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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손광성 수필집 『바다』에 나타난 유년기 자아의 특성과 가 족로맨스를 고찰했다. 손광성의 가족로맨스는 그의 기원이 있는 북녘 ‘고향집’으로 회귀 욕망에 시작점과 끝이 있다. 그러나 그가 꿈꾸는 고 향 산천은 이미 예전의 ‘그곳’이 아니며 순수한 원초적 의미로서의 소 기는 어디에도 없다는 데 애잔함이 있다. 일제치하와 육이오, 유년기에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 형수님과의 결별과 누님의 보살핌, 흥남 철수 때 누님과의 남하 등의 가족 서사는 가족로맨스의 특성인 업둥이형 형태로 발현된다. 「물소 문진」 등에는 ‘사라지고 싶음’ 혹은 현실의 세계를 도 피해 ‘자신 만의 세계를 꿈꾸고자 했던’ 업둥이형 욕망이 투영된다. 이 는 그의 유년기 자아에 고착된 어머니의 이미지나 죽음 환영 등으로 발현된다. 그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현실 저 너머’의 세계로 ‘사라져 버 리고 마는’ 어떤 의미, 즉, '대상 a'의 의미로 존재한다. 이는 주체의 불안과 결핍을 상징한다. 손광성에게 가족로맨스는 유년기 자아의 핵심 적 동인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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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3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성주지역에 분포한 선사∼삼국시대 유적에 대해 정리하고, 지역 내 삼국시대 고 분의 편년과 성격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성주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그 시작은 구석기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성주읍과 선남면 일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다수 출 토, 채집되었고, 지역을 관류하는 이천(伊川), 백천(白川), 신천(新川) 등의 소하천 유역에 형 성된 하안단구상에 구석기시대 유적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지역 내에서 확인된 바가 없지만, 성주와 인접한 김천지역의 송 죽리유적을 비롯하여 합천, 거창 등지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확인되는 것을 토대로 성 주지역 내에서도 신석기시대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낙동강 및 지역 내 소하천 등지에 입석, 지석묘, 유물산포지 등 53개소 정도가 보고되어 있고, 성주지역에서 확인된 지석묘는 모두 165여기 이며, 입석은 6기이다.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유적도 지역 내에서 다수가 조사되었는데, 특히 백전·예산리유 적은 원삼국시대 전기에 목관묘를 축조하고 철기를 사용한 세력이 당시 성주지역 내에서 성 장,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대외교류 등을 통해 철기류와 같은 선진 문물을 받아 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삼국시대가 되면 지역 내 3대 고총고분군인 성산동고분군, 수죽·용각리고분군, 명 천리고분군을 중심으로 많은 수의 고분군이 조영되는데, 60여개소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지 역 내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성산동고분군 내에서는 22호분, 48호분, 수죽·용각리고분 군에서는 수죽리고분군Ⅱ 30호분, 353호분, 명천리고분군 내에서는 6호분 등이 최근 발굴 조사되었고, 성산성과 할미산성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도 최근 실시되는 등 다양하고 활발한 조사가 지역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성주지역 내 삼국시대 고분에 대한 편년은 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성산동고분군을 중 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지역색이 강한 성주양식 토기가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낙동강 이동지역까지 확인되며, 대형의 판석조 석곽 역시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낙동강 중상류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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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was conducted to examine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Hak-seong Lee Family's Geun-jae-gong Historic House located in Seok-cheon-ri, Ung-chon-myeon, Ulju-gun, Ulsan. The house is said to have been rebuilt in the early 20th century after it was built in the 18th century, and now there are nine buildings left, including the An-chae, Sa-rang-chae, Sa-dang, storehouses and etc. This house is a large-scale house that is difficult to find similar cases in near region. The division of areas on each building is clear, and it is evaluated that it retains the typical characteristics of the head fami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 terms of its overall size and layout. In addition, the current wooden structure, which is said to have been rebuilt in the early 20th century, shows the composition method and space utilization method of the 3-Dori type upper structure, which have become more diverse since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has not been dealt with in the previous survey, and should be considered in detail through this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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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2.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isolated lactic acid bacteria (LAB) on the quality of high moisture rye silage. Rye forage (Secale cereale L.) was harvested at the heading stage (27.3% of dry matter (DM)) and cut into approximately 3-5 cm lengths. Then, the forage divided into 4 treatments with different inoculants: 1) No additives (CON); 2) Lactobacillus brevis strain 100D8 at a 1.2 x 105 colony-forming unit (cfu)/g of fresh forage (LBR); 3) Leuconostoc holzapfelii strain 5H4 at a 1.0 x 105 cfu/g of fresh forage (LHO); and 4) Mixture of LBR and LHO (1:1 ratio) applied at a 1.0 x 105 cfu/g of fresh forage (MIX). About 3 kg of forage from each treatment was ensiled into a 20 L mini-bucket silo in quadruplicate for 100 days. After silo opening, silage was collected for analyses of chemical compositions, in vitro nutrient digestibilities, fermentation characteristics, and microbial enumerations. The CON silage had the highest concentrations of neutral detergent fiber and acid detergent fiber (p = 0.006; p = 0.008) and a lowest in vitro DM digestibility (p < 0.001). The pH was highest in CON silage, while lowest in LBR and MIX silages (p < 0.001). The concentrations of ammonia-N, lactate, and acetate were highest in LBR silage (p = 0.008; p < 0.001; p < 0.001). Propionate and butyrate concentrations were highest in CON silage (p = 0.004; p < 0.001). The LAB and yeast counts were higher in CON and LHO silages compare to LBR and MIX silages (p < 0.001). However, the mold did not detect in all treatments. Therefore, this study could conclude that L. brevis 100D8 and Leu. holzapfelii strain 5H4 can improve the digestibility and anti-fungal activity of high moisture rye si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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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이성교 시의 기독교적 형상화와 구원의식을 구명했다. 이성교는 1956년 등단 후 주로 고향을 소재로 한 향토적, 전통적 서정시를 선보였다. 그러나 제4시집 이후 그는 강원도의 일상적․전통적 소재에 신앙적 감흥과 성서적 사건을 연결한다. 그는 일상의 ‘눈(雪)’을 기독교적 ‘거듭남’으로, ‘까치소리’를 ‘영 성의 소리’로, ‘봄’을 부활을 현시하는 ‘영적 회복’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예수의 형상으로 시화된다. 예수의 형상화는 ‘어머니<임<그 사람’으로 변조된다. 어머니는 실제적(a real) 어머니(이성교의 어머니)에서 실재적 ‘임(당신)’ 으로 형상화되며, ‘임’에서 ‘그 사람’으로 예수의 형상화가 다시 확장되어 자기 희생적 삶과 구도자적 삶을 객관화하여 노래하게 된다. 이성교는 강원도를 시적 배경으로 삼아 실제 지리적 공간을 이상화된 지정학적 구원의 공간으로 노래한다. 그는 풍요의 유년 공간 월천(삼척)을 이상 실현의 공간 강릉(영동지역)으로 확대하며, 강릉 일대는 인심이 가득한 본향으로서의 구원 공간 강원도로 다시 한 번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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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former administration office building of Kyeong-seong-bu(京城府) was a building converted from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s of Kyeong-seong(京城理事廳) which was originally built as the Japanese consulate in J oseon(日本領事館). It was too worn and too small as a Kyeong-seong-bu administration office even with several annexes. Kyeong-seong-bu tried to build a new big administration office building at the vacant north side of the same site, which was closely faced to the rotary in front of the Bank of J oseon(朝鮮銀行前廣場). But this trial was ended in vain due to insufficient budget. Therefore Kyeong-seong-bu built a new administration office building in another site and moved to it in 1926 with debts. For paying for the debts Kyeong-seong-bu sold the former site after partitioning with new roads through it. As a result the nature of the former site and its surroundings was changed. This study traces the changes and inquires how the authorities in the colonial J oseon and various commercial powers of Kyeong-seong-bu behaved for their own interests in the meantime. It makes use of the historical records and documentary literatures between early 1910s and early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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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7.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제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며 주로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 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이다.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통신기 술에 지능을 더한 기술 혁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한문과에서 대비해야 할 하나의 수업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같은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ⅰ) 삶의 패러다임 변화와 이면의 문제들을 논의해보고, 이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교육 패러다임에 대해 고찰하고, ⅱ) 미래의 한문교육을 위한 수업을 구안・ 적용하여 인간 중심의 가치를 생각하고, 미래 인재가 갖추어야할 역량을 키우는 한문교육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연구 문제로 상정한다. 연구 문제 해결을 위해 택한 소재는 ‘성어’이다. 정보검색활용 수업, 토론학습, 문제해결학습, 팀 프로젝트, 자유 발표 등을 활용한 성어 수업을 통해 제4차 산업혁명을 대비할 수 있는 핵심 역량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한다.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역 량을 함양시키기 위한 한문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이 연구를 통해 미래교육의 패러다임 변화 를 예측하고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는 한문교육이 이루어지길 기대한 다. 또한 미래의 한문교육을 위한 수업 구안・적용을 통해 미래 인재가 갖추어야할 역량 강화를 위한 한문교육 방법을 일반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문과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여 전문적인 기술과 정보 습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한문교육, 인간의 가치를 탐 구하는 한문교육, 이러한 요소와 관련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한문교육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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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7.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life and astronomical activity of Lee Deok-Seong (李德星, 1720-1794) was studied using various historical sources, including the astronomical almanac, Seungjeongwon-Ilgi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and the Gwansang-Gam’s logbooks during Joseon dynasty (A.D. 1392– 1910). We present the results of the study including the following main findings. First, from the investigation of Lee’s family tree, we find that a number of his relatives were also astronomers, notably Samryeok-Gwan (三曆官, the post of calendrical calculation). Second, we find that he took part in the compilation of an annual astronomical almanac over a period of at least 16 years. His major achievements in the astronomy of the Joseon dynasty were to establish a new method of calendar-making calculation and to bring astronomical materials to the Joseon court through a visit to China. The Joseon dynasty enforced the Shixianli (時憲曆, a Chinese calendar made by Adam Shall) in 1654 without fully understanding the calendar. So an astronomer and an envoy were dispatched to China in order to master the intricacies of the calendar and to learn as much of Western science as was available in that time and place. Lee Deok-Seong worked at the Gwansang-Gam (觀象監, Royal Astronomical Bureau) during the reigns of King Yeongjo (英祖) and Jeongjo (正祖). As best as we can ascertain in relation with the calculations in the Shixian calendar, Lee visited China four times. During his trips and interactions, he learned a new method for calendar-making calculations, and introduced many Western-Chinese astronomical books to Joseon academia. Lee greatly improved the accuracy of calendrical calculations, even while simplifying the calculation process. With these achievements, he finally was promoted to the title of Sungrok-Daebu (崇祿 大夫), the third highest grade of royal official. In conclusion, history demonstrates that Lee Deok-Seong was one of the most outstanding astronomers in the late-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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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4.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제주도 한라산국립공원 굴거리나무 식생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 영실 ․ 성판악지역을 중심으로 26개의 조사구(20m×20m)를 설정하고 조사하였다. 위 지역의 식생군집은 TWINSPAN을 이용한 Classification 분석과 DCA Ordination 분석을 활용하였다. 분석결과는 총 3개 군집으로 나타났다. 군집Ⅰ은 소나무-서어나무 군집, 군집Ⅱ는 서어나무-졸참나무 군집, 군집Ⅲ은 개서어나무 군집이었다. 이러한 식생구조 분석 결과, 모든 군집의 하층에서는 굴거리나무가 출현하였다. 추후 굴거리나무는 아교목층 및 관목층에서 주요종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이러한 군집분류결과는 해발고 차이와 동반출현종에 의한 영향 때문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동반출현종은 굴거리나무 생육환경과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는 종이다. 동반출현종으로는 아교목층에서 때죽나무, 졸참나무 등이었고, 관목층에서는 꽝꽝나무, 주목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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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14.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conducted a survey to analyze awareness, preferences, and the current state of consuming environmentally friendly organic food while eating-out in 435 adults aged 20 and above in Daegu, Korea. Most subjects (95%) showed awareness of environmentally friendly organic food, and 88.5% of subjects answered environmentally friendly organic food is ‘needed’. The percentage of eating out for families was 58.9%, and 49.0% of subjects said they eat out one to three times per month on average. In addition, subjects preferred a price range between 10,000 and 20,000 won per person when eating out, and they mostly favored Korean restaurants when ordering environmentally friendly organic food. Analysis of awareness of environmentally friendly organic food showed that among ‘health’ factors, ‘environmental’ factors, ‘social’ factors, and ‘dietary essential’ factors, ‘health’ factors showed the highest percentage for awareness. A survey on preferred foods by gender showed that both genders preferred vegetables the most. The results show that subjects in their 20s and 30s favored vegetables and fruits while subjects in their 40s preferred vegetables and grain animal products. Analysis of preferred types of environmentally friendly organic foods showed that men preferred polished rice while women preferred brown rice. Subjects in their 20s and 30s preferred strawberries, whereas those in their 40s preferred cherry tomatoes and those in their 50s and above favored tomatoes (p<0.001). Among root and tuber crops (63.4%), sweet potato was the most preferred. Among fruits, subjects preferred apples while among special crops, they most preferred oyster mushrooms; both genders preferred Korean beef. The most preferred livestock product of subjects in their 20s was pork, whereas subjects in their 30s preferred Korean beef. Subjects in their 40s preferred Korean beef and pork in the same proportions, whereas subjects in their 50s and above favored eggs the m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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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1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this article I studied the novels and essays of Park Hwa-Seong, who was a representative woman in the 1920-30s as a tendency writer. She wrote a lot of novels over 60 years from 1925 when she became a writer till 1988 when she died. The literary world of Park Hwa-Seong changed greatly according to the conditions of times. In this article, above all, I want to focus on her novels that dealt with the christianity as a subject matter in order to prove the characteristics of recognition of christianity expressed in her works. This study can be an example of how the tendency writers of the 1920-30s recognized christianity and expressed their ideology in their work. Park Hwa-Seong had a specific biography in respect of christianity as a tendency writer in the 1920-30s. She was baptized as an infant and led a religious life very eagerly in her youth. However, as she became a tendency writer and wrote realistic novels reflecting the conditions of the bard times, Japanese colonial era, she wrote novels which expressed negative recognition of American missionary and protest providence of God. In the 1920s-30s, the tendency writers looked upon christianity as a certain ideology for tbe perspective of socialism and criticized it on the ground that christianity could not improve the conditions of colonial reality. As an intelligent leader, she considered anti-christian emotions as an act of nationalistic faith to overcome Japanese colonial conditions. So the reason why she wrote negative christian view in her novels in the 1930s was to disclose the feeling of helplessness of christianity which couldn't revolutionize the dismal reality of nation. For examnple, the short story "Hangui" showed the question of theodicy, why the good had to suffer from hunger and poverty despite the prosperity of the evil. She doubted about the presence of God and became a skeptic of God in her life. Nevertheless she didn't leave the christianity and lived a christian life in a specific method. If she had not known the christianity,she could not have written such a novel that raised a metaphysical question about the providence of God. Through her life, Park Hwa-Seong created works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times. But as she was a writer who had related with christian background from her childhood,in the time of Japanese colonial period, she used christianity as subject matters in her works. AIso she showed christian consciousness in the form of negative as a tendency writer and expressed writer's recognition of chrisrianity as a skeptic of God honestly in the latter part of her literary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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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12.05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주장성은 5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하는 신라 석축산성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무왕12년(672) 신라는 해발 500m가 넘는 남한산에 대규모 산성을 쌓고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당시 신라는 이미 둘레 8km가 넘는산성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쌓을 수 있는 조직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돌도 주변에 있는 편마암 석재가 아니라 최소한 11k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서 운반해온 화강암 성돌을 하나 하나 옥수수알 모양으로 치밀하게 가공하여 쌓았다. 보축(保築)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 성문을 만들었으며, 성벽 위에는 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을 쌓았다. 당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성 내에는 대형 창고를 지어 많은 군량미와 병장기를 비축하였다. 길이 53m가 넘는 대형 건물에는 기와 한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특대형 기와를 사용하였다. 기와 무게로 인한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돌과 흙을 교대로 판축하여 견고하게 대지를 조성하고 벽체는 두께 2m가 넘도록 하여 기둥이 받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등 이 대형건물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로 구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인조2년(1624)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수축하였다.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서 성을 쌓고, 주장성 성돌을 재활용하기도 하였지만 현문식 성문을 평문식(平文式)으로 바꾸고, 12개의 암문(暗門)을 새로 만드는 등 남한산성에는 조선중기의 새로운 축성기술이 반영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화포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옹성과 포루가 새롭게 구축되었으며 한봉성과 봉암성, 신남성 등의 외성(外城)이 보강되었다. 성돌의 크기도 커지고 돌로 쌓았던 여장도 벽돌과 석회(石灰)로 다시 쌓아 포탄을 맞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여장을 만들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고대의 축성기술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각 시기 축성기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교과서와 같은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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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1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With the accumulations of outcomes from archaeological excavations of mountain fortress of three kingdoms period, there have been studies about time-periodic territory range of mountain fortress, difference in the way(method) of construction, defence system and so on from various points of view. This is an empirical study on the construction method of the valley part of stone fortress. First of all, it is required to secure large quantity of fresh water for those who lived at mountain fortress. Especially when builders of fortress construct a fortification at the valley part of stone fortress, in advance they must sufficiently consider several options including the establishment of sustainable water resources. First, when it comes to build a fortification on a ridge[or a slope] of a mountain, you have only to consider a vertical stress. However, when it comes to build a fortification at the valley part of a mountain, You must have more sufficient preparations for the constructing process. Because there are not only a vertical stress but also a horizontal pressure simultaneously. Second, a fortification of mountain fortress built by using unit building stone is a structure of masonry construction like brick construction, and the valley part of it is where the construction of the fortification begins. Third, when it comes to build a fortification at the valley part of a mountain, it seems that they use a temporary method such as coffer dam in oder to prevent the collapse of the fortification due to heavy rain. Furthermore, in response to a horizontal pressure a fortification is built by the way of its plane make an arch, or by piling up the soil with the plate method(類似版築) and earthen wall harder method(敷葉) they increase cross-sectional area of the fortification and its cutoff capacity. In front direction they put the reservoir facility for the fear that the hydraulic pressure and earth pressure are directly transmitted to the fortification. The process of constructing the fortification at the valley part of a mountain is done in the same oder as follows; leveling of ground(整地) ⇨ construction of coffer dam ⇨ construction of the fortification between the both banks of the valley ⇨ construction of the fortification at bottom part of spill way(餘水路) between the both banks of the valley ⇨ construction of spill way(餘水路) & reservoir facility ⇨ construction of the fortification at upper part of spill way between the both banks of the valley. Coffer dam facility seems to be not only the protection device on occasion of flood but also an important criterion to measure the proper height of spill way or tailrace(放水路). This study has a meaningful significance in that it empirically examines the method of reduction of the horizontal pressure which the fortification at the valley part of a mountain takes, the date the construction was done, and wether the changes in climate such as heavy rainfall influence the process of constr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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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0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Now I’d like to abstract the statement as far and reach the conclusions by making clear the basic direction, of it’s characteristics,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 Studies. Seong-Ho not only accepted the previous seience itself as private person 60 more years but also try to criticized the reality of politics, laying stress on the ratiinal innovation of real policies. He didn’t obey blindly ready-made congnition system, because of his objectified attitude for recognition of object, so he pursuited the rational congnition in accordance with reality. This attitude is a kind of characteristics and basic elements of his realistic development in Confucian studies. Therefore, I’d like to overview interpretation of Confucian classical canons which is basic element of his study. First, Seong-Ho emphasized that a man who studied the Confucianism ought to rearch for the original Confucianism with the attitude of throughout rearch for original understanding. If possible, as one want to study the classical canons of Confucianism, not only acquainted with the meaning of canons and supporting evidence, but also, not adhere to the previous interpretation. So it would be helful for researching the real problems. Seong-Ho insisted that scholia and prose poem never helful for real benefit, at same argument on Lee-Qi(理氣) would be more important things than any others. On this stand-point, it means that Confucian studies ought to return to the original Confucianism as a attitude for studing confucian canons. Second, Seong-Ho insisted that method for interpretation of Confucian canons would be more clear by means of historical research and meaning of worlds. This is cleary differentiated characteristic of Seong-Ho Confucian studies, compared with general way of thingking at that time which blindly followed the Zhu-Xi`s(朱喜) annotation. The other world, He made an effort to reinterpretated the classical canons, refered various theory, not depend on only one theory. Third, It was noted that the cardinal point of Seong-Ho’s studies was a means of manage and benefits for practical use, that is to say, ultimate goal in of Seong-Ho’s studies was benefit for pracrical use. I think characteristic of Lee-Yik’s view on the study of classical canons itself, rather consider it as a means of study, because his emphasise on the practical use and practice. This specific feature of Seong-Ho, Lee Yik’s was concreatly appeared in the Jil seu for the Four Books.
        6,700원
        17.
        1974.12 KCI 등재 SCOPUS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osition and magnitude of 1449 stars listed in "Seoung Kyung" (by Byung Kil Nahm, 1861) are compared with those in modern western star catalogues for their identification. 923 stars out of 1449 stars were identified within the range of accuracy. Δ α ≤ 20 s .0 , Δ δ ≤ 1 ′ .0 a n d Δ m = 0 o r ± 1 . When Δ α a n d Δ δ increased to Δ α ≤ 1 m . 0 , Δ δ ≤ 15 ′ .0 a n d Δ m = 0 or +1, 399 more stars could be included in the list.
        4,000원
        18.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松溪先生으로 알려진 申季誠(1499-1562)은 흔히 南冥 曺植의 ‘畏友’ 로 언급되고는 한다. 송계는 平山을 본관으로 하는 고려 건국의 충신인 壯節公 申崇謙의 후예로 연산군 5년 밀양 후사포리에서 출생해 명종 17년에 향년 64세의 일기로 삶을 마친 인물이다. 하지만 송계 신계성의 행적은 문학이나 사학, 혹은 철학계에서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분이다. 다만 사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영남 지역의 사림 학맥을 고찰하면서, 혹은 남명 조식의 학술적 면모를 언급하는 과정에 잠시 언급되고는 할 뿐이다. 하지만 송계가 영남 지역 사림의 한 부분을 대표하며 남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 학계가 간과할 수 없는 인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밀양이라는 지역은 이미 삼한시대에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수산제와 같은 수리 시설을 갖춘 농경 지역이었다. 또한 낙동강을 이용한 漕運倉의 운영은 물론 嶺南大路의 거점에 놓인 嶺南樓라는 조선3대 누각에 꼽히는 문화적 존재가 증명하듯 주변 지역과의 관계망을 갖춘 경제의 중심으로서 근대 전환의 시점 까지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春亭 卞季良(1369-1430)과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뒤를 이어 사림의 중망을 얻은 송계와 같은 인물의 등장이 일견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송계 신계성의 면모와 학적 형상은 춘정과 점필재에 비해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남명을 비롯해 명종 때 領相을 지낸 東皐 李浚慶, 錦溪 黃俊良 등의 언급을 볼 때 영남 사림의 한 부분인 송계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송계가 남명, 黃江 李希顔과 세상에서 嶺中三高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본고는 송계 가문의 밀양 정착 과정으로부터 후대인들의 송계 추숭 과정을 살펴 그의 영남지역에서의 위상을 엿보고자 한다.
        19.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글은 제1차 진주성전투에 있어서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역할을 구명하기 위한 논고이다. 주지하다시피, 진주성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 등이 혈투를 전개하여 진주성을 지켰던 승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 김성일은 경상우도관찰사로사 김시민 등을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초유사로 활동하던 김성일은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초유사직에 물러나 잠시 경상우도를 떠났다가 다시 경상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에 개령, 성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거창 방면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 창원 방면으로부터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경상우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성일은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역량과 전술운용으로 진주성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 등을 주축으로 관군 중심의 수성체계를 구축하고, 진주성 외곽에 관군과 의병을 배치하여 구원하게 함으로써 진주성을 공격하도록하는 전략을 운영하여 진주성 방어력을 강화함은 물론, 분산전을 유도하여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의 전력을 약화시켜 진주 수성군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아울러 포위된 진주성에 화살 등의 물자를 공급하여 줌으로써 전투력을 유지하고 군사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진주성 전투 직후 그는 거창 방면으로 쳐들어 오는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삼가로 달려가, 주변 지역의 관군을 거느리고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을 도와 이를 막아내었다. 이후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은 전라도 의병장인 최경회 임계영 등이 성주, 개령 지역의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마침내대 다음해 2월 성주, 개령지역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에도 관찰사로서 김성일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경상우도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김성일의 전략과 진주성의 수성장이었던 김시민의 절묘한 전술운용, 그리고 각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수행했던 제장과 사졸의 분전이 어우러진 값진 결과였다. 진주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수만의 성내 관민의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이고, 경상우도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였으며, 나아가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6∼7세기 南冥 曺植의 문인으로 진주 지역에 살았던 처사 成汝信 (1546-1632)이 만년에 지리산 천왕봉을 유람하고 쓴 「遊頭流山詩」를 분석하 여 정신세계의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성여신은 젊어서부터 경세적 포부와 문학적 성취를 견지하였는데, 문학은 당 송고문 가운데서도 특히 韓愈와 歐陽脩를 전범으로 하여 雅正平淡한 문장을 추 구하였다. 그러나 잇따라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중년을 훌 쩍 넘긴 뒤, 60세가 넘어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해 불우한 處士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 때 영창대 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불화가 극대화되어 이를 해 소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는 방편으로 1616년 선계 유람에 몰입하였다. 또한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자신의 포부를 완전히 접게 되자, 78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정신적 지향처로 삼았던 천왕봉에 올랐다. 조선시대 士人들의 지리산 유산기를 보면, 대체로 천왕봉에 올라 登泰山而小天下의 의식을 맛보거나, 청학동을 찾아 俗塵을 蕩滌하며 仙遊를 하는 것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성여신의 「유두류산시」에는 천왕봉에 올라 등태산이소천하 를 지향하는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불우한 처사로서의 思美人, 유자로 서의 현실주의정신, 탈속적 淸新灑落의 興趣, 安貧樂道와 逍遙放曠의 志趣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을 통해 성여신이 천왕봉에 오른 이유를 추론해 보면, 불우한 처사로서의 정신적 지향을 다짐하기 위한 유람이었다고 하겠다. 성여신의 1616년 쌍계사 방면 유람은 仙趣的 傾向에 몰입하는 성향을 보인 다. 그런데 1623년 천왕봉 유람은 선취적 경향보다는 불우한 처사로서의 정신 적 지향을 더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지향은 安貧樂道와 逍遙放曠의 志 趣로 귀결된다. 이런 점에서 성여신이 1616년 쌍계사 방면을 유람하고 지은 「方丈山仙遊日記」에는 극대화된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선계를 유람하며 仙趣 에 빠져드는 儒仙的 仙趣가 두드러진 반면, 1623년에 천왕봉을 유람하고 지은 「遊頭流山詩」에는 불우한 처사로서의 안빈낙도와 소요방광의 지취를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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