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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121

        101.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에서는 출사하지 않고 인격 수양과 학문 탐구에 힘을 쏟으며 일평생을 보냈던 ‘獨善其身’형 인물에 대하여 그 삶의 지향과 가치관 및 처세관의 일단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시도로써, 조선 중기 광해조와 인조반정 등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일평생 처사로써의 삶의 견지하였던 權是中이란 인물에 주목을 하여 살펴보았다. 권시중은 머물던 곳 근처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퇴계의 「櫟遷」 시를 걸어놓고 櫟亭居士라고 자호함으로써, 퇴계에 대한 경앙의 심정과 사숙의 마음을 깃들였다. 그리고 아울러 세상에 특출난 재능과 능력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천성을 온전히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늑정이라는 호를 통하여 드러내었다. 또한 ‘野舟子’라는 호를 통하여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처세의 가치이자 이정표로써 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소요하는 삶, 외부의 잣대나 평가로부터 벗어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권시중이 인생의 목표로 지향하였던 이러한 삶의 구호들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추상적인 논의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자 실제적 원칙으로 적용되었다는 데 있다. 또한 권시중은 地方誌인 『宣城邑誌』, 지역의 科試 합격자를 기록한 책 인 『善谷蓮桂錄』등을 편찬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저술로 공헌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102.
        2018.08 KCI 등재 SCOPUS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aims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organizational justice and social loafing of organizations in Ho Chi Minh City through quantitative analysis from the survey data for the 228 employees are working at the Organizations in Ho Chi Minh City. The instrument of collecting data was a questionnaire. The collected data were analyzed using SPSS version 22 and employing exploratory factor analysis (EFA), Cronbach's alpha, multiple regression analysis. The results showed that only two factors are Distributive justice and Procedural justice is to have the reverse effect on social loafing of employee. From the results of the study showed, Distributive justice and Procedural justice has the opposite effect of social loafing, which demonstrates that when individuals feel that their work is spent on Perform tasks in a clearly divided and they will receive a worthwhile result in the group when performing the task then the individual's collective indifference to the organization will decrease. And motivate the employee to make more efforts to work and contribute for the organization. In addition, the factor of Procedural justice also has the opposite effect of collective redundancy, which demonstrates that employees are more concerned about fairness in official policies and organizational procedures.
        103.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Nitrogen budgets in Sihwa-ho in 2010 were estimated using a mass balance approach. Major nitrogen fluxes sources can be divided into three sections: cities, agricultural area, and forest. Surplus nitrogen 2,030~2,214 ton/yr (2,123 ton/yr in average) was discharged to Sihwa Lake. 20% of the surplus nitrogen is removed from the wetland and 60% is removed tidal flats. Therefore net nitrogen discharge from Sihwa basin is estimated to be 650 708 ton/yr (679 ton/yr in average). Wet and dry nitrogen deposition and load from non-point sources ware estimated to be 97 ton/yr and 69 ton/yr, deposition is using CAMx model. So estimated total nitrogen discharge into Sihwa-ho was 817 875 ton/yr (846 ton/yr in average). The atmospheric load explains 11.1 11.9% (11.5% in average) of the total nitrogen load Sihwa-ho.
        104.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만회의 80년 삶과 그것을 반영한 문학은 개인의 삶이자 격변기의 조선 지식인의 삶과 문학의 한 전형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당위 성을 획득한다. 청년 급제자인 자신을 잠룡으로 표현하며 자부심을 나타낸 만회는 ‘國計民憂’ 즉,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큰 포부를 품고 출사에 나선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지속적인 정쟁과 보수와 개혁의 격렬한 엇갈림은 수차례의 정 변을 야기하였다. 위태롭고 혼란한 시대에 그와 같은 지방 출신의 지지 기반이 없는 젊은 급제자는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이 때문 에 요로의 재상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능력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출사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기대하던 답을 얻지 못하 였다. 그러자 그는 ‘遯世無悶’을 삶의 참된 비결로 설정한다. 세속을 등지고 은둔하며 지내더라도 괴로워하지 않겠다는 뜻의 이 말은, 환로 에서 외면 받고 승진에서 제외되는 자신을 위한 만회의 자기방어적인 태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조선의 몰락과 일제 강점 하의 삼십 년 동안에 더욱 경화되어, 세상의 외면에 번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두고 세상을 살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不敢生世人’ 또는 ‘세상 속의 하나의 幣物’로 정의한다. 만회의 작품들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견지했던 문학적 기록이자 역 사의 격변기를 관통하는 한 유가 지식인의 삶을 형상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증거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105.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Kimchi cabbage (known as Chinese cabbage) is major vegetable in Korea. An inbred line of ‘Wonkyo20038ho’, was developed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Horticultural & Herbal Science, RDA in Republic of Korea. The microspore culture was carried out using ‘Chunhuigohangwang’ which was introduced from China in 2002. Among 3 DH inbred lines, ‘Wonkyo20038ho’ inbred line was finally selected after field exhibition in 2009. The horticultural traits of ‘Wonkyo20038ho’ inbred line; half-open head, white inner leaf colour, and dark green outer leaf colour. The average (for four years) head weight was 2025.3g, and head width and height were 15.8cm and 32.4cm, respectively. Head shape was narrow elliptic and degree of overlapping leaf was medium. Numbers of outer and internal leaves were 14.1 and 49.8, respectively. Harvest maturity was mid-late maturing type and average of seed yield for five years was 926 seeds. In addition, ‘Wonkyo20038ho’ inbred line is suitable for salad in that it possessed few trichome and narrow elliptic head shape.
        106.
        2017.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현대의학의 발달과 사회경제적 수준의 향상으로 암 환자의 생존율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암은 장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만성 질환의 하나 로서 입원과 퇴원의 반복과 오랜 기간의 치료는 암 환자들은 심리적으로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신, 2014). 특히 암 환자들은 희망 보다는 죽게 될 것이라는 불안과 우울 등의 기분이 복잡한 심리적 디스트레스에 노출되어 그들의 건강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 므로 심리적 안정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심리적 디스트레스는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에서 디스트레스라는 말로 그들의 정신적 고통을 정의 한다. 한편 원예치료가 암 환자들의 우울과 불안들을 감소 시켰다는 연구가 보고되고 있으며(김, 2008) 자연의 식물을 이용한 다양한 원예활동이 긍정적인 사고로 변화 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원예치료가 요양원 암 환자의 심리적 디스트레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 는지 알아보고자 수행 하였다. 본 연구의 대상자는 K도 C군에 위치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암 환자 15명을 대상으로 하였다. 원예치료 프로 그램은 2016년 12월7일부터 2월 8일까지 매주 수요일 주1희 60분 동안 총 10회를 실시하였으며 암 환자의 디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프로 그램으로 구성하였다. 본 연구의 측정도구는 심리적 디스트레스 척도로서 기분상태 측정은 McNair 등(2003)이 개발하여 Ueun 등이 한글 화한 K-POMS-B, 불안과 우울은 오세만 등(1999)이 개발한 척도를 사용 하였으며 결과 분석 데이터는 SPSS PC program(ver. 18.0)으로 비모수검정인 Wilcoxon signed rank test로 분석하였다. 그 결과 암 환자의 심리적 디스트레스에서 기분상태점수는 총 점수가 원예치료 실 시 전 50.30에서 원예치료 실시 후25.15점으로 25.15점 감소하여 통계적으로 매우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으며(p=.035) 이 점수는 점수가 낮 을수록 기분상태가 좋음을 의미한다. 하위영역으로 긴장(p=.005), 우울(p=.015), 분노(p=.026), 활기(p=.045), 피로(p=.003), 그리고 혼란 (p=.027)의 모든 영역에서도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를 보였다. 또한 암 환자의 불안점수의 변화는 원예치료 실시 전 11.65점에서 원예치 료 실시 후 7.38점으로 4.27점 감소하여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p=.038). 그리고 우울점수의 변화에서도 원예치료 실시 전 10.42점에서 원예치료 실시 후 6.35점으로 4.07점 감소하여 유의한 차이를 보였다(p=.021). 이러한 연구결과는 말기 암 환자를 위한 꽃 색 채조화를 적용하여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킨 결과(김, 2008)와 비슷한 맥락이며 요양병원에 입원한 암 환자에게 희망증진요법을 적용한 원 예치료의 효과(신, 2014)와 유사한 결과이다. 이상의 결과에서 원예치료는 신체적·심리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요양병원의 암 환자들의 디 스트레스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하고 전문적인 원예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장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요양병원 암 환자들에게 제공 한다면 긍정적인 사고로 전환되어 치료 기간이 단축 될 것으로 사료 된다.
        107.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13년의 동경협정, 1922년의 요코하마협정, 1929년의 태평양문제연구 회를 관통하는 YMCA의 첨예한 관심사는 문화적 자치의 공간이었다. 이는 외교적 협력을 통해 획득한 한국YMCA의 고유한 권리로,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의 한국에 문화적 독립에 상응하는 권리를, 외교권이 박탈당한 한국에 국제교류의 통로를 제공하였다.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체 결한 동경협정은 한국 YMCA가 보유한 문화민족주의 실현의 자치권을 일 본YMCA의 체제에 예편시켜, 기관명칭, 의사집행부, 법규제정에 이르기까 지 일본 YMCA에게 동반적 통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1922년 체결한 요 코하마협정은 동경협정조문의 실행에 제동을 걸고, 기관명칭, 건물소유권, 의사집행부구성, 선교사 관할영역에 이르기까지 한국 YMCA의 독자적 자 치권을 천명하고, 구체적으로 반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한일YMCA의 쌍방협약은 3년 후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일본, 필리핀, 하와이로 구성된 태평양문제연구회에 1925년부터 1929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본과 구별된 독자적 국제교류를 가능하도록 수문을 개방했다. 1925년 태평양문제연구회라는 국제기관의 발족단계에서부터 시작된 한국의 참여는 한국문화를 말살시키는 일본정책을 보고를 가능하게 하였고 해외전문가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 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나 1920년 파리강화회의에서 기회조차 두 절된 식민지 한국의 상황 및 한국인의 입장은 1925년 제 1회 태평양문제연 구회에서 평화적으로 진술되었고 1차 세계대전 후 평등과 상생이 지배하 는 국제적 신질서를 모색하는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이해를 증진하는데 기 여했다. 즉 한국YMCA는 단순히 민족주의의 보루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주의의 이상을 구현할 자치의 공간을 제공하였 다. 한국 YMCA의 민족주의는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투쟁을 통해서라기 보 다 장기적이고 은밀한 외교적 방식을 사용하였고 국제주의에 입각한 협력 을 통해 획득한 자치공간 안에서 발현되었다. 국제기구라는 장막 안에 숨 겨진 민족적 이상을 실현할 장이요 민족 지도자를 양육할 백년지대계를 이 행할 장이었다. 이러한 YMCA의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정신을 꿰뚫고 있는 중심인물 은 윤치호로서 그의 YMCA 훈련은 한국YMCA역사의 오류로 알려진 최초 의 YMCA가담자 여병헌에 선행한다. 윤치호는 여병헌이 런던으로 가는 1896년, 한국에 YMCA가 도입된 1903년 이전, 미국의 반더빌트 대학, 에 모리 대학, 학생자원운동의 학생 YMCA대표로 활동했고, 전국신학교 선교 연맹 및 조지아주 YMCA컨벤션에서 YMCA 지도자 훈련을 몸에 익혔던 YMCA인이었다. 윤치호는 뉴욕 본부가 지원한 한국인 최초의 YMCA간사 였고, 모트 등 해외 YMCA 간사의 한국인 자문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수 십 년 동안 YMCA 이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봉쇄 및 이권 착취의 최대걸림돌은 국제관계를 유지한 YMCA의 제압이었다. 따 라서 일제는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가 대구 구치소에 투옥된 기간, 이상재, 남궁억, 신흥우, 아비슨 및 언더우드의 참석과 존 모트의 진행가운데 동경 협정을 체결하여 자치권을 보유한 한국 YMCA에 일본의 감독권을 침투시켰다. 여기에 애국자로 묘사된 한국YMCA 인사들이 한국 YMCA를 일제 에 복속시키는 협정에 서명한 것이다. 그러나 1922년 YMCA의 요코하마 협정에서는 윤치호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한국 YMCA의 자치권을 탈취 하였고, 이로 인해 1925년 YMCA 중심의 태평양문제연구회의 활동이 가 능했으며, 1929년 일제가 태평양문제 연구회에 한국인 참여금지법안을 제 정하고자 상정할 때 한국태평양연구회 회장인 윤치호가 전면에서 한국인 참여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변호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국면은 일반적으 로 애국자의 표상으로 구축된 인물의 해석이나, 윤치호는 삼일운동 이후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친일로 기울었고 대동아이론에 기초하여 서구를 배 척하고 친일에 전향했다는 양극단적 해석의 실증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역사자료의 실증적 검토는 윤치호가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경도된 사실을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에 복잡하게 얽힌 억압의 현실이 친일파 내지 애국자라는 양극단적 해석의 틀에 개인생애 전반과 집단 전체를 삽입 하여 유형화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그러기에는 선택의 폭이 다양하고 유동적이었음을 시사한다.
        108.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Kimchi cabbage (known as Chinese cabbage) is one of the major vegetable in Korea. An inbred line ‘Wonkyo20042ho’, was developed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Horticultural & Herbal Science, RDA in South Korea. The first cross carried out using ‘Norang gwandong’ which had been introduced to Korea in 2007. During segrerating generations, bud pollination carried out using selected plants to fix genetic materials. ‘Wonkyo20042ho’ inbred line was finally selected by breeders from commercial companies at the field exhibition at 2011. The horticultural traits of ‘Wonkyo20042ho’ inbred line were as follows; half-open head, yellow inner leaf colour, and dark green outer leaf colour. The average head weight was 1899.2g, head width and height were 17.5cm and 27.9cm, respectively. Numbers of outer and internal leaves were 14.3 and 66.5, respectively. Harvest maturity was mid-late maturing type and average of seed yield for three years was 723 seeds. In addition, ‘Wonkyo20042ho’ inbred line showed resistance to clubroot disease (race 4 single spore isolation) and possessed thin leaves and small sized head.
        109.
        2015.07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Orchardgrass (Dactylis glomerata L.) is a Gramineae perennial grass species and commonly used as a forage crop and developed to be used for pasture. In Korea, in order to improve high persistence and forage quality, through selection of various superior parental varieties for breeding and synthesis of them with new lines, there are ongoing worldwide studies aiming to enhance the quality and environmental adaptability of Orchardgrass. Between 2010 and 2014, a Orchardgrass variety named Onnuri 2ho was developed by the Grassland & Forages Division, National Institute of Animal Science,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RDA), Republic of Korea. For the production of synthetic seeds for Onnuri 2ho 4 superior clones, Dg7506, Dg9508, Edg215 and Edg218 were selected and polycrossed. Between 2010 and 2011, the agronomic growth characteristics and forage production capability of the seeds were studied at Cheonan, and between 2012 and 2014, regional trials were conducted in Cheonan, Hoengseong, Jinju, and in Jeju. The main growth characteristic of Onnuri 2ho is a tetraploid variety, a medium-late maturity variety, the heading stage of which is around May 17, which is four days later than that of Amba. This study tested the regional adaptability of Orchardgrass in Cheonan, Hoengseong, Jeju, and in Jinju. The average dry matter yield of Onnuri 2ho in the four regions was 15,814 kg/ha, which is greater than that of Amba by 34%. These differences show that Onnuri 2ho is more resistant to environmental stresses than Amba and that this growth characteristic directly led to dry matter yield. Thus, Onnuri 2ho is a suitable variety for the establishment of grasslands as it has enhanced disease resistance and persistence, compared to Amba. The forage quality of Onnuri 2ho was similar to that of Amba in crude protein (11.5%), total digestible nutrients (59.2%), neutral detergent fiber (62.7%), and acid detergent fiber (37.6%), whereas the forage quality of Ongreen was higher than that of Amba in (71.0%). The new variety was selected and named Onnuri 2ho from Composite 34 by the RDA in November 2014, and the application for the protection of the new variety by the Korea Seed and Variety Service is currently pending. In this study, a new variety of Orchardgrass with excellent environmental adaptability was developed, in order to contribute to the vitalization of the Korean grassland industry.
        110.
        2015.07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order to improve high persistence and forage quality, through selection of various superior parental varieties for breeding and synthesis of them with new lines, there are ongoing worldwide studies aiming to enhance the quality of tall fescue through a traditional breeding method by selection and hybridization. A new tall fescue variety (Festuca arundinacea Schreb.), named Greenmaster3ho, was developed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Animal Science,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in Korea from 2010 to 2014. For synthetic seed production of this new variety, five superior clones, 09XFa02, 09XFa03, 09XFa11, 09XFa13, and 09XFa14 were selected and polycrossed. The agronomic growth characteristics and forage production capability of the seeds were studied at Cheonan from 2010, and regional trials were conducted in Cheonan, Hoengseong, Jeju, and Jinju from 2012 to 2014. Greenmaster3ho showed enhanced disease resistance, persistence, and regrowth ability as compared to Fawn. The dry matter yield of Greenmaster 2 was 29% higher (15,119 kg/ha) than that of Fawn. However, the nutritive value of both varieties was similar. This study developed a new tall fescue variety with excellent environmental adaptability, aiming to make a contribution to the vitalization of the Korean grassland industry.
        111.
        2015.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현재 세계적으로 지난 133년간(1880~2012년)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된 이상기후로 평균기온은 약 0.85℃ 상승하였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강우강도, 강우량이 증가하고 있다(한국환경공단, 2013). 이러한 기후변화는 수문 현상에 많은 영향을 미쳐 물 순환 과정의 정확한 파악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물 공급을 위한 수자원 계획 수립에 불확실성을 증대시키고 있어 기후변화를 고려한 물관리가 필요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장기유출 SLURP 모형을 이용하여 RCP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천유역의 수문 변화를 분석하고, 물 수지 분석을 통한 미래의 물 수급의 변동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대상유역인 금호강유역의 30년(1983~2012)간의 기상자료(강수량, 일조시간, 상대습도, 평균기온, 평균풍속)와 지형자료(DEM, 토지피복도)를 이용하여 미래의 유출변동성을 산정하였다. 또한 유출량 자료를 바탕으로 RCP시나리오에 따른 계절별 유출 변동성을 분석하고, 미래의 유출량 자료를 바탕으로 물 수지 분석을 통해 금호강 유역의 이수변동성을 확인하였다. 본 논문의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모든 이해관계자와 정책결정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문변동특성을 활용하여 향후 수자원계획수립과 유출변동 특성에 따른 적응대안을 고려할 수 있는 종합적인 수자원계획 및 평가에 기초자료로써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12.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중모1009호’는 국립식량과학원 영덕출장소에서 1999년 하계에 밥맛이 뛰어나면서 재배 안정성이 높은 벼 품종을 육성할 목적으로 흰잎마름병에 강한 ‘익산443호’를 모본으로 줄무늬잎마름병에 강하고 내도복성인 ‘밀양165호’를 부본으로 인공교배를 실시하여, 2000년 하계에 57개체의 F1 식물체를 양성하고 YR21324의 교배번호를 부여하였다. 2001년 하계포장에 전개한 F2 집단 중 18개체를 선발하여 2002년 하계에 F3세대 18계통을 육성하고, 이후 F4, F5세대를 계통육종법으로 전개하여 고품질이면서 현미외관특성이 우수하고 병해 및 안정적인 재해에 저항성을 나타내는 계통을 선발하여 2006년 생산력검정예비시험, 2007년 생산력검정본시험을 실시한 후 완전미율이 높고 외관이 우수하면서 재배 안정성이 높은 YR22207-5-3-1-3을 선발하여 ‘영덕48호’로 명명하였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간 지역적응시험을 실시한 결과 중생종이면서 쌀 품위가 좋고 밥맛이 양호하며 내도복과 내병성에 양호한 것으로 평가되어 2009년 12월 농작물 직무육성 신품종 선정위원회에서 국가품종목록으로 등재 할 것을 결정하고 ‘중모1009호’로 명명하여 적응지역인 동해안 냉조풍지 및 남부중산간지에 보급하게 되었다. ‘중모1009호’의 출수기는 보통기 재배에서 평균 8월 13일로 ‘화성벼’와 같은 중생종 품종이다. ‘중모1009호’는 직립 초형이고 탈립은 잘되지 않고 이삭추출은 양호하고 까락이 거의 없다. ‘중모1009호’의 수당립수는 ‘화성벼’보다 약간 많은 편이고 현미천립중 22.0 g으로 ‘화성벼’와 비슷하다. ‘중모1009호’의 도정특성 및 외관특성은 ‘화성벼’와 비슷하고 완전미율은 96.4%로 ‘화성벼’보다 높으며, 밥맛은 ‘화성벼’와 ‘추청벼’보다 우수하다. ‘중모1009호’의 불시출수와 수발아가 안되는 편이고, 위조현상에 강하고 성숙기 엽노화가 느린 편이며 내냉성은 ‘화성벼’ 수준이다. ‘중모1009호’의 잎도열병 밭못자리 검정 결과 중도저항성을 보였고 도열병 내구저항성은 ‘화성벼’보다 매우 강하였고, 줄무늬잎마름병과 흰잎마름병(K1, K2, K3)에는 강하나 오갈병 및 검은줄오갈병에 약하고 벼멸구 등 충해에는 감수성이다. ‘중모1009호’의 수량성은 2007년부터 2009년 까지 3년간 실시한 지역적응시험 보통기 보비재배 9개소에서 5.47 MT/ha로 ‘화성벼’ 대비 2% 감수되었으며, 이모작재배에서는 4.31 MT/ha ‘남평벼’ 대비 14% 감수되었고, 만식재배에서는 4.63 MT/ha로 ‘남평벼’ 대비 10% 감수되었다. ‘중모1009호’의 적응지역은 동해안 냉조풍지 및 남부중산간지이다.
        113.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봄내엽1호’ 들깨 품종은 강원대학교 농장에서 2006년에서 2008년에 걸쳐 파종과 계통선발을 통해 육성하였다. 품종의 특성검정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들깨의 적정 재배조건 아래서 3회에 걸쳐 조사하였다. ‘봄내엽1호’ 들깨 품종은 대조 품종보다 경장이 크고, 화방군수와 화방군당삭수가 많으며 잎색은 대조품종에 비해 진한 녹색을 띤다. 정유 성분 분석결과 ‘봄내엽1호’ 들깨잎의 주요성분으로는 Perilla ketone, Beta-caryophyl
        114.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Hinsicht auf die patristische Auslegungen über die vierte Brotbitte im Herrengebet(Mt. 6.11; Lk. 11.3) wurden uns zwei unterschiedliche Auslegungsrichtungen, nömlich spiritualisch und materialisch, überliefert. Unter “dem äglichen Brot(o ∈`π ι o α` p)” verstehen nicht nur Tertullianus, sondern auch Origenes als Christus, der “das vom Himmel herabkommende wahre Brot”(Jo. 6.32) oder “das Brot des Lebens”(Jo. 6.35) ist. In der Forderung Jesu, dass wir sein Reich und seine Gerechtigkeit beten sollen(Mt. 6.33), findet Tertullianus den Grund seiner exegetischen Richtung. Origenes, der darüber etymologisch am tiefsten erörtert, haben auch seinerseits mindestens zwei Gründe: erstens, Jesus erfordert uns, etwas Himmliches und Grösseres zu beten(Proöm. peri euches); zweitens, er leitet “∈`π ι o(täglich)” etymologisch von “∈πι την ouσιαν” aus, indem er “ouσια” als “notwendig” vesteht. Also "ό έπιουσιος 'άρτος” ist für ihn “das mit Wesen verbundene Brot”. Die biblich und etymologisch grundlegende Interpretation von Origenes wurde auf die “spiritual-erbauliche” Auslegungstendenz der folgenden Generationen ausgeübt. Im Gegenteil davon sehen darin Gregorios von Nyssa und Johannes Chrysostomos einfach materiales, reales Brot, weil Menschen, natürlich nicht Engel, unter Hunger leiden können und darum etwas zum Essen jeden Tag brauchen müssen. Aber dies Brot ist uns nicht preislos gegeben, sondern man soll es erwerben, insbesondere für Gregorios, als Lohn der fleissigen Arbeit(Gen. 3.19). Uns gibt es also der himmliche Vater, das daher das gerechtige Brot ist. Die Bedeutung der Gregorios’ Exegese ist schliesslich folgenschwer, besonders für das Thema “Reictum und Armut”. Die Unterschiedlichkeit beider Positionen könnten aus der zeitlichen Situations-veränderung zwischen dem 3. und 4. Jahundert, oder aus sozial-wirtlschaflich unterschiedlichem Hintergrund in Nordafrika und Asia Minor, oder aus der individuell theologischen Richtungen.
        115.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勿川 金鎭祜는 寒洲 李震相으로부터 性理說을 전수받았지만 性齋 許傳의 문 하에서 먼저 수학하였고 학맥의 계보 상으로도 한주보다 오히려 성재 쪽의 近 畿學派에 더 가깝다. 물천은 한주의 제자인 俛宇 郭鍾錫과의 논변을 통하여 한주 성리설의 핵심인 七情理發說을 수용한다. 그러나 여전히 分開看에 의해 理發 · 氣發을 분명히 구 별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주의 학설을 대체로 수용하면서 한주의 竪看 · 橫 看 · 倒看 三看과 順推 · 逆推 二推라는 용어만은 끝내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물 천이 한주의 대표적인 학설인 心卽理說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竪看 대신 퇴 계 이후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져 온 渾淪看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性齋로부터 이 어받은 近畿學派의 학맥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주는 主理의 필요성을 극히 강조했으나 물천을 주리를 주장하는 것을 꺼 렸고 주리라는 명목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각자의 학문성향 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며, 또한 학문적 노선에서 寒洲學派와 상반된 주장이다. 물천이 성리설에서 시종 后山 許愈 · 俛宇 郭鍾錫 등 한주의 제자들과 다른 견 해를 보이는인 것은 성리설을 뒷받침하는 논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후산이 한주의 삼간에 의거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물천은 기존 영남학파의 혼 륜간과 분개간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서로 매우 흡사한 데도 서로의 견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116.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에서 학문활동을 하였던 물천 김진호 (1845-1908)의 문학사상을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아직 이런 주제로 그에 대한 논문이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우선 문학사상사의 흐름위에서 그가 어 떠한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1.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도학파였는가. 그는 문학에서 덕성과 의리를 중시하고 실천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도 학파들의 주장에서 시를 짓는 작자들이 선험적인 도리를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 에 머무르고 있는데, 비하여 그는 인간마다 가지고 있는 ‘良知’를 강조하였다. 그는 단순히 전통적 이념을 계승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2. 모방을 거부한 현실주의자였는가. 그는 대가의 학자들이 의고적 입장에서 唐詩를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당시의 형식적인 운율을 모방하는 것으로 현실의 의미를 담지 못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시를 칭찬하면서 ‘그대의 시는 세상에 드 문 옛음율’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그가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과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3. 古文으로 어떻게 현실을 담을 것인가. 그는 전통적인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문학은 형식적 논리보다는 실천적 행위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보 편적 진실을 가지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 이 바로 고문이라고 생각하였다. 4. 언어를 실천하면 살 수 있는가. 그는 자기만의 깨달음을 실천해야하고, 언어와 행동은 일치해야한다고 생각 하였다.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주인공 으로 하는 글을 많이 남기고 있다. 언어는 행동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언어관, 문학관은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양면성을 지니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문을 고집하면서 과거회고적일 수도 없고, 그렇 다고 현실적인 처지만을 강조하는 반의고적 주장을 할 수도 없는 모순된 시대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문학적 입장은 그가 일본 등 외국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시대 말기에 살았다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다.
        117.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勿川 金鎭祜(1845-1908)선생은 寒洲 李震相(1818-1886)을 통해 退溪 理學 의 정통을 이으면서 性齋 許傳(1797-1886)을 통해 星湖에서 비롯한 近畿南人 의 학맥을 잇고, 고장의 선현인 南冥선생을 사숙하여 스스로의 학문세계를 성 립시킨 학자요, 勿川書堂과 麗澤堂 등에서 講學으로 다수의 올바른 제자를 길 러낸 큰 스승이었다. 晩醒 朴致馥을 통해서는 문학 방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재야에 은거했던 山林處士였다. 물천은 전문적인 문사로서 시인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가 남긴 문집의 시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勿川의 시는 生活漢詩로 규정할 수 있을 듯 하다. 즉 학 자와 교육자로서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同門의 선후배 학자들과 弟子, 鄕 中人士, 姻婭戚黨과의 교유에 한시를 적극 활용하였다. 많은 양의 次(和)韻詩와 輓詩를 창작한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또 생활 주변에서 시의 소재를 찾아 작시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심회를 시 속에 녹이기도 하였다. 이 두 범주의 시 를 통해 자신의 수양과 학문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각별하다. 민족이 위 기에 처한 상황에서 물천도 그러한 시대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憫時 憂國의 시편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 은 아니었으므로 뚜렷한 현실주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 다. 마지막으로 비록 물천이 남명의 학통을 이은 것은 아니지만 동향의 선배로 서 남명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바 몇 편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남명을 百世師로 숭앙한 것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118.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지하다시피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은 그의 사후 문인들에 의해 계 승 ․ 발전되어 來庵 鄭仁弘(1536-1623)과 寒岡 鄭逑(1543-1620) 등의 문인 집단에 의해 크게 현창됨으로써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 내암의 敗退와 더불어 급격한 침체를 맞이하다가 1728년의 戊申事態 이후 존립 자체 가 거의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 正祖가 南冥에 대한 賜祭文을 친히 지어서 내려준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부 경남 지역에 서서히 학문 이 흥기하여 중엽 이후에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미 退溪學派 化 또는 畿湖學派化한 상황에서의 興隆이었던 것이다. 勿川 金鎭祜 또한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물천은 학 문적 사승관계에 의해 주로 퇴계학파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자신이 처한 지리적 배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남명학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물천의 남 명학파로서의 면모를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드러난 남명 정신을 숭앙하는 태도이다. 秋霜烈日 같은 粹然한 정신 경계와, 直內方外를 내용으로 하는 敬義之學을 남 명 학문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이를 후학들이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準的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이 廉頑立懦의 효과가 있다고 하여 남명을 ‘百 世師’로 인식하였다. 둘째, 남명의 구체적 저술에 대한 물천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한 자료 는 흔하지 않다. 신명사도에 대한 한두 가지 견해만 보일 뿐이고, 이 또한 남명 의 학문을 자기화한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셋째, 󰡔남명집󰡕 ․ 󰡔학기󰡕 ․ 󰡔연보󰡕 등의 중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 면서, 기회가 되기만 하면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尊衛라는 이름 으로 남명의 진면목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반대하였다. 이들의 중간 을 주관하던 復菴 曺垣淳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자신의 견해를 주었으나, 물천 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일이 완성되지 않은 채 복암이 별세하였고 그 얼마 뒤에 물천 자신도 별세하였다. 요컨대 물천은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살았던 인물로, 조 선 말기 이후 일제 강점 시기를 살았던 서부 경남 지역의 학자들에게 퇴계학과 함께 남명학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 던 인물이라 이를 수 있다.
        119.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金鎭祜는 경상도 단성의 商山金氏 가문에서 1845년에 태어나 1908년까지 활동한 학자였다. 단성의 상산김씨는 조선 중기에 이미 ‘八文章家’가 배출되어 영남의 名家로 알려졌다. 19세기 중반에 상산김씨 문중 書齋인 仁智齋는 김씨 문중의 家學의 산실이자 강우학계의 학술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김진호는 인지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교육환경에서 자 랐다. 김진호는 17세부터 박치복의 문하에서 詩文을 배웠고, 이어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익혔다. 우선 그는 스승 박치복이 운영하던 百鍊齋에서 70여명의 강우 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 뒤 그는 麗澤堂을 지어 박치복과 함께 講學활동 을 하였고, 박치복이 작고한 이후에는 그가 이택당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그는 허전의 문하에서 禮學을 배웠는데 禮를 해석함에 있어 人情의 측면 보다는 義理의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19세기에 강우학계의 학자들은 조선이 처한 위기를 理學을 새롭게 해석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 김진호는 理氣說에 있어 스승 이진상의 학설을 계승하여 七情도 理가 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진호는 明德을 心으로 이해하 여 명덕은 理이지 氣를 겸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김진호의 다 양한 주장은 19세기 당시 조선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禮學이나 理學을 義理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120.
        2002.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t is said to be that most part of Seo-in(西人) scholars (e.g. Song, Si-yeol(宋時烈) and his pupils) regarded Neo-Confucianism(朱子學) as the absolute one, and only admitted it for their orthodoxy. In contrast, however, there was a bunch of scholars who tried to accept Neo-Confucianism critically participating in Seo-in party such as Jo, ik(趙翼), Choi, Yu-hae(崔有海), Choi, Yu-Ji In terms of this viewpoint, I focused on the fact that Gan-ho(艮湖) Choi, Yu-Ji(崔攸之) had revised the book of "Dae-hak-jang-gu"(『大學章句』), and studied his revised contents and its significance to this paper. Gan-ho's revision on " Dae-hak-jang-gu" proofread by Chu-tzu(朱熹:1130-1200) are summarized as follows; (1) Gan-ho regarded next two chapters of 'mul-yu-bon-mal(物有本末)……' and 'gi-bon-ran-yi-mi-chi-ja(基本亂而末治者)……' included in the major text(經) as the explanation of 'Gyeok-mul(格物)', so remade it into the 4th chapter of the minor text(傳) combining with the chapter of 'Cheong-song(聽訟章)' (2) Gan-ho regarded next two chapters of 'ji-ji-yi-hy-yu-jeong(知止而后有定)……' included in the major text and 'gi-bon-ran-yi-mi-chi-ja(基本亂而末治者)……' included in the 5th chapter of the minor text as the explanation of 'Chi-ji(致知)', so remade it into the 5th chapter of the minor text combining the two chapters. The significance of revision on the book of "Dae-hak-jang-gu" by Gan-ho can be valued as follows; (1) Several Seo-in scholars had succeeded progressively traditional scholarship without falling in the trap of adhesion under highly 'Neo-Confucianism dominated circumstance'. (2) Gan-ho had revised some part of "Dae-hak-jang-gu" with his trailblazing viewpoint based on the peculiar studying method mentioned above. (3) Gan-ho had succeeded and developed the former theories digestion well enough advocated by Dong, Goi(董槐) and Gueon, Geun(權近) (4) The separation of the two chapter of 'Gyeok-mul' and 'Chi-ji' from Chu-tzu's "Dae-hak-jang-gu" by Gan-go is outstanding opinion never found on former theories. In interpretation history of "Dae-hak", therefore, it must be valued to quite a new theory that no one had ever mentioned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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