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51

        61.
        201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임제의현(臨濟義玄)을 대표하는 개념 중 하 나이다. 임제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작용즉성설(作用卽性說)과 무 사선(無事禪)을 계승하고 있는데, 무위진인은 원래‘지금 현재 육체 를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위진인은 마조도 일의 무사선을 계승한 용어이지만, 불성(佛性)을‘人’이라는 용어로 써 의인화한 것이 임제의 특징이다. 한편 소소영영(昭昭靈靈)과 견문 각지(見聞覺知)는 무사선을 상징하는 용어로서, 소소영영은‘불성의 신령스러운 작용’을 가리키고 견문각지는‘불성이 견문각지(보고 듣 는 등의 작용)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소영 영과 견문각지는 무위진인과 깊은 관계에 있다. 무위진인은 임제의 입적 이후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에 걸쳐서 의 미가 변화되기도 하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우선 당대의 현사사비 (玄沙師備)는 작용즉성설을 비판하였는데, 소소영영과 견문각지를 주된 비판대상으로 하였다. 현사는‘견문각지는 대상이 존재할 때만 발생하는 것으로서, 만약 대상이 없다면 견문각지는 일어나지 않는 다. 따라서 견문각지를 일으키는 것은 불성[昭昭靈靈]이 아니라 육식 (六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 송대에 오면 무사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데, 특히 원오극근(圓悟克勤)과 대혜종고(大慧宗) 는 무사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소소영영과 견문각지를 비판하고 있 다. 간화선은 무사선(無事禪)을 부정하고 깨달음의 체험을 강조한 데 서 일어난 것이다. 나아가 원래‘현실에 존재하는 육체를 지닌 자기 자신’을 가리켰던 무위진인이 후대에는‘내면에 존재하는 초월적 본성’으로서 인식되 는 경향이 발생하였다. 특히 송대에는‘공겁이전(空劫以前)의 자기 (自己)’를 묻는 문답이 많았는데, 공겁이전의 자기란‘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기’로서‘내면화된 불성’을 말한다. 공겁이전의 자기는 각범혜홍(覺範慧洪)에 의하여 비판되었는데, 천복승고(薦福承 古)가 자기를‘공겁이전의 자기’와‘현재의 자기’로 양분한 것에 대 해서 각범혜홍은 석가모니의 예를 들면서‘자기는 양분(兩分)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8,100원
        62.
        2015.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효과적인 한자교육을 위하여 한자의 字體 변천과정에서 나타난 한자 字素의 변화 과정을 분석하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 자형인 楷書에서 나타난 자소들의 변이현상과 기본 규율을 정리하고자 한다. 또한 그 연구 결과를 한자교육의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變異 字素들의 本義를 파악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字形과 字義에 대한 혼란 해결을 그 목적으로 한다. 현재 中國에서 2001년부터 정책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漢字 敎育 방법인 構形學은 說文解字의 小篆 構形 체계를 시작으로 전통적인 육서의 주요한 정신을 받아들여 근본적으로 육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였다. 構形學은 구조 기능 분석법을 이용하여 한자의 本義를 설명하고 시대별 字體 변화에 따른 자형 구조상의 규칙을 찾으려는 현대 한자학 이론이다. 한자의 字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효율적인 한자 자형 분석 방법을 찾으려면 構形學을 적용하여 字素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기초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構形學에서 기본으로 삼고 있는 說文解字는 小篆의 字形을 중심으로 한자의 구조와 형태를 분석하여 ‘六書說’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후로 한자는 隸書와 楷書로의 변천 과정을 거치면서 자형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심지어 楷書 중의 獨體字에서는 字體가 서로 점합하여 더 이상 獨體象形字의 결합으로 볼 수 없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러한 자형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자소의 변이와 그 규칙성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說文解字의 六書說을 기본적인 이론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字形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따른 한자의 字體 변화를 참고하여 字形을 구성하는 각각의 구성요소를 분석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는 隸變의 과정을 겪은 뒤의 자형이므로 古文字 계통과의 자형상 괴리가 심하여 한자를 교육하는 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혼란이 적지 않다. 이러한 제반의 문제들을 보완하고 교육현장에서 효율적 字形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수많은 변이자소들로 인한 의미 파악의 혼란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7,800원
        66.
        2014.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동탁과 마탁자료를 집성하여 그 변천을 파악하고, 중국 동북지방 출토 동령 및 뉴종과의 비교검토를 통해 그 유입과정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한반도 내에서 확인된 동탁은 B.C.4C부터 출현한 고식동탁과 B.C.1C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마탁으로 구분되며, 서로 한반도로 유입된 계통이 달라 개별적으로 연구되어왔다. 하지만 양자의 최초조형은 중원문물인 동령이고, 연구를 진행하며 한반도 내에서 동탁이 제작·사용되는 과정에서도 계속적으로 동북지방 및 산동반도 일대 동기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되어 양자 간에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함께 살펴보았다. 고식동탁은 Ⅰ기(B.C.4C~B.C.1C)에 처음으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이루어진 뉴종 명기화의 영향으로 요령지방으로부터 유입되어 제의적 성격으로 매납되었다. Ⅱ기(B.C.1C~A.D.2C)에 들어서는 고식동탁이 점차 사라지고 마탁이 등장하면서 함께 사용되었는데, 마탁은 당시 낙랑에 해당한 한반도서부지방으로 유입된 후 남부지방으로 확산된 것으로 파악된다. Ⅰ~Ⅱ기의 고식동탁과 마탁은 매납의례에 관련된 청동제품으로 당시에는 그 기능이 중복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한반도 서부지방에서는 마구류와 공반되고 중·남부지방에서는 의기류와 공반되어 지역적 차이가 확인된다. Ⅲ기(A.D.3C~A.D.5C)에는 마탁만이 사용되었다. Ⅱ기에 비해 탁신의 형태와 문양의 조합 구성에 있어 보다 다양한 형태를 보이며, 한반도 중·남부지방에서 마구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Ⅳ기(A.D.5C~A.D.6C)에는 이전과 형태는 같으나 대형으로 제작된 마탁이 한반도 동남부지역의 대형분에서 확인되는데, 전국시대~한나라대의 마탁을 완전품으로 수입하여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한반도의 동탁은 일본의 북구주 일대에 전파되어 탁신의 크기 및 장식성이 커지며 한반도와 다른특유의 동탁문화를 형성하였다.
        7,800원
        67.
        2014.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 동북지역에서 점토대토기문화는 남한지역 점토대토기문화와의 관련성에 주목하여 주로 요동지역에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심양 정가와자 유적을 비롯한 요동지역에서는 전형적인 원형점토대토기 외에 다양한 파수가 부착된 점토대토기가 다수 확인된다. 그러므로 요령지역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형태의 이중구연토기 가운데 문화 성격과 공반유물 등을 고려하여 점토대토기의 범주에 포함시킬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검토해야 한다. 점토대토기발과 평저장경호는 요동지역 뿐만 아니라 요서지역에도 분포하며, 기형상의 유사성도보이지만 공반유물에서 일정한 지역성도 확인된다. 점토대토기는 구연부 내측의 외반 상태와 구연부(점토대) 외측의 변형 정도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세분되며, 남한지역의 원형점토대토기와 같은 형태를 지닌 것은 성립 이후의 확산 단계부터 뚜렷하게 확인된다. 요령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는 춘추 후기 이후 요서지역에서 성립되어 요동 서부지역에서 완성된다. 점토대토기문화는 전국시대 이후 요서와 요동 양 지역에서 지역성을 이루면서 발전하였는데, 전국 중기 이후 요동반도와 한반도에서도 관련 유적이 확인되며, 전국 후기 연의 요동 진출 이후에는 점토대토기문화의 중심지가 요길 접경지역과 요동 동부지역으로 변화된다. 요령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는 연·한문화를 순차적으로 수용하여 서한 전기 늦은 단계까지 지속된다. 요령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되는 것은 요동 서부지역에서 주변 지역으로 파급되는 맥락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그 시기는 서북한지역과 서남한지역이 크게 다르지가 않다. 요동지역과 남한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에서 점토대토기발과 흑도장경호보다 두형토기가 늦게 등장하며, 두형토기와 한국식의 세형동과·동모가 연의 요동 진출에 따른 문화변동의 결과물로 등장하였음을 고려하면, 요령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가 남한지역으로 처음 파급되는 것은 전국 후기 이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중기 이후, 즉 기원전 4세기대일 가능성이 높다.
        8,300원
        68.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서예는 문자의 조형미를 표현하는 예술이며, 문자의 뜻과 자형을 통하여 작가의 성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서예의 주요 성분은 필법 ㆍ필세ㆍ필의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필법은 서예에서 가장 기본 적 요소로 입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규범이다. 필세와 필 의는 필법의 기초에서 작가의 성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법 에 대한 연구와 고찰은 서예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한 우선적으로 해 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없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연구 목적은 서예의 기본적 표현 기법인 필법에 대한 역대 변천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는 필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창작을 모색하는 데에도 필수적 연구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필 법에 대한 정확한 기초를 마련하고, 또한 이러한 기초에서 올바른 창 작을 모색하는 데에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연구의 의의가 있 을 것이다. 연구 방법은 먼저 필법의 의의와 형성을 살펴본 다음 역대 필법의 변천을 위진남북조ㆍ당나라ㆍ당나라 이후로 나누어 분석한 이후 필 법의 가치와 영향을 기술하고 여기에서 얻은 결과를 정리하여 결론 으로 삼았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기본 필법은 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점과 획으로 변화하였고, 진나라 문자통일을 거쳐 한나라 예서에서 기틀을 마련하여 삼절필의 기교가 보편적으로 응용됨으로써 형성되 었다. 필법의 변천 과정을 보면, 위진남북조는 주로 해서ㆍ행서ㆍ초 서에서 완성을 이루었고, 한나라 예서의 필법이 점차 사라졌으며, 전 절을 겸하여 삼절필에 대한 기법을 완성하는 시기였다. 당나라는 초 당 삼대가를 통하여 남북의 필법 및 해서ㆍ행서ㆍ초서 등의 체계를 갖추었고, 중기 이후는 안진경을 통하여 필법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 후 송나라에 이르러 황실의 기호, 제도의 영향, 예술사상의 변화 등 으로 분명하게 다원화된 ‘상의’서풍을 나타냈고, 이후 조맹부의 시대 서풍을 거쳐 명나라의 전람문화와 청나라의 비학 등의 발전으로 시 대별 다양한 변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변천 과정을 통 하여 필법의 가치는 본래의 법을 바탕으로 하여야만 알맞게 취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으며, 심미가치 또한 높게 구현할 수 있다고 분석 하였다. 이는 역대 서예가들이 끊임없이 필법을 탐구하는 이유이고, 이를 통하여 필법의 전승은 서예를 예술의 한 분야로써 탄탄하게 만 드는 기반이며, 서예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임을 알 수 있 었다. 서예는 3,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장구한 세월 동안 서예가 지속적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각 시대별 변천 과정에 서 끊임없는 창신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 하고 뛰어난 서예가들은 우수한 전통을 지키고, 낡은 전통을 버리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창신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필법을 바탕으로 이루었고, 끊임없이 필법의 비결을 얻고자 노력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서예의 공통적 규범을 습 득하고, 득심응수(得心應手)의 경지에 이르고자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법의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서예의 실천에서 필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서예의 건전한 미래 발전을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필법에 대한 고찰은 바로 서예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는 분명히 현실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8,100원
        69.
        201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s a macroscopic research for the interface of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in Korea, I have analyzed the introduction background & mutual characteristic of each interface according to the development shifts of MMORPG. The MMORPG of Korea, in the mid-1990s, was started while taking a foreign MUD (Multi User Dungeon) games, which used 'Text Interface' based on the keyboard. When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infrastructure was expanded in earnest in the late 1990s, Computer games interface was rapidly changed to GUI(Graphic User Interface) based on 2D graphic from text-based UI. So, Games of this period used the 'Point & Click Interface' that uses the mouse only to move character and carry out combat. Since graphic technology was changed to 3D in the middle of 2000's, The interface of MMOGPG for three-dimensional representation was naturally changed to 'keyboard control Interface' which used both mouse and keyboard. Recently, 'Action Control Interface' that was hardly used to MMORPG was appeared due to progress of game programming technology. And 'Diversity of play pattern' & 'Non-targeting' are attributes of 'Action Control Interface', which is differentiated with other interfaces.
        4,000원
        70.
        2014.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글은 가락동유형의 중심시기인 청동기시대 전기를 이분 또는 삼분으로 나누는 틀에서 탈피하여 세분된 편년을 기반으로 한 개별취락의 미시적 분석결과를 통해 금강유역 가락동유형 취락의 변천과 정을 검토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금강유역 가락동유형 취락의 변천상을 지역적으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미호천유역의 취락은 초현기의 양상이 타지역에 비해 뚜렷하지만 전반적으로 소규모의 단위취락 중심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갑천유역은 최초 용산동취락을 중심으로 국지적인 형성을 나타낸 이후 재지화되면서 주변으로 확산되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단위취락과 중위취락으로 발전하게 되며 4단계에 최대 성장기를 나타낸 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장은 대부분 5단계를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지만, 6단계에도 중층의 구조를 갖는 관저동취락에 결집하여 상위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 중류역은 2단계부터 상위취락인 송담리를 중심으로 취락의 본격적 성장이 확인되는 점이 타 지역과 비교되는 특징이다. 3단계에는 취락 성장의 균질성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으며 외부로부터 파급된 문화가 금강유역 전역에서 재지화되는 시점으로 파악되는데,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대부분 중위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취락별로 성장의 동력이 분산되지만, 4단계에 이르러 상위취락인 송원리로 다시 집중된다. 송원리취락은 이후 6단계에 이르기까지 상위취락을 유지하는데, 특히 금강유역 일원에서 전기의 취락 대부분이 쇠퇴하는 6단계에서도 송담리와 함께 상위취락을 유지하고 있다. 끝으로 전기 마지막단계에는 취락의 영역이 축소되어 주거밀도가 높아지는데, 상위취락을 유지하는 송원리취락 등의 공간범위가 직경 약 150~200m 정도이며, 갑천유역의 6단계 상위취락인 관저동취락도 직경 150m의 공간범위이다. 이와 같이 취락영역이 줄어드는 점은 대외적 취락 영향력의 감소가 예상되지만, 오히려 취락내 구성원간의 유대감과 동질성의 향상을 통해 효과적이고 집중화된 취락의 운영이 가능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8,300원
        71.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에서의 복령연구는 형태학적 관찰 및 특징, 채집기, 재배방법, 복령균의 배양학적 특성연구 (홍과이, 1990), 1994년 농촌진흥청에서 복령의 인공재배법이 개발되면서 드링크제, 제빵제재 등의 식품화연구도 2000년대 초까지 진행되었다. 복령의 에탄올추출물은 폐암, 난소암, 피부암, 중추신경암, 직장암 세포 성장에 높은 저해활성을 나타내는 등 항암효과 등의 기능성이 입증되었다(권 등, 1998). 하지만 현재까지도 복령의 수요를 천연채집 및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서 재배시 고품질, 다수확을 위한 인공재배방법을개선해야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경북농업기술원과신농버섯연구소 등에서 지상에서 재배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최근의 재배사례에서는 부적절한 재배시기를 선택하는 등의 사유로 실패사례를 간혹 볼수 있다. 최근 복령의 주요 수출국인 중국이 수출을제한하여서 지난 4년간 복령가격이 113% 인상되는등 복령의 국내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개발된 복령의 지상재배법과 지하재배법의 장점만을 이용한 새로운 방법의 복령인공재배기술의 확립이 요청된다.
        4,000원
        72.
        201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Da-bo stupa by examining the correlation among architectural languages and by studying the features of its architectural components and transitional changes shown in Da-bo stupa line drawings in Dunhuang Mogao Grottes. The results are as follows. 1st, the Da-bo stupa of Dunhuang faithfully follows the sutra of lotus, and although the form changes, the fundamental essence of Bo-tap-yong-chul and two seated Buddhas provided by the Gyun-bo-tap-pum in the sutra of lotus is consistent. 2nd, the pagoda body can be periodically divided into parasol, stupa, and royal palace types. The parasol type has an incomplete tower body, which makes distinguishing each of its architectural components difficult. The stupa type appeared between the early (AD 618–712) and middle (AD 766–835) Tang dynasty. It combines the form of Indian stupa type and East Asian wood structural architecture. The royal palace type, which appeared between the peak period of the Tang (713–765) and Sung Dynasties, shows the standardized pattern of the Da-bo stupa described as two seated Buddhas and Bo-tap-yong-chul. 3rd, the use of a stylobate does not appear in the early construction of Da-bo stupa, only in the later period, in the form of high pillars. Forms include many Su-mi-jwah and three-way stairways and Dab-do, but as time passes, the forms are simplified to the form of high pillars. 4th, the purpose of early Da-bo stupa was to provide space for Da-bo-yu-rae of Gyun-bo-tap-pum; hence, it did not have sangryoon(the top part). However, after it was influenced by general pagodas, sangryoon was established. Toward the Tang Dynasty, sangryoon has come to emphasize the forms of boryoon(nine wheels) or dome. However, this form is eventually simplified to only retain bo-joo(the orb).
        4,500원
        73.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tegrated-Salmi can be suggested as a character of Da-po type Kong-po in Korea’s traditional architecture. However, only few studies are made on this subject yet.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integration process of Salmi through cases of certain Kong-po which have the same number of inner and outer Chul-mok and are also known to precede in time.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like below. First, Integrated-Salmi is more dominant in inner and outer 3 Chul-mok Kong-po than in inner and outer 2 Chul-mok Kong-po. Second, While inner and outer 2 Chul-mok prevail in Yeong-nam region, inner and outer 3 Chul-mok prevail in Ho-nam region. Third, integrated Salmi of Inner and outer 3 Chul-mok, first appeared in internal Jusangpo to be carried over to internal Juganpo then eventually to outer Salmi. Fourth, the reason why integrated form precede in internal salmi of inner and outer 3 Chul-mok Kong-po is due to 2 main factors. First of which is the impact of integrated Boaji that developed in Da-po type since the early 16th century. The second factor is downward expansion of Cho-gak’s Boaji which was adopted to cope with disorders made in structure of Chum-Cha, due to inner and outer 3 Chul-mok type buddhist temples’ wide reconstruction throughout Jeolla region follow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is study is to disclose the regularity of development process of Salmi’s Cho-gak(草 刻) which is a characteristic of Korea’s Da-po type Kong-po.
        4,300원
        76.
        2013.03 KCI 등재 SCOPUS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77.
        2013.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축성된 월송포 진성은 1970년대까지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고 전해지지만, 1970년대 이후 주변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흔적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였다. 월송포 진성의 남쪽 일부가 울진군에서 추진하는 망양-직산간 도로 확장공사 부지에 포함됨으로 인하여 추진된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성벽과 문지, 우물 등이 잘 남아있음이 확인되었다. 진성은 해안에 접한 해안평탄면에 형성된 사구의 남쪽 말단부에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남쪽으로 수로가 연결되어있어 천연의 해자를 이루는 형태이다. 이는 인접한 울진포영 및 남해안 일대에 위치하는 영ㆍ진ㆍ보성의 입지와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성벽은 후대 교란으로 인하여 동쪽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지적도상의 지번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지적도를 참고하여 성의 규모를 추정해 보면 둘레 328.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와 문헌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3.1~4.7m 정도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이다. 성벽의 안쪽 에는 성벽과 동시에 축조된 우물이 잘 남아있었으며, 문지 안쪽으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풍경화에서 보이는 문루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월송포 진성은 인접한 대풍헌의 현판과 『조선왕조실록』등을 통하여 삼척영과 함께 3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울릉도 ․ 독도 수토를 담당하였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울릉도 수토는 1693년 안용복의 일본 도해 사건을 계기로 1694년 처음 시작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수토사의 출발지는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수토관으로 파견되는 관계로 초기에는 삼척부의 장오리진, 울진현의 죽변진, 평해 군의 구산포 등 수토관의 위치와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구산포로 고정되었다. 이는 동해의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울릉도과 가장 가깝고, 항해에 해류와 해풍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구산포임을 파악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8,900원
        78.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John Bunyan’s The Pilgrim’s Progress, first published in 1678,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hristian mission work and is remembered as one of the first modern novels. In 1830 the book was entitled the ‘English Literature Cannon,’ and has been translated into many languages, second only to the Bible. This honor and popularity is due mainly to Bunyan's fine writing style and fertile literary imagination; however, the illustrations added to each version and print - that is, the visualizations of the content - were crucial to maintaining popular interest in and understanding of the book. Illustrations can have a major influence on the reputation and authority of a book. However, researches on book illustrations are rarely found in Korean scholarly works. As a foundational research, therefore, this article explores the illustrations of various prints of The Pilgrim’s Progress by six artists and role and development of the illustrations, consulting works of Gerda S. Norvig on the subject. Illustrations first appeared in the fourth edition of the book in 1680, two years after the first edition. Although the book had only two drawings, the event became the critical moment for the gradual emergence of book illustrations which also influenced and changed the constitution of the book itself. Of the illustrations in the book’s early days, it was the fourteen drawings in the fifth edition (1682) that first covered and visualized the general content of the book. But because adding book illustrations was a new development, the illustrations were far from eloquent and skillful in their design and carving technique. Three years later, a Flemish-French translation of the book appeared with nine illustrations by a Dutch poet and engraver Jan Luiken. These illustrations, engraved out of copper plates, show an advancement in the expression and technology of craftsmanship. In the eighteenth century, John Sturt’s fourteen illustrations were included in the 22nd edition, so-called the Queen Caroline edition (1728). The illustrations are praised for their unique aesthetical elements while maintaining the tradition of former editions. In 1788 eight drawings by Thomas Stothard were issued separately from the 1788 edition. Compared with the craftwork on the former illustrations, the painter prettified the design, which still remained in the tradition of genre-painting. Stothard's illustrations became popular, deeply influencing illustrations in the coming ages.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number of illustrations in The Pilgrim’s Progress increased while qualitative changes also appeared. In 1824 painter William Blake produced 28 mysterious watercolor illustrations based on his meditation and imagination. Henry Courtney Selous' 58 illustrations were placed in the 1844 Rev. Maguire annotated edition. Despite the busy composition, his works are acclaimed as expressing the theme of the book in distinct and dynamic ways. Throughout the three centuries of the book’s history, it was the famous artists of the age that improved the quality and creativity of the illustrations of The Pilgrim’s Progress. The illustrations in the book had been drawing the attention of readers to the text and leading them to understand briefly the pilgrimage to the Celestial City, regardless of readers’ literacy. Particularly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illustrations themselves were recognized and developed as an independent field, not as a part of the book. The drawings now spoke for themselves apart from the text, and people could comprehend the whole story only by appreciating the images. Surely, the story of the book in visualized illustrations imprinted smoothly in the reader’s memories. This article also briefly deals with the American illustrations of The Pilgrim's Progress.
        7,000원
        79.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매스 미디어가 문화변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문헌 검토를 통해 현대 문화변천과 매스 미디어와의 상관성을 세 가 지의 연구 문제로 설정하였다. 특히 이 연구는 문화적 인식 변화와 문화변천에 도 움을 주는 매스 미디어와 정치, 사회변천, 세계화, 경제 발전과 미래 문화에 매스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검토하는데 주요 목적이 있다. 매스 미디어는 우리 에게 이미 어느 정도의 통제가 가능하고 더 편리해져서 문화변천에 다양한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매스 미디어는 문화진화와 실천 과정의 직접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문화변천에 대한 매스 미디어의 영향은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모 든 국제화 사업과의 조화로운 융합에 성공함으로써 매스미디어가 문화적 가치 및 경제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5,100원
        80.
        201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Since its introduction in"Jeungbosallimgyeongje" in the mid-1700s, Chogyetang has continuously changed as a cooked food while still reflecting the era as in the following four phases. In the first phase from 1766 to 1920, Chogyetang was served as a hot pot dish consisting of boiled chicken with spring onions, vinegar, soy sauce, oil, and egg. The second phase from 1930 to 1950 involved the removal of vinegar, an important seasoning. Instead, a wider variety of materials such as beef, sea cucumber, abalone, cucumber, and mushroom were added. Third, from the late-1950s to 1980s, there were significant changes both in the materials and recipe. Chogyetang was changed into a cold food for consumption in the summer in which sesame, a new material, was added to make soup. The prepared soup was then poured over the chicken and vegetables. Fourth, from the late-1980s to the present, sesame, the main ingredient added in the third phase, was removed. Instead, vinegar, mustard, and sugar were added in order to increase taste. Therefore, Chogyetang has been changed into an a la carte menu item in which vegetables and noodles are added to boiled chicken, and it has become a popular summer food consumed when eating-out.
        4,300원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