된 기록을, 일찍이 직접 刪削해 주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뒤에는 林⾕의 아 들 林汝栢이 无悶堂의 아들 朴曼에게 편지로 간곡하고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임 여백은 귀암을 향사하고 있는 龜溪書院의 院⻑을 지냈고, 귀암을 위해 귀계서원의 賜額을 요청하여 성사시켰으며 귀암의 시호를 요청하는 상소도 작성하여 올린 적이 있었다.
남명집에 귀암 관련 기록을 남긴 인물은 내암 정인홍인데, 정인홍이 무민당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임곡과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다 임곡의 두 아들 이 모두 무민당의 문인이 되었으니, 내암은 임곡의 아들들로서는 스승의 스승인 셈 이어서 비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이 마침 인조반정으 로 인해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신원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0년대 이후에는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강우 유림 사회에서도 정인홍을 적신으로 인정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임곡 집안의 처지에서는 첨모당집을 간행할 때에 될 수 있는 한 남명과 관련을 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西人 老論系 학자들이 南冥 曺植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상황 속에서, 남명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주장하여 존숭과 선양을 촉구한 이들은 星 湖 李瀷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조선후기에 남명학파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 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호학파 학자들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 을 했다고 이해된다. 이 글은 성호의 제자인 順菴 安鼎福이 南冥集에 기록한 箚記를 통해 그가 남명의 학문과 삶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으며, 그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었는지를 살펴보았다. 箚記에 근거해 볼 때, 안정복은 남명집을 매우 면밀하 게 읽고 관련 사실이나 자료를 참조하면서 고찰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남명집을 정밀하게 연구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남명이 진 정 어떤 인물인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남명의 문학 작품에 대한 품평이나 견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 인물ㆍ시기ㆍ사 건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사실과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고증한 점 등 을 고려한다면, 그가 남명집을 읽을 때 무엇에 유의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안정복은 남명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 인물의 학문과 인품에 관한 평가를 스스로 확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알게 된 남명의 학문 과 언행을 벗과 제자들을 권면할 때 인용하여 말했으며, 남명과 관련 있는 인물 들의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연관성을 드러내어 연원을 밝혔다. 그러므로 남 명에 대한 안정복의 관심과 선양은 남명학파에게 가장 암흑한 시기였던 18세기 에 빛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남명집의 간행이 언제 처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이미 전병윤과 오이환, 김윤수의 논문에서 1602년이냐 1604년이냐의 논란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해 이 상필이 南冥學硏究 30집(2010.12.31간행)의 「南冥集 初刊年代 辨證」이란 논문에서, 남명집의 초간은 남명의 문인 정인홍이 그 서문을 쓴 1604년 8월 이라 볼 수밖에 없으며, 그 뒤 목판이 불타 관찰사 柳永詢의 도움으로 다시 판 각되어 간행되었다는 그 판본을 병오본으로 명명하게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은 바로 그 병오본으로서, 제1권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 있고, 제2권과 제3권(부록)이 한 책으로 장책되어 있다. 제1책은 서문 3장, 남 명행장 9장, 남명비문 6장, 제1권 37장 등 모두 55장으로 되어 있다. 제2책은 제2권 88장, 제3권 36장 등 모두 124장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남명 집으로서는 最古本이며 完帙本이다. 이 병오본과 기유본을 대조하여 병오본의 내용을 기유본에서 어떻게 고쳤던 가 하는 점을 낱낱이 살펴본 결과 그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는 병오본에서 기유본으로 바뀌면서 112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는 점 이다. 전병윤과 오이환은 28곳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같은 곳에 서 84곳이 더 발견되었고, 그들이 보지 못했던 2권 마흔다섯 장에서 28곳을 발 견함으로써, 그 사이에 변화된 곳이 모두 112곳임이 드러난 것이다. 둘째는 단순한 오자 수정이 72곳에서 이루어졌고 이들은 대체로 수정될 만한 것을 수정했다고 하겠으나, ‘先乘霽日’의 경우는 재고의 여지가 있고, ‘胤孫’의 경우는 잘못 수정한 것이었다. 셋째로 시 형식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 가운데 ‘全身五十年前u’의 ‘五十年’은, 이 판본을 근거로 기존의 ‘四十年’을 수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확정할 만하다. 넷째로 문맥과 관련하여 이정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될 만하다. 이 가 운데서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특히 신명사명의 뒷부분을 완전히 삭거한 것 은 退溪의 指斥을 염두에 둔 결과로 해석된다. 그리고 退溪에게 ‘獨立之地’라고 한 것이라든지, 權應仁에게 五柱를 보내어 자신의 임종 시기를 알아보게 한 편 지라든지, 異姓養子를 분명히 기술한 것이라든지, ‘江樓’ 시를 보각한 것 등은 앞으로 연구의 한 부분으로 인용될 만한 것이다.
이 논문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문에 대한 새로운 연구관 점의 필요성, 그의 처사적 삶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경의(敬義)정신과 사회적 실천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의 학문은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李珥. 1536~1584)를 중심으로 하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 學派)와 같은 이분법적 연구를 지양해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연구는 일제의 어용학자인 Takahashi Toru(高橋亨.1878~1967)가 남긴 일제(日帝)의 잔재 (殘滓)이기 때문이다. 둘째, 처사(處士)로서 남명은 학문적으로 이단(異端)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 는 늘 불의에 항거하고, 무능한 왕과 그의 어머니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척신(戚臣)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조정에는 출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늘 국정 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시무책을 제시하였고, 다양한 문인을 교육하고 교유 하면서 장차 다가올 국난을 대비하였다. 셋째, 그는 국가의 안위와 민생을 위해 늘 국정의 혁신을 주창하였다. 특히 남 명은 최고통치자인 왕의 진정한 희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에 잘 나타난다. 종합하면, 남명의 사상에는 근대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무실(務實)을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당리당략이나 특정 학문을 고집하지 않 았고, 연구와 실천에서 항상 객관적·합리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남명의 학문과 사상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과 삶에서 현대의 한국병을 고칠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조선 중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하학론(下學論)’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당대 퇴계 등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하학 (下學)’을 강조했다. 그는 하학이 유학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측 면에서 하학을 경시했던 당시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 의 ‘하학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유학에 있어 하학이 가지는 위치를 먼저 검토했다. ‘하학’은 유학을 도가나 불가 등 다른 사상과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선진 유학에서부터 이어져온 중요한 전통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유학 의 본질은 하학에 있다고 보았으며, 하학(下學)의 대상인 현실세계를 떠나지 않 았다. 유학자들은 세속에서 상달하고 도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속에서 상 달의 성스러움을 실현하려고 했다. 불교나 도교는 상달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유학과 비슷하지만, 하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학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학은 정치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학은 유학자를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며, 하학의 세계에 대한 걱정 은 바로 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학의 하학전통을 잘 이해한 사람이 조선 중기 남명 조식이다. 남명 에게 ‘하학’은 단순한 공부상의 절차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의 사상에 있어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명에게 현실을 떠난 학 문은 실(實)이 아닌 헛됨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유학의 경세(經世)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남명사상의 특징 중 하나인 실천성과 경세성 등을 이런 ‘유학의 하학전통’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남명의 하학론을 단순한 학 문적 단계로서가 아니라 유학의 주요한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사상(敬義思想)이나 출처관(出處觀) 등 남명의 주요 사상에 있어서도 그의 하학론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고, 그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敬義사상에 내포 된 교육적 의미를 추출하여 오늘날 유아인성지도를 위한 교사의 리더십을 탐색하는 데 있다. 연구결과, 敬義사상에 근거한 유아인성지도 교사는 마음 을 다하여 수양하며, 올바른 배움으로 인지적, 정의적, 활동적 리더십을 義 롭게 실천해야하는 것으로 분석되어졌다. 본 연구결과가 유아기 인성지도 교사의 리더십 연구에 주는 시사점은 남명의 敬義사상을 통하여 정체성 있 는 교육자 역할을 정립하고 인성지도를 위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는 점이다.
16-17세기 초반은 南冥 曺植(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 및 재전제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학문적ㆍ정치적 활동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 려웠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시기는 남명학파의 전성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6-17세기 초반에 창작된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 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수양론을 파악해보고자 시도했다.
箴의 효용성에 주목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분석하여 수양의 실천 양상 을 분류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수양론의 핵심 사상을 제기하여 그것에 따른 실천 의지를 촉구한 작품군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ㆍ본질적 측면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규계하는 것이므로, 치료 방법중에서 原因治療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특정한 병폐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적시하여 그것에 따른 수양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어떤 증상에 대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對症治療의 명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는 어 느 시기나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지어진 작품으로, 이것은 주위 환경이나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병을 호전시키는 改善治療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3가지 유형 가운데 편수가 가장 많은 것은 對症治療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총 10편이 여기에 속한다. 原因治療는 5편이 있으며, 改善治療는 4편이다. 곽재우의 「調息箴」은 호흡법에 관한 내용으로 다른 箴 작품의 일반적인 성 향과 구별되어 기타로 분류했다.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 학자들이 창작한 箴 작품은총 20편인데, 비슷 한 시기에 지리산권의 서부인 호남지역에서는 箴 작품의 수량이 6편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2편이 임금을 위해 지은 官箴이고 나머지 4편은 경전 을 해석하거나 전대의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箴 창작 양 상과 대비해 보자면,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품은 수양의 내용 및 방법을 서술한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따라서 16-17세기 초반 남명학 파의 箴 작품은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고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