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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1.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4년 1월 28일 일본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가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주장을 기술하도록 개정된 이후 검정을 통과한 일본의 모든 초·중·고 사회과 교과서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교과서보다 앞서 독도교육을 주도한 것은 시마네 현이다. 시마네현 竹島문제연구회 제3기 최종보고서에는 고등학교 일본사A/B 학습지도안 (이하, 학습지도안)이 제시되어 있다. 제2기 竹島문제연구회 활동 기간에는 지리A/B, 공민 (정치경제, 현대사회), 세계사A/B 학습지도안이 작성되었는데, 이번 학습지도안은 竹島문 제연구회 차원에서의 고등학교 독도교육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본고의 목적은 첫째, 시마네현 竹島문제연구회 제3기 최종보고서를 소재로 일본 초·중· 고 교과서의 독도기술과 시마네현 독도교육 자료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둘째, 시마네현이 실시하고 있는 독도교육 실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향후 일본 학교현장에서의 독도교육 방향을 전망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시마네현에서 작성한 일본사 학습지도안과 교과서 기술의 공통점은 첫째, 일본이 국제법에 근거하여 독도를 편입한 사실을 가르친다는 학습 목표와 논리, 근거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둘째, 독도 편입 경위를 러일전쟁과의 관련성이 아니라 강치 잡이와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고, 편입 후 시마네현이 독도에 대해 행정력을 행사하고 어업활동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마네현에서는 ‘독도는 일본 침략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땅’이라는 한국 주장에 대한 반론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시마네현에서는 교원연수, 고등학교 입학 선발 시험 문제 출제, ‘竹島의 날 주간’ 계기수업, 교과 시간 등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竹島학습 이 추진되고 있다. 시마네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독도학습과 교육 자료는 다른 지역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 행사는 역사적, 국제법적 근거와 법령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일본 교과서 기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교과서 기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청소년들의 국제이해에 교과서가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일본 교과서 독도기술과 시마네현 독도학 습은 한일 간 협력의 필요성이 커지는 현실과 역행하는 것으로 한일관계는 물론 동아시아 공생과 번영의 걸림돌이 된다. 따라서 대응방안도 이러한 차원에서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일 양국의 청소년들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독도 영유권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도록 해야 한다.
        1822.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 강씨 집안은 강희맹(姜希孟, 1424-1483)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훈구파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관각문인으로서의 재능을 꽃피운,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문 거족이다. 이 집안의 문학적 전통은 그의 조부인 강회백(姜淮伯, 1357-1402)에 서부터 시작되었는데도, 그동안 연구된 바가 없다. 삼대에 걸친 시문집인 『진산세고』에는 93제 108수가 실려 있다. 이 작품들은 강희맹이 강회백의 문집 『통정집』에서 정선한 것으로, 강회백의 대표적인 시문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대상으로 강회백의 시문학을 고찰하였다. 『진산세고』에 실린 백여 수의 시를 살펴보면 대략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고 려와 조선에 걸쳐 관료 생활을 하는 도중 지은 시, 국가적인 행사나 임무에 참 가하여 지은 시, 개인적인 소회를 읊은 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능력 있는 관료의 자질을 지닌 문인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시는 관료로서의 포부와 함께 백성과 국가에 대한 근심을 드러내기 위해 강개한 시구가 많이 쓰인다. 반면 외 교 임무를 띠거나 국가의 위상을 드러내야 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현실과는 상 관없이 공적인 임무에 맞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어를 활용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소회를 읊은 시들은 유자(儒者)로서의 깨달음에 기반한 노성한 품격을 드러낸다. 『진산세고』가 연방집(聯芳集)의 백미로 꼽히고, 강희맹으로 이어지는 관각문 인의 시초가 강회백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강회백의 시문은 연구가 할 가치 가 있다고 사료된다. 또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거치는 과정에서 유자 (儒者)로 자처한 관료들의 시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보여 주는 전범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1824.
        201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르페브르의 공간론을 교육에 적용하고자 한다. 그는 공간을 한 쪽의 관점에서만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 관점에서 공간을 조망했다. 즉 공간은 사회, 문화, 정치, 역사 등 의 복합적인 생산물이며, 또한 이러한 복합적인 공간은 다시 사회, 문화, 정치, 역사 등에 영향 을 준다. 그러므로 그의 공간은 정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변화되는 유기적 특성 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공간은 공간이라는 삶의 장을 다원화된 시각에서 조망하는 효과 가 있다. 그래서 그의 공간론은 현재 도시학, 건축학, 지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공간론은 융합교육이나 구성주의 교육에서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며 삶에 기반한 교육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공간적 실천, 공간의 재현, 재현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공간적 실천은 공간을 생산 및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공간을 지각하는 것은 공간의 생산과 그에 따른 삶을 이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문화 교과와 연계될 수 있다. 공간의 재현은 공간을 발견 및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공간을 인지하는 것은 공간에 대한 시대별, 지역별, 문화별, 국가별 특징으로 이해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리 교과와 연계될 수 있다. 다음으로 재현 공간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창 작하는 것을 말한다. 재현 공간은 공간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하고 그에 대한 반성적으로 창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 교과나 미술 교과, 음악 교과와 연계될 수 있다.
        1825.
        201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 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래 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에 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심지어 모호하다. 기본적으로, 그 런 조항은 미국헌법의 절대적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전개된 한국근대사의 혼돈 속에서, 그런 헌법조항에 근거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문제가 많았다. 특히, 한국의 보수적 복음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유동적인 정치적·종교적 환경에 따라 이 문제를 전략 적으로 다루어왔다. 이 논문은 1945년부터 2013년까지 보수적 복음주의자 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며 그것에 적응해 온 복잡한 역 사를 추적하는데 목적을 둔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에 대한 헌법의 규정과 상 관없이 기독교에 특혜를 베풀어준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그 기간 동안 미군정은 미국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서 한국개신교인 들이 다양한 정치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종교정책 면에서, 미군정은 다른 종교들을 배제한 채, 한국교회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 특혜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한국교회는 정부정책에 열정적으로 협조했다. 특히, 제1공화국에서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이자 한국개신교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이승만을 거의 맹목 적으로 지지했다. 그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의 의미를 정확히 이 해하지 못했다. 1961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은 군사독재기간을 통과했다. 그 동안, 한 국교회는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다. 즉, 군사정부를 신실하게 지지했던 보 수주의자들과 그 정부에 저항했던 진보주의자들로 말이다. 그 결과, 독재 자들은 두 진영을 정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취급했다. 예를 들어, 군사정부는 보수교회들이 ‘액스플로 74’ 같은 일련의 대규모 집회들을 개최하고 ‘전군신자화운동’ 같은 전도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후원함으로써,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런 종교적 특 혜에 대한 반응으로,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진보진영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 정권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의 경우, 군사정 권에 저항한 것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정부와 부정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진보적 정부가 남북간의 적대적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고,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기독교사립학교들의 부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한국교회는 반정부세력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진보적 정부를 종북좌파세력 으로 규정하고 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에 반대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들은 정교분리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수정했다. 그들은 이전에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종교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정치적 저항이 헌법 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정부를 위한 새로운 대통령 후보로 보다 보수적이고 친기독교적인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근에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제와 관련해서 정부와 이중적 태 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친기독교적인 이명박 정부의 강력하고 신실한 후원자들이었다. 같은 정치적·경제적 신념 에 기초해서, 그들은 이 정부를 지속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적극적 정치참여가 정교분리라는 헌법조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은 동일한 정부가 타종교들, 특히 불교와 이슬람 에 대해 우호적 조치를 취하자 강력하게 저항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정부 의 그런 태도가 기독교를 배제한 채 다른 종교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정교 분리의 원칙을 위반했다며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정부와 자신들의 관계에 따라 “정교분리”란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을 때, 그들은 “정교분리”를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 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과 정부의 관계가 불편했을 때, 그들은 그런 이 해를 뒤집고 강력한 반정부세력이 되었다. 한편, 그들이 정부로부터 우호 적 지원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런 특혜가 정교분리의 헌법적 조항을 위반 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부에 의해 차별을 받는다 고 느꼈을 때는 정부가 헌법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반정부적 투쟁에 나섰 다. 이토록, 한국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 정교분리의 관계는 복잡했다.
        1826.
        201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사형제도”를 다루는 방식은 법률적이고, 민속학적이며 사회학적인 분 야이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종교사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즉,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사형제도” 역시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음에 분명하며 이를 둘러싼 입장 역시 첨예하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신약성서에 따르면 사형제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복종과 불복 종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부에 사형제도라는 권한을 부여해주셨다 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사형제도를 거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법의 이반 (離反)이라는 전제 아래 주장하였다. 반면 신정통주의 신학자인 에밀 부룬 너는 “검, 즉 사형제도는 깨어진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신의 거룩한 진노 의 표현이며 표현이어야만 한다”고 기술했는데, 이는 완고한 이단, 어린이 들을 미혹하는 유혹자, 살인이나 신성모독자 같은 범법자들에 대해서 불과 검으로 근절시켜야 한다는 프란체스코회 설교자인 시에나의 베르나르딘 (Bernardin von Siena, 1380-1444)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종교 사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사료에 대한 언어학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국가와 정치에 대한 종교적인 관계를 묻는 것인 데, 이때 본문과 사실에 대한 종교사적인 접근이란 종교적인 언어로 환원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교회가 겪고 있는 도나투스파 논쟁에 깊이 관여하면서, 그 지도자였던 “파르메니아누스 서신 논박”(Contra epistulam Parmeniani)을 남겼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근본적으로는 살인과 같은 사형제 를 인정하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와 국가의 권위를 모독 함으로써 질서와 규정을 깨는 행위들에 대해서는 “사형제”라는 강경한 입 장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1827.
        2016.03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경주에 저준위 및 극저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영구적으로 처분하기 위한 2단계 처분시설이 표층처분시설로 건설된다. 처분시 설은 폐쇄 후 제도적 관리기간 동안에는 일반인의 부주의한 침입을 제한하지만, 제도적 관리기간 이후에는 일반인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거주 및 자원 탐사 등을 목적으로 한 인간침입 행위가 발생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침입자 에 대한 방사선 영향은 일반인에 대한 선량한도로 제한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부지 특성을 반영하여 시추 및 시 추 후 거주시나리오를 설정하고 종류 및 준위별 발생량을 고려하여 선정된 처분고내 폐기물에 대하여 평가하였다. 첫째, 시 추 및 시추 후 거주시나리오의 평가결과가 모두 규제 제한치를 만족하였다. 둘째, 평가결과 시추 후 거주시나리오가 시추시 나리오에 비해 중요한 시나리오임을 알 수 있었다. 셋째, 폐쇄 후 인간침입 시점과 침입자의 행위에 따라 침입자가 지배적으 로 영향 받는 핵종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넷째, 인간행위와 관련된 입력 자료의 민감도 분석결과 모두 규제 제한치를 만족 하였다. 특히 민감도 분석결과, 토양재분배인자에 피폭선량이 가장 민감하게 변동됨을 알 수 있었다. 다섯째, 인간침입평가 측면에서 폐기물의 바람직한 정치방안을 살펴본 결과, 폐필터 폐기물은 가능한 폐수지 및 농축폐액 폐기물보다 잡고체 폐기 물과 정치하며 폐필터 폐기물 비율을 낮추는 것이 개인최대 피폭선량을 줄이고 선량한도 대비 안전여유도를 높이기 위해서 바람직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처분시설의 개발 시 인간침입을 고려한 표층처분시설의 강건성과 심층방어를 위한 Safety Case 구축을 위하여 활용하고자 한다.
        1828.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의 고지도는 당시의 자연인식, 문화와 경제, 정치‧행정과 국방, 지명 및 지리정보 등을 총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경관텍스트이다. 이 글은 남해안 및 진주를 사례로 조선후기의 지도상에 재현된 지역경관에 관해 역사지리적인 관점으로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고지도를 지리정보의 사실적 표현 및 시간단 면의 누적이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관계의 재현물이자 해석적 텍스트로 까지 포 괄적인 스케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관이 주도하여 제작한 조선 시대의 고지도는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왕조의 정치사회적 통치 질서를 구현, 강화하는 목적과 기능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의 남해안 지도 에는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사회경제적인 비중이 시대적으로 달리 반영되어 있 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남해안이 갖는 군사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경제적인 비중의 증대로 지도 표현이 정밀해지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국토공간적 중요성 에 대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적인 인식이 달라진데 연유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진주 지도에는 위계적 산수체계의 인식, 중앙집권적 통치체계의 구현, 행정중 심지적 도로체계의 형태, 이데올로기적 교육종교경관이 재현되어 있다. 현존하 는 진주의 고지도는 대체로 18세기와 19세기에 제작되었는데, 특히 진주성도 및 군현지도첩의 지도는 지역경관의 복원 자료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1829.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선진 유가 사상을 정치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분석 함으로써 그것의 공사문제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家와 國의 영역 문제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다음 으로, 그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단순히 인간의 본성 문제로 설명되는지, 만약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그 해명 되지 않는 부분이 도덕 감정과 공동선의 상호작용임을 밝힘으로써 선진 유교의 공사관을 그림을 그려낼 것이다. 유교가 감정윤리라는 점에서 이모티비즘과 어 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차별성을 통해 유교의 감정윤리가 어떻게 공공성을 획 득할 수 있는지 해명한다.
        1830.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어계 조려가 살았던 1420년(세종 2년)부터 1489년(성종 20)까지의 기간은 조선이 유교이념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 문물이 갖추어져 가던 시기였다. 동시 에 세조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는 막강해진 훈구세력에 맞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고 지방에서 유교 교육에 힘쓴 사림세력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함안 조씨의 조려 가문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절의를 중시하고 유교 교육 에 힘썼던 조려에 의해 그 성장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조려는 함안의 원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경하여 유교경전과 문장을 익혔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요순 시대의 이상적 인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많은 유교적 지식인들과 사 귀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에 의해 단종이 강제로 쫓겨나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 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 며,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하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안 일대에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지식인들 과 교제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예속의 보급과 가문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유교적 예속의 보급을 위해 주자가례에 규정된 상제례의 실천에 솔선수범하였고, 지방 교화를 위해서 향교에 나아갔으며, 지방 수령들에 게 어진 정사를 펼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아들들이 매사에 뜻을 크게 갖고 조심 하여 호랑이처럼 이름을 떨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의 종제(從弟) 조욱(趙昱)과 함께 훈도하였다. 이에 조려의 큰 아들 조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 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동호가 안동의 이증과 같은 사림가문의 인물과 혼인한 것이 큰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아들 금호와 그 소생 역시 주로 무관으로 진출하였는데, 금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훈척가문 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훈도로 인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왜 란 때에 다수의 인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려의 후손들 은 조려의 절의를 추숭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려의 5대손 조임도는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의 내용에서 조려의 절의를 표상할 수 있음을 알았으며, 조려의 절의를 표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려의 현손 조감의 사위인 성문준의 「어계선생전(漁溪先生傳)」과 성문준 의 생질인 윤선거의 『노릉지(魯陵志)』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에 다시 조려의 절의사실이 기록되어지 고, 사림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사육신과 단 종이 복권된 것을 계기로 조려의 절의가 조야에서 재조명되고, 생육신으로 받 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831.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 중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하학론(下學論)’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당대 퇴계 등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하학 (下學)’을 강조했다. 그는 하학이 유학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측 면에서 하학을 경시했던 당시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 의 ‘하학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유학에 있어 하학이 가지는 위치를 먼저 검토했다. ‘하학’은 유학을 도가나 불가 등 다른 사상과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선진 유학에서부터 이어져온 중요한 전통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유학 의 본질은 하학에 있다고 보았으며, 하학(下學)의 대상인 현실세계를 떠나지 않 았다. 유학자들은 세속에서 상달하고 도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속에서 상 달의 성스러움을 실현하려고 했다. 불교나 도교는 상달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유학과 비슷하지만, 하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학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학은 정치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하학은 유학자를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며, 하학의 세계에 대한 걱정 은 바로 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학의 하학전통을 잘 이해한 사람이 조선 중기 남명 조식이다. 남명 에게 ‘하학’은 단순한 공부상의 절차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의 사상에 있어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명에게 현실을 떠난 학 문은 실(實)이 아닌 헛됨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유학의 경세(經世)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남명사상의 특징 중 하나인 실천성과 경세성 등을 이런 ‘유학의 하학전통’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남명의 하학론을 단순한 학 문적 단계로서가 아니라 유학의 주요한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의사상(敬義思想)이나 출처관(出處觀) 등 남명의 주요 사상에 있어서도 그의 하학론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고, 그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1832.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역사교과서는 사람들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역사교과서 편찬은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토대 위에서 표준과정과 심의과정을 체계적으로 운영 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대내외 정치적 문제 때문에 독도를 포함한 과거 역사를 사실과 다른 역사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일본은 2014년 기존 교과서에서 독도가 부분적으로 기술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과서에 들어갈 내용을 해설서에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일본은 2015 년 독도와 관련하여 일본의 고유영토, 1905년 시마네현의 편입, 1954년 한국의 불법점거, 국제사법재판소의 평화적 해결 등의 내용을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대폭적으로 강화 되었다. 일본은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검정을 통해서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독도 교육을 전면적으로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독도를 영토문제로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 역사문제로 전면적으로 확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일본의 사회과 교과서는 동북아의 평화적 미래보다는 아베정권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 일본은 독도와 관련하여 초등학교에서 시각적인 측면, 중·고등학교에서 논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일본은 주로 근현대사 위주의 독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고등학교 지리와 공민 교과서에 독도를 영토문제로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서, 현재 역사 교과서에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독도 교육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한국은 독도와 관련하여 초·중·고등학교에서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한국은 주로 전근대와 근대사 중심의 독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 사회과 교과서는 독도에 관한 국제법적 측면, 논리적인 측면에 대한 보강이 필요하다. 향후 한국의 사회과 교과서는 근현대 일본이 동북아의 역사 갈등을 유도했다는 서술이 필요하다. 또한 한중일의 근현대 역사 교과서의 공통편찬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럽과 달리 동북아의 역사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33.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81년 비엔나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1784년에 돌연 프리메 이슨 회원이 되었다. 그즈음은 프리메이슨 운동이 비엔나에서 아주 부흥하던 때라, 많은 사회 인사 들이 이 종교 철학적인 성향의 비밀결사모임에 몰려들던 때였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음악 후원자들을 모으기 위한 처세술 중 하나였다고도 해석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날이 세를 불려가는 이 운동에 요제프 2세가 급제동을 걸며 1785년에 칙령을 선포하자, 정치 사회적인 불이익 을 우려한 많은 사람들이 급물살을 타듯 이 단체를 빠져 나갈 때에도 모차르트는 여전히 프리메이 슨으로 머물렀고, 그렇게 그의 삶 마지막까지 지조를 지켰다. 오히려 그는 그의 대표적인 프리메이 슨 오페라 《마술피리》 외에도 적지 않은 프리메이슨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자신의 지부뿐만이 아 니라 다른 지부의 모임에까지 정기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열성이었고, 심지어 비록 불발로 그쳤지만 새로운 지부의 결성까지 계획할 정도로 이 운동에 대한 소신을 보여주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모차르트에게서 프리메이슨이 갖는 주요 의미를 그의 시기 비엔나의 프리메이슨이 어떤 단체였고, 주창하는 사상은 무엇이었으며, 왜 가입하였는지, 어떤 정도에서 삶과 음악에 구심점이 되어주었는 지, 나아가 그의 음악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면서 확인하였다.
        1834.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적정기술이란 한 공동체의 문화․정치․환경적인 면들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술이며 문화적정기술은 문화적인 측면이 강조 된 의미이다. 문화적정기술의 측면에서의 마을가꾸기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며 현지의 자원을 활용하고 지속가능한 관점 에서의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본 연구에서는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에 위치한 군둔마을 가꾸기에 있어서 문화 적정기술의 적용점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문헌고찰과 제안연구로 이루어져있다. 문헌고찰을 통해 문화적정기술 의 개념과 문화적정기술을 활용한 마을가꾸기 기법을 고찰하였다. 문헌연구에서 도출된 문화적정개발기법들을 반영하여 실제 사례인 군산 군둔마을 가꾸기 개발에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기법들의 적용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를 통 해 첫째, 군둔마을의 지역적 특성을 알아보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광자원화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둘째, 지역민 중심의 개발이 되기 위하여 현지의 자연, 농업자원, 기반시설, 인적자원을 활용하되 그 방법에 있어서 단순한 개발구조와 디자인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셋째, 지속가능한 관점에서의 개발을 위해, 마을의 경제적 수익모델을 창출하고, 지역민의 의 식과 역량을 꾸준히 개발하도록 지원하며, 자생적 마을과 계획도시가 연계되고 공존하도록 하되, 정주환경을 보호할 것을 제안하였다.
        1835.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The Abingdon Bible Commentary(1929)에 나타난 주요 신학사 상을 고찰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주석서는 신학적으로나 교회 정치적 으로나 혼란스럽던 시기에 번역되어 1935년에 발행되었으며, 장로교 총회 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單券聖經註釋은 총 다섯 편으로 편성되었는데 제1편에는 “聖經 全體 에 對한 論文”, 제2편에는 “舊約全書에 對한 論文”, 제3편에는 “舊約全書 註釋”, 제4편에는 “新約에 對한 論文”, 제5편에는 “新約全書註釋”이 실려 있다. 개혁주의 신학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이 주석서의 주요 난제는 신학적으로 성경 고등비평과 문서설에 입각하여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주석서에는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논리 가 명백하게 전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單券聖經註釋의 신학적인 문제들을 분석한 학적 작업은 수행되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는 單券聖經註釋을 고찰함에 있어 당시 논란의 핵심이었 던 ‘기적들’과 ‘그리스도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기적들’에 대한 관점에서는 천지창조 사역, 노아의 대홍수, 애굽 십재앙과 홍해도하, 오병이어 기적 등에 대해 고찰했다.둘째, ‘그리스도론’에 대한 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선재성, 양자론, 그리 스도의 인성의 무죄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메시야 자의식, 그리스도 의 죽으심(죄의 전가)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양식 등에 대해 고찰했다.
        1836.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
        1837.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스크랜튼은 기숙제 학교인 이화 학당과 보구여관이라는 여성 전용 병원 그리고 공옥여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여자매일학교를 세우고 여성교회와 부인성경학교를 세워 여성을 교육하고 여성지도력을 개발했다. 이것은 여 성교육 활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화기의 한국 여성들에게 ‘여성의 공간’ 의 창출이었고, ‘여성 주의’ 의식의 개발이기도 했다. 특별히 그녀가 설립 한 이 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었던 이화 학당은 스크랜튼이 뿌린 ‘여성주의’ 의식이 싹을 틔우고 태동하는 중요한 묘판이 되었다. 이화학당 이라는 기독교적 여성 고등 교육 시설 안에서 개화기 한국 여성들은 사물 을 규정하고 명명하며 자신과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여성주의 의식’에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자기의식을 현실화하여 당당한 사 회적 전문인으로서 혹은 민족 독립 운동가라는 정치적 주체로서 자립해 가 게 되었다. 이화라는 공간 안에서 여성들은 무지로부터 해방되었고 가정이 라는 공간에서 해방되었고, 아내, 딸, 어머니라는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해 방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여성을 자신의 삶과 역사의 주체로 세우고 사회적 존재로 확장해 가는 의식해방을 이루었던 것이다. 개화기 이화학당에서 태동된 ‘여성주의’ 의식이 가부장제적 성적 위계질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나, 개화기의 ‘여성주 의’ 의식은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의식이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저변을 이룬 우리 나라 ‘초기 여성주의’로서의 의의가 크다. 그러한 의미에서 스크랜튼은 이 나라 여성 교육의 개척자임과 동시에 ‘여 성주의’ 의식의 개척자이자 여성 운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38.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근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셰커 교도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며 정직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였는데, 생활 에 필요한 제품들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했다. 순수한 기능만을 추구하며 장식이 없는 기능을 위주로 제품을 생산 사용하였 다. 종교적인 내용을 제외하자면 합목적성에 초점을 맞춘 기능주의를 추구했다 할 수 있다. 기능주의는 제품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기능을 중심으로 생산과정과 사용편리성에 중심을 맞추어 디자인, 설계, 생산이 이루어진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기능주의는 상업성과 합리주의를 표방하며 발전했으나, 그 바탕에는 인간을 생각하는 휴머니즘 과 공리주의가 영향을 주었다. 단순히 사용자의 편리함과 정신적 만족감만을 고려한 것이 아닌 생산자의 노동환경 역시 고 려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의 바탕은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데스틸, 독일공작연맹, 바우하우스, 브라운사 로 이어져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기능주의가 사용된 의도, 목적, 시 도했던 각각의 요소들을 그들만의 방법으로 발전시키며 제품 본연의 합목적성에 맞도록 발전되었다.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기능주의 형식으로 발전되었다.
        1839.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모든 부는 불의한 부, 즉 불공평한 부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그것 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한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다른 사 람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풍부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이 인용문은 부의 불공평한 분배가 불의하다는 관념 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정의는 동등을 함축한다”는 명제로 요 약될 수 있는 토마스 정의론의 핵심적인 관념에 속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토마스의 정의론에 비추어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용되어 온 심각한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은 부정의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 인다. 본고는 현대자본주의의 경제 질서가 양산해 온 불평등 문제를 재평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적 준거점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론을 고 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본고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타난 정의론을 사적 소유권의 한계와 빈민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어 철저 한 원전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한다. 이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 을 밝힌다. 토마스는 외적 사물의 관리와 분배에 있어서 효율성, 질서, 평 화를 이유로 사적 소유가 허용됨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외적 사물의 사용에 있어서는 공적 소유를 주장하며, 사적 소유권에 우선하는 자연법의 규정에 근거하여 사적 소유권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즉 사적 소유권은 생 존에 필요한 것이 결핍된 빈민의 자기보존이라는 자연권에 종속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법에 토대를 둔 소유권 이해에 따라 토마스는 빈 민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부의 불평등 문제에 접근한다. 본고의 연구결과는 토마스의 정의론에 따른 소유권 이해가 무한한 재산 의 축적을 정의로운 것으로 본 현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전제를 윤리적 으로 재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1840.
        2015.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화학비료 소비량이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왔고, 인산을 생산할 때 인광석 분쇄하여 황산으로 처리하는 습식 인산비료제조시설에서 폐인산석고가 다량 발생되었다. 이때 발생된 인산석고는 일부 재활용되고 있지만 재활용량이 많지 않아서 공장 인근 적치장에 장기간 적치되어 인산석고 적치장의 유지관리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있다. 특히 폭우와 같은 기상재해로 인산석고가 환경 중으로 유출될 경우 환경 오염이 우려되며, 폐기물관리법 상 인산석고의 해안지역 성토재, 도로기층재, 복토재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으나 실제 재활용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인산석고의 재활용용도 확대를 위해 해안매립지역 염분 토양 개량제로서 인산석고의 일반 토양 복토높이 축소와 안전한 재활용을 위해 환경성 평가연구를 수행하였다. 폐인산석고는 인산석고 적치장에서 충분히 혼합하여 건조한 다음 맨 아래층에 해안준설토를 포설하고 그 위에 일반토양 충진컬럼(대조시료)과 일반토양과의 층별 혼합하여 충진한 컬럼(대상시료)실험을 수행하였다. 토양의 수분함량을 고려하여 증류수를 살포하고 2주정도 정치하여 안정화 기간을 거쳤다. 조사대상지역의 연평균강수량을 토대로 월간, 주간 평균 강수량과 Lysimeter 단면적을 기초로 산정하였고, 증류수(계산된 강수량)를 주 1회 살포하였다. 조사항목은 pH, 전기전도도, 중금속류(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비소 등 유해물질), 이온물질(불소이온, 질산성질소이온, 염소이온, 황산염이온 등)을 폐기물공정시험기준, 토양오염공정시험기준을 참고하여 토양 깊이 별로 시료를 채취한 후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대조시료에 비해 조사대상 시료 컬럼의 나트륨 농도는 인산석고층 상부로 올라갈수록 염분농도가 낮아졌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트륨 농도가 더 낮아질 것으로 판단된다. 비소, 납, 카드뮴, 구리 등 유해중금속 농도는 폐기물관리법 유해물질 기준이하로 나타났다. 최상층 일반토양복토 깊이는 토지이용 및 식재되는 식물 종에 따라 0.5 ~ 1.5m 이하, 또는 나무식재 주변에 한해서 적용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