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ious kinds of clothing characterized the fashion style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Cheollik, the oldest among traditional Korean costumes, was worn for diverse purposes by various classes and has immense historical value for its unique structure and form. This study reveals the aesthetic aspects of cheollik from the Joseon period, which upheld the spirit of consideration. It looks into the possibility of cheollik’s re-creation in light of the social/cultural background of that period. It also reviews the literature and compiles images of artifacts and relics of cheollik excavated from the tombs of its wearers during the Joseon period. The aesthetic aspects of cheollik reflect the mindset of Joseon people, as demonstrated by its diverse proportions and forms, qualities that exhibit “thinking outside the box” flexibility, and the ability to transcend conventions through free thinking and creative imagination in daily life. These are consistent with contemporary fashion trends, thus pointing to the modernity of cheollik, as exemplified by a number of design cases thus inspired. Cheollik represents the kind of beauty that resonates with contemporary individuals, showcasing the potential for historical elements to continuously transform into futuristic forms. In other words, the aesthetic value of cheollik begins with consideration and ends with creation.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ical background,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apron-style clothing from the Joseon dynasty and reinterprets them through contemporary fashion design. Here, apron-style clothing refers to clothing worn over a first layer, secured with straps, and structured to cover the front of the body. During the Joseon dynasty, apron-style clothing was differentiated according to purpose as follows: daily use, performance use, and ceremonial use. Structurally, it can be classified into four types: square, square with multiple straps, three-pronged with waist gathers, and three-pronged with narrow pleats. Based on Joseon-period apron-style clothing’s historical significance, structural features, and layered visual effects a total of four contemporary fashion designs were developed using CLO 3D as a design tool: Design 1 is a mini dress in a tube-top style derived from a simple square apron, Design 2 is a mini dress that reinterprets the Yuso [流蘇] decoration of the Boro [甫老], Design 3 is a cape design divided into three sections that is inspired by the Suboro [繡甫老], and Design 4 is a layered skirt reflecting the pleated structure of the Jeonhaeng-utchima [前香上裳]. The design outcomes demonstrate that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apron-style clothing are effectively expressed through silhouette, while their layered qualities are rendered with depth using different materials and colors. This research are expected to contribute to a deeper understanding of Korean traditional costume and to expand its value and potential for contemporary application.
This study compares two representative sundial makers from the mid-latitude regions of the Northern and Southern
Hemispheres—the Kang family of late Joseon Korea and James Stewart (1852–1933) of New Zealand—to analyze how
their sociocultural backgrounds influenced the structure and function of their sundials. Through a combined analysis of
historical literature and surviving artifacts, the research examines both the design principles and the symbolic meanings
embodied in these instruments. The findings reveal that the Kang family’s sundials embodied Joseon’s traditional
calendrical system and Confucian intellectual heritage, symbolizing state authority and familial status, while also serving
practical purposes rooted in a people-centered political philosophy by conveying scientific temporal knowledge to the
populace. In contrast, Stewart’s sundials, grounded in the educational and public-oriented traditions of Britain, incorporated
international and pedagogical features such as major cities’ time differences in the world, zodiac signs, and time correction
table for local time, and were designed for installation in exhibition spaces and gardens to encourage public engagement
and promote the dissemination of scientific knowledge. This comparative study demonstrates that sundials functioned not
merely as instruments for timekeeping but as scientific and cultural heritage shaped by social institutions and cultural
values. Furthermore, it suggests that the study of sundials can be extended beyond the technical history of science to
encompass broader cultural and global-historical perspectives.
본 연구는 조선 시대 중사(中祀) 제의소로서 양잠과 관련 깊은 선잠단(先蠶壇)의 입지를 풍수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조선은 국가 제사를 규모에 따라 대사, 중사, 소사로 나누었는 데 중사에 해당하는 곳은 풍운뇌우단, 선농단, 선잠단, 문묘이다. 문묘의 입지는 많은 연구 가 되었으며, 유구만 남은 풍운뇌우단은 군사 지역으로 출입이 어렵고, 선농단은 입지가 크 게 변경되었기에 비교적 초기 입지에 가깝게 복원된 선잠단의 풍수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 해 입지를 분석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전통 풍수 분석 요소의 형세론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 혈, 사, 수, 향의 지리오결과 이기론 중의 하나이며 조선 시대 초기 건축물에 적용된 것 으로 알려진 지리신법을 적용하였다. 선잠단은 예기의 기준에 의해 북교에 처음 자리한 후 동교로 옮기려 한 적도 있으나 계속 이곳에 자리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조선 초 사전(祀 典)이 정비되기 전에 만들어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여 소사의 규격이었으며 중사의 규격 으로 수정되지 못하였다. 풍수적 입지에 있어 기록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혈에서 벗어나 있 음을 확인하였고 이는 파구가 부적합한 것과도 일맥상통하였다. 그러나 용맥과 사신사 및 수세와 좌향에서는 풍수 고전에 부합하는 유정한 형태를 보여 최고의 풍수 길지에 자리 잡 고자 시도했던 점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상으로 인간의 수명에 대한 인상학적 해석 을 실증적으로 검증하고자 하였다. 동양 인상학에서는 얼굴의 특정 부위, 특 히 귀(耳)와 인중(人中)의 형태와 길이가 수명과 관련된다고 보아 왔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 사대부 초상화 167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고전 인상학의 수명 관련 이론을 통계적으로 검증하였다. 조선 초상화는 전신사조(傳神寫照) 의 원리에 따라 인물의 외형과 정신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기록화이므로, 인체 의 실제적 비율을 반영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연구에서는 얼굴 전체 길이에 대한 각 부위의 상대적 비율(귀, 귓불, 인중) 을 측정하고, 70세 이상과 70세 미만 집단 간의 차이를 독립표본 t-검정으로 검증하였다. 또한 각 변수와 수명 간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단순회귀분석과 다중회귀분석, 판별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인중/안면 비율과 귓불/귀 전 체 비율이 수명과 유의한 상관성을 보였으며, 특히 귓불의 길이가 가장 높은 영향력을 나타냈다. 이러한 결과는 ‘귀가 두텁고 길면 장수한다’, ‘인중이 깊고 길면 생명이 길 다’ 는 동양 인상학의 전통적 명제가 통계적으로도 일정 부분 타당함을 보여 준다. 본 연구는 전통 인상학을 실증적 분석 틀 안에서 검증함으로써, 조선시 대 초상화가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인체적⋅인류학적 정보를 내포한 학제 적 연구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하우저의 예술사회학 이론을 토대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 기에 이르는 기생 예술을 사회적 수용자·시장구조·계급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였다. 그 결과, 기생 예술은 특정 계급의 권위를 재현하거나 대 중적 욕구를 반영하는 미적 형식으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예술 가의 주체성과 사회적 권력관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매개체로 기능했음 을 확인하였다. 특히, 기생 예술은 사회적 수용자의 변화와 시장구조 재편을 반영하여 성리학적 의례예술에서 근대 대중예술로 변모하였으 며, 여성 예술가로서 기생은 억압된 존재로 한정되지 않고, 창작·교육· 대중문화 활동을 통해 자아와 주체성을 구현하였고, 계급적 예술 양식 으로서 지배계급의 권위와 대중의 욕구를 매개하면서 사회적 긴장의 조정자로 작동하였다. 이는 곧 기생 예술을 단순한 향락적 산물이 아닌 사회 구조와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이념적 예술형식으로 재평가해야 함 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창작뮤지컬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의 제작과 발전 과정을 통해 한국 창작뮤 지컬의 제작 시스템과 흥행 전략을 분석하였다. 이 작품은 2017년 서울예술대학교 학생 창작에서 출발하여, 학교의 창작지원 제도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이 결합된 산학협력형 창작 모델로 발전하였다. 서사는 쇼케이스 단계의 복수 중심 서사에서 ‘작은 외침이 세상을 바꾼다’는 주제 를 중심으로 한 성장 서사로 수정되었다. 주인공 ‘단’은 개인적 복수에서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 는 인물로, ‘진’은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 주체로 변화하였다. 연출은 관객 참여형 구조로 발 전하며 체험적 몰입을 강화하였다. 음악은 시조와 국악의 운율을 기반으로 힙합, R&B, 일렉트로닉 등 현대음악을 융합하여 한국형 뮤지컬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특히 「이것이 양반놀음」, 「운 명」 등의 넘버는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통해 극적 메시지를 강화하였다. 제작진은 관객 설문과 피드백을 적극 반영하는 디벨럽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또한 OST 발매, MD 제작, ‘싱어롱 데이’ 등 참여형 마케팅으로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확대하였다. 신인 배우의 등용은 작품의 신선함을 높이 고 창작 생태계 순환 구조를 활성화하였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단순한 공연소비를 넘어 ‘참여 문 화’로 확장되는 사례가 되었다.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은 창작자의 성장, 전문가 협업, 관객 참여, 신인 발굴의 네 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결과적으로 본 작품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제작·유통 모델을 제시한 성공적 사례로 평가된다.
In nineteenth-century Joseon Korea, large-scale panoramic paintings vividly depicting royal palaces newly appeared. Yet, in the absence of surviving records, their precise purpose and function remain uncertain.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ical process that led to their emergence, situating them within the broader trajectory of Joseon architectural representation. Previous scholarship has treated palace paintings through separate art-historical and architectural approaches. This study instead emphasizes the transformation of practical architectural diagrams, produced since the early Joseon period for functional purposes, and traces their evolution into pictorial and panoramic paintings in the nineteenth century. Originally serving as design plans and simplified records of structures, architectural diagrams in the late Joseon period began to incorporate techniques from cartography and painting. This shift gave rise to forms such as Ganga-do (detailed architectural drawings with extensive information) and perspectival diagrams pursuing realism and spatial depth, which ultimately culminated in panoramic palace views. Palace paintings of late Joseon court were thus hybrid works, neither purely pictorial nor strictly technical. Produced by court painters under royal commission, they embodied both functional and aesthetic purposes, representing a distinctive synthesis of architectural knowledge and visual artistry in late Joseon Korea.
조선 후기 유람 문화의 한 형태인 뱃놀이는 풍류를 넘어 행위의 폐단으로 기록될 만큼 성 행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흐름 속에서 뱃놀이를 기록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나타나며 선유(船遊)와 관련된 문학작품이 다수 생성되었고, 동시에 선유도(船遊圖)라 명명할 수 있 는 뱃놀이 그림이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는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다루어졌 던 선유도라는 화제가 제작되기 시작한 배경을 분석한 후,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조선 후 기 선유도의 제작 배경과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선유도 제작은 17세기 문인 계층 사이에 공유된 문화적 흐름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중국에서 유입된 선유 문학 가운데 소식의 「전ㆍ후적벽부」와 주희의 「무이 도가」가 조선 후기 선유문화를 기록하고 시각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선상 유희를 즐기 는 문인의 전형적 표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낙동강을 따라 전개된 선유는 영남의 지역적ㆍ시대적 특수성을 반영하며, 낙동강 유 역 선유도를 제작할 수 있게 한 동인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선유도를 향유하는 문인들의 감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낙동강 상류에 도산서당이 건립된 이후, 낙동강은 퇴계 이황의 도학이 흐르는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선유는 그 도맥을 계승하는 상징적 실천으로 행 해졌다. 이에 따라 선유의 행위가 시각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물로서 선유 도가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제작 배경은 선유도가 감상화의 성격을 넘어 세전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당대의 사상과 실천을 기록하고 전승하려는 기록화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남을 보여준다. 이처럼 조선 후기 선유문화의 흥성과 향유 양상을 중국 문학의 유입을 통해 조망한 뒤, 그 공통된 특징을 바탕으로 낙동강 유역의 선유문화와 선유 도가 지닌 차별적 의미를 고찰하였다.
본 논문은 명기(明器)라는 물적 자료를 통해 중앙에서 확립된 새로운 의례가 지방으로 전 파 및 수용되는 과정을 탐색하고, 조선시대 의례기물이 민간에 유통되었던 방법에 대한 고찰 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명기가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16~17세기에 초점을 맞춰 분묘 유적을 중심으로 출토된 명기를 비교하고, 당시 문헌 기록 및 기타 유적 출토품과의 대조를 통해 종합적인 검토를 시도하였다. 명기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기물(器物)을 구분하고자 했던 유가 사상에 의해 정립된 개념 으로,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본격적인 상례 제도의 절 차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실생활에 사용되는 기물과는 구별되는 작은 크기의 기 물들이 분묘에 부장되었다. 명기 출토 양상은 전반적으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사이에 경기도 일대를 중심 으로 출토되기 시작하다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로 명기 부장 문화가 확산 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재질이나 구성에 있어서도 중앙과 가까운 곳일수록 예서를 준용 하려는 모습이 보이며, 멀어질수록 상대적으로 구성 및 조합에서 예서에서 확인되지 않는 기 형들이 확인되고, 퇴화 정도도 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매납되었던 명기는 크게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유통되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첫 번째는 시전행랑과 같은 시장 유통망을 통한 방식이며, 두 번째는 관청에 소속된 관장(官匠)을 통해 명기를 마련하는 방식, 세 번째는 민간의 사장(私匠)을 통해 개별적으로 마련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명기 유통 방식에 대한 이해는 조선시대 민간에서 소비되었던 도 자기류 및 장례용 기물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단서 를 제공하며, 당시 물질문화와 소비 구조를 이해하는 기초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 의가 있다.
본 연구는 조선 초 제도 문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규범 구조와 제도 원리를 지속가능발전목표 (SDGs)와 환경·사회·거버넌스(ESG)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육전(六典) —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 (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 — 을 중심으로 각 전의 제도 설계 원리를 17개 SDG 목표와 ESG 영역에 비교·매핑하였다. 분석 결과, 치전은 공정한 인사제도와 관료 운영, 재정 관리, 부전은 재해 대응·자원 관리·농업 진흥으로, 예전은 질서·교육·자연 존중으로, 정전은 군사 정의·복지·병농일 치·생태 보전으로, 헌전은 도덕적 법치·약자 보호·법 교육으로, 공전은 절제·자원 효율성·장인 존 중·공공 인프라 관리로 각각 SDGs와 ESG에 관해 대응되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한국 전통 고전에도 SDGs·ESG 가치 체계와 구조적으로 상응하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고려 말과 조선 초 對明 使行詩에 나타난 주요 해항도시 江蘇 太倉, 山 東 登州, 江南 揚州의 실상을 문학 자료를 통해 복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존 대명 사행시 연구는 사행 경로나 명대 문물제도의 광대함과 화려함 등에 집중하여, 실제 사행단이 도착·체류했던 해항도시의 구체적 모습과 기능을 고찰하는 데는 상대 적으로 소홀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사행시를 1차 자료로 활용하여, 각 해항도시가 갖는 역사·경제・문화적 복합 기능과 현장성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해항 네 트워크 속에서 고려·조선 사행의 활동 무대를 재구성하였다. 태창은 국제 무역과 군 사 거점이 결합한 남방의 관문이자 ‘여섯 나라의 항구(六國碼頭)’로서의 위상을, 등주 는 齊魯의 역사와 해양 신앙이 융합된 전통적 북방 해상 거점의 의미를, 양주는 내 륙운하와 양자강의 결절지로서 강남 문물의 보고라는 가치를 확인하였다. 이 과정에 서 사신들의 체류 경험과 시적 형상화는 해당 도시를 단순 경유지가 아니라 외교와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부각하였다. 본 논문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 여말선초 해항도시 연구의 공백을 메우고 해항도시 공간의 복합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것 을 연구의 궁극적 목표로 한다.
조선시대 산성의 축성법은 군사적 상황과 외부 충격, 그리고 외래 성제의 수용과 변용 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 말 대몽항쟁기의 경험을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대규모 입보용 산성을 수축하였으나, 1429년(세종 11) 이후 읍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 환되면서 산성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조선은 다시 산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하였다. 명나라의 『기 효신서』가 전래되어 포루, 여장, 현안 등 새로운 축성 개념이 도입되었으나, 전시 상황의 제약으로 제한적 적용에 머물렀다. 조선 후기에는 병자호란에서의 홍이포 충격을 계기 로 성벽의 대형화·입방체화가 이루어졌으며, 포혈·돈대·총안의 표준화, 읍치의 산성 내 조성 등 구조적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축성법의 변화에는 중국 성제의 규식화와 일본 왜성의 곡륜형 옹성·완경사 성 벽·다중 성벽 구조가 영향을 주었으나, 조선은 이를 전통 기술과 융합하여 독자적 양식 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조선 산성은 단순한 방어시설을 넘어, 위기 대응과 외래 성제의 창의적 변용을 보여주는 복합적 군사 건축유산으로 평가된다.
본고는 조선시대 영진보성 중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체성의 축조방법을 확인할 수 있 는 23개의 성곽으로 외벽부(지대석, 기단석 쌓기방법)와 내벽부 축조방법에 대한 형식 을 설정 및 조합하여 유형을 분류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출토유물과 문헌기록을 통해 수 축을 감안한 각 유형의 시간성을 파악한 논문이다. 그 결과, 기단석은 눕혀쌓기(Ⅰ)→섞어쌓기(Ⅱ)→세워쌓기(Ⅲ)→막쌓기(Ⅳ), 내벽부는 석축계단식(A)→석축다짐식(B)→토사다짐식(C), 지대석은 1단(a)→2단(b)→퇴화과정(c) 으로 변화한다는 대체적인 시간의 경향성이 확인되었다. 시기설정은 유형이 집중적으 로 출현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ⅠAa·ⅠBa·ⅡAa(1기)→ⅢBb·ⅢBa·ⅢCa(2기)→Ⅳ Ca(3기)→ⅣCc·ⅠBc(4기)유형으로 변화하는 대체적인 시간성을 보인다. 1기는 15세기 초에 해당하며, 고려시대 축성방법의 전통이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승 되면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수군의 성곽은 확인되지 않는다. 2기 는 15세기 후반~17세기 중반에 해당하나,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절대적으로 집중 되어 있다. 이는 본격적인 축성 논의와 삼포왜란을 거치면서 축성사업이 의욕적으로 진 행된 결과로 생각된다. 3기는 17세기 전반에 해당하며, 이전 시기와 달리 기단석 쌓기방 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는 기단석 쌓기방법 Ⅳ형식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를 상한으로 한다. 4기는 17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한다. 이 시기 에는 기단석 쌓기방법 Ⅰ·Ⅳ형식과 내벽 축조방법 B·C형식 등 많은 형식이 동시에 확인 되어 기준이 없어 보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지대석에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따라서 영진보성 축조에 있어 1기는 조선건국(태조 1년, 1392)부터 15세기 전반, 2기 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 3기는 17세기 전반, 4기는 17세기 후반 이후로 설정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읍성을 중심으로 구축된 방어체제가 한계를 드러내 자 산성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과 맺은 정축약조로 인해 산성 수축의 대상지가 하삼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외방산성의 수·개축은 조선 후기 산성 축성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본 연구에서는 하삼도 지역의 산성을 중심으로 문헌기록과 주요 산성의 조사성과를 검토하고 중앙의 산성과 비교하 여 살펴봄으로써 조선 후기 산성 축성법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많은 산성이 외성·중성 등을 포함한 복합적인 구조를 보이며, 대형화 되는 특징이 있다. 성벽은 병자호란 이후 수축된 남한산성의 사례처럼 허튼층쌓기에 쐐 기돌을 이용하여 틈을 보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또한 1711년에 축성된 북한산성은 입지에 따라 성벽의 높이를 달리하고, 마름돌 층지어쌓기, 다듬돌 바른층쌓기법 등이 도 입되는데, 이후 일부 지방의 산성 축성에도 적용되었다. 수성 체계에도 변화가 나타나 화기의 사용에 대응한 방어시설로 총안과 포루가 새롭 게 도입되었다. 총안은 여장 상면에 자연석을 활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포루는 치성과 결 합되거나 조망이 유리한 지점의 성벽 안쪽에 설치하였다. 남한산성의 사례와 같이 용도 (甬道)와 같이 길게 이어진 치(雉)에 포루를 결합한 형태도 보인다. 조선 후기 산성의 축성법을 검토한 결과 외방산성은 중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입지, 전략적 가치, 사회적 상황 등에 따라 적절한 축성법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 추가 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조선 후기 산성의 축성법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 할 것이다.
우리가 한국사의 전체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부 분들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한국사 연구의 심화와 지방사 연구의 발전을 위해 조선시대 지방 군현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논문 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9세기 조선시대 전라도 무주부라는 지방 군현의 실제 모습을 홍등중기라는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이다. 19세기 조선에서 크게 알려 지지 않은 지방 군현의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사료의 부족이다. 그렇 기에 본 연구는 홍등중기라는 사료를 통해 그 실태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작성 당시의 지방 군현의 실태를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중기(重記)이다. 특히 이 자료에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두 가지 내용에 주목하였다. 첫째는 19세기 조선에서 가장 중요했던 지방의 군비(軍備) 관련 내용이다. 둘째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교방(敎房)과 교방청 물목(敎坊廳 物目)에 대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19세기 조선의 지방 군현이었던 전라도 무주부의 군비 실태와 교 방 문화의 실상에 다가서고자 하였다. 또한 이 중기 자료를 중심으로 각종 관찬 자료와 읍지(邑誌) 등의 자료를 통해 19세기 조선 전라도 무주부라는 지방 군현의 실체에 접근하 고자 노력하였다. 이 연구가 한국 지방사를 이해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