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3

        1.
        202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의 목적은 일본 근대 초기 감옥의 체계와 노동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유신 후 홋카이도 개척기 집치감과 아바시리감옥의 사례를 통해 그것에 접근하였다. 이를 위해 연구는 관련 문헌을 분석하고, 현지 조사를 수행하여 홋카이도 개척과 수용자의 노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치안 유지와 자원 확보, 국방 강화 를 위해 행형제도를 개혁하고 수용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 는 사회에서 격리되어 제거될 존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할 유용한 노동력이었 다. 그것의 첫 출발지는 홋카이도였다. 북방의 척박한 지역이었던 홋카이도는 수용자의 노동으로 빠르게 개발되어, 이주민 이 유입되고 국방까지 안정화할 수 있었다. 이때의 노동은 현대의 그것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노동은 수용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다는 목적보다 국가의 전략적 목표를 위해 수행되었다. 노동의 환경과 방식은 매우 가혹하여 많은 수용자가 부상하거나 사망했 다. 그렇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지역은 활성화되었다. 이주민이 빠르게 유입되고, 경제 가 발전했으며, 감옥 관련 시설과 이야기는 관광 자원화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다시 한번 행형제도가 국가와 지역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부정적 영향력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홋카이도 개척기 일본의 경험은 행형의 발전을 모색 하는데 유의미한 사례가 될 수 있다.
        7,000원
        3.
        2024.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시기 한자자전에 [華]로 표기된 한자의 유형과 특징을 분석 하여 [華]로 표기된 한자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속에 포함된 한자의 원류를 찾아 [華]로 표기된 한자의 속성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한국 근대 시기에 출판된 자전석요(字典釋要)(1909), 한선문신옥편(漢鮮文新玉篇)(1913), 자 전대해(字典大海)(1913), 자림보주(字林補註)(1924) 등의 한자자전을 중심으로 [華] 로 표기된 한자의 데이터를 추출하고, 추출된 한자의 유형과 특징을 살피면서 [華]로 표기된 한자의 전거(典據)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華]로 표기된 한자의 원류를 파악하고 이 한자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사용되는지를 살펴서 한국 근대 시기 한자자전에 [華]로 표기된 한자의 속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당시 사용된 한자의 실태와 역사적 변천사의 재구를 실현함으로써 언어 문자학사와 지성사의 연구는 물론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토대 연구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아울러 한자문화권의 주요 국가인 중국과 일본 등 같은 성격의 자료 비교를 통해서 당시 사용된 한자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8,100원
        5.
        2023.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compositions of ethnic groups in Macau vary with time. Prior to the opening of the port, the majority of the residents in Macau were Chinese people, including those living on land and at sea. After the port was opened, with the increase of Portugal businessmen and missionaries, the population was divided into Chinese people and foreigners (so-called ‘Yiren’ or 夷人in Chinese). Chinese people living on land were mainly of Hakka, Fujian, and Cantonese descent. Those living at sea were referred to as ‘Tanka People’ (named ‘Danmin’ or 蜑民in Chinese). They lived on floating boats for their entire lives and were similar to the ‘drifters’ in Japan. Since modern times, many refugees from mainland China and Southeast Asia flooded into Macau due to warfare. The development of industrialization required a larger number of laborers, and some ‘coolies’ entered Macau in legal or illegal ways, making it a multi-ethnic city. However, the Tanka people were not considered a minority ethnic group under the national ethnic policy of 56 ethnic groups since they did not have an exclusive language and shared dialects in different regions. As the ports inhabited by Tanka people gradually restored foreign trade, the boats and stilt houses used by Tanka people were dismantled to expand the infrastructure area of the ports. Many Tanka people began to live on land and marry people on land, leading to the disappearance of the Tanka group in Macau. The fishing boats and stilt houses used by Tanka people have also disappeared, with only a few remaining in areas such as Pearl River Delta and Hong Kong. This paper examines the natural and social environment of Tanka people in Macau from the Ming and Qing dynasties to the Republic of China, as well as the adaptive changes they adopted for the aforementioned environment in terms of living space and architectural type, on the basis of summarizing the historical activities of Tanka people. Finally, this study provides a layout plan and interior structure of the most commonly used boat for Tanka people from the Ming and Qing dynasties to the Republic of China, with the use of CAD and other technical software, along with reference to written historical documentation, and provides a case study for further research on the architectural history of Macau's inner harbor cities, from anthropological and folklore perspectives.
        4,600원
        8.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근대 신성로마제국, 특히 그 독일어권 지역 귀족 궁정들의 여성 음악후원, 그 후원을 통한 음악 및 음악문화 전파를 탐구한다. 탐구대상은 엘리자베트 폰 헤센-카셀, 소피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소피 샬로테 폰 하노버의 경우이다. 이들은 당대에 통상적으로 여성에게 허용된 범위를 넘어선 인문주의적, 음악적 교육 및 체험을 누렸으며, 이미 본가의 궁정 에서 자신의 연주력, 연주 기획력을 펼쳤다. 훗날에는 시가 궁정의 음악을 (재)구성하고 재건하며 관리해냈다. 본가의 음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며 그 과업들을 수행해냈다. 그리하여 근대 이탈리아, 프랑스의 음악 양식과 극적 음악장르들, 실내악이 이동하며 정착했다. 독일 바로크 음악의 전파, 근대 독일 오페라의 발전도 구현되었다. 영국 음악이 독일 지역들로 스며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17, 18세기 독일의 음악 중심지들에 음악적, 음악문화적 정체성의 토대가 놓여졌다. 음악교육, 음악애호의 대물림을 통해 실현된 모녀 2대에 의한 2중 전파 역시 흥미롭다. 당대 궁정 음악후원의 주목적이었던 군주의 권세 과시를 벗어난, 음악에 대한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후원 행위도 특징적이다.
        6,700원
        9.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P’yohaerok was written by the order of King Sŏngjong in June 1488. It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drifting records to China in the Ming era, which was published in six different printed versions in the Chosŏn period. There are two sets of versions, each of which is comprised of three. One is in Toyo Bunko, Yomei Bunko, and Kanazawa Bunko, all of which had been printed before Hideyoshi’s Invasion of Chosŏn in 1592. The other printed and published as a part of Kŭmnamjip after the Invasion has been available in South Korea. P’yohaerok is really an excellent work. For not only does it possess an important historical value of the Ming Dynasty but also allows us to discover a variety of linguistic data and phenomena such as nonstandard forms of characters, vocabulary, grammar and phonemes of native languages in the Ming era, etc. From the perspective of linguistic discourse, the author makes a detailed analysis of the Modern Chinese Linguistics of the work.
        5,800원
        10.
        201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Ganggyeong, a city which is located at riverside of Geum River, played a role to connect the inland cities and the coastal cities through the Geum river waterway. In Chosun dynasty, Ganggyeong was one of the three major markets in Korea, and at the same time, it was one of the two river docks in Korea. However, after the railway was installed in Korea, railroad was more important than waterway in transporting logistics and in 1911 Honam railroad and Ganggyeong railway station was installed. Thus it was necessary to reorganize urban structure of Ganggyeong city from the traditional river-dock city to modern railroad city. In addition, urban infrastructure to prevent flood damage was needed because Ganggyeong suffered from floods and water shortages every year. Therefore, between 1910s and 1930s large-scale social infrastructures including road, water and sewage system, river bank, floodgate was constructed not only to revitalize the declining city but also to prevent flood damage and water shortages that hinder urban development. The installation of urban infrastructure has enabled the urban expansion and development of Ganggyeong city, and it is still served as a basic urban structure.
        4,200원
        11.
        2019.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호남학회 성립 이전에 호남지역에서 상경한 뜻있는 인사들은 주권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갈망했다. 그러한 열망을 품은 당대 호남의 지식인들은 계몽 단체에 참여 하여 활약하는 동시에 국운 회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경호남 지식인들은 호남지역의 계몽과 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호남학회를 조직하였다. 호남학회를 근거지로 회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호남을 기반으로 특정 지향점을 공유하는 지식인 공동 체가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본고는 호남학회 활동시기 참여자들의 공론장 형성 활동을 기술하 고자 하였다. 특히 공론장의 주요 의사소통 행위자로 활약한 이들의 공론 표출 양상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호남학회와 『호남학보』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공동 체의 성격과 유학적 관계망을 통한 호남 공론장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근 대전환기 호남의 공론장 연구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7,700원
        12.
        2019.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면서 왕조의 정통성과 성전파괴를 경험하였지만,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편협된 틀을 깨고 야웨신앙을 견고히 하면서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공동체와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회당을 세웠으며, 그들의 생활을 만인에게 공개하고 율법을 실천하며 모범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실생활에 서도 경건한 생활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에 대한 도전을 주었으며 그 자체가 유대교 선전의 효과를 낳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존재의 선교, 즉 삶을 통해 보여주는 선교에 중심을 두고 있다. 포로기에 유대인들의 생활을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며, 회당을 세우고, 신앙재건을 위해 노력한 점을 확인하였으며, 그들의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 자신들이 섬기던 하나님의 뜻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해 나갔는지 회당공동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대교 회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하였다.
        6,600원
        13.
        2016.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study presented attempts to analyze and categorize Chosun’s food ingredients and culture through a Western perspective based on 32 representative Western documents pertaining to old Korea. Before modernization, Westerners visited Chosun during their visits to old China or Japan. Westerners were most active in Chosun from the open port period to the annexation of Korea to Japan occupation. They were teachers, missionaries, diplomats, and doctors visiting Chosun with personal goals. In 31 book traveler’s journal, it records Chosen’s mainly produced ingredients, such as grains, spices, fruits, cabbage, chicken, and chestnuts; foods from Chosen include kimchi, soup, and tofu. Foreigners especially liked foods made of eggs and chicken, but they did not enjoy Chosun’s lack of sugar and dairy. Thirty-one book foreigners’ records describe Chosun’s Ondol, kitchen, crock, fermented foods, low dining tables, and chopsticks. Chosun people liked dog meat, unrestrained drinking culture, sungnyung, and tea culture. Foreign documentation on Chosun’s food culture allows modern scholars to learn about Chosun people’s lifestyles, as if their lives were a vivid picture
        5,400원
        15.
        2016.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삼척이 동해안의 교통 요지였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삼척은 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아 농산물은 풍부하지 못하였지만, 해산물과 광산물 자원은 풍부하였다. 강원 남부 지역의 탄광은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기초 에너지를 공급해 왔다. 한국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삼척의 시멘트 생산은 기본 동력이 되었다. 삼척의 부족한 농산물을 풍부한 해산물과 광산물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필수적이었다. 물자의 교환과 사람의 이동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전제되어야 했다. 삼척으로 연결되는 육로와 해로는 근대 이후 더욱 확장되어 나갔다. 삼척은 군사 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삼척이 포항과 함께 동해안 방어를 위한 기지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물류 측면에서 보면 삼척은 부산↔원산 구간의 기항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삼척은 지리적으로 한반 도와 일본, 러시아를 잇는 동북아 물류의 거점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일찍부터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남북 분단 이후 그 길이 끊기고 말았다. 앞 으로 삼척이 이른바 통일시대를 대비하고자 한다면, 과거에 삼척이 부산↔원산 구간의 기항지로서 담당했던 역할에 대하여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700원
        17.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Western perspective on the food and food culture of Modern Times in Korea (from the late of Joseon Dynasty until Japanese colonial era). Literature and written records were analyzed. This analysis revealed that the heart of the mill in this period involved rice, and that a common beverage was sungnyung made from boiled scorched rice (in contrast to tea as the common beverage in Japan or China). The most important subsidiary food in Joseon was vegetables, especially Kimchi. Westerners viewed Kimchi as a smell symbolizing Joseon and their meal times. Even though both Kimchi and cheese are fermented food, just like Westerners could not stand the smell of Kimchi, Koreans viewed the smell of cheese unpleasant. Westerners viewed German sauerkraut as Western food counterpart to Kimchi, as sauerkraut is also fermented food made of cabbage. Regarding the eating of dog meat in Joseon, most Westerners viewed it as brutal; however some interpreted it as a difference in food culture. In addition, the eating of raw fish and its intestines felt crude to Westerners.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Joseon's food and Western food was that Joseon had no dairy products and no sugar. The most highly preferred fruit for Westerners was the persimmon, and ginseng was already widely recognized and recorded as a medicinal plant. Joseon's desserts were also favorably evaluated. In contrast, the excessive gluttony, heavy drinking, and unsanitary conditions in Joseon were problems pointed out in many records.
        4,800원
        18.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논자가 분석ㆍ점검한 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봇짱이 공부했던 메이지시대의 물리학교는 낙제를 하지 않고 졸업하는 학생이 10% 전후로 입학은 쉬웠으나 졸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학교였다. 실력이 모자라는 학생에게 엄격한 학칙을 적용하여 낙제를 시키고 있었던 물리학교를 공부에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닌 봇짱이 3년간 학교를 다니자 그냥 졸업하라고 해서 불평하지 않고 졸업해 버렸다고 표현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가 당시 물리학교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작품에 묘사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작자의 의도된 유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일본인 특유의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최대한 낮추어 말하는 표현 방법 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둘째, 메이지시대 말경에 일본정부가 인정하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여 스미토모총본점에 입사한 사람의 급료가 40엔, 경시청 순사의 급료도 10∼13엔 정도였던 것을 고려해볼 때, 봇짱이 물리학교를 졸업하고 시코쿠 지방에 있는 중학교에 수학 교사로 취직을 하여 40엔이라고 하는 급료를 받은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교사로 취직하여 초임금 40엔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 교직사회에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있던 물리학교 출신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일본의 근대시대에는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급료의 차이와 신분의 차이가 났던 시대였다. 메이지 정부가 인정하는 제국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급료를 많이 받고 고급관리와 관리직 등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학벌에 의한 급료의 차이, 신분의 벽을 만들어 제국대학에 못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열등감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국대학 출신은 학문적으로는 우수했을지 몰라도 인간이 지켜야 할 인성적인 면까지 우수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벌사회의 권력화에 대한 어두운 이면이《도련님》에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봇짱은 자신도 물리학교 출신이라고 하는 중간 엘리트의 학벌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대학 출신의 슈퍼(super) 엘리트 학벌 소지자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대학 출신 교감 선생과 충동적으로 대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고 점차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일본 근대의 독특한 학벌이라는 사회제도가 존재하는 시대에 봇짱이 제국대학 출신인 아카샤쓰를 강자로 인정하지 않고 불신임하고, 충돌하려 했던 것은 필연적으로 좌절과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500원
        19.
        2001.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근대교육기(1876∼1910) 중 1905년부터 1910년 사이는 우리 나라 교육에 대한 일제의 간섭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우리 민족은 전국 단위나 지방 단위로 학회를 세웠고, 학회를 통하여 근대 교육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연구에서는 근대교육기에 국내에서 출판된 학회지 9종 132권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근대교육기에 발간된 학회지의 주요 내용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역사나 지리 등의 내용과 계몽적인 차원에서 서구의 정치나 경제 체제를 소개하는 글과 더불어 자연과학에 관한 논술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둘째, 과학 관련 논술을 분야별로 분석해보면 생리· 위생을 포함한 생물학 분야와 지구과학 분야가 비교적 많았다. 반면에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는 아주 적었다는 특징이 나타난다. 셋째, 학회지에 게재된 지구과학 관련 논술만 분석하더라도, 대부분 같은 저자에 의해 교과서적인 기초 내용을 연재한 논술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술지에 게재된 과학 관련 논술은 근대 교육기에 우리 나름의 과학 교육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4,600원
        20.
        202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의 목적은 동서교류문헌으로서 교리교육서(catechism)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아시아 선교 상황에서 새롭게 작성된 예수회 순찰사 발리냐노 (Alessandro Valignano 范禮安)의 《그리스도교 신앙 교리교육서》(Catechismus Christianae Fidei, 1586)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먼저 교리교육서라 는 장르의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고(II), 발리냐노의 교리교육서의 그리스도 교 변증 신학을 규명하고(III), 중국 선교사 루제리(Michele Ruggieri 羅明 堅)의 《신적인 일들의 설명》(Vera et Brevis Divinarum Rerum Expositio, 1582)와 비교하여 특징을 밝힌다. 발리냐노의 일본 종교와 문화 비판과 그 리스도교 변증은 이성적 논증과 신앙적 진술로 이루어지며, 그의 변증신학 은 만물의 창조자와 통치자, 구원자인 하나의 근원자 개념과 영혼의 영적 실체, 불사불멸, 내세의 보상과 형벌을 강조했으며, 작용인, 영적 형상, 실 체적 형상, 네 원소, 질료와 형상 등 철학 개념을 활용하여 그리스도교를 변증했다. 이러한 점에서 발리냐노의 교리교육서는 동서교류의 상황에서 교리교육서가 새롭게 발전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