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케이트 크로포드와 블라단 욜러의 협업 프로젝트인 <AI 시스템의 해부>를 중심으로 인간, 사회, 지구를 관통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작동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담론을 읽어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AI 시스템의 해부>는 인공지능 음성인식 스피커인 아마존 에코를 사례로 삼아 인공지능 기술세계의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가시화한 ‘데이터 시각화’로서, 인공지능 시스템의 이면에 감추어진 노동, 데이터, 자원의 무자비한 추출 구조를 드러낸 해부학적 지도이다. 크로포드와 욜러는 인공지능 기술이 작동하는 기술세계의 지형을 탐구하고 시각화하 기 위해 ‘비판적 지도제작’을 중요한 인식적, 실천적 방법으로 사용해 왔다. 이에 본고는 <AI 시스템의 해부>에 대한 ‘지도 읽기’를 수행하되,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가 ‘존재지도학’에서 제시하는 지형학의 네 가지 요소를 범주로 삼아 거대 기술세계 지형도의 구조와 의미를 분석하였 다. 이를 통해 본고는 크로포트와 욜러의 지형도가 인공지능 기술세계의 광범위한 추출주의를 비판적으로 가시화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본 연구는 웨스트민스터 궁 장식을 목표로 1843년 열린 카툰 경연대회에 관한 연구이다. 140점이 선보인 카툰 경연대회는 영국에서 전례 없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841년 왕립위원회는 새 국회의사당 재건에 맞춰 영국 내 순수미술을 진흥시키기 위해 발족되었다. 본 연구 는 웨스트민스터 궁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보고서 자료들을 통해 1843년 카툰 경연대회를 분석하고자 한다. 카툰 경연대회 공고문에 따 르면 매체는 프레스코로, 주제는 영국 역사와 밀톤, 스펜서, 세익스피어 문학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카툰 경연대회는 영국 미술의 진흥을 목표 로 했으나 실천 과정에서 여러 가지 허점을 보였다. 이는 국가 규모의 행사에 비해 사전에 충분한 준비 없이 개최되었음을 나타낸다. 비록 준비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으나 순수미술 진흥을 기치로 내건 카툰 경연대회는 빅토리안 벽화사의 태동과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카툰 경연대회는 영국 미술의 기초 부족이라는 자각과 함께 영국 미술을 장려하기 위한 국가적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각과 시도, 노력은 독립적 학문으로서 빅토리안 회화사와 구분되는 빅토리안 벽화사 정립의 필요성을 촉구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충주 고미술 거리의 공간 구성 및 특징을 살펴보고, 심층 인터뷰 기법을 이용하여 충주 고미술 거리에 대한 가치와 과거와 현재의 변화상을 정량적, 정석적으로 분석하여 활성화 방안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거리문화, 문화의 거리 및 고미술 거리 활성화, 충주 고미술 거리에 관한 선행연구를 분석하고, 충주 고미술 거리의 상인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충주 고미술 거 리 활성화를 위해서 다섯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고미술 및 수석 상인들에 대한 전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둘째, 고미술과 수석에 대한 가치가 지역민, 유관기관, 지자체 공무원 들을 중심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셋째, 평생교육 및 관관산업 지원을 통해 유입 인구를 확대하여야 한다. 넷째, 투명한 거래문화 확립을 위한 법적 규제 완화이다. 다섯째, 충주 고미술 거리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고미술 및 수석의 가 치를 알고 즐길 수 있는 후속세대 양성이 필요하다.
이 논문에서는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1877~?)의 저작 경주의 전설(慶州の傳說) (1927년 초판)을 중심으로, 석굴암(石窟庵) 본존불 여래좌상과 조선의 민간신앙이 일제강 점기에 근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관계 지어지고 해석되었는지 고찰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들을 내려주는 불상’으로 이미지화된 석굴암 본존불이다. 글에서는 경주의 전설에 기술 된 석굴암 본존불 전설을 확인하고, 이것이 일제강점기 석굴암 본존불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 하는 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핀다. 오사카 긴타로는 경주의 전설에서 석굴암 본존불과 관련된 전설로 삼국유사(三國遺 事)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徳王忠談師表訓大徳)」조의 혜공왕(惠恭王) 탄생 전설을 인 용하고, 이를 당대 조선인의 ‘극단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남아 선호와 연관시켰다. 그리고 석굴암 본존불이 조선인들에게 아들을 내려주는 부처로 신앙되고 있다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기술은 일제강점기 일본 지식인들이 석굴암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석굴암을 타자 조선인의 우상으로 폄하하는 인식은 그것을 동양 의 걸작으로 극찬하는 시선과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동양은 하나라는 태도와 조선은 비문명이라는 태도가 공존하던 근대기 일본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연관된다. 이 글 은 식민지 시기 석굴암에 대한 태도를 확인하기 위해 기존에 연구된 석굴암의 미술사학적 위상 과 더불어, 비문명화된 타자의 우상으로서의 석굴암 이미지를 새로이 확인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의 복장 기록인 중수 원문(1865년)의 해석과 불 상 양식의 비교분석을 통해 불상의 제작 시기가 1628년임을 밝힌 것이다. 중수 원문의 기록 에 의하면,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628년에 조성되었고, 1802년ㆍ1845년ㆍ 1865년에 걸쳐 중수되었으며, 원 봉안처는 해남 대흥사 대광명전이었고, 1845년과 1865 년에 불상의 중수를 주도한 승려는 초의 의순이었음이 확인된다. 초의 의순은 19세기 전라 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원담 내원(1845년)과 용완(원) 기연(1865년)과 함께 신 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을 개금ㆍ중수했다. 특히 초의 의순은 선교(禪敎)와 학예(學藝)에 뛰 어난 자질을 가졌으며 19세기의 대흥사 불사를 이끈 승려이다. 두 화승(내원과 기연)은 초의 의순이 주도한 대흥사 불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이 1628년에 조성된 사실은 중수 원문의 기록과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상들과의 양식 비교를 통해 파악했다. 초의 의순이 쓴 「대둔사신건광명전상 량문(大芚寺新建光明殿上樑文)」, 「대둔사비로전신건화연소(大芚寺毘盧殿新建化緣疏)」, 「불상개금모연문(佛像改金募緣文)」에 의하면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628년에 조성 된 후 대흥사 대광명전 비로자나삼불상 가운데 좌존으로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 사 대광명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1841년에 새로 건립되었다.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의 양식 특징은 조각승 태전이 조성한 대흥사 목조약사ㆍ아미타불상(1612년)을 계승했고, 현진이 1610년에서 1630년 사이에 제작한 불상과 친연성이 강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응원ㆍ인균파 및 수연파 불상의 특징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조성되어 19세기 대흥사 현창 운동 과정에서 새로 건립된 대광명전에 봉안되어 개금ㆍ중수된 불상으로, 교학과 학예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가진 초의 의순이 불상의 개금ㆍ중수 불사를 주도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교사 및 불교미술사를 연구하는데 자료의 가치가 매우 크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청동 방정의 기형을 모방한 것이다. 11세기말~12세기 전반 고려와 북송ㆍ요(遼) 국가 간 활발한 문물교류를 가졌으며, 이 무렵 송나라 휘종 연간에 편찬된 선화박고도(宣和博古 圖)가 교류를 통하여 고려로 전래되었다.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의 모본은 선화 박고도 권1에 수록한 상나라 청동 ‘상소부정(商召夫鼎)’이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다. 지금까지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 내부에 새겨진 명문은 선화박고도 상소부정 명문의 해석을 인용하여 각각 한자(漢字) ‘亞 召夫 子ㆍ辛ㆍ月(아 소부 자ㆍ신ㆍ월)’로 읽어 냈다. 그러나 선화박고도 자체가 가진 사료적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류가 있 었으며, 명문을 판독할 때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선화박고도의 주석에서 벗어나 그의 실재 한 의미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는 은허(殷墟)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과 은주금문집성(殷周金文集成)에 수록된 명문 탁본을 기준으로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와 유사한 명문을 확인하였 다. 이 논문에서는 <청자 양각 도철무늬 사각 향로> 명문 첫 번째 기호에 있는 아(亞)자형 테두리는 상나라 족씨명문(族氏銘文)의 특징적인 부호이며, 본고에는 학계에서 지지도가 높 고 유래가 가장 깊은 ‘아자종묘설(亞字宗廟説)’을 채택하여 명문에 아자는 ‘조상의 묘’와 관 련이 있는 것으로 봤다. 명문의 첫 번째 기호는 상 말기에 지위가 높은 亞(발음 : 아호) 씨족(氏族)의 족씨명문(族氏銘文)으로, 두 번째 기호는 상나라에 실존하는 ‘고죽국(孤竹國)’ 의 국명이자 족씨명문으로 해석했다.
고려청자 문양 연구에서 그동안 모란과 작약, 훤화와 연화 문양의 세부 특징을 분석하지 않고, 훤화를 연화나 초화로 분류하거나 작약을 모두 모란으로 명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 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 정요 자기의 영향을 받은 각 화목의 문양과 구성 요소를 비교 분석하여 문양을 분류하고 명칭 분류의 필요성을 제기하였 다. 대부분 모란으로 분류되었던 작약문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약이 중앙 관사인 중서성을 상징했던 사실도 문헌 기록을 통해 밝혔다. 또 정요 자기에서 연화문으로 분류되던 여러 형 식의 훤화문도 고려청자에 영향을 주었다. 정요 자기와 고려청자의 화훼절지문은 문양 구성이 유사하지만 시문 기법에서는 차이가 있다. 고려에서는 정요 자기의 음각과 유사한 획화 기법 대신에 성형과 시문이 동시에 가능 한 압출양각 기법을 선택하였다. 정요 양식의 화훼절지문 청자는 12세기 전반과 후반의 제 작 경향이 달랐다. 12세기 전반에는 압출양각과 함께 음각 기법도 구사하고, 백색내화토 빚 음이나 규석 받침이 품질 차이 없이 생산되었다. 정요 자기의 문양을 해체하여 재조합하거나 시문 기법을 바꾸는 등 외래 요소에 대한 적극적 변용도 행해졌다. 그러나 12세기 중반 이후 부터는 절요접시의 꺾임이 완만해지고, 모란절지문과 작약절지문만 압출양각 기법으로 13세기 초까지 생산되었다. 또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의 ‘定器制度’에 대해 연관된 여러 용어의 용례를 검토한 결과, 정요 자기의 크기, 형태, 규격 등을 의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정기제도’는 12세기 전반에 고려청자 제작에 정요 자기의 영향이 매우 컸던 상황을 충실하게 기술한 것으로 판단 된다.
전라남도 곡성군에 위치한 대안사(大安寺)는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785~861) 이 창건한 사찰이다. 태안사지(泰安寺誌)에 수록된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裡山泰安寺事蹟) 」에 따르면 대안사(현 태안사)에는 두 구의 약사철조불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다만 현재는 조성 당시의 온전한 형태의 불상이 아니라 ‘철로 만든 손, 즉 철제(鐵製) 불수(佛手)’ 1점만이 전한다. 이 철제 불수는 남아있는 형태와 선종사찰의 사적기, 일제강점기 공문서 등을 고려할 때, 손바닥을 앞쪽으로 뻗은 수인, 즉 시무외인을 결한 오른손으로 판단된다. 동시기에 창건된 실상사, 삼화사, 성주사의 주존불처럼 대안사 철불도 동리산문의 개창 당시에 조성된 노사나불 로 추정된다. 대안사 금당의 노사나철불은 후대에 사적기를 엮는 과정에서 세속의 통념에 따라 약사철조불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동리산문 대안사는 사역 내 금살당(禁殺幢)을 설정하는 등 예영계 왕실의 후원을 받아 사세 를 확장해나갔다. 혜철은 막대한 경제력을 토대로 841년 장보고 사후 급격하게 피폐해진 지방 의 민심을 위무하고 교화하기 위해 철불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실상사, 성주사 등의 지방 선종사찰을 후원하여 승려를 포섭한 문성왕의 지방통치책의 일환이며, 대안사 철불 은 잦은 전쟁으로 고통받던 지역민들의 민심을 결집하는 존상(尊像)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9세기 신라 구법승은 당에서 어떤 불교 성물을 보았을까? 이 글은 신라 구법승과 같은 시기 당(唐)에 머물며 장안(長安)과 양주(揚州), 태주(台州) 등지에서 불교 경전과 서적 뿐 아니라 불화와 백묘 도상, 밀교 법구 등을 수집해 간 일본 구법승들의 청래목록(請來目錄) 을 살펴보았다. 입당팔가(入唐八家)라 알려진 일본의 9세기 구법승, 즉 사이초(最澄), 구카 이(空海), 조교(常曉), 엔교(圓行), 엔닌(圓仁), 에운(惠運), 엔친(圓珍), 슈에이(宗叡)가 작성한 청래목록을 읽으며 그들이 가지고 온 그림과 도구 등의 미술사 관련 물목을 정리하 고, 신라 불교미술과의 연관성을 탐색해 보았다. 9세기 일본 승려들이 입당한 주요 목적은 밀교 수법에 필요한 만다라와 도구 등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여정에 따라, 또 개인적인 관심사나 인연에 따라 천태(天台)나 선(禪) 등 비밀 교적인 그림이나 성물도 수집했음을 확인했다. 이들이 공들여 수집한 물건들 가운데에는 신 라 구법승도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것이고, 신라로 장래(將來)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화본(畫本)으로 전해진 밀교 도상이나 단감(檀龕), 즉 전단목(栴檀 木)으로 제작한 불감 등 그간 신라 불교미술 연구에서 주목해 온 항목을 재확인했다. 이에 더해 근래 주목을 받는 경주 출토 <범한다라니(梵漢陀羅尼)>(본관6860)가 사이초의 목록 에서 보이는 <범한양자수구즉득다라니(梵漢兩字隨求陀羅尼)> 등 범자와 한자 두 글자로 적힌 다라니의 유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리고 조교와 엔교, 엔닌의 목록에 보이는 보리상(菩提像)과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의 유통 양상을 주목했다. 이 외에도 목 록에 보이는 다양한 종류의 고승 진영, 오대산(五臺山) 및 천태산(天台山) 관련 유물, 인불 (印佛)과 인탑(印塔) 역시 앞으로 더 주목해 보아야 할 소재임을 제시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청 황제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6)가 발문한 사 슴뿔 그림인 <녹각도(鹿角圖)>가 소장되어 있다. 기존 연구에서 이 그림은 건륭제가 서양의 회화 주제인 사슴뿔을 서양 화법을 적용하여 그림으로써 서양풍을 모방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전용하고자 한 시도로 이해되었다. 본고는 관점을 달리하여 <녹각도>의 상서적(祥瑞 的) 요소를 발견하고 청 황제들의 대표적인 사냥감이었던 사슴의 뿔이 사냥 전리품에서 산령 (山靈)이 보낸 상서로운 징표, 즉 부서(符瑞)로 변모한 과정을 고찰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북 경ㆍ심양고궁박물원에 소장된 홍타이지, 강희제, 건륭제가 제작한 녹각의(鹿角椅)를 통해 청 황제들에게 있어 사슴뿔이 만주족의 전통과 용맹함을 보여주는 사냥 전리품이었음을 확인 한다. 또한 <녹각도>에 실린 건륭제의 발문인 ‘녹각기(鹿角記)’를 분석하여 이 사슴뿔이 어떻게 부서가 되었는지 밝힌다. <녹각도>에서 건륭제는 사냥감보다 서수(瑞獸)로서의 사슴 을 강조함으로써 청 황실의 사냥 의식이 중시한 만주적 무용(武勇) 위에 한족의 전통 사상인 천인감응설(天人感應設)에 의거한 부명(符命)의 가치를 덧입혔다. 이처럼 <녹각도>에서는 사냥을 자연의 정복이 아닌 자연과의 교감으로 해석하여 만주 황권을 성군의 경지로 끌어올 리고자 한 건륭제의 의도가 읽힌다.
본 연구의 목적은 주간 보호센터 노인을 대상으로 집단미술치료가 스트레스, 무력감 및 자아존중 감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려는 것이다. 노인 인구 증가와 수명 연장으로 노년기의 행복한 삶이 중요 해지고 있으며, 자존감을 높여 노년기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치료적 개입이 필요하다. 연구는 P시 소재 J주간 보호센터 이용 노인 30명을 대상으로, 실험집단과 통제집단을 각각 15명씩 무선 할당하였 다. 실험은 2023년 6월부터 9월까지 주 1회, 60분씩 총 15회기 진행하였다, 효과성 검증 도구로는 스 트레스, 무력감, 그리고 자아존중감 척도를 사용하였다. 연구결과는 SPSS WIN 26.0으로 t-test와 Mann-Whitney의 U, Wilcoxon 부호순위 검정을 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실험집 단 사전-사후 스트레스 척도에서 유의한 감소로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둘째, 실험집단 사전-사후 무 력감 척도에서 유의한 감소로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셋째, 실험집단 사전-사후 자아존중감 척도에서 유의한 향상으로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연구는 집단미술치료가 주간 보호센터 노인의 스트레스 및 무력감을 감소시키고 자아존중감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는 집단미술치료가 노년기 삶의 질과 행복감 증진에 효과가 있음을 검증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집단미술치료가 노년기 자존감 과 행복감 향상에 의의가 있다.
본 연구는 반려동물을 상실한 성인의 심리적 회복과 성장을 돕기 위한 애도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실행한 후 참여자들의 변화를 질적으로 분석한 연구이다. 연구자는 미술, 글쓰기, 명상기법 등을 포함한 통합적 애도 프로그램을 구성하였고 이를 반려동물을 상실한 성인 8명에게 실시 했다. 총 8회기의 프로그램 과정 및 프로그램 전과 후에 참여자들과 1대 1로 심층면담을 수행했고, 이를 Colazzi가 제시한 체험적 현상학적 연구 방법으로 분석했다. 애도프로그램 참여를 통한 반려인들의 변화를 정서 적, 인지적, 관계적, 행동적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는데, ‘긍정적 추억 이 되살아남’, ‘죄책감의 완화’, ‘자기에 대한 자비’, ‘부정적 자신과의 화 해’. ‘새로운 삶의 정체성’, ‘반려동물과의 유대감의 지속’, ‘상호지지와 유대감’, ‘현재의 삶에 집중’, ‘가치지향 행동’이라는 9개의 구성요소와 34개의 하위 구성요소가 드러났다.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반려동물 상실 자조모임이나 애도 집단 프로그램 구성을 위한 제언을 했다.
이 논문은 호세 에스테반 무뇨즈의 탈동일시 개념을 바탕으로 아파르트헤이트 해체 이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여성 노동자의 젠더적, 인종적, 계층적 정체성을 새롭게 탐색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역할을 재정의하는 미술 작업을 조명한다. 브리짓 베이커의 장소-특정적 퍼포먼스 사진인 《블루칼라 소녀》 연작과 메리 시반데의 ‘블루 시기’ 소피의 극사실주의 조각 및 사진 은 슈퍼히어로의 속성이 덧입혀진 블루칼라 노동자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에 주목한 본 연구는 두 작업의 매체적, 형식적 특성, 서술의 구조, 그리고 창작과 전시의 맥락 등을 촘촘히 분석하며 베이커와 시반데가 각각 어떻게 슈퍼히어로의 이미지와 서사가 지닌 전통과 권위를 비판적으로 차용하여 여성 노동의 사회정치적 개념을 재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지 논의한다. 나아가, 베이커와 시반데의 작업이 공유하는 노동과 패션 사이 의 시각적, 정치적 역학, 그리고 작가의 예술적 실천과 캐릭터의 노동 모두에 내재한 수행적 속성이 남아공 여성 노동자들의 사회정치적 영향력의 확장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밝힌다.
본 연구는 독일 외교관이었던 리하르트 헤르츠(1898-1961)가 한국에 체류한 시기(1956- 1960) 동안 고미술품 수집과 예술가 후원에 힘썼으며 미술평론에 힘썼던 배경과 활동을 살펴본다. 그가 함부르크 대학에서 어윈 파노프스키 하에 수학했으며 외교관으로서 아시아 미술을 수집하던 컬렉터이며 나치 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후 미학 저서와 글을 발표했던 독일계 유대인 지식인이었음을 밝히고 그의 지적 배경을 분석한다. 그리고 한국에 서 영어와 한글로 발표한 그의 평론과 잦은 전시장 방문은 당시 취약했던 한국 평론계의 권 위를 세우는데 기여했으며 미술의 ‘현대성’을 두고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에 한국 작가들이 서구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을 추종하던 분위기에 일조했다는 점을 밝힌다.
본 연구는 취미가 직업이 되는 하비프러너 도슨트(Hobby-Preneur Docent) 의 요건을 도출하고, 이들 활동의 개인적 의미와 사회적 영향에 대해 고 찰하고자 하였다. 하비프러너 도슨트는 취미활동에 가치를 두고 이와 관 련한 지식, 경험 등을 쌓아 전문성을 갖추어 경제활동을 하는 도슨트를 뜻한다. 하비프러너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는 6명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 하여 지오르기(Giorgi)의 현상학적 연구방법으로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하비프러너 도슨트의 요건은 개인적 성장과 자족감 등 지속적인 내적 보 상과 경제적 보상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불안정한 고용과 낮은 경제적 보상에도 불구하고, 흥미와 재미를 느끼며 활동의 가치를 찾고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만족감이 높다. 이들의 활동은 개인적으로는 삶의 만족감 증진, 존재의 효능감 등 긍정적 경험을 제공 하여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이는 사회적 자본형성에 기여할 수 있 다. 한편 갤러리나 아트페어에서의 활동은 미술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 을 제시할 수 있고 문화예술의 저변 확대로 문화 민주주의 실천에 기여 할 수 있다.
미술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은 다양한 사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특히 실학사상은 실경산수화의 전개에 중요한 영 향을 미쳤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실학사상이 반영된 한·중·일 삼국의 실경산수화를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중·일 삼국에서 전개된 실학사상은 다소간의 시기적 편차 를 두고 각국의 정치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전개 되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현실과 사실이라는 현상에 각별히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경향은 미술 방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실경산수화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한·중·일 삼국에서는 17~18세기에 자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는 기유(紀遊) 문화의 유행을 배경으로 특정 지역의 경관을 그리는 실경산수 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에서는 17세기 중반 안휘성 출신 염상(鹽商)의 풍부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황산도(黃山圖)가 제작 되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에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완성 된 이후 19세기에는 김홍도 화풍의 실경산수화로 발전하였다. 일본에서도 18세기에 이케노 다이가(池大雅)에 의해 후지산이 진경도로 다루어졌고, 19세기에는 우키요에 풍경화로 재탄생되 어 대중적 상품 이미지로 전환되는 독특한 전개를 보여준다. 한·중·일 삼국에서 실경산수화는 실학사상 중 실사구시(實事 求是)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실학사상은 한·중·일 삼 국의 실경산수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척도를 제공할 것이다.
본 논문은 ‘민간회화로서 무화(巫畵)의 예술적 기치-이미지의 미적특질을 중심으로’를 회화사적 입장에서 실증자료를 토대로 성찰하고자 한다. 그 동안 무화에 관한 도상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민속학적 관점에서 문화사적 의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측면이 다수를 이루었다. 신의 형상을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기에 불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회화사에 서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져야 되는 측면에 있으나, 무(巫)에 대한 부정적 시선 과 특정한 사조 또는 대표적인 작가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는 미술사에서 적극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장르이다. 무명(無名)의 작가에 의 해 그려졌으며 무당이 죽음이 다가오면 자신이 봉안하던 무화를 땅에 묻거나 불태워서 정리하는 관습 때문에 100년 이상 된 무신도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관한 연구를 꺼린다면 한국 인의 고유한 신에 대한 관념과 미적인 사유체계에 관한 이해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라 판단한다. 이러한 연유로 본 논문에서는 무화만이 지닌 미 적 특수성을 찾고자 하며, 이는 기층의 미감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것 이라 본다. 본인은 무화의 예술적 가치를 미적인 측면에서 논하기 위해서는 방향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속학자인 김태곤은 무화는 민간신앙 속에서 전 승된 일종의 원시회화이므로 민화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무화를 전형 적인 순수한 민화이고 말하고 있다. 민(民)에 의해 소통된 민간회화라는 점이 민화의 핵심이라면, 무화(巫畵)는 무당의 집인 신당에서 사용되었지만, 그 당 시 대중들의 욕구에 의해 제작되고 소통되어진 측면이 크기에 민화의 하나로 분류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본 논문에서는 무화의 예술적 가치를 민간의 회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하며 통시적 입장에서 사료의 분석과 실제 남아있는 무화의 실견을 통한 검토를 통해 무화라는 이미지가 지닌 본질을 파악하고 그간의 논의를 확장시키고자 한다.
캐나다 미술가 마이클 스노우는 1971년에 캐나다의 북방 야생지 풍경을 담은 영화 <중 심지대>를 제작하였다. 북방 야생지는 1920년대 캐나다의 풍경화가 모임인 그룹 오브 세븐 이후 캐나다 미술에서 자주 다뤄져 온 독특한 주제이다. 그룹 오브 세븐의 작품에서 북방 야 생지는 태초의 신성한 장소로 표현되는데 이 같은 풍경에는 북방 야생지에서 캐나다의 역사 적 기원을 설립하고 통치권을 주장하려는 민족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의도가 반영되어 있 었다. 스노우는 <중심지대>에서 그룹 오브 세븐에 의해 만들어진 캐나다 풍경화 전통을 해체 한다. 그는 무한하게 회전하는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전지적인 단일 시점으로 그려진 그룹 오브 세븐의 북방 야생지 풍경을 탈중심적인 우주 풍경으로 전환한다. 또한 카메라 움직임에 의한 운동감각적 시각과 전자음에 의한 신경계적 청각을 통해 프레임의 물질적 표면을 접촉 하고 스치는 듯한 촉지적인 감각 경험을 생성한다. 즉 <중심지대>는 그룹 오브 세븐의 시각 중심적 풍경화에서 벗어나 영화 매체에 의해 야기되는 다감각적 풍경을 제시하면서 북방 야 생지에 대한 기존의 의미와 경험을 재구성한다.
본 논문은 1980년대 초 도미 이후 지속적으로 기하학적 드로잉의 형태로 작업을 이어 가는 이상남의 도상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그가 뉴욕이라는 배경에서 과거의 국내 또는 뉴 욕 현지에서의 주된 미술의 조류에 동화되는 일 없이 독특한 기하학적이고 기계적인 이미지 로만 작업을 이어가는 과정을 마르셀 뒤샹이 1911년 이후 기계적 이미지를 화면에 도입하 고 그 이후로는 완전한 기하학적 추상, 또는 기계적 구성으로만 작품을 구성하는 점과 비교, 연구하고 있다. 이들 화풍에 공통되는 점은 첫째, 직전 세대에 통용되는 화법으로부터의 명 백한 단절을 꾀함으로써 전통회화적 기법에서 해방되고자 했다는 점, 둘째, 이를 위한 방법 으로 고질적 회화의 기술, 즉, 손이 익힌 화법을 차단하고자 몰개성(de-personalize)적인 기 하학 또는 기계 이미지만을 그리거나 제작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 어 기하학은 20세기 초의 추상화로의 움직임에서 전형적인 순수한 형식상의 필요에 의한 변 화로만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은 동시대 미술에서 나타나는 아카이브의 형식을 통해 개인의 차원에서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아카이브는 단순히 기록 보관소의 역할을 넘어서 사적인 기억을 재편하고 가상의 서사를 전개하는 데 두루 활용되고 있다. 또한 선형적인 시간성을 의도적 으로 흐트러뜨려 본래와 다른 맥락을 만들어내며 현재를 과거와 매개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게 선별된 것들은 탈맥락화의 과정을 거쳐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개인이 집단과 맺게 되는 관계에 질문을 던지고 흩어진 과거의 흔적을 재구성하여 비공식적인 역사로 다시 쓰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본인과 마르셀 뒤샹, 아크람 자타리의 작품을 사례로 분석하여 대안 서사의 개념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결국 이 논문은 수집과 배 열의 방법론을 통해 과거의 잔해를 발굴하고 새로운 형태로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