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485

        341.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隱 權平鉉은 19세기 끄트머리인 1897년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인 1969년까지 살면서 평생 한문지식인으로 자처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고 다시 한국전쟁을 겪는 그야말로 평안한 날이 없는 날들이었다. 또한 그가 학문에 입문할 시기는 한문폐지론이 일었고, 儒學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문-유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선택했고, 栗谷 李珥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특히 율곡의 四七說에 대한 독실한 믿음은 그와 다른 그 어떤 논의도 수용하지 않았다. 화은의 삶과 학문은 주변이나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 바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간 그의 강인한 정신의 징표이다. 그는 성현의 도를 지키는 것이 시대 변화를 追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과거의 문자와 학문으로 전락한 한문과 유학이지만 거기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답이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예컨대 陰이 가득하면 반드시 陽이 다시 차오르는 이치와 같이 조국의 광복도 그런 이치 속에 이루어질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학문적 태도를 時宜라는 점에서 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 하지만 철저하게 성현의 말씀을 따르고 체현하려 노력했던 20세기 마지막 유학자의 모습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행동을 바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342.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늘날 소비자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성격이나 품질 그리고 가격 보다는 제품과 처음 마주하는 순간에 지각되는 감정(인상)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상의 비물질적 기능에 대한 연구를 통해 디자인이 단지 유용성, 실용성 또는 단순한 미학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확장된 차원에서의 가치교환 체계이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매개적 대상임이 입증되고 되고 있다. 더불어 산업사회의 기술적 성과로 간주하는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현란하게 재현되는 시지각적 이미지 자극에 노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기능 중심의 마케팅과 시장 형성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문헌을 중심으로 이미지가 사회·문화적 가치를 매개하는 대상으로서 그에 대한 정의를 확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이미지와 디자인이 추구해야할 방향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2장에서는 이미지, 매개수단, 매체로서의 디자인을 탐구하였으며, 제 3장에서는 21세기 디자인을 “인식과 감각 자료적 대상으로서의 이미지”, “심미적 체험과 이미지”, “우상 숭배와 이미지”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읽는 정보로서의 아니라 느끼고 지각하는 이미지로서의 디자인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미지로서의 디자인의 실체(實體)와 향후 디자인이 추구해야할 지향점(指向點)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를 통해 21세기 디자인이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술로서 나아갈 길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343.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늘날 21세기 산업 디자인환경에서의 기술은 디자인의 가치, 기업의 정체성 그리고 시장에서의 경쟁관계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핀버그의 주장대로 기술이 인간의 삶 모든 부분에서 의심 없이 수용되는 문화지평(cultural horizon)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기술은 곧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내지는 권력을 의미하며, 기술에 대한 믿음은 종교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완성된 기술로 인해 사회·경제·문화 그리고 지역적 불균형과 노동현장에서 종속관계가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기계와 기술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반성적 요구와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위한 인식적 사고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본 연구는 산업디자인에서 요구되는 핵심 요소인 기술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위해 제2 단원에서는 기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추구하는 앤드류 핀버그의 기술철학을 중심으로 기술이 수반되는 디자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고민하고자 하였다. 또한 논지(論旨)를 전개하기 위해 핀버그의 기술 철학을 구성하는 기술비판주의, 구성주의, 기술 헤게모니 그리고 기술 민주화의 개념을 파악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제3 단원에서는 21세기 산업디자인이 추구해야할 기술적 경계와 그를 위한 인식적 사고의 내용과 범위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344.
        2018.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 개신교의 초기 출판은 동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 역사가 가장 깊은 중국의 출판물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 뿐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계도 일본 출판계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국 기독교 출판계의 영향력은 한반도에서 서서히 약화되어 갔으며, 「구미 → 중국 → 일본 → 한국」이라는 근대 기독교 출판계의 영향 구조가 「구미 + 일본 → 한국」이라는 도식으로 변화해 갔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구미 → 한국」이라는 구조로 재편 되면서, 나름의 주체적 기독교 출판의 역량 확보를 도모해가게 된다. 일제하 한국 기독교 출판은 그러한 한계들과 미숙함 속에서도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창출신학이 움트는 모판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감당했으며, 해방 이후 현대 한국교회의 역동적인 신학담론과 저술들이 출판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345.
        2018.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마리 당티에르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대격변의 시기에 자신이 옳다 고 믿는 진리를 온몸으로 외치며 살았던 평신도 여성 개혁자였다. 마리는 한편으로는 오직 성서의 원리에 근거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실천을 비판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대안으로 제시한 종교개혁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만인제사장 원리에 기초하여 남성중심적인 기존 질 서에 대항한 여성 권리의 옹호론자로 아마도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이 마리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여성 권리를 옹호하는 “이중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필자는 먼저 마리 당티에르가 활동했던 16세기 제네바의 역사적 상황을 개관할 것이다. 당시의 제네바의 역사적 맥락을 아는 것은 마리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필자는 마리의 대표적 저술인 『편지』에 주목할 것이다. 『편지』의 배경, 내용, 중심사상 등을 살펴보면서 마리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인 동시에 페미니스트였음을 논증할 것이다. 또한 제네바의 대표적 개혁자였던 칼뱅과 마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마리 당티에르라는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그동안 묻혀 있던 16세기 여성 개혁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종교 개혁을 보다 온전하고 균형 있게 해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346.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天主歌辭와 反天主歌辭인 闢衛歌辭를 대상으로 가사 작품의 어조와 서술 방식을 분석하여 조선조 후기 가사의 흐름을 살피고자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당하기 이전의 작품들이기에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처절한 절규나 교리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깨우치기보다는 천주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내용을 유교의 이념과 덕목에 견주어서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 사회는 성리학이 지닌 모순을 뛰어넘기 위한 대안으로 실학을 등장시켰으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학과 과학 문명은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조선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민중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보통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조선조 후기에 모습을 드러낸 종교가사로서의 천주가사는 가사문학의 하위갈래이며, 가사라는 양식을 문학적 토양으로 하여 창작되었다. 18세기말 조선이라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낯선 사상이 낯익은 노래 양식과 만나서 내용상으로는 논증의 과정을 거치며 창작된 것이 18세기 말의 天主歌辭와 闢衛歌辭 작품이다. 이들 가사 작품은 작가 자신이 겪은 체험을 불러내어 새로운 공감의 장을 만들기도 하고 나누기도 했다. 문화 융합의 관점에서 볼 때, 천주가사가 지닌 내용들은 노래를 통해서 독자나 청자에게 체험을 나누며 긴장과 일치를 느끼게 하는 역할까지도 해내고 있다.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짧은 노래로 전하려 했던 「天主恭敬歌」와 구약성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토착 언어와 서민들의 일상을 바탕으로 표현했던 「十誡命歌」, 「天主恭敬歌」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지었던 「警世歌」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조선 후기 가사 작품의 본질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또한, 闢邪衛正을 주장하며 五倫歌의 짜임에 따라 조목조목 천주교의 가르침을 비판했던 「尋眞曲」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철학적 사유의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나갔던 「浪遊司」는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금수만도 못한 천주교의 도리를 비판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주가사는 유학자들의 미의식이 반영되었던 사대부 가사가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생각과 이념을 천주로 대체하여 전통 양식에 새로운 종교적 가치와 이념을 담은 문학작품이다. 가사작품의 어조와 서술방식을 분석하면서 얻은 결과는 시가문학의 본질이자 가사의 본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공유되고 확장되었느냐하는 데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347.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국가에서는 조선초기부터 도성 내외와 연해지역에 禁山을 설정하고 禁松정책을 취했다. 한편 민간이 山林을 사적으로 점유해 이용하는 것도 허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에게는 그 기회가 별로 없었고, 그 대상은 주로 양반층이었다. 국가의 禁山정책에도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에게도 수목 채취를 어느 정도 보장하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숙종 21년 당시 민간에서 시행되고 있던 禁松契를 참조해 마을마다 금송계를 만들어 스스로 금송활동을 하게 하는 조치를 충청도에 시험적으로 시행해 보기도 하지만, 이후 국가에서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시행하는 조치는 없었다. 다만 조정에서 여러 차례 논의가 이루어져 금송계 문제가 부각되고, 또 일부 관리들이 작성한 牧民書에 이런 방안이 소개되면서, 금송계가 전국적으로 점차 확산된 것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을마다 금양의 경계가 지워져 마을 단위로 禁養하고 採樵하는 관행이 점차 일반화되어 간다. 이런 추세 속에서 禁養權과 그 경계를 둘러싸고 양반층과 사찰, 그리고 금양처를 새롭게 마련해 가던 마을 간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 이런 갈등 상황에 직면하여 양반층은 마을과 연대하여 금송계를 결성·활용하는 방법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런 금송계는 사족이 주도하면서도 주민이 함께 화합하고 채초문제를 잘 해결해 가려는 것이었지만, 일부 금송계에서는 양반층의 입지가 약화되고 서민들의 입지가 강화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금양경계를 둘러싼 마을 간의 다툼도 적지 않았다. 산송이 계속되면서 관에서는 애매했던 경계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소송 당사자 간의 권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조정하고 구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처럼 사족, 사찰, 마을 간에 금양권과 그 경계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산림 중에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공한지가 있었다거나, 또 금양경계가 분명하게 처리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에서도 연유한 것 같다. 또 금양처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여 생존권 차원에서 다른 마을과 채초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마을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금양권 확보를 위한 마을 간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348.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의 목적은 19세기에 조선정부가 울릉도 통치의 일환으로 실시한 울릉도 수토 연도에 관하여 기존 연구의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재정리하고, 새로 확인된 수토 사실들을 보고하여 목록에 추가하며, 향후 수토 연구의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기존의 수토 연도 목록을 검토하여 수토 연도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한 9개의 연도를 목록에서 삭제하고, 새로 확인한 1849년 이규상의 수토, 1853년 석충선의 수토, 1855년 이원명의 수토, 1873년 월송만호의 수토, 1879년 월송만호의 수토, 1883년 안영식의 수토 등은 목록에 추가하였다. 19세기 울릉도 수토는 약간의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가 영토관리 차원에서 수토제를 통하여 울릉도를 잘 다스려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울릉도 수토 연구의 방향은 이양선 및 표류 관련 연구와 연계하여 수토 연구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다양하고 많은 수의 수토 사례와 연관시켜 연구함으로써 조선 정부의 통치행위로서 수토의 전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349.
        2017.10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Brain MRI 검사에서는 영상을 얻기 위해 RF Pulse를 인체에 조사하게 되는데 이때 조사된 RF Pulse 에너 지의 상당 부분은 우리 몸에 그대로 흡수되게 되고 이로 인해 인체 온도가 상승하게 되는데 노출 정도에 따라 인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RF Pulse 에너지는 MRI 장비의 발전으로 인해 자기장의 세기가 1.5 Tesla에서 3 Tesla, 3 Tesla에서 7 Tesla로 높아지는 시점에서 자기장의 세기 변화에 따른 두부 전체의 SAR 와 온도의 변화를 알아보고 위의 결과가 치아 임플란트 사용 여부에 따른 결과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연 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실험은 인체 두부 모델에 1.5 Tesla MRI 장비에서 발생되는 64 MHz RF Pulse 주파수, 3.0 Tesla MRI 장비 에서 발생되는 128 MHz RF Pulse 주파수, 7 Tesla MRI 장비에서 발생되는 298 MHz RF Pulse 주파수를 조 사하고 위의 실험을 치아 임플란트를 사용하였을 때와 사용하지 않았을 때로 나누어 XFDTD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머리 주변의 SAR와 체온의 변화를 각각 실험하였다. 치아 임플란트를 하지 않았을 때보다 치아 임플란트를 하였을 때 SAR값은 7T의 RF Pulse 주파수 256MH z에서 최대 약 5800배의 차이를 나타냈으며 주파수가 증가할수록 치아 임플란트 사용으로 인한 SAR값의 차이는 크게 나타났다. 치아 임플란트를 하지 않았을 때보다 치아 임플란트를 하였을 때 두부전체의 온도 변화는 2배에서 최대 4배 가까운 온도 상승을 나타내었다. 또한 RF Pulse 주파수가 증가할수록 SAR값은 증 가하지만, 두부 전체의 온도는 감소하였는데 이는 주파수가 증가할수록 파장이 작을수록 인체표면에 흡수 되는 양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향후 치아 임플란트 유무와 RF Pulse 주파수의 세기 변화로 인한 이상 반응 요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 체의 생리적 연구와 생화학적 연구 등 인체에 대한 영향과 관련하여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350.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세기까지 금강산을 유람한 인물은 모두 32명이며, 이들이 남긴 유람록 작품은 모두 37편이다. 이들이 금강산을 유람한 유람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금강산을 찾아가는 유람 경로, 금강 산을 유람하는 과정의 유람 경로,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유람 경로이다. 여기에서 다시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는 내산에서 유람 을 시작하는 경우와 외산에서 유람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비로 봉을 등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17세기까지 금강산 유람록에 나타난 금강산 유람 경로의 특징은 다 섯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람 인물은 한양, 근기지역 중심이었다는 점이며, 둘째 금강산 유람은 주로 내산 중심이었다는 점 이고, 셋째 금강산 유람지의 명칭이 변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 유람객들의 숙식처는 사찰이었으며, 금강산 내에서의 경로는 주로 승 려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며, 다섯째 유람 기일에 따라 유람의 경로와 일정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들은 오늘날과 비교해 보았을 때 후대로 갈수록 다른 양상 으로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금강산 유람 인물이 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게 되고, 외산 쪽으로 새로운 유람 경로 가 등장하게 되며, 오늘날 사용하는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의 용어 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등장하게 되리란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 고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도 점차적으로 다양화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51.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늘날 산업디자인은 기능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싸여 논란과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계몽으로부터 시작된 이성주의 와 합리주의에 의해 발전한 과학과 기술은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다양한 분야에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환경파괴는 생산과 소비를 위축시켰으며 인공기능(AI) 와 같은 기술적 진보에 의해 차이가 인정되는 다양성의 개념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아도르노가 주장하였던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산업은 수익을 독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매력적인 상품을 요구하고 있다. 21세기 디자인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마케팅과 심미적 내용보다 외형적 가상 즉 이미지에 몰두함으로써 대중들의 삶의 질 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디자인과 사회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의 실체에 대한 탐구가 요구되고 있 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1944)”에서 언급 되었던 “관 리되는 사회”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산업과 예술, 예술과 디자인 그리고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를 규명하였다. 이를 통해 21세기 산업디자인이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고 앞으로 지향해야할 철학적 관점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352.
        2017.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성화상 논쟁에 대하여 역사(historiography)와 사상(philosophy and methodology)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동시에 다룬 연구이다. 이러한 점 에서 성화상 논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차별되는 독특성을 띠고 있다. 본 연구는 ‘이미지 이데올로기(image ideology)’ 측면에서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하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화상 논쟁에 관한 연구는 논쟁 발단의 외면적 요인을 중점적으로 다룬 반면, 본 논문은 그 내면적 요인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췄다. 연구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이미지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여 해석의 툴(tool)로 사용하였다. ‘이미지 이데올로기’는 이 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와 ‘이 미지의 이미지’의 속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as an attribute of image of image)를 동시에 지닌 해석체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지가 본 래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이미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성화상 논쟁의 발단 원인을 조명해 본 결 과,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은 성화상 파괴를 주도하였던 황제 레오 3세(Leo Ⅲ, 717-41 재위)와 성화상 숭배를 옹호하였던 교황 그레고 리우스 2세(Gregorius Ⅱ, 715-31 재위)간의 이미지 이데올로기 충돌로 인해 발생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레오 3세는 ‘황제-교황주의’를, 그레고리우스 2세 는 ‘교황-황제주의’ 라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성화상(icon)이라는 이미지를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8세기 비잔틴 시대의 성화상 논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이 미지 담론은 오늘날에 이르러 단순히 신학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정치, 경 제, 사회, 문화, 예술, 사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거 대담론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이미지의 속성이라는 본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 황에서 본 논문이 이론적으로는 성화상 논쟁 연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하고, 정책적으로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미지 이데올로기에 대 한 경각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53.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7세기에 활동했던 林眞怤(1586-1657)의 학자적 삶을 분석한 것이며, 궁 극적으로는 조선후기 南冥學派의 다양성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그 다양성 이란 강우 남명학파권에 지역적 연고를 두고 曺植 및 그 문인들과 일정한 학연을 맺 으면 기계적으로 남명학파의 범주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임진부를 양성한 학문적 물줄기 속에 남명학파적 요소가 충만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삶과 학문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는 조식을 매우 흠모 했고, 南冥學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평생을 부심하면서도 뇌리 한 편에는 항상 李滉 을 담아두고 있었다. 임진부는 남명학과 退溪學의 절충을 모색하고 있었고, 퇴계학 이 절충의 종속 요소가 아니라는데 중요성이 있다. 순혈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남 명학파 연구에 있어 임진부의 존재는 향후 연구의 새로운 시각으로서 깊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354.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19세기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을 기독교사상 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다른 이름인 문화-프로테스탄 티즘은 기독교 신학을 철학화하여 정통주의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신학사 조를 말한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등장한 합리적 회의주의로 인해 기독교 신앙이 도전을 받게 되자 그에 대한 학문적 응전이 필요했는데, 문화-프로 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에 기초해서 그 과제를 해결하 려 했다. 특별히 인간의 선의지로 실현할 윤리적 하나님 나라에 기초해 종 말론을 내재적,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에서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은 근 대 이성철학의 낙관주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주 요 학자인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과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와 문화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낙관적 종말론을 확립하였다. 이와 함께 근대 진보적 낙관주의에 영향을 받아 세속적 유토피아의 실현을 하나님 나 라와 일치시킴으로써 기독교 종말론의 낙관적 이해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 이 종말론에 대한 낙관적 이해는 재림의 지연에 따른 성서적 종말론의 딜 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학적 원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성철학에 기초한 근대 계몽주의적 진보주의가 실패 한 상황에서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 역시 사상적으로 도전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기독교는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이 실패한 자 리에서 새로운 신학적 종말론을 모색하면서 다양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결 과적으로 19세기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낙관적 종말론은 변증법적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355.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에서는 역사적 정보에 근거한 분석을 통해 19세기 당시 사변적 음악이론이 작곡실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논의된다. 이를 위해 브람스와 실제 교류가 있었던 하우프트만, 리만 등의 음악학자들의 이론과 사상이 소개되고 이와 관련된 브람스의 작품의 예들을 살펴본다. 이 연구 과정을 통하여 이론적 사상이 작곡가에게 미학적으로 어떻게 수용되고 음악작품 창작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규명된다. 브람스의 클라리넷 소나타 제1번 op. 120-1을 비롯한 후기 음악작품에서 화성의 본질을 다루는 이원론적·대칭적 사상, 변증법적 과정에 의해형성된 연속 3도 사슬, 장3화음과 단3화음의 동등성 등이 작곡기법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연구된다. 또한 당시 미학적·음향학적 쟁점이었으나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 현재까지도 묻혀 있던, 배음과 거울관계에 있는 하배음의 속성과 관련된 작곡 기법을 살펴본다. 이연구는 다양한 거울 구조와 기법으로 이루어진 브람스의 작품의 내용을 당시 사변적 음악이론이라는 거울로 들여다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356.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논문의 목적은 요안네스 카시아누스의 『제도집』과 『담화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철저하고 자발적인 부의 포기와 가난의 지속’이라는 주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반복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다. 카시아누스는 5세기 초 남부 갈리아 지역에서 수도사로 활동했고 『제 도집』과 『담화집』을 수도문헌으로 남겼다. 두 권의 수도문헌은 전통적으로 이집트와 동방의 수도생활을 서방, 특별히 갈리아 지역의 수도사들에게 전 할 목적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카시아누스의 수도문헌에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주제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카시아누스 연구가들은 그동안 가난의 주제 뿐 아니라 그것이 강조 되는 이유와 배경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연구논문은 카시아누스의 가난에 대한 강조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서 먼저 『제도집』과 『담화집』에서 가난에 대한 강조가 어떻게 나타나
        357.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밀리터리 위장 패턴은 적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군복과 장비에 쓰인 일종의 보호색과 같은 특유의 패턴을 말한다. 세계대전 이후 밀리터리 룩은 때로는 저항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때로는 개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감성표현으로 스트리트 패션과 캐주얼웨어에 적용되었으며, 창조적인 패션을 선도하는 유명디자이너의 작품에서 새로운 스타일로 창조되었다. 최근 밀리터리 스타일이 새로운 패션 트렌드로서 소비자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밀리터리 위장 패턴에 대한 관심도 동반 상승하며, 다양한 패션제품에 밀리터리 위장 패턴이 활용되어지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여 다양한 패턴디자인의 정보원으로서 패션에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밀리터리 위장 패턴디자인에 관한 유형파악에 목적을 둔다. 그러므로 연구는 밀리터리 위장 패턴에 관한 개념과 발생, 밀리터리 위장 패턴을 활용한 밀리터리 패션에 관하여 고찰하였으며, 군에서 사용된 위장 패턴과 밀리터리 위장패턴 디자인의 유형과 특징을 파악해 보았다. 아울러 본 연구를 통해 밀리터리 위장 패턴 활용 시, 패턴디자인에 대한 정보지식을 개괄적으로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358.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루터의 죽음관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루터의 죽음관이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은 루터가 죽음의 문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그의 핵심적 개혁 사상을 가지고 풀이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루터는 이 개혁 사상에 의거하여 중세 구원론과 종교적 관행에 불가결한 요소였던 연옥 사상을 결국 거부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관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두 종류 의 죽음―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인생 중에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과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죽음―을 이야기한 다. 전자의 죽음은 후자의 죽음의 형태와 그 이후 누리게 될 부활과 영생 의 불가피한 조건이 되는 만큼 루터의 죽음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이 두 형태의 죽음은 두 형태의 부활 과 연결된다. 루터는 죽음 이후 불멸하는 영혼이 즉각적으로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옮겨진다는 중세 후기 교리 대신 부활 때까지 죽음은 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잠으로서의 이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첫 번째 창조 때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두 번째 창조를 위한 중간과정이라는 점에서 두렵고 끔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 의 영원한 삶을 위해 거쳐야 할 꼭 필요한 통과의례가 되며 이 세상에서 겪은 모든 죄와 죽음과 악과의 싸움에 대한 최후 승리를 의미한다.
        359.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Aerosols play the important role as scatter or absorb solar radiation, which consequently modies the radiative balance of the atmosphere. Aerosol and its eects, especially its indirect eects, on climate have drawn increasing attention in recent years. Understanding of interactions of aerosols and climate is important to better prediction of future climate change. In this study, the direct and indirect effect of fossil fuel organic carbon aerosol (OC) and its impacts on the climate during the period of the early of 20th century (1901~1920) and the end of 20th century (1986~2005) were investigated. we examine changes in aerosol emission during 20th century. Using HadGEM2-AO (Hadley Centre Global Environmental Model version 2, Atmosphere and Ocean), historical experiments are carried out with and without anthropogenic aerosol emissions (HIST, FIXA) from 1860 to 2005. Fossil fuel organic carbon aerosol (OCFF) emission xed at 1860 is added. Due to the large emission of OC, thick optical depth of the OC appears over Asia, western Europe and eastern north America. e direct eect due to increasing OC influences negative radiative effect at the surface, which leads to a cooling effect on the surface. The OC shows direct eect and indirect eect as well. e variation of total amount of clouds are aected by the OC aerosols emission.
        360.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 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 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 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 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