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70년대 서울의 도시 개발로 인한 주거 문제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1978)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를 통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들 두 작품은 각각 철거민이 하층 노동자가 되어 자본가에게 노동 착취를 당하는 사례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 위한 소시민이 불합리한 주거 정책으로 인해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도시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법을 앞세운 행정 당국의 폭력적 행태를 확인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거주민의 인권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은 문제라 할 수 있다. 한편 도시 기반 시설이 미비한 상태에서 졸속으로 추진한 대규모 주거 단지의 문제는 시민들의 폭동을 유발하였다는 점에서 행정당국의 미숙함이 드러난다. 철거민과 내집 마련에 실패한 소시민은 하층 노동자가 되어 자본주의 체제의 탐욕 앞에서 착취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이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투쟁을 전개할 때 이들을 응원하고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중간세력이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1970년대의 자본가들이 군사독재 세력에 협력하여 이권을 얻고 부를 축적하는 것과 달리 노동자 및 하층 세력과 연대하는 중간 세력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예라는 점에서 자본가의 자본 축적이 일제강점기부터 민족을 배신한 결과임을 암시하면서 노동자와의 연대에 정당성을 획득하고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970년대의 도시 확장과 도시 개발은 산업화와 더불어 진행되었고 비민주적이고 폭력적 과정을 보여주었으며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소시민들은 하층 노동자로 전락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 조선산업의 경쟁력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산업 정책이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그 변화의 원인을 담론제도주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 각 시기별 주요 조 선산업정책과 관련된 이슈들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에서 조선산업이 위기 에 직면했을 때 주요 정책 행위자들 간에 산업정책의 방향을 두고 산업 논리 담론과 시장논리 담론이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이러한 담론경쟁 의 결과가 한국 조선산업정책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한 다. 즉, 이 논문은 담론정치를 통해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조선산업정책 이 크게 “발전주의적 육성정책→발전주의적 조정정책→자유주의적 육성 정책→자유주의적 조정정책”의 4단계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This study reviewed Korean food recipes and food culture included in English cookbooks issued in the United States from the 1930s to the early 1970s. In the 1930s cookbook, many types of soup were introduced to Korean food under the influence of the Tangban culture in the Joseon dynasty and a brief description of ‘Sinseollo’ culture. The 1940s cookbooks, introduced Korean table settings, food culture, and cooking methods depending on the use of chopsticks. In the 1950s cookbooks, Korean foods were selected to suit a Western table setting, and detailed explanations were included along with ‘cheopsu’ means the number of dishes served in Korean food. More diverse Korean food was introduced within its culture and origins in the 1960s cookbooks. The 1970s cookbooks explaine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culinary specialties that differentiated from oriental food. This study of Korean food and culture from Cookbooks issued in the United States from the 1930s to 1970s, where Eastern and Western multiculturalism coexist, can be used as baseline data to understand the identity of modern Korean food culture and the direction of the globalization of Korean food.
본 연구는 1970년대 중반의 한국 미술 현장에서 두드러진 ‘새로운 평면’에 주목해 형식주의 관점에서 일반화할 수 없는 평면 작업의 개별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때의 새로운 평면은 국제 무대의 새로운 아방가르드 기획으로, 68혁명 이후 후기구조주의 맥락에서 회화 요소를 통해 회 화 매체를 전복하고자 한 미술 양상으로 설명된다. 국제 조류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한국 미술계 역시 1973년의 제8회 《파리비엔날레》를 주요 통로로 동시대 전위를 수용했고, 양식적으로 차용 했다. 구체적으로 이우환의 <선으로부터>(1973), 박서보의 <묘법>(1973), 그리고 이건용의 <신 체 드로잉>(1976)에서 동시대 평면 경향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1970년대 중반 을 배경으로 반복적 행위가 표상된 평면 드로잉이라는 유사성으로 유비된다. 특히 ‘한국적 모더 니즘’이라는 회화 중심의 서사에서 동시대 전위의 맥락이 굴절된 채 단일 매체로 범주화되기도 한다. 이에 본 논문은 이우환, 박서보, 이건용의 각기 다른 작업 기반을 살펴 형식적 유사성만으 로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평면 작업의 개별성을 논증하고자 한다.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의 주요 특징으로는 기법과 수법의 상위개념으로서 ‘화법’ 개념의 정립, 색채의 주관적 인식(일반성)과 객관적 지각(개별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제 색(본색)’ 개념의 부상, 예술적 형상화의 높이에 올라선 ‘예술적 필치’ 개념에 대한 강조 등 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은 대립하는 것들의 중재, 또는 갈등의 봉합을 추구했다. 그들은 ‘화법’, ‘제색(본색)’, ‘예술적 필치’ 등을 내세워 선과 색, 본색과 반사색, 몰골법과 구륵법 등 대립으로 이끌어지기 쉬운 것들을 담론 체계 안에 효율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화의 개조발전과 현대화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렇듯 조율과 중재, 봉합과 화해를 지향하는 개념들은 차이들, 곧 서로 다른 입장들이 경쟁하 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담론장의 역동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0년대에 구축된 조선화 형식체계는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면서 조선화 창작과 수용에 절대적인 영 향력을 행사했다. ‘화법’, ‘제색’, ‘필치’ 등의 개념들은 모두 조선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의 능동적 관여를 강조했지만 그 관여는 언제나 지배체제의 이념이 정해준 길을 따라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조선화 형식론은 궁극적으로 형식 문제를 이념 문제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말할 수 있다.
DMZ가 생성된 이래 북한의 도발 및 남북무력충돌이 발생해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가장 높았던 시기가 바로 1960∼70년대였다. 정전협정 체결 후 1960∼70년대 북한 무력도발은 ①남조선혁명의 일환으로 획책, ②체제결속의 강화 차원에서 지속, ③남북분단 고통의 심화·확대의 초래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북한의 대남전략 및 무력도발이 주는 시사점은 ①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대한 철저한 대비, ②북한의 어떤 무력적화도 발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안보능력 강화, ③통일지상주의 및 근거 없는 낙관론의 지양, ④북한의 변화를 위한 점진적·단계론적 접근의 추진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우리의 국방은 항상 최악의 상황 까지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 유사시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조적·공조적 국방안보능력 강화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라도 보는 전 지구적 흐름 속에서 국가주의를 표방하던 1970년대 단색화의 비평 양상을‘지연된 사후 작용 (deferred action)’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1970년대는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를 직접 겪은 세대들이 문화정책을 수립하던 시기로 이 시기 한국미술에서는 정체성 담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는 민족의 정체성이 작품에서 어떻게 내면화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비평이 ‘전통’이라는 문맥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논증한다. 이러한 ‘지연된 사후 작용’에 의한 비평의 모습을 분석하여 집단이나 계층을 대 변하는 이데올로기의 후원자로서의 비평을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 논문의 목적이다.
본 연구에서는 다양한 관련 문헌들에 대한 내용분석과 분석적 서술을 통해 1960-1970년대 우리나라 중공업발전 사례에서의 발전모습을 산업추격관점에서 분석해보고, 그 과정에서의 KIST의 역할을 재조명하였다. 중공업 발전 초기 단계에서 우리나라는 국가 주도의 산업 전반에 걸쳐 새롭게 요구되는 산업추격전략이 필요했다. 산업추격전략에서는 개별 기업의 기술학습능력 보다는 국가 수준에서 산업 전반을 고려한 산업 설계역량이 필요 했으며, KIST 그러한 산업기획 및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산업계획가로서 역할을 했다.
산업계획가는 ‘국가 경제발전을 위하여 미래 수요를 예측하고 분석하여 국가 수준에서 산업을 설계, 계획하고 우선순위를 정하여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 또는 기관’ 이라고 정의 할 수 있으며, KIST는 ① 산업발전을 위한 필요 범용기술의 인지와 기술선택, ② 전후방 효과에 대한 분석과 가치사슬 설계, ③ 다학문 융합적 사고 또는 다분야 집단지식의 발현, ④ 사명감 및 애국심에 의한 동기부여 등의 역할 및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Although it has been well known that the Saemaul Undong had a direct relation with the water resources development during 1970’s, its contribution to the water resources and increased income in rural communities has not been thoroughly quantified so far. In order to assess the contribution of the Saemaul Undong in terms of rural water resources development, we investigated various historical data produced by the central and local governments in relation to water resources development. The results show the direct and indirect contribution of the Saemaul Undong to the water resources development in rural communities such as sewage works, water supply facilities, shared wells, and river works. The results also showed a positive relation between per-house income in rural communities and areas of irrigated paddies, which were rapidly increased during 1970’s. These results can be utilized to transplant the positive aspect of the Saemaul Undong to developing countries focusing on water resources development in rural areas.
연구자는 1960년대 후반, 한국의 미술가들이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여 퍼포먼스에 대한 실험 성을 펼친 사례를 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한 작가들이 시도한 해프닝, 1970년대 중반의 이건용 과 이강소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에서 처음으로 신체를 ‘매개’로 사용한 점 을 분석하며 예술가의 몸과 일상을 서로 중재해 나가는 예술적 과정과 실천을 검토한다. 초기 한국 의 퍼포먼스 아트에서 정강자와 같은 여성 퍼포머를 바라보는 방식, 이건용의 ‘로지컬-이벤트’에서 는 언어의 개념과 상황을 매개하는 예술가의 몸과 타자성, 이강소의 1973년 <선술집>을 설명한다. 1960-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는 미술가들의 신체가 갖는 불확정성, 비결정성을 중심으로 처음으로 ‘미술가의 몸’을 중요한 개인, 사회, 정치적 사이트라는 문화적 (콘)텍스트로 인식하는 한 국 아방가르드의 특징을 구축했다.
This is about Robert Mangold’s exhibition which was staged at Pace Wildenstein Gallery in New York in 2014.
Mangold puts on an exhibition a lot but it’s been 3 years since his last exhibition of painting. Robert Mangold is an American Minimalism artist. While other Minimalism artist changes their work style as time goes by he’s been doing Minimalism work now. It took my attention to study his work.
At first glance, it could seem to be an expansion of what he’s been doing in the past. However, he found a new figure from his work inside. In particular he newly chose a triangle found in his own 1970’s. If it’s said that a triangle worked in 1970’s has primary symbol and meaning, new triangle made in 2014 is a new figure combined each other and the meaning is expanded as well.
A triangle has a direction in its figure. Because of its image of direction it gives an impression of open to upward. In contrast, the triangle in 2014 is a combination of all and it becomes perfectly closed space. This means an endless and it’s an utopia which everyone dreams of getting together.
Delicate visual vibration in the picture he intended to show is mutual response with viewer. Viewer observe that triangle becomes quadrangle and polygon. Through this it makes viewer imagine various form cut and combined. Therefore, even though it’s a plane work it he leads viewer’s aggressive participation as the third dimension sculpture. These are gestalt effect. In this regard, what he really wants seems to be mutual response between viewer and artist.
It’s an outstanding point when Mangold produces new work he utilize former work again. He did not only serial repeat but also repeat among works and I think it can be applied with contemporary conception. I hope his work can be observed with new views rather than standstill evaluation with existing critic views.
This study will examine the works of Kim Ku-lim, <From Phenomenon to Traces> (1970), with the social and political background of their time. Around the year 1970, Korean society was in turmoil. Its economy had been developing quickly during short period, and the industrialization in urban areas increased the population of cities, which brought out the collapse of traditional values and the rise of new ideas. Korean conventional artistic style had reached its limit to convey the ideas of avant-garde artists. In addition, it was at that time, when the public was under high surveillance and strict censorship which were conducted by the military regime of President Park Jeong-hui. Due to all these reasons, the artist Kim Ku-lim brought body movements, the surrounding environment, time flow, and locations into his artwork.
Since the late 1960's, Kim Ku-lim had started doing unconventional paintings, for example, burning plastic on canvas, and making holes on iron plates. In 1969, he gave up any forms and structures and moved to performances, happenings, and film making. In the year of 1970, Kim produced artworks, as known as <From Phenomenon to Traces>. There were all three of them produced in 1970: setting fire to grass, placing ice cubes on floors, and wrapping the Museum of Modern Art.
The first work of <From Phenomenon to Traces>, setting fire on grass is the first Earth Work executed in Korea. It introduced the urban environment into his own work, visualizing the invisible flow of time. In addition, a photograph which was taken at that day captured students in military training, marching and passing by the place, and accidently disclosed the political censorship of the period. The second work was showed at the AG Exhibition of experimental artists, and helped people to see the process of time, ice to water, water into air. People couldn't understand this work and laughed at it. The last one, wrapping museum was un-installed within 26 hours by the host sponsor, and revealed how conservative the Korean art institution was. It was the use of body movements and natural phenomenon, which was most interesting during the research on this subject. In the similar time-line, Kim was one of artists who introduced these things into his work. Lee Seung-Taek's 'Wind' series, for example, shared the same idea/ method, in which artists' job is only to set the condition of works and it is nature (wind for Lee, time for Kim) which completes the works.
Kim introduced nature and body movements, and it was because of Korean social and political condition of 1970. The Korean government promoted the economic development as its national goal, so the economic wealth became regarded as more important than the traditional customs and nature. Building and houses were built quickly to hold the fast-growing population in cities without long-term planning. During this process, nature was destroyed for buildings and houses. Moreover, the regime of military government seized its power for over ten years since the May 16th Coup and controlled the public with the threat of North Korea. Under the circumstance, Kim introduced natural phenomenon into his works and tried to evoke ideas, which had been often neglected during that period. And this is the reason why the works <From Phenomenon to Traces> has its value in the Korean art history.
This paper examines a number of Korean artists-Whanki Kim, Po Kim, Byungki Kim, Lim Choong-Sup, Min Byung-Ok and etc-working in New York in the 1960s and 1970s, focusing on their motivations to head for the U.S. and their life and activity in the newly-emerged city of international art. The thesis was conceived based upon the fact that New York has been one of the major venues for Korean artists in which to live, study, travel and stay after the Korean War. Moreover, the United States, since 1945, has had a tremendous influence upon Korea politically, socially, economically, and, above all, culturally. This study is divided into three major sections. The first one attends to the reasons that these artists moved out of Korea while including in this discussion, the long-standing yearning of the Korean intelligentsia to experience more modernized cultures, and American postwar cultural policies that stimulated them to envision life beyond their national parameters, in a country heavily entrenched in Cold War ideology. The second part examines these artists' pursuit of abstraction in New York where it was already losing its avant-garde status as opposed to the style's cutting edge cache in Korea. While their turn to abstraction was outdated from New York's critical perspective, it was seen to be de rigueur for Koreans that had developed through phases from Art Informel in the 1960s to Dansaekhwa (monochromatic paintings) in the 1970s. The third part focuses on the artists' struggle while caught between a dualistic framework such as Korea/U.S, East/West, center/margin, traditional/modern, and abstraction/figuration. Despite such dichotomic frames, they identified abstract art as the epitome of pure, absolute art, which revealed their beliefs inherited from western modernism during the colonial period before 1910-1945. In fact, their reality as immigrants in America put them in a diasporic space where they oscillated between the fixed, essentialist Korean identity and the floating, transforming identity as international artists in New York or Korean-American artists. Thus their abstract and semi-abstract art reflect the in-between identity from the diasporic space while demonstrating their yearning for a land of political freedom, intellectual fulfillment and the continuity of modern art's legacy imposed upon them over the course of Korea's tumultuous history in the twentieth century and making the artists as precursor of transnational, transcultural art of the global age in the twenty-first century.
본 논문은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된 1960∼1970년대 노동자의 육체적 힘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농업 중심의 산업체제제에서 육체적 힘은 남보다 우월한 노동력을 발휘하였으며, 이는 남보다 더 많은 노동 생산성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기계 중심의 공장제 산업에서 육체적 힘은 그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김승옥의 「力士(역사)」와 황석영의 「장사의 꿈」은 보통사람보다 탁월한 힘의 소 유자가 자본주의 체제하의 도시적 삶에 대한 대응의 방식과 좌절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힘을 헛된 노동에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力士(역 사)」의 서씨와 타락한 도시의 욕망에 순응하다 좌절하는 「장사의 꿈」의 일봉 모두 산업화 시대의 도시적 삶에 적응하지 못한 패배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기계 중심의 산업화 시대에 육체적 힘의 가치는 약화되었으며, 이들의 힘은 교환가치로 전락한 노동력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