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the body and clothing of Jesus Christ are represented in the Russian Transfiguration of Christ icons of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nd why it is considered to have established a distinct Russian iconography free from Byzantine influence. The study analyzes the Russian icons comparing them with their Byzantine prototypes to identify the distinctive ‘Russianness’ of the representation. The research methods comprise a qualitative analysis of the literature on Russian Orthodoxy, Russian icons, Christian theology, and Christ’s clothing and an empirical analysis of the icons. The scope of the study is limited to Russian icons from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nd Byzantine icons from the 9th century onwards. The study found that, compared to Byzantine icons, the Russian icons exhibit a more elongated body, darker facial features, and lighter clothing. A statistical analysis using the Mann-Whitney U test further revealed that the Russian icons feature a stiffer, simpler form, more opaque material, and more defined clothing boundaries. These stylistic differences suggest that the ‘Russianness’ in the expression of Christ’s body and clothing in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icons derives from creativity, abstractness, and tradition. Rather than a simple recreation of the historical Christ or adherence to the Byzantine tradition, the Russian iconographic representation emphasizes Christ's transfiguration into a luminous form, as described in the Bible, accentuating his divine nature over his human aspects.
16세기에 제작된 초기 낙중낙외도 병풍의 고찰을 통하여 사방위와 사계절을 결합하여 표 현되는 3차원의 시공간 표현의 기원을 살펴보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사계절의 순환 을 통한 새로운 봄의 시각화는 우주 만물의 순조로운 운행과 이상향을 상징하는 주제였다. 특히 정월은 해가 바뀌고 처음으로 돌아오는 달로 새해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시 기이며, 12달 중에 예축적인 세시풍속이 가장 많이 집중된 달이었다. 이 기념비적인 병풍은 초토화된 교토를 재건하면서 도시의 번영을 기원하고 예축하는 의미를 지녔다. 초기 낙중낙 외도 병풍의 곳곳에 이들의 예축활동이 세밀하게 묘사된 것은 도시도 병풍이라는 매체가 지 닌 예축의 기능에 충실히 부합하는 선택된 화제였다고 생각된다. 16세기의 낙중낙외도 병풍에는 사방사계의 아름다움으로 장엄미를 강조하는 중세회화의 면모와 미시적이고 다양한 인간 양태의 묘사에 집중하는 근세 풍속화로의 태동이 모두 감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social and artistic aspects of the Netherlands in the 16th century, focusing on the paintings of 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 a representative Dutch painter at that time. Also analyzed were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each item of the male populace’s and nobles’ costumes at that point in the Renaissance. The results are as follows: most of the populace’s chemises do not have frills on the neckline and sleeves; the doublet has a loose body and sleeves overall; and the sleeves and armholes are fixed with sewing rather than being detachable, making the epaulet invisible. The neckline of the doublet usually does not have a collar, but it sometimes has a hood. In the case of trousers, most males are shown wearing waist-high stockings, and a piece of cord is visible. It seems that the populace’s coats were mainly Spanish-style capes. The 16th-century Dutch populace’s costumes are imitative—reflecting a desire to emulate the codpieces and hairstyles of the aristocrats—while providing individuality through hats and belts. In terms of practicality, it appears that a knife and pouch were used in various living environments. This trend can be seen as a reflection of populace’s perception of the costume at the time.
빈 미술사박물관의 중세 소장품 중 인상적인 작품의 하나는 ‘덧없음의 알레고리’를 내용으 로 하는 소위 <바니타스 그룹>이다. 세 인물이 쌍을 이룬 조각상은 젊음의 아름다움과 나이 듦의 노쇠함이 명백하게 대조를 이룬다. 노파의 몸은 처진 가슴, 주름진 얼굴 등 노화의 사실적 묘사를 통해 강조되는 반면 젊은이의 피부는 매끄럽고 팽팽하다. 서양미술사에서 노인을 소재로 다룬 경 우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1500년경 독일 남부에서 벌거벗은 노파를 소재로 한 미술품의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본 연구는 주름과 불거진 뼈 등 육체적 노쇠함의 징후를 강조하는 ‘추한 여성’을 주제로 다룬다. <바니타스 그룹>과 같은 조각상의 유행과 의미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관계가 깊다. ‘추한 여성’을 다룬 작품이 당대 지식인과 인문주의자의 서재나 쿤스트캄머를 위해 주문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본 글은 선조 17년(1584)과 18년(1585)에 개최된 기영연(耆英宴)을 그림으로 기록한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16세기 사연용(賜宴用) 화준(花樽)과 주 준(酒樽)의 조형 특징을 구명하고, 사연에 있어서 두 종류 준(樽)의 진설 방식과 및 진설 의 미를 고찰하였다. 연회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 가운데 준화(樽花)를 꽂기 위한 화준(花樽)과 선온(宣醞)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주준(酒樽)은 16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좋은 품질의 백 자․청화백자로 추정된다. 사연용 화준은 조선 전기 국가 의례서(儀禮書) 및 조선 후기 궁 중연(宮中宴) 관련 기록에서 확인되는 호(壺)와 재질․기형․품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식에 있어서 문양을 생략하거나 청화(靑畵) 문양이 장식되었을 경우 소재 는 대나무․매화․화당초문 등 화훼문(花卉文) 계통을 채택함으로써, 사연의 설행(設行) 목적을 투영하는 동시에 궁중연 용준(龍樽)과 차별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선조조기영회도> 에 묘사된 주준용 뚜껑은 입구의 가장자리가 위로 살짝 들려 있는 특징에 기인하여 연엽(蓮 葉)형 뚜껑으로 명명하였다. 연엽형 뚜껑은 국가 의례용기, 가마터 출토품, 전세품 등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되고 있는 만큼, 뚜껑의 사용처와 용도에는 왕실 및 사연용 주준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6세기 <선조조기영회도>의 화준․주준 진설 방식과 사연도(賜宴圖) 속 진설 방식 을 종합해보면, 16세기 화준은 다양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진설 되지만, 주준의 경우 획일화 되고 고정된 진설 방식을 보인다.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연회의 주최자인 왕의 교체, 임 진왜란으로 인한 제작 여건 및 관련 기록 소실로 인한 고증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17세기 이후 점차 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사연용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18세기 이후 양상과는 상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16세기 기영연에 화준․주준이 모두 진설 되 었다는 사실은 이 연회가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대된 사연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 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은 선교 명령이 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말씀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이 주어진 때와 상황을 미루어 본다면 선교가 얼마나 기독교 신앙과 교회 사역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논문은 먼저 초기 기독교 시대에 로마제국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선교의 역동성과 방식이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형성된 국가교회 체제에서 어떻게 변질되었 는지를 설명하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도 국가교회 체제를 수용했 던 관료의존적 개혁 진영은 선교의 개념과 방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점을 지적한 뒤에, 동시대에 국가교회 체제의 청산을 주장하면서 등장한 아나뱁티스트 개혁에서 초기 기독교의 선교 개념과 방식이 회복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글은 ‘콘스탄티누스 전환’이라는 현상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선교적 원천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다.
근대 영어와 영문학에 기여한 대표적인 요인으로 교육혁명과 윌리엄 틴데일의 성경 번역을 들 수 있다. 인본주의와 실용성에 근거한 에라스뮈스의 수사학 이론과 번역된 고전들은 많은 영국 작가들을 위한 토양이 되었다. 이와 같은 환 경에서 교육받은 틴데일은 성경은 모국어로 읽어야 한다는 신학적 동기를 가지고 그의 역서에서 원어의 성경적 의미는 놓치지 않으면서 간결하고도 웅장한 구사를 할 수 있었다. 틴데일 성경에 사용된 다양한 새로운 단어들, 관용구들, 그리고 수사적 장치들은 16세기의 언어적이고 문학적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틴데일이 없었다면 엘리자베스 시대와 그 이후에 나타난 직설적인 산문체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당대 영국 작가들의 역동적이면서도 간결한 문어체도 없었을 것이다.
This study examined the document Shaemirok, which recorded the daily lives of people from Jangsoo (長水), Junrado to Pyeongang (平康), Gangwondo, from 1591 to 1601. This book represents the mid Josun dynasty Noble Lineage's diary together with Muk-Jae (默齋日記). This study analyzed the Shaemirok of Noble lineage’s seasonal food and traditional Korean food through the lens of the Shaemirok. The Shaemirok recorded that Josun people practiced the Julsa (節祀) and Julshik (節食) during the spring, as follows: Sakil (中和節) five times on February 1, Dapchungil (Samjiknal) six times on March 3, Hanshikil five times on March 8, and Deungsuk (Chopile) three times on April 8. Samjiknal on March 3, which is mentioned six times, is the spring Julsa and Julshik that show up most frequently within the Shaemirok’s records. The Shaemirok recorded that Josun people, practiced the Julsa and Julshik during the summer, as follows: Danyang (Danoh) eight times on May 5 Youdoojul six times on June 15, Chilsuk five times on July 7, and Bakjoong five times on July 15. Dangohjul on May 5, which is mentioned eight times, is the summer Julsa and Julshik that show up most frequently within the Shaemirok’s records. The Shaemirok’s author recorded Julsa and Julshik practiced in the autumn eight times annually. Joongangjul, which is mentioned six times, is the autumn Julsa and Julshik that show up most frequently within the Shaemirok’s records. Shaemirok recorded that Josun people practiced the Julsa and Julshik during the winter, as follows: Dongji during November, Sul on January 1, and Daebohrum on January 15 Dongji and Sul, Daebohrum are mentioned eight and seven times, respectively, in the Shaemirok. The people of the Four Main Families of the mid-period Josun practiced more Julsa and Julshik in the winter than in any other season. The Josun people stored the most food during winter, thus had the highest abundance of food. This seasonal factor explains Dongji and Sul, Daebohrum’s unusual frequency with which they were celebrated.
본 논문은 15-16세기 베트남 청화백자를 제작한 가마의 형태분석과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도자를 분석하여 베트 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기존 논문에서는 중국 청화백자와의 유사성에 초점이 맞춰져 이 부분이 미비하였다. 이 부분을 보강 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와 현지 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베트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화백자는 생활용품이자 고가의 무역품이었다. 15-16세기에 베트남은 국내 도자 제작 수준의 발전과 명 해금정책의 배경으로 청화백자를 동남아시아, 류큐, 터키, 이슬람 지역권 등으로 수출하였다. 각국으로 수출된 청화백자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는 가마에서 주로 생산되었으 며, 북부 지역의 가마가 중국의 가마 형태를 모방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청화백자 생산지인 쭈더우(Chu Đậu) 지역의 가마 형 태를 조사한 결과로는 중국의 용요와 만두요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베 트남 지형에 맞게 재해석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명이나 조선에서는 여성이 도자 제작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톱카피 사라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백자모란문천구병>이나 16세기 쭈더우 지역과 근접한 곳에 거주한 도공의 아내인 응우옌 티 딘(Nguyễn Thị Đỉnh)이 도자를 제작했다는 흔 적이 남아있어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완성된 청화백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적인 특징을 보이게 된다. 수많은 동물 기형을 만들고 정병(켄디)라는 특수 기형을 제작하였다. 베트남 청화백자는 중국처럼 용이나 봉황과 같이 상상 속의 동물을 사용 하기도 하였지만 베트남의 자연환경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동물인 코끼리, 앵무새, 복어, 물소 등을 기형이나 문양에 활용한 독 특함을 선보였다. 특수 기형인 정병(켄디)도 동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 던 형태와 다르게 주구가 보다 길며 손잡이가 없고 높이가 낮은 형태로 상당수 생산되었다.
이를 통해 베트남 청화백자가 중국 도자를 모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중국의 양식을 수용하면서 점차 베트남 특유의 미감을 담아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도자 수출, 제작법, 도자 형식 등을 통 해 베트남 청화백자만의 의의도 함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16세기 프랑스의 디에프 학파의 지도에 수록된 ‘거대한 자바’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디에프 학파의 지도가 제작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지도의 일반적인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거대한 자바’의 표현 내용과 시대에 따른 표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또한 동시대 다른 유럽국가의 지도의 표현내용과 비교했다. 연구결과 디에프 학파의 지도는 장 파르멩티에의 「항해기」와 장 알퐁소의 「우주지」에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메르카토르의 1569년 지도와 오르텔리우스의 1570년 지도가 출간된 이후에는 ‘거대한 자바’의 지명 대신 루칵과 비치로 표기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들이 ‘거대한 자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수록한 것은 이 지역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항해를 국왕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16세기 대표적 어휘 분류집인 『訓蒙字會』를 21세기 대표적 國家公認資格證인 한글어문회의 1급 한자 3500자를 비교하여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자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16세기와 21세기 상용한자가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 글자들의 의미범주는 어떻게 바뀌 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사 결과 총 1,743개의 한자가 현재까지 공용자로 여전히 사용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범주별 사용 한자는 조금씩 달랐는데, 예를 들면 곤충을 나타내 는 글자나, 채소, 질병을 나타내는 글자들은 16세기와는 현저히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유학이나 서식 등에 관한 글자는 여전히 현재까지도 자주 사용되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훈몽자회』의 어휘 분류는 당시 시대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천륜’에 노비들이 속한다든지, ‘인류’에 현대에는 없는 직업군이나 동서남북을 나 타내는 글자를 그 지역의 종족을 나타낸 의미를 해석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가들이 선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적인 선교를 거의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본질과 실체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받은 나머지 한 때 이단적 취급을 받았고 급진적 종교개혁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던 재세례파는 오히려 종교개혁 시대에 선교의 선봉장 역할을 감당하였다. 재세례파는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 개혁에 몰두한 나머지 선교 사역의 실천적인 영역이 미진했을 때에, 재세례파는 모든 신자가 다 선교사라는 의식을 가지고 선교 사역에 매진하였다. 그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제자도의 실천을 통한 신실한 섬김의 삶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였으며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친 것 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개종자를 얻었다. 재세례파는 개신교 선교의 최초의 개척자였다.
재세례파의 이러한 놀랄만한 선교적 사역의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선교의 역사에서는 재세례파의 선교가 정식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금세기에 들어서 재세례파에 대한 연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고 있다. 재세례파의 본질이 산상수훈을 통한 제자도의 실천과 성경적인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마당에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선교에 선봉에 섰던 재세례파의 선교적 교회의 실체와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시대의 선교에 대한 균형 잡힌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This paper studies how the continuity and uniformity are achieved in the 16th century polyphony through the imitation technique and cadential formula. Usually imitation technique is needed for the beginning and cadence for closing in the polyphony texture but these two are overlapped in inner cadences thus producing meshed opening and ending in progressions.
Cadence is a device for bringing a pause or a close in a section. In spite of that inner cadences should produce a double effect of termination and continuity before the final cadence in order to show coherence. In this sense intensity is important in inner cadences. Imitation is a tool for repetition. Imitation in perfect interval according to hexachord system confrims the fact that “a melody” is repeated by several voices in different register. Sharing a melody denotes uniformity while voices beginning in various time difference represent continuous flow of time. Imitation happens at the beginning of a phrase but it overlaps with the cadence of the previous phrase creating a continuity naturally between two phrases.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establish the identity of Korean traditional food based on the recorded food preferences during the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Our primary source in this regard was the invaluable, historical document called the "Miam's diary." This important document reveals details of such food preferences from October 1567 to September 1568. By analyzing the income-expenditure trends of virtually every household, this diary was used to describe a vivid traditional food preference of the people during that period. A detailed analysis of the diary reveals the summary of families' characteristics in the 16th century. First, it records the fact that expenditure on food was mainly based on stipend and gifts received. The type of food preferred by the people was diverse in nature; for it included rice, bean, chicken, pheasant, and seafood. However, there were dried or pickled forms too so as to prevent them from undergoing decay. Second, it throws light on the fact that people expended food mainly as a salary for servants. People utilized the income from selling such food items to purchase goods and land. They also used the same either to donate for a funeral or wedding purpose. Third, it records the fact that day-to-day purchase of groceries was mostly based on gift(s) for someone close to them such as a neighbor, colleague, relative, or student. Further, such gifts included small groceries, food items, and clothes. Fourth, based on the data available in the diary, it seemed likely that the gentry families laid emphasis on the customary formalities of a family dating back to as early as the late 16th century. Finally, the document also records the fact that noblemen of the Chosun Dynasty had a notion that they had to extend warmth and affection by presenting generous gifts to their guests at home. Noblemen during that period were very particular in welcoming their guests as they believed that this approach alone would testify their status as noblemen.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underwear design shown in historical dramas set in Europe between the 16th and the 18th century, woman's bodies were highly restricted, in order to analyze the symbolism of the movie costume and provide basic data for the future education of the department of movie costume design. For a study method, literature relating to movie costumes and underwear as well as captured images from 29 historical dramas set in Europe between the 16th and the 18th century was reviewed. Among them, data from 17 movies where underwear and crinoline were observed was analyzed. Historical movies, set in the 18th century Europe exposed underwear more frequently and decisively than movies set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For the figure wearing underwear, its expression effect was maximized by the implication function of costumes. Underwear can easily express the time and space background and symbolize the character's social and economic position, attitudes, and values. In addition, the exposure of underwear can reveal characters' internal expressions, such as mental status, taste, temper, intention, mood, time and space display. The result of observing the underwear shown in movies reveals that underwear plays a subjective role in expressing ideal femininity as a woman of a particular age, modesty, social position symbolism and eroticism that depended on the situation. It is expected that the study will provide an opportunity to reconsider the function of underwear, which is different from the meaning of costume history, and its role as a means of communication by considering the change of underwear by age.
홋카이도와 주변지역에 대한 유럽인들의 탐사와 지도 작업은 유럽인들의 동해와 한반도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16세기와 17세기의 서양고지도에 나타난 이 지역의 표현 형태를 논의하였다. 16세기까지는 이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적 인식 수준은 매우 미약하여 일본만 태평양 한 가운데에 표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Angelis의 지도가 1621년 제작됨으로 홋카이도의 지도 제작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Dudley는 Angelis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홋카이도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한반도와 홋카이도 의 상대적 위치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17세기 중반에는 Vries의 탐사 결과 쿠릴 열도의 한 섬을 아메리카와 동일시하게 되는 오류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이후 이 지역의 지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Vries 이후의 이 지역의 표현 형태를 여섯 가지 범주로 유형화하여 살펴보았다. 또한 Vries의 탐사와는 별도로 지도 오류의 원인을 Kaempfe가 유럽에 가져간 지도를 근거로 하여 살펴보았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achieve a better theoretical comprehension of the 16th century music. The "modal theory" is a problematic term of Renaissance discourse about music. The 16th-century modal theory drew upon and was synthesized with diverse theoretical traditions. The aspects of modal theory that are most directly concerned with a tonal structure are discussions of modes and counterpoint. In this vein, a mode is not only a music-theoretical construct, an inherited category in a fixed set of categories, but also a tonal type in 16th century music that forms a music-analytical construct. Many changes in modal thought resulted in tensions that are reflected in 16th century theoretical writing, musical composition, and editorial practice. A general trend in 16th-century printed collections was from less tonal ordering to more, and the organization of cyclic sets became more and more common according to modal schemes as the century went on. It is important that major composers of the second half of the century adopted the old system of 8 modes. It centers round the compositions and theoretical writings of Gioseffo Zarlino (1517-90), the most famous theorist of the 16th century. Zarlino adopted Glarean`s nomenclature, including the aeolian and ionian modes. Thus, motet, "Ego veni in hortum meum"-which Zarlino had composed a representation of mode 5 in Canticum Canticorum (1540), labeled as ionian in his 1549 motet print, and mode 11 in the 1558 edition of Le istitutioni harmoniche, and mode 1 in the Dimonstrationi harmoniche (1571). This is a fair representation of multi-faceted situation that held away from the 1570s well into the 17th century. A particular 16th century tonal type has evolved into a particular 17th- century and 18th-century tonality.
Politeness is an important feature in Korean language and it has been studied actively. But it can be said that the study of Politeness in the sixteenth century does not exist because the century has often been tied with the fifteenth century, so that research on this field has followed that way. Nevertheless, there are many differences between the fifteenth century and the sixteenth century. Thus it is necessary to study each field separately. Focusing on this view, this investigation is to divide the forms of Politeness and these are the results. The degrees of Politeness in the sixteenth century are: polite formal style―polite informal style, and impolite formal style―impolite informal style. Considering each style with certain examples, firstly, 'nayida, nayitga, showshyeo' forms are the 'polite formal style' and these were used between people in different social ranks, such as 'servant to king, apprentice to master, offspring to parent'. Secondly, 'naengyida, naengyitga/ naengda, nitga/ nae, singa, so' forms are the 'polite informal style' and these were used to express intimacy. In more detail, 'nae, singa, so' forms were used in family relations, not in social relations. Thirdly, '-da/-nda/-ra' forms are the 'impoliteformal style' and these were used to make differences of social ranks definitely. Lastly, '-ra/-ga(go) pattern, -(ni)ri' forms are the 'impolite-informal style' and these were used to make more amiable relations in different social ranks and narrow the emotional distance.
The Honam region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evelopment of Korea poetry. So this study focuses on Song Soon among various factors of Honam architecture in 16th century. He was ahead of his times in development of Korean literature, and made buildings that become background and materials of his literature. Song Soon built Myonang-jong in Damyang for his life time and tried to design to pull in nature into his buildings. These buildings were built in beautiful landscape, and showed elegance as a retired scholar and Taoism characteristics. He provided basic ideas, that is, pulling in nature into architecture, and metaphysics morality, and his ideas also influenced Honam School Including Jung Chul. This study looks into Nujung architecture that had become materials of Myonang-jong Song Soon literature and characteristics of Honam architecture through his buildings at the same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