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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고의 주제는 통일신라시대 성곽에서 출토되는 기와의 해석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기와는 타 유물에 비해 출토량이 대량인 점, 용도가 다양한 점, 사용 기간이 장기간인 점, 여러 단계의 기와가 동시에 폐기되는 점, 재사용과 재활용의 문제 등 고고자료로서의 기와 가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통시적·공시적 해석에 난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출 토 맥락이 명확한 일부 유적의 출토 사례와 기존의 기와 분석 연구 성과 등을 토대로 통일신 라시대 성곽 출토 기와의 해석 방법을 고찰해 보았다. 동래고읍성지의 기와 출토 사례를 통해 토성 초축의 상한 연대는 8세기대, 1차 수축은 9 세기대로 추정되고, 지구별로 축조 시점이 상이할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었으며, 수축 과정 에서의 기와 재활용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기와의 재활용에 대한 해석은 성곽이나 건물지의 여러 출토 사례로 볼 때 유적의 폐기에 이어진 자연 탈락으로 인한 퇴적이나 산포와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으며, 이에 따 라 ① 시기의 한정성, ② 타 유물 혼입 여부, ③ 기와의 잔존상태, ④ 해당 층위 외의 퇴적층 에 포함된 기와 및 폐기 시점의 기와 노출상태와의 비교 등을 고려해 출토 맥락과 용도(자연 폐기 또는 재활용)를 해석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성곽에서의 평기와 사용을 위계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문제는 기와의 사용 유무에 따른 상대성, 장식기와 사용 여부에 따른 상대성이 있으므로 인접한 동 시기 유적과의 상대적인 비교 분석이 필요하며, 사례로 부산 배산성과 낙민동유적의 출토 기와 양상을 비교하여 거 칠산군의 치소로서 가진 배산성의 성격이 사회·경제·문화의 중심이라기보다는 행정·군 사적인 거점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출토 기와의 특징에 대한 해석 방법은 기존의 평기와 분석법에 더해 삼국~통일신라시대 의 평기와 제작법 전개를 4단계로 제시하였고, 특히 통시적인 해석에 가장 중요한 속성인 타날판 크기의 오독 사례로 아차산성과 배산성을 들고, 타날판 복원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 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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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3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현재 성주지역에는 고대산성으로 알려진 성산성, 용각산성, 성주 할미산성 등이 있고, 고 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성곽으로는 성주읍성, 가야산성, 독용산성 등이 있다. 성주지역이 가야의 고지로서 대가야와 경계를 함께하였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성곽을 가 야와 연관시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가야 성곽의 축조수법과 안정된 토층에서 가야의 출토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한 보다 신중하게 검토한 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자료로 제공되 어야 할 것이다. 성주지역 고대산성과 인근지역 고분은 서로 간에 시기 차이가 있다. 이들 고대산성은 신라가 진출한 시기와 유적의 입지, 축성 목적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성주체 및 산성의 성격, 구체적인 축성시기 등을 밝히려면 체성벽과 성문, 집수 지, 성내 건물지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고려시대 경산부(京山府)의 중심지로 보고 있는 성산성과 성주고읍성의 관계, 그리고 조 선시대 성주읍성의 옛 동문지 기록과 평지 토성의 증축 가능성 문제, 고려시대 토성의 범위 확인과 조선시대 성곽과의 중첩관계 등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사용 척도에 대한 고증, 그리고 고려시대 축조된 토성과 조선시대 증축 또는 중 종 15년(1520)에 개축된 석성과의 범위 관계도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입보용산성은 몽골 침입과 관련되어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최근에는 그 시기가 나말 여초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가야산성과 독용산성은 평지에서 멀리 떨어진 험 산대성(險山大城)이다. 가야산성 내에서 조선 전기 및 그 이전 시기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 으며, 독용산성 남문지 하부에서 토축 성벽이 확인되어 이들 산성은 축조시기가 고려시대까 지 소급될 수 있는 전형적인 입보용 산성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산성에 대한 발굴조 사가 진행된다면 보다 구체적인 입보용산성의 초축 시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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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4.03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친 축성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려의 축성 사업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었는데 1기는 북방개척으로 시작된 청천강과 압록강 유역 진출과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 과정에서 축성이 이루어졌고 윤관이 개척한 9진을 여진에게 반환하기까지 약 200년의 기 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먼저 왕건의 북진 정책에 따라 서경을 서도로 정하여 축성하고 서 경의 주변으로 진성이나 주현성을 배치하는 과정과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과정에서 축 성, 그리고 동여진을 제압하기 위한 천리장성의 축조와 동해연안의 축성, 그리고 9진 개척 으로 요약되는 시기이다. 이것은 태조가 북방개척을 위하여 변경 지역의 요해처에 진성[鎭城]을 설치한 후에 주성 [州城]을 설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의 전 쟁을 치르게 되면서 축조된 성곽들은 대부분 흥화도(영삭진성, 태주성, 신도성, 가주성)·흥 교도(용강현성, 함종현성, 진국성, 안북부성, 진국성, 안정진성, 영청진성, 박주성) ·운중도 (운남현성, 성주성, 연주성, 운주성, 안수진성, 흥덕진성, 위화진) 등의 역로를 따라 위치하고 있어 거란이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노선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에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보조에 남은 성곽 축조 기사 중 동일한 성곽을 축조한 기사가 겹치는 것은 지역 의 사정에 따라 주성, 진성 등을 축성하였고 단순히 하나의 성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 것은 조선 전기 지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성곽이 축조된 위치에 따른 다면 평지성이나 산성으로 나누어 볼 소지도 다분하다고 하겠다. 2기는 금과 100년 간의 평화 시기 다음에 이어진 대몽항쟁기에 축조된 성곽이 축조된 시 기이다. 대몽항쟁은 해도입보와 산성입보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해도에 축성한 강화중성과 외성, 진도 용장성, 장도토성 등은 고려의 토성 축조 전통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 다. 아울러 몽골의 침입은 대규모 병력으로 장기간 이어지면서 대몽항쟁은 주현성을 중심으 로 치러졌고 이것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몽골 기병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 대산험 지에 위치한 산성[주현성]으로 옮겨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몽항쟁이 주현 성에서 산성으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관점이 아닌 것은 주현성과 산성이라는 구분 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 북계와 동계의 방어군성은 대부분 산에 위치하므로 몽 골과의 전장은 처음부터 산성이었던 것이다. 또한 몽골의 침입을 맞아 산성이 대형화되었다 는 것도 고려 주현성의 둘레는 조선 읍성보다는 훨씬 컸던 것이 사실이고 군관민이 함께 입 보하여 항쟁하려 한 전략적 결정에 따라 산성의 둘레도 따라서 커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고 생각된다. 3기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맞아 연해주군의 군현성을 수축하거나 산성을 축조하여 방 어한 시기에 해당되며 대몽항쟁기 이래 전통적인 청야입보책을 시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 려말 산성의 축조는 왜구가 해로를 장악하여 조운선도 약탈하는 지경에 몽골 침입 때와는 달리 해도입보라는 대책은 무용하게 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몽항쟁기에 둘레 1,000보 이상의 대형 석축 산성이 아니라 500보 내외의 석축성으로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이것은 대규모로 장기간 고려를 침공하였던 몽골군과는 달리 소규모로 자주 침공하였던 왜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하여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침공이 시작된 경인년(1350)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우왕3년(1377) 에 지방 산성 보수기사가 보이는 것은 그 동안 성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평지 에 위치한 군현성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우왕3년경부터는 산성을 수축하 여 입보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평지축성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은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경인년 이후 수축이 이루어진 군현성은 대부분 평지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때 수축된 군현성은 조선시대 들어 읍성으 로 편입되면서 읍성의 축조가 고려말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당한 수의 산성을 축조하여 운용하였던 것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산석성인데 석축을 강조한 것은 고려시대 토축 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여 석축성으로 축조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산성에 물이 부족하거나 물이 없다고 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장기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왜구의 침 입을 피하기 위하여 급히 축조하였거나 일시적인 입보를 위하여 수축하였다가 조선전기까 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읍석성 중에는 조선시대 들어 축조한 읍성과 고려말에 석축으 로 개축한 이후 읍성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고려의 군현성으로 축조된 것을 조선시대 들어 읍성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정에 따라 편입한 것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는 고려때 축조된 읍토성과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축조한 산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 러한 상황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읍성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군현에 󰡔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읍성이 보이지 않거나 산성 또는 고적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어 고려말의 성곽 수축과 조선 개국 이후의 읍성 축조 정책을 반영한 결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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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일대에 축성된 전라우수영 성곽의 부재를 대상으로 암석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산지를 추정하여 보수정비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연구대상인 전라우수영은 2016년에 사적 제535호로 지정되었으며 성곽의 잔존구간은 약 15% 정도로 보존관리가 필요한 실정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성곽 부재에 대한 암석기재적 특징을 바탕으로 축성에 사용된 암석을 분류하고 사용비율을 산출하였으며 동시에 전암대자율을 측정하였다. 채취한 성곽 시료의 현미경관찰로 광물 구성 및 조직 등을 파악하였으며 주변지역에 대한 지질조사를 통해 축성 재료의 가능성이 있는 주변암과 비교하였다. 연구 결과, 성곽 부재는 크게 응회암류와 기타 암석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대부분이 응회암류이며 세부적으로는 응회암, 화산력 응회암, 화산력암이다. 부재로 사용된 비율을 살펴보면 화산력 응회암이 60.3%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이어서 응회암(34.7%), 화산력암(2.5%) 순이다. 전암대자율 측정 결과 응회암류는 1×10−3 SI unit 이하의 낮은 값과 1-14×10−3 SI unit의 높은 값을 보이는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변암은 응회암이 우세하나 위치마다 기재면에서 차이를 보이며 그 외의 응회암류는 화원면 신덕리 일대에 분포한다. 암석기재적인 특징과 전암대자율값, 채석산지의 가능성을 고려하면 부재의 응회암은 문내면 동외리, 화산력 응회암은 화원면 신덕리 일대가 산지로 추정된다. 추가로 축성 재료의 기준 설정을 위해 성곽의 주요 부재를 대상으로 물성시험을 수행하였으며, 압축강도 면에서 응회암이 약 156 MPa의 양호한 값을 보였다. 물성시험 결과와 부재의 암종 별 사용량을 종합하면 성곽의 보수정비 시 대체석으로는 응회암이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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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7.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main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preservation and management for the city wall ruins of China, and to find out the implications. Firstly, Chinese walls have experienced a process from demolition to protection. The walls of the historical value of the site are gradually being certified, and many walls ruins were designated as a conservation unit. Secondly, China’s institutional system is based on the central government issued Cultural Relics Protection Law and combined with the actual situation of local governments to establish a special law. Management System is Cultural Relics Bureau, the planning department, the garden department and the tourism sector joint implementation. Thirdly, through the study of Nanjing, Xian, Pingyao, Suzhou city wall ruins finding that perfect legislation and unified management system to help protect city wall ru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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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7.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Korea, the occurrence frequency of earthquakes has recently increased, compared with the past. So, the various damages for cultural properties due to earthquake can be expected, and especially fortress structure is vulnerable to earthquake. Therefore, the resonable seismic characteristics evaluation is required to secure the safety for fortress structure with the various construction and configuration types. Also, we should consider the various applied load conditions as design variables. To this end, this study classifies fortress structures according to the construction and configuration types, and then applies the discrete element method to model and analyze fortress structures. Finally, the seismic characteristics is evaluated through slip condition due to the analysis results considering the various design vari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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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4.11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9.
        2013.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강원지방에 분포한 중세성곽의 현황과 현재까지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된 성곽을 중심으로 문헌기록과 연결하여 강원지방 성곽의 특징을 분석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있다. 본고에서 다루는 성곽들은 중세에 신축되거나 수·개축된 성곽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정밀지표조사보고서나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보고서 등이 발간된 성곽을 중심으로 그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강원지방은 태백산맥이라는 자연적 경계로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단순비교이나 면적상으로 영동지역이 영서지역보다 작은 편이다. 그러나 성곽의 분포수에 있어서는 거의 비등하다. 다시 말해 이는 고려시대 동계로 편입되었던 영동지역은 군사적 목적이 강하고 그에 따라 성곽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영동지역은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나『高麗史』등과 같은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초기부터 해안으로부터의 이민족 침입이 자주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해안성들이 축조되고, 해안성이나 주변 성곽을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읍성들이 축조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육지를 통해 몽고의 침입이 있었고, 해안을 통해 왜의 침입이 증가함에 따라 험악한 산중에 입보용산성이 축성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전쟁양상과도 관련이 있으며, 점령이 아닌 약탈의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영서지역은 문헌이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아직까지 읍성이나 평지성, 평산성이 조사된 사례가 없다. 현재까지 조사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운영되던 테뫼식산성을 수축하여 사용하고 몽고의 침입과 더불어 영동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대규모의 포곡식산성을 축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에서 중세 강원지방 성곽의 시기적 변천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성곽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발굴조사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진 성곽은 많지 않다. 또한 정밀지표조사가 실시되어 70여개소에 달하는 중세성곽에 대한 정확한 현황이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되고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된다면 본고는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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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먼저 문무좵신문왕대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주좵소경의 성을 구체적으로 비정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漢山州晝長城,國原城(옛 薍長城)은 각각 남한산성과 대림산성에 비정할 수 있었고, 신문왕대에 축조된 주좵소경의 성 역시 평지 시가지 인근의 산성으로 파악하였다. 이들은 입지와 규모로 보았을 때 삼국 시대에는 거의 요구되지 않았던 지방 도시 거주 지배층의 피난성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성벽의 양상은 오히려 기존의 거점성에 비하여 정연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따라서 이 시기 성벽 축조의 표준을 보여주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한편 소경의 중심 지역에 나타나는 평지 토성은 신라 말이나 대체로 고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통일기의 坊구획과 잘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무의미해진 시점에, 상시적인 방어 시설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한산주 주장성이나 국원성(옛 완장성)은 실제로 한산주 및 국원소경에 거주하고 있었던 왕경인들의 장기적인 입보처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다시 평지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정비되었을 것인데, 한산주의 경우에는 8세기에 들어 기존의 거점성인 이성산성이 새로이 정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국원소경의 경우에는 현 충주시내에 새로운 시가지가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한산주에서는 9세기에 들어 이성산성보다는 다시 남한산성이 활성화되는 양상이 나타나며, 그보다 늦은 시기에 국원소경에서는 평지 시가지를 둘러싼 부정형의 토성이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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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1.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성곽의 축조는 당대의 토목기술과 관념(정치상황과 국가간의 관계)을 반영하므로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성곽들은 유사한 축조수법과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양상은 창녕지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본고에서는 창녕지역 성곽 중 낙동강 연안에 축성된 성곽에 대한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확인한 속성들을 분석한 결과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성곽들은 5세기에서 6세기 초반경 재지세력에 의해서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성곽들의 특징 및 성격은 첫째, 낙동강과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축조된 성곽들은 200m 이하의 소형인데 반해, 창녕지역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지점의 성산산성과 웅곡리산성, 그리고 낙동강 중류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점의 구진산성은 대체로 400~600m로 대형에 속하지만 경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신라산성 중 규모가 소형인 산성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소형에 해당된다. 따라서 낙동강 연안에 위치하는 성곽의 규모로 보아 낙동강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낙동강 연안 성곽의 축조수법은 토성과 석성으로 나누어지며, 토성의 비율이 높다. 토성의 정확한 축조수법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 시기에 축조된 다른 토성들의 축조 수법을 감안할 때 순수판축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성의 경우 허튼층쌓기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암괴가 노두된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음으로써 공력을 줄였다. 이러한 양상은 전형적인 신라성곽과는 차이를 보인다. 상기의 내용으로 보아 낙동강 연안에 축조된 성곽들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 신라의 영토 확장과 관련된 지역에 축성된 신라성곽의 특징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근거 역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대부분의 성곽들이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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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근대 시대의 군사활동이나 방어에 있어서 성곽이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전투가 攻城이나 守城戰이라는 것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이 상시화된 삼국시대의 경우 수많은 성곽이 건설되고 또 폐기되었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성곽유적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명확하게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유적도 있고 또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만 그 위치조차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러 史書에 기록되어 있거나 유적으로 남아있는 삼척지역의 성곽과 수군 유적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국 시대 신라의 여러 군사적 활동과 관련하여 그러한 유적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연구하였다. 아직 고고학적 조사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10개의 城址 가운데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갈야산성, 옥원성, 호산리성지, 광태리고성, 맹방고성 정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성터로 자리잡 았던 곳이라 여겨지며 결과적으로 신라의 북방 진출이나 지방통치체제 정비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오화리산성은 신라의 삼척 점거 초기에 조성된 산성이며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여겨지며, 古代 삼척군의 領縣과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호산리성지(혹은 옥원성지), 광태리고성(혹은 맹방고성) 은 小據點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갈야산성 성벽하부에서 신라고분이 발견된 점에서 볼 때 갈야산성도 신라가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 시기는 오화리산성 보다는 후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신라는 일찍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박 운영 제도를 확립하였고, ‘船府’라는 관 청을 두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상당한 규모의 수군과 병선제조 능력, 운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신라의 북상과 함께 동해안 곳곳의 주요 요충지가 신라 선박의 기항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와 오분항은 신라의 군사거점과 연계하여 가장 중요한 기항지였다고 여겨진다. 異斯夫가 우산국 정벌을 앞두고 하슬라군주로 임명된 사실을 중시하여 이사부 가 통제하던 신라군이 모두 하슬라(강릉)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가서 우산국 정벌에 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史料도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본래 하슬라(강릉)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북부 동해안 지역이 ‘실직주’라는 명칭하에 관리되고 있었던 것을 州의 명칭과 그 중심지를 하슬라 지역으로 바꾸어 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직군주를 지내면서 건설해 놓은 군사거점을 옮긴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슬라주를 설치하였으면서도 지방 주둔 신라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단인 停(悉直停)을 곧바로 하슬라로 옮기지 않고 하서정을 무열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강릉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척에 상당기간 주둔하며 육성한 수군을 우산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목전에 두고 군주의 이동과 함께 완전히 이전하여 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우산국으로 향하기 훨씬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삼척지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군주 명칭이 바뀌었다고 옮겨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10,100원
        13.
        2010.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韓半島의 중심부에 위치한 忠州지역에는 지금까지 忠州邑城 · 忠州山城 · 薔薇山城 · 大林山城 · 寶蓮山城 · 龍觀洞山城 · 文周里山城 · 見鶴里土城 · 彈琴臺土城 · 하늘재 山城(寒喧嶺山城) · 마즈막재嶺阨(忠州嶺阨) · 麻骨岾山城 · 烽峴城址 등 모두 13개소 城郭이 알려져 있었는데, 2009년도에 새로이 虎岩洞土城과 將台山城 2개소가 찾아졌다. 虎岩洞土城은 충주시 虎岩洞 560번지 일원에서 일부 잔존하는 土壘가 확인돠었는데, 『三國史記』에 新羅 文武王 13년(673) 9월에 쌓은 國原城(옛 薍長城)터가 高麗 高宗代 蒙古侵入期에 改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실체는 土城으로서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황폐화되면서 高麗末期~朝鮮前期에 축조된 石築의 邑城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해 진 것으로 보이며,『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1942)에 보이는 烽峴城과 관련있어 보인다. 將台山城은 충주시 금가면 금가면 하담리 산 9-3임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련 文獻의 기록은 없으며, 統一新羅時代의 瓦積層 위에서 확인되는 U字形의 壕유구 및 凹字形의 도랑유구 등 성벽의 축조와 관련한 새로운 구조가 확인되어 주목된다. 虎岩洞土城 주위로 山城이 배치되어 있음은 新羅의 王京이었던 慶州地域, 新羅 西原京의 治所였던 淸州地域의 城郭配置가 중심부에 邑城을 두고 外廓에 山城을 배치하고 있는 사실과도 비교되어 이와 비슷한 羅城體系를 형성하고 있어 주목된다. 忠州地域에서 다양한 구조의 城郭이 확인되고 있음은 南漢江유역에 위치한 넓은 平野를 갖고 있는 지역으로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陸上 交通路 및 東西로 이어지는 水路가 발달하여 있어 地理的 要衝地이면서 戰略的 重要性이 강조되고, 지역의 政治的 位相이 높았던 결과로 보인다. 충주에서 새로이 발견된 虎岩洞土城과 將台山城은 古代 中原京을 중심으로 한 城郭의 配置 및 築城史 硏究에 새로운 자료로 여겨지며, 韓國 城郭史 硏究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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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평택지역 토성 중 성벽이 조사 된 琵琶山城, 德睦里城, 龍城里城, 武城山城, 農城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 지역 토성은 축조방식에서 기저부에 점질토를 조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중심토루를 조성하기 위한 기단석축의 유무와 판축공정 및 구성재료가 토성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기단석축은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성은 판축으로 중심토루를 구성하였다.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은 축조방식과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심토루가 판축이 아닌 경우는 용성리성, 농성, 무성산성 등이었다. 이들 성들은 해자 혹은 내측 구를 파며 나온 토사로 성벽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무성산성은 점토보다는 자갈과 석재를 혼합하여 중심토루를 조성하였다. 비파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광종 대에는 크게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파산성은 거성현의 치소로써 자미산성에서 그 역할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서의 비파산성은 자미산성과 무성산성과 더불어 안성천 하구변의 해안방어와 해로교통망 확보를 위해 활용되었다. 덕목리성은 통일신라시기 이 지역에 인구가 집중하면서 축조되었다. 새로운 촌락과 행적적인 거점을 위해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동성과 서성으로 토성이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용성리성은 고려후기에 아산만 일대로 진출한 왜구들로 부터 비파산성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무성과 자미산성, 용성리성은 남북으로 연계하는 구조로 비파산성을 방비하고 있다. 농성은 고려후기 혹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가 습격해 올 때에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농성의 구조가 인근주민이 장기간 立保하여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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