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남부 지역은 태평양(pacific)판의 섭입에 의한 화성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지역으로 백악기 화강암류와 이와 성인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산암류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여수 지역 백악기 화강암류를 형성시킨 마그마의 특성 및 지구조적 환경을 규명하고자 주성분 원소, 미량원소에 대한 지화학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지역의 화성암류는 섬록암, 각섬석 흑운모 화강암, 미문상 화강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지역의 화강암은 칼크-알칼리(calc-alkaline) 계열로, A/NK vs. A/CNK 도에 점시해 본 마그마의 특성은 대부분 중알루미나(metaluminous)에 해당하고 I-type로 나타난다. 암석기재학적 특징으로 본역의 암석은 천소에 관입 정치된 화강암류의 암석으로, 지구조판 별도에 의하면 압축장이 작용하는 판의 경계부 즉, 화산호화강암(VAG)에 해당된다. 희토류원소의 패턴은 경희토류원소(LREE)가 중희토류원소(HREE)보다 부화된 ((La/Lu)cN=4.2-13.3) 백악기 화강암류의 전형적인 패턴과 일치하며 미문상화강암은 섬록암에 비해 Eu(-) 이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총희토류원소(σLREE) 함량은 76.2-235 ppm으로 본 연구지역의 화강암류들은 대륙연변부에서 나타나는 화강암류의 희토류원소 총함량 범위에 해당된다. 위의 지화학적 자료를 종합해 보면 여수 지역 화강암류들은 태평양판의 섭입에 의한 압축장이 작용하는 대륙 연변부에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점오염원으로부터 오염된 소하천에서 영양염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식물플랑크톤 배양 장치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식물플랑크톤 배양조에서 식물플랑크톤 정치배양 결과, 식물플랑크톤의 연속배양을 위한 배양조의 체류시간을 3일로 결정하였으며 TP는 70%, TN은 44%가 제거됨을 확인하였다. 연속배양 결과 45일 동안 배양조에 유입된 TP의 53.9%, TN의 53.1%가 식물플랑크톤에 의한 흡수와 슬러지로 제거되었다. 식물플랑크톤이 성장하면서 배양조의 pH와 용존산소농도는 각각 평균 10.8, 16mg L-1이었다. 결국 비점오염원에 오염된 하천수의 영양 염류는 식물플랑크톤의 사체와 화학반응으로 생성된 침전물로 제거되었다. 비교적 설치가 간단하고 경제성이 높은 식물플랑크톤 배양법의 높은 현장적용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중국에 있어서 형벌의 집행은 각 국가기관으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형사집행의 다원화로 말미암아 각 기관과의 업무마찰, 업무소홀, 불협화음의 정도가 심하다. 현재의 감옥법으로서는 형사법 전체에서 운행되고 있는 감옥관련 업무를 조화롭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 중국에서 감옥법은 형법, 형사소송법과 더불어 형사법체제의 3대 지주(支柱)라고 일컬어 진다. 그러나 현행 중국감옥법은 총칙과 각칙 그리고 부칙 모두 7장 78개 조문에 불과하다. 따라서 입법상 그리고 시행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입법에 있어서는 형법, 형사소송법과 충돌하는 현상, 입법내용의 공백(空白)과 미흡, 규정이 모호하고 명확성이 떨어지는 문제 등이 있다. 법시행 과정중에서는 형벌집행 대상범위가 적은 것, 수형자의 감형‧가석방에 대한 법규 범의 결여, 수감중 사망한 자의 처리문제, 법적 구속력의 미약, 법규정과 실무와의 괴리(乖離) 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중국의 형사집행 상황은 공안기관에 상당한 업무와 재량이 주어진 형세를 이룬다. 현재 인민법원은 주로 사형‧ 벌금‧재산몰수에 처한 자들을 다루고 있고, 공안기관은 주로 유예형‧구역‧가석 방 후 나머지 형의 집행‧잠시 감외집행‧외국인에 대한 추방‧정치권리박탈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감옥기관이 마땅히 다루어야 할 본연의 업무를 공안기관이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약 <감옥법>을 <형 사집행법>으로 대체 할 수 있다면 감옥이 주체적으로 감옥관련 업무를 확장시 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형벌집행과 관련된 국가기관과의 갈등과 마찰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형벌집행을 감옥이 자주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정보화라는 거대한 물결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킬 만큼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은 정보의 대중화 및 보편화를 선도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생활양식 전반에 걸친 새로운 변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정보사회의 정보격차는 사람이나 지역에 따라 컴퓨터와 인터넷, 방송 등에 접근하지 못하게 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보 습득의 차이를 말하며 사회활동성이 적고, 정보접근권이 취약한 장애인의 정보격차는 곧 기회의 불평등을 만들고 이는 다시 정보격차 확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악순환을 차단하고 정보격차를 없애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보편적인 정보 서비스이다. 보편적인 서비스란 국민 모두가 장애, 나이, 성별, 지역, 계층에 상관없이 정보통신기기에 접근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인과 정보취약계층간의 정보격차 실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은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정보화 취약계층인 장애인의 정보화 수준 및 정보격차 현황과 실태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대처방안을 모색하여 장애인 계층의 정보격차해소를 위한 기초 연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한국은 냉전기에는 친미일변도 원칙아래 미국을 주요대상으로 외교정책을 수립 추진하였다. 최근에 와서 한국은 탈냉전시대의 분위기에 젖어 한반도의 안보현안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자신의 독자외교보다는 중국에 편승하는 형식에 기대감을 보여 왔다. 강대국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약소국의 선택은 자국의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한국은 약소국으로서 그간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독자적 안보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외부의 협조 없이는 안보유지가 불가하다는 현실주의 생존논리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분단 현실을 인정하고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추구하려 노력해 왔으나, 독자적으로는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질서를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절대 절명의 외교과제인 만큼 4강 외교 강화가 불가피하게 제기되었다. 한국은 지정학적 측면에서, 어느 한 국가와만 결정적인 동맹을 맺거나 그에 안주하는 외교행태는 지양해야만 한다. 한국이 특정 국가와만 영원한 동맹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은 매우 비자주적 선택이다. 한국의 안보외교와 경제발전은 다자주의적 차원에서 그리고 전방위 각도에서 모색하고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근자에 와서 한ㆍ미관계의 전면적 재검토를 둘러싼 논쟁과 한ㆍ중관계의 재정립을 주장했던 것 등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고 있다. 중국의 강대국화 여정은 당분간 제어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열망은 다분히 팽창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이 우려해야 할 상황은 강대국을 지향하는 중국이 점차 배타적 민족주의와 신중화사상에 천착하는 현실이다. 많은 국가들이 2008년 북경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나타난 민족주의 선동에 대하여 우려를 보였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의 강한 민족주의 감정 표출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북한과도 관계가 있다. 만일 중국이 강대국화에 집착하여 정치ㆍ군사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빠져든다면 이는 필연코 북한을 자극할 소지가 매우 크다. 이는 북한의 핵 위주의 선군정치세력을 고무해 주는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사태로의 진전은 한국 안보에 중요한 위기 국면을 조성하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최근의 중국이 기존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자로서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국제질서의 옹호자로서의 변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전략적 협력외교가 작동되어 영향을 줄 수 있는 범위가 그 만큼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 완전한 현상유지국도 아니고, 현상타파세력도 아니다. 한국은 외교적 대응에 있어 중국이 기본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일종의 유화정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중국의 외교적 지향이 다소 불확실성을 띠고 있으므로 명분과 실리가 없는 견제보다는 편승과 유화가 양국 관계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은 중·북 간의 이해상충을 예의주시하고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북한 핵 위기를 극복하여 안보를 확립하고, 중국과 동반 번영하는 기회를 공유하는데 필요한 ‘중국기회론’에 편승하여 경제실리를 도모해 나가는 양방정책도 재고해야 한다. 대중 우호협력관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데 있어 전략적 협력관계의 확대와 외교현안의 성실한 추진은 한반도의 미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남북한 평화정착과 평화통일의 초석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는데 있어 필히 요청되는 외교과제이기도 하다.
松江이 활동하던 시대는 倭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난리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黨爭으로 인한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정치 ․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西人의 우두머리로서 정치에 몸담았던 송강은 黨派로 인한 답답한 심정과 謫所生活에서 겪는 고민을 해소하고자 도연명이 자연을 벗 삼아 참신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田園閑居 생활을 흠모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自然憧憬의 시를 읊었다. 송강은 도연명처럼 자의적으로 歸去來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타의에 의한 謫所生活에서 出仕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임금의 은혜로 謫所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되어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오른 것은 도연명이 자의적으로 전원에 歸去來한 후 다시는 조정에서 불러도 정치에 뜻을 두지 않은 出處觀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임금에 충성하고 經世濟民에 뜻을 두었던 16세기 조선 士林들의 出處觀과 송강도 같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도연명은 政治道義가 상실되어 不義한 방법으로 신하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어 晉에서 宋으로 나라가 바뀌자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와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라는 儒家의 관념에 出處觀을 두었고, 송강은 맹자가 말한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에 出處觀을 두어 經世濟民하고자 끝까지 벼슬에 대한 집착을 하였다. 이를 보면 兩人의 出處는 儒家의 가치관에 의해 정했다는 것이 相似點으로 나타났다. 松江은 당시 黨爭으로 인한 정치 현실에서 고뇌를 해소하고, 謫所생활에서의 위안을 얻는 데는 술만큼 좋은 媒介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도연명이 憂愁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는 점과 일치한다. 도연명은 비록 다섯 편의 시에서 짧은 시구로 국화사랑의 시를 표현하였으나, 周濂溪가 그의〈愛蓮說〉에서 국화는 꽃의 은일자다.(菊, 花之隱逸者也.)라 말하고, 晉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다. (晉陶淵明獨愛菊)라고 말하여 도연명의 국화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킨 이후 송강도 菊花하면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밑에 심었던黃菊을 연상하였고, 국화를 통해 名利로부터 탈속하여 선비로서의 고결한 자태를 보여준 도연명을 국화사랑의 대표자로 생각하며 존경과 흠모하는 시를 읊었다. 田園은 생명의 근원이 샘솟고, 자연의 숨결과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며,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勤勉과 休息을 주는 최후의 安息處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일반 전원시인들과는 달리 그의 시에서 田園에 대한 讚美와 함께 몸소 전원에서 躬耕한 체험을 바탕으로 田園의 생명력이 솟구치는 활기찬 정경을 읊어 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松江도 도연명이 읊은 시구와 典故를 援用하여 도연명의 田園閑居에 대한 동경의 시를 지었다. 陶淵明이 만년에 쓴 〈桃花源詩幷記〉는 晋 ․ 宋年間에 민중들이 정치의 災禍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이상사회를 추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人口에 膾炙되어 왔다. 이 작품은 간결한 언어와 뛰어난 造語力으로 순박하고 화목한 농촌사회를 이상세계로 삼아 老子의 ‘小國寡民’ 이나 儒家의 ‘大同世界’ 이념을 잘 형상화하여 혼란시대에 처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망을 반영시켰다. 도연명의 이상향인 桃源世界는 신선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포악한 秦의 난리를 피해 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魏나라 晉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면서 조상에 제사지내고, 손님에게 닭을 잡아 술을 대접하는 다정다감한 情感과 불 때서 밥해 먹는 인간사회의 정황을 묘사하였기에 松江도 도연명이 묘사한 儒家的 관념의 桃源世界를 갈망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도연명은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자 不老長生을 추구하는 道家나 靈魂不滅의 佛家에도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宿命的인 죽음을 해결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儒家的인 自然歸依觀에 최후의 몸을 맡겼듯이 송강도 도연명처럼 儒家的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그의 생을 마쳤다. 결국 兩人은 1200년 가까운 시대적 차이와 각기 다른 국가에서 다른 정치 ․ 사회의 풍파를 겪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兩人의 자연사랑과 은일관념은 儒家的 관념으로 불후의 전원시가 문학을 창작한 것이 일치하며, 兩人의 문학세계는 후대 시가 문학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성리학의 대가 주희는 유학사상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초사학에 있어서도 그가 후대 초사학자들 특히 민지의 초사학자들에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 그의《楚辭集注》는 그 이전의 訓詁와 考據를 중심으로 한 초사연구를 義理 천명 중심으로 한 연구로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복건성인 민지에서 주자의 영향을 받아 초사연구가 크게 일었고, 또한 그 연구 역시 주자의 義理를 천명해내는 연구방법을 대체로 그대로 따랐다. 그들은 履忠被讒된 위대한 애국시인 굴원의 憤懣과 애국심을 대한 意趣를 그대로 따랐는데, 이들 민지의 초사연구가들과 騷體 작가들은 대부분 민족적 애국기질이 강하며 또한 현실에 대한 강한 정치적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초사연구나 소체 작품 창작을 통해 자신의 처지와 불우함에 대한 울분과 불만 그리고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을 분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학문 풍토는 아직도 민지학자들의 학풍 속에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할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경험하면서 동아시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개편된다. 일본의 경우, 이 전쟁은 明治시대의「국체」를 확고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근대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암시하는「支那」로 위치가 격하되었고, 일본은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의존해 왔던 중화적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위해 支那를 보급시켰다. 16세기「선교의학」이었던 서양의학은 제국주의가 팽창함에 따라 위생제국 건설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森鷗外와 魯迅은 이것의 가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동양의 선두인 일본의 森鷗外도 나우만에게서는「他者化」된 오리엔트에 불과하다는 것이 논쟁을 통해 확인된다. 森鷗外 자신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우만에 의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야만이라는 가치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森鷗外는 서양과 동등해지고자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强辯했다. 나우만은 서양의 눈으로 동양의 선두 일본을 마음껏 조롱하고, 그 衰滅을 예고한다. 하지만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총력적인 明治政府의 지원 아래 森鷗外의 과학적 위생국가 건설의 꿈은 점차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文學者 ․ 軍醫 ․ 衛生學者인 森鷗外가 서양과「同等」해지기 위해 전투적으로 분신하는 모습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의학도 魯迅은 醫專 在學 도중, 자신의 역할에서 근대의학 효용의 한계를 깨닫고 문학으로 전환한다. 이 전환점을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장소로서 仙台醫專이며, 時期로서 러일전쟁이, 후지노와 周樹人의 인연을 엮어내고 있었다. 支那人 의학도와 日本人 선생의 만남은 20여년 후 국책소설《惜別》을 낳게 되고, 文學報國會는 太宰治를 통해, 40여 년 전의 침략자의 施惠를 추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仙台는 제국주의 실현의 한 장으로 볼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中日親善을 목적으로 그 추억은 이어지고 있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周樹人의 자아 비판적 회심은 혁명가 魯迅에게 정치적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지만, 魯迅으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는 끊임없이 중도에 그만둔 근대 의학의 역할을 차용케 한다. 즉 魯迅은 누구보다도 근대 의학의 정치적 효력을 알고 있었고 근대문명을 수행하는 이가 의사임을 깨닫고 있었다. 위생 제국 건설에 전투적으로 이바지 한 森鷗外지만, 유학생활을 통해 발아한 서구자유주의 사상과 문학 창작에 대한 욕구 등은 제국주의 현실에 회의를 품게 했다. 이러한 間隙을 그는 문학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 이는 혁명가 魯迅이 정치적 변화를 문학이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따라서 근대 서양의학은 선교사를 따라 또는 식민지 개척자를 따라, 물리적 국경을 넘어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과학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적 발전 그 자체가 권력이 되었다. 의학적 지식 그 자체가 권력화 되고 결정권을 가지게 되면서 사상적으로 월경해 가는 것을 森鷗外와 魯迅의 생애와 유학체험의 분석을 통해 밝혀낼 수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현대문예이론의 기준으로 梁啓超의 소설이론을 평가하면, 梁啓超의 소설에 대한 인식은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다. 매우 분명한 논리적 허점이 있어, 수많은 이론상의 오해와 논리상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객관적 현실을 감안하면 그의 이론이 시대의 최선봉에 선 것임은 분명하다. 심지어는 문장 속의 어떤 오해와 과장에는 말살할 수 없는 역사적 소명의식이 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梁啓超가 제창한 소설이론은 중국근대문학의 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했다. 첫째, 소설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론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이론의 최고 수준이었다. 둘째, 줄곧 그 지위가 낮았던 중국의 소설을 “文學之最上乘”의 지위로까지 끌어 올렸다. 셋째, 그는 형식면에서, 신문이나 잡지에 이론을 발표함으로서, 중국의 문예비평방법인 評點이나 序跋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근대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넷째, 그 결과 소설이론이 구체적 작품으로부터 분리되어 문학의 일반론이나 서사방법 등 이론성 문장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방법론면에서 근대소설이론으로 발전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소설계혁명”의 실제효과를 보면, 梁啓超이론의 부정적 효과도 너무나 분명하여 간과할 수는 없다. 첫째, 소설과 사회의 관계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소설이 그 본래의 독립적 품격을 상실하고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둘째, 소설과 사회라는 외부관계만을 일방적으로 중시하여 서사방법·인물의 전형화이론·사건의 형상화이론 등과 같은 소설내부의 예술문제 등을 홀시하여 중국의 고전소설이 근대소설로 정상적인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청말(만청)에 이렇게 많은 창작이 쏟아져 나와 소설의 전성기를 구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 문학연구자들의 공통된 평가이다. 이러한 양과 질의 불균형 현상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갑작스런 양의 증대현상이 질적 향상을 담보할 수는 없었으며, 이런 양적 증가의 원인이 비문학적 요소인 사회변혁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에 梁啓超와 그의 소설이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계초는 자신이 주장한 “소설계혁명”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유일한 소설창작인《新中國未來記》를 창작하였으나, 겨우 5회를 쓰고 나서 스스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의 이러한 실패는 서언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실천만이 이론을 검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이 국정을 담당할 대표자를 선출하고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그 본연의 기능을 다하고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선거는 정치적 의사와 정치적 견해의 존재를 전제로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하여 자유롭게 행하여져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선거의 자유는 그 헌법적 중요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한편 선거의 자유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선거에서의 기회균등이 보장되지 않고 선거에서의 불공정·불공평이 난무하여 선거의 공정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대의제민주주의에서 그러한 선거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선거의 공정성 확보를 통한 민주적 정당성의 부여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활하고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 헌법적으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이처럼 우리 헌법은 민주적인 선거제도가 구비해야 할 조건으로서 선거의 자유와 선거의 공정을 요청하고 있으며 두 이념 사이의 합리적인 조화를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헌법이 민주적인 선거제도의 형성을 위하여 요청하는 바가 이와 같이 파악한다면 선거의 자유와 선거의 공정은 공직선거법이 추구하는 목적으로서 어느 하나의 가치에 희생을 명령하고 다른 하나의 가치를 우선시할 수 없는 동등하고 평등한 선거법의 근본이념 내지 목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선거의 공정 확보를 위하여 손쉽게 선거의 자유를 희생해서도 아니 되며, 선거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선거의 기회균등과 공정선거를 훼손하는 것도 용납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선거의 자유와 공정은 국민주권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입헌주의 헌법에서 선거제도가 가지는 본연의 기능을 다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기본이념이며 공직선거법은 두 가치의 동등한 실현을 위하여 선거의 자유와 공정 사이에서 슬기로운 조화를 모색해야만 한다. 선거의 자유와 공정의 슬기로운 조화의 모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행의 공직선거법은 선거의 자유보다 선거의 공정에 치우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사전선거운동의 엄격한 제한과 선거운동방식의 엄격한 규제는 아직도 공직선거법이 선거의 공정에만 치우쳐 선거제도를 규율하고 있다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국민의 성숙된 민주의식과 선거의식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이 선거의 공정에 치우친 현행의 공직선거법은 개정되어 선거의 자유와 선거의 공정 사이에서 합리적인 조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 보호의 범위는‘저작권의 독점으로 인한 공공이익 손실’과‘창작을 위한 동기유발’사이에 균형을 잡는 선에서 결정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따라서 저작권 보호의 바람직한 범위에 관한 토론은 저작권 보호의 사회적 비용 그리고 사회적 혜택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Matthew J. Baker, Brendan M. Cunningham은 저작권에 관한 미국 연방법원 판결 및 연방 저작권법상의 변화들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 데이터베이스를 저작권 보호의 범위에 있어서의 변화들을 측정하는 지표들을 도출하는 데 활용한다. 그들은 그 지표들을 저작권 관련 기업군 주식의 초과수익과 결합시키고, 저작권 보호의 범위의 변화가 저작권 관련 기업 주식의 시장 가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측정한다. 저작권 보호의 범위를 확대하는 전형적인 법률은 관련 기업 주식의 초과수익의 0.40~2.09% 증가를 가져오는데, 이는 정확한 기간, 기업의 크기, 법률적인 변화의 중요성에 달려 있다. 전형적인 연방대법원의 저작권 확장판결은 초과수익의 0.13~1.05% 증가를 가져온다. Baker 등의 견해는 저작권 보호의 폭에서의 새로운 변화들을 기업의 시장가치와 연관시키고 수학적 방법론을 사용한 점에서 참신하고 탁월하다. 그러나 Baker 등은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저작권자측만 일방향적으로 분석하였고, 주식의 초과수익률 증가의 원인에 관해, 입법 또는 판례의 변화가 이미 존재하는 저작권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인지 혹은 새로운 창작물을 창작할 동기부여 때문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며, 음악산업의 경우 우리의 경험과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장래 우리나라에서도 Baker 등의 연구결과를 기초로 출판, 음악, 영화, 광고 등 산업별로 세분화되고 더욱 정치해진 연구성과가 나온다면 입법이나 재판에서 더욱 설득력 있는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수출 작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파프리카의 두 품종을 성숙 정도와 저장 조건을 달리하여 저장성을 비교하였다. 국내에서 많이 재배되는 'Special'과 'Fiesta' 두 품종을 수경재배하여 미숙과와 완숙과 상태로 수확한 후 무공 필름과 유공 필름으로 포장하여 4℃와 9℃에 저장하였다. 가장 긴 저장 수명을 보인 저장 조건을 4℃에 포장 내 5%의 이산화탄소와 10%의 산소 농도를 보인 무공처리였다. 무공 처리의 경우 저장온도, 품종, 숙기정도에 관계없이 3~9μl/l 에틸렌 농도를 보였으나 경도와 생체중 유지에 효과적이었으며 유공처리와 비교해서 부패율에도 차이가 크지 않았다. 50% 착색된 반숙과의 과피색은 9℃와 무공 필름 처리에서 많이 착색되었으나, 완숙과 수준까지 진전되지는 못하였다. 4℃에서 20일간 저장한 후 상온에서 3일간 정치한 완숙 'Special'의 저온장해 정도를 전해질 용출량과 호흡 속도로 비교한 결과, 무공필름 포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되었다. 따라서 파프리카의 장기 유통 및 저장을 위해서는 적절한 무공 필름 포장과 저온장해가 발생하지 않는 범위의 저장장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름은 사회를 공동체로 만드는 기능이 있다. 지명을 붙이는 방법에는 ‘문화적 유산’, ‘언어적 이름 붙이기’, ‘자연적 ․ 지각적으로 이름 붙이기’, ‘어원적 이름 붙이기’ 등4가지가 있다.이 이름들은 자연적 위험, 정치적 ․사회적 움직임이 나타나면 변할 수 있는데,이름은 이러한 지역의 정보를 담고 있다. 즉, 지명의 변화는 통시적, 공시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상호적으로 이해 가능한 새 유형을 만들기 위한 행정, 정치와 상관된 문화 ․역사적 결과를 연결시켜 바라볼 수 있다.
장기간동안 상이한 정치이념에 근간하여 법규범 질서를 정립하고 있는 남북한이 장래에 통일을 할 경우에 그 통합과정에서 다양한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북한의 사법질서를 어떻게 통합할 것이며, 통합과정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고려되어져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예측하여 분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통일독일의 재산법 통합과정은 한국의 통일과정에서 일정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의 경우와 다르게 북한의 경우에는 몰수당시의 권리관계를 공시할 수 있는 국가공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이를 남한 판례에 근거하여 법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2002년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 이래, 우리는 초기 감정적인 동요 분위기에서 소극적인 형태로 전화돼 계속 학술적 대응 태도를 고수해 오고 있다. 한국의 대응이 학술적 연구에만 그치는 동안 중국 정부의 묵인아래 중국의 동북공정논리는 전 세계로 빠르게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러한 관계로 한국에서의 동북공정에 대한 인식이 점점 소멸해가고 있다는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필자는 본고에서 동북공정논쟁이후의 한중 양국의 인식차이에 대한 비교를 해보고자 한다. 먼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인식은 아래와 같다. 첫째, 대외적으로 패권주의 발현을 지향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패권주의 발현이라는 측면을 정리하자면, 전세계적 패권국으로의 부상, 동아사이의 맹주로의 추구, 북한정권 붕괴 후 한반도까지의 영향력 행사 등까지 계획 중이다. 둘째, 중국내 내부적 인식 태도는 국경 지역 영토 확보 및 다민족 국가인 중국민의 정서적 분열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진행된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한국의 입장은 아래와 같다. 첫째, 한국인의 고구려사 역사인식에 대한 환기이다. 동북공정의 결과가 어떠하든, 한국사회는 반드시 고구려역사를 환기하고, 재고해봐야 할 것이다. 둘째, 민족주의 혹은 탈민족주의 및 동아시아론 등의 이론 등장이다. 다민족·다국가가 함께 생존하는 지구상에서 제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혹은 탈민족주의 및 동아시아론이 함께 등장·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는 학술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은 동북공정을 학술적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그들의 동북공정의 진정한 목적·그에 대한 대응책을 정확하게 분석, 파악,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대내적으로는 범국민적 제대로 된 역사인식 교육에 힘쓰고, 아울러 소중한 고대사에 대한 지각 있는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혁명현실주의와 혁명낭만주의의 양결합”은 급진적인 사회주의화를 통한 정치적 결속과 경제발전의 필요성에 처해 있던 1950년대 말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창작방법이다. 신민가운동과 동시에 제기된 ‘양결합’은 모든 문예종사자들이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으며 문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양결합’은 무엇보다 소련의 사회주의 현실주의를 대체할 민족형식으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문학창작방법으로 일컬어졌지만, 실상은 어떤 안경을 쓰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 시대의 대안이었다. 작가로부터 평론가, 선택의 자유를 제한받는 독자들까지 현재의 필요에 따라 과거를 재평가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희망으로 은폐하며, 공산주의의 환상으로 미래를 꿈꾸어야 했던 ‘양결합’의 강제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혁명현실주의와 혁명낭만주의의 결합은 기존의 동서진영간 대립구도를 소련 수정주의를 포괄하는 대립구도로 전환시키고, 사회주의 현실주의에 대한 민족형식의 우위를 통하여 黨性에 의한 미래의 이념화와 미래에 의한 현실 속의 박투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노선이었다.
이 논문은 장이머우의 대표작인 영화 《인생》이 도달한 미덕을 ‘중국 현대사에 대한 준엄하고 따뜻한 통찰’이라는 측면과, 이런 통찰이 ‘중국인의 심성에 썩 어울리는 방식’으로 절묘하게 표현되었다는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필자는 ‘중국인의 심성에 썩 어울리는 방식’이라는 표현을 “말하고자 하는 바를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속에 담아서 넌지시 암시하기”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루쉰이 일찍이 모든 문예의 보편적 표현법이라고 정의했던 ‘광의의 상징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영화 《인생》은 기구한 운명에 의해서 빚어진 혈육의 비극으로 점철된 푸구이라는 한 가족의 역사를 그려낸 것이면서, 그것이 동시에 파란만장한 정치적 운동에 의해서 빚어진 사회적 비극으로 충만한 중국민족의 현대사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장이모우가 그의 영화 ‘인생’에서 이러한 ‘광의의 상징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왜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 이 글에서 분석하고 논의해보았다. 또한 장이머우의 영화 《인생》과 위화의 소설 《인생》을 영화와 소설이라는 서로 다른 예술형태 사이의 관계, 영화감독 장이머우와 소설가 위화 사이의 관계, 그 공통성과 차별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한 인간이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오며 겪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가 서로 비슷하지만, 소설은 주인공 푸구이가 자신의 극단적으로 불운한 일생을 인생의 황혼에서 깨달음을 얻은 소박하고도 초월적인 시선으로 가뿐하게 돌아보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그 철학․사상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 영화는 배경으로 설정된 기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산을 탕진하고 몰락한 푸구이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운명을 비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중국 민족 전체의 운명을 은유하여 나름의 사회역사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참위의 학문은 동한이 정치와 사회생활 그리고 학술사상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가 동한 말년에 쇠미해졌다. 원래 참위 서적은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의해서 조대가 바뀌는데 이용되었다. 그런데 통치자는 그 중의 위험을 점점 의식하게 되었고 위진 이후에는 수차례 금지되다가, 수양제가 정식으로 금지한 후에는 참위의 서적은 대량으로 손실되었다. 참위라는 것은 신학적이고 미신적인 색체를 띄고 있기에 아예 유가 경전과는 장기적으로 병행 되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비교적 빨리 유가 경전과 분리되어 나갔다. 그러나 참위의 서적은 전부다가 완전히 황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또한 허다한 천문, 역수, 지리학 등의 방면의 고대 자연과학 지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처강”과 같은 수천 년 중국 군주 전제 사회의 최고의 윤리 규범이었던 삼강도 《白虎通義》라고 하는 것에 확실히 기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禮緯 《含文嘉》 중에서 인용해 나온 것이다. 도참은 처음에는 인간과 천지 혹은 자연과의 교류의 차원에서 논의 되던 것으로 시작하여 유가 경전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해석하고 학문의 폭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 역대 제왕들이 그것을 정권 탈취의 목적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왜냐하면 도참을 이용하여 정권을 탈취한 자에게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스스로 에게 다시 돌아오기 일쑤이기 때문에 그것의 위력을 아는 자는 그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역대 중국의 금서사상 참위는 후대로 갈수록 배척 되어 왔음에도 아직도 우리의 뇌리 속에 신비스러운 잔영으로 남아 있다.
이 논문에서는 한유 시와 불교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한유는 "불도를 배척한다"고 스스로 자임했지만, 그의 행위는 도리어 불교와 깊고 애매하게 유착되어, 자신의 "선언"과 "행동"이 서로 위배되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원도〉를 찬술하고 불골 맞는 일을 간언하는 등 결연히 불도를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승려와 밀접하게 왕래하고 시를 수창하며 정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모순적 태도는 후세에 비평을 받았다. 현존하는 한유의 시 사백여수 중 불교와 관련된 시는 겨우 약 20여 수 뿐이지만, 그 영향은 대단하다. 당나라 때 불교는 정치사상면에서 국가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사회를 침식시키는 큰 병폐였다. 당시에 형성된 방대한 무위도식계급 및 그들의 소비경비는 심히 통절한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이런 불교의 해악을 지적하고 불교를 적극 반대했다.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불교가 백성들의 생산생활에 막대한 파괴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시에다 불교의 허망과 거짓을 풍자하였으며, 혹세우민을 폭로하였다. 시승과 진지하게 교류한 시들은 후세사람들이 한유가 변심하여 불가에 귀의했다고 여겨 질책을 받았다. 한유와 승려의 교류는 경제적 능력 때문이거나, 시문의 재능이 출중한데 불교에 입문한 것이 통탄스러웠기 때문이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유가의 문하로 끌어들여 벼슬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무본스님을 환속시킨 것은 한유의 일대공로였다. 韓愈는 불교비판에 힘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문학창작방법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이점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는 불교경전을 익숙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시에다 화용했고, 그가 시도한 "이문위시" 역시 직접 불경과 불경번역과정에서 얻은 것이며, 시 속의 몇몇 조구방법들도 역시 불경게송의 조구방법을 모방했다. 이로 본다면 한유는 비록 불교를 배척했다지만 그는 여전히 불교경전을 열람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온갖 전적을 박람했으니, 불경도 당연한 포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