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시위, 주요 수출 품목들에 대한 수출규제, 무비자 입국제도 중단 등으로 한일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제 3차, 4차 한류 붐이 일고 있어 세대 간의 인식차가 크게 확대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3차 한류 붐의 중심에 서있는 방탄소년단 (BTS)이 일본의 젊은 세대들의 지지를 받으며 팬덤을 형성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과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한국, 한류에 대한 인식의 차의 배경이 무엇인지 밝히려 한다. BTS가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198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아이돌 컨셉(미숙하고 서투른 아이돌을 팬들이 응원해서 성장시킨다는 유형)이 더 이상 젊은 세대들에게 어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이돌, 언제든 자신들과 소통하며 반응해 주는 아이돌인 BTS에 열광을 하고 있었다. 한국과 한류에 대한 시각이 세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배경에는 각 세대가 신뢰하며 시청하는 미디어가 각각 달랐다는 점에서 인식의 차가 발생하고 있었다.
1992년 8월 뉴욕에서 개최된 유엔지명표준화총회에서 한국과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일본해 지명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동해 표기의 정당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일본해는 19세기 서구에서 확립된 유일한 명칭이므로 일본해 이외에 다른 명칭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한일 간에 동해와 일본해를 둘러싼 논쟁과 분쟁은 지속되고 있다. 본 연구는 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한일 대학생들의 동해/일본해 지명에 대한 인식을 조사 및 분석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대학생들은 일본해 지명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와 감정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표준 지명으로 한국의 대학생들은 동해를 선호하고, 일본의 대학생들은 동해/일본해를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한일 대학생들은 공통적으로 한일 정부의 논의에 가장 많이 응답했다.
본 연구에서는 일본에서 중국 지명과 인명을 어떻게 표기하고 읽는지에 대해서 한자문명의 공통자산으로서 한자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먼저 일본어 안에는 음성언어가 한자를 중심으로 한 문자언어와 상호보완적인 의존관계에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한자가 일본어 안에서 시니피앙(signifiant)으로서 갖는 위상과 기능을 검토하고 그것이 중국 고유명사를 어떻게 적고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와 직결됨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근대 이후 일본에서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어떻게 표기하였으며 그것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하는 역사적 경위를 살펴본다. 또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안의 서로 다른 언어권 간에 지명과 인명을 차용할 때에 한자음을 취할 것인가 현지음을 취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성질에 대해서도 고민해 본다.
본 논문은 ‘四溟惟政(1544~1610)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주제로 하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사명당과 교유한 일본인’을 조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명당에 관한 일본의 현존자료’를 찾아내는 것이다. 먼저 사명당은 임진정유재란 시기와 探賊使로서 일본에 갔을 때 많은 일본인들과 교유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가토키 요마사(加藤淸正), 닛신화상(日眞和尙),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이 있다. 또 닛신(日眞)과 엔지(圓耳) 등에게 준 글이 지금도 일본에 현존하고 있다. 나아가 유명한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과는 『論語』, 『周易』 등을 인용하면서 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에 대한 일본인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데, 가토 키요마사와닛신은 불교신자로서 사명당과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근대의 유명한 역사가인 토쿠토미 이이치로(德富猪一郞)는 사명당을 ‘지혜와 용기를 지닌 위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사명당에 관한 일본의 현존자료는 많지 않다. 특히 사명당과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회담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그 이유를 타카이 마사유끼(貴井正之)교수는 ‘일본에 불리한 회담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없애버렸을 것이다’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사명당이 교토에 체재한 3개월 동안 교류한 인물들의 가내(家內)문서 등을 조사하면 새로운 기록이 발견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행연구가 있지 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가 저조해진 19세기에 활약한 실학자에 대한 그것은 비교적 양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 최한기 (崔漢綺)와 이규경 (李圭景)의 일본인식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았다. 최한기의 일본관은 세계 각국의 지리, 제도, 산물, 역사, 종교, 풍토, 문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구전요 (地毬典要)에 집중적으로 나 타나 있다. 그 저본은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영환지략 (瀛環志略)』이지만 두 책의 일본 기술이 미비한 부분을 신유한 (申維翰) 의 『해유록 (海游錄)에 의거해서 보충했기 때문에 그의 일본에 관한 지 식・이해는 신유한에 의거하고 있다. 최한기는 일본의 세습제도에 대해 “어찌 인간의 재능에 한계가 있겠 는가? 실로 정교 (政敎)의 구속에 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공평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일본 정보・지식은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기학 (氣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전통적 유교의 화의사상이나 역사적인 적개심, 멸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이규경은 규장각검서관 (奎章閣檢書官)이자 『청령국지 (蜻蛉國 志)라는 일본에 관한 저술도 있는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가 할아버지 였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최한기보다 풍부한 문헌과 지식・정보와 접 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활용해서 일본의 신화, 역사부터 생활 문화와 속신 (俗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그의 저서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속에서 기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일본인을 가리켜 ‘도이 (島夷)’, ‘왜이 (倭夷)’, ‘흑치 녹정 (黑齒綠頂)’ 등의 멸칭을 거리낌 없이 쓰고 그 방대한 지식을 가지 고도 일본이나 일본인에의 멸시관, 차별의식을 고치고 극복하기에 이르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나 사고전서 (四庫全書)에도 수록된 일본의 유학 자 야먀노이 테이 (山井鼎)의 『칠경맹자고문 (七經孟子考文)』의 고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규경은 그러한 차별의식을 옆에 두고 일본의 문물이나 학술의 좋은 것을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출간된 역사지도책에 반영된 한국의 영토, 일본의 의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역사지도(日本歷史地圖)」와 이 책의 증보판인 「신편일본역사지도(新編日本歷史地 圖)」의 편저자인 시바 카츠모리(芝葛盛), 당시 시대상 및 간행 배경 등에 대해 알아보고, 두 역사지도책의 내용 구성방식을 비교·분석 하였다. 이어서 두 역사지도책에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두 역사지도책에 수록된 지도의 스케일이 확대되었으며, 일본이 역사지도를 통해 한반도 지배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추구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일본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역사적 연속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우리나라를 ‘조선’으로 인식하였는데, 울릉도는 물론 독도까지 조선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 정부는 일본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였다. 한국과 일본 사이 수산물 분쟁은 아직 진행중이며 소비자들은 식품안전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연구는 소비자의 일본수산물에 대한 위험인식과 위험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2012년 9월부터 10월까지 1,5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수행하였다. 분석결과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위험인식에서 감정의 역할이 확인되었는데, 일본산 수산물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개인은 해당 제품에 대한 위험 인식이 높았다. 또 부정적인 감정은 수산물 구입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운명주의적 성향은 수산물 구입행동에 유의한 변수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This study was undertaken to examine the knowledge about food culture and intakes of traditional food in Korean and Japanese elementary school students. In 2012 and 2013, a total of 265 students were surveyed, consisting of 73 Korean fifth graders and 192 Japanese sixth graders. The questionnaire comprised of queries on general items, the recognition and sampling of traditional and celebration foods, the knowledge about the partner country's food culture, and the frequency of consuming the partner country's foods. As a result of this study, the frequency of consuming their own country's traditional foods for Korean children (3.1 out of 5.0 points) and Japanese children (3.2 out of 5.0 points) was similar to each other. Japanese children reported to eat Korean foods (2.9 points) more frequently than those of Korean children to eat Japanese foods (2.4 out of 5.0 points) (p<0.001). However, the Korean children reported to have more experience on given typical Japanese foods than Japanese children reported about Korean foods. Further studies are needed for the perception on traditional foods in Korean and Japanese children. The results of this study can be used as a basic data to succeed and develop traditional food cultures.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propose an export strategy due to an analysis of USA and Japan consumer's perception and willingness-to-pay for flower tea. For that, we conducted a survey on the consumer's perception on flower tea compared with leaf tea such as green tea. We also analyzed the willingness to purchase and pay for it. The reasons of drinking of flower tea for USA consumer are 'flavor'-followed by 'taste', and for Japanese consumer 'relaxation'-followed by 'flavor' in order. Both of them consider 'quality', 'safety'- and 'origin' in order when they purchase flower tea. USA consumers have a willingness-to-pay of about 8.3% and Japanese consumers have a willingness-to-pay of about 29.1%. Based on those results, it is necessary to differentiate the process and marketing strategies for the export of flower tea.
A survey on the quality improvement and preference for green onion kimchi by Chinese and Japanese consumers was conducted by 30 Korean specialists in order to develop an improved green onion kimchi product. The long green onion shape, kimchi juice, seasonings, off-odor of fermented sea food, and stimulatory flavor of green onion were the main issues considered for the improvement of green onion product. Usage of the favorite ingredients of the Chinese and Japanese consumers was also suggested. The percentages of Chinese and Japanese who already knew green onion kimchi were 54.1% and 30.3%, respectively, whereas 46.8% of Chinese and 28.1% of Japanese have actually tried green onion kimchi in Korea.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in the preference for green onion kimchi between Chinese (3.25/5.0) and Japanese (3.17/5.0) consumers. For recommendations for improving the quality of green onion, Chinese consumers thought off-flavor, fibrous texture, and fermentation level were more significant while the Japanese considered red color, various taste, MSG content, and length of green onion. Seasoned tofu with green onion and rice were suggested as complementary foods to green onion kimchi by the Chinese and Japanese, respectively.
본고는 1903년에 발행된 「일로청한 명세신도」에 나타난 일본인들의 독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먼저 이 지도를 편찬한 ‘제국 육해 측량부’가 육군 측량부와 해군 수로부의 측량과가 임시로 합해진 기구로 보고, 이 지도를 국가기관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그 제작의 목적은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또 한 ․일 간 동해안에서의 경계선 획정에서 독도에 해당되는 송도를 한국의 동단(東端)으로, 일본은 오키도를 서단(西端)으로 하여 같은 거리에 경계선을 그으면서, 그 사이에 공해를 설정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사람들이 러일전쟁의 발발 이전에는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로 간주하였다.
For globalization of Korean food, It is essential to research and analyze target markets in advance. However until recently, there has been a lack of food research in regions of select countries in order to create systematic plans for marketing Korean foods. Therefore this study aimed to investigate the recognition of Korean foods as compared to other Asian foods in young adults living in Vaxjo, Sweden. Over 90 percent of the Swedish students had experienced Thai and Chinese cuisines, indicating their popularity as Asian foods in Sweden. The participants were attracted to six positive attributes of Asian food: 'fresh vegetables', 'low fat', 'chicken and sea food', 'exotic ingredients', 'good value for the money' and 'unknown foods'. The favorite type of Asian food was Thai food and Korean food was the least tried, as over 50% of respondents linked it to 'unknown food' attributes. Based on these results, in order to introduce Korean food more successfully, focus should be placed on the unique and unknown attributes of Korean food, as well as emphasis placed on its healthfulness, to stimulate the curiosity of target markets such as young Swedish adults.
나카네 기요시는 陸軍(省)參謀局 등에 근무하면서 『兵要日本地理小誌』 등 일본지리교과서를 출판하였다. 그가 육군참모국 재직 중 집필했던 『병요일본지리소지』는 최초의 官撰 全國地理書로 군인용 교재뿐 아니라 일본지리교과서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따라서 당시 최신의 정보를 근거로 편찬된 『병요일본지리소지』에는 육군참모국의 일본 영토 인식이 잘 반영 되어 있다. 『병요일본지리소지』의 본문에는 일본의 극단에 위치한 섬들이 소개되고 「日本國全圖」와 「山陰道之圖」 등에 일본 영토가 표시되었지만, 울릉도와 독도는 거론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카네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獨學日本地理書』에는 일본 영토의 변동 상황이 정확히 반영되었음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과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 나카네는 『日本地理小誌』에서 비로소 竹島와 松島를 조선 영토가 되었다고 확실하게 밝혔다. 山陰道總論에서 오키의 서북쪽에 松島⋅竹島가 있음을 소개하고 울릉도쟁계와 竹島 渡海禁止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막부가 竹島를 포기한다고 명령했다고 서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지리교과서 가운데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사례이며, 「日本國全圖」와 「山 陰道之圖」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日本地理小學』에는 松島⋅竹島가 조선 영토라는 나카네의 인식이 유지⋅계승되고 있다. 『일본지리소학』의 본문에는 竹島⋅松島가 거론되지 않지만, 「日本總圖」에는 竹島⋅松 島로 여겨지는 두 섬이 그려져 있다. 「山陰道之圖」는 『일본지리소지』의 것과 동일한데, 『訂 正日本地理小學』의 「山陰道之圖」는 경위도의 범주가 줄어들면서 松島가 표시되지 않았다. 『정정일본지리소학』의 「日本總圖」와 「山陰道之圖」에서 松島⋅竹島 모두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점은 더욱 확실해졌던 것이다.
그동안 여러 선행연구의 성과를 통하여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시키기 이전, 일본의 지도와 역사지리교육에서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시대적인 특성상, 위와 같은 관점의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기에 따라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속성 하에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법제적으로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영토화했다고 해도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인식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울릉도와 독도 관련의 일본어 자료 속에 독도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상 자료는 2017년에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김남훈 독도 관련 기증자료 중,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역사지리부도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저술된 울릉도와 독도 관련 연구논문, 시마네 현 마쓰에 시 죽도연구소에서 필자가 직접 수집한 「죽도편입에 관하여」라는 문서군을 주목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바 가즈모리(芝葛盛) 의 『일본역사지도』(1922)에는 죽도(=독도)를 조선의 것으로 적어,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독도를 인지했음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地名의 巨人’으로 불린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대일본지명사서』의 영향이 컸으며, 요시다 도고가 펴낸 『신편 일본독사지도』에 소개된 「한국병합 전후 일본영역도」 의 인식과도 일치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나아가 시바 가즈모리의 관점은 연구 동료인 후지타 아키라(藤田明)의 저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런 점에서 시바 가즈모리의 『일본역사지도』 의 독도 관련 기술이 시바 가즈모리의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하는 사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의 저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등의 연구에서는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에 비정함으로써 자연히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드러내었다. 히바타 셋코(樋畑雪湖)는 직접적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 라고 단정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울릉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뚜렷이 보인다고 증언한 점, 독도가 竹島라는 이름으로 시마네 현에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은 량코도로, 조선인은 獨島라고 했다는 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정 지역의 소속과 명칭을 바꾸어도 일상생활 속에서 체감하는 공간 인식은 이전의 방식 과 습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23년 발간된『島根縣誌』나 1945년 일본 마쓰에 재무부 국유지대장에 ‘獨島’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의 독도의 존재감이 일본 측에도 인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정작 독도를 영토 편제한 시마네 현에서는 1926년에 행정구역 개정으로 오키 도사가 폐지되고 오키지청이 수립된 후 독도 관련 행정 조치도 취해야 했지만 1953년까지 방치한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현재 일본 측에서는 은폐하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독도에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한국병합조약에 의해 ‘영원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인식되었기에, 일본 측은 굳이 독도를 따로 떼어 내어 일본의 영토로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도는 그 행정적인 소속 관계와 상관없이 지리적인 특성에 의해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펴낸 저술에도 표출되었으며, 일본 측 공식 자료에도 ‘獨島’라는 명칭이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방문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 라고 하여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비난했다. 특히 일본 국회에서 독도문제를 국제사 법재판소에 제소하여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본 연구는 일본국회에서 독도문제를 국제사 법재판소에서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분석하였다. 첫째, 일반적으로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일본국회에는 국회의원들이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하는 인식이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 아니면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고찰했다. 적극적인 견해는 독도가 일본영토임에도 불구하고 현 민주당정부가 적극적으로 독도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고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소극적인 견해는 독도가 일본영 토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게 된 것은 이전의 자민당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하여 정치권 모두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이 ‘죽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그 이후 매년처럼 중앙 정부의 관료를 초빙하여 2월22일에 ‘죽도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일본 국회에서도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독도문제를 제기하여 영토문제는 외교문제 이기 때문에 정부주도의 행사를 개최하여 국내외에 홍보해야할 것과 독도문제를 국제사법 재판소에 제소하여 신속하게 해결할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독도문제를 제기하는 의원은 시마네현 출신 국회의원 단 한사람뿐이다. 그것도 매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제기했다. 이처럼 일본국회에서도 독도 영유권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국회에서도 독도가 일본영토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와야하는 영토라는 인식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연구는 제국주의 일본이 불법적으로 독도편입을 시도한 1905년 전후 일본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검토하고, 이를 통하여 일본의 왜곡된 독도영유 권 주장의 실태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1905년 일본의 불법적 독도편입 조치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본질은 그 출발점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침탈 야욕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즉 1904년 발발한 제국주의 국가인 러.일 양국 간의 전쟁 수행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근 세.근대기 일본 고문서에 나타나는 혼란된 지리적 인식은 1905년을 전후한 시기에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미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을 앞서 수용한 일본은 근대적 측량법 덕택으로 경위도나 거리를 큰 오차 없이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위도 위치나 거리 측정은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보다 정확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지리적 인식의 정확도보다 울릉도·독도의 명칭을 어떻게 확정할지가 더 큰 관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일전쟁은 이러한 명칭혼란을 종식시키고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독도를 불법 편입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영토팽창 정책 속에 ‘죽도(다케시마)’라는 원치 않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 편입된 일제강점기의 첫 번째 희생물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