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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6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o develope seaweed transplantation method to reduce grazing pressure by Anthocidaris crassispina, seaweed biomass and number of sea urchin were examined after 2 days from Ecklonia cava transplantation by four ways (three floating rope methods and seaweed transplantation block method). Three floating rope methods were different in the seaweed rope connection to fixation block rope; direct connection, polypropylene rope connection, and stainless wire connection. About twenty sea urchins were found on the seaweed cultivation rope connected directly to fixation block rope and on transplantation block. However no sea urchin was found for 2 days on the seaweed cultivation ropes connected by stainless wire and polypropylene rope. After 2 days from seaweed transplantation, biomass of E. cava was maximal with 992.61 ± 78 g m-1 in wet weight on stainless wire connection method and minimal in seaweed transplantation block method with 121.85 ± 71.67 g m-1. Before transplanting 42 Ecklonia cava plants were on one meter of cultivation rope and 41 plants on the cultivation rope connected with stainless wire to fixation block but five plants were remained on the transplantation block after 2 days. In conclusion, the best transplantation method of E. cava in this study to reduce grazing pressure of sea urchin was a floating rope method connected stainless wire to fixation block.
        4,000원
        3.
        2005.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evere-Ornament (Vyuha :Sanskrit) of wooden pagodas in Shilla period in order to assume a detailed shape of wooden pagodas called the palace style, the multi-story style, the towered namsion style, that were built at the temples in Gyeongju during Shilla period. The Severe-Ornament had been used traditionally by installing a Buddhist image, Guardians, Sarira and by printing a color. The other hand, The roof tiles and tiles were annexed to the Severe-Ornament so as to enhance the value of the wooden pagodas. The Vyuha had been used not only to install a highly valued Buddhist image in the wooden pagodas but also to represent an important part of ritual art of Silla period. Therefore, it was possible to find out a variety of details of the wooden pagodas in Shilla period.
        5,400원
        4.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出處는 儒學에서 선비들에게 요구한 중요한 덕목이며, 많은 유학자들이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남명 조식은 출처를 君子의 큰 절조로 보았으며, 평생 ‘處士’로 실천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정의 계속된 출사요구를 거부한 남명을 퇴계와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문적 體認의 결과가 아닌 개인적 기질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기절’이나 ‘기상’, ‘절개’등 개인적 차원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며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남명의 처사적 삶과 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명의 ‘처’ 즉 ‘물러남’이 가지는 국가권력과의 ‘거리감’에 주목한다. 유학은 현실정치를 긍정하여 ‘나아가감(出)’을 강조했지만, ‘處-물러남’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처’는 유학자들이 현실의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견제와 긴장을 만들어낸 요소이기도 했다. 남명은 이러한 ‘물러남의 정치학’을 잘 이해했으며, 그의 출처사상과 처사로서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남명의 處는 개인적 기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대한 ‘경계’와 ‘비판’ ‘저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아가 ‘폭력적 국가권력’을 ‘공공의 국가권력’으로 변화 시키려는 문제제기도 담고 있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른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남명의 비판과 그가 실천한 ‘물러남의 정치학’은 현대의 정치현실에 있어서도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의 성격을 보다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 현대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5.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瞻慕堂 林芸(1517-1572)은 조선 시대 安陰 葛溪에 살았던 儒學者로, 그 형 葛川 林薰(1500-1584)과 함께, 살아서 孝⼦ 旌閭를 받아 당대에 實踐儒學의 表象으로 알려져 사후에 一蠹 鄭汝昌(1450-1504)을 제향 하던 ⿓門書院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형 갈천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南冥 曺植(1501-1572)을 從遊하였던 것으로 山海師友淵源錄에 收錄되어 있는바, 학문의 성취와 관련지어 유추해 보 거나 연령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남명의 문인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瞻慕堂集을 살펴보면, 退溪 李滉(1501-1570)과의 師承 관계를 표현 하고 있는 글들이 곳곳에 보일 뿐만 아니라 후인이 찬술한 瞻慕堂 墓道文字에서도 退溪의 門人임은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南冥과의 관련성을 짐작할 만한 첨모당 본 인의 글은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남명이 66세 때 첨모당을 만난 사실이 남명학파의 여러 기록에 남아 전하고 그 이 전에 만나서 담화를 나눈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566년이라면 첨모당이 50세 때이 니, 첨모당의 학문에 대한 남명의 충고가 첨모당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첨모당의 학 문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명연보에 전하는 남명과 첨모당의 만남 정도는 싣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서는 지금 전하는 첨모당집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첨모당의 손자 임곡 임진부가 남명이 절교했던 귀암 이정의 曾孫壻라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林⾕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无悶 堂 朴絪이 편찬한 山海師友淵源錄의 龜巖 李楨 부분의 기록 가운데 淫婦獄事와 관련된 기록을, 일찍이 직접 刪削해 주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뒤에는 林⾕의 아 들 林汝栢이 无悶堂의 아들 朴曼에게 편지로 간곡하고 단호하게 요청하고 있다. 임 여백은 귀암을 향사하고 있는 龜溪書院의 院⻑을 지냈고, 귀암을 위해 귀계서원의 賜額을 요청하여 성사시켰으며 귀암의 시호를 요청하는 상소도 작성하여 올린 적이 있었다. 남명집에 귀암 관련 기록을 남긴 인물은 내암 정인홍인데, 정인홍이 무민당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임곡과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다 임곡의 두 아들 이 모두 무민당의 문인이 되었으니, 내암은 임곡의 아들들로서는 스승의 스승인 셈 이어서 비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이 마침 인조반정으 로 인해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신원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0년대 이후에는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강우 유림 사회에서도 정인홍을 적신으로 인정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임곡 집안의 처지에서는 첨모당집을 간행할 때에 될 수 있는 한 남명과 관련을 짓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6.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인조반정 이후 西人 老論系 학자들이 南冥 曺植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상황 속에서, 남명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주장하여 존숭과 선양을 촉구한 이들은 星 湖 李瀷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조선후기에 남명학파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 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호학파 학자들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 을 했다고 이해된다. 이 글은 성호의 제자인 順菴 安鼎福이 󰡔南冥集󰡕에 기록한 箚記를 통해 그가 남명의 학문과 삶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으며, 그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었는지를 살펴보았다. 箚記에 근거해 볼 때, 안정복은 󰡔남명집󰡕을 매우 면밀하 게 읽고 관련 사실이나 자료를 참조하면서 고찰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남명집󰡕을 정밀하게 연구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남명이 진 정 어떤 인물인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남명의 문학 작품에 대한 품평이나 견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 인물ㆍ시기ㆍ사 건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사실과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고증한 점 등 을 고려한다면, 그가 󰡔남명집󰡕을 읽을 때 무엇에 유의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안정복은 남명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 인물의 학문과 인품에 관한 평가를 스스로 확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알게 된 남명의 학문 과 언행을 벗과 제자들을 권면할 때 인용하여 말했으며, 남명과 관련 있는 인물 들의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연관성을 드러내어 연원을 밝혔다. 그러므로 남 명에 대한 안정복의 관심과 선양은 남명학파에게 가장 암흑한 시기였던 18세기 에 빛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7.
        201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南冥學의 본질과 특색에 대해 재조명한 것이다. 南冥은 16세기 사화 기에 현실정치의 참여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한 인물인데, 25세 때부터 孔子 를 배우고자 하여 顔回의 克己復5를 통해 근본을 확립하는 구도의 길로 들어 섰다. 남명학의 淵源은 남명이 학문을 전환한 뒤 孔子·周敦頤·程Ⅱ·朱熹의 초상 을 그려 봉안해 놓고 참배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주자의 博文約5의 학문과 程明道의 揚休山立의 氣節과 周濂溪의 光風霽月의 흉금을 추구하고, 나 아가 안회의 克己復5를 통해 공자의 경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명학의 요체를 敬·義라 하는데, 이는 󰡔주역󰡕 「坤卦-文言」의 ‘敬以直內 義以 方外’에서 나온 것으로, 주자도 학문의 요체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경의학의 연 원은 주자를 통해 󰡔주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의학은 마음을 眞實無妄하게 하는 공부로, 敬은 마음을 고요하고 또렷하게 하여 긴장감과 경건함을 유지하 는 것이고, 義는 마음이 발한 뒤 판단이나 조처를 올바르고 합리적으로 하는 것 이다. 남명학의 본질은 남명이 남긴 3편의 賦와 󰡔學記類編󰡕의 「誠圖」·「易書學庸語 孟一道圖」·「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原泉 賦」에는 근본을 중시하는 사유가 근저에 깔려 있으며, 「民巖賦」는 나라의 근본 을 백성으로 보고 정치의 근본이 임금에게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며, 「軍法行酒 賦」는 나라의 근본은 禮義라는 점을 역설한 글이다. 또한 「誠圖」와 「易書學庸 語孟一道圖」는 남명학의 본체에 해당하는데, 「誠圖」는 眞實無妄의 誠을 목표로 그 공부방법과 실천요령을 적시한 도표이며, 「易書學庸語孟一道圖」는 惟精·惟 一의 공부를 통해 誠을 추구하는 것을 형상한 것이다. 「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는 남명학의 작용에 해당하는데, 「心爲嚴師圖」는 心을 嚴師로 삼아 存養·省察을 나타낸 것이고, 「幾圖」는 省察과 克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것이 며, 「神明舍圖」는 극기복례하여 至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남명학의 특색은 「神明舍圖」의 ‘天德’과 ‘王道’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천 덕은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얻어 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內聖에 해당하 고, 王道는 그 덕을 현실사회에 펴는 것으로 外王에 해당한다. 천덕을 추구하는 것은 人道를 닦아 天道에 배합하는 誠을 추구하는 것으로, 남명학의 특색은 居 敬行義의 공부를 통해 󰡔中庸󰡕의 大旨인 誠을 추구한 데 있다. 이는 퇴계가 󰡔소 학󰡕·󰡔대학󰡕을 근본으로 한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중용󰡕을 所依經傳으로 삼은 것이다.
        8.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南冥 曺植(1501-1572)의 만년 은거지인 지리산 천왕봉 아래 德山洞天에 德山九曲이 설정되지 못한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덕 산구곡의 설정이 왜 필요한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근거는 무엇이어 야 하는지, 덕산구곡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이며 그 역사적·문 화적 사실은 무엇인지, 덕산구곡 설정의 의의와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를 논의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만을 논의하면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에 孔孟과 朱子로 이어진 동아시아 山水認 識의 傳統과 九曲文化, 조선시대 선비들의 산수인식과 구곡문화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慶尙右道 지역의 학술이 극도로 침체 된 조선후기 이 지역의 학자들이 南冥學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한 것 중에 三山書院의 位相을 鼎立하여 晦齋·退溪와 함께 南冥을 추숭하고 자 한 노력, 三山九曲詩를 지어 보내 陶山九曲·玉山九曲과 함께 德山九 曲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남명학을 보전하고 계승하는 길인지를 찾아보려 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 선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 뜻 있는 인사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德山九曲을 設定하고 경영하여 德山을 명실 상부한 道學의 聖地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는 남명학을 계승하고 체험할 수 있는 현장과 콘텐츠를 확보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를 통해 安德文과 河範運이 추구한 영남의 세 先賢을 함께 존모하는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나간다면 嶺南을 鄒魯之鄕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영남이 중국의 曲阜나 武夷山 못지않은 儒學의 産室로 세계 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9.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은 수제자인 來庵 鄭仁弘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내암 도 남명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명 사후 그를 추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내암이 지은 「南冥 曺先生 行狀」도 이러한 남명추숭 의식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명은, 退溪 李滉의 출사 권유를 거절한 이후로 끊임없이 퇴계로부 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비판은 퇴계의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급기야 남명의 문묘종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에 대한 반 작용으로 내암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을 해명하 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내암의 노력은 그가 지은 스승 남명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내암은 남명의 행장에서 남명이 생전에 남긴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남명의 출처의식과 남명의 학문관을 설파함으로써, 남명의 입장에 대한 옹호는 물론 나아가 퇴계에 대한 비판까지도 불사하는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10.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金宇.이 지은 .南冥先生行狀.을 鄭仁弘이 지은 .南冥曺先生行狀.과 비교 분석하여 敍事의 특징을 논한 것으로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서사구조의 측면에서, 김우옹은 전체를 생애-졸기-행적 세 부분으 로 나누고, 생애와 행적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서술하지 않았으며, 행적 보다 생애에 더 치중하여 기술하였고, 남명의 자질과 교육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서사내용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학문전환에 대해 정 인홍은 爲學에 포함시켰는데 김우옹은 별도로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2).을묘사직소.와 .무진봉사.에 대해 정인홍은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김우옹은 주요 내용을 직접 인용하였으며, 3)도덕에 대해 정인홍은 심 성수양을 통해 天德을 이룩한 점을 중시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資稟 과 氣像에 중점을 두었으며, 4)공부에 대해 정인홍은 格物致知와 存養省察을 모두 언급한 반면 김우옹은 省察克治에 중점을 두었으며, 5)학 문성취에 대해 정인홍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일가의 학문을 이룬 점을 서술했는데 김우옹은 自得과 致用實踐을 급무로 여겼다는 점을 언급하 였으며, 6)국가와 백성을 걱정한 점에 대해 정인홍은 소상하게 서술했 는데 김우옹은 세상사를 잊지 못하는 측면을 간단하게 언급했으며, 7) 교육에 대해 정인홍은 짧게 서술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말을 인용하 여 상세히 거론했으며, 8)취향에 대해 정인홍은 언급한 것이 없는 반면 김우옹은 비교적 소상히 서술했으며, 9)전체적으로 정인홍은 남명의 道學者像을 부각시켰는데 김우옹은 남명의 자품과 기상을 바탕으로 高士像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편 행장의 서사의 유사성을 검토한 결과, 김우옹이 먼저 행장을 지 었는데 정인홍이 그 내용을 불만족스럽게 여겨 다시 지은 것으로 드러 났다. 김우옹의 「남명선생행장」을 성운의 묘갈명 및 곽종석의 묘지명과 개괄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1)구성비율의 측면에서 성운은 행적에 비 중을 두었는데 김우옹은 생애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2)세부항목을 보 면 묘갈명은 25개, 묘지명은 18개인데 비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은 13 개로 현저히 적으며, 3)세부항목 구성비율로 보면 성운과 곽종석은 항 목을 두루 갖추어 서술하고 있는데 김우옹은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의 서사는 주요 항목을 특징적으로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우옹이 지은 「남명선생행장」에 대해서는 그 동안 별문제가 없다 가, 근세에 남명의 후손 曺庸相이 「踣德山碑理由」와 「先子門下敍述考證」을 지음으로써 논쟁이 일어났다. 남명 후손들은 김우옹과 정인홍의 행장 및 허목의 신도비명에서 남명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해 남명의 순정한 도학에 대해 후세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바로잡으려 하고, 남명 문인의 문중에서는 자기 선조의 글을 비난한 것에 대해 정면 대응함으로써 논쟁이 야기된 것이다.
        11.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2012년 7월까지 남명 조식의 철학사상을 연구한 업적들을 회고한 글이다. 다섯 분야로 나누어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실천유학성에 대한 논의, 남명 성리학의 속성에 대한 논의, 탈유학성의 논의, 공부론의 특징에 관한 논의, 이기론적 성향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남명의 유학이 실천유학이자 脫이론적이라는 데 동의하고, 남명학의 특징을 비교라는 방법에 의하여 탐구한다. 비교 대상으로 삼아진 이들은 이황과 주희였다. 비교를 통해 남명만이 가지는 특성이 많이 드러났으나, 지나치게 차이성을 강조하고자 한 경우 상식에서 벗어난 무리한 주장들을 내놓아 남명학 이해를 오히려 저해한다. 이에 필자는 저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남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별화와 함께 동일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남명학이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는 남명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12.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무진봉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조식의 사회변혁론을 정리해 봄으 로써, 실천적 유학자로 지칭되는 조식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다. 「무진봉사」에 나타난 조식의 사회 변혁론은 한마디로 군왕의 도덕적인 인격의 완성을 토대로 한 ‘덕치’를 핵심으 로 하고 있다. 군왕의 도덕적 인격완성은 인재의 등용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문 제의 해결 등 모든 정치의 출발점이자 토대이다. 즉 인재를 등용하는 것도, 관 리들의 비리를 척결하는 것도, 그 밖의 모든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열 쇠는 바로 군왕의 수신에 있고, 군왕의 수신에서 시작한다. 이와 같은 덕치를 통한 조식의 사회변혁론은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이상적이 라는 측면에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훈척정치의 폐단이 문제가 되었던 당시, 제 도와 그것을 제대로 지키려는 인간의지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작용을 할 수 있 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 민주적 절차가 점차 형 식화 될수록 인간성의 실현으로부터 멀어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형식화된 민주적 절차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주목될 수 있다. 또한 덕치의 이상은 현실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척도로 작용함으로써 이미 충분한 의미를 가 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식의 이러한 덕치는 관학파에서 훈구파로 이어 진 역사의 전개과정을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토대로 하지 않고, 단지 법과 제도 에 의지한 정치를 지향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단면적인 추구가 결국은 정 치․사회적인 다양한 문제들을 생성시켰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제기되었다고 이 해된다.
        13.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논문은 남명 조식이 정주학을 수용한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관련 자료의 제시를 통해 ‘고증’에 초점을 두었으며, 󰡔학기유편󰡕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조식의 저술에서 朱子보다 二程이 중시되었던 점에 착안하였고, 남명학에서 ‘실천’이란 두 글자가 학문적 특성을 논하는 데 중요한 단어임에 주 목하였다. 실천을 중시하였던 남명학의 특성상 주자보다 이정이 중시되었을 것 이고, 특히 明道가 중시되었음은 조식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것은 조식이 공자와 周濂溪・程明道・주자 이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 리고 때때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결국 退溪 李滉이 伊 川과 주자를 잘 배운 학자라면 조식은 이정, 특히 명도의 사상을 잘 체득한 학 자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에 내포된 莊子的 요소, 陽明學的 요소 등 정주학 이 외의 여러 요소는 명도의 사상을 매개로 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14.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 한 때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성인의 학문 을 자신이 공부할 목표로 정한 뒤로부터는 문학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 는 완물상지하기 쉬우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 정인홍에 따 르면 그는 항상 시황계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명이 이처럼 시를 배격하였다면 그의 문집에 시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 만, 그의 문집에는 많은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시 벽이 있어 시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남명은 결국 시를 멀리 하면서도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물론 시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지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 다. 특히 문장의 경우에는 이른바 문예문에 속하는 글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실용성에 근거하는 남명의 문학관은 작품 속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성이나 바탕과 같은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원천부」에서 온 갖 이치가 모두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도 이 러한 생각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과 일상과 같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을묘사직소」와 「무 진봉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일상을 중시하는 생각은 다른 산문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시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실을 중시하고 허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하였던 점 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스스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특히 묘문을 지으면 서 그는 고인에게 아첨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훌륭한 학자라는 빈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다는 생각을 여러 작품 속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남명의 문학작품 속에는 그가 문학을 멀리하면서도 왜 작품을 짓지 안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문학작품을 지음에 있어서 무엇을 강 조하였는가,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것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중시하였 는가를 살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 결론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과 맞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5.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반은 남명의 교육사상이 형성되고 계승되는 시기이며, 그의 문인 및 사숙인들이 경상우도에 두루 거주하며 상호간에 활발히 교유하면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남명은 교육이 비근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야 하며, 하학에 대한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실천 중심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천도 의 묘리를 찾는 공부의 요체가 사친경형의 공부로부터 시작한 교육에 있음을 남명 은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하학상달의 공부를 ‘가까운데서 말미암아 먼 곳에 미친다’ 는 방법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하학상달의 공부를 강조하는 교육은 오건․정 인홍․정구․김우굉․배신․이조․성여신․하항․유종지․유덕룡 등의 경우에서, 그리고 실천성의 강조는 오건․김우옹․정구․김효원 등에서 각각 그 계승을 살 펴볼 수 있었다. 남명의 실천 중심의 교육은 당시 유행하던 실천성이 결여된 성리 학의 명분론이나 관념적인 이론을 불식하고, 실천위주의 교육관을 제기한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남명의 실천 중심의 교육사상은 실 천과 결부된 교육목적의 설정, 실천이 결여된 교육실제의 난맥상 등을 극복하고 교육 전반에 걸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한국교육사상 실천적 교육사상의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16.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6세기 조선시대의 南冥 曺植(1501-1572)의 정치사상과 17세기 명말 청초의 鏡萬唐甄(1630-1703)의 정치사상을 비교한 논술하였다. 두 사상가는 130 년이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자리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토론하며 교류한 듯 여러 방면에 걸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현실에 대한 강력한 개혁의식과 실천정신은 그야말로 不謀而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성리학자들의 성향은 본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학적 • 이론적 공소함 에 빠지가 쉽다. 막상 그런 현상은 성리학자들 사이에 빈번하였다. 그런 점에서 남 명과 주만은 철저히 이런 성리학자들의 단점을 실천적 · 개혁적 관점에서 보완해 나아갔다. 이로부터 두 사상가는 정치현실에 그 누구보다 민감하였고, 구체적 개혁 정책으로 당대 사회 정치적 부조리의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두 사상가는 당대보다는 후대에더 큰 빛을 발하며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17.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식 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다. ⒫ 자료 - 『학기도(學記圖)』와 『학기유편(學記 類編)』, ⒬ 자료 - 시와 명(銘) 부(賦) 론(論), 편지, 상소문 등 문집에 실린 것들. 조식을 성리학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 자료에 의존한다. 반면 ⒬ 자료에 의하면 조식은 양명학자이다. ⒫ 자료는 조식의 직접 저술이 아니며, 성리학 정초자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반면 ⒬ 자료는 조식이 깨달아 안 것을 직접 쓴 것이다. ⒫ 자료에 의존하면, 조식의 사상을 성리학 정초자들의 사상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그 결과 조식은 이론이 없이 실천만 파고든 묵수 주자학자가 되어 버린다. 반면 ⒬ 자료를 보면 조식은 거대한 자아를 추구한다. 이는 양명학의 '치량지' 이론과 비슷하다. 조식은 실천의 극한에서 창조적인 한 걸음을 내딛어서, 왕수인과 별개로 스스로 양명학적인 통찰에 도달한 것이다.
        18.
        200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Cho Sik was a great scholar in Chosun Dynasty. He was a contemporary scholar with Lee Hwang. We can see some statements of Cho Sik in the books written by Lee Ie(Yoolgog). It is obvious that his thoughts affected many scholars later. In addition to this, he taught many disciples some of whom became public officials, and some became civil leaders in the War named Imjinwoeran(the invasion of the Japan, 1592). His administrative thoughts are revealed in the Letters to the King(Sangso) more clearly. And so the author analyzed the Letters and classified his administrative thoughts. The findings were like these. His administrative thoughts could be summed 4 suggestions : leadership, personnel administration, administrative ideologies(the administration for the people and Minbon/民本 thoughts), the listening of public opinion, and the timing and Hersil(虛實, formal/substantial) as criteria for policy-making. His administrative thoughts belong to the style of Moral-training - oriented mentioned in the paper. Generally speaking, we can see that Cho-Sik emphasizes most the Moral-training of the leader and the recruitment based on that. The administration for the people and Minbon thoughts also are the ideologies for the leader. The listening of the public opinion and the criteria for policy-making wholly rely on the will of the leader. It follows that we can see that he suggested Moral-training and will of leader for the solution of the bureaucratic problems, and he rarely discussed practical systemic and institutional reforms. This seems to reflect his absence of practical experience as a public service in bureaucratic system. Nevertheless, his thoughts affected many practitioners and scholars later. And so we need to study the relationships with them and effects on them more clearly.
        19.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thesis deals with comparing and observing 『Shim Kyoung』 which Donggo wrote to Nammyoung for a present as well as the books written by Nammyoung and Donggo, their growing background and learning, their positions as government officers, and 「Moojinbongsa」 and 「Byounginbongsa」, letters having written to show respect to the King There are more records about Nammyung in 『Donggoyugo』 than in 『Nammyoungjib』. However, I am aware of the fact that the two books have almost the same content in them. 「Nammyoungshimkyoungbal」 has exactly the same content as 『Donggoyugo』. According to the comparition of these two books, I found that Donggo had sent the medicine material, calenda, 『Shimkyoung』, and other things to Nammyoung. Then Nammyoung sent appreciation letters to Donggo. In 『Shimkyoung』, Donggo suggested to Nammyoung that he became a government officer, but Nammyoung was only interested in morality. Donggo sent his son to Deoksan to grieve Nammyoung's death. They had the different pedigrees. Nammyoung's forefathers, who live in Huubcheon, didn't have any big government ranks. However, Donggo's forefathers had high government ranks. In their backgrounds some things are the same and some things are different. The things that were different were that Nammyoung was born in a rural area and his father died when he was 6 years old, but Donggo was born in Seoul and his father died when he was 26 years old. The things they had in common were that they all struggled economically, their mothers were all very clever, and they were not the eldest sons in their families. As they had different pedigrees, in the end Nammyoung became a scholar and Donggo became responsible for the national property. When Nammyoung was studying, I suppose that he was taught about learning from his father. However, Donggo learned about it from Lee, Yeonkyoung and Mr. Thansoo. When they were staying in Hyubcheon and Sangju, I suppose that they went to Hwang, Hyoheon to study, Nammyoung didn't go to school but Donggo went to school. Nammyoung changed his career objectives due to failing the exam to be a government officer, but Donggo started the job as a government officer because he passed it. Nammyoung's highest rank in his life was only Hyunkam, but Donggo was Youngeujung. However, Nammyoung was appointed to a high position by the King. In 「Moojinbongsa」written by Nammyoung, he insisted on 'Respect', which is the important item of his consideration. It is the same that in 「Byounginbongsa」Donggo insisted on 'Harmony' which is an important item of his consideration. In 「Moojinbongsa」, he made clear the troubles of the government officers and suggested to the King that he treat all the problems of the government very strictly. In 「Byounginbongsa」, Donggo insisted harmony and advised that they have to prepare the following King through logic which to choose the talented men. I am aware that both of them did their best with their position at that time. When Doggo was 33 years old, he presented 『Shimkyoung』to Nammyoung. When Donggo gave that. I supposed that he transmitted Nammyoung 'Su-ki-chi-in'(to control themselves by learning) of the important spirit of Confucianism. Nammyoung decided to himself that he would try to study harder when he received the book. Both of them had lived differently but they always cared for their people. The fact Donggo gave a present, 『Shimkyoung』 to Nammyoung. After much consideration, study and hearing from our country's political leaders, I have become aware that there is now more study and consideration being given to our country.
        20.
        2002.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Most studies on Nammyeong Jo Sik's literary works have been focused mainly on the discussion about his poems and aesthetic sense on which his literature was based. Moreover, researches on his prose unlike that on poetry have made little progress, especially with no studies on epitaphs, which are considered important among his prose in classical Chinese. This thesis is to examine Nammyeong Jo Sik's style of writing and the underlying aesthetic sense, focusing on his epitaphs, which most researchers have had little interest in so far. When he wrote epitaph, Nammyeong Jo Sik put great emphasis on frank narration among other things, which is to describe the truth about the dead person in question. Besides, he stressed two points; first, to know the dead concerned very well and to frankly describe the fact about the dead person without flattering attitude, under any circumstances. We can prove that he applied these rules to the writing of epitaph. Above all, it is clear in the fact that among about 22 epitaphs, most of them were for his own father, relatives, close friends and relatives of his pupils whose family history and specific situations he himself knew very well. Secondly, as shown explicitly from the epitaph for his deceased father, he faithfully followed his own rule not to flatter a dead person by exaggerating or making an excuse. In addition to the rule of truth, he exalted epitaph to the high place of literary works not only by narrating the fact frankly, but also freely expressing his own feelings. At this point, it is worth mentioning the episode concerning the epitaph he wrote for the late father of Guam(龜巖) Yi Jeong(李楨), who was one of major scholars living in Yeongnam(嶺南) province and Nammyeong Jo Sik kept in contact with. As Guam Yi Jeong sent the epitaph to T'oegye(退溪) Yi Hwang(李滉), asking for correction, this led to an indirect argument between T'ogye Yi Hwang and Nammyeong Jo Sik. Exceptionally T'oegye Yi Hwang corrected a lot the epitaph written by Nammyeong Jo Sik, severely criticizing the form and content of the epitaph. Naturally, Nammyeong Jo Sik did not accept the criticism of T'oegye Yi Hwang, because they were much different in a philosophical inclination and view of study as well as literary taste and style. Consequently, they both showed great opposition to each other's style and aesthetic sense concerning the epitaph beyond compromise. Nammyeong Jo Sik thought that he was not so much literarily successful, but he himself was the successor of 'ancient prose'(古文) tradition, while he criticized T'oegye Yi Hwang's style naming it 'popular prose'(今文) despite his success in the world. On the other hand, T'oegye Yi Hwang criticized Nammyeong Jo Sik's epitaph for his consistently changing rule, mentioning that there are certain rules of epitaph narration, which are the fixed rule and changing rule. Form this controversy between the two persons concerning epitaph writing, we can understand to some extent the thought of men of noble family in the early Chosen dynasty period concerning epitaph as an important form of prose in classical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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