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nstruction method of scaffolding structures is different from Mortise and Tenon and bucket arch structure of traditional large woodwork. It forms an independent construction system-fixing nodes with knots, a large number of diagonal braces are used to fix shelves and the structures mostly contain X-shape and triangular shape details. Simple ones include stalls, sheds, rain sheds, altars, lamp racks etc. But the scaffolding with larger scale and more complicated structure are modeled on archways, theatres and other buildings which are used in commercial and festival activities. At present, Macao, Hong Kong, Guangdong, Sichuan, Shanxi and other places in China have retained the custom of using scaffolding structures in important festival activities, but their uses, techniques and building types are slightly different from place to place. Due to building and demolishing at any time, the construction and service cycle is short. As a result, there are almost no physical objects left. We can only deduce the use and technical characteristics of ancient scaffolding skills through the colorful building styles that have been preserved with folk activities in various parts of China, the craftsmanship hand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y the scaffolding guild and artisans, and the description of cultural and historical materials and the mutual corroboration of visual materials.
전필(顫筆)은 용필(用筆) 기법의 일종으로 전필(戰筆)이라고 도 불리며, 필획의 떨리는 동작에서 나타나는 모양으로 그 이 름이 유래되었다. 하소기(何紹基)는 청나라 후반에 활동한 서예 가로 역사와 소학(小學) 금석비판(金石碑版)에 능했고, 용비주 첩(鎔碑鑄帖)의 독특한 서예 기법으로 청나라 서예계에서 명성 을 날렸다. 그는 안진경(顏眞卿)에게 처음으로 처음 서법을 익 혔고,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서법을 통합하여 일가를 이루 었다. 전필(顫筆)은 그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고, 특히 노년 시기에 나타난 전필 서법은 필봉(筆鋒)의 흔들림과 떨림을 묘 사하여 소탈하고 거친 효과를 주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 겨주었다. 하소기(何紹基) 전필 서법의 형성과정과 구체적 표현 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가 있는데, 본문은 이를 논의하 고자 한다. 본문의 내용은 주요하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회완법(迴腕法)의 운용, 금석기의 추구, 팔목 노쇠의 영향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전필 서법의 연원을 알아볼 것이다. 하소기의 팔꿈치를 높게 드는 집필법은 전필을 형성하는 데 유 리하게 작용했고, 이는 필획의 거친 느낌을 잘 살려주었다. 하 소기는 금석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소박하고도 깊은 심미관을 형성했다. 하소기는 60대 이후에 손목과 팔의 영향으 로 전필의 표현이 더욱 뚜렷해졌다. 두 번째, 57세 전후를 기준 으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전필 표현 차이에 대해 자세히 분석 할 것이다
오대산(五臺山)은 신라시대 자장스님에 의해 중국 오대산으로터 문수신앙 이 도입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수신앙의 성지가 되어 왔다. 그 중심에 상원사가 있다. 상원사에는 1466년 조선왕실이 발원한 동자 문수 보살상과 1661년에 의천스님이 발원, 조성한 문수보살상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1661년 조성된 문수보살상은 진여원의 세 번째 중창된 만들어진 상원 사의 본존불이다. 이 불상이 조성되기 전 이미 상원사에는 동자 문수보살상 과 노(老) 문수보살이 전하고 있었다. 동자 문수보살은 왕실에서 조성한 것이 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특별히 마련된 원당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고 노 문수보살상은 상원사의 원래 본존으로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문수보살상이 1599년에서 1661년 사이 인근 보현사로 이안되면서, 새로운 문수보살상이 의천스님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문수보살상이 바로 그 문수보살로 추정된다. 보살상의 제작에는 임진왜란 이후 팔도도총섭 체제로 개편되는 불교의 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팔도도총섭은 전란으로 피해 를 입은 사찰을 복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승려장인들을 육성하였고, 이 보 살상을 제작한 승려 역시 도총섭 체제하에서 육성된 승려장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1661년에 제작된 문수보살상은 如意를 지물로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 전 如意는 주로 보현보살의 지물로 등장하지만, 차츰 문수보살상의 지물로도 사용되다 17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문수보살의 지물로 채택되고 있다. 따라 서 상원사 문수보살상의 여의는 조선 후기 조각승들이 인식했던 문수보살의 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을 제작한 사람은 신겸과 회감인데, 신겸은 이 시기 대표적인 불화승이고 회감은 조각승이다. 불화승과 조각승의 공조로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당시 불사의 특징을 이해하 는 데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다.
『불설아미타경』은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발원하고 그곳에 왕생하기 위 해 ‘칭명염불(稱名念佛)’에 전념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미타불의 이 름을 듣고 일심(一心)으로 염불하면 누구든지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 이 경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염불을 선정과 삼매로 규정하고 있다. 또 염불이 삼매(三 昧) 또는 선정(禪定)과 병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염불이 곧 선정이고, 선 정이 곧 염불’이라는 일여(一如)의 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8종의 조사(祖師)라 불리는 용수(Nāgārjuna)가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 道)라는 정토문의 씨앗을 뿌리자, 중국불교는 이를 바탕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 정토왕생을 추구하는 정토교의 기틀을 놓았다. 이들 정 토교 초기 사상가들의, ‘나무아미타불’만 일심(一心)으로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신념에 기반한 염불수행은 한국불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 다. 『삼국유사』에는 염불을 통해 정토에 태어난 기록이 보이고, 고성 건봉사 의 사료는 신라 경덕왕 대의 염불 ‘만일결사’를 전해준다. 이러한 ‘칭명염 불’의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르러 오늘날에도 염불 ‘만일결사’를 하는 사 찰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불교에 있어서 ‘칭명염 불’ 수행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특히 재가불자의 염불수행은 어떠해야 하는가? 초기경전은, 보시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그 과보가 부와 명성과 같은 세속 적인 가치에 머물지 않고 초기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인 사성제를 깨 닫는 인(因)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미타 염불수행은 그것이 칭명염불 이든, 관상염불이든 ‘정토의 청정한 공덕상’과 ‘아미타 부처님의 공덕’에 의지한 정토왕생을 목표로 한다. 이는 극락정토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길 가운데 하나로 ‘보시바라밀로 장엄된 청정한 세상’을 상정할 수 있는 여 지를 준다. 극락정토를 단지 죽은 뒤에나 갈 수 있는 이상세계로만 상정한다면, 현실 에서의 신행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대의 불교 신앙 인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정토의 개념’을 ‘이 세상의 불국토화’로, ‘왕생의 개념’을 ‘보살의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등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 이다. 또, 염불의 궁극적 목표를 ‘정토왕생’[불국토화]에 국한할 것이 아 니라 그 과정까지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본고는 1999년 7월에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要鼓)의 특징과 사용연대를 규명하기 위해 중국 요고의 연원과 변화양상을 심도 있게 고찰한 것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출토된 요고 실물 중에서 고려시대 이전에 속하는 것은 2010년 충남 연기군 나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도제 요고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 2점뿐이다. 전자는 백제(5세기 후반)의 것으로 현재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실물자료이지만 그 형태적 특징이 초기형태의 요고와 상이하기 때문에 악기로 사용된 것인지에 대해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의 제작연대에 대해 현재 고구려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2개의 견해가 존재한다. 목제 요고의 형태적 특징을 보면,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요고의 중간 부분이 가느다란 특징보다는 통일신라시대 감은사 사리기의 요고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성산성의 요고는 중국 북위시대(北魏: 386∼534) 에 속하는 산서(山西) 대동(大同) 운강석굴(雲岡石窟)의 요고, 하남(河 南) 공현석굴(鞏縣石窟)의 요고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제 요고의 제작연대를 고구려(475년 이후)까지 소급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결론적으로 현재 형태적인 특징만으로 이성산성의 요고를 통일신 라시대의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다만 현재 고구려와 관련된 요고 실물 자료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차후 삼국시대 요고에 관한 실물 자료들이 추가적으로 발견 되어 이에 관한 논의가 심화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 논문은 먼저 ‘우연한 만남’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글자로서 ‘遇’자가 그 초기 형태에서 어떻게 그러한 개념을 나타내게 되었는지를 글자의 어원을 통해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 후 이런 의미의 ‘遇’자가 실제로 어떤 경우에 쓰였는가를 선진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우연한 만남’의 상황에 ‘遇’자가 사용되었음을 논증하였다. 먼저 『周易』의 용례를 분석한 결과, ‘遇’자는 동사로서 각종 인간사의 우연한 만남의 상황에 사용되었음을 보았다. 그리고 『春秋』에 보이는 용례에서는, 중국의 禮儀문화 배경에서 천자와 제후 간의 四季節의 정기모임 중에 겨울의 모임을 지칭하는 명사로 ‘遇’자가 사용되었으며, 아울러 제후 간의 비정기적인 혹은 사전에 기약하지 않은 모임을 나타내는 동사로 사용된 경우를 분석하였다. 이런 분석을 통해 초창기의 ‘遇’자가 갖고 있는 단순한 ‘우연한 만남’의 의미가, 예의문화의 배경 속에서 천자와 제후, 혹은 제후와 제후 간의 비정기적 혹은 우연한 만남을 표현하는 단어로 자주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의 외연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 외연의 확대를 통해 다양한 인간사의 우연한 만남을 나타내는 보편적 개념을 함의하는 단어로 ‘遇’자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본 논문의 주제인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내포된 우연성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로 ‘遇’자가 사용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수사학은 훌륭한 말에 관한 재주이거나 학문이다. 어느 경우에나 수사학을 활용하는 목적은 말과 행동 등으로 남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한 것인데 연설뿐만 아니라 연극과 같은 각종 매체에서도 자주 쓰인다. 본고가 수사학적 각도로 탐구하려는 중국가수 薛之谦(설지겸)의 노래 <演员>(연기자)은 출시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데 과연 어떤 요인들로 인하여 청자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는지에 대해 착상, 배열, 표현, 발표 등 서양 수사학 방법론을 적용하여 분석한다. 국내에서 중국 가수의 노래에 대해 수사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은 현재 전무한데 새로운 분석틀을 적용하여 현대중국 대중문화의 트렌드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를 시도하였다.
Wang Hahn-sok. 2015. “A Reflective Confession on my Scholarship: Its Origins, Characteristics, and Achievements”. The Sociolinguistic Journal of Korea 23(3). 3~32. This paper builds on the special lecture that I gave at the 2015 Fall Meeting of the Sociolinguistic Society of Korea. The overall paper takes a kind of narrative form with reflective confession. Specifically, it consists of (1) scholarly genealogy of my study, (2) main characteristics of my study, (3) major achievements of my study, and (4) my special relationships with the Sociolinguistics Society of Korea.
玉洞 李漵(1662-1723)는 평생 학문과 예술로 살다간 近畿南人 실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李繼孫에 이르러 문학으로 起家하였고, 증조 李尙毅 대를 거치면서 문벌가문으로 성장하였고, 영조 이후로는 이서 형제의 학인들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을 형성․발전시킨 유서 깊은 가문 이다. 먼저 이서 학문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 李尙毅는 中 正과 自得을, 조부 李志安은 『大學』과『中庸』을, 부친 李夏鎭은 敬의 수양태도, 博學의 추구, 聖經의 객관적 수용 등을 강조하였는데, 中正의 정신, 自得의 정신, 誠敬의 수양, 독서를 통한 다양한 분야의 관심은 이서 학예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서가 가르침을 받은 중형 李潛은 自得을 중시하였으나 『弘道遺稿』에 나타나 있는 이서의 학문은 철저한 성리학자의 면모이다. 이서 예술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는 道本文末적 사유를 견지하였으나 서예로 이 름이 있었고, 從祖 李志定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로 그 의 시는 仙趣가 있다. 그의 서예는 從姪 李夏鎭과 從孫 李漵형제에게 가전되었다. 부친은 唐宋古文과 中唐의 詩를 지향하고, 서예는 鍾繇 와 王羲之를 추구하였다. 이서의 가학연원과 관련하여 선조들의 使行 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부친이 중국에서 가져온 다량의 장서 와 서화는 이서의 서예성취와 서학형성에 큰 바탕이 되었다. 요컨대 이서가문은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六藝를 익히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 들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대대로 수양과 실천을 중시한 생활태도, 독 서를 통한 박학적 학문태도, 詩書를 위주로 하는 예술관은 이들의 공 통된 경향이다. 이서는 이전까지 문학으로 성가하였던 집안을 경학으로 전환하고, 다양한 관심 분야와의 유기적 결합이나 새롭게 접하는 분야를 發明함 에 있어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학예정신은 분명 선대의 가르침인 자득정신과 성경사상의 실천적 측면이 어느 정도 작 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자신이 새롭게 발명함으로써 가 학의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고 하겠다.
본 논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크게 유행한 계수호의 연원과 형식, 양식변천을 파악하고 그 소멸 원인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문헌 분석과 편년이 확실한 출토품과 중국 국내외 박물관 수장품에 대한 형식과 양식 분석을 시도하였다. 원래 계수 도상은 중국 전통의 닭에 대한 길상적 사고와 서방의 영향이 합쳐져 서진시대 청자에 장식된 것이 그 시초였다. 이후 흑유로 그 제작의 폭이 넓어졌으며 부장품과 위세품으로 또한 실생활에 사용되는 주기로 사용되었다. 남북조시대 들어 사회 변동과 불교의 유입, 서방 양식의 유입, 월주요를 중심으로 한청자 제작기술의 향상으로 다양한 형식과 양식의 계수호가 출현하게 된 것을 파악하였다. 계수호의 형식은 손잡이에 따라 크게 계수계미형과 계수병형, 계수용 병형으로 분류하였고 닭의 형태와 문양 장식에 따라 세분하였다. 계수호의 양식은 시기별로 변화하였다. 계수계미형과 구형의 몸체가 처음 등장하는 서진 시기에는 월주요가 주 생산지였다. 이후 덕청요의 흑유계수와 계수병형이 나타나는 동진 시기, 안양요와 월주요가 주 생산지이며 크기가 커지고 장식적이며 몸체가 입호형의 계수용병이 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방의 형요를 중심으로 백자가 나타나는 수대로 양식이변화한것을 고찰하였다. 끝으로 당대 이후 계수호의 소멸 원인으로는 최고 소비층의 당삼채와 서방풍의 봉수호의 선호에 따라 명기로서도 주기로서도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하였다.
중국 위진 시기 고분벽화는 한대 고분벽화와 화상석과 더불어 중국 고대 회화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회화자료이다. 동북과 하서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중국 위진 벽화고분의 연원을 고찰하기 위하여 본문에서는 두 지역에 벽화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한 신망에서 동한 전기의 벽화고분부터 시작해서 동한 후기-서진의 벽화고분까지 그 출현과 발달 및 전개과정을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벽화고분들과의 상호관계를 고려하면서 정리하였다. 먼저 동북과 하서지역에 처음으로 벽화고분이 등장하는 신망-동한 전기의 요녕 대련 영성자 한묘와 감숙 무위 한좌 오패산 한묘를 통하여 서한부터 낙양, 장안 등지의 벽화와 화상석에 보이는 鎭墓辟邪, 引魂昇天을 반영한 제재와 승선관이 이미 신망-동한 전기에 동북이나 하서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북지역 고분벽화의 출현에는 중원지역에서는 신망-동한 전기부터,관중지역에서는 서한 후기부터 나타나는 생활풍속적 제재의 전파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보인다. 동시에 내몽고나섬 서북부와같은 북방지역의 동한 후기 벽화고분과도 벽화제재와 표현에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동한 후기에 와서 동북, 내몽고, 하서를 잇는 북방지역이 벽화고분 축조의 중심지로 되면서 벽화문화권이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서지역의 동한 후기-서진의 벽화고분은 무위, 주천, 돈황 등에 분포되어, 요양에 집중된 동시기 동북 벽화고분보다 다양한 발전양상을 보여준다. 하서지역 위진벽화고분은 연원을 해당 지역한대고분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남, 관중, 섬북, 산서지역 한대 벽화고분과 화상전고분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요녕 조양 원대자묘 벽화는 요양지역 벽화고분에서 보이지 않던 여러가지 새로운 제재들이 출현하는데 1세기 앞선 요양지역의 벽화고분과 다른 벽화 제재들이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고분의 벽화 구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四神, 力士, 狩獵과 같이 요양지역에 등장하지 않은 제재들의 전파경로를 살피면 대체로 하남, 섬서 지역(서한 후기)에서 북방과 하서지역(동한)으로 전파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감숙 주천 정가갑 5호묘의 벽화의 제재와 구성 배치는 신망-동한 전기 하남지역에서 발달한 궁륭형 천장을 가진 전축분의 특징과 유사하며 고구려 벽화고분과도 친연성이 보인다. 고구려와 하서지역 고분벽화의 친연성은 서한 이후 벽화문화의 전파과정과 동한 후기부터 북방지역을 따라 형성된 벽화문화권의 교류가 그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위진 벽화고분의 연원에 대한 고찰은 3-4세기에 벽화고분이 조성된 동북과 하서지역만이 아니라 그 이전인 한대부터 각 지역별로 발달한 고분벽화 및 화상석의 특징과 지역 간 상호 교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고려하면서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동북·하서 지역의 시기별 벽화고분의 연원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단순한 전파과정이 아니며 다양한 지역적, 시기적 편차를 가지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위진 벽화고분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연원은 인접한 동북, 하북, 산동만이 아니라 보다 시야를 넓혀 중원, 관중, 북방, 하서가종축과 횡축으로 연결된 교류 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운영하고 있는 교도소와 그 행형은 일본과 서양국가들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 등 서양국가로부터 받아들여 구축한 일본 모델이 현대 우리나라 행형의 주된 모습을 구성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은 미국보다는 영국제도를 따랐다는 증거도 보인다. 정부의 명령으로 유럽과 미국을 다녀 온 관료들은 일본의 교도소 행형을 크게 발전시켰고, 이는 최근까지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과거에 기결 수용자에 대한 교도소 제도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서양국가에서 발전시켜 온 교도소와 행형제도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나라 교도소의 유래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교도소와 행형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영국․미국 등 서양국가와 일본의 발전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이들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trace the architectural origin of the Bosung College Library (1935~37), which is currently used as Graduate School Building of Korea University. So far, numerous books have repeatedly described that the library was modelled on a Duke University library, but without any serious consideration. Through literature review, field-trip and archives investigation, this research discovered new critical facts concerning the origin of the building. First, Dong-Jin Park, the architect for Bosung College, saw a photograph of the Duke library in a Duke University catalog possessed by Chun Suk Auh, Professor of the college at that time. Second, the Duke library that he saw in the catalog, which might possibly be Bulletin of Duke University (Feb. 1931), is certainly the present Perkins Library (1930) in Duke University West Campus. Third, the architect probably referred not only to the library but also to other Duke buildings such as School of Medicine and The Union, of which photographs were also published impressively in the Bulletin. Although the Bosung College Library was inspired by the Duke buildings, however, it is undoubtedly a creative design work by the architect Park. Arguably, these findings broaden our view of Korean architectural history in the modernization period, and it is more than a confirmation of just one building's origin.
晩醒 朴致馥은 定齋 柳致明과 性齋 許傳, 두 문하에서 수학하여 江右(慶尙右 道) 지역을 대표하는 퇴계학파의 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한주학파의 새로운 학설로부터 師門을 보위할 것을 자임하 였다. 한주와 만나 太極動靜의 문제를 토론하고 만성은 바로 그 이듬해인 무인 년에 太極動靜辨을 저술, 한주의 태극설을 반박하였다. 여기서 만성은 태극이 홀로 동정할 수 없고 반드시 음양이 함께 있어야 하니, 음양을 떠나서 태극의 동정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氣를 떠나서 理를 말하면 理가 공허하 고 추상적인 것이 될 우려가 있다고 반박했는데 이는 퇴계학파 전통의 心說인 合理氣說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성의 명덕설은 스승 정재의 설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주의 설을 반박한 것이 다. 만성의 명덕설에서 중요한 특징은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맑고 밝은 것도 명덕이요 맑혀서 다시 밝게 하는 것도 명덕’이라 하여 明明德까지 명덕의 개념 속에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만성만의 매우 특이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工夫論의 차원에서 나온 견해로 이해된다. 태극설, 명덕설을 이어서 心說에서도 만성은 理와 氣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 하였으며, 특히 氣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역시 理만으로 심을 정의한 한주의 心卽理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다. 만성의 心說 전반을 관통하는 심의 主槪念은 시종 合理氣일 뿐이다. 즉 합리기를 근간으로 삼은 위에서 경우에 따 라 즉기·즉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심의 개념 자체를 달리 정의할 수 없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이 글은 조위의 학문연원과 시세계 가운데 특히 조위가 김종직 문하에서 차지 하고 있던 위치와 무오사화를 전후로 하여 달라지는 시세계의 두 국면을 중심 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조위의 이복누이가 김종직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조위는 김종직과 처남ㆍ자형 의 지친이 되었고, 이것을 인연으로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도학을 강론하였으 며, 김종직이 죽은 뒤에 그의 처남이며 문집을 수찬하였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에는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천양지화를 당하였다. 당시에 수많은 제자를 길렀던 김종직 문하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 데, 조위는 여러 부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문학으로 이름이 났고, 결국 문학 으로 입신하여 성종의 지우를 받아 「호당기」를 짓고, 두시언해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성종 사후 연산군이 즉위한 뒤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서 승승 장구하던 그의 벼슬길이 급전직하하여 귀양길로 이어지는 시기를 당해서는 글 에 대한 그의 생각과 철학이 바뀌었다. 그는 무오사화 이전에는 김종직의 문학에서 다진 도학을 바탕으로 문학으로 발양하였고, 이 시기의 그의 시는 벼슬살이 가운데의 한가함을 노래한 것이 주 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지나면서는 실의에 빠지고 문학에 대한 관심이 도학으로 회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그의 시는 귀양살이 속에서의 한가함을 노 래하는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