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contemporary architectural discourse, the concept of space is ubiquitous, yet its historical genesis and theoretical underpinnings in Gottfried Semper's seminal theoretical work remain under explored. This study investigates the reception and integration of Semper’s architectural theory into modern discourse, tracing its trajectory from August Schmarsow, to Nikolaus Pevsner, to Sigfried Giedion. While Semper’s “cladding theory” had initially been understood in terms of both its relation to physical properties and structural and functional values, leading to an expansion of cladding as a new genre of art, i.e. arts and crafts, Semper’s “architectural theory” instead explained cladding theory in terms of space. In disseminating Semper’s theoretical work, Schmarsow was especially important as he himself played an increasingly prominent role in expanding the boundaries of modernist architectural theory and practice from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on.
이 논문은 미국 남부의 농본주의운동에 의한 예이츠의 수용을 배경으로 예이츠의 문학적 유산이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전유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남부의 전통과 현대성 사이의 대립적 구성을 바탕으로 농본주의 비평가들은 예이츠의 문학적 비전 속에서 그 둘의 결합의 가능성을 찾았고, 그를 그러한 통합과 완성의 표식으로 주조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이츠에 대한 미국 남부의 수용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부 모더니티의 중심에 도사린 불안감, 다시 말해 현대시와 전통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싶은 열망과 그 연속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지역적 특수성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남부의 예이츠 수용은 예이츠의 문학적 유산이 문화적 역사적 충돌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문맥화될 것임을, 그리고 예이츠의 지역적 수용의 혼란스러운 방향성은 그 위대한 시인의 문학적 유산의 창조적 계승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proposes a solution to the out-of band oscillation signal and in-band low transmitter power output that occurrs during the low-temperature operation test for the new mine detector GPR signal transmission and reception module. Tests were performed by applying the optimal values of capacitors and inductors through circuit analysis simulation under the limited space,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gain and return loss were improved at all-band thereby preventing oscillation signal and low transmitter power output.
아브라함 종교들은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혹은 친족]인가’ 라는 문제에 자신의 적법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한다. 수용사 속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아브라함-사라-이삭’의 계보를 ‘하갈-이스 마엘’로 이어지는 계보와 비교 대조함으로 아브라함과 자신들의 관계를 배타적으로 설정하며, ‘하갈-이스마엘’ 계통에 대해 왜곡하고 폄하한 다. 아브라함 종교들 사이의 첨예한 대립의 문제인 ‘아브라함의 친족 됨(kinship)’을 구약성서 속에서 연구한 결과 아브라함의 친족 됨은 민족들 또는 하갈-이스마엘로 불리는 타자들을 향해 열려있으며 아브 라함은 타자들과의 관계하는 삶의 원형으로 제시된다. 선교는 낯선 타자들과 만남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타자 없이는 선교도 있을 수 없으며 타자를 향한 보내심이 교회와 선교의 본질이다. 유일신 신앙과 예언자들을 공유하는 아브라함 종교의 전통은 고통받는 타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책임을 수행해 왔으며 오늘날도 이 가치는 아브라함의 친족 됨의 핵심가치로 변함없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Historically, rhythm has played a key role not only in musical composition, but also in architectural design. In 1893, architectural theorist and art scholar August Schmarsow, in "The Essence of Architectural Creation,” created a new definition of architecture as space-creation and characterized rhythm as a design principle. However, this new idea was confronted by Heinrich Wölfflin. While Schmarsow’s theory represents a dynamic world-view based on anthropomorphism, the architectural theory of Wölfflin is based on the notion of harmony, displaying a kind of conservative stasis. These two main streams have greatly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modern architecture. The concept of space has prevailed in the discourse of modern architecture, but the principle of rhythm has seldom received any positive recognition. This article introduces and develops the concept of rhythm and disputes whether Behrens and Frankl in particular, two who dispute Schmarsow’s theories, have used the concept of rhythm in terms of space. I conclude that they could not overcome the notion of the physical—the body —, thus their use of the term rhythm is incongruous with the notion of space. The idea of rhythm in architectural creation remains an up and coming idea.
예이츠는 중국에서 1910년대부터 소개되고, 번역되고 연구되었다. 수용 범주는 3가지인데, 지배자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작가, 신중국시의 현대적 규범으로서의 예이츠, 중국문학의 국제화를 위해 공부하는 세계문학으로서의 그의 작품성, 등이 다. 중국에서의 예이츠의 변모는 외국문학의 수용은 정치적, 문화적, 문학적 요소 등이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과정이라는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cultural meaning behind modern experiences of diversity through the history of clothing in Korea. To this end, this study examines aspects that dictate clothing culture acceptance experienced and practiced by women by analyzing the case of the Naju rural area in Jeollanam-do from the 1950s to 1980s. Modern clothing was accepted later in the 20 century in this village, and the Satgolnai traditional textile tradition was an important factor after 1950s. In addition, the continuity of the rural five-day market is different from practices in the city. Limitations in access to media such as TV, films, and magazines, and the functional meaning of clothing in rural areas contributed to limitations for women to get the opportunity to access modern clothing items that were popular in the city. Unlike in the city, the event that inspired the transition to full-scale modern clothing in this village was the Saemaul Undong Movement of the 1970s. Additionally, Mombbe (labor cloth) wor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as continuously worn as daily clothes for Naju women even after the 1950s. Therefore, colonial modernity continued through clothing.
This study is about pressure-accepting behavior of consumers attached to brands. Previous studies of the situation focused on time pressure and scarcity pressure, focusing on scarcity.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consumers attached to brands were found to be relatively blunt in time pressures. This indicates that brands of consumers are attached to do not buy on impulse because of time pressure. Second, consumers attached to brands were found to be relatively under social pressure. This indicates that consumers who are attached to the brand do not buy with social pressures such as quasi-family groups. Third, consumers attached to brands were found to be relatively sensitive to scarcity pressures. Thus, a quantity-limited marketing strategy is generally more effective for consumers with high marketing effectiveness but high brand attachment. Fourth, unlike the one presented, consumers attached to the brand were found to be relatively insensitive to place pressure.
이 연구는 17세기 초의 북부 네덜란드 화가 헨드릭 테르브루헨의 작품 <의심하는 토마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연구는 우선, 테르브루헨의 <의심하는 토마스>를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토마스>와 비교해 구도가 일치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이 연구는 테르브루헨의 작품을 감상했던 감상자들 이 작품 앞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음을 전제했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감상자들이 테르브루헨의 작품 앞에서 성경원문과 그림전통의 차이에 대해 대화했음을 증명하려 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테르브 루헨의 작품을 둘러싼 수용활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Foreign Reception Hall in Gyeongungung Palace was constructed during 1899-1902 according to Yesigjangjeong (禮式章程), Korean Empire's modern diplomatic protocol. This bulilding is a case worthy of notice, because its construction process was written in Jubon(奏本), Korean Empire's official document. Yesigjangjeong(禮式章程) regulates the process of diplomat's audience with Emperor Gojong. The process suggested that Foreign Reception Hall was designed as the place of the end as well as the beginning for audience. According to the process, diplomat came through main gate, Daehanmun and outer gate of main hall(Junghwajeon Hall, Audience Hall), then arrived at the stair to Foreign Reception Hall. After waiting time in the hall, he was going to be granted an audience with Emperor. And he exited through Foreign Reception Hall as the reverse way. This hall was constructed as western-style. Subcontracted carpenters and wood sculptors and laborers from China represents that chinese workers were prevailed in the government construction at that time. And modern building materials, such as glass, colored brick, sanitary wares and lightings were applied, which showed the new landscape in the middle of Gyeongungung Palace. Above all, official documents related with this hall reveals Korean Empire supervised this construction for diplomatic protocol. That is the identity of western-style buildings in Gyeongungung Palace.
오늘날 예술에 있어서 공포의 표현은 인간성의 상실, 환경의 파괴, 인간관계에서의 소통의 부 재 등을 소재로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술작품에 표현된 공포 이미지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사회적, 외부 환경적, 심리, 유전적 원인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여러 예술 장르 중 영화는 이러한 공포 유발의 원인들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내용)와 영상이미지(형식)를 함께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관객의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따라서 공포영화에 있어 공포를 유발하는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관객 수용의 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의 이미지와 표현방법에 대한 관객 인식유형의 연구는 현재까지 많 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질적 방법론 중 하나인 Q방법론을 사용하여 공포 영화 속 혐오성 이미지에 대한 수용자의 주관적 감정의 상태와 유형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3가지 인식 유형을 도출할 수 있었다. 먼저 신체적 가해에 대한 공포 감정을 느끼는 유형이 다. 이 유형은 잔인함 혹은 신체적 가해로 인해 나타나는 불안함을 공포의 감정으로 표출하고 있다. 다음으로 낯섦에 대한 공포는 알려지지 않는 악령이나 초자연적 현상 혹은 여성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기형적 혐오성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는 유형은 이질적인 것들 인간과 다른 괴물이나 외계 생명체에 대해 공포의 감정을 갖고 있는 유형이다. 이러한 분석으로 도출되는 가설을 바탕으로 추후 계량적 방법론을 통한 연구가 추가적으로 수행 된다면 더욱 더 유의미한 연구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그의 여타 작품들 및 서양음악의 창작 유산들과 구별되는 수용의 역사, 즉 작곡가 사후 오늘날까지 부단히도 해석, 재생산, 창작의 범주에서 예술음 악과 대중음악 간의 뚜렷한 경계마저 넘나들며 활기차고도 압도적인 생명력을 유지해온 역사에 주 목하면서 그 ‘특별한’ 수용사의 요인들을 역사의 흐름 안에서, 작품의 내부에서 찾으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다양하고 때로는 매우 이질적인 시대, 양식, 장르, 음악적 콘텍스트로의 탁월한 동 화력과 시대, 양식, 장르의 초월성으로 귀결되는 양면적 가치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특별한’ 수용사를 일군 주요 요인이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 기댄 후대의 작품들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부여받기도 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수용사는 결국 이 작품이 품고 있는 가치와 속성, 음악적 가능성과 잠재력이 역사의 흐름을 타며 한껏 발현되고 호응될 수 있는, 역사적 · 예 술적 위상의 담보가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에 기반을 둔다.
The spiritual world in Wang Wei’s poem has a significant impact not only to the artists of the time but also to the Chinese literati at later date. This infleunce was not limited to the ancient Chinese literati. It also infleunced Goryo dynasty’s scholars. Goryo literati influenced by his poem were Lim Yujung(林惟正), Lee Gyubo(李奎报), Lee Jehyun(李齐贤), Jin Hwa(陈澕), Lee Saek(李穡) and so on. Its influence to the Goryo Dynasty’s scholars was essentially founded on the Nature of perception,the style of 'The implication', Zen realm and 'Poem paintings' realm in Wang Wei’ poem.
이승우는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구원과 초월, 인간의 내면적 욕망과 운명,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천착해 왔지만, 교리적이거나 기독교 변증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감추기 위해 드러내고, 드러내기 위해 감추는 기법을 전략적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지상의 노래』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성서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수용하여 초월과 구원, 인간의 욕망과 운명,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후의 사촌 누나 연희는 박 중위의 일방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어 희생당하고 후는 박 중위를 죽이려 하지만 자기 자신도 연희 누나에 대한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후와 연희는 압살롬과 다말에 대비되고, 박 중위는 암논에 대비된다. 후는 나중에 정보기관 고위직에 있는 사람의 부인인 ‘사모님’과 성행위를 하면서 연희누나를 떠올린다. 그 순간 ‘사모님’은 곧 연희 누나이다. 따라서 후는 자기 안에 암논이 들어 있음을 깨닫고 고통스러워한다. 이 작품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인 천산 수도원은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있었던 70인역 유대 번역공동체를, 천산 수도원의 일흔두 개의 방은 곧 유대번역가 일흔두 명이 사용했던 동굴방을 떠올린다. 이 작품은 성서 이야기를 수용하여 구성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The Bauhaus educational method gave the strong influences on Modern Japanese art and design education. In the 1920s and 1930s, Japan allied with Germany and Italy politically and tried to receive German system to be modernized. The reception of the Bauhaus and Moholy-Nagy's photographic theory was one of those activities at that time. Japanese intellectual class went to the Bauhaus and studied there; Ishimoto Kikuchi, Nakata Sadanosuke, Mijutani Takehiko, Yamawaki Iwao and Yamawaki Michiko(Yamawaki Iwao's wife). Especially, Yamawaki Iwao studied about the architecture at the Bauhaus, but his interest moved toward the photography and the photomontage based on Moholy-Nagy's theory. He studied at the photography workshop of the Bauhaus presented by Peterhans irregularly. Even though Yamawaki Iwao was an architect, he wanted to be admitted as an expert for the photomontage that he particularly studied at the Bauahus as a Bauhaus member. He had presented many articles about the photomontage at the photography magazines in Japan in order to introduce it to Japan since he returned in 1933. Thus, Yamawaki Iwao is the important person when we look back the Modern Japanese design and art history. In Japan, the art and design systems are managed by the Bauhaus educational system until now, and it has become a kind of cultural legacy in Modern Japan; The university of Tama and The university of Tsukuba are the representative educational systems which are based on the Bauhaus legacy. However, Yamawaki Iwao had been concealed as a photographer in Japanese design and photography history until the retrospective discuss named by ‘Bauhaus syashin(Bauhaus Photographies)’ at the photography magazine, Deja-vu in 1995 and the retrospective exhibition titled as ‘Bauhaus syashin(bauahustofografie)’ in 1997. This study rethinks of Yamawaki Iwao's historical position while looking at the term as ‘Bauhaus Syashin(Bauhaus Photographies)’ used in Japan. It is very important to bear in mind Moholy-Nagy's wide variety of approaches to photography at the Bauhaus, but it is impossible to name it ‘Bauhaus style’. ‘Bauhaus style’ is the international style in architecture, but that was never a Bauhaus style in photography. Eugene J. Prakapas indicated that the vague term of ‘Bauhaus Photographies’ in his article in 1985 as well. This study considers the historical background for the mistake of the term of ‘Bauhaus Syashin(Bauhaus Photographies)’ in Modern Japanese history, while looking at Yamawaki Iwao's photomontage faintly entering on the historical stage again to discuss the reception of the photomontage from him. In particular, Some of Yamawaki Iwao's photomontage presented as the wall photography in Japa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that was related to the propaganda of Japanese government. It had not been known well in the modern Japanese art and design history because it was related to a declaration of the Second World War by Japan. However, the historical position of his photomontage is very important for Japanese history when we rethink of the reception of the Bauhaus and Moholy-Nagys' photographic theory to build up the Japanese modern history. In the result, this study wants to discuss that the mistake of the term of ‘Bauhaus syashin(Bauhaus Photographies)’ in Japan is related to the interpretation for the the historical position for Yamawaki Iwao's photomontage in the reception of Bauhaus and Moholy-Nagy's photography in Japan.
沈遠悅은 실험적이고 경험중심적인 소재와 사유를 다양한 문학 장르에 구사했 던 19세기 중엽의 문인이다. 그의 『鶴陰散稿』에 담겨있는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작품들을 개인적인 성향에서 발로한 것으로, 또는 교유관계, 시대상과 관련지어 살펴보기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심원열의 문학비평론이 公安派의 그것과 상당 부분 유사함에 주목하여, 조선후기 한문학이 중국 공안파의 영향으로 일정하게 변모되는 흐름 속에서 심원열의 산문을 살펴보 았다. 公安派의 핵심인물인 袁宏道는 “옛날은 옛날일 뿐이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 옛 사람의 언어의 묵은 자취를 답습해 뒤집어쓰고는 예스럽다 하는 것은, 엄동설 한에 여름의 베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격이다”고 하면서 옛것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체의 상고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며 시간 상대론을 제출하였다. 심원열 또한, “하필 古談이리오? 近事가 있을 따름이오”라고 하며 진부한 옛날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이야 기를 하고자한다. 원굉도가 옛것을 맞지 않는 옷에 비유해서 벗어던지고, 현재의 주체에 꼭 맞는 것을 추구한 사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심원열에게 있어 이러한 상대주의적 사고는 구체적 경험 중시와 선험적 진리의 부정, 경전과 성인 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로 폭넓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를 예증하는 많은 글도 있다. 이는 결국, 심원열이 격변하는 19세기 당대를 살아가면서 생동감 넘치는 현실 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려는 고뇌에서 산생된 인식으로, 경전이든 한문고전이 든지 추구한 바가 현실과 유리되어 화석화되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 사하는 바가 크다.
松江이 활동하던 시대는 倭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난리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黨爭으로 인한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정치 ․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西人의 우두머리로서 정치에 몸담았던 송강은 黨派로 인한 답답한 심정과 謫所生活에서 겪는 고민을 해소하고자 도연명이 자연을 벗 삼아 참신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田園閑居 생활을 흠모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自然憧憬의 시를 읊었다. 송강은 도연명처럼 자의적으로 歸去來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타의에 의한 謫所生活에서 出仕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임금의 은혜로 謫所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되어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오른 것은 도연명이 자의적으로 전원에 歸去來한 후 다시는 조정에서 불러도 정치에 뜻을 두지 않은 出處觀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임금에 충성하고 經世濟民에 뜻을 두었던 16세기 조선 士林들의 出處觀과 송강도 같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도연명은 政治道義가 상실되어 不義한 방법으로 신하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어 晉에서 宋으로 나라가 바뀌자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와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라는 儒家의 관념에 出處觀을 두었고, 송강은 맹자가 말한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에 出處觀을 두어 經世濟民하고자 끝까지 벼슬에 대한 집착을 하였다. 이를 보면 兩人의 出處는 儒家의 가치관에 의해 정했다는 것이 相似點으로 나타났다. 松江은 당시 黨爭으로 인한 정치 현실에서 고뇌를 해소하고, 謫所생활에서의 위안을 얻는 데는 술만큼 좋은 媒介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도연명이 憂愁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는 점과 일치한다. 도연명은 비록 다섯 편의 시에서 짧은 시구로 국화사랑의 시를 표현하였으나, 周濂溪가 그의〈愛蓮說〉에서 국화는 꽃의 은일자다.(菊, 花之隱逸者也.)라 말하고, 晉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다. (晉陶淵明獨愛菊)라고 말하여 도연명의 국화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킨 이후 송강도 菊花하면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밑에 심었던黃菊을 연상하였고, 국화를 통해 名利로부터 탈속하여 선비로서의 고결한 자태를 보여준 도연명을 국화사랑의 대표자로 생각하며 존경과 흠모하는 시를 읊었다. 田園은 생명의 근원이 샘솟고, 자연의 숨결과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며,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勤勉과 休息을 주는 최후의 安息處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일반 전원시인들과는 달리 그의 시에서 田園에 대한 讚美와 함께 몸소 전원에서 躬耕한 체험을 바탕으로 田園의 생명력이 솟구치는 활기찬 정경을 읊어 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松江도 도연명이 읊은 시구와 典故를 援用하여 도연명의 田園閑居에 대한 동경의 시를 지었다. 陶淵明이 만년에 쓴 〈桃花源詩幷記〉는 晋 ․ 宋年間에 민중들이 정치의 災禍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이상사회를 추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人口에 膾炙되어 왔다. 이 작품은 간결한 언어와 뛰어난 造語力으로 순박하고 화목한 농촌사회를 이상세계로 삼아 老子의 ‘小國寡民’ 이나 儒家의 ‘大同世界’ 이념을 잘 형상화하여 혼란시대에 처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망을 반영시켰다. 도연명의 이상향인 桃源世界는 신선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포악한 秦의 난리를 피해 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魏나라 晉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면서 조상에 제사지내고, 손님에게 닭을 잡아 술을 대접하는 다정다감한 情感과 불 때서 밥해 먹는 인간사회의 정황을 묘사하였기에 松江도 도연명이 묘사한 儒家的 관념의 桃源世界를 갈망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도연명은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자 不老長生을 추구하는 道家나 靈魂不滅의 佛家에도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宿命的인 죽음을 해결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儒家的인 自然歸依觀에 최후의 몸을 맡겼듯이 송강도 도연명처럼 儒家的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그의 생을 마쳤다. 결국 兩人은 1200년 가까운 시대적 차이와 각기 다른 국가에서 다른 정치 ․ 사회의 풍파를 겪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兩人의 자연사랑과 은일관념은 儒家的 관념으로 불후의 전원시가 문학을 창작한 것이 일치하며, 兩人의 문학세계는 후대 시가 문학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