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는 신라이래 고려시대까지 군현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피현 (本彼縣, 신라)·신안현(新安縣, 757)·벽진군(碧珍郡, 후삼국)·경산부(京山府, 940)·광 평군(廣平郡, 981)·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 1295)·성주목(星州牧, 1308)·경산부(京 山府, 1310)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1401년(태종 1) 태종의 태실(胎室)이 조성되면서 다시 성주목(星州牧)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몇 차례 현(縣)으로 강격(降格)을 거듭하다가, 1745 년(영조 21)에 다시 성주목으로 환원되었다가 1895년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23부제(府 制)를 실시할 때에 성주군이 되었다. 이후 이웃 지역과 몇자례의 면(面)·리(里)의 행정 분리 조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주는 신라시대 때에는 그만큼의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성주읍 지역에 있던 신안현(新 安縣)은 성산군(星山郡) 소속 4개 영현(領縣)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일대의 지역 중심지는 현 성주읍 지역이 아니라, 옛 성산군의 치소가 있던 낙동강변의 현 경북 고령군 성 산면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경산부와 조선시대 성주목으로 경상도의 상주, 진주 와 함께 3대 목(牧)의 하나로 번영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성주목이 지녔던 지역적 위상은 이 미 고려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성주는 고려시대 이후 한말까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성주 ‘6이(李)’와 함께 성주배씨(裵氏)와 성주도씨(都氏)가 유명하다. 성주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여섯 이씨 가문은 모두 다른 시조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이총언(李悤言)의 등장 이후 성주 지역에서는 이씨 성을 칭한 가문들 사이에 세력 경쟁이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여 겨진다. 이총언(李悤言)·이능일(李能一)·이장경(李長庚)·이조년(李兆年)·이승경(李承 慶)·이승휴(李承休)·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숭인(李崇仁)·배극렴(裵克 廉)·도길부(都吉敷)와 조선시대 인물인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이진상(李震相)· 김창숙(金昌淑)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시대 유적으로는 성주 가암리와 동포리, 봉정리, 어산리, 용봉리 등에서 토기 및 자기산포 지가 지표상 확인되었으며, 성주읍 예산리 동방사지 칠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0호) 과 가천면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 수륜면 백운리 석탑부재, 가천면 창천리 청명사 석불좌 상과 같은 불교 관련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성주 시비실, 예산리와 기성리, 학산리, 대성리 그리고 성산 옥성리 유적에서 이루어졌다.
나한신앙은 나말여초 시기 중국 절강성 천태산에서 유입되어 고려시대 성행한 불교신앙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나한이 천태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나한재 를 통해 祈雨, 國難克服, 長壽 등 현세와 관련 깊은 소원을 빌었다. 고려시대의 나한상은 천태종이 발원한 중국 절강성 지역 나한상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자 세로, 다양한 지물과 함께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동시기 중국의 나한상에선 볼 수 없는 ‘두건’을 쓴 나한도상도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도상은 승가대사상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 으로 생각된다. 이 영향에는 천태종단의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천태종의 본산인 국청사에서는 북송시기 지자대사, 승가대사, 그리고 나한을 함께 모셨다는 기록이 전한다. 관음신행을 중시한 천태종단에서는 관음의 화신인 승가대사를 수용 하였으며, 나한과 관음을 동일시하였기에 세 존상을 함께 모신 것으로 보인다. 국청사를 방 문하였던 고려의 승려들은 두건을 쓴 승가대사와 지자대사를 보았을 것이다. 지자와 승가 모 두 두건을 쓴 신이한 승려이므로, 신이한 승려인 나한에게도 이 이미지가 적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는 한국 만두문화의 기원이 되는 고려시기 만두문화의 전체상을 조망 하기 위한 고찰이다. 선행연구들은 고려말 충렬왕 시기 『쌍화점』의 ‘쌍화’를 한국 만두의 기원으로 간주해오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회는 ‘불교사찰의 채 식만두문화’와 ‘왕실과 민간사회의 육식만두문화’가 『쌍화점』의 ‘쌍화’ 이전 시기부터 고려사회에 정착하여 지속되어 오고 있었음을 밝힌다. 고려 불교채식만두는 13세기 초 수선사 2세인 진각국사 혜심의 『조계진각 국사어록』에 등장하는 불교채식만두인 ‘산함(餕餡)’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 집』에 언급된, 이규보가 평소 교류가 있었던 기선사(其禪師)로부터 받은 만 두류 음식인 ‘혼돈(餛飩)’을 통해 확인된다. 이 시기에 고려불교사찰은 아침 메뉴로 전통적인 죽과 더불어 만두류 음식인 혼돈을 식용하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고려시대 육식만두의 전통은 국가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의 의례 속에 등 장하는 ‘쌍하(雙下)만두’와 고려가요 속에 언급된 『쌍화점』의 ‘쌍화만두’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쌍하’는 당시 동아시아 왕실과 사신접대에 등장하는 만두류 음식으로 낙타의 육봉을 속재료로 한 왕실연향에서 사용되는 ‘쌍하타 봉각자(雙下駝峰角子)’와 사신접대 등에 사용되는 타봉을 사용하지 않은 ‘쌍 화관장만두(雙下灌漿饅頭)’나 ‘쌍하각자(雙下角子)’등으로 구분된다. 『쌍화점』의 ‘쌍화만두’는 고려사회에 정착한 외국인인 회회인(回回人) 상 인이 팔던 만두로 양고기와 밀착된 그들의 음식문화와 고려사회에서 도축업 에 종사한 사실 등을 토대로 ‘양고기만두’였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위의 고찰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한국 만두의 기원은 『쌍화점』의 ‘쌍 화’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아마도 북송과 맞물리는 시기에 불교사찰의 채 식만두문화와 왕실과 민간의 육식만두문화가 이미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연화문(연꽃문양)은 다른 역사문화유산(나전칠기, 회화, 금속 공예, 기와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조선시대(임진왜란 이전) 도자기 문양에서 압도적인 비중이고 모습도 다양하다. 그 모습은 자연 생태계의 모습과 가깝고 닮은 경우(原연화문·蓮池연화문), 氣·化生을 적극 나타낸 경우로 구분된다. 이 시기 도자기에는 분명 연화문임에도 불구하고 연화당초문·모란문· 菊花文·寶相華文·如意頭文으로 잘못 불리는 문양들이 있다. 이 가운데 연화당초문은 연화문과 덩굴문이란 독립된 두 문양의 단순한 결합으로, 모란문은 연꽃잎과 연잎사귀 모습을 분리하여 꽃나무 모습이 되자 꽃봉오리가 비슷한 모란으로 착각하며, 국화문은 子房에 비하여 연꽃잎(연판)을 가늘고 길게 표현하자 비슷한 국화로 착각하며, 보상화문은 연꽃잎에 기· 화생이 많이 표현되어 다소 복잡한 모습이 되자 다른 꽃으로 여기며, 여의두문은 연꽃잎이 如意의 머리처럼 보여 각각 부여된 이름이다. 연화문은 한 도자기 안에서도 한 모습보다 여러 모습인 경우가 더 많고, 原연화문부터 연속 덩굴 연화문에 이르는 단계도 보여 준다. 또한 原연화문·蓮池연화문보다 기·화생을 더 나타낸 덩굴 연화문 쪽이 많다. 이 현상은 우리 先人들이 연화문의 다양한 모습은 물론 성격, 기·화생의 강약, 표현 위치 등을 철저하게 이해하며 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도자기에 있는 기·화생을 담은 연화문들은 물론이고, 중앙에 서 외곽으로 또는 위쪽으로 상승하는 표현들, 나무처럼 표현한 연꽃, 산을 화생하는 연꽃 표현 등은 중국에서 또는, 불교와 함께 전래된 불교를 상징하거나 관련되는 표현이 전혀 아니다. 우리 겨레의 역사문화강역 안에서 신석기·청동기시대부터 믿음과 전통을 담아 치밀하고 높은 수준으로 전개된 표현이다.
연속적인 맥락에서 보이는 아름답거나 흥미있는 현상, 자연특질에 있는 장소를 ‘경승’ 또는 ‘승경’이라 한다. 또 승지, 승구, 승소, 승적과 유사한 의미로 ‘명승’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명승’은 동양의 대표경관으로 현재 중국, 일본, 대만, 남‧북한이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한반도 명승의 최초 유행은 그동안 중국에서 유래된 소상팔경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상팔경도는 북송시대 송적이 그리기 시작하여 널리 유행하여 명승을 소재로 한 산수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팔경문화는 많은 문인과 화가들에 의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명승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한국의 팔경은 명승을 바탕으로 이를 향유한 계층인 고려 후기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선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부터 ‘송도팔경’과‘신도팔경’등이 유행하면서 승경을 팔경화하는 고유 팔경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명승의 시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의 일반적 현상이라 취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명승이 여말선초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면 최초의 명승 개념은 어디서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유행한 명승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의 심층적 고찰이 요구된다.
근대기 국가차원에서 법령이 마련된 것은 1933년 조선명승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에서 출발한다. 그 후 우리나라 명승은 1946년 북한이 먼저 자체 법령으로 분리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으로 남한이 자체의 법령을 배포함으로서 최초의 자주적 법령체제가 완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명승지정보호 활성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까지 1970년에 최초로 지정된 명승은 국보나 보물, 사적 등의 보존관리에 치중하던 문화재정책으로 인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못하고 성숙되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채 유지되어 왔다. 명승 문화재를 지정하던 초기에는 사적과 차별적인 다른 문화재 주변의 자연환경을 포함한 대면적의 문화재라는 개념을 반영하는데 그쳐 과거 전래명승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현장조사 등 과거 우리 명승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또한 집경형식의 연속경관 형식을 취한 팔경은 국토개발로 인해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명승의 대표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내 명승은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일부지식인층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명승 관련 정보가 끊임없이 생산되었던 동양 고유의 문화경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해방이후 6.25동란을 겪으면서 점차 그 수가 사라져갔고 1970년 최초의 명승이 지정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전래명승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가 명승 지정시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한국 명승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적 접근으로 한반도내 유행했던 지식인층이 저술한 명승관련 문헌자료수집과 분석을 통해 한국명승의 개념 확립과 변화 과정 속의 나타난 특징을 발견하는데 기초자료 구축을 목적하고 있다. 연구방법은 시대별 사회 지식인층이 작성한 문헌자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주요내용을 기술하였다.
먼저 고려시대에 나타난 명승에 대해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로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어 명성을 떨쳤지만, 원림을 중심으로 한 정원문화와 명승을 유람하고 감상하는 활동도 유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현전하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경향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명승 문화가 발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기정사실이다. 고려시대 문인들이 명승을 유람하고 유람기 등으로 남긴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고 그중에서 금강산은 당대 최고의 명승으로 회자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으로 지순(至順) 2년(1331, 충혜왕1) 2월에 안축(安軸)이 쓴 『근재집 』 권1, 의「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에 명승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오늘날 경포대는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관미를 자랑하는 곳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처음 경포대가 건립될 당시에는 사실상 무명의 공간에 불과했고 고려시대 일반적인 사람들은 금강산과 총석정만을 명승으로 손꼽았다. 안축에게 태정(泰定) 병인년(1326, 충숙왕13)에 지금의 지추부학사(知秋部學士) 박숙(朴淑) 공이 관동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경포대에 정자를 짓고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박숙은 영랑의 정자터가 있었던 곳에 정자를 다시 짓고 이 곳의 장소성을 부각시켰다. 이 사건은 고려시대에 명승적 개념에 입각한 사고의 기록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게 한다.
안축의 명승에 대한 개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사물 중에 대체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이치를 담고 있다. 크게는 산수, 작게는 조그마한 돌멩이나 한 치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다. 유람하는 사람들이 이 사물을 둘러보고 흥취를 붙이고 이를 통해 즐거움으로 삼으니, 이것이 누대와 정자가 만들어진 까닭이다. 형상이 기이한 것은 드러나는 곳에 존재하여 눈으로 완상할 수 있고, 이치가 오묘한 것은 은미한 곳에 숨어 있어서 마음으로 터득한다. 눈으로 기이한 형상을 완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모두 같아서 한쪽만을 보고, 마음으로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군자만이 그렇게 하여 그 온전함을 즐긴다. 하고 그 가치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명승경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내용도 나타난다. 경포호(鏡浦湖)는 맑고 깨끗하여 바람 따라 잔물결이 찰랑거렸다. 멀리 있는 산은 골짜기가 천 겹이어서 구름과 이내가 아득하였고, 가까이 있는 산은 봉우리가 십 리에 뻗어 초목이 푸르렀다. 항상 갈매기와 물새가 나타났다 잠겼다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대(臺) 앞에서 한가하게 놀았다. 봄 가을의 안개와 달, 아침저녁의 흐리고 갬이 이처럼 때에 따라 기상이 변화무쌍하다. 이것이 이 경포대의 대체적인 경관이다. 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명승은 유학의 발달에 힘입어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공자가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라고 한것은 기이한 것을 완상하여 한쪽만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묘함을 터득하여 온전함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명승을 즐겼으며, 이는 ‘명승문화’ 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유교적 자연관과 수련문화가 지배한 조선시대에는 명승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명승 유람을 통하여 자연과 친화함으로써 산수지락(山水之樂)의 감흥과 인지지락(仁智之樂)의 경지를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명승을 향유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나 활동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일체감을 얻고자 하는 중요한 실천 활동이었다. 명승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임경제지’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중 ‘임원 경제지’ 이운지 편에는 명승을 여행할 때 갖추어야 할 행장과 재료, 용도, 제조법, 가치, 사용법, 효과 등 명승의 여행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명승의 유행정도를 알 수 있다. 채제공의 번암집에 보면 “여러 유명한 노선생들은 거의 모두 몸소 좋은 경치 좋은 곳을 점령하여 살면서 글 읽고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에는 제사하는 곳이 된다. 그러한 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둑을 벌여 놓은 것처럼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이치이다.”라고 명승의 개념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명승 문화의 유행은 ‘청구남승도’ 놀이에도 응용되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녀자나 유생들에게 전국 각지의 명승 120곳을 놀이판에 담아 곳곳을 누비면서 그곳의 정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도 했다.
근대시대의 명승은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추적이나 평가, 근대문물과 함께 유입된 유원지 문화가 명승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내용들은 일본인이나 신지식인들에 의해 책자로 발간되는 일이 잦았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의 명승・고적과 관련된 비롯한 다양한 서적은 조선시대 지리지 등 고문헌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에 작성된 나루시마 사기무라[成島鷺村]의 『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 1915 』의 서문에서 조선시대 명승관련 고서를 탐구하여 집대성한 결과를 밝히고 있는 대표사례에 해당된다. 명승에 대한 보호체계가 시작 된 것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관련 법령과 정책이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먼저 일본에서 제정된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1919)」을 기준으로 1922년에 11개소가 명승으로 지정되고 이후 조선에서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을 통해 ‘고적 및 명승’ 5건과 ‘명승 및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정되었던 명승은 현재 사용하는 명승 문화재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의 것이였다. 현재 통용되는 역사와 문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명승’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에 대두되었다. 명승기정기준은 1962년에 제정되었고 1979년에는 7개소만이 명승으로 지정되었었다. 한국의 명승은 유형별로 산악형, 계곡형, 하천형, 도서해안형, 원림형, 옛길형, 산업형으로 구분되고 최근 문화경관적 가치가 확대되어 지정시 반영되고 있다. 2018년 한반도내 명승은 총 111개소에 달한다. 전래 명승의 고찰을 통한 한국 명승만의 특성이 명승 지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등촉구(燈燭具)는 등 또는 초를 사용하여 불을 밝히는 기구이다. 본 논문에서는 고려시대 등촉구의 종류를 크게 등과 초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광명대(光明臺), 초를 사용하는 촛대 [燭臺]와 번(燔)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등(燈)은 인간의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 인류와 함께 등을 사용하기 위한 등촉구도 발달하였다. 불교에서는 등을 중요한 공양물로 인식 하였는데 지혜의 상징으로 광명을 통해 어리석음의 어둠을 없앨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등공양을 통해 무한한 공덕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성불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 다양한 등촉구가 발견되었고 한대(漢代) 부터 초의 사용이 나타난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등공양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통일신라에 들어서 등촉구를 찾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는 燈具 이외에도 초의 생산이과 함께 촛대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 등촉구를 광명대, 촛대, 번으로 나누어 각 유형을 분류하고 시기별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았다. 광명대는 일반적으로 받침의 모습에 따라 삼족형과 안상형으로 나누고, 특수하게 간주에 쌍사자가 표현된 쌍사자형으로 분류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촛대는 받침의 모습에따라 안상형과 삼단형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번은 초꽂이가 둥근기둥으로 그 안에 초를 세우는 입촉형, 초꽂이가 針으로 나타나 초를 끼우는 삽촉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은 제작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과 양식의 변천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려시대 등촉구에 나타나는 명문과 동반출토유물을 통해 사찰에서 등공양구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918~1392)시대와 일본의 헤이안 (平安, 794~1192)시대의 사경(寫經)은 다른 점이 많다. 먼저 고려시대 의 사경에는 금자(金字), 은자(銀字) 사경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묵서경(墨書經)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반면에 헤이안시대의 사경에는 묵서경이 금자, 은자 사경보다 많다.
묵서경에 있어서도, 고려시대의 묵서경은 경문(經文)이나 천지선(天 地線), 계선(界線) 등을 금, 은으로 장식한다든지 변상도(變相圖)를 그리 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에 비해 헤이안시대 묵서경의 특징은 장식경(裝 飾經)이라고 불러서, 사경지(寫經紙)에 금은박(金銀箔)을 뿌린다든지, 경문을 쓰는 본지(本紙)에 새, 구름 등의 그림을 그려 넣거나 경문에 보 탑(寶塔)이나 연화대(蓮花臺)를 그려 넣는다든지 하는 다양하고 화려한 장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헤이안 시대의 사경장식의 발달은 법화경과 밀접한 관계에 있 다. 일본에서는 중국, 우리나라에 비하여 법화경 신앙이 더 강했는데, 법 화경은 서사(書寫)의 공덕이 강하게 설해지는 경전이다. 특히 헤이안시 대에는 법화경을 서사할 때, 법화경 28품(品)을 별개의 사람들이 각각 1 품씩 서사하는 일품경(一品經)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1 품씩 사경했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화려함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양식의 작품이 생기게 되었다.
Module coordination(分數), which is crucially relevant to plan shape of a fortress and the location of its gates and chis(雉, protruding posts), have not been thoroughly studied, despite its importance in fortress system. While plan shape of Goryeo fortress features orderly placement of gates and chis, under medium-sized Joseon fortress doesn’t follow it strictly. As a result, fortresses with various plan shapes greatly outnumber those of Goryeo. Especially, Gimhaeeupseong Fortress, which is a large-scale town wall, shows such a complicated plan shape, making it difficult to figure out its modular coordination. Presumably, the reason for Joseon fortress’ complicated plan shapes, which doesn’t follow the orderly modular coordination, is thought to be in its various geographical conditions. Also, it seems that the building of fortress with such various and complicated plan shapes was to deter enemies from intruding by confusing them. And various plan shapes of fortress are also figured out to be pertinent to street system of towns and positions of public offices.
Sangnyang-mun(上樑文) is not only a memorial address for the ceremony of putting up the ridge beam, namely the sangnyang-ceremony(上樑式) but also the executional record of building construction. This paper aims at researching on the oldest five sangnyang-muns written for the constructions of palaces and government offices in Goryeo Dynasty, especially viewed in the architectural history. The results of that are as follows:
First, it is supposed that sangnyang-mun originated in the ancient Chinese ceremonial songs for the celebration of building construction. Second, as compared against the former times, the sangnyang-muns in Goryeo Dynasty were written to the advanced establishing forms and literary patterns, so to speak, these were the more developed styles. Third, in the 12th century, sangnyang-mun was introduced from Chinese Song to Goryeo. To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sangnyang-mun had been to write for the sangnyang-ceremony as necessary memorial address. Fourth, the writers of five sangnyang-muns in Goryeo Dynasty were the new civil ministers appointed by the soldier rulers. They wrote the contents of their sangnyang-muns, especially focused to the king’s achievements. And in the yugwi-song(六衛頌), they recited six poems in which were complicated the world view and aesthetics of the tim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framework schema of early Jusimpo-style Buddhist halls (Geungnakjeon Hall of Bongjeongsa Temple, Muryangsujeon Hall of Buseoksa Temple, and Daeungjeon Hall of Sudeoksa Temple ). Though the halls are known as built in the late Goryeo Period, they show the influence of the architectural style of the early Unified Silla Period. To find the adopted modules and proportions of these halls, this study conceived a schematic diagram based on the whole frame structure taking reference from the Cai-Fen system in Yingzao Fashi . In these three halls, the heights of each cross-beam (Dori ) are made up by the layers of member and member units. This study computes the values of Cai, Zhi, and Fen which can apply to both the section and the plan. The vertical section structure is determined by combining the standard member heights (Cai ) and the standard unit heights (CaiZhi ). The bays of columns are made by multiples of the standard member width (Fen).
The color that painted on the ground of Dancheong becomes Gachil(basecoat)-Dancheong and underpainting of Moro-Dancheong or Geum-Dancheong. So, the color of underpainting is the most important element that determines impression of the building. Thus, the architecture after using “Sangrokhadan” has different characters from what it had been. In the existing perception toward the background color of Dancheong, it was considered the characters of Korean Dancheong so-called “Sangrokhadan” that paint vertical elements like columns red and upper part of the columns green. But this study examined the color of Dancheong according to the era and region before and after Goryeo Dynasty era, then it reveals that Sangrokhadan technique was applied from the 14th century in the late Goryeo Dynasty. One of the Goryeo architecture, Geungnakjeon Hall of Bongjeongsa Temple is thought to be a previous style that is not applied “Sangrokhadan” technique because old elements are painted red pigment.
We investigate the records related to the reign style and the calendar day from the epigraphs of the Goryeo dynasty (918 - 1392) in Korea in order to verify and supplement the sexagenary cycle data of the first day in the lunar month of the dynasty. The database of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e Heritage contains a rubbed-copy image, transcription statement, and translation statement for Korean epigraphs as well as 775 epigraphs corresponding to the Goryeo dynasty. The epigraph records are valuable in that, during this time, they were written differently from other historical literature such as the Goryeosa (History of the Goryeo Dynasty), which was compiled in the next dynasty. We find that the Goryeo dynasty, in general, had adopted the reign styles of Chinese dynasties at that time. We also find 159 calendar day records all showing good agreement with the work of Ahn et al. except for dozens of records. Through this study, we can verify the reign styles and the calendar days of the Goryeo dynasty.
Tean Mado Shipwreck No. 3 is presumed to have been shipwrecked between 1260 and 1268. It departed from a Southern costal area of Yeosu in Jeonnam Province to Ganghwa Island, its final destination at which the temporal regime of Koryo Dynasty was located. In the shipwreck, a total of 35 wooden tablets were found, and forwarding places, senders, receivers, descriptions, and quantities of freight were written on the wooden tablets. The names of receivers included Kim Jun, who was influential in the late Musin Era of the Koryo Dynasty, and key institutions such as Junmin and Sambyulcho of the Musin force. Twenty wooden tables had lists of food items such as barley, abalone, salted-fermented abalone, mussel, dried mussel, salted fermented mussel, dried shark meat, fish oil, pheasant, and dried dog meat. The food items in the late 13th century were systematically examined using scientifically determined food organic remains and records of wooden tablets among the marine relics of Mado Shipwreck No.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