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6

        1.
        2024.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고의 주제는 통일신라시대 성곽에서 출토되는 기와의 해석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기와는 타 유물에 비해 출토량이 대량인 점, 용도가 다양한 점, 사용 기간이 장기간인 점, 여러 단계의 기와가 동시에 폐기되는 점, 재사용과 재활용의 문제 등 고고자료로서의 기와 가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통시적·공시적 해석에 난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출 토 맥락이 명확한 일부 유적의 출토 사례와 기존의 기와 분석 연구 성과 등을 토대로 통일신 라시대 성곽 출토 기와의 해석 방법을 고찰해 보았다. 동래고읍성지의 기와 출토 사례를 통해 토성 초축의 상한 연대는 8세기대, 1차 수축은 9 세기대로 추정되고, 지구별로 축조 시점이 상이할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었으며, 수축 과정 에서의 기와 재활용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기와의 재활용에 대한 해석은 성곽이나 건물지의 여러 출토 사례로 볼 때 유적의 폐기에 이어진 자연 탈락으로 인한 퇴적이나 산포와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으며, 이에 따 라 ① 시기의 한정성, ② 타 유물 혼입 여부, ③ 기와의 잔존상태, ④ 해당 층위 외의 퇴적층 에 포함된 기와 및 폐기 시점의 기와 노출상태와의 비교 등을 고려해 출토 맥락과 용도(자연 폐기 또는 재활용)를 해석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성곽에서의 평기와 사용을 위계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문제는 기와의 사용 유무에 따른 상대성, 장식기와 사용 여부에 따른 상대성이 있으므로 인접한 동 시기 유적과의 상대적인 비교 분석이 필요하며, 사례로 부산 배산성과 낙민동유적의 출토 기와 양상을 비교하여 거 칠산군의 치소로서 가진 배산성의 성격이 사회·경제·문화의 중심이라기보다는 행정·군 사적인 거점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출토 기와의 특징에 대한 해석 방법은 기존의 평기와 분석법에 더해 삼국~통일신라시대 의 평기와 제작법 전개를 4단계로 제시하였고, 특히 통시적인 해석에 가장 중요한 속성인 타날판 크기의 오독 사례로 아차산성과 배산성을 들고, 타날판 복원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 시하였다.
        6,000원
        2.
        2024.03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현재 성주지역에는 고대산성으로 알려진 성산성, 용각산성, 성주 할미산성 등이 있고, 고 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성곽으로는 성주읍성, 가야산성, 독용산성 등이 있다. 성주지역이 가야의 고지로서 대가야와 경계를 함께하였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성곽을 가 야와 연관시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가야 성곽의 축조수법과 안정된 토층에서 가야의 출토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한 보다 신중하게 검토한 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자료로 제공되 어야 할 것이다. 성주지역 고대산성과 인근지역 고분은 서로 간에 시기 차이가 있다. 이들 고대산성은 신라가 진출한 시기와 유적의 입지, 축성 목적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성주체 및 산성의 성격, 구체적인 축성시기 등을 밝히려면 체성벽과 성문, 집수 지, 성내 건물지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고려시대 경산부(京山府)의 중심지로 보고 있는 성산성과 성주고읍성의 관계, 그리고 조 선시대 성주읍성의 옛 동문지 기록과 평지 토성의 증축 가능성 문제, 고려시대 토성의 범위 확인과 조선시대 성곽과의 중첩관계 등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와 사용 척도에 대한 고증, 그리고 고려시대 축조된 토성과 조선시대 증축 또는 중 종 15년(1520)에 개축된 석성과의 범위 관계도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입보용산성은 몽골 침입과 관련되어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최근에는 그 시기가 나말 여초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가야산성과 독용산성은 평지에서 멀리 떨어진 험 산대성(險山大城)이다. 가야산성 내에서 조선 전기 및 그 이전 시기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 으며, 독용산성 남문지 하부에서 토축 성벽이 확인되어 이들 산성은 축조시기가 고려시대까 지 소급될 수 있는 전형적인 입보용 산성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산성에 대한 발굴조 사가 진행된다면 보다 구체적인 입보용산성의 초축 시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8,700원
        4.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일대에 축성된 전라우수영 성곽의 부재를 대상으로 암석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산지를 추정하여 보수정비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연구대상인 전라우수영은 2016년에 사적 제535호로 지정되었으며 성곽의 잔존구간은 약 15% 정도로 보존관리가 필요한 실정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성곽 부재에 대한 암석기재적 특징을 바탕으로 축성에 사용된 암석을 분류하고 사용비율을 산출하였으며 동시에 전암대자율을 측정하였다. 채취한 성곽 시료의 현미경관찰로 광물 구성 및 조직 등을 파악하였으며 주변지역에 대한 지질조사를 통해 축성 재료의 가능성이 있는 주변암과 비교하였다. 연구 결과, 성곽 부재는 크게 응회암류와 기타 암석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대부분이 응회암류이며 세부적으로는 응회암, 화산력 응회암, 화산력암이다. 부재로 사용된 비율을 살펴보면 화산력 응회암이 60.3%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이어서 응회암(34.7%), 화산력암(2.5%) 순이다. 전암대자율 측정 결과 응회암류는 1×10−3 SI unit 이하의 낮은 값과 1-14×10−3 SI unit의 높은 값을 보이는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변암은 응회암이 우세하나 위치마다 기재면에서 차이를 보이며 그 외의 응회암류는 화원면 신덕리 일대에 분포한다. 암석기재적인 특징과 전암대자율값, 채석산지의 가능성을 고려하면 부재의 응회암은 문내면 동외리, 화산력 응회암은 화원면 신덕리 일대가 산지로 추정된다. 추가로 축성 재료의 기준 설정을 위해 성곽의 주요 부재를 대상으로 물성시험을 수행하였으며, 압축강도 면에서 응회암이 약 156 MPa의 양호한 값을 보였다. 물성시험 결과와 부재의 암종 별 사용량을 종합하면 성곽의 보수정비 시 대체석으로는 응회암이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4,000원
        5.
        2017.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main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preservation and management for the city wall ruins of China, and to find out the implications. Firstly, Chinese walls have experienced a process from demolition to protection. The walls of the historical value of the site are gradually being certified, and many walls ruins were designated as a conservation unit. Secondly, China’s institutional system is based on the central government issued Cultural Relics Protection Law and combined with the actual situation of local governments to establish a special law. Management System is Cultural Relics Bureau, the planning department, the garden department and the tourism sector joint implementation. Thirdly, through the study of Nanjing, Xian, Pingyao, Suzhou city wall ruins finding that perfect legislation and unified management system to help protect city wall ruins.
        4,300원
        6.
        2017.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Korea, the occurrence frequency of earthquakes has recently increased, compared with the past. So, the various damages for cultural properties due to earthquake can be expected, and especially fortress structure is vulnerable to earthquake. Therefore, the resonable seismic characteristics evaluation is required to secure the safety for fortress structure with the various construction and configuration types. Also, we should consider the various applied load conditions as design variables. To this end, this study classifies fortress structures according to the construction and configuration types, and then applies the discrete element method to model and analyze fortress structures. Finally, the seismic characteristics is evaluated through slip condition due to the analysis results considering the various design variables.
        4,000원
        7.
        2014.11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8.
        2013.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강원지방에 분포한 중세성곽의 현황과 현재까지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된 성곽을 중심으로 문헌기록과 연결하여 강원지방 성곽의 특징을 분석하는데 이 글의 목적이있다. 본고에서 다루는 성곽들은 중세에 신축되거나 수·개축된 성곽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정밀지표조사보고서나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보고서 등이 발간된 성곽을 중심으로 그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강원지방은 태백산맥이라는 자연적 경계로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단순비교이나 면적상으로 영동지역이 영서지역보다 작은 편이다. 그러나 성곽의 분포수에 있어서는 거의 비등하다. 다시 말해 이는 고려시대 동계로 편입되었던 영동지역은 군사적 목적이 강하고 그에 따라 성곽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영동지역은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나『高麗史』등과 같은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초기부터 해안으로부터의 이민족 침입이 자주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해안성들이 축조되고, 해안성이나 주변 성곽을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읍성들이 축조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육지를 통해 몽고의 침입이 있었고, 해안을 통해 왜의 침입이 증가함에 따라 험악한 산중에 입보용산성이 축성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전쟁양상과도 관련이 있으며, 점령이 아닌 약탈의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영서지역은 문헌이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아직까지 읍성이나 평지성, 평산성이 조사된 사례가 없다. 현재까지 조사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운영되던 테뫼식산성을 수축하여 사용하고 몽고의 침입과 더불어 영동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대규모의 포곡식산성을 축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에서 중세 강원지방 성곽의 시기적 변천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성곽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발굴조사가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발굴조사가 이뤄진 성곽은 많지 않다. 또한 정밀지표조사가 실시되어 70여개소에 달하는 중세성곽에 대한 정확한 현황이 필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축적되고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된다면 본고는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7,000원
        9.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먼저 문무좵신문왕대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주좵소경의 성을 구체적으로 비정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漢山州晝長城,國原城(옛 薍長城)은 각각 남한산성과 대림산성에 비정할 수 있었고, 신문왕대에 축조된 주좵소경의 성 역시 평지 시가지 인근의 산성으로 파악하였다. 이들은 입지와 규모로 보았을 때 삼국 시대에는 거의 요구되지 않았던 지방 도시 거주 지배층의 피난성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성벽의 양상은 오히려 기존의 거점성에 비하여 정연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따라서 이 시기 성벽 축조의 표준을 보여주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한편 소경의 중심 지역에 나타나는 평지 토성은 신라 말이나 대체로 고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통일기의 坊구획과 잘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무의미해진 시점에, 상시적인 방어 시설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당 전쟁기에 축조된 한산주 주장성이나 국원성(옛 완장성)은 실제로 한산주 및 국원소경에 거주하고 있었던 왕경인들의 장기적인 입보처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다시 평지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정비되었을 것인데, 한산주의 경우에는 8세기에 들어 기존의 거점성인 이성산성이 새로이 정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국원소경의 경우에는 현 충주시내에 새로운 시가지가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한산주에서는 9세기에 들어 이성산성보다는 다시 남한산성이 활성화되는 양상이 나타나며, 그보다 늦은 시기에 국원소경에서는 평지 시가지를 둘러싼 부정형의 토성이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5,700원
        10.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三國史記』에의하면신라文武王13년(673) 9월에 둘레 2,592보의 국원성(國原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국원성 추정지는 지금의 충주 중심부 외곽 사직산∼만리산∼충주 성심학교를 연하는 구릉성 능선과 평지를 에워쌓은 외성(外城)이 말각정방형(抹角正方形)으로 둘레가 약 6km 의 흔적을 남기고 있고, 그 안쪽의 내성(內城)은 조선후기까지 경영된 충주읍성터가 위치하고 있어 이중복곽(二重複郭)의 나성구조(羅城構造)이다. 외성의 한 변의 폭은 대략 1.6km 정도로서 남북 중심축이 약 48° 정도 서향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의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계획적인 구상을 하여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터의 입지는 성곽의 규모가 크면서 북쪽의 남한강(南漢江)과 서쪽의 달천(達川) 사이에 위치하고, 전면에 하천을 끼고 뒤에 산을 배경으로 하여 축조되고,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축조되어 있음은 한국의 다른 읍성(邑城)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성터는 당초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국원성이라는 큰 성을 쌓아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로서 기능하였다고 여겨지며, 이 성터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충주성(忠州城)으로서 기능(機能)하여 고려후기 몽고침입기(蒙古侵入期)를 즈음하여 대대적인 개축(改築)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방치되고 내성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터는 충주의 사직산 서쪽 사면 구간과 만리산 동쪽 구간 능선 외연(外緣)에 잔존하는 성벽 구조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만리산 구간 토루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대략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때의 신라계 산성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기와편으로서 인접한 충주산성에서 출토된 것들과 같은 유형의 유물이며 내성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국원성의 축조(築造)와 관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의 국원지역 대한 성곽 경영(經營)은 진흥왕 때에 먼저 남쪽의 충주산성(忠州山城) 및 평지에 작은 읍성(邑城)을 먼저 축조하고, 이후에 외곽에 대규모 평지성을 축조한 것이다. 이 성터의 구조가 평지에 대규모 방형(方形)의 이중복곽구조 성곽(二重複郭構造城郭)을 이루고 있으면서 배후(背後)에 산성을 두고 있음은 같은 시기의 다른 지역 도시성곽과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600원
        11.
        2011.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성곽의 축조는 당대의 토목기술과 관념(정치상황과 국가간의 관계)을 반영하므로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성곽들은 유사한 축조수법과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양상은 창녕지역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본고에서는 창녕지역 성곽 중 낙동강 연안에 축성된 성곽에 대한 지표조사를 바탕으로 확인한 속성들을 분석한 결과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성곽들은 5세기에서 6세기 초반경 재지세력에 의해서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낙동강 연안의 성곽들의 특징 및 성격은 첫째, 낙동강과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축조된 성곽들은 200m 이하의 소형인데 반해, 창녕지역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지점의 성산산성과 웅곡리산성, 그리고 낙동강 중류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점의 구진산성은 대체로 400~600m로 대형에 속하지만 경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신라산성 중 규모가 소형인 산성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소형에 해당된다. 따라서 낙동강 연안에 위치하는 성곽의 규모로 보아 낙동강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낙동강 연안 성곽의 축조수법은 토성과 석성으로 나누어지며, 토성의 비율이 높다. 토성의 정확한 축조수법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 시기에 축조된 다른 토성들의 축조 수법을 감안할 때 순수판축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성의 경우 허튼층쌓기에 가깝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암괴가 노두된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음으로써 공력을 줄였다. 이러한 양상은 전형적인 신라성곽과는 차이를 보인다. 상기의 내용으로 보아 낙동강 연안에 축조된 성곽들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 신라의 영토 확장과 관련된 지역에 축성된 신라성곽의 특징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근거 역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는 대부분의 성곽들이 신라에 의해서 축조되었다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6,400원
        12.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근대 시대의 군사활동이나 방어에 있어서 성곽이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전투가 攻城이나 守城戰이라는 것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이 상시화된 삼국시대의 경우 수많은 성곽이 건설되고 또 폐기되었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성곽유적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명확하게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유적도 있고 또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만 그 위치조차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러 史書에 기록되어 있거나 유적으로 남아있는 삼척지역의 성곽과 수군 유적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국 시대 신라의 여러 군사적 활동과 관련하여 그러한 유적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연구하였다. 아직 고고학적 조사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10개의 城址 가운데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갈야산성, 옥원성, 호산리성지, 광태리고성, 맹방고성 정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성터로 자리잡 았던 곳이라 여겨지며 결과적으로 신라의 북방 진출이나 지방통치체제 정비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오화리산성은 신라의 삼척 점거 초기에 조성된 산성이며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여겨지며, 古代 삼척군의 領縣과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호산리성지(혹은 옥원성지), 광태리고성(혹은 맹방고성) 은 小據點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갈야산성 성벽하부에서 신라고분이 발견된 점에서 볼 때 갈야산성도 신라가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 시기는 오화리산성 보다는 후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신라는 일찍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박 운영 제도를 확립하였고, ‘船府’라는 관 청을 두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상당한 규모의 수군과 병선제조 능력, 운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신라의 북상과 함께 동해안 곳곳의 주요 요충지가 신라 선박의 기항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와 오분항은 신라의 군사거점과 연계하여 가장 중요한 기항지였다고 여겨진다. 異斯夫가 우산국 정벌을 앞두고 하슬라군주로 임명된 사실을 중시하여 이사부 가 통제하던 신라군이 모두 하슬라(강릉)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가서 우산국 정벌에 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史料도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본래 하슬라(강릉)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북부 동해안 지역이 ‘실직주’라는 명칭하에 관리되고 있었던 것을 州의 명칭과 그 중심지를 하슬라 지역으로 바꾸어 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직군주를 지내면서 건설해 놓은 군사거점을 옮긴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슬라주를 설치하였으면서도 지방 주둔 신라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단인 停(悉直停)을 곧바로 하슬라로 옮기지 않고 하서정을 무열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강릉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척에 상당기간 주둔하며 육성한 수군을 우산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목전에 두고 군주의 이동과 함께 완전히 이전하여 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우산국으로 향하기 훨씬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삼척지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군주 명칭이 바뀌었다고 옮겨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10,100원
        13.
        2010.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韓半島의 중심부에 위치한 忠州지역에는 지금까지 忠州邑城 · 忠州山城 · 薔薇山城 · 大林山城 · 寶蓮山城 · 龍觀洞山城 · 文周里山城 · 見鶴里土城 · 彈琴臺土城 · 하늘재 山城(寒喧嶺山城) · 마즈막재嶺阨(忠州嶺阨) · 麻骨岾山城 · 烽峴城址 등 모두 13개소 城郭이 알려져 있었는데, 2009년도에 새로이 虎岩洞土城과 將台山城 2개소가 찾아졌다. 虎岩洞土城은 충주시 虎岩洞 560번지 일원에서 일부 잔존하는 土壘가 확인돠었는데, 『三國史記』에 新羅 文武王 13년(673) 9월에 쌓은 國原城(옛 薍長城)터가 高麗 高宗代 蒙古侵入期에 改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실체는 土城으로서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황폐화되면서 高麗末期~朝鮮前期에 축조된 石築의 邑城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해 진 것으로 보이며,『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1942)에 보이는 烽峴城과 관련있어 보인다. 將台山城은 충주시 금가면 금가면 하담리 산 9-3임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련 文獻의 기록은 없으며, 統一新羅時代의 瓦積層 위에서 확인되는 U字形의 壕유구 및 凹字形의 도랑유구 등 성벽의 축조와 관련한 새로운 구조가 확인되어 주목된다. 虎岩洞土城 주위로 山城이 배치되어 있음은 新羅의 王京이었던 慶州地域, 新羅 西原京의 治所였던 淸州地域의 城郭配置가 중심부에 邑城을 두고 外廓에 山城을 배치하고 있는 사실과도 비교되어 이와 비슷한 羅城體系를 형성하고 있어 주목된다. 忠州地域에서 다양한 구조의 城郭이 확인되고 있음은 南漢江유역에 위치한 넓은 平野를 갖고 있는 지역으로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陸上 交通路 및 東西로 이어지는 水路가 발달하여 있어 地理的 要衝地이면서 戰略的 重要性이 강조되고, 지역의 政治的 位相이 높았던 결과로 보인다. 충주에서 새로이 발견된 虎岩洞土城과 將台山城은 古代 中原京을 중심으로 한 城郭의 配置 및 築城史 硏究에 새로운 자료로 여겨지며, 韓國 城郭史 硏究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6,400원
        14.
        2010.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한국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서울, 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倭가 개입하여 축조한 성을 말하며, 그 축조 배경에는 일본군의 남해안 거점 확보가 주목적이었고 부수적으로는 행좌소와 보급기지 역할이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 왜성은 1592년에 가덕, 웅천, 영등성을 시작으로 1593년에는 서생포, 기장, 자성대, 안골포, 거제도 등지에도 축조되었다. 이러한 왜성은 현재 남해안 일대에서 이미 확인된 것만 해도 30여 개소에 달하며, 내륙 곳곳에서도 유구는 자세하지 않으나 왜성의 기울기와 축조수법을 가진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김해, 울산, 구포, 순천, 사천 등지에서 간헐적인 고고학적 조사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최근 한일 양국에서 왜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조사 예가 늘고 있다. 왜성이 토목이나 건축사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성곽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면 연구는 주로 일본인에 의하여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왜성에 대한 전기한 기존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본인이 직접 현지답사에서 얻은 자료를 집성, 분석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았다. 그 결과 축조기술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일본성곽요소와 우리나라 성곽요소가 혼합된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석성의 발전과정은 사원계 석원의 성립→安土城→舊 大坂城→ 남해안 倭城→肥前 名護屋城→근세 석성→江戶期 개수성 등의 순서인데 그 중간에 왜성이 위치하고 있다. 둘째, 왜성 입지는 강이나 바다의 돌출한 곶에 위치하고 본곽, 2곽, 3곽으로 둘러져있고 그 형태는 연곽식, 별곽식, 제곽식으로 나눌 수 있다. 셋째, 왜성에 사용된 성석은 자연석, 절단면석, 다듬돌, 장식석 등으로 구분되며, 그 변천과정은 자연석→절단면석→다듬돌→화장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말기에 보수된 성에서는 이들 3단계가 혼용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 근세성에서도 장식석까지 혼용되고 있다. 성석 가운데는 성문 입구에 게시용으로 배치한 방문석을 일본 근세성에서는 立石, 裝飾石, 記念石, 鏡石 등으로 명칭하고 있으나 그 시작은 왜성에서부터 이며 조선읍성의 방문석이 그 시원이었다. 넷째, 초기 왜성은 축조 기법상으로 우각부는 축성집단에 따라 기울기를 63°, 60°를 기준으로 하는 곳과 50°이상을 전후한 기울기를 기준으로 하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정유재란기에는 70°, 80°에 가깝게 급한 기울기를 갖는가 하면 성고를 높이기 위해 협축 성벽을 구사하면서 전기한 2가지 기울기를 겸용한 분절형 성벽이 나타나며 전쟁 말기에는 곡선 성벽도 나타난다. 이것은 모두 왜성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알수가 있다. 다섯째, 성곽의 구조적 측면으로 보면 왜성에서 시작된 치성, 적대, 등성로, 해자, 고식 고려문 등이 일본 근세 석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남해안에 위치하는 왜성은 기본적으로 일본적인 요소와 조선적인 축성기술 요소가 혼합되어 발생기에는 일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가, 수축기에는 점차 한국적인 요소가 증대되고 발전기에는 왜성 축조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 근세 석성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기울기의 변천, 경석의 배치, 성석의 채택, 천공에 의한 절단방법, 성곽석과 채움석 쌓기수법, 협축과 분절형 성벽, 치와 적대, 해자, 고려문 설치 등은 우리나라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적으로 축조된 산성, 읍성, 진보루 등 관방성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기술 중 일부임을 감안할 때 일본 근세성은 물론 우리나라 석성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5,500원
        15.
        2009.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200원
        17.
        2008.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200원
        18.
        2008.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평택지역 토성 중 성벽이 조사 된 琵琶山城, 德睦里城, 龍城里城, 武城山城, 農城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 지역 토성은 축조방식에서 기저부에 점질토를 조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중심토루를 조성하기 위한 기단석축의 유무와 판축공정 및 구성재료가 토성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기단석축은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성은 판축으로 중심토루를 구성하였다.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은 축조방식과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심토루가 판축이 아닌 경우는 용성리성, 농성, 무성산성 등이었다. 이들 성들은 해자 혹은 내측 구를 파며 나온 토사로 성벽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무성산성은 점토보다는 자갈과 석재를 혼합하여 중심토루를 조성하였다. 비파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광종 대에는 크게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파산성은 거성현의 치소로써 자미산성에서 그 역할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서의 비파산성은 자미산성과 무성산성과 더불어 안성천 하구변의 해안방어와 해로교통망 확보를 위해 활용되었다. 덕목리성은 통일신라시기 이 지역에 인구가 집중하면서 축조되었다. 새로운 촌락과 행적적인 거점을 위해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동성과 서성으로 토성이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용성리성은 고려후기에 아산만 일대로 진출한 왜구들로 부터 비파산성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무성과 자미산성, 용성리성은 남북으로 연계하는 구조로 비파산성을 방비하고 있다. 농성은 고려후기 혹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가 습격해 올 때에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농성의 구조가 인근주민이 장기간 立保하여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7,700원
        20.
        2007.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000원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