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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Zhangzai’s philosophy is a precious property of civilization of China and the world. His theory affected not only the development of Chinese Confucianism , but also the development of Korean Confucianism through generations of Korean Confucianism scholars’ absorption and transfer. In accepting and absorbing Zhangzai's philosophy being represented of 'Wei Qi lun', or the energy about origin of nature, Korean Confucianists tried to form Chinese Confucianism in the concrete, properly to Korea. So Korean Confucianism is not a reappearance of Chinese Confucianism, is peculiar to Korea. Naturally, each Confucianist 's idea and theory is not always simple, containing rich and deep contents. So I tried to analysis Korean Confucianism entirely to study about the influence of Zhangzai's ideology on Korean 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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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05.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s focused on a space for man in upper classes house that is one of appeared characteristics as Korea, China and Japan imported Confucianism become common cultural base in these countries. Because a space for man in these countries has the same nature represented as a typical space in a upper classes house, and this space is differentiated by regional features, a way of thinking, a way of life and social structure as well, these characteristics are compared one another. Import of Confucianism influenced formation of a upper classes house and the spaces of the house are divided by generation, sexuality and classes. A space for man become a center of the house as well as a space for reception in accordance with patriarchism because this space stands for hierarchy of the house. A space for man of each country, Korea, China and Japan, has differences; that is, Chinese Jeongbang is used as a space for family as well as for guests; Korean Sarangchae is for only men and used as a reception space; Japanese Zasiki is used just for reception. These differences among countries are caused by owner's class, a civil officer or a military officer, and this class differentiated the characteristics of reception for guest. Even though the these countries take the space for man for meeting, Chinese is for family, Korean is for ancestors and Japanese is for gu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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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2004.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rough 16-17th century, Neo-Confucianism was accepted and extended to Chosun Dynasty. The architecture of the Taegae school made buildings of Yongnam area rich by adding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based on Taegae's thought of architecture. The following is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academic clique around Sangju. Transformation such as separation and combination of the Jeongsa space by function, lifted floor type reflecting local feature or high platform was appeared, and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aegae school, that is, a small scale, a moderate figure, a type of side-attached floor, landscape, were still maintained at the same tim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aegae school and regional figure of Sangju were well joined. The upper class houses, Seodang, Jeongsa and Seowon, built by Confucianist had shared common Confucian characteristics in spite of their different purposes. The world view of the Confucianism such as sacrifice for sages, cultivation, devoting for study, teaching disciples, and education for villagers was revealed through the Confucian architecture including dwelling houses during the 16-17th century. Buildings of Confucianist were focused on the space for men. Seoae and Kyumam built two different Jeongsa's inside and outside of the boundary of the nakdong river. While Seodang and Jeongsa located outside of the boundary of the river were built excluding spaces for living, the function of the Jeongsa located inside of the boundary of the river was assimilated by Sarangcahe. However, both buildings kept the function for cultivation, devoting for study and t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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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200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is a part of the study on the origin of literature that Mok-Eun pursued. The content of Chinese Classics of Confucianism are much found in Mok-Eun’s poems. Considering this fact, the study examines how Mok-Eun alludes and claims the content of Chiness Classics of Confucianism such as The Great Learning, The Analects of Confucius, The Works of Mencius, and The Right Path, and finds out characteristics of Mok-Eun’s poems through this examination. The following are the summary of the substance discussed in the study. Firstly, Mok-Eun alludes mostly Samkangryeong(three Confucius doctrines scholars should keep) from The Great Learning. This fact reveals the idealistic characteristics in his poems. Secondly, the book that Mok-Eun cites heavily is The Analects of Confucius. Especially he alludes much to An-Hoe’s historical event called Dan-pyo-nu-hang. This fact shows that Mok-Eun bore love of learning, contentment with poverty and delight in the Taoist way in spite of his high public position. Third, Mok-Eun cites chiefly Mencius’s political thought. exhausted energy, and theory that man has good spirit by nature. For example, Mok-Eun’s poem, ’27th Day’. is almost similar to a part of a chapter called Jinsimjang in The Works of Mencius in the content, not formal aspect. Forth. Mok-Eun made poems. understanding the history and content of The Right Path. Among the contents alluded from the book, he used very much the phrase called Yeonbieoyak(Tao is infinite and subtle). Though he could not see the subtle reason. he tried to explain the reason by giving shape to it. This reveals his pursuit for the philosophical reason in The Right Path. This Study can be considered only a draft because it examines Mok-Eun’s poetic thought only relating his poems to The Four Books of Ancient China. Therefore, it necessary to make close examination of the allusion from the whole Chinese Classics of Confucianism in Mok-Eun ‘s poems to understand clearly his literary thought. In addition, the study need include the advanced examination of the allusion from Chiness Classics of Confucianism in poems by Mok-Eun’s contemporaries to establish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in Chinese character when Sung Confucianism was accepted in Korea. But the advanced examination will be carried out at the next study.
        7,800원
        27.
        199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800원
        28.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친 연구에서 유학에 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유학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접근과 통합적 방법론의 모색은 동아시아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구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은 아주 뜨겁다. 한반도의 정세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해지는 현황에서 동아시아를 정확히 보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학의 다변적 해석에 관한 연구는 동아시아학 연구자들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하나의 사상을 특정한 시대의 요구나 편의성에 따라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아가면서 필요로 한 동아시아적 복잡한 요소들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보편적 가치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유학에 대하여 다시금 짚어보는 것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철학, 사학 등 무한의 영역들이 세대를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실현됨으로써 공감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변화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와 역할의 상실에 따른 근본적인 해결을 유학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29.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선진 유가 사상을 정치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분석 함으로써 그것의 공사문제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家와 國의 영역 문제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다음 으로, 그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단순히 인간의 본성 문제로 설명되는지, 만약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그 해명 되지 않는 부분이 도덕 감정과 공동선의 상호작용임을 밝힘으로써 선진 유교의 공사관을 그림을 그려낼 것이다. 유교가 감정윤리라는 점에서 이모티비즘과 어 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차별성을 통해 유교의 감정윤리가 어떻게 공공성을 획 득할 수 있는지 해명한다.
        30.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중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하학론(下學論)’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당대 퇴계 등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하학 (下學)’을 강조했다. 그는 하학이 유학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측 면에서 하학을 경시했던 당시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 의 ‘하학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유학에 있어 하학이 가지는 위치를 먼저 검토했다. ‘하학’은 유학을 도가나 불가 등 다른 사상과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선진 유학에서부터 이어져온 중요한 전통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유학 의 본질은 하학에 있다고 보았으며, 하학(下學)의 대상인 현실세계를 떠나지 않 았다. 유학자들은 세속에서 상달하고 도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속에서 상 달의 성스러움을 실현하려고 했다. 불교나 도교는 상달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유학과 비슷하지만, 하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학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학은 정치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학은 유학자를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며, 하학의 세계에 대한 걱정 은 바로 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학의 하학전통을 잘 이해한 사람이 조선 중기 남명 조식이다. 남명 에게 ‘하학’은 단순한 공부상의 절차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의 사상에 있어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명에게 현실을 떠난 학 문은 실(實)이 아닌 헛됨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유학의 경세(經世)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남명사상의 특징 중 하나인 실천성과 경세성 등을 이런 ‘유학의 하학전통’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남명의 하학론을 단순한 학 문적 단계로서가 아니라 유학의 주요한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사상(敬義思想)이나 출처관(出處觀) 등 남명의 주요 사상에 있어서도 그의 하학론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고, 그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31.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이 자리 잡기 이전, 곧 조선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던 지리산유람록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기다려 100여 편이나 등장했다. 그리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을 남기는 전통 또한 사라졌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하나의 물음을 떠올린다. 유람록의 주체이자 성리학을 이념적 토대로 삼았던 선비, 그들은 도대체 왜 지리산 유람 길을 떠났고 수많은 유람록을 남겼을까? 이 글은 이 물음에 대해 배움과 휴식 그리고 선현을 닮기 위한 노력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선비들이 유람을 떠난 동기를 찾아보고, 그것이 어떻게 넓게는 유학 그리고 좁게는 성리학과 연결되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선비들의 유람은 한편으로 일상의 배움을 이어서 세상을 읽어가는 또 다른 형태의 배움을 위한 길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긴장을 해소하는 휴식의 길이었다. 그리고 긴장과 이완이라는 두 가지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비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선현들과 닮은 모습, 곧 자신이 현인 혹은 그와 같은 인격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선비들에게 긴장과 이완, 배움과 휴식이 둘이 아니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선현을 닮아가는 것 역시 또 다른 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유람은 선비들에게 세상을 읽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세상 읽기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가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더욱 충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과 함께 유람록의 전통이 세워지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의 전통 역시 사라지는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선비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들이 세상을 읽던 방식 역시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2.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은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불교식 사회사상을 비판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었고, 고려의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단으로 지목되었으며, 불교 이단성의 비판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문이 유입되었고, 당시 명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도 매우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그런데 이 양명학 역시 주자학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단성이 지적되었는데, 주된 비판의 내용은 불교와의 유사성이었다. 명나라로 사행을 간 조선인은 명나라 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양명학의 공부 방식이 참선의 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하였으며, 양명학은 선학(禪學)이라는 명제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일본의 유학이 아직 맹아 상태일 때, 경전을 논하는 이들은 주로 승려 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이들의 이단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의 유학이 성장하여 고학 등이 등장하였을 때 조선인은 양명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사행에서의 양명학 논쟁 경험이 일본 유학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1764년 일본에 번성하는 고문사학의 경향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서야 일본 유학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비판의 논점이 불교 유사성에서 경전 이해의 오류로 옮겨갈 수 있었다.
        33.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忠毅公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남명 선생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招諭使 金誠一(1538~1593)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고, 1597년 丁酉再亂때 안음현감 郭준(1551~1597)과 함양 黃石山城에서 왜장 加蕂淸正이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소헌은 어릴 때부터 家學 또는 지역의 先輩 학자들로부터 익힌 공부를 비롯해 본격적으로 남명에게서 배운 학문의 지결을 몸소 실천하였다. 곧 義理精神을 근간으로 한 그의 학문적 바탕이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 仁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대소헌은 평소 국가에 재난이 있으면 관직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선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소 배운 대로 실행하여 하늘의 떳떳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세상을 잊고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는 것을 능한 일로 삼아 명예만 얻으려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니고 문무를 겸비하고서 옳은 일에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올바른 선비라고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함으로서 선비의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34.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늘날 유학은 그 존립의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공자가 요순시대를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주나라의 주공이 만든 통치체계를 모델로 하여 정립한 것이 유학이다. 유학자는 경전과 육예에 밝으면서 여러 형태의 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공자로부터 유학의 목적은 ‘극기복례’로 규정되었고, 이후에는 이 개념이 ‘수기치인’과 ‘내성외왕’으로 확대되었다. 내면적 인격을 완성하고, 이를 통하여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은 왕조시대의 통치논리를 정당화 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는 맞지 않는다. 본고는 유학의 현대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모색이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중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공자 이전의 유학은 ‘황극’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으며, 공자로부터 ‘중용’이 강조되면서 커다란 변신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북송시대의 승려인 계숭이 파악한 유학의 본질에 대한 관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왕조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오늘날 유학은 새로운 변신이 필요하며, 그 중심에 근본 덕목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보면서 이를 ‘大公’으로 제시한다. 정치의 형태에 따라 고대 요순시대에는 천자가 중심이 되어 ‘황극’에 의지해 ‘덕화’를 시행하였으며, 공자 이후로는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중용’에 의지해 ‘교화’를 시행하였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오늘날은 국민 모두가 중심이 되어 ‘대공’에 의한 ‘同化’가 시행되어야 하며, 그 세부절목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학이 꿈꾸는 이상사회는 ‘大中至正’한 사회이다.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의 공화국 체제에서 가장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유학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예의의 강조이다. 각종 제례에서의 예의는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가정과 사회에서의 공공예절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의 유학이 스스로의 존속을 위한 정체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현대사회에 필요한 예의 절목을 마련하여 모두가 함께 지키도록 홍보하는 일이다.
        35.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溪南 崔琡民(1837-1904)은 기정진의 제자이자,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기호 학맥의 끝자락을 장식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그의 스승 기정진과 함께 율곡학 파에 귀속되긴 하지만, 그의 성리학적 구도는 율곡학이나, 이이의 시각을 수정 없이 그대로 계승한 계열과 많은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 논문의 목적은 최숙민 의 성리학이 어떤 측면에서 율곡학의 관점과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의 리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확인하는 데 있다. 아울러 그러한 차별성 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여전히 율곡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성리학이 조선성리학의 전개사에 있어서 어떤 좌표에 위치해 있는지를 분 석하고 있다. ‘氣發理乘一途’와 ‘심은 곧 기(心卽氣)’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이이의 성리학이 떠안아야만 했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성리학의 궁극적인 목 표였던 ‘도덕실천의 필연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 렇듯 이이가 남겨둔 문제는 이이의 후계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 할 과 제이기도 하였고, 율곡학파의 전개사는 곧 이 문제에 고민하며 그 답을 찾아가 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숙민의 성리학에는 율곡학파 300년의 고민이 담겨져 있 다. 그 고민의 결과가 리기론에서는 주리적인 성격의 강화로, 심성론에서는 ‘심 이 곧 리(心卽理)’라는 명제로 나타났다. 물론 이것은 최숙민의 문제해결 방식 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체계는 혹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율 곡학파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그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 의를 가진다.
        36.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37.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鄭載圭는 奇正鎭의 학문을 영남에 전한 학자이다. 기정진의 문집 간행과 추모 문자를 제작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그는 스승에 대한 비난에 대응하 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스승의 학설에 田愚의 비판이 있자 師說을 변호하면 서 자신의 성리학을 체계화한다. 지향해야 할 가치의 폭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主理의 논리로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이 그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성리학이 었는데, 理의 主宰·인물성동이론·本心論 등을 통해 주리의 논리를 전개한다. 정 재규의 성리학을 규명하는 본 연구는 그의 학설의 모태가 된 기정진의 성리학, 기정진의 학설에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 전우의 성리 이론을 먼저 살핀다. 이를 바탕으로 정재규 성리학의 역할과 성격을 이해하여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정진 과 정재규의 주리론과 전우의 주기론이 갖는 학술적 의미를 조명해 보았다. 그 결과 정재규의 성리학은 한말 주리론의 삼대가인 기정진, 李恒老, 李震相의 학 문과 정신적으로 상통하는 것이었고, 또한 율곡학파가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주기론의 장점을 버리지 않고 주리의 학문과 결합시킨 학문이었다.
        38.
        200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 받아 조선 말 최대의 학파라고 일 컬을 수 있는 한주학파를 선두에 서서 이끌면서 ‘개명한 도학자’로서 일생을 살 았다. 곧 그는 이진상의 竪看·橫看·到看의 三看法과 理發一途說, 心卽理說을 계 승하여 옹호하고, 이진상이야말로 공자와 맹자, 주자, 이황을 정통으로 계승하 였다고 주장하였다. 한주학파의 리발일도설과 심즉리설의 핵심은 심과 그 속에 있는 리의 주재성을 확보하여 주체에 철학적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은 단순히 이론적 영역에서만 머물지 않고, 가까이로는 어려운 시 기 도학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긴요한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눈앞의 현실 을 인식하고 참여하는 데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39.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강 김우옹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서 조선중기 남명학파의 저명한 학자이 다. 김우옹의 학문은 스승인 조식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근원 을 찾아보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자의 영향권 아래 있다. 주자와 김우옹의 정치론과 학문론을 비교해 본 결과, 이 두 학자의 영향 관계 는 매우 직접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정치론을 살펴보면, 군주론에서는 군 주의 정치적 역량보다 군주의 마음을 가장 중시하였고, 신권론에서는 나라를 경영하는 주체로서 신하의 권한을 옹호하고 있으며, 붕당론에서는 군자와 소인 을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요구하고, 외세론에서는 시종일관 외세배격의 논리를 지녔다. 그리고 학문론에서는 주자학의 공통된 이념인 ‘性卽理’를 공유하였고, 敬과 실천을 매우 중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인격적 면에서도 매우 유사한 면모 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명학을 두고 주자학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김우옹의 삶 과 사상을 살펴본 결과 김우옹을 위시한 남명학파는 철저히 주자학의 기반위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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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鄭琢은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이황에게서 心學의 요체를 배워 스승을 중심으로 심화되고 있던 조선 유학의 心學化 현상 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였다. 조식으로부터는 壁立千仞의 기상을 배워 불굴의 절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정신 세계의 원천은 유학의 경전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학󰡕, 󰡔대학󰡕, 󰡔중용󰡕을 가장 중시하였다. 내용적으로는 경-중용-절의의 세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 중용과 절의를 최 선의 가치로 본 유가의 철학에 세계와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성찰을 더하면서, 수양에 의한 인격화 및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는 도정에 나타난 것이 정탁의 학 문이다. 그의 시대의 사림파들은 도덕으로부터 독립된 利害의 세계를 허용하는 대신 의리론에 입각하여 이해의 세계를 재해석하고, 이해 타산이 아닌 순수한 도덕 감정에 의해, 私心없는 도덕성에 의해 영위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것 은 일상의 세계를 이상적 도덕 관념과 실천으로 엄밀하게 통제하여 감을 뜻한 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心性論과 理氣論을 검토하고 그로부터 추출된 진리 를 修養論에 의하여 體化하고자 한 것이 이 시대 학자들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의 영향 하에서 도덕적 관념을 일상화하고,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신 성화하는 정탁의 생각은 도덕적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좁은 시각이다. 정주학적 세계관과 윤리관의 착근과 순수성에의 몰입은 이념의 경색화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전기 관학파가 의리와 함께 실리 를 함께 중시하다가 이해의 함정에 빠졌다면, 사림파는 도의의 순정성을 중시 함으로써 일상에 대한 탄력적 대응 능력을 상실하였다. 정탁은 정주학이 이 두 모습을 모두 드러내던 시기에 활동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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