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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109

        81.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노동이주에서 유학이주로 재입국한 외국인 이주자가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하 는가를 살펴보고 생애사를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점차 복잡화되고 장기화되는 한국 사회 이주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개별 사례들을 연구할 필요성에서 출발한다. 네팔에 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에 온 이주자는 노동이주 기간 동안 문화적 충격과 신체적 폭 력 경험하였고, 기독교 문화를 접하면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망을 형성하여 한국 사회 적응하였으며 이후 신학 공부를 위해 재이주하였다. 유학이주를 준비 하기 위해 네팔에 있는 동안 이주자는 한국과 네팔 두 사회를 비교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 전의 원동력에 관심을 두었다. 이후 한국에서 학사부터 박사학위 수료까지의 유학 경험을 통해 그는 교육과 종교를 한국 경제 발전의 요인으로 파악하였다. 외국인 노동자에서 외국 인 유학생과 한국 교회 내 전도사로써 신분과 역할이 바뀌면서 네팔인 이주자는 자신의 교육적․신분적 성취를 통하여 ‘애국심과 신앙심 심어’ 네팔 발전에 봉사할 능력 있는 인 재를 양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종교인-교육자로 준비시켰다. 이 사례는 국가 발전을 추구하 는 교육 이데올로기가 이주자를 매개로 한국보다 덜 산업화된 국가에 전파되고 있음을 보 여준다.
        82.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국제결혼가정에서 성장한 외국인 유학생들의 다문화 정 체성은 무엇이며 그 정체성 발달 과정은 어떠한지 질적 연구방법을 통해 탐색해 보고자 하 였다. 이에 6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개별 심층면접을 실시하여 자료를 수집․분 석한 결과, 이들의 정체성 발달은 “주어진(Given) 다문화 정체성, 선택된(chosen) 다문화 정체 성, 글로벌(global) 다문화 정체성”의 세 단계를 거치며, Banks의 다문화정체성 발달 6단계에 서 보여주는 “글로벌 시민 정체성”을 갖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어린 시절 다문화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다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경험하였으나 청소년기 학교와 사회 에서 외모, 인종, 종교 등으로 인한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을 스스로 극복해야만 하였다. 이 들의 부모와 가정과 교회의 다문화적 환경은 이들의 다문화 정체성 형성과 발달에 토대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글로벌 다문화 정체성을 발달시킴으로 미래 자신의 진로는 초국가적 인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다문화가정 부모와 자녀를 비롯하여 모두 를 위한 다문화교육이 고려 할 사항 등을 제안하였다.
        83.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현재 한국 대학에서 수학하는 아시아 국가 출신 유학생들의 대학 사회의 적응 을 호네트의 사회적 인정관계의 구조 속에서 살펴보고 있다. 개별 주체인 유학생이 대학사 회 주요 구성원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들이 경험하는 인정의 훼손, 즉 무시의 경험이 일어나는 계기가 무엇이며 훼손된 인정을 회복하고자 이들이 펼치는 인정투쟁 방식에 초점 을 맞추었다. 이들의 인정투쟁 방식의 고찰은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 증가하는 유학생을 포 함한 이주민을 이해하는 시각의 확대를 제안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이미 형성된 사회의 인정질서에 이들의 새로운 정체성 요구 즉 새로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관계를 확대하여 사회통합에 기여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질적연구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며 연구 결과 아시아 국가 출신 유학생들은 언어 적 부족, 교우관계, 출신국가 배경에 의해 인정의 부재를 경험하고, 그 결과 분노하지만 무 시를 참고 이해하기, 소모임 만들어 분노 표출과 하소연하기, 한국 학생들에게 점차 동등한 관계형성 요구하기 형태의 인정투쟁 방식을 보여줌을 알 수 있었다.
        84.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선진 유가 사상을 정치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분석 함으로써 그것의 공사문제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家와 國의 영역 문제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다음 으로, 그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단순히 인간의 본성 문제로 설명되는지, 만약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그 해명 되지 않는 부분이 도덕 감정과 공동선의 상호작용임을 밝힘으로써 선진 유교의 공사관을 그림을 그려낼 것이다. 유교가 감정윤리라는 점에서 이모티비즘과 어 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차별성을 통해 유교의 감정윤리가 어떻게 공공성을 획 득할 수 있는지 해명한다.
        85.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중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하학론(下學論)’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당대 퇴계 등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하학 (下學)’을 강조했다. 그는 하학이 유학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측 면에서 하학을 경시했던 당시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 의 ‘하학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유학에 있어 하학이 가지는 위치를 먼저 검토했다. ‘하학’은 유학을 도가나 불가 등 다른 사상과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선진 유학에서부터 이어져온 중요한 전통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유학 의 본질은 하학에 있다고 보았으며, 하학(下學)의 대상인 현실세계를 떠나지 않 았다. 유학자들은 세속에서 상달하고 도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속에서 상 달의 성스러움을 실현하려고 했다. 불교나 도교는 상달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유학과 비슷하지만, 하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학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학은 정치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학은 유학자를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며, 하학의 세계에 대한 걱정 은 바로 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학의 하학전통을 잘 이해한 사람이 조선 중기 남명 조식이다. 남명 에게 ‘하학’은 단순한 공부상의 절차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의 사상에 있어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명에게 현실을 떠난 학 문은 실(實)이 아닌 헛됨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유학의 경세(經世)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남명사상의 특징 중 하나인 실천성과 경세성 등을 이런 ‘유학의 하학전통’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남명의 하학론을 단순한 학 문적 단계로서가 아니라 유학의 주요한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사상(敬義思想)이나 출처관(出處觀) 등 남명의 주요 사상에 있어서도 그의 하학론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고, 그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86.
        2016.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유학생, 특히 중국인 유학생들의 교수-학습 활동 과정 중 학문목적 한국어능력 향상을 위한 연구에 목적이 있다. 한국에 소재한 3개 대학의 중국인 유학생(남 133명, 여 150명)을 대상으로 학업, 학문목적 한국어에 대해 느끼는 어려움, 대학진학 전 한국어 학습 경험 과 한국어능력시험 등급이 대학생활에 미치는 정도와, 학문목적 한국어 교수-학습 활동에 어떤 영향 을 미치는지를 조사하였다. 설문조사는 2015년 3월 21일에서 6월23일까지 3개 월간에 걸쳐 실시되었 다. 대상자의 선발은 각 대학교 유학생회를 통해서 각 대학에 중국유학생을 대상으로 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SPSS WIN 20.0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본 결과연구는 학문목적을 가진 학습자들이 언어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어려움의 해소와 문어능력의 향상, 대학생활 중 학문적 활동 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시사점을 논의하고, 연구 한계점을 제시하였 다.
        87.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세계화 추세에 발맞춰 국내에도 외국인 유학생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현황이며 특히 이들 유학생들이 실생활의 대다 수 시간을 보내는 대학생활원에서의 생활 및 적응에 관련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 연 구는 질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외국인 유학생들의 실제 대학생활원에서의 생활방식을 유학생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고, 이들 유학생들이 대학생활원의 시스템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떻 게 적응하며, 어떤 부분에서 한계점을 느끼는지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 외국인 유학생들 은 경제적인 효율성과 지리적 위치와 생활의 편의를 대학생활원의 장점으로 손꼽았고 엄격한 규율 과 의사소통의 문제, 대학생활원생들을 위한 서비스의 미흡 문제, 급식관련 문제, 그리고 문화적 차 이를 그 한계점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문화권의 학 생들이 거주하는 생활원으로서의 대학생활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먼저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지 적되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대학생활원의 경비원 이외에도 외국인 유학생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대 학생활원 안내 직원의 상주가 시급한 것으로 제시되었다. 또한 현존하는 대학생활원내의 외국인 조 교제도를 보다 실용적인 방향으로 활용해야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개선점들을 통해 현지 대학생활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삶의 질 상승은 물론, 향후 유학생의 급속한 증가 와 함께 더 크게 야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88.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치원은 12세에 唐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賓貢科에 급제하여 현지에서 관료로 활동하였다. 16년 동안의 당 나라 생활, 그 리고 28세에 귀국한 이후 신라에서의 활동에서 그는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기에 더해서 그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하면서, 그의 학문은 곧 ‘詞章學’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받 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기본적 으로 최치원의 학문이 사장학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서도, 그의 학문이 정말 우리가 믿고 있는 만큼 순수하게 사장학적인가 하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자 출발점이다. 최치원의 유학사상에 사장학이 아닌 새로운 지향이 함축될 수 있다 는 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가기 50여 년 전, 흔히 송명리학의 선구로 알려져 있는 한유나 이고 등에 의해 이미 유학의 질적 전환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이들의 활동이 당시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새로운 방향으로의 첫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당나라 중기 이후 사장학 내부에서 발생한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최치원이 직간접으로 계승하고 있는지 여부 는, 결국 한유와 이고 등의 지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것과 함께, 그와 유사한 지향을 최치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 첫째로 사장학 의 한계와 함께 그것을 넘어서는 학적 체계를 인정하는 탈사장학적 특징, 둘째로 직접적으로 성리학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지향을 구분하여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치원으로부터 우리는 사장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탈사장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經典의 전통보다는 四書의 전통을 준비하고, 공자와 맹자를 道統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성리학을 향한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사장학으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사장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89.
        2015.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국내 외국인유학생의 문화성향이 대학생활적응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Chun, Moos, and Cronkite(2006)가 제시한 스트레스-대처 맥락적 모형을 근거로 문화성향이 문화적응스트레 스, 자기효능감, 대처방식 및 대학생활적응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에 대한 구조모형을 설정하고 검증 하였다. 자료 수집은 서울 소재 일 개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외국인유학생 363명을 대상으로 2013 년 6월 1일부터 7월 15일까지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외국인유학생의 대학생활적응에는 개인주의성 향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집단주의성향은 대학생활적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았으나 자 기효능감을 완전매개로 한 간접효과와 자기효능감이 적극적대처를 불완전매개로 한 간접효과 및 적 극적대처를 완전매개로 한 간접효과가 있었다. 또한 외국인유학생의 대학생활적응력을 향상시키고, 대학생활적응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응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서는 자기효능감이 중요한 중재방안이 될 수 있음도 확인되었다.
        90.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후기 유학자의 산수 유람기 속에는 사찰이나 승려에 관한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이 기록들은 제삼자의 눈에 비친 사찰과 승려의 실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유람자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指路僧이나 가마를 메는 藍輿僧에게 지나친 관심을 둠으로써 抑佛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유람기가 이해되어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유람기에는 여러 修行僧의 모습도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그 수행승에게 시선을 돌리면 당시의 불교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선후기 지리산에는 많은 名僧들이 주석하며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본고에서 다룬 16-18세기 유람기에서도 그들의 법명이 등장한다. 가령, 浮休善修, 逍遙太能, 靑梅印悟, 碧巖覺性 등은 당대 최고의 禪師로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유람기에서는 이들을 따라 공부하는 승려들이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깊은 암자에는 長坐不臥하며 수행하는 수행승의 모습도 그려지고 있다. 유학자들은 유람 도중에 만난 高僧들과 대화를 나누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 心性論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1790년에 李東沆은 유람 도중에 만난 승려 道原과 理氣心性에 관해 대화하였고 그 대략적인 내용이 그가 쓴 유람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당시 불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심성에 관한 논쟁이 유학자와 승려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91.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이 자리 잡기 이전, 곧 조선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던 지리산유람록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기다려 100여 편이나 등장했다. 그리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을 남기는 전통 또한 사라졌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하나의 물음을 떠올린다. 유람록의 주체이자 성리학을 이념적 토대로 삼았던 선비, 그들은 도대체 왜 지리산 유람 길을 떠났고 수많은 유람록을 남겼을까? 이 글은 이 물음에 대해 배움과 휴식 그리고 선현을 닮기 위한 노력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선비들이 유람을 떠난 동기를 찾아보고, 그것이 어떻게 넓게는 유학 그리고 좁게는 성리학과 연결되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선비들의 유람은 한편으로 일상의 배움을 이어서 세상을 읽어가는 또 다른 형태의 배움을 위한 길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긴장을 해소하는 휴식의 길이었다. 그리고 긴장과 이완이라는 두 가지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비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선현들과 닮은 모습, 곧 자신이 현인 혹은 그와 같은 인격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선비들에게 긴장과 이완, 배움과 휴식이 둘이 아니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선현을 닮아가는 것 역시 또 다른 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유람은 선비들에게 세상을 읽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세상 읽기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가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더욱 충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과 함께 유람록의 전통이 세워지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의 전통 역시 사라지는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선비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들이 세상을 읽던 방식 역시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2.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외국인 유학생들의 한국어 능력 부족에 따른 대학원 생활 경험을 심층적으로 탐색해 보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내러티브 탐구 방법을 사용하여 8명의 외국인 대학원생들이 한국어 능력이 부족함에 따라 대학원 생활 경험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그들의 목소리로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자료 분석은 전체 이야기의 배경 안에서 현장 텍스트를 분석하는 내러티브 탐구 방법의 특징을 살려서 영역 분석과 분류 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은 한국어 능력 부족으로 인한 학업의 어려움, 한국어와 영어 혼용은 또 하나의 걸림돌, 한국어능력시험은 시험을 위한 시험, 언어연수 과정은 한국어 능력을 키우기 위한 징검다리와 같이 4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 밝혀진 결과는 앞으로 한국에서 유학하게 될 외국인 대학원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대학원생 관리와 지원에도 유용할 것이며 이후의 유학생 유치를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93.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늘날 유학은 그 존립의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공자가 요순시대를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주나라의 주공이 만든 통치체계를 모델로 하여 정립한 것이 유학이다. 유학자는 경전과 육예에 밝으면서 여러 형태의 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공자로부터 유학의 목적은 ‘극기복례’로 규정되었고, 이후에는 이 개념이 ‘수기치인’과 ‘내성외왕’으로 확대되었다. 내면적 인격을 완성하고, 이를 통하여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은 왕조시대의 통치논리를 정당화 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는 맞지 않는다. 본고는 유학의 현대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모색이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중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공자 이전의 유학은 ‘황극’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으며, 공자로부터 ‘중용’이 강조되면서 커다란 변신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북송시대의 승려인 계숭이 파악한 유학의 본질에 대한 관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왕조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오늘날 유학은 새로운 변신이 필요하며, 그 중심에 근본 덕목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보면서 이를 ‘大公’으로 제시한다. 정치의 형태에 따라 고대 요순시대에는 천자가 중심이 되어 ‘황극’에 의지해 ‘덕화’를 시행하였으며, 공자 이후로는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중용’에 의지해 ‘교화’를 시행하였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오늘날은 국민 모두가 중심이 되어 ‘대공’에 의한 ‘同化’가 시행되어야 하며, 그 세부절목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학이 꿈꾸는 이상사회는 ‘大中至正’한 사회이다.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의 공화국 체제에서 가장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유학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예의의 강조이다. 각종 제례에서의 예의는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가정과 사회에서의 공공예절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의 유학이 스스로의 존속을 위한 정체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현대사회에 필요한 예의 절목을 마련하여 모두가 함께 지키도록 홍보하는 일이다.
        94.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호남지역 유학자들의 초기 箴 작품은 蘇沿(1390-1441)이 창작한 것으로부터 李恒(1499-1576)이 지은 것에 이르기까지 총 6편이 지어졌다. 그 가운데 2편이 中宗에게 올려진 官箴이다. 그리고 경전 구절을 해석한 것이 3편, 전대의 작품에 차운하여 계승한 것이 1편으로, 의리의 발현을 수사 기법으로 삼은 작품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 중기는 箴을 지은 유학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아 초기에 비해 인원수가 더욱 줄었지만, 작품의 수량은 7편으로 1편이 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安邦俊(1573-1654)으로부터 黃胤錫(1729-1791)에 이르기까지 150년이 넘는 시기 동안 4명의 유학자가 7편의 작품을 지었다는 것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영성한 상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中庸』 제1장의 ‘莫見乎隱’을 해석한 황위의 「莫見乎隱箴」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수양의 덕목을 해설한 내용들이다. 다만 경계하는 대상이 자신에게 한정되느냐 아니면 자식이나 주변의 타인에게 확장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개인적인 용도인 私箴의 범위를 벗어나는 작품은 없다. 후기는 초기 및 중기에 비해 거의 5~6배가 넘을 정도로 많은 분량의 箴 작품이 창작되었다. 그리고 경계의 내용과 방법이 이전과 달리 다양하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奇正鎭(1798-1880)으로부터 柳永善(1893-1961)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 14명의 유학자에 의해 37편의 箴이 지어졌다. 이 시기는 이전보다 양적으로도 월등하게 많을 뿐만 아니라, 수사 기법도 다양한 양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경계한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한말의 절박한 시대적·역사적 상황 때문에 箴을 통해 同道의 사람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신 및 학파가 주창하는 성리설을 箴의 문체로 드러내어 밝히고자 한 것도 이전 시기에는 없는 하나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95.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차별과 이중문화의 갈등을 겪으며 변화하는 중국인 유학생의 정체의식을 문화적정체감의 발달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 발달단계에 따라 차별을 지각하고 대처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지 분석하였다. 확인적 요인분석 결과, 문화적정체감의 발달단계를 확인하였고, 변량분석으로 단계에 따른 차별지각 정도와 대처방식의 차이를 점검하였다. 확인적 요인분석 결과 문화적정체감 발달단계에서 4개 요인이 추출되었다. 4개 요인에 대한 공분산 분석 결과, 상관도를 고려하여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 구분하여 분석한 결과 차별대처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낮은 단계에 비해 높은 단계의 학생들은 한국문화에 동화하기보다는 사회적 경쟁을 통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본 연구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사회에서 문화차이로 인한 심리적응의 어려움을 문화적정체감의 발달적 측면에서 이해한 점과 이중문화의 환경에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유학생들을 돕는데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96.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97.
        2010.03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외국인 유학생 유치와 관련된 정부정책의 변천과정 및 내용을 살펴보고 외국인 유학생을 직접 선발하고 가르친 경험을 토대로 정책의 효율성을 비판적 시각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정부정책을 크게 교육과학기술부와 법무부 그리고 문화관광부의 정책으로 구분 정리하여 각 정책의 변화와 정책간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살펴본 결과 외국인 유학생 유치정책 수립과 개선방안 마련에 있어서 교육과학기술부와 법무부 그리고 대학간의 정보공유 및 의사소통 미비로 인해 정책의 효과를 최대화시키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98.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국유학사에서 면우 곽종석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학문과 사상, 그리고 현실 대응 등 그의 삶과 학문 전반에 대해 폭넓게 살폈다. 곽종석은 조선 말기로부터 일제강점기에 간재 전우와 함께 조선유학의 쌍벽으 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학통과 당색에서 완전히 초탈하지는 못했지만 일생을 융합주의 신념 아래 살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고 영 남학파와 기호학파를 넘나드는 등 보폭 넓은 활동을 하였으며, 유림을 세력화 하고 대동단결하는 데 힘썼다. 그의 학문 특성은 ‘집약’과 ‘會通’에 있다.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한 뒤 자기의 관점에서 다시 체계화하였으며, 연구방법론 에서도 여타의 학자들과는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곽종석은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가교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개명적이고 시대 를 앞서가는 안목과 시대인식은 후학들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은 철학․종교․교육․역사학 및 독립운동 여러 방면에서 큰 구실을 하였다. 유학사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전통의 근대적 계 승을 위해 신학(서구사조)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를 가졌던 곽종석의 학문관, 학문 방법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었고, 전통 학문의 근대적 계승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방향성을 제공하였다.
        99.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한국 명산문화의 정체성을 인문지리적인 관점에서 탐구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명산문화의 개념 정의, 사상적 배경 및 구성 요소, 역사적 기원과 형성 유형을 살펴보고,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중 심으로 유학적 명산문화의 전개와 의의 등을 주요 논제로 고찰하였다. 조선조 유학사상은 한국 명산문화의 인문적 발전을 이끌고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었다. 道學者들에게 있어 명산경관은 天地動靜의 이치를 體現하 고 있는 공부텍스트이자 觀物察己의 유학적 存養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명산 의 장소이미지를 인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名山과 名儒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표상하였다. 實學者들에 있어 명산의 산수는 可居地 생활권의 한 입지 요건이 되었고, 명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어 名山誌가 저술되 었다. 白頭大幹과 관련하여 명산에 대한 인식의 提高가 이루어졌고 국토의 祖 宗이 되는 명산으로서 백두산이 주목되었다.
        100.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소눌 노상직의 학문이 영남유학의 전통 속에서 어떠한 측면을 계승하 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노상직은 이황과 조식을 함께 높이면서도, 정구의 실용주의적 노선을 더욱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 자 正脈이 이황에게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구와 허목 등을 통해 허전에게까지 그 맥이 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는 근기 남인의 학문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 스 스로가 허전의 제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로 학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상직에게 있어 하나의 자부심으로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고, 여타 영남 좌우도의 선비들을 폭넓게 교유하면서 사상사적 진폭 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노상직의 학문은 ‘수양론에 바탕한 실용학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서당을 건 립하고 수양론에 입각하여 강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저술과 출판사업을 벌였던 것은 이 같은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특히 근기 남인의 실 학연원을 튼실히 하면서 자암서당을 중심으로 학도들을 기르며 이들에게서 미 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점, 다양한 저술과 출판을 통해 전통문화를 정리하고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점은 모두 위기적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키우기 위한 것 이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그의 실용학풍은 결국 구국의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고 하겠다. 소눌학은 무엇보다 江岸學的 特性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협의적 개념으로 16세기 이후 낙동강 연안의 유학사상을 의미하는 강안학은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으나 정구의 한강학이 담지하고 있는 실용주의적 경향은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강안학은 강좌지역의 퇴계학과 강우지역의 남명학을 넘나들며 새로 운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는데, 그 선두에 한강학이 있고 그 마지 막에 소눌학이 있었다. 따라서 강안학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 면서 또한 이를 당대의 환경 속에서 응용하려는 학문의 실용성을 충실히 담보 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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