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1년 비엔나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1784년에 돌연 프리메 이슨 회원이 되었다. 그즈음은 프리메이슨 운동이 비엔나에서 아주 부흥하던 때라, 많은 사회 인사 들이 이 종교 철학적인 성향의 비밀결사모임에 몰려들던 때였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음악 후원자들을 모으기 위한 처세술 중 하나였다고도 해석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날이 세를 불려가는 이 운동에 요제프 2세가 급제동을 걸며 1785년에 칙령을 선포하자, 정치 사회적인 불이익 을 우려한 많은 사람들이 급물살을 타듯 이 단체를 빠져 나갈 때에도 모차르트는 여전히 프리메이 슨으로 머물렀고, 그렇게 그의 삶 마지막까지 지조를 지켰다. 오히려 그는 그의 대표적인 프리메이 슨 오페라 《마술피리》 외에도 적지 않은 프리메이슨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자신의 지부뿐만이 아 니라 다른 지부의 모임에까지 정기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열성이었고, 심지어 비록 불발로 그쳤지만 새로운 지부의 결성까지 계획할 정도로 이 운동에 대한 소신을 보여주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모차르트에게서 프리메이슨이 갖는 주요 의미를 그의 시기 비엔나의 프리메이슨이 어떤 단체였고, 주창하는 사상은 무엇이었으며, 왜 가입하였는지, 어떤 정도에서 삶과 음악에 구심점이 되어주었는 지, 나아가 그의 음악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면서 확인하였다.
적정기술이란 한 공동체의 문화․정치․환경적인 면들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술이며 문화적정기술은 문화적인 측면이 강조 된 의미이다. 문화적정기술의 측면에서의 마을가꾸기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며 현지의 자원을 활용하고 지속가능한 관점 에서의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본 연구에서는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에 위치한 군둔마을 가꾸기에 있어서 문화 적정기술의 적용점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문헌고찰과 제안연구로 이루어져있다. 문헌고찰을 통해 문화적정기술 의 개념과 문화적정기술을 활용한 마을가꾸기 기법을 고찰하였다. 문헌연구에서 도출된 문화적정개발기법들을 반영하여 실제 사례인 군산 군둔마을 가꾸기 개발에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기법들의 적용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를 통 해 첫째, 군둔마을의 지역적 특성을 알아보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광자원화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둘째, 지역민 중심의 개발이 되기 위하여 현지의 자연, 농업자원, 기반시설, 인적자원을 활용하되 그 방법에 있어서 단순한 개발구조와 디자인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셋째, 지속가능한 관점에서의 개발을 위해, 마을의 경제적 수익모델을 창출하고, 지역민의 의 식과 역량을 꾸준히 개발하도록 지원하며, 자생적 마을과 계획도시가 연계되고 공존하도록 하되, 정주환경을 보호할 것을 제안하였다.
본 연구는 The Abingdon Bible Commentary(1929)에 나타난 주요 신학사 상을 고찰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주석서는 신학적으로나 교회 정치적 으로나 혼란스럽던 시기에 번역되어 1935년에 발행되었으며, 장로교 총회 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單券聖經註釋은 총 다섯 편으로 편성되었는데 제1편에는 “聖經 全體 에 對한 論文”, 제2편에는 “舊約全書에 對한 論文”, 제3편에는 “舊約全書 註釋”, 제4편에는 “新約에 對한 論文”, 제5편에는 “新約全書註釋”이 실려 있다. 개혁주의 신학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이 주석서의 주요 난제는 신학적으로 성경 고등비평과 문서설에 입각하여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주석서에는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논리 가 명백하게 전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單券聖經註釋의 신학적인 문제들을 분석한 학적 작업은 수행되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는 單券聖經註釋을 고찰함에 있어 당시 논란의 핵심이었 던 ‘기적들’과 ‘그리스도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기적들’에 대한 관점에서는 천지창조 사역, 노아의 대홍수, 애굽 십재앙과 홍해도하, 오병이어 기적 등에 대해 고찰했다.둘째, ‘그리스도론’에 대한 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선재성, 양자론, 그리 스도의 인성의 무죄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메시야 자의식, 그리스도 의 죽으심(죄의 전가)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양식 등에 대해 고찰했다.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
스크랜튼은 기숙제 학교인 이화 학당과 보구여관이라는 여성 전용 병원 그리고 공옥여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여자매일학교를 세우고 여성교회와 부인성경학교를 세워 여성을 교육하고 여성지도력을 개발했다. 이것은 여 성교육 활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화기의 한국 여성들에게 ‘여성의 공간’ 의 창출이었고, ‘여성 주의’ 의식의 개발이기도 했다. 특별히 그녀가 설립 한 이 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었던 이화 학당은 스크랜튼이 뿌린 ‘여성주의’ 의식이 싹을 틔우고 태동하는 중요한 묘판이 되었다. 이화학당 이라는 기독교적 여성 고등 교육 시설 안에서 개화기 한국 여성들은 사물 을 규정하고 명명하며 자신과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여성주의 의식’에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자기의식을 현실화하여 당당한 사 회적 전문인으로서 혹은 민족 독립 운동가라는 정치적 주체로서 자립해 가 게 되었다. 이화라는 공간 안에서 여성들은 무지로부터 해방되었고 가정이 라는 공간에서 해방되었고, 아내, 딸, 어머니라는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해 방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여성을 자신의 삶과 역사의 주체로 세우고 사회적 존재로 확장해 가는 의식해방을 이루었던 것이다. 개화기 이화학당에서 태동된 ‘여성주의’ 의식이 가부장제적 성적 위계질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나, 개화기의 ‘여성주 의’ 의식은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의식이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저변을 이룬 우리 나라 ‘초기 여성주의’로서의 의의가 크다. 그러한 의미에서 스크랜튼은 이 나라 여성 교육의 개척자임과 동시에 ‘여 성주의’ 의식의 개척자이자 여성 운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셰커 교도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며 정직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였는데, 생활 에 필요한 제품들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했다. 순수한 기능만을 추구하며 장식이 없는 기능을 위주로 제품을 생산 사용하였 다. 종교적인 내용을 제외하자면 합목적성에 초점을 맞춘 기능주의를 추구했다 할 수 있다. 기능주의는 제품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기능을 중심으로 생산과정과 사용편리성에 중심을 맞추어 디자인, 설계, 생산이 이루어진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기능주의는 상업성과 합리주의를 표방하며 발전했으나, 그 바탕에는 인간을 생각하는 휴머니즘 과 공리주의가 영향을 주었다. 단순히 사용자의 편리함과 정신적 만족감만을 고려한 것이 아닌 생산자의 노동환경 역시 고 려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의 바탕은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데스틸, 독일공작연맹, 바우하우스, 브라운사 로 이어져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기능주의가 사용된 의도, 목적, 시 도했던 각각의 요소들을 그들만의 방법으로 발전시키며 제품 본연의 합목적성에 맞도록 발전되었다.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기능주의 형식으로 발전되었다.
“모든 부는 불의한 부, 즉 불공평한 부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그것 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한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다른 사 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풍부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이 인용문은 부의 불공평한 분배가 불의하다는 관념 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정의는 동등을 함축한다”는 명제로 요 약될 수 있는 토마스 정의론의 핵심적인 관념에 속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토마스의 정의론에 비추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용되어 온 심각한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은 부정의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 인다. 본고는 현대자본주의의 경제 질서가 양산해 온 불평등 문제를 재평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적 준거점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론을 고 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본고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타난 정의론을 사적 소유권의 한계와 빈민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어 철저 한 원전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한다. 이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 을 밝힌다. 토마스는 외적 사물의 관리와 분배에 있어서 효율성, 질서, 평 화를 이유로 사적 소유가 허용됨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외적 사물의 사용에 있어서는 공적 소유를 주장하며, 사적 소유권에 우선하는 자연법의 규정에 근거하여 사적 소유권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즉 사적 소유권은 생 존에 필요한 것이 결핍된 빈민의 자기보존이라는 자연권에 종속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법에 토대를 둔 소유권 이해에 따라 토마스는 빈 민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부의 불평등 문제에 접근한다. 본고의 연구결과는 토마스의 정의론에 따른 소유권 이해가 무한한 재산 의 축적을 정의로운 것으로 본 현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전제를 윤리적 으로 재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화학비료 소비량이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왔고, 인산을 생산할 때 인광석 분쇄하여 황산으로 처리하는 습식 인산비료제조시설에서 폐인산석고가 다량 발생되었다. 이때 발생된 인산석고는 일부 재활용되고 있지만 재활용량이 많지 않아서 공장 인근 적치장에 장기간 적치되어 인산석고 적치장의 유지관리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있다. 특히 폭우와 같은 기상재해로 인산석고가 환경 중으로 유출될 경우 환경 오염이 우려되며, 폐기물관리법 상 인산석고의 해안지역 성토재, 도로기층재, 복토재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으나 실제 재활용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인산석고의 재활용용도 확대를 위해 해안매립지역 염분 토양 개량제로서 인산석고의 일반 토양 복토높이 축소와 안전한 재활용을 위해 환경성 평가연구를 수행하였다. 폐인산석고는 인산석고 적치장에서 충분히 혼합하여 건조한 다음 맨 아래층에 해안준설토를 포설하고 그 위에 일반토양 충진컬럼(대조시료)과 일반토양과의 층별 혼합하여 충진한 컬럼(대상시료)실험을 수행하였다. 토양의 수분함량을 고려하여 증류수를 살포하고 2주정도 정치하여 안정화 기간을 거쳤다. 조사대상지역의 연평균강수량을 토대로 월간, 주간 평균 강수량과 Lysimeter 단면적을 기초로 산정하였고, 증류수(계산된 강수량)를 주 1회 살포하였다. 조사항목은 pH, 전기전도도, 중금속류(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비소 등 유해물질), 이온물질(불소이온, 질산성질소이온, 염소이온, 황산염이온 등)을 폐기물공정시험기준, 토양오염공정시험기준을 참고하여 토양 깊이 별로 시료를 채취한 후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대조시료에 비해 조사대상 시료 컬럼의 나트륨 농도는 인산석고층 상부로 올라갈수록 염분농도가 낮아졌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트륨 농도가 더 낮아질 것으로 판단된다. 비소, 납, 카드뮴, 구리 등 유해중금속 농도는 폐기물관리법 유해물질 기준이하로 나타났다. 최상층 일반토양복토 깊이는 토지이용 및 식재되는 식물 종에 따라 0.5 ~ 1.5m 이하, 또는 나무식재 주변에 한해서 적용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판단된다.
정상적으로 포장되어 출하되지 못하는 폐캡슐의 가장 큰 원인중 하나는 캡슐 수분함량에 의해 결정된다. 수분함량이 16% 이상일 경우 캡슐 변형 및 Sticky가 발생되기 쉬운 상태가 되어 불량이 된다. 또한 12.5% 이하인 경우에도 캡슐이 수축되고 해지기 쉬운 상태가 되기 때문에 가장 좋은 수분 조건은 12.5 ~ 16.0% 이다. 폐캡슐 발생에 따른 문제점은 환경오염 문제를 야기 시킨다는 점이다. 매립이나 소각을 시킬 경우 젤라틴 및 충진물 혹은 색소제 등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토양 또는 대기오염원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95% 이상 수입되고 있는 캡슐의 원료인 젤라틴과 같은 유기성 물질의 손실 때문에 자원 및 비용이 낭비되게 된다. 현재 국내기술로 현장에서 발생하는 폐캡슐을 전량 재활용하는 곳은 없으며 시급히 대안이 만들어져야 하는 실정이다. 그 동안의 사전연구를 통해 회수된 젤라틴에 대한 평가 결과를 아래 표에 나타내었다. 점도와 밀도에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색도부분이 너무 탁하게 나와 불순물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결국 수율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본 과제에서는 그 동안의 사전연구를 토대로 장치를 Scale-up하여 현장에 구축한 후 운전조건을 확립하고 발생처 및 수요기업과의 자원순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폐캡슐을 정제하여 접착제 원료로 회수하는 정치를 사업화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 복음주의는 보수주의와 단순하게 동일시되어 왔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민주화운동과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의 반동적 행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유형의 복음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보수적 복음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 나는 그것을 ‘진보적 복음주의’라고 칭한다. 이 새로운 유형의 복음주의는 몇 가지 중요한 기관과 조직들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기독교학문연구회(기학연, 1984), 한국헨리조지협회(1984), 기독교문화연구회(기문연, 1986),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1987),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1989)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1990년대 이후, 이것은 다양한 조직, 기관, 운동으로 더욱 확대·발전되었다. 예를 들어, 잡지 「복음과 상황」(1991), 기독법률가회(1999), 교회개혁실천연대(2002), 성서한국(2002), 기독연구원 느헤미야(2010) 등이 연속적으로 출현했으며, 한국헨리조지협회는 1996년에 ‘성경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10년에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희년운동)과 통합하여 ‘희년함께’로 거듭났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에서 비슷한 운동을 개척하거나 주도했던 학자들이 IVP를 포함한 여러 복음주의 출판사들을 통해, 국내에 꾸준히 소개되었다. 존 스토트, 크리스토퍼 라이트, 로날드 사이더, 리차드 마우, 짐 월리스, 토니 캠폴로, 브라이언 맥클라렌, 존 하워드 요더가 그런 흐름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이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이 운동의 신학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신학적 원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 신학,” 로잔언약(1974), 기독교세계관운동, 해방신학, 민중신학,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 좌파가 한국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의 탄생과 성장에 지속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진보적 복음주의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비교적 진보적·개방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은 근본주의자들의 것보다 진보적이며,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선 좌파적 경향을 보이고, 행동 방식은 명백히 엘리트주의적 혹은 학문적이다.
이처럼, 진보적 복음주의는 한국의 복음주의 역사에서 대단히 독특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 혹은 극대화하기 위해선, 특히, 대중을 포용하기 위해선, 자신의 엘리트주의와 학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독특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환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서구신학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과 중국에서 산은 단순한 자연체(自然體)가 아니다. 평평한 대지 위에 유독 우뚝하게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은 무언가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며, 설명되지 않는 생로병사의 열쇠를 지고 있는 어떤 신비로운 존재가 있다고 상상하던 곳이었다. 산에 대한 숭배와 상상 력은 하늘의 신과 소통하며 인간사를 다스리는 산신(山神)을 창조 하였다. 한국과 중국 전통 종교에서 산신은 지상과 자연신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며 존숭되어왔다. 한국과 중국 산신신앙 중 특이한 점은 특정 산에 거하면서 역사대 대로 그 영향력을 지대하게 발휘하던 여신, 즉 여산신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여산신은 세속적 민중의 신으로 대단한 응집력을 보이며, 정치 권력층이나 신흥종교와 융화되었다. 한국 지리산의 성모와 한라산의 설문대할망, 중국 상상속의 산 곤륜산의 서왕모와 태산의 벽하원군은 이와 같은 여산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양국의 대표 여산신이며 그 영향력이 현재까지 이어지 고 있다. 본고에서는 지리산 성모, 한라산 설문대할망, 곤륜산 서왕모, 태산 벽하원군과 관련된 신화 자료를 중심으로 한중 여산신의 다양한 형 상을 살펴보고, 변화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여산신 신앙의 변이과정 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순수상업작품에는 창작자의 생각과 사상이 은폐화되어 있다. 개인적인 감성 혹은 사용성, 기능성이 작품에 포함되어 감상자나 사용자에 의해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 제품과 사용자의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인위적인 방해요소가 가미되되는 경우를 우리는 보아왔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사상적 동질감과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용되었고,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지는 십자가는 예수의 순수한 희생이라는 상징보다 크리스트교 포교라는 정벌이라는 이유로 사용되었다. 마오쩌뚱의 푸른색 인민복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십자군의 십자가에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대상에 은폐화 되었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디자인과 건축은 순수한 기능적, 감성적인 내용 이외에 독일 제3제국의 정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은폐화 되어 다른 목적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본 고찰을 통하여 독일 제3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건축과 디자인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이 논문은 러시아와 일본의 상호관계에서 풀어야 할 당면문제를 다루었다. 당면의 문제란, 일본이 러시아의 불법 점령으로 인하여 러시아 영토의 일부가 된 4개의 섬: 쿠나시르, 이투루프, 시코탄, 하보마이에 대하여 그 섬들은 자신의 고유의 북방영토로 주장하고 있고, 반면에 러시아는 그 섬들은 제2차세계대전의 결과 동맹국들과의 합의에 의해서 러시아가 취득한 영토로 간주하고 있는 문제이다. 당면의 이 문제는 양국이 현재까지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현실은, 비록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고, 경제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러시아와 일본의 완전한 협력관계의 장애가 되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이 영토문제에 관한 러시아의 전반적인 사회여론을 조명해보고, 동시에, 이 문제의 논의의 과정 속에서 러시아측의 정부관계자, 정치인,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이 제시하였고,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논거를 밝히는 점에 있다. 일련의 학술연구물 및 보도자료에 근거하여 이 논문은 17C부터 시작된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한 쿠릴열도 개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러시아와 일본간의 일련의 협약에 따른 쿠릴열도의 섬들에 대한 양국간의 영토소유권의 이동을 설명하면서, 현재의 영토논쟁을 낳은 원인과 본질을 검토하였다. 논쟁이 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러시아정책의 기본입장은 쿠릴열도의 4개의 섬이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하는 일본의 주장이 근거가 없고, 러시아, 일본간의 포츠담평화협정이 부당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 직후의 소련의 영토배상의 요구는 정당하다고 보고 있다. 소련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주요 시각은 일본은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쿠릴열도에 관한 모든 권리와 요구를 포기하였다는 점이다. 러시아측은 쿠릴열도 속에 논쟁이 되고 있는 4개의 섬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견해이다. 이에 반해, 현재의 일본 정치가들의 발언은 일본은 논쟁이 되고 있는 4개의 섬을 쿠릴열도(千島) 속의 섬으로 결코 간주한 적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은 본 논문에서도 제시되었듯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한 섬들이 지명이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이 점이 조약의 조건을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건설적인 대화를 기대하고 있다. 이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 즉, 푸친대통령이 아시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발언하였듯이, 무승부를 의미하는“히키와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전후 초기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이루어진 소련점령지 반환을 위한 대중들의 초기 운동에 대하여 주안점을 둔 것이다. 운동의 기원, 그 뒤에 숨은 배경, 그리고 일본 전체 국민들의 광범위한 동조를 얻는데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초기 대중들의 요구는 지방의 경제적인 욕구에 의해서 형성되었고, 또한 공범위한 국내적, 국제적인 정치적 발전이 반영되었다. 이런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여러 조직단체들은 그들의 요구가 직접적으로 구성원들의 물질적 이익을 반영한다고 믿고 단결하였다. 이 운동을 이끈 이념은 1960년대 말 중앙정부가 주도한 이후 영토회복주의자들을 이끌게 된 비물질적인 민족주의와는 분명히 거리가 멀었다. 또한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당시 일본에서 주도된 주권 정체성과 공명을 이루지 못하고 구조화에 실패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 논문은 조선후기 산수 유람의 실태와 그 문화적 양태 가운데 지리산 유람이 보이는 특성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유람환경에서 변화가 보이던 18세기 후반 지리산 유람의 양상에 주목하였다.
18세기는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유람의 성격과 환경에 있어서도 그 전과 다른 현상들이 발견되는 시기이다. 유람문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유람가라고 지칭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였으며 관련 문예도 풍부하게 창작되었다. 또한 유람주체들의 계층과 성격도 다양화되고 원거리, 장기간 여행이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화폐를 소지하고 주점을 이용하는 여행환경의 변화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영남지역의 사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보유한 지역내 명승 유람에 더욱 몰두하는 현상을 보였고 지리산은 그 대표적 유람지였다. 이는 영남지역의 사족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과 지역의 전통적 문화특성이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후기 지리산 유람기의 작성자는 대부분 근방의 처사들이었다. 이들 유람에서 보이는 특성 중 하나는 집단적이며 장기적 여행이 이루어진 점이다. 지리산 유람이 이 지방사족들의 집단적 遊樂로서 기능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연망을 재확인하고 확대하며 결속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유람을 하면서 酒店을 이용하는 장면이 전보다 자주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18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 밖에 지리산 유람자들은 지리산이 남방의 祖宗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천왕봉에 오른 소회를 토로했다. 지리산의 위상에 자부심을 갖고 지방 사족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이제까지 지리산 유람기의 분석에서 간과되었던 시대적 맥락과 지역적 특수성을 살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지리산 유람문화의 역사적 전개를 탐구하는 데 일조하길 기대한다.
기계 또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같은 인공물은 단순히 도구일 뿐인가? 이미 많은 프로그램들이 인간사용자들을 안내하거나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행위자(agents) 개념을 사용하여, 인간플레이어와 게임봇의 행위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게임봇은 상호작용성과 자율성은 물론이고 적응성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게임수행 동안, 게임봇과 인간플레이어는 서로를 구성하는 사이보그 동료이다. 그런 점에서 게임봇은 정치사회적 존재가 되고 있다. 컴퓨터 환경에서 인간행위자는 인공행위자와의 관계에서 구성되는 사이보그적 존재가 되므로, 그들은 전통적인 인간행위자와는 다르다.
이 논문은 근대의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지식인들이 3.1운동 이후 새롭게 형성된 ‘제한된’ 담론공간 안에서 젠더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 고찰한다. 젠더 이슈는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일제 식민체제 하에서 근대사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본격화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 기독교 신지식인들은 새로운 변화에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표출하며 ‘근대’와 ‘전통’의 충돌에서 발생되는 파열음을 도덕적 균형으로 최소화하려는 전략을 보여주었다.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체의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소비주의와 결합된 도덕적 일탈과 가정으로부터의 이탈을 경계하며 ‘가정’이야말로 남녀평등의 근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반면에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 사회주의 여성들과는 이념적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틀을 모색하고 ‘남녀평등’이 실현된 문명사회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고자 시도했다. 이를 기반으로 여성해방논의가 더욱 확장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탈정치화된 문화지형의 틀 안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만큼 기독교 신지식인들의 젠더 논의는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우선 ‘문명사회의 실현’을 근대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서구적 근대의 사상적 종속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서구 중산층의 근대적 욕구를 근대사회의 이상적 가치로 수용했다. 이는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즉 그 어떤 정치적 자유도 결코 허용되지 않았던 식민지 현실에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중립적 근대가치로 치환시킴으로써 평등사회에 대한 갈망과 정치적 해방의 욕구를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해소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현실 인식에 있어서도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세계열강들의 식민주의 확장과 식민체제로부터 파생된 억압적 현실을 간과한 채, 그 근본원인을 조선의 ‘근대적 결핍’에서 찾았다. 이들은 조선여성들의 의지부족이나 미성숙한 정신 또는 교육환경의 낙후성 등을 조선여성운동의 저해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자신들 스스로가 식민지 조선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식민화된 근대’의 주요채널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이 논문의 논점은 동방 로마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를 통해 과연 동방 로마제국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처럼 caesaro-papism 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슈멤만의 항변이 옳은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방 로마제국은 교회가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동방 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 황제-교황주의” ‘Byzantine caesaro-papism’로 국가가 교회를 조정한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동방정교회 학자인 알렉산더 슈멤만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어떤 조약 혹은 법률상의 제한에 의해서 연결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나 교회 신앙에 의해 말해진 진리(truth)에 의해서 연결되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신앙은 먼저 황제가 그리고 나서 그를 통해 제국 그 자체가 교회 신앙의 진리로서 그리고 황제나 제국의 우위에 있는 진리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단 슈멤만의 주장을 전제하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 사이에 언제나 연결되어 있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황제는 과연 진정으로 교회 분쟁의 중재자인가 혹은 결정자인가를 검토하려고 한다. 필자는 네스토리오스 논쟁(428-431), 즉,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재임했던 428-431년, 특별히 테오토코스 논쟁에 휘말리면서 그의 실각까지의 역사적인 재구성을 통해 이러한 쟁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입장을 논의하지만, 방법상 교리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전체 역사적 정황 속에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로마제국을 최초로 기독교제국으로 명명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손자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 장남인 아르카디우스(395-408)는 콘스탄티노플을 통치하였고 차남인 호노리우스(395-)는 이태리 지역을 통치하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408-450) 아르카디우스의 장남으로 40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카디우스는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그는 408년부터 450년까지 42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전 생애동안 통치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네스토리오스의 논쟁에 관여하게 된 때는 그의 아버지 알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토모스를 실각시킨 지 불과 사반세기가 겨우 지난 때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즉 동방 로마 제국이 지향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 크게 변화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소스토모스와 네스토리오스의 실각 사건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기에, 두 사건을 함께 고찰하는 것은 동방 로마제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얻을 것이다.
본 논문은 빈고전주의 음악의 자율성, 보편성에 살진 토양을 마련해준 합스부르크 제국 황 제와 귀족의 음악문화 및 음악후원에 대해 탐구하며,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합스부르크 제 국의 절대적이고 강력한 유력가들은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음악후원의 한 기틀로 삼았으나, 동시에 수 세대에 걸쳐 음악을 중요한 정신적 덕목으로 삼으며 전문가적 관심과 방식으로써 다양한 장르의 음악예술을 보호했다. 아울러 ‘옛’ 양식과 ‘현대적’ 양식, ‘옛’ 언어와 ‘현대적’ 언어, 세속적 양식과 종교적 양식이 공존하는 음악, 혼합양식의 음악을 보호, 후원함으로써 보편주의적 음악 상(像)을 구현했다. 이러한 기조 가운데 18세기 중반 황제에서 귀족으로 음 악 문화 및 후원의 주체가 옮겨지고, 이때 귀족들은 후원자를 넘어 동료로서 동시대와 미래 를 주도할 음악에 발전의 동력을 마련해주었다. 과거 유산들의 시대 초월적 의미마저 발견해 내 독창적 작곡가들에게 알린 이들의 공적은 음악예술의 자율성과 보편적 가치 실현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논문투고일자
종교개혁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 시작되었고, 2017년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이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축하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축하되어야 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이를 위한 좋은 토대가 되는 것이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전망”인데, 이 논문에서 이것이 자세히 분석되며 이를 근거로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와 16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영향력이 서술된다.
종교개혁은 여기서 네 가지 범주로 고찰된다. 먼저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그리고 종교적, 신학적 사건으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가져다주며 정치, 경제, 문화를 변혁시킨 사건으로 서술된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전망”에는 교회, 사회, 정치, 교육 등에서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잘 요약되어 23개 명제로 서술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은 특별히 기독교 교회 일치를 위한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이다. 종교개혁은 근원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갱신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바른 숙고는 오히려 교회 일치를 강화시킨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는 루터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개신교인,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축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